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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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고대 참인과 도서부 동남아시아
기원전 1000년–기원후 200년 사이 베트남 중부 꽝빈성 사후인(Sa Huỳnh)에 참어를 사용하는 고대 참인의 사후인 문화가 존재하였다. 이는 역사 시대에 베트남 중부와 남부에서 참파 왕국(192–1832)으로 발달하였다. 참파 왕국은 4–6세기의 동옌쩌우 비문을 남기며,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를 쓰는 집단으로서는 최초로 자신들의 언어로 역사 시대로 진입하였다. 참인들은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과 활발히 무역하며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섬 등지에도 어느 정도 분포하여 있었는데, 실제로 이 지역의 오스트로아시아계 아슬리 제어(Aslian languages)에는 참어계의 외래어가 다수 존재한다.
현재의 베트남 지역에 존재하였던 참파 왕국은 중국화된 오스트로아시아계 집단 베트남인의 지속적인 남진으로 압박받게 된다. 《말레이 연대기》(Sejarah Melayu, Sulalatus Salatin, 1612)에는 1471년 베트남의 후 레 왕조가 참파의 수도 위자야(Vijaya)를 점령하고 약탈했을 때, 참파 왕 샤 파우 쿠바(Syah Pau Kubah)의 아들 샤 파우 링(Syah Pau Ling) 왕자가 위자야를 탈출해 수마트라 북부로 가서 아체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아체 지역의 지배층이 15세기 중반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참파 왕국과도 어느 정도의 해상 교류가 있었다는 정도는 분명하다.
한편 아체 술탄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수마트라 북서부 지역에는 파사이 술탄국(Kesultanan Pasai, 1267–1521)과 라무리 왕국(Kerajaan Lamuri, 15세기 초–1503)이 존재하였다. 이 두 왕국은 군도 전체를 통틀어 아주 이른 시기에 이슬람화된 왕국이었으며,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군도의 교통어이자 문어였던 말레이어가 공용어로 쓰였지만 참계 주민들에 의해 참어도 사용되었다. 아체 술탄국은 초기에 라무리 왕국의 영주가 지배하던 영지로 출발하여 라무리 전토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발전함으로써 성립하였다. 말레이어로 쓰인 아체의 기록 《히카얏 아체》(Hikayat Aceh, 17세기)에는 두 압사라스(말레이, 아체 지역의 명칭으로는 비다다리bidadari)가 라무리 왕국의 두 왕자와 각각 결혼하여 아체의 새 왕조를 열었다는 식의 신화적 서술이 보인다.
2. 역사
2.1. 초기
권위를 인정받는 아체 역사서 《제왕의 정원》(Bustan al-Salatin, 1636, 누룻딘 아르라니리Nuruddin al-Raniri[3] 저술)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술탄위를 칭하여 아체 술탄국을 연 아체의 영주는 알리 무가얏 샤(Ali Mughayat Syah, 1512–1515 사이 즉위[4] , 1530년 사망과 동시에 퇴위)이다. 알리 무가얏 샤는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아체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사실상의 창업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히카얏 아체》에 따르면 알리 무가얏 샤가 즉위하던 시점에 아체는 피디으(Pidië, Pedir) 지역의 술탄국에 종속된 상태였는데, 피디으의 술탄 마아립 샤(Ma'arif Syah)가 알리 무가얏 샤의 여자 형제와 결혼하려 하였으나 알리 무가얏 샤가 이를 거절하여 마아립 샤가 아체를 침략했다가 아체군에 패퇴한 시점부터 아체가 피디으에서 독립했다고 한다. 아체와 대립하던 와중 술탄 마아립은 1511년에 사망하고 아들 아맛(Ahmad)이 피디으의 술탄으로 즉위하여 아체와의 전쟁을 지속하였지만, 아맛은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으며 결국 1520년대 초 아체에 완전히 패퇴하고 피디으를 버리고 파사이(Pasai) 지역으로 도망갔다. 알리 무가얏 샤 치세에 아체는 원정을 통해 피디으뿐만 아니라 다야(Daya)를 비롯한 북서 해안 지방과 파사이를 비롯한 북동 해안 지방의 후추, 금 산지를 점령하였고, 아루 왕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아체의 수도 쿠타라자(Kutaraja, 오늘날의 반다아체)는 교역항으로서 번성하였다.
아체–피디으 전쟁은 아체와 말레이 지역의 연대기뿐 아니라 당대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인의 기록에 의해서도 교차 검증되고 있다. 토메 피르스(Tomé Pires)의 《동방지》(Suma Oriental, 1512–1515)에 따르면 당시 아체는 이미 라무리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1511년부터 말라카를 점거한 포르투갈 세력이 아체와 처음으로 직접 접촉한 것은 1519년, 포르투갈인 가스파르 다코스타(Gaspar da Costa)가 아체 지배 지역의 해안에 도착했을 때였다. 다코스타는 우호적이지 않은 아체 주민들에게 붙잡혔고, 인근 파사이 지역의 항구 관리가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 주어 탈출할 수 있었다. 1520년에 아체는 수마트라 북서 해안 다야 지방을 침공했는데, 이 지역에 건설되어 있던 포르투갈 성채는 아체에 빼앗겼다. 1521년, 조르즈 드브리투(Jorge de Brito)의 포르투갈 함대가 200명의 선원을 데리고 아체의 항구에 도착하였다. 처음에 알리 무가얏 샤는 선물과 함께 아체에 머무르던 포르투갈인을 사절로 보내며 환대하였는데, 포르투갈인 사절이 아체 수도에 황금이 가득한 성전이 있다고 꼬드겨 드브리투가 아체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는 별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800에서 1천 명에 이르는 군세와 6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거느린 아체군은 드브리투 세력을 완전히 분쇄했고 유럽산 화포를 노획하였으며, 드브리투 본인도 전투 와중에 사망하였다. 같은 해, 포르투갈 세력은 아체와 인접한 파사이를 점령하였고, 아체와 포르투갈 간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졌다. 아직 아체–피디으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피디으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지만 피디으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1524년, 아체는 포르투갈이 보호하고 있던 파사이를 점령했고 포르투갈 수비병이 축출되었다. 쫓겨난 파사이 술탄은 말라카로 도망갔으며, 아체의 원정으로 역시 축출된 피디으와 다야의 술탄들은 아루 지역으로 도망갔다. 최종적으로 피디으, 다야, 파사이 지역은 아체에 복속되었으나, 급성장한 아체 세력은 끊임없이 포르투갈 세력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으며 지역의 유력한 조호르 술탄국과도 말라카 해협 교역의 통제를 두고 차츰 불편한 관계가 된다.
알리 무가얏 샤는 1530년 8월에 죽었는데, 포르투갈인 주앙 드바후스(João de Barros, 1496–1570)의 《아시아사》(Décadas da Ásia)에 따르면 술탄은 다야 군주와 남매 관계였으며 다야의 멸망으로 앙심을 품고 있던 부인 싯 후르(Sitt Hur)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뒤이어 즉위한 싯 후르 소생의 왕자 술탄 살라후딘(Salahuddin, 재위 1530–1537 또는 1539, 1548년 사망)은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지속하여, 1537년 9월 3천 명의 병력을 보내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침공했지만 점령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술탄 살라후딘의 치세에 술탄의 모후는 막후에서 궁정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신료들이 알리 무가얏 샤와 싯 후르의 다른 아들인 알라우딘 알카하르(Alauddin al-Kahar)를 구심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쿠데타가 성공하여 술탄과 싯 후르 태후는 유폐되고 알라우딘 알카하르는 새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Alauddin Ri'ayat Syah, 재위 1537 또는 1539–1571년 9월 28일)로 즉위하였다. 알라우딘 리아얏 샤는 선대 부왕의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수마트라 내륙의 바탁인에 대한 원정을 벌였으며, 수마트라 서해안으로 아체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동해안에서는 아루 왕국을 공격하여 1539년 아루의 왕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1540년 전후 조호르 술탄국이 아체의 급성장을 견제하여 군대를 보내 아루를 도왔으므로 아체군은 아루 지역에서 돌아간다. 이후 아루는 1564년까지 조호르의 보호를 받으며 아체–조호르 간 대립의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아체와 조호르는 16세기 중반 내내 대립하다가, 1564년 아체가 조호르를 기습하여 수도 조호르를 점령, 약탈하고 조호르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 2세를 사살한 후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가 조호르의 공주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음으로써 아체의 우위가 확립된다. 조호르가 이렇게 아체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아루는 곧 아체에 복속된다.
알라우딘 리아얏 샤는 당대의 떠오르는 이슬람 세력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561–1562년 사이 아체는 오스만의 쉴레이만 대제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지역의 포르투갈인에 대항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오스만 제국 역시 포르투갈과 각지에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오스만은 이에 호의적으로 반응하여 1564년 오스만 총병대가 아체를 돕기 위해 파견된다. 1566년에 즉위한 오스만의 다음 술탄 셀림 2세 역시 아체 원조에 열의를 보여 15척의 갤리선과 2척의 바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아체로 파견할 채비를 하였으나, 마침 예멘 지역에서 자이드파 이맘 알무타하르(Al-Mutahhar, 1503–1572)의 반란이 발발하여 이 함대는 예멘으로 파견되고, 함대 대신 2척의 수송선으로 군수 물자와 군사 전문가들이 아체로 파견되어 알라우딘 리아얏 샤를 도왔다. 직후인 1568년 셀림 황제는 다시 함대를 꾸려 아체로 보냈다. 쿠르토을루 흐즈르 레이스(Kurtoğlu Hızır Reis)가 이끄는 22척의 오스만 함대는 인도양을 통과해 1569년 아체에 당도하였고, 아체는 오스만 함대를 환대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포르투갈에 아체는 이 시점(1569)부터 오스만의 영토라고 선언하여 아체를 공격하는 것은 오스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알렸고, 일시적으로 포르투갈 함대는 아체 근해에서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아체는 이때부터 18세기 말까지 오스만의 보호국으로 남았으며, 멸망하는 1903년까지 오스만의 동맹으로서 교류를 지속하였다.
아체는 1547년과 1568년 두 번에 걸쳐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공격하였는데, 특히 1568년 1월의 공격에는 400명의 오스만 파견 병력을 포함한 15,000명의 대군세와 200대의 청동 대포가 동원되었다. 결국 아체의 말라카 함락은 두 차례 모두 실패하였지만, 1568년의 공격에서는 포르투갈이 자력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조호르 술탄국과 크다 술탄국의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이들의 원군이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체군이 퇴각하였다. 한편, 1570년 아체 근해에서 아체와 포르투갈 함대 간 해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아체군이 패배를 겪었다.
1575년, 아체는 조호르의 속령이었던 페락 지역을 공격하여 복속시킴으로써 말레이 반도에 본격적인 교두보를 얻게 된다. 아루 지역은 1590년대에 조호르가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함에 따라 종주국을 다시 아체에서 조호르로 바꾸었는데, 당대의 아체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 사잇 알무카말(Alauddin Ri'ayat Syah Sayyid al-Mukammal, 재위 1589–1604)은 이에 아루로 아체 함대를 파견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했다. 술탄은 재차 함대를 보내어 마침내 아루를 재복속시켰지만, 원정 와중 사위인 만수르(후대 술탄 이스칸다르 무다의 아버지)가 전사하게 된다. 술탄은 징벌을 위해 아체 함대를 조호르로 돌려 조호르를 포위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1599년 6월에는 코르넬리스 더하우트만(Cornelis de Houtman)이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아체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더하우트만과 아체 사이에 우호적으로 교섭이 진행되던 와중 아체와 일시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포르투갈 세력이 아체를 자극하여 네덜란드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아체의 공격에 패배하고 코르넬리스 더하우트만 본인은 전사했으며, 그의 동생 프레데릭 더하우트만(Frederik de Houtman)은 아체 포로가 되었다. 이때 붙잡힌 네덜란드인 포로들은 다음 해 판카르던(van Caerden)의 네덜란드 함대가 도착하고 다시 아체와 교섭하여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판카르던 쪽에서 아체를 의심하여 아체의 항구에 정박한 포르투갈을 포함한 타국 선박을 무차별 공격하고 도주하였다. 이렇듯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1601년 포르투갈과의 짧은 평화 무드가 깨지자 아체는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해 네덜란드 등의 유럽 세력과 친교를 맺을 방법을 모색했고, 1601년 8월에 아체를 방문한 네덜란드 함대는 따뜻한 환대를 받고 아체 해안에 교역소를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아체 사절도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판나사우와 접견하고 우호를 다진 후 1604년 12월 네덜란드 배로 아체로 돌아왔다. 160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도 아체를 방문하였고 아체와 우호 관계를 구축하였으며, 네덜란드–영국 연합 함대가 포르투갈의 대형 갤리온을 나포하자 아체 술탄은 환호하였다[5] .
알라우딘 리아얏 샤 사잇 알무카말은 1600년대 초부터 둘째 왕자와 공동 통치하고 있었는데, 둘째 왕자가 1604년에 노쇠한 술탄을 폐위하고 스스로 술탄위에 올라 알리 리아얏 샤 3세(Ali Ri'ayat Syah III, 재위 1604–1607)가 되었다. 새 술탄이 유능한 조카 프르카사 알람(Perkasa Alam)과 반목하여 트집을 잡고 그를 투옥하려 하자, 프르카사 알람은 피디으로 피신해 술탄과 사이가 나쁜 피디으 영주 후사인(Husain)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프르카사 알람과 후사인은 피디으군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프르카사 알람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이 수도 쿠타라자로 진격하였으나, 반란군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프르카사 알람은 술탄에게 붙잡혀 투옥된다. 1606년 6월, 네덜란드와 아체 간에 구축되고 있던 친선 관계에 위협을 느끼던 포르투갈 세력이 마르팅 아폰수 드카스트루(Martim Afonso de Castro)가 지휘하는 대함대(갤리온 14척, 갤리 4척 및 수송선단)를 보내 아체를 공격하였다. 드카스트루 함대가 쿠타라자 인근에 상륙하고 아체의 요새를 점령하자, 투옥되어 있던 프르카사 알람이 자신을 풀어주면 이교도들에게 맞서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술탄에게 간청하였다. 술탄은 수락하였고, 전선으로 나간 프르카사 알람이 포르투갈군을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네덜란드–조호르 연합군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포르투갈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공으로 프르카사 알람의 명성이 일거에 드높아지게 되었고, 1607년 4월 4일 알리 리아얏 샤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프르카사 알람은 술탄 이스칸다르 무다(Iskandar Muda)로서 술탄위를 계승하였다.
2.2. 전성기
17세기 초, 아체는 새로운 정복군주 이스칸다르 무다(Iskandar Muda, 재위 1607–1636)[6] 와 그 사위 이스칸다르 사니[7] (Iskandar Thani, 재위 1636–1641)의 시대에 전 세기에 축적된 무역, 군사 자원을 바탕으로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스칸다르 무다는 전례 없는 팽창 정책을 펼쳐 아체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는 1613년 아루 왕국을 마침내 멸망시키고 아루–들리 지역을 합병하였으며, 서수마트라에서는 니아스섬(Nias, 1624–1625)을 비롯한 여러 외곽 도서를 점령하고 파가루융 왕국의 영향권이던 파당 인근[8] 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와 더불어 이스칸다르 무다는 말레이 반도 전역으로 원정을 펼쳐 조호르 술탄국을 압박한다. 1613년 조호르(도시)는 다시 아체군에 점령되었다. 1614년 아체군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또 한 번 조호르의 위신은 실추되었으며, 조호르는 파항, 팔렘방, 잠비, 시악, 인드라기리 등지의 군주들과 연합하여 대 아체 공동전선을 형성함으로써 간신히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칸다르 무다는 승승장구하였는데, 1614년 빈탄섬 근해의 해전에서 포르투갈 함대를 물리쳤고, 1617년 파항을 점령하고 파항의 전 술탄 아맛 샤 2세(Ahmad Syah II, 재위 1590–1592)를 아체로 압송하였으며, 1619년에는 크다를 점령하였고 1620년에는 지배의 공고화를 위해 이미 복속되었던 페락에 다시 원정을 나가 점령하였다. 1623년, 조호르(도시)는 다시 한 번 아체의 점령 및 약탈을 겪었다. 1627년부터 아체의 함대는 말라카를 봉쇄하며 포르투갈의 무역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1629년, 이스칸다르 무다는 아체의 오랜 숙원이던 말라카 점령을 위해 1만 9천에 달하는 병력으로 말라카 공격에 나섰고 1568년처럼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결국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고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말라카를 점령함으로써 말라카 해협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손에 넣으려던 아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아체의 팽창은 이로써 종료된다. 이스칸다르 무다의 후기 원정은 파항 등 점령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주가 된다.
이스칸다르 무다의 치세에 아체는 수마트라 최초의 이슬람 술탄국인 파사이 술탄국의 계승국을 자처하며 이슬람 연구와 교육을 후원하여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았다. 아체는 뛰어난 이슬람 학자를 끌어모았고, 여러 말레이어, 아체어 서적이 쓰였으며 아체의 선교사는 수마트라 곳곳으로 포교를 나갔다. 아체에서는 16세기의 함자 판수리(Hamzah Fansuri)[9] 이후 수피 전통이 발달하였는데 이스칸다르 무다는 이들의 활동 역시 후원하였다. 이스칸다르 무다 사후, 이스칸다르 무다의 사위이자 파항 술탄 아맛 샤 2세의 아들인 이스칸다르 사니가 술탄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전대의 이스칸다르 무다처럼 탁월한 군사적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내정에 집중하여 술탄국의 내실을 다졌으며, 문화적으로도 이슬람 후원 정책을 지속하였다. 이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앞서 언급한 《제왕의 정원》을 저술한 구자라트 출신의 누룻딘 아르라니리(Nuruddin ibn Ali al-Raniri)가 있다. 아체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 향신료의 원산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서 군도에서 16–17세기를 거쳐 경제적으로도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2.3. 술타나 시대
이스칸다르 사니 사후 술타나 사피아투딘 샤(Sultana Taj ul-Alam Safiatuddin Syah, 재위 1641–1675), 술타나 나키아투딘 샤(Sultana Nurul Alam Naqiatuddin Syah, 재위 1675–1678)[10][11] , 술타나 자키아투딘 샤(Sultana Inayat Zakiatuddin Syah, 재위 1678–1688)[12] , 술타나 자이나투딘 카말랏 샤(Sultana Zainatuddin Kamalat Syah, 재위 1688–1699, 1700년 사망)[13] 까지 14–17대 4대에 걸쳐 아체에서는 전 이슬람권을 통틀어 드문 여성 술탄, 술타나의 치세가 반세기 넘게 이어지게 된다. 사피아투딘 샤는 1641년까지 생존한 아들이 없었던[14] 이스칸다르 무다의 딸[15] 이자 전대 술탄 이스칸다르 사니의 부인으로서, 비록 당대에도 이슬람에 반한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이스칸다르 무다의 직계 혈통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계승에 성공하였다. 이 시대는 자이나투딘 카말랏 샤가 아라비아에서 온 남성 후계자, 하심가의 18대 술탄 바드룰 알람(Badrul Alam, Badr ul-Alam Syarif Hasyim Jamaluddin, 재위 1699–1702)[16] 에게 술탄위를 물려주고, 아체의 술탄조가 하심 술탄조로 교체됨으로써 종료된다.
술타나 시대에는 아체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화되고 지방 영주들의 권력이 강해졌으며, 더불어 새로이 군도에서 세력을 키워 포르투갈을 밀어낸(1641년 조호르와 연합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함락시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이 새로운 아체의 경쟁자로 등장하였다. 17세기 전반에 아체에 눌려 지내던 조호르 세력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파항은 아체에서 독립하고 조호르 편으로 돌아섰다. 아체는 주석의 주요 산지인 페락을 계속해서 영유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 역시 페락의 주석을 목적으로 아체를 압박하였으며, 1650년대에는 함대를 동원해 아체 해안을 봉쇄하기도 했다. 결국 아체는 네덜란드의 기세에 눌려 16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페락에서 생산된 주석의 절반을 동인도 회사에 넘기고, 아체 지역의 항구에서 동인도 회사에 교역 독점권을 내주며[17] 수마트라 서부 파당에 동인도 회사 교역소를 개설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수마트라에서 네덜란드는 아체의 세력권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는데, 서부 해안의 미낭카바우–말레이 지역에서 지방 영주와 교섭하여 일부에게 아체에서 돌아서서 네덜란드의 보호를 받게 하였으며, 북동부에서는 1669년 아체의 보호국인 들리 술탄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이 지역을 아체에서 독립시켰다.
전통적으로 아체와 말레이 역사가들은 17세기 후반의 술타나 시대를 문란과 쇠락의 시대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으며, 여기에는 여성혐오적 편견이 얼마간 개입되어 있다. 술타나 시대의 아체가 군사적으로 네덜란드와 조호르에 의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정복 원정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술타나 시대는 내치의 측면에서는 17세기 전반 아체 전성기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가끔 네덜란드와 대립하며 무역이 방해받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후추 무역에서 아체의 입지는 절대적이었고, 문화적으로도 술타나들은 이스칸다르 무다–이스칸다르 사니 시대의 이슬람 후원 정책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켰다[18] . 17세기 후반의 아체에서도 싱킬(Singkil) 지방의 압두라웁(Abdurrauf) 등의 저술가가 활동하며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초대 술타나인 사피아투딘 샤는 6개 언어(아체어, 말레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구사가 가능할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하며, 당대의 많은 아체인과 유럽인은 술타나의 인품과 위엄을 칭송하였다. 아체의 선교사는 여전히 동남아시아 각지로 파견되었는데, 특히 이들은 17세기 수마트라 서부 미낭카바우 지역의 이슬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68년에는 시암 지역에도 아체 선교사가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4. 18세기
술탄 자말룰 알람(Jamalul Alam, Jamal ul-Alam Badr ul-Munir, 재위 1703–1726) 시대 아체에서는 17세기 전반기의 군사적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술탄은 당시 이미 아체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던 파당을 비롯한 수마트라 서해안으로 원정하려고 계획하였고, 또 조호르와 협력하여 네덜란드 지배 하의 말라카를 공격하려고 계획하기도 했다. 이 두 계획 모두 아체의 군사적 능력이 전 세기만 못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 자말룰 알람은 아체 본토의 방비를 강화하였고 마드라스(오늘날의 첸나이)와 븡쿨루에 진출해 있던 영국 세력과의 교역을 증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술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과의 교역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체보다 리아우 제도 지역이 입지상 이주하여 교역 상품 생산을 담당하던 화인 노동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북동수마트라 바투바라(Batubara) 지역의 바탁인들도 아체 지배에 반발해 독립하였고 술탄의 진압군을 물리쳤다.
아체 본토는 세 개의 지방(sagi)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술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지방의 대영주(panglima) 무다 스티아(Muda Setia)를 투옥하려고 시도하다가 오히려 무다 스티아의 반격을 받고 패주하여 충성스러운 부기스인 장군 마하라자 렐라(Maharaja Lela)에게 세력 거점을 맡기고 1726년 11월에 피디으 지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이후 몇 달간 두 명의 단명한 술탄이 즉위하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다가, 아체의 세 대영주가 1727년 1월까지 굳건히 자말룰 알람의 명을 받들며 요새를 방비하고 있던 마하라자 렐라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마하라자 렐라는 자말룰 알람에게 이를 알리며 의향을 물었고, 실권을 상실한 자말룰 알람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마하라자 렐라가 새로운 아체의 술탄 알라우딘 아맛 샤(Alauddin Ahmad Syah, 재위 1727–1735)로 즉위하여 아체의 부기스 술탄조를 열게 된다. 이후 아체에서는 (1815–1819년의 내전기를 예외로 하면) 더 이상 술탄조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고, 부기스 술탄조가 아체 술탄국이 멸망하는 1903년까지 세습하게 된다.
18세기에는 이처럼 전반적으로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남술라웨시계의 호전적인 해양 민족 부기스의 세력이 강해졌는데, 이 무렵 부기스인은 군도 전체에서 강력한 무력집단을 이루고 상선의 호위를 맡거나 지역 분쟁에 개입하는 등 용병 일을 도맡아 하였고, 일부는 해적이 되기도 하였다. 17세기까지 아체와 경쟁하던 조호르 술탄국(조호르–리아우 술탄국)에서도 18세기에 부기스 세력이 정치에 깊게 개입하여 부기스인 부왕이 국가의 제2인자로서 정치에서 실세 역할을 하였다.
1735년 알라우딘 아맛 샤가 사망하자, 아직까지 살아 있던 전대 술탄 자말룰 알람은 수도 쿠타라자로 귀환한다. 자말룰 알람은 여전히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사이이드(سيد)로서 존경받고 있었으므로, 알라우딘 아맛 샤의 장자 알라우딘 조한(Alauddin Johan)과 자말룰 알람을 지지하는 세력이 갈려 술탄위 계승을 놓고 대립하게 된다. 알라우딘 조한은 원래 사이이드를 해하고 싶지 않아 살육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으나, 알라우딘 조한의 막내 동생인 포춧 무하맛(Pocut Muhammad) 왕자가 알라우딘 조한 편에서 내전을 일으켜 캄퐁자와(Kampong Jawa)의 전투에서 자말룰 알람 세력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이 과정은 아체 고전 문학 《히카얏 포춧 무하맛》(Hikayat Pocut Muhammad)으로 아체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승리한 알라우딘 조한은 술탄 알라우딘 조한 샤(Alauddin Johan Syah, 재위 1735–1760)로 즉위하였으며, 캄퐁자와 전투에서 패한 자말룰 알람은 여장(女裝)을 하고 도주하여 캄퐁칸당(Kampong Kandang)에 머무르다 사후 이곳에 묻힌다.
알라우딘 조한 치세에는 이 외에도 이스칸다르 무다의 후손인 대영주가 2만의 군세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쿠타라자로 진군하다 간신히 진압되는 등 아직 부기스 술탄조의 권력이 공고하지 않았으나, 18세기를 지나며 부기스 술탄조는 차츰 확실한 정당성과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한편 알라우딘 조한은 18세기 중반에 아체에 내항한 프랑스의 편을 들어 7년 전쟁에 개입하여, 아체 함대와 연합한 프랑스의 에스탱 백작 샤를 엑토르(Charles Henri Hector, comte d'Estaing, 1729–1794)가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1760년 2월 수마트라 서부의 나탈(Natal)과 타파눌리(Tapanuli) 항구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하고 이 항구들을 접수하기도 했다.
2.5. 19세기
2.5.1. 전반
18세기와 19세기 초반을 거치며 아체 술탄국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서부에서는 더 이상 세력권을 유지하지 못하였으나 전통적인 강역인 수마트라 북서부에서는 여전히 여러 유럽 세력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19세기 전반에도 아체 지역은 세계 후추 생산의 절반을 담당하며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계승 분쟁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어 다소 혼란한 상태였다. 알라우딘 조한 샤의 손자인 알라우딘 무하맛 샤(Alauddin Muhammad Syah, 재위 1781–1795)가 1795년 2월에 9살밖에 안 된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아들은 알라우딘 자우하르 울알람 샤(Alauddin Jauhar ul-Alam Syah, 재위 1795–1815, 1819–1823)로 즉위하였다. 알라우딘 무하맛 샤의 제1왕비였던 메라 디아완(Merah di Awan)은 새 술탄의 모후로서 자신의 남자 형제 라자 우다나 렐라(Raja Udahna Lela)를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섭정 기간 동안 어린 술탄은 말라카 해협을 오가는 영국 함선에서 선원 보조로 일하며 영어를 배우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때 술탄은 유럽 문물에 익숙해지고 유럽 관습을 익혔는데, 이는 나중에 정적들에 의해 반이슬람 혐의의 근거로 쓰였다.
술탄은 16세가 되던 1802년부터 섭정을 종료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친정을 시작하려 했는데, 섭정이던 술탄의 삼촌 우다나 렐라가 섭정 특권의 회수에 반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초반에는 우다나 렐라가 승승장구하여 술탄이 피디으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술탄과 섭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태후 메라 디아완이 결국 술탄을 지지하게 되었고 술탄 자신도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술탄 측으로 전세가 점차 기울었다. 1805년, 패퇴한 반란자 우다나 렐라가 사살되고 내전이 일단락된다. 그러나 술탄이 증가해 가는 서해안 후추 교역을 통제하는 데 충분한 행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일부 아체 상인 및 귀족은 술탄을 불신하게 되었고, 술탄의 권위는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1808년, 과거 우다나 렐라를 지지했던 대상인 르바이 다파(Lebai Dappah)가 자신의 세력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1811년 영국 세력이 네덜란드령 자바를 접수하자, 영국 관료와 상인 들은 아체 항구에 대한 자유 통행권을 얻기 원하였으나, 술탄은 무역에 대한 아체의 통제권을 강화하려 노력하였으므로 알력이 발생하였다. 아체 국내의 일부 상인과 귀족 역시 무능한 술탄에게 등을 돌리고 이 문제에서 영국 편을 들었다. 영국을 뒷배로 하는 부유한 페낭 상인 사잇 후사인(Sayyid Husain)이 아체 하심 술탄조 자말룰 알람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나서며 자우하르 울알람 샤에 대한 반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814년 10월, 아체 본토 세 지방의 대영주는 이슬람에 반하는 행실 등의 명목상 구실로 자우하르 울알람 샤를 폐위하는 데 합의하고, 1815년 4월 사잇 후사인을 새 술탄으로 선출하였다. 사잇 후사인은 이를 고사하고 대신 그의 아들 사잇 압둘라(Sayyid Abdullah)에게 술탄위를 넘겨, 사잇 압둘라가 아체의 새 술탄 샤립 사이풀 알람 샤(Syarif Saiful Alam Syah, 재위 1815–1819)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자우하르 울알람 샤를 지지하는 세력은 잔존하고 있었으며, 폐위된 술탄은 일단 지지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여 두 차례에 걸친 새 술탄의 암살 시도를 막아내고, 파사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새 술탄과 내전을 벌였다. 처음에 영국은 사이풀 알람 샤를 지지하였으나, 네덜란드에 자바를 반환한 1816년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은 다시 말레이 반도 및 븡쿨루 지역의 기존 세력권으로 돌아가서 아체와 친선 관계를 구축하려고 하였고, 국내외의 협잡으로 술탄위를 찬탈한 새 술탄은 아체와의 관계 안정화를 위한 선결 조건인 내전 종식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영국은 결국 1819년 4월 22일 자우하르 울알람 샤를 정당한 술탄으로 인정하고 그와 조약을 맺었으며, 핵심 지지 세력을 잃어버린 찬탈자 샤립 사이풀 알람 샤는 페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복위한 자우하르 울알람 샤는 여전히 인기 없는 술탄이었다. 세 대영주는 그대로 술탄과 반목하고 있었고, 술탄은 복위한 후로는 수도 쿠타라자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여 쿠타라자 외곽에 요새를 짓고 거주하였다. 1823년 자우하르 울알람 샤가 사망한 직후, 다시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자우하르 울알람 샤의 제1왕비 푸트리 시하리불란(Puteri Siharibulan) 소생이자 자우하르 울알람 샤가 계승자로 지명한 왕자 압둘 무하맛(Abdul Muhammad)은 고작 여섯 살이었으므로, 22세인 후궁의 아들 틍쿠 다웃(Tengku Da'ud)이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던 것이다. 아직 살아 있던 태후 메라 디아완 역시 틍쿠 다웃을 지지하였고, 결국 틍쿠 다웃이 새 술탄 알라우딘 무하맛 다웃 샤 1세(Alauddin Muhammad Da'ud Syah I, 재위 1823–1838)로 즉위하게 되었다. 푸트리 시하리불란은 이에 페낭의 영국 세력에 압둘 무하맛의 지지와 개입을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고려해 아체 내정에 개입하기를 꺼렸고, 결국 무하맛 다웃 샤 1세의 동생 투안쿠 이브라힘(Tuanku Ibrahim, 알라우딘 무하맛 다웃 샤 1세의 치세에 '라자 무다'(Raja Muda)라는 작위를 갖고 아체의 2인자로 영향력을 행사함)이 양편 사이에서 중재를 벌여 내전 발발 직전에서 위기가 진정되었다. 새 술탄과 투안쿠 이브라힘은 정치력을 발휘하여 아버지가 끝내 얻지 못했던 대영주와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조금씩 획득해 나갔다.
국내 정치는 안정되어 갔던 반면, 국제 정치에서 1824년의 영국–네덜란드 조약 이후 영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아체에 개입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세력이 새로이 아체를 위협하였다. 네덜란드는 1829년과 1834년 두 차례에 걸쳐 수마트라 북서부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아체령 바루스(Barus) 항구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물러났고, 1829년의 바루스 공격 후 아체도 역습을 가해 네덜란드의 타파눌리 항구를 기습하고 물러났다. 아체의 지방 영주 일부는 수마트라 서부 파가루융 술탄국의 세력권에서 진행 중이었던 파드리 전쟁(Perang Padri, 1803–1837)에 반네덜란드 울라마 편으로 참전하여 네덜란드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는데, 특히 1831년 네덜란드의 아이으르방이스(Aierbangis)와 나탈(Natal) 지역에 대한 미낭카바우–아체 연합 세력의 대대적인 공격은 결국 격퇴되기는 하였으나 네덜란드군을 고전하게 하였다.
무하맛 다웃 샤 1세는 내정의 안정에 힘입어 후추 무역에서 아체의 입지를 다지고 아체의 경제를 진흥하였다. 1838년 그가 사망했을 때 유일한 왕자가 새 술탄 알라우딘 술라이만 알리 이스칸다르 샤(Alauddin Sulaiman Ali Iskandar Syah, 재위 1838–1857)로 즉위하였으나, 새 술탄은 아직 어렸고, 전대 술탄의 동생으로 막강한 정치적 권위를 보유한 투안쿠 이브라힘이 사실상 아체의 지배자로서 통치하였다. 1854년, 술탄은 투안쿠 이브라힘에게 정치적 실권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고, 내전이 발발하였다. 세 명 중 두 명의 대영주는 술탄을 지지하였지만, 술탄은 결국 수도 쿠타라자도 점령하지 못한 채로 1857년에 죽었다. 경쟁자가 사망하자 투안쿠 이브라힘은 새 술탄 알라우딘 이브라힘 만수르 샤(Sultan Alauddin Ibrahim Mansur Syah, 재위 1857–1870, 이하 '만수르 샤'로 줄임)로 즉위하였다.
2.5.2. 후반
19세기 중반, 만수르 샤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계승 분쟁을 안정시키고, 탄탄한 아체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였으며 수마트라 북동부에서 다시금 팽창 정책을 펼쳐 1853–1854년에는 들리 술탄국(1854)을 비롯해 지역의 랑캇 술탄국, 아사한 술탄국, 스르당 술탄국 및 바탁계 바투바라 지역을 산하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네덜란드의 위협은 계속되어, 네덜란드는 1839년에 마침내 아체의 바루스 항구를 점령하였는데 타푸스(Tapus)와 싱킬의 아체군은 반격을 위해 바루스를 공격했지만 패배하였다. 아체의 공격은 네덜란드의 주목을 끌어 곧 네덜란드군이 타푸스와 싱킬을 침공해 점령하였으나, 싱킬에서 아체는 네덜란드군 지휘관 빅토르 미힐스(Andreas Victor Michiels, 1797–1849) 장군을 고전하게 하였다. 1848년 아체는 네덜란드 지배 하의 싱킬을 공격하였지만 패배하고 물러났다.
점증하는 네덜란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만수르 샤는 1849년 후추 무역상 무하맛 가우스[19] (Muhammad Ghauth)를 메카로 순례시키며 더불어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와 오스만 술탄 압뒬메지트 1세에게 친서를 전하게 한다. 이에 압뒬메지트 1세는 아체의 보호를 선언하고, 만수르 샤를 공식적인 오스만의 봉신으로 임명한다. 마침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에 대항한 오스만의 선전은 아체와 말레이 지역의 무슬림 지도자들을 오스만을 향한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한편 네덜란드는 아체의 유럽을 향한 외교 노력을 감지하고, 1855년 군함을 직접 아체로 파견하여 공식 외교 관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섭 과정에서 만수르 샤는 무례한 네덜란드인 사절이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여겼고, 험악한 분위기에서 교섭은 결렬되었다.
1857년, 얀 판스비턴(Jan van Swieten) 장군이 이끄는 네덜란드 사절단이 아체를 방문하여 지난한 교섭 끝에 가까스로 네덜란드–아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체는 싱가포르의 영국 세력에 사절을 파견하여 네덜란드를 물리치기 위한 도움을 구하려고 했으며, 이는 곧 네덜란드에 발각되었다. 결국 1857년의 조약은 아체와 네덜란드의 대립을 거의 종식시키지 못했고,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까지 아체와 네덜란드는 수마트라 북동부와 북서부 각지의 영유권을 놓고 계속해서 적대적인 관계로 남았다. 1862년에는 들리가 네덜란드 편으로 돌아섰고 1865년에는 네덜란드의 원정으로 수마트라 북동부의 아체 산하 아사한과 스르당이 아체에서 네덜란드로 종주국을 교체하는 등 아체는 점차 수세에 몰려 갔다. 그럼에도 1860년대 내내 아체 본국과 네덜란드 간에는 팽팽한 긴장 속에 한동안 본격적인 전쟁 없는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만수르 샤가 1870년에 사망하자, 마뭇 샤 2세(Alauddin Mahmud Syah II, 재위 1870–1874)가 아체의 술탄위를 계승하였다.
1871년 체결된 새로운 영국–네덜란드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수마트라 전역에 대한 영국의 간섭을 확실히 배제하였다. 한동안 네덜란드는 마뭇 샤 2세를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마뭇 샤 2세는 오히려 오스만 제국에 하빕 압두라크만(Habib Abdurrachman)을 파견해 원조를 구하고, 싱가포르의 미국, 이탈리아 영사에게도 도움을 요청한다. 오스만 술탄 압뒬라지즈(Abdülaziz, 재위 1861–1876)는 아체를 동정하였으나 오스만 본국 역시 러시아의 압박으로 위태로운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이러한 아체의 외교적 노력은 네덜란드에도 알려졌고, 마침내 인내심을 상실한 네덜란드가 1873년 아체를 침공하여 아체 전쟁이 발발한다. 1873년 3월에 시작된 네덜란드의 제1차 아체 침공에서는 아체의 분전으로 네덜란드군이 패배해 퇴각하였지만, 동년 11월에 네덜란드가 잘 준비된 13,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재차 침공해 오자 아체는 수도 쿠타라자(반다아체)를 네덜란드에 내주고 내륙으로 세력 거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전으로 전환한 아체의 저항은 성공적이어서 네덜란드는 큰 피해만 입고 아체 세력을 소탕하지 못했고, 전쟁은 장기화되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이슬람의 권위가 군도에서도 특히 각별했던 아체 지역에서 영적 권위를 갖춘 울라마 집단은 이교도 네덜란드인에 대항하는 '성전'을 강조하여 아체인의 항전 의지를 고무하였으며, 춧 냑(냐) 딘(Cut Nyak Dhien, Tjoet Nja' Dhien, 1848–1908)[20] 과 춧 냑(냐) 므티아(Cut Nyak Meutia, Tjoet Nja' Meuthia, 1870–1910)[21] 를 비롯한 여성들 역시 게릴라 전사로서 활발히 전쟁에 참여하였다[22] . 이에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아체의 토착 군사 귀족 계층 훌루발랑(Hulubalang)[23] 을 포섭하여 울라마의 권위에 맞서는 전략을 택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1903년 1월에 아체 술탄 무하맛 다웃 샤 2세(Sultan Alauddin Muhammad Da'ud Syah II, 재위 1875–1903, 1939년 사망)가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술탄국이 공식적으로 해산되고 1904년까지 주요 아체 항쟁 지도자들이 항복하거나 체포, 사살됨으로써 간신히 네덜란드의 승리로 아체 전쟁이 종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상당수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싸웠는데, 가령 전술한 춧 냑 딘은 1905년까지 항쟁하다 체포되어 수므당으로 유배되었으며, 춧 냑 므티아는 1910년에 체포 과정에서 른총(rencong) 단검으로 저항하여 사살되었다. 결국 아체 지역의 반네덜란드 항쟁은 1942년의 일본군 점령 시점까지 종료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는 강한 반네덜란드 정서로 구 네덜란드 식민 세력이 귀환하지 못하고[24] 아체는 그대로 인도네시아 독립파 세력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남았다.
3. 참고 문헌
- 서지원. 2017. "이슬람, 모성, 참여: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일리자 시장의 여성정치인 정체성 활용 전략 사례 연구," 동아연구 34 (2): 301-347.
- Munoz, Paul Michel. 2006.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Singapore: Editions Didier Millet.
- Ricklefs, Merle C. 1994.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 1300.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 Shaffer, Lynda Norene. 1996. Maritime Southeast Asia to 1500. London: ME Sharpe Armonk.
- Stuart-Fox, Martin. 2003. A Short History of China and Southeast Asia: Tribute, Trade, and Influence. London: Allen and Unwin.
[1] 아체어[2] 말레이어[3]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를 모어로 사용한 인물이 아니므로 아랍어 외래어 표기법 시안을 준용함. 이다파(연결형) 구조인 '누룻딘' 부분은 동화된 정관사를 분리하여 적으면 '누르 앗딘'으로도 적을 수 있음.[4] 이보다 이전에 즉위하였을 수 있음. 기록들이 엇갈리고 있다.[5] 여담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여러 유럽 세력과 아체가 조우 및 전투를 벌일 때 전공을 세운 아체 측 장군 가운데 여성인 크말라하야티(Keumalahayati, 또는 말라하야티Malahayati)도 있었다. 아체 제독(아체어: lakseumana, 인도네시아어: laksamana)의 딸로 태어나 군사 교육을 받은 크말라하야티는 전사자의 부인으로 구성된 과부 부대 '이농 발레'(Inong Balèe)를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크말라하야티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어서 오늘날 그녀의 생애는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크말라하야티는 1606년 아래 문단에 나오는 마르팅 아폰수 드카스트루의 아체 침공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6] 'muda'는 말레이어와 아체어(양 언어에서 동형 동음)로 '젊다'라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히카얏 아체》는 '이스칸다르 줄카르나인'(Iskandar Zulkarnain)이라는 이름으로 말레이어권에 알려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스칸다르 무다의 선조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상상적인 것일 뿐 특별한 근거는 없다.[7] 아체어나 말레이어에는 권설음이나 기식 구별이 없으므로 'th'는 아랍어식 표기로 보임.[8] 오늘날 도시로서의 파당 자체는 네덜란드인이 1669년에 건설한 무역항을 기원으로 하지만, 16세기 및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근 해안 지대에서 파가루융과 아체가 경합하고 있었다.[9] 전통 시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사상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이븐 아라비 이래 수피 사상의 강한 영향 하에서 범신론적 신비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누룻딘 아르라니리 등의 순니 정통파는 이단 교설을 설파한다고 비판하였다.[10] 'q'는 여기서 아랍어식 로마자 전사 표기에 쓰이고 있으나, 본 문서는 인도네시아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므로 되도록이면 마인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하기 위하여 이를 마인어식 'k'로 읽어 한글로 옮겼다.[11] 전대의 사피아투딘 샤는 자식이나 형제자매 없이 사망하였고, 나키아투딘 샤는 아체 왕족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자세한 계보는 다소 불확실하다. 국립 말레이시아 대학교(Universiti Kebangsaan Malaysia)에 소장된 한 필사본에 따르면, 나키아투딘 샤는 알라우딘 리아얏 샤의 고손녀(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딸)라고 한다.[12] 전대 술타나 나키아투딘 샤의 딸이다.[13] 전대 술타나들과의 관계는 다소 불분명하다. 국립 말레이시아 대학교(Universiti Kebangsaan Malaysia)에 소장된 한 필사본에 따르면, 자이나투딘 카말랏 샤는 16세기 후반에 짧은 재위 후 퇴위당하고 죽은 아체의 6대 술탄 스리 알람(Sri Alam, 재위 1579)의 고손녀(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딸)라고 한다.[14] 이스칸다르 사니의 계승 이전, 이스칸다르 무다는 아들 메라 푸폭(Merah Pupok) 왕자를 죽였다.[15] 어머니는 파항의 공주 카말리아(Kamaliah)로서 이스칸다르 무다의 정실이었다.[16] 자이나투딘 카말랏 샤의 공식적인 남편은 왕실 근위대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바드룰 알람이 자이나투딘 카말랏 샤의 비공식적인 남편(새 남편, 혹은 여러 남편 가운데 하나)이었다는 설도 있다.[17] 그러나 교역 독점은 명목상의 것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8] 다만 사피아투딘 샤는 누룻딘 아르라니리의 후원에는 남편만큼의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1644년에 아체를 떠나게 된다.[19] 아체어나 말레이어에는 권설음이나 기식 구별이 없으므로 'th'는 아랍어식 표기로 보임.[20] 대네덜란드 게릴라전을 이끌던 지휘관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항복과 배신으로 유명한 남편 트쿠 우마르(Teukoe Oemar)가 네덜란드군의 기습으로 1899년 사망하자, 그의 세력을 넘겨받아 게릴라전을 지휘함.[21] 남편 트쿠 칙 투농(Teuku Cik Tunong)은 1899–1903년간 네덜란드군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을 수행한 게릴라 지휘관이자 아체 지방관이었으며, 춧 냑 므티아는 남편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5년 트쿠 칙 투농이 네덜란드에 붙잡혀 총살당하자 춧 냑 므티아는 트쿠 칙 투농의 기존 세력을 이끄는 새 지휘관 팡 낭그루(Pang Nanggroe)와 재혼하여 항쟁을 지속하였으며, 1910년 9월 26일 팡 낭그루가 전사하자 그 자신이 팡 낭그루의 잔존 세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춧 냑 므티아를 따르는 게릴라들은 고작 45명뿐이었고, 며칠 후 춧 냑 므티아도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네덜란드 병력에 총살되었다.[22] (서지원 2015, 305-306)[23] 보통 한국어로는 아체어를 옮긴 것으로 '울레발랑'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지만, 아체뿐 아니라 인근 말레이 지역에도 같은 군사 귀족 계층이 있었으므로 보다 보편적인 말레이어를 사용하여 '훌루발랑'이라고 표기한다.[24] 1945년 10월부터 11월 초까지 소규모 네덜란드군이 반다아체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민심이 흉흉하자 그대로 메단으로 철수했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