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리 쇼크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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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상황은 뭐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비상구로 달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타리에서 덤핑 경쟁에 뛰어들면서 모든 것의 종말이 오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게임산업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짐 레비, 액티비전 회장.
정말이지 게임 업계에 지독한 세월이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죠. 애플 II 게임을 내놓더라도 1만 5,000개를 팔기 힘들었습니다. 일렉트로닉 아츠를 시작한 때에는 카트리지 게임이나 플로피 디스크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130여 곳이나 되었지만, 그 가운데 오늘날에 살아남은 회사는 불과 6곳뿐입니다(1983년 아타리의 몰락 이후 상황).
트립 호킨스, EA 창업자.
1. 개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일어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의 대규모 경기침체 사건을 일컫는 말로, '''비디오 게임계의 거장이자 선구자인 아타리를 비디오 게임계의 엔론 내지 월드컴 수준으로 떨어트린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1982년에 30억 달러까지 간 시장 규모가 1985년에 거의 3% 수준인 1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2. 이름
'아타리 쇼크'라는 단어는 증권가에서 생겨난 것으로, 미국의 달러화 금태환 정지 정책으로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닉슨 쇼크'에 빗댄 것이다. 즉 아타리 쇼크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특정 게임사의 실패라는 두리뭉실한 의미와는 다르게, 당시 아타리의 최대 주주였던 워너사에서[1] 아타리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게되면서 생긴 경영 실패를 지칭하는 것 이었다.
Video game crash of 1983 사건 이후로 게임 시장으로 진출을 엿보고 있던 닌텐도 그리고 그와 유착관계였던 일본의 게임 잡지사[2] 들이 북미 게임시장의 상징과도 같았던 '아타리의 쇼크 사태' - 북미 게임은 망했다 라는 뉘앙스의 다소 악의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하고, 닌텐도 게임은 발매에 앞서 검열로 게임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서드파티제[3] 를 대비시키며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아타리 쇼크의 의미가 왜곡되고 또 오용된 것은, 용어를 처음 소개한 국내 게임 잡지사들의 성향이 당시 주류였던 일본의 게임기 시장과 일본 게임 잡지사에서 큰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서양권에서도 편의성 측면에서 Video game crash of 1983 보다 Atari shock 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시장과포화로 인한 실패인가 상술한 경영간섭으로 인한 제작사의 몰락인가를 구분짓기 위해서는 두 용어의 사용범주를 구분하는것이 좋다.
3. 배경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시장의 과포화(saturation)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보통 아타리 쇼크를 거론할 때는 '저질 게임의 범람으로 화가 난 소비자가 게임 시장을 외면해서 벌어진 일' 정도로 사용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사건 이후로 북미의 게임 시장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1985년에 뉴욕에서 시범 출시하여 1987년의 전미에 선풍적으로 성공한 닌텐도 NES의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덕분에 다시 성장했다.
3.1. 아타리의 탄생과 성공
놀런 부슈널은 1972년 6월에 회사 아타리를 만들었고, 같은 해 11월에 퐁을 내놓았다. 그는 퐁을 통해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하여 게임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976년부터는 게임기 개발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800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고, 1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고 1977년에 아타리 2600을 9개의 출시 게임과 함께 발매했다.
아타리 2600의 초반 성적은 그저 그랬다. 기계가 너무도 조악하고 불량이 많아 반품되기 일쑤였다. 1978년 2월의 워너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굴지의 섬유 기업 벌링턴 인더스트리의 부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레이몬드 에드워드 카사르(Raymond Edward Kassar)[4] 를 영입해 아타리의 부사장에 임명했다.
반면 부슈널은 아타리 2600의 판매 부진과 그에 따른 워너와의 불화로 1978년 11월, 5년 동안 동종업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당시에 아타리는 판매 부진을 겪고 있던 아타리 2600을 대체할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워너는 이 시스템을 개인용 컴퓨터로 만들 것을 원했고, 부슈널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부슈널은 아타리를 떠나고 본인이 원하던 피자 프랜차이즈 사업[5] 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사업을 늘려나갔지만 아타리 같은 새로운 게임 회사를 만들지는 않았다.
부슈널이 아타리를 떠난 이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스티브 로스는 레이몬드 카사르를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카사르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개판 5분 전의 아타리를 재정비하고 크게 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 아타리 2600의 판매량은 매년 두 배씩 증가하여 1979년 크리스마스에는 1백만 대가 팔렸고, 타이토의 대히트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아타리용으로 이식하여 1980년 1월에 발매했다. 이때부터 아타리는 재고로 쌓여 있던 게임기들을 소진시켰을 뿐 아니라 매출이 두 배 이상으로 늘면서 1980년 한 해에만 2억 달러 이상 성장했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시기에 1977년 75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아타리 매출액을 시장 붕괴 직전인 1982년 20억 달러 수준까지 크게 성장시켰다.[6]
3.2. 서드파티의 탄생
아타리에 서드파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이 모든 것을 독점했다. 그러나 개발자들에게는 성과급은 커녕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7] 물론 아타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해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발매한 1980년이지만, 개발자들은 여러모로 참을 수 없었는지 1979년 5월에 아타리의 프로그래머 몇 명은 레이몬드 카사르에게 자신들을 레코드 레이블처럼 판매량에 따른 성과급과 게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요구했다. 카사르는 그 요구에 대해 그들에게 '수건 디자이너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라며 그들을 모욕했다.[8] 결국 그들은 회사를 떠나 1979년 10월에 액티비전을 창업했다.
이 액티비전에서 만든 게임들은 판매량과 평가 면에서 모두 상위권에 들어가는 명작 아타리 게임들을 개발했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슈퍼 마리오의 선조격으로 불리는 피트폴이 바로 액티비전 작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서드파티였다. 아타리는 자신들 밖의 누군가가 자신들 게임기의 게임을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게임 회사들은 기기를 분해하고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아타리 게임기를 연구하여 무허가로 게임을 개발했다. 아타리에서는 그들에게 특허 침해 혐의로 소송을 걸었다. 결국 1982년에 아타리가 특허료를 받는 조건으로 게임 회사들과 화해하면서, 다른 게임 회사에서도 아타리에게 특허료를 지불하면서 아타리 게임기에 게임을 출시하는게 가능해졌다. 서드파티라는 개념은 이 때 탄생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아타리에서는 다른 개발사에 플랫폼을 개방한 적이 없다. 저질 게임을 양산하는데 아타리에서 독려를 했다는 주장은 당연히 거짓이다. 퍼블리셔 'Mystique'에서 나온 일련의 포르노 게임들도 퍼블리싱과 서드파티에 대한 아타리의 통제력이 얼마나 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방증이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도 내외에 나왔던 게임은 질이 좋았다. 그러나 1981년 말기부터 게임의 질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시 아타리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쓰레기를 넣은 카트리지도 백만 개는 팔릴 거야."''' 아타리 2600의 인기가 절정이었으니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3.3. 소프트웨어 범람과 경쟁자들의 출현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라는 금맥을 향한 골드 러시는 이미 한창이었다. 이 시기에는 아타리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비디오 게임기도 여러개 생겨났고, 애플 II를 비롯한 홈 컴퓨터들까지 우후죽순으로 발매되었다. 그리하여 시장은 대 비디오 게임 시대가 열렸고, 정말이지 수많은 업체들이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 근데 이 업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14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US GAMES는 식품회사 Quaker Oats[9] 의 게임 개발 부서였다.
- 11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Apollo는 커리어 컨설턴트용 영상음향 교재를 만들던 회사의 자회사였다.
- Spieder Maze와 Vulture Attack을 퍼블리싱한 K-tel은 컴필레이션 음반 전문 회사다.
거기에 사태는 악화일로로 나아가 마침내 아타리 2600용 저질 '''포르노 게임'''까지 등장하게 됐다. 무엇보다 현대의 연령별 게임 등급 분류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포르노 게임에는 '커스터의 복수'라는 게임이 가장 유명하다. AVGN의 리뷰로 잘 알려진 게임인데, 그 유명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화살의 방해를 뚫고 인디언 여자가 있는 자리까지 보내는 것이 주 내용. 물론 둘이 만난 뒤엔 뭘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시기도 시기이지만 그래픽이 조악해서 아이가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어른은 '커스터 장군이 춤을 춘다'고 변명했다.[12]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그것도 인디언 전쟁 내내 이어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전쟁 범죄에 관련된 인물을 가지고 포르노 게임에다 인종차별에 고인드립까지 친 탓에 당시 미국 사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오늘날 미국 대학 내의 게임 관련 과목에서도 다룬다.
또한 홈 컴퓨터가 대두되며 아타리의 자리를 위협했다. 1970년대부터 등장한 애플 II, 코모도어 PET 등의 컴퓨터는 원래 사무용 기기를 노리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스프레드시트인 VisiCalc의 애플 II 출시로 인해 사무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 II의 승리로 끝나자, 코모도어는 박리다매 전략으로 바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노리게 됐고, 1981년 코모도어 VIC-20을 출시했다.
$299이라는, 아타리 2600과는 불과 $100밖에 차이나지 않은 다소 공격적인 가격으로 출시됐으며, 왜 단순히 비디오 게임기를 사냐는 도발적인 TV 광고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컴퓨터는 비디오 게임기들과 같이 게임도 할 수 있을 뿐더러 '''교육적'''인 기능도 할 수 있는 다목적 기기라는 내용이다. 광고를 위해 당시 인기 드라마 스타 트렉의 주인공, 커크 선장 역할을 맡았던 주연 배우 윌리엄 샤트너까지 기용했다.
왜 비디오 게임기를 사냔 코모도어 VIC-20의 광고.
두 아이 다 훗날은 일자리를 구해야 될 것이란 코모도어 VIC-20의 광고.[13]
이 광고는 북미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2년만에 컴퓨터 역사상 최초로 100만 대나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그 유명한 코모도어 64를 $595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했다. 코모도어 64 관련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코모도어 64가 출시한 해의 이듬해인 1983년이 되자마자 $399까지 인하해 더욱 거세게 가격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4월이 되자 코모도어 VIC-20의 가격을 $99까지 인하했으며, 타사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기를 가져오는 조건으로 코모도어 64 구입자에게 $100 추가 할인해 주는 프로모션을 실시했다. 6월에는 코모도어 64의 소매점 가격이 사실상 $200~$230까지 인하됐다. 이러한 코모도어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14] 때문에 1993년까지 1700만 대가 팔려나가 북미 시장에서는 단일 기종으로 가장 많이 팔린 컴퓨터 기록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으며,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상대적으로 크게 움츠러드는 결과를 낳았다.[15]
결국 이러한 무모한 물량 전술은 '''게임기 고르는 데 1주일, 다시 게임 고르는 데 1주일, 게임을 하는 데 1시간, 후회하고 욕하는 데 1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대해졌다.
3.4. 자폭 버튼을 누르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북미 게임계는 계속 성장 중이었고, 1982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성장이 모두의 눈을 가리게 했고, '''아타리의 셀 수 없는 미스 사이에서도 중대한 미스를 불러들였다.''' 아타리에서는 급성장으로 수요예측을 감당하기 어려워 1981년 10월에 각 도매상에 1982년에 판매할 수량을 미리 주문시켰다. 그때는 아타리에서도, 증권가도, 소매상에서도 모두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다들 미칠 듯한 물량을 써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팩맨 1200만개'''라는 주문량이다.
1982년 3월에 팩맨이 발매되었고, 무려 700만 개가 판매됐다. 하지만 5백만 개는 고스란히 남아 크나큰 부담이 되었고, 조악한 품질로 반품되어 돌아온 것들은 상황을 악화했다. 그럼에도 1982년 6월까지는 누구도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고, 증권가 역시 최대 300% 성장이라는 분석안을 내놓아 장작을 쌓는 데 보태었다.
1982년에 북미 게임계는 최고전성기를 맞은듯이 보였지만, 비디오 게임기는 경쟁자의 범람과 더불어 저가격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와도 경쟁했다. 이는 결국 시장 포화로 이어졌고, 뒤늦게 우후죽순처럼 끼어든 서드파티들은 슬슬 탈락할 준비를 하고 말았다.
결국 1982년 말부터 시장 붕괴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1982년 12월 8일의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서는 1982년 수익이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타리 가정용 게임기 부문 사장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이는 뉴욕 증권 시장에 쇼크로 이어져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주가 폭락을 촉발했다. 마텔, 콜레코 같은 경쟁사에서는 물론이고, 코모도어 같은 홈 컴퓨터 메이커에, 토이저러스 같은 유통 쪽까지 관련된 주식들은 모조리 곤두박질쳤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크리스마스 연말 대목을 대비해 만든 비장의 소프트 아타리 2600판 E.T.가 화려하게 망하면서 아타리는 또 다시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 아타리의 판매 예상량은 400만 개였지만 팔린 것은 약 50만 개 정도였다. 사실 팩맨의 케이스와는 다르게 이 경우에는 영화의 흥행정도를 봤을 때 결코 무리한 예측이 아니었다. '''게임이 쓰레기로만 안 나왔으면.''' 판매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겨 겨우 5~6주만에 게임을 만들었고, 결국 참혹하게 망했다. 이는 당시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CEO인 스티브 로스의 탐욕에 따른 무리한 시도였고, 아타리 사장인 레이몬드 카사르 역시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1983년, 1982년 4분기와 연간 실적을 발표했는데, 1982년에 20억 달러의 매출액을 발표해, 1981년의 11억 달러 매출액에 비해 얼핏 고무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82년 4분기 영업이익을 고작 120만 달러라 발표했다. 1981년 4분기의 영업이익 1억 3650만 달러에 비해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3.5. 1983년~1985년, 북미 게임 시장 붕괴 후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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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미국 게임산업의 통계. (단위: 10억 달러)[16]
'''그렇게 위 요인들이 섞인 결과물은 바로 2년에 걸친 비디오 게임 시장의 완전한 붕괴였으며, 말 그대로 게임이 무너지고 시장이 황폐화되고 이와 동시에 대부분의 개발사들이 망해버렸다.'''
1983년에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는 여전히 팔렸다. 도표 참고. 하드웨어도 660만대나 팔렸고, 게임 카트리지는 오히려 1500만 개가 더 팔렸다. 콜레코비전을 만든 콜레코에서는 자신들의 기기는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인텔리비전과 아타리에도 소프트를 공급해서 1983년 8월에 8백만 개의 소프트를 출하했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팔린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먼저 포화 상태가 된 시장에 늦게 뛰어든 얼치기들이 도산을 시작했다. 그 다음에 도산한 회사의 게임 카트리지를 반품도 못하고 둘 공간도 더 이상 없게 된 소매상들이 게임 덤핑 판매를 시작했다. 그래서 대체로 30달러였던 가격은 보통 5달러, 심지어는 2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어서 낮아진 가격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제 가격을 주고 게임을 사지 않게 됐다. 마치 번들 CD 경쟁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니 게임이 지난 해보다 1500만 개나 더 팔렸는데도 마진이 없으니 수익이 오히려 더 감소한 것이다. 그리고 수익이 줄어든 개발사들은 정리해고 등으로 버티다 결국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독특한 소비 문화 문제도 있다. 타깃 같은 대형 양판점들은 소비자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서 게임기를 반품한다고 하면 영수증이 없어도, 심지어 구성품이 없어도 그냥 반품을 받아줬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는 1990년대 넘어서까지도 계속되었고 그래서 미국에 SNES가 출시될 당시까지만 해도 몇 년이나 쓰고 구성물도 몇 개 빠진 NES를 '''환불'''받아 SNES를 사는 이용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미국에선 일어나고 있었고, 이에 견디지 못한 닌텐도는 도소매상에게 '90일 환불 정책'을 내세워 상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7]
다만 이에 대해서 블랙 컨슈머는 소수일 뿐이고, 대부분 잘 모르거나 착각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 뿐이라는 미국 백화점 프랜차이즈 노드스트롬의 주장도 있다.# 지금의 미국은 소매점마다 환불 정책이 제각각인데, 어떤 소매점은 영수증을 요구하고 태그를 부착해놓고 있긴 하지만, 영수증을 요구하지 않는 환불 정책을 갖고 있는 일부 소매점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물론 영수증을 갖고 오지 않으면 환불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또한 어떤 소매점들은 Price adjustment 제도나 Rebate[18] 제도를 통해 환불 남용을 억제하고 있다. 전자는 최저 가격 보상 제도이며, 후자는 구매 제품을 일정 기간 사용 후 영수증을 제출하면 현금을 일부 돌려주는 제도이다. 또 어떤 소매점들은 환불해도 현금이 아닌 마켓 크레딧을 주기도 한다. 미국의 환불 정책은 까다로워지고 있는 게 추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타 국가들에 비해 매우 너그러운 편이며, 미국에 진출한 모든 기업은 이런 미국 특유의 너그러운 환불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저 수많은 반품된 팩맨과 ET 카트리지의 수를 보실 것.
당시 최대 게임기 회사였던 아타리는 '''1983년 한 해에만 무려 5억 3천 6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1984년 1분기에는 2천 8백만 달러의 손실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자회사로 마지막 시기였던 2분기에는 '''무려 4억 2천 5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19] 1년 6개월 동안 무려 10억 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이다.'''
결국 아타리의 경영난으로, 모기업이었던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1983년 말부터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 합병 공격에 노출되었다. 대략 3개월간의 분쟁 결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루퍼트 머독이 사들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지분을 1억 7260만 달러에 되사들이기로 했다. 이 때문에 루퍼트 머독은 4천만 달러 이득을 봤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그만큼 손해를 입었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CEO, 스티브 로스는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 합병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아타리를 매각해야 한다고 이사회에 주장했다. 이듬해인 1984년부터 아타리를 아케이드 사업부였던 아타리 게임즈와 아타리 홈 컴퓨팅 & 게임기 사업부 그리고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 3등분으로 분할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아타리 홈 컴퓨팅 & 게임기 사업부는 1984년 6월 2일 코모도어의 창업자 잭 트라미엘이 코모도어를 퇴사하고 세운 트라미엘 테크놀로지에게 2억 4천만 달러에 매각했으며,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였던 아타리텔은 미쓰비시에 매각했다. 아타리 게임즈는 이듬해인 1985년 남코에 매각됐다. 이후 아타리의 운명은 아타리 5번 항목을 참고.
당시 본업이 게임이 아니었지만 게임기 시장 2위였던, 인텔리비전을 개발한 마텔에서는 1983년 8월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대규모 구조조정 했음에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83년 한 해 동안 3억 9천 4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고''' 이듬해인 1984년 1월 20일 인텔리비전 생산을 중단하고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청산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기업인 '''마텔이 1984년 2월 4일,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을 법원에 신청해야 했다.'''# 이후 인텔리비전의 운명은 해당 문서를 참고.
3위였던 필립스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2 후속 게임기의 북미 시장 출시를 포기하고 1983년에 유럽 시장에만 한정적으로 출시했다. 그러나 한정적인 수량만 생산 후 그마저 생산 중단해 버리고 이듬해인 '''1984년부터 게임기에서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 MSX로 종목을 변경했다.'''
콜레코비전으로 4위였던 콜레코는 가정용 컴퓨터 콜레코 아담 사업 실패와 겹쳐지면서, 1983년 743만 달러, 1984년에는 장난감 부문에서 2억 달러가 넘는 영업이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총 7,982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20]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85년 10월 19일 전자 기기 사업 자체를 철수했으나 '''1988년 7월 11일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을 법원에 신청해야 했다.''' 결국 1989년 6월 15일 해즈브로에게 8천 5백만 달러에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아타리의 첫 번째 서드파티 게임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액티비전은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 목숨만은 겨우 부지했다.[21] 그러나 두 번째 서드파티 게임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이매직(Imagic)은 원래 기업 공개하려는 목표가 있었지만, 쇼크의 여파로 1983년 9월 17일 170명의 종업원 중 40명을 정리해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1985년 파산했다.[22] 그 외에도 아타리에 참여하던 중소 게임 소프트 메이커가 거의 사라졌다.
그렇게 2년 동안 게임을 만들 사람도, 게임을 팔아주는 사람도, 또 게임을 제 값에 사주는 사람도 모두 잃었고, 북미 가정용 게임 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케이드 게임도 비슷하게 하락세를 겪었으나 게임기 게임과 달리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3.6. 일본의 세계 게임시장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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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일본 게임산업의 통계. (단위: 10억 달러)[23]
1985년에 닌텐도가 북미에 NES를 출시했다. 게임 시장 붕괴를 겪으며 게임이라면 넌더리가 나는 소매상의 눈치를 본 닌텐도에서는 '콘솔'이라는 단어 대신 'Entertainment System', '게임 팩'이나 본체를 '컨트롤 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장난감처럼 보이도록 로봇인 R.O.B.를 추가하는 등 어디까지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며, 게임은 부가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했다.[24]
닌텐도의 NES 동시 발매 게임인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큰 인기로 NES의 성공을 넘어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덕에 미국에서 ‘'''닌텐도를 하다'''’는 말 그대로 ‘'''게임을 하다'''’라는 의미가 되었으며, 기존의 게임기 개발사들이 떠나간 탓에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한동안 닌텐도와 세가를 비롯한 일본 회사들에서 쥐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닌텐도는 이미 일본에서 남코의 패미컴 참여 사건[25] 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처럼 아타리에서 서드파티 관리에 실패한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 북미판 패미컴에는 하드웨어적으로 락아웃칩인 10NES칩을 도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표면적으로 닌텐도에게 정식 라이선스를 받은 제품의 커버에는 Seal of Quality 표식을 붙이게 하는 등 서드파티 라이선스 관리와 카트리지 제조를 직접 관리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아타리 게임즈의 자회사였던 텐겐 게임즈와 EA[26] 같은 업체들로부터 제멋대로 하겠다는 도전을 받았지만 모조리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엄격한 관리 때문에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의 개입을 유발하게 됐다. 1991년 4월 FTC가 지적한 가혹한 라이선스 조항들을 제거하고 5달러의 게임 할인 쿠폰을 사용자들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종료됐다.
이러한 닌텐도의 플랫폼 비즈니스는 현대의 애플의 App Store나 스팀 같은 온라인 플랫폼 비즈니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후 미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한 동안 게임기보다 PC 게임 위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질 좋은 게임을 낸 서드파티 제작사는 많이 남아 있었고, 또한 가정용 컴퓨터(Home Computer)의 개념으로 애플 2와 유럽시장 홈 PC의 제왕 코모도어 64 등의 8비트 PC가 보급되고 있던 때였다. 그 뒤를 이어서 16비트에서는 꾸준히 명성을 이어온 IBM은 물론, 코모도어에 이은 유럽시장의 강자 아미가도 선보였다. 이 아미가는 당대 IBM PC보다 약간 우월한 성능을 가졌기에 아미가로 나온 게임(주로 유럽시장을 대상으로 한 게임들)이 IBM PC로도 이식되는등 PC게임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어포지가 셰어웨어 게임 유통망 모델을 성공시키고 이드 소프트웨어가 둠 시리즈 혁명을 일으키면서 미국 PC게이밍 시장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어쨌든 이들 서드파티 제작사들은 PC 환경으로 게임을 내놓으면서 미국의 자국산 게임들은 한 동안 게임기와 PC로 양분됐다. 이후 미국 게임 시장은 엑스박스가 나온 2000년대 초중반까지 PC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성장을 하였고, 게임기 게임들 못지 않은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흔히 "미국 게임은 PC 위주, 일본 게임은 콘솔 위주"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4. 요약
- 아타리에서 1977년에 아타리 2600을 발매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 아타리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기점으로 1980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이윽고 비슷한 게임기와 홈 컴퓨터가 계속 발매되고, 수많은 회사[27] 에서 똑같은 게임을 각 기종으로 발매하여 시장은 금방 포화상태가 되었고 소비자의 불만은 높아졌다.
- 아타리에서는 서드파티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으나, 통제할 수도 없었다.
- 게임 회사, 소매상, 증권 시장 등, 시장 참여자들의 낙관 속에 경영진들의 누적된 판단 실패로 게임 카트리지를 미친 듯이 찍어냈다.
- 공급 과잉으로 게임이 반품되고, 게임 제작사들이 망해 반품마저 안 되는 게임이 헐값으로 팔리자, 소비자들은 게임에 제값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위의 팩맨 주문건수와 같은 사례는 이후 일본에서도 쉽게 재현이 됐는데, 인기 소프트의 최신작이 발매된다고 했을 때 동네에 몇 군대씩이나 있는 작은 소매점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모든 주문이 500만개 정도가 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이 터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슈퍼)패미컴 소프트의 제조비가 부담스럽고 제조에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주문이 들어오는대로 찍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도매상이 소매상을 컨트롤 하기 위해 물건을 달라는 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아타리 쇼크는 경제학 뿐만 아니라 경영학, 응용윤리학에도 큰 의미가 있다. 경제학에는 시장에 풀린 상품, 그것도 대체재가 풍부한 것들의 전체적인 품질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되어 주었고, 경영학과 응용윤리학에는 각각 '지속 가능한 경영'과 '윤리경영'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16비트 시절까지는 게임 개발의 고정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게임 산업은 고작 2~3명의 직원만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가져오는 꿈의 산업 정도로 인식되었을 정도. 지금처럼 500명 이상이 5년 이상 투입되어야 하는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의 시장을 잘못 판단하고 1200만개나 물량을 찍어내는 판단(이는 1981년 총 판매량의 1/3 정도 해당되는 사항)이 정신나간 것이다.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리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서 소비자의 판단을 흐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틀린 얘기이다. 왜냐하면 아타리의 성공으로 인해 1980년대부터 여러 비디오 게임지가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컴퓨터 게이밍 월드'도 1981년에 창간되었다. 그러나 1984년 즈음에 대다수의 게임 잡지가 폐간하게 된다. '''리뷰할 게임도, 게임 회사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이밍 월드 1988년 8월호에 설립자 '러셀 사이프'가 이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는데, 1984년 겨울까지 몇 개의 잡지만 살아남았고, 1985년 여름에는 자신들이 발행했던 컴퓨터 게이밍 월드가 유일한 풀 컬러 게임 잡지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게임 잡지들은 비디오 게임이 인기를 끌면서부터 다양하게 발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제2의 아타리 쇼크는 올 것인가?
아타리 쇼크는 게임이 범람하는 현 시대에 다시 한 번 조명받고 있다. F2P, 가챠, DLC 등으로 게임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소비자들이 이런 저질 게임에 질려 게임을 외면하고 게임 시장이 망할지도 모르니 제작사들에서는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를 하며 아타리 쇼크를 인용하는 게이머들이 많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2의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고, 설령 일어난다 하더라도 같은 국면으로 전개되진 않을 것'''이다. 지금의 게임시장은 아타리 쇼크가 일어났던 40여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데다 보통 아타리 쇼크를 인용하는 사람들은 아타리 쇼크의 전말을 단순히 저질 게임 범람으로 인한 소비자의 외면 정도로 국한해서 해석하고 있어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타리 쇼크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타리가 당시 게임 산업을 거의 독점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순한 저질 게임의 범람이 소비자의 외면을 불러왔다는 단편적인 평가보다는 차라리 아일랜드 대기근 같은 사례가 아타리 쇼크와 더 비슷한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비디오 게임 업계가 지금과 비교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소규모였고 게임산업의 가치가 지나치게 고평가되고 있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당시 아타리는 현재 컴퓨터 OS 시장의 마이크로소프트같은 위상의 기업이었다. 그래서 업계 1위가 똥을 싸면 업계 전체가 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 하지만 40여 년을 거치면서 2010년대 이후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당시 아타리처럼 한 기업이 좌지우지하는 게 아닌 여러 게임 기업이 춘추전국시대처럼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엄청나게 커지고 다양화되었으며, 무엇보다 아타리 쇼크를 겪었던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을 즐겨온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이제는 중장년층에까지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대중음악과 같이 사회의 주류 엔터테인먼트 매체 중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워너 브라더스나 디즈니가 갑자기 돈에 눈이 멀어서 저질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하면 영화 산업 전체가 붕괴하는가? 제 2의 아타리 쇼크는 사실 이런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설령 특정한 장르와 분야를 거의 반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회사가 아타리같은 행보로 궤멸한다고 해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장 전체를 보면 극히 일부분적 쇠퇴와 대체재의 등판만이 힐끗 보일 뿐이다. 게임 산업 안에서도 50년 전에 비해 수천 배는 커진 규모를 생각하면 워낙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회사, 글로벌 거대 시장과 다양한 소비층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을 일은 없다. 다만 장르에 따라 소멸하는 장르와 새로 뜨는 장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겠지만.
- 근본적으로 게임산업을 아타리라는 회사 한 곳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구조였다. 반대로 지금의 게임 시장은 하나의 업체가 독식하는 구조가 아니다. 게임기 시장은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닌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나눠먹고 있다. 만약 한 곳에서 큰 실책을 저지른다 해도 이탈한 고객들을 다른 경쟁업체에서 흡수할 것이다. 퍼블리셔 쪽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액티비전 블리자드, 일렉트로닉 아츠, 유비소프트,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 등등 대형 퍼블리셔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독보적인 쉐어를 차지하는 곳은 없다. 아타리 쇼크 때처럼 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 게다가 온라인 유통으로 인해 대형 퍼블리셔를 거치지 않고 각종 인디게임을 개발하는 소규모 개발사들도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들 중 성공하는 게임은 지극히 드물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수작들은 다수 존재하며 수십만 장 이상을 판매하는 대박도 여럿 등장하고 있다. 설령 대형 퍼블리셔들이 싸그리 망해서 AAA급 대작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할만한 게임들은 여전히 수도 없이 나올 것이며 이들 중에서는 다시 대규모 개발사로 성장할 회사들이 다시 나올 만큼 시장이 성숙되어 있다.
- 게임의 유통과 수익구조도 아타리 쇼크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유통비용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시장 상황을 판단하지 않은채 무작정 하드웨어를 최대물량을 찍어내놓고 시장에 내놓았기에 아타리 쇼크 발생에 대한 대비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타리 쇼크의 가장 큰 원인은 쓰레기 게임의 반품과 덤핑 판매로 매출이 서서히 줄어들었기에 자멸 했던 것. 하지만 현재는 스팀 같은 ESD의 발달로 비상식적인 덤핑 판매는 사라지고 있고 그 ESD에서 반품은 관대하기 짝이없던 1980년대와 비교하면 깐깐하기 짝이 없어졌기에 '해보고 반품'한다가 힘들어졌다. 부분유료화 모델 역시 게임 수익 모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챠, 랜덤박스 등의 확률형 콘텐츠는 아예 반품이 안된다. 설사 확률형 콘텐츠가 도박 중독을 이유로 전면 금지된다 해도, 그 악영향은 그 쪽 수익에만 의존하는 게임 및 게임사에만 가지, 해당 콘텐츠를 도입하지 않는 쪽에는 오히려 더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게임성이 좋아야 잘 팔린다'는 공식이 2010년대 들어서 완전히 깨지고 게임성이 별로라고 해도 대중성과 IP만 좋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게임들이 증명하고 있기에 아타리 쇼크가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장 페이트 그랜드 오더나 리니지 M의 경우, 직접 플레이 하는 팬들도 게임성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하지 않으며 과금유도가 과도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구급 매출을 자랑하고 있다. 저렴한 게임성을 극복할 만한 방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게임 개발의 방법론이 아타리 쇼크 당시에 비해 성숙되어 있다. 주먹구구식 개발 위주였던 아타리 쇼크 당시와는 달리, 현재의 게임 개발은 다른 프로그램 개발과 마찬가지로 시장조사 등 계획 절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더불어 모든 단계에서 품질 관리가 제대로 이뤄져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렇게 성공한 결과가 테트리스, 마리오 시리즈, 마인크래프트 등의 스테디셀러로, 이들은 게임성을 갖춤과 동시에 그 자체로 거대한 IP 구성이 되었다. 당연히 팬덤도 자연스레 거대해졌기에, 해당 시리즈에 위기가 왔다 싶으면 그 팬덤의 자문을 얻어 신작을 개발하거나 패치를 진행하면 그만이다. (앞서 언급한 대중성에 의존하는 게임도 사실은 그러한 계획의 산물이다.)
- 게임에 보수적인 세력, 심지어는 적대적인 세력도 기능성 게임, 시리어스 게임을 통해 얼마든지 포섭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게임들에 비해 악영향이 적다는 것이 이미 수 차례 증명된 바 있고, 학부모 및 학계의 수요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잘 만든 기능성 게임 하나가 회사는 물론 게임계 전체를 부활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아타리 쇼크를 패미컴으로 극복한 닌텐도가 바로 이 방법을 썼다
5.1. 모바일 게임에서의 제2의 아타리 쇼크 가능성
특히 F2P, 가챠, DLC 등으로 게임 가치의 훼손을 우려하는 해외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양산되는 모바일 게임에 한국 게임 시장에 제2의 아타리 쇼크가 올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극히 작은 부분에서만 제2의 아타리 쇼크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이지, '''모바일 게임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은 여전히 같다.
우선 모바일 게임에서 갑(甲)이라고 할 수 있는 애플과 구글에서 그런 가능성이 막히는데, 이들은 인기와 판매량이 높은 게임을 우선적으로 노출시키고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게임을 추천하는 등 저질 게임을 자동적으로 배제시키고 소비자 개개인의 성향에 맞는 게임을 제안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직접 해보기 전까진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렵고 잘만든 게임과 저질 게임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 판매대 위에 올라와있던 아타리 때와는 다른 점이다. 사실 진입이 쉬운 모바일 시장에서 쓰레기 게임은 정말로 이루 셀 수도 없이 많다. 이리저리 검색해보면 스토어 내에 저질 게임은 넘쳐나지만 굳이 열심히 찾지 않으면 잘 노출되지 않으며 다운로드 횟수도 적다. 반면 상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일정 이상의 퀄리티는 갖춘 게임들이다. 확률형 콘텐츠에 대한 대책 역시 마련되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게임을 직권으로 내리는 식으로 대응하면 그만이다. 다만 이러한 시스템도 완벽한 것은 아닌지라 타 인기 게임을 고소만 간신히 피할 정도로 정도로 대놓고 표절한 게임들도 상위권에 노출되기도 하지만, 언급했듯이 쓰레기 수준으로 완벽하게 표절한 게임은 정말 그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많다. 필터링 돼서 노출되는 게 그나마 나은 것이다.
이에 더해서 컨슈머 패키지 시장이 아타리 쇼크의 교훈으로 질적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모바일 게임에선 오히려 그런 시장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사건이 터지지 않을 것이므로,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없어 질적으로 더욱 더 악화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오토 사냥류 RPG, 팡게임, 일러스트 수집 등으로 모바일 게임의 큰 흐름은 이미 고착화된 상태로, 오히려 아타리 쇼크 때보다 악질적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을 정도이다. (글로 하는 모바일 게임.txt)
그러나 악질적이라고 해도 이미 2020년대에 이르면 모바일 게임 시장도 상당한 경험이 쌓인 곳이며, 어떻게 최소한도의 질만 맞추면서 유저들에게서 돈을 뜯어낼지에 대해 오랜 기간의 연구가 되어 있다. 인기 모바일 게임들은 엄청난 과금유도와 부족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 PC, 콘솔 게임들에 비해 개발비용은 적으면서도 사람들의 돈 쓰고 싶어하는 욕망만은 절묘하게 자극하고 수익은 엄청나게 올리고 있어 오히려 기존 개발사들이 모바일 시장에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판이다.
물론 전체 게임 시장이 모바일 게임 일변도로 흘러간다면 전망이 좋을 수만은 없다. 눈 앞의 수익에 눈이 멀어 자칫 게임 시장의 갈라파고스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체적인 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며, 특정 문제 등으로 인해 전체 시장이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커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게임 시장을 휴대용 게임기가 주도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줄어들어 버리니 일본의 게임 제작 기술이 서구와 비교해서 한없이 뒤쳐졌었고, 한국에서는 WIPI 위주였던 모바일 게임 시장이 아이폰과 앵그리버드 시리즈 때문에 홍역을 치른 바 있었다.
한국 게임의 뒤쳐지는 기술력 문제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을 보면, 플랫폼 문제보다는 '''게임의 형태나 대상 소비자층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운로드 비율과 네트워크 연결을 중시하는 한국 게임의 특성상 높은 수준의 그래픽 기술 등을 집어넣었다가는 서버나 소비자의 하드웨어에 무리를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유저층은 게임 자체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닌,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용으로 여기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코어 게이머들에게 비판받는 자동전투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소비자들이 복잡한 전투 조작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소비자들이 복잡한 전투 조작을 원하지 않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터치 기반의 스마트폰 디바이스에서는 다양한 조작 체계를 구현 및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 모바일 게임 업계에 한정하면 다른 방향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조금씩 점쳐지고 있다. 2020년 기준 국내 모바일 게임 추세가 2000년대 즈음 유행한 PC IP를 발굴하여 모바일 플랫폼에 이식하는 것으로 넘어왔는데, 이 원인이 국내 게임 업계가 더이상 모바일 플랫폼에서 매력적인 신규 IP를 발굴하지 못하는 와중 점차적으로 중국산 양산형 모바일 게임에 국내 모바일 게임 점유율이 잠식당하여 국내 게임이 더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자 궁여지책으로 내놓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타리 쇼크마냥 국내 게임 시장이 무너지진 않겠지만 정작 국내 게임 업체는 국내에서 이익을 제대로 낼 수 없는 기형적 구조가 되는 것. 현재 이 것과 국내에서의 콘솔 시장 성장이 맞물려서 국내 게임 업계가 그동안 등한시한 콘솔 업계쪽에 조금씩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6. 기타
아타리 쇼크와 비슷하게 1977년에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붕괴된 사건이 있다. 미국에서는 아타리 쇼크인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을 빗대 Video game crash of 1977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퐁 클론의 범람이 원인이었다. 반도체 기술의 발전으로 1976년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 Pong-on-a-Chip이 개발되고 나서 너도 나도 퐁 클론을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77년 연말 상전부터 퐁 클론 판매 실적이 저조해지면서 이듬해인 1978년부터 대기업 RCA를 포함한 수많은 퐁 클론을 만들던 회사들이 게임기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마그나복스는 퐁에 대한 저작권이 있었기 때문에 1974년부터 법정을 통해 저작권 행세를 시작했다. 또한 전자 대기업인 페어차일드에서 채널 F라는 최초의 롬 카트리지 타입 게임기가 공개되었다. 아타리와 마그나복스는 비디오 핀볼과 오디세이 4000이라는 게임기로 퐁과 차별화되는 전용 게임기를 출시했고, 이어서 아타리 2600과 오디세이2로 카트리지 게임기를 만들어 내면서 버텨냈다. 1978년의 대형 히트 게임이었던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아타리가 타이토와 계약을 맺고 1980년 아타리 2600에 이식해 출시하면서, 침체된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28]
한편 아타리 쇼크 때문에 아케이드 게임장에도 사람이 빠지고 고수들만 남아 적자에 시달리자 난이도를 높여 회전률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기존에 오른손으로 조작하는것이 기본인 조이스틱의 위치를 좌측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썰이 존재한다. #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조이스틱, 듀얼쇼크, 경로의존성 참고.
7. 외부 링크
다음 링크들은 본 문서와 관련지어 읽을 만 한 내용이 많다.
- "아타리 쇼크 당시 CEO 레이 키사르의 인터뷰 내용"[29]
- 하워드 스콧 인터뷰
- IGN 83년 비디오 게임 대붕괴의 10가지 사실
- 코모도어 64 영어 위키 1982~1983년 마케팅 전쟁 항목
- 任天堂文脈でのアタリショックと史実のアタリショック
- ATARI GAME OVER 일본판 제작자 인터뷰
- アタリショックの真実(1)「それは暴落から始まった」
- アタリショックの原因は「海賊ソフト」ではない
- 「アタリショック」の嘘と誤解
- <디테일추적>모바일 게임업계를 날려버릴 쇼크가 오고 있다
- 비디오 게임 역사(영문 위키)
8. 관련 문서
[1] 영화쪽의 그 워너Warner Bros.가 맞다[2] 광고수주 뿐만 아니라 유저의 일반적인 플레이로 절대 알아낼수 없는 공략방식이나 비밀을 잡지사에만 알려줘 판매량을 보장해주는 식. 이런 뗄 수 없는 관계로 인해 일본산 게임에 유독 후한 평가를 내려주는 모습이 해외의 게이머들 사이에선 공정성 관련 논란이 되곤 한다.[3] 국내에선 서드파티제를 퍼스트파티와 계약하여 게임을 제작해주는 업체를 지칭하는것으로 오용되어 있지만, 용어의 시작은 게임 출시는 모두 닌텐도를 거친다는 사전검열제도였다.[4] 1928년 1월 2일(뉴욕 브루클린)~2017년 12월 10일(플로리다 비로비치)[5] 척 E. 치즈(Chuck E. Cheese)라는 프랜차이즈로, 피자를 주문한 후 조리 시간동안 오락실 게임을 하거나 애니매트로닉스 로봇들의 공연(2019년 이후 사라짐)을 관람하는 컨셉트의 사업모델을 갖추었다. 2020년 현재 시점에서도 현역이고 2017년 기준 전국 607곳의 매장을 두고 있다.(위키피디아 영문 문서/공식 사이트) 그리고 이걸 모티브로 만든 공포게임이 바로 FNaF 시리즈.[6] 그러나 1982년 연말 충격적인 실적 발표 직전, 주식을 5천 주를 매각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서 내부자 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이를 책임지고 사임했다.[7] 당시에 아타리의 <Adventure>(1979)를 만든 워렌 로비넷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면 자기 이름이 나오는 이스터 에그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로 속 어딘가에 열쇠가 숨어있는데, 작은 회색 점 모양의 열쇠를 찾으면 자신의 이름을 몰래 숨겨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비디오 게임에서의 첫 번째 이스터 에그'''로 알려져 있다. 이 에피소드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2011)에도 소개되어 있다.[8] 이에 대해 레이몬드 카사르는 훗날 비 게임 개발자 출신과 서부 사람들의 뉴욕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확대생산된 유언비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주간 경제 잡지 포춘에 오프 더 레코드로 '신경질쟁이 프리마돈나'라는 말한 것이 실렸는데 이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9] 간혹 한국 수입식품점이나 미군PX 유출품으로도 볼 수 있는, 퀘이커교도의 얼굴이 새겨진 그 오트밀 만드는 회사. 한때 게토레이도 여기서 생산하였다.[10] 벡터 그래픽을 기반으로 둔 게임기.[11] 최초의 게임 카트리지 교환식 게임기로서, 아타리 2600보다 1년 앞선 1976년에 발매했다.[12] 게임 매뉴얼의 뒷면의 주의문에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다. P.S. If the kids catch you and should ask, tell them Custer and the maiden are just dancing.(추신: 만약 아이가 당신이 이 게임을 하고있는 것을 볼 경우, 커스터와 여자가 춤을 추고 있다고 말하면 됩니다.)[13] '저 광고는 대학교를 가야겠죠' 등의 여러가지 변형된 버전이 있다.[14] 이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놓고 Texas Instruments 99/4A와의 경쟁도 원인이었다. 이는 그보다 10여년전인 1970년대 북미 전자 계산기 시장을 두고 코모도어에 대한 Texas Instruments의 가격 공세의 복수전이기도 했다.[15] 코모도어가 일으킨 치킨 게임은 비디오 게임기 시장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었다. Texas Instruments에서는 1983년 3분기에 막대한 적자 피해를 입고 가정용 컴퓨터 사업을 그만두었으며, 아타리도 아타리 400/800을 내놨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콜레코 역시 콜레코 아담이 파산의 주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심지어는 코모도어 64의 후속작인 코모도어 128과 그 이후 코모도어 가정용 컴퓨터 후속 모델의 판매에도 영향을 미쳐서 1985년 이후로 몇 번이나 생산 중단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내려간 모습. (빨간색 선) 참고 자료[17] 이런 일을 도소매상들이 흔쾌히 벌인 이유는 바로 이런 사용자들이 대부분 '''충성고객'''들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로 치면 하드코어 게이머, 고정 유저층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 이렇게나 관대하게 환불/반품 정책을 내세워도 어차피 이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신작, 새로운 게임기, 혹은 다른 종류라도 게임을 즐기는 고정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18] 이런 리베이트 제도는 보통 소비자가 꼼꼼하게 챙기지 않으면 혜택을 받아먹기 어렵도록 설계되어있다. 요즘 한국 TV홈쇼핑에서도 상품평 댓글 같은걸 달거나 버튼을 눌러 신청해야 적립금이나 사은품을 주도록 하게 바뀐 것도 비슷한 맥락.[19] 특히 1984년 2분기의 어마어마한 손실은 악성 재고를 특별 손실로 반영한 결과이다. 참고로 아타리의 악성 재고 앨라모고도 사막 매립은 1983년 9월 26일에 있었던 일로, 그 이후로도 약 9개월 동안 거의 팔리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고 이는 엄청난 양의 악성 재고가 되었을 것이다.[20] 1984년의 실적은 1985년 1월에 사업 철수한 콜레코의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 아담의 특별 손실 1억 1860만 달러가 반영된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레코비전은 2,140만 달러의 손실을 일으켰다. 이 결과는 1982년 4,490만 달러 수익을 본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다.[21] 그러나 필립스와의 퐁 특허 분쟁 관련, 1988년 연방 항소법원에서 660만 달러와 소송 비용을 필립스에 지급하라는 판결 때문에, 1991년 법원의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를 신청한 이력이 있다.[22] 이매직의 CEO, 브루스 데이비스는 파산한 해의 이듬해인 1986년까지 이매직을 정리한 이후 1987년 액티비전의 CEO가 되었다.[23] 아타리 쇼크가 터진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올라간 모습. 이후 게임시장은 한동안 일본이 점령한다. 참고 자료[24] 마블 코믹스의 현 CCO인 조 케사다가 이때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한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던 당시 안 팔린 게임팩 재고가 창고를 가득 채웠다고.[25] 남코가 패미컴을 리버스 엔지니어링 하여 자사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하고 닌텐도에 들고가 참여의 허가를 요구하게 되고 부랴부랴 서드파티 관련 조항을 만들게 된다.[26] 세가를 협박하는 데에는 성공하여 좋은 조건으로 라이선스 협약을 따낸다.[27] 게임 회사 뿐만 아니라 식품 회사나 유통 회사등. 말그대로 개나소나...[28]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아타리 2600 출시덕에 기존 판매량에서 무려 4배의 속도로 팔려나갔다.[29] E.T. 프로젝트에 반대했으며, 경영자로서 회사의 성장과 책임감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바란다.[30] 표절, 양산형 게임, 과금이란 요소로 인해 크게 비판받다가 강점인 온라인게임 시장마저 북미 작품들에게 내주고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는 일본이나 중국 게임들에게도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지는 않다. 다만 아타리 쇼크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전자는 시장마저 축소되고 사멸했다는 거지만 후자는 다른 대체제의 존재로 인해 빈 자리를 다른 것들이 메꿀 수 있다는 차이점이다. 예로 들어서 서든어택2가 대차게 망하고 아키에이지나 검은사막, 블레스 등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작품들이 과거 리니지나 전성기의 메이플, 던파만큼의 흥행을 못 거두고 있지만 LOL이나 오버워치 등 다른 게임들의 유무로 인해 시장 자체는 유지되는 형국이다. 물론 손 놓는 것은 아니닌지라 배그나 로스트아크 등 여러 흥행작들이 나오면서 중흥을 꾀하려는 모습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