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호

 




'''푸르밀 회장'''
푸르밀 창업

'''초대 신준호'''

현직
'''초대 푸르밀 회장
신준호
辛俊浩
'''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생'''
1941년 11월 1일 (82세), 경상남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본관'''
영산 신씨
'''부모'''
아버지 신진수, 어머니 김필순
'''형제자매'''
신격호[1], 신철호, 신춘호, 신선호, 동생 신정희
'''경력'''
롯데그룹 부회장
롯데우유 대표이사 회장
'''소속'''
푸르밀 대표이사 회장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이사장
'''학력'''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 학사)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수상경력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2. 생애


1941년, 경상남도 울산군(現 울산광역시)에서 롯데그룹 신격호 전 총괄회장의 다섯째 남동생으로 태어났다. 미래통합당의 4선 국회의원윤상현의 장인이며, 신동주신동빈의 숙부다.
경남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 롯데물산, 롯데건설 등 롯데그룹 계열사에서 임원으로 근무했다.
큰형인 신격호 회장과는 원래 가까운 사이였다. 신격호 회장이 가장 아끼는 동생 중 한 명이었으나 1996년에 부동산 관련 분쟁을 일으키면서[2]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2007년에 롯데햄ㆍ우유에서 우유 사업을 떼어내 롯데우유로 분리되었으며 롯데우유가 푸르밀이 되면서[3] 현재는 푸르밀 회장이다. 맏형인 신격호 회장과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지만[4][5] 역시 큰형 신격호와 사이가 안좋은 셋째 형인 신춘호 농심 회장과는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6]
큰형인 신격호 회장과는 사이가 안좋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외모는 형과 꽤 닮은 편이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 롯데그룹의 부회장을 맡았고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각각 역임했다. 2012년부터는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2018년 차남인 신동환 부사장이 대표이사가 되었고, 본인은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야구 쪽에도 꽤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1975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가 창단할 때 사장 겸 단장 역할을 직접 맡았고 KBO 리그 출범 원년인 1982년부터 1996년까지는 롯데 자이언츠의 구단주를 맡았다. 신준호가 구단주로 있을 당시에는 롯데가 각각 1984년1992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였다.[7] 1992년에는 비야구인이자, 도선사 출신인 송정규롯데 자이언츠 단장에 파격임명한 것은 야구계에 유명한 이야기.[8]

3. 논란


2007년, 부산광역시의 최대 주류업체인 대선주조를 헐값에 사들인 뒤 3년만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3,0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겨 이른바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신동학재벌가의 개망나니로 이름을 떨쳤으며 뉴스에도 몇번 나왔다. 신준호도 언제부터인가 신동학을 버린 자식으로 낙인 찍었다. 신동학은 2005년에 외국에서 술먹고 헤롱거리다 태국 방콕의 한 호텔에서 추락사했다.

4. 수상경력


  • 철탑산업훈장 (1988)

5. 가계도




[1] 1921년생이며, 롯데 창업자다. 2020년 1월 19일 노환으로 운명을 달리하였다.[2] 금융실명제의 여파로 부동산 차명소유가 추적대상이 되면서 롯데 가의 여러 차명 부동산을 신격호가 명의전환으로 회수하려고 했는데, 당시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의 명의자였던 신준호가 반발하여 신격호와 신준호간 소송으로 발전했고, 결국 신준호가 패해 롯데제과 부지 + 그룹 부회장 겸 롯데건설 대표이사직을 모두 뺏겼다.[3] 롯데그룹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쓰지 말도록 롯데우유 측의 상표권 사용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롯데우유가 롯데라는 이름을 포기했다.[4] 그래도 2020년 1월 신격호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빈소에 찾아와서 먼저 간 맏형을 애도했다고 한다.[5] 신격호 회장의 형제 중에서 신격호 회장과 가까운 사람은 넷째인 신선호 사장이다. 물론 이 사람도 신격호 회장과 안 싸웠던 것은 아니지만 형제 간 분쟁 중에서 유일하게 맏형 신격호를 따르고 있다.[6] 그래서 푸르밀농심이 협업 마케팅을 종종 한다.[7] 그 외 1995년에는 준우승을 하였다. 상대는 OB 베어스.[8] 하지만 송정규는 결국 구단 내부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 해, 우승시키고도 1년만에 단장직을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