쇠말뚝

 

1. 개요
2. 상세
3. 오해와 진실
3.1. 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
3.2. 왜 그런 설이 나왔는가?
3.3.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풍수 개념이 존재했는가?
3.4.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어야 할 만큼 일제는 한민족을 경계했는가?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정기를 끊고자 쇠말뚝을 산간벽지 이곳 저곳에 꽂아뒀다는 도시전설.

2. 상세


아래 문단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사실무근인 이야기다.''' 한때 백두산에도 일본이 쇠말뚝을 박아놨다는 사진이 나와 큰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음으로 나타났다. 요즘에 와서는 뜸해진 것 같지만 이거 찾아내서 죄다 뽑아내자는 민족정기선양위원회이니 하는 조직들이 아직까지 활동한다.
한반도 쇠말뚝설은 이른바 일본 육군 장군 야마시타 전설에서 시작되었다. 즉 일본 패망 후 전범재판에서 일본 육군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영어 통역관이 신세우 라는 한국인이었는데, 야마시타가 조선에서 근무할 당시 조선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 수백 개를 박았다는 비밀을 형 집행 직전 신세우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1] 그러나 여러 언론에서 당시 재판기록과 문서들을 조사해본 결과 한국인 통역관은 없었고[2] 쇠말뚝 어쩌고 하는 얘기도 전범재판 과정 내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출처 1(월간 말 지 2006월 1월호) 출처 2(조선일보) 출처 3(데일리굿뉴스)

1995년 2월에 김영삼 문민정부 시기 내무부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쇠말뚝 뽑기를 국가정책으로 실시하여 118개를 뽑아낸 바 있다. 정부가 근거없는 낭설을 믿고 실제 정책으로 추진한 역사에 남을 삽질.
[image]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심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은 철심이다!'고 하는 판. 나이든 세대 중에는 아직도 이 도시전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image]
국내에서 유일한 풍수지리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해당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링크
요약하면 풍수지리적으로는 쇠말뚝이 박힌 위치가 대한민국 기가 뭉친 혈처가 아닌 엉뚱한 바위이므로,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용된 삼각점일 확률이 높고 이를 보고 분개한 농민들에 의해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 한다'고 구전되었을 수 있다는 소견을 밝혔다.

3. 오해와 진실



3.1. 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


당연히도 조선총독부 혹은 조선주둔 일본육군이 조선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은 일이 없으니 그러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국가 단위에서 어떠한 일을 추진하였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기록은 남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가 한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쇠말뚝을 어느 지역에 몇 개를 박겠다는 기본계획, 풍수지리에 따라 지역을 선정한 기록, 풍수지리에 자문을 한 사람들의 명단, 쇠말뚝 제조에 들어간 비용의 지출 기록, 쇠말뚝을 박은 사람들의 동원기록과 급여 지급기록 같은 것들이 당연히 남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역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총독부의 거의 모든 행정기록은 놀라울 만큼 상세하게 남아있고 지금도 한국의 연구자들이 그 기록을 활용하여 연구한다. 조선총독부 기록물 개요(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관리) 하다못해 일제시대 징용이나 위안부 동원 같은 일제의 악행들을 오늘날 일부나마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가 남긴 기록에 의한 것이다.
또한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의 풍수지리 전설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라는 개념이 한국나 중국에 비해 매우 약한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없다. 오히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취급하고, 이런 미신이나 믿는 조선인은 미개하다며 일본이 이들을 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써먹었다. 사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있던 서양 선교사 등도 공통적으로 한국의 풍수지리 관념을 매우 미개한 것으로 비판하였다. #
일본은 풍수에 관심이 없었고 측량과정이었을 뿐이라는 내용은 이이화[3]가 역사풍속기행에 쓴 것으로, 각 언론보도로 내용이 알려지자 적잖은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이화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 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 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4] 라고 반박했다.

3.2. 왜 그런 설이 나왔는가?


풍수지리 사상을 기반으로 한 한국의 전통 신앙을 못마땅한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 차원에서 마을 사람들의 민속 신앙을 방해한 것이 일제가 풍수지리를 믿고 풍수 침략을 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을 수는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전암면 안치마을에 얽힌 사연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링크

안치마을 이장 김판태(76) 씨는 "마을에서는 산의 가장 낮은 지점을, 설화처럼 뱀이 바위에 끼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부근을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있어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으로 여겼다"고 했다. 현재의 안치마을 앞 도로는 과거 바다를 간척해 국도 15호선이 깔려 있다.

김 이장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은 뱀이 끼어있던 그 장소를 묏자리로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김 이장은 "뱀이 바위에 끼어있는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라 특이하게 여겼다고 하더라"며 "뱀이 이렇게 낀 데는 이 산에 특별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해 꺼려하는 동물인데도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날짜를 특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어서 주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이 모습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김 이장은 "당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불분명한 장소를 마음속으로만 신성시 여기는 것뿐이었다"며 "하지만 일본인들은 마을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쇠말뚝 박고 잘라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만 위의 증언도 기록에는 없는 일이며 마을 주민들의 주관적 경험에 따른 진술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전통 신앙을 멸시했다. 조선 민중들이 행하는 '비문명적인 민간신앙'을 직접 훼방 놓으려던 이들도 있었고, 일부에서는 순사 등 공권력이 직접 그러기도 했다. 이런 태도가 적대감을 불러 '쇠말뚝 전설'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여러 언론의 추적에 의하면, 쇠말뚝설은 해당 지역 주민들이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방송국에서 취재를 하면서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고 들었다."라고 말한 정황도 포착된다. 일종의 집단적 기억조작 + 언론사의 황색 저널리즘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기자는 KBS 아침뉴스에 출연해 일제의 소행임을 증언했던 그 유일한(?) 증언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남한산성 북문 인근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병갑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제 나이가 쉰 한 살인데, 30년도 훨씬 더된 이야기에요.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일제시대에 맥을 끊기 위해 일본사람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단지 그렇게 들은 내용을 (KBS 측에서) 말해 달라고 해서 이야기해줬을 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분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동네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얼핏 들었다”고 밝힌 김씨의 증언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또한 소윤하 회장에게 “쇠말뚝을 뽑을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을 지원했다”고 밝힌 하남시청 관계자는 “고리 모양의 쇠말뚝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의 소행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중론”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공영방송의 뉴스 진행자가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남한산성에 심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들고 나온 쇠말뚝의 실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월간 말 지 2006년 1월호에서 발췌)

근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기조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민족적 패배감을 안겨준 것은 기존에는 오랑캐 혹은 한수 아래로 여겼던 일본이 소중화인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일본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독립하는 대신-물론 독립운동가의 공이 없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그 열패감을 씻어내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조선이 일본에게 병합당한 원인과 민족적 자신감을 되살릴 수 있는, 이를테면 '조선 민족은 우월한 민족인데 일본은 비열한 방법으로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해쳤다.' 따위 이야기가 쉽게 퍼져나갈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국가 통제의 입장에서도 외부의 적을 통해 민족적 동일감을 형성하는 것이 정치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므로, 권위주의 정부였던 60년대의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이고 그 후의 정부나 기득권층 역시도 이러한 낭설을 반기고 확산시켰을 개연성이 크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점차 옅어지는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쇠말뚝 설이 낭설에 불과함이, 특히 인터넷과 인터넷에 접근하기 가장 쉽고 동시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장 적은 20대 청년층 사이에서 쉽게 퍼지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3.3.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풍수 개념이 존재했는가?


일본의 수도 도쿄와 일왕이 거주하는 황거의 입지만 봐도 이들은 풍수지리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배산임수로 대표되는 명당자리와는 아주 동떨어진, 산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야가 이어지고 형편없는 작은 물줄기나 저 멀리 지나가는 이런 동네에 수도를 세우고 군주의 궁궐을 지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풍수지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5]
'미개한 조선을 문명화하는 선진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이 왜 조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쇠말뚝을 박겠느냐는 반론에 맞서, 어떤 사람은 '미신을 역으로 이용하여 조선 민중에게 정신적 공격을 하려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신을 역으로 이용하려 했다면[6][7] 오히려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박았어야 한다. 비밀리에 박는다면 무슨 정신적 공격이 되겠는가? 비밀리에 박는다는 것은 일본이 실제로 풍수지리를 진지하게 믿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일본에선 오히려 미신으로 취급했으므로 비밀리에 박을 리가 없다.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는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풍수사들'이라는 저서(1994년)까지 낼 정도로 한국통인 그는 쇠말뚝에 대해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았다. 노자키 교수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연구가 중단된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당연하다. 일본인이 박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미개하게 미신 믿으며 북치고 장구치고 했다는 진실을 말해버리면 한국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간혹 일본의 만화를 예로 들면서 일본에서도 풍수가 친근하고 익숙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에서 1990년대 중반에 풍수 붐이 일어나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물론 현대 이전에 일본에 아예 풍수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 풍수지리서 지상가상대전(地相家相大全)이 1940년에 출판되기도 했다.
[image]
[image]
저자 코바야시 하쿠류시(小林白龍子)[8]
그러나 지상가상대전의 내용은 한국의 '풍수'와는 촛점이 다르다. 형국론에 따라 기가 모인 혈처를 찾아 무덤을 쓰거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집에서 북두칠성의 방위를 보고 우물이나 창고를 어디에 두며 신단을 어떻게 꾸밀지 설명하였다. 똑같이 '풍수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긴 해도, 물형[9]을 보고 기가 모인 혈처를 찾는 한국 풍수지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image]
한편 쇠말뚝 설의 근거로 1943년 일본 종교단체가 백두산 천지에 일본 개국신 제사를 지내면서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진이 자주 거론되는데 결론적으로 저건 쇠말뚝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주간조선이 보도하고 다른 언론이 인용하면서 당시 이슈가 되었다.
사진 자체를 분석하면 아래 부분에 무엇인가 괴어 놓은 듯해 보이는데다가 제관의 몸에 가려진 부분이 있고 상판이 지나치게 넓고 얇은 데다가 홈들이 길게 나 있어 쇠말뚝이라고 보기에는 여러 물리적 특성들이 부적당하다.
2004년 3월 8일 방영SBS 백만불 미스터리 40회에서 이 사건를 조사했었다.[10]
[image]
SBS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당시 제사를 지낸 일본 종교 단체를 취재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신토에서 사용하는 제례용 나무 탁자에 불과했다. 이런 탁자를 흔히 안(案)이라고 부르는데, 탁자 다리가 4개짜리, 8개짜리, 16개짜리 등이 있으나 8개짜리가 제일 흔하다. 그래서 다리가 8개인 안을 핫소쿠안(八足案, 8족안), 줄여서 핫소쿠(8족)라고 부르기도 한다.
[image]
다리가 8개인 핫소쿠안 (사진 출처: 위키페디아 공용)
사진을 핫소쿠안의 오른쪽 뒤에서 대각선으로 찍자, 우측 다리들이 하나로 모인 듯이 보여 말뚝으로 착각할 수 있는 착시를 일으켰다.
사진 속 사람들은 1921년에 창교된 신도텐코쿄(神道天行居)라는 종교단체 소속이다. 이들은 일본이 유대인들에게 영적으로 공격을 받는다고 믿고, 일본을 영적으로 방어하고자 신지(神璽)라는 물건을 땅에 묻거나 호수에 던지는 주술을 행하였다. 백두산에서도 신지를 천지 바닥에 가라앉혔다. 백두산에 말뚝을 박아 산을 쇠하게 하려고 하기는커녕, 백두산을 일본의 중요한 영적 거점으로 보고 주술로 백두산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페이지를 참조하면 좋다. 가장 확실한 반박으로 이 종교단체는 후지산을 비롯한 일본의 명산에서도 똑같은 의식을 거행했다(...)
이런 풍수 공격을 지금도 믿는 사람이 있어서, 유명한 위인이나 특정 조상의 묘에 쇠로 된 칼붙이를 집어넣어서 그 자손의 정기를 끊어 놓는 '''저주 계열의 주술'''로 사용되기도 한다. 1999년에 어떤 정신 나간 무당이순신 장군의 묘에 그런 짓을 한 적이 있어서 화제가 되었다.#
[image]
그리고 몇몇 쇠말뚝의 정체는 일제가 꽂은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측량용으로 꽂은 것'''과 '''과거 국군 임시 막사 설치시 꽂아 놓고 잊어 버린 것'''으로도 추측된다. 실제로 위 사진의 몇몇 쇠말뚝을 보면 위가 고리형으로 된 게 군인들이 임시 천막 설치할 때 쓰는 지주핀과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는 말뚝에 '''한국 정부 각인'''이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고. 측량용 말뚝이 아닌 경우에도, 결국 아무튼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박았을 뿐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풍수에서 지관마다 땅의 기가 모인 혈처라고 보는 위치가 다르다. 그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명당을 잘 잡는다는 소문이 난 지관의 몸값이 그만큼 높다. 지관을 불러 쇠말뚝이 나온 자리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다들 그 자리가 혈처라고 답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 자리가 혈처일까? 쇠말뚝이 나온 자리인 줄 모르고 봤을 때에도 과연 지관이 혈처라고 답했을까?
약간 다르지만 참고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살아생전에 지관들이 박정희 부모의 묘에 찾아올 때마다 만고에 다시 없을 명당자리라고들 했지만, 박정희 암살된 뒤에 찾아온 지관들은 그 전에는 언급도 안 되던 요소들을 지적하며 "이런 것 때문에 박정희가 횡액을 당했다." 운운하더란다. 먼저 결론을 내리고 근거를 찾는다는 뜻이다.
조선일보에서도 이 쇠말뚝 괴담에 대해 인터넷판 1면으로 괴담의 허상에 대해 분석한 기사를 보도하는 등 쇠말뚝 괴담에 대한 반성이 나왔다. 한국일보 보도에 비해서도 좀 더 단호하게 말뚝 괴담을 부인한 것이 포인트.#
월간조선 기자기도 했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이 미디어펜에 기고한 칼럼에는, 현장에서 일제의 쇠말뚝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기자들이 굳이 일제의 쇠말뚝이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한다거나, 일제 쇠말뚝이 아니라고 판명된 경우에도 쇠말뚝 뽑기 행사를 진행하려는 공무원들이 제발 일제의 쇠말뚝으로 해달라고 애원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
백두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진에 찍힌 신토텐코쿄를 일제시대 일본 정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면 참고가 된다. 신도텐코쿄는 매우 일본 우익적인 종교단체로, 신지를 일본과 대만, 조선 등에 묻고 물에 가라앉히는 의식을 함으로써 일본이 영적으로 굳건해지고 외부의 공격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일본 정부는 신도텐코쿄가 _무력전을 경시하는 유해한 사상을 퍼트린다는 이유로_ 경계하였다.
애초에 일본은 자국에서도 1940년대에 '''국가신토'''라는 것을 만들어서 신토의 종교적 측면을 없애버리고 오로지 통치도구, 즉,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을 정도인 나라였다.

3.4.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어야 할 만큼 일제는 한민족을 경계했는가?


쇠말뚝설이 만일 사실이라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은 당시의 조선민족의 잠재력, 능력 등을 매우 높게 봤고, 식민지배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야 없어도) 조선의 주술적 방법까지 동원해서라도 조선민족의 잠재적 능력을 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즉 일제가 당시의 조선 민족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대했는가는 일제 쇠말뚝설을 논할 때 중요한 정황증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쇠말뚝을 박아서라도 민족 정기를 차단해야 할 정도로 조선 민족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한 적이 전혀 없다. 위 문단에서도 설명되어 있지만 애당초 일제는 '민족정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가 쇠말뚝이라도 박아 민족정기를 없애려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좋게 말하면 민족주의적, 보다 적나라하게 지적하자면 국뽕적 마인드가 역으로 표출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1945년 독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대화 과정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역량은 정말로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우수함이 일제 쇠말뚝설 같은 허접한 도시전설로 강화될 필요는 전혀 없다.
만약 일제의 누군가가 비싼 돈 들여 쇠말뚝을, 그것도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 조선에 박는 계획을 누군가가 정말로 세우고 실행하려고 했다면, 그 윗선에서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반려했을 것이다. 대전 말기 일제는 마구잡이로 전선을 확대하는 바람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 특히 금속류의 부족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조선 곳곳에 있는 사찰의 범종이며 일반인들이 쓰는 놋쇠 그릇과 수저까지 온갖 금속류를 모조리 쓸어가던 상황이었다.일제의 금속류 공출(국사편찬위원회) 이런 상황에서 그 귀중한 금속류로 말뚝 따위나 만들고 있었겠는가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4. 여담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방방곡곡에 혈침을 박거나 맥을 끊었다는 비슷한 민간설화가 여러 곳에서 전해진다. [11] 그러나 전설이 전해지는 곳 중에서는 아예 이여송이 간 적이 없는 곳도 있어 역사적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 신기하게도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한 지역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을 대중적으로 믿는 조선 민중은 조선 땅에 들어온 외세를 풍수지리와 연결하여 이러한 음모론을 상상하기 십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명군들은 조선 백성을 매우 심하게 약탈했는데, 이에 대한 반감이 쇠말뚝 전설로 이어진 듯하다. 문제는 그게 환빠 같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약발이 먹히는 점이겠지만. 그런데 정작 이여송은 선조가 고려 출신 귀화인, 즉 한민족의 후손이다.(...)[12] 고전소설 임진록에도 이 설화를 반영해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는 장면이 묘사되며 이때 그짓을 한 이유가 김응서, 강홍립 등 조선 장수들의 용맹을 보고 경계해 조선에 다시는 영웅호걸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나오는데 정작 실제 역사에서는 김응서가 이여송이 경계할 만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강홍립은 아예 평양성 전투 당시에는 관직에 있지도 않았다.
일제와는 상관없지만 제주도에 전해지는 '고종달 설화'도 있다. 이 경우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고종달이란 승려가 제주도의 지기를 끊기 위해 제주도의 혈자리 여러 곳에 철심을 박았고 거기서 피가 흘러나와(!) 지금의 오름이나 삼성혈 같은 지형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제주에서는 큰 인물이 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각지에는 꼭 외세가 아니더라도 그 지방의 기를 풍수적으로 꺾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았다는 전설이 상당히 흔하다. 예를 들어 강원도 강릉에는 16세기 중종 때에 한급(韓汲)이란 사람이 강릉부사로 부임했는데, 지역 유림들에게 무시를 당하자, 또는 강릉 사람들의 기가 너무 드세서 꺾어버리고자 모산봉의 산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다고 한다. 이런 풍수적 조치 때문에 더 이상 강릉에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것. 전남 해남에도 김서구란 사람이 지역의 기를 꺾어버리고자 말뫼봉이라는 산의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전설이 전한다.
1995년 인화(仁和)출판사에서 만화가 강촌[13]이 <혈맥(血脈)>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전 3권. 내용은 임진왜란 때 한반도의 호랑이 지형에서 네 발목과 명치 부분에 일본인 장수들이 쇠말뚝을 박았는데, 한국인들이 이 말뚝을 뽑으려 하고 일본인들은 이를 막으려 한다는 전형적인 국뽕 소설. 2010년에 저자가 두레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원판이든 개정판이든 큰 인기는 끌지 못하고 절판되었다.
2010년 초에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쇠말뚝(이라기보다는 철침)이 다량 발견되었다. 보통 것과는 다르게 '''묘지'''에만 집중적으로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박혀 있었고, 무덤도 남자가 있는 집의 무덤만 골라서 박혀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 기사
그리고 북한 개성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日帝 쇠말뚝, 북한 명산에서도 대거 발견 북한에서는 이것를 일제가 풍수지리설에 기초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려고 악랄하게 책동한 것'이라고 선전하며 반일감정 고취용 소재로 써먹는다.
만화 풍장의 시대에도 쇠말뚝 이야기가 나온다. 들이 가슴을 쥐어뜯고 으아악. 그 외에도 몇몇 국내 학습만화에서 이 쇠말뚝설을 진실인 양 그려놓는 경우가 있다.
이두호의 만화 '덜거덕 덜거덕'에는 한 마을에서 천재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나왔는데, 이 예언을 들은 마을의 원님이 그 아이의 기를 끊으려고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는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구절을 말했는데, 쇠말뚝이 다 박히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가 보통 아기처럼 울었다. 부부는 이 아기에게 '장독대[14]'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이고이 길렀으며 독대는 자라면서 천재의 기질을 발휘해 중력이며 '단지 속에 파리가 날아다닐 때와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무게가 달라지는가' 등의 현대적인 과학 문제를 풀어낸다. 결말부에서는 한 사악한 도사가 독대를 찾아와 자신이 얻은 비급을 해독하라고 협박한다. 그 비급은 백짓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는데 독대는 그 책을 한 장 한 장 다 뜯어낸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도사가 독대를 죽이려는 순간 독대는 마지막 장을 들고 바로 이거라며 개천으로 가 종잇장을 물에 띄운다. 그러자 로 쓴 '마을 산줄기의 쇠말뚝을 뽑아라'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도사는 자신의 내공을 써서 쇠말뚝을 뽑았으나, 쇠말뚝을 뽑느라 기를 다 소진하고 그냥 힘없는 늙은이가 돼 버린다. 독대가 도사를 업고 자신이 모시겠다며 마을로 내려가는 것으로 만화는 끝이 났다. 결국 쇠말뚝이 억누른 독대의 능력은 묘사되지 않은 채로 완결.
쇠말뚝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비슷한 설을 반박한 다산 정약용의 글이 있다. 철로 만든 말을 보고 노인들이 '이건 왜인들이 정기를 누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자 이를 반박한 것. (다산 시문집 12권 중 '철마(鐵馬)에 대한 변증')[15] '''즉, 쇠말뚝설은 일제강점기에 떡하니 생긴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정약용처럼 사실에 기반하여 이성적으로 비판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5. 관련 문서




[1] 이 외에도 신세우가 변론을 잘 해준 덕분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형이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도 같이 있다. 그러나 야마시타 도모유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군인에게는 총살형이 오히려 명예로운 것이고 교수형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야마시타는 총살형을 애걸했지만 필리핀 학살의 총 책임자로서 전쟁범죄자라 하여 교수행이 집행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신세우라는 사람의 증언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2] 상식적으로 당시 분위기에서 일본 육군 대장의 변론을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에게 맡겼을까 생각해보도록 하자(...) 당시 통역과 변론은 연합군 측 인물들이 모두 담당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 중에도 영어 잘하는 사람은 넘쳤다. 미국계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대 미국 선전부대까지 운영했던 일본이 뭐가 아쉬워 조선인에게 통역을 맡기겠는가.[3] 이이화가 쇠말뚝설을 부정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혹시 이사람 친일적인 학자 아닌가 싶겠지만, 이이화는 친일인명사전을 집필한 대표적인 진보적 시각의 역사학자이다.[4] ‘동아일보’ 99년 6월7일자 기고문[5] 전통적인 풍수지리에 따르면 기운은 산줄기를 타고 흐르기 때문에, 기가 모이는 혈처까지 산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보면, 도쿄는 근처에 산이 없기 때문에 기운을 받을 수 없다. 명당의 조건에 대놓고 벗어나는 것이다. [6] 사실 그런 의도로 한국의 민속을 연구한 적은 있다. 무라야마 지준이 만든 <조선의 풍수>와 <조선의 귀신> 등이 대표적인 연구 자료인데, <조선의 풍수>는 풍수지리가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고 설화나 전설과는 달리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없는 미개한 풍속이라고 까는 내용이고, 후자는 내선일체 사업의 일환으로 토속 신앙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지우고 일본의 설화를 한국에 이식하고 일본이 아니꼬와 하는 인물(대표적으로 이순신, 권율 등)들을 장군신으로 섬기는 일 등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7] 일제가 문화적인 동질화를 꾀한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의 도깨비에 대한 이미지를 일본의 오니와 매우 유사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몸이 붉거나 퍼렇고 허리에 호랑이 가죽을 감고 뿔이 솟아난 방망이를 손에 든 야만적인 모습은 원래 일본의 오니의 이미지다. 한국의 도깨비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잘생겼다고 묘사하기도 하며, 잠방이에 바지를 입고 다니거나,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를 틀어 감투를 쓰고 다니기도 한다(...) 도깨비 감투가 여기서 나왔다. 한국의 도깨비는 피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폭력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서 방망이도 그냥 평범한 나무 방망이나 황금 방망이(!)를 들고 다닌다.[8] 어떤 사람인지는 자료가 없다. 일본의 오컬트나 점복술 하는 사람들의 글을 참고하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2대 코바야시 하쿠류시'라고 하며 역시 술수 관련 서적을 내는 듯?[9] 땅의 생김새가 XXX과 같아 그런 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10] 그런데 이 프로그램도 웃긴 게 백두산 쇠말뚝이 가짜로 밝혀졌음에도 우리 나라 산을 돌아다니면서 쇠말뚝을 없애고 다니는 소윤하를 집중취재하면서 마치 쇠말뚝 정기 훼손설이 사실인 양 방영했다. (소윤하는 1966년에 용화교 교주 서백일을 찔러 죽인 그 사람이다.) 백만불 미스터리 책을 보면 더 가관이다. 가족과 등산 온 한 아이가 산을 아프게 하고 한국 정기를 훼손하는 쇠말뚝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아저씨를 만나 그 아저씨와 합심해 쇠말뚝을 빼내고 민족 정기를 고취하는 감동 섞인 스토리....아예 소설을 써놓았다.[11]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가 신하들에게 이 설화의 진위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택리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12] 즉 고선지와 똑같은 경우이다. 그런데 고선지는 한반도의 국가와는 아예 마주치지 않아 은원관계가 없다는게 오히려 이득으로 작용했기에 한국의 위인인양 추켜세우는 경우가 많아 이여송과 한국 역사계에서의 대우가 완전히 대조된다.[13] 1970-90년대까지 이런저런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이다.[14] 이두호 작품의 레귤러 주인공 이름이다.[15] 이 글에 언급된 철마는 그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서낭당 신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서낭당에 조그마하게 철로 말(馬) 형상을 만들어 모신 곳이 많다. 어떤 곳에서는 이 철마가 서낭신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그 자체로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정약용의 글에 나온 철마는 산등성이에 있었다고 하니, 산신이 타는 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