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효상

 


'''승효상
承孝相'''
'''출생'''
1952년 10월 26일 (만 71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image]
'''본관'''
연일 승씨
'''학력'''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1]
'''직업'''
건축가
'''소속'''
이로재 대표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가족'''[2]
승병조(아버지), 문옥숙(어머니), 최덕주(배우자), 슬하 1남 2녀
1. 개요
2. 상세
3. 대표 작품
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건축가.

2. 상세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출생으로, 경남고등학교[3],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4] 졸업 후에 김수근이 운영하던 '공간'에 취직했다. 당시 설계한 건물은 마산 양덕성당, 경동교회 등이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 거기에서 아돌프 로스의 '로스 하우스'에 큰 영향을 받는다.[5] 2년 후 곧장 빈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9년도에 을 청산하고 독립하여 자신의 건축사무소 '이로재'[6]를 만든다.
1990년도에 4.3그룹을 결성하는데, 당시 건축계는 학연으로 뭉쳐 있어 담론이 형성되지 않고 건전한 비판을 통한 자정기능을 상실해 있었다. 30, 40대 건축가들이 1990년 4월 3일에 모여 학연을 떠난 건전한 담론의 장을 만들었으나 2년 후에 해체되었다. 승효상은 이 그룹을 통해서 김수근 아류에서 자신의 건축을 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대표적인 건축물으로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이자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의 자택인 수졸당[7]이다. 수졸당의 의미는 "졸렬함을 지키는 집"이다.[8]
이 수졸당이 그의 대표작인 이유는 그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구현한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빈자의 미학은 "호화로운 건축에서 허황되고 거짓스러운 삶이 만들어지기 십상이고, 초라한 건축에서 바르고 올곧은 심성이 길러지기가 더 쉽다"라는 것이다. 그가 김수근의 사후에 김수근 건축이 아닌 자신의 건축을 하기 위해서 고민하다가 금호동 달동네에 갔을때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소유가 아닌 공동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건축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아 빈자의 미학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타인의 가난을 미학적 도구로 승화시킨 것.
수졸당은 동선이 간단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아파트 같은 현대 건축물의 설계에서 나타나는 동선의 단순화를 거부해서, 수졸당의 동선은 복잡하다. 그는 수졸당을 비롯한 자신의 작품에 동선이 복잡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편하게 살아서 게을러.

그러니 집에 와서라도 불편하게 살아야지.

집에서 조금이라도 걸어다녀야 운동하는 거 아닌가?

나는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사람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고 싶어

그래야 건강에도 좋아.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야.

2014년 9월 10일 서울특별시 초대 총괄 건축가 자리에 지명되었다. 앞으로 서울시의 도시정책, 건축문화, 공공 공간, 도시계획 전반에 대해 시장에게 조언해주게 된다.
2017년 8월 28일, 동아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2018년 4월 16일,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되었다.

3. 대표 작품


  • 시안가족추모공원 (2014년)
  • 수졸당 (1993년)
  • 수백당 (1998년)
  • 웰콤시티 (2000년)
  • 대전대학교 혜화문화관 (2003년)
  • 대전대학교 30주년기념관 (2010년)
  • 대전대학교 레지덴셜 칼리지 기숙사(HRC) (2018년)
  •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2006년)
  • 베이징 장성호텔
  • 휴맥스빌리지
  • 아부다비 문화지구 전시관
  • 쿠알라룸푸르 복합빌딩
  • 파주출판단지[9]
  •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 신동엽 문학관
  • 중곡동성당

4. 기타


  •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 당시 강하게 반발했던 적이 있다. 해체 결정에 대해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라고 결사반대하였다. 때문에 90년대 중반 당시에는 외세에 의하여 우리 문화재를 부수고 그 옆에 강제로 지어진 건물을 문화주의라고 옹호하는 왜색문화주의자, 그런 걸 지키면 넌 양반 문화라고 우쭐거리느냐고 욕도 많이 들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 한동안 건축 의뢰도 많이 줄어서 경제적 타격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지금도 이걸 아쉬워하고 인터뷰에서 안타깝게 여긴 반응을 보였다. 최근 세운상가 관련한 문제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재건축, 재개발 등에 극히 부정적인 편인데, 승효상뿐만 아니라 한국 건축학계에 이러한 경향이 상당히 강하고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에도 건축학계는 일치단결해 철거를 반대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누그러져서 맹목적인 철거 반대를 주장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총독부가 있었다는 흔적은 남겼어야 한다며 아쉬워한다.



[1] 1975년에 졸업했는데 이때까진 건축공학과였다. 1975년에 건축학과로 명칭이 변경되어 1976년 졸업생부터는 건축학과로 졸업하게 되었다. 서울대인명록(2013) 확인.[2] 부모님 두분 모두 이북 출신 실향민이다. 부산으로 피난와 승효상을 낳았다고 한다.[3] 문재인, 서병수, 박맹우, 박종웅, 승효상, 송정규, 최철국, 김정태(1952) 모두 경남고 25회 동기생이다.[4] 1975년에 졸업했는데 이때까진 건축공학과였다. 1975년에 건축학과로 명칭이 변경되어 1976년 졸업생부터는 건축학과로 졸업하게 되었다. 서울대인명록(2013) 확인.[5] 로스 하우스는 화려한 빈의 거리에 전혀 장식이 없이 밋밋하게 설계되고 만들어져서 설계한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는 경찰청에 불려가기 까지 했고, 빈 당국이 시공의 중단을 요구하자, 창문틀에 화분을 놓는 것으로 협상했던 건축물이다. 로스하우스는 당시 건축 산업 환경의 변화에 발맞춘 고발성 작품에 가까웠다. 전후상황을 복구하기 위한 건설환경에서 화려한 장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6] 서울 동숭동에 위치했고, 승효상의 자택과 겸해 있다. 뜻은 '이슬을 밟는 집'.[7] 서울 강남구 논현동.[8] 당시 유홍준은 나의 문화답사기를 쓰기 전이고, 아버지 퇴직금으로 구입한 집이라 절제함을 강조한 집이다.[9]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