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겸
1. 개요
吳允謙ㆍ1559년 ~ 1636년
조선의 문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황희, 맹사성, 류성룡, 이항복과 같이 조선의 5대 명재상 중 한명으로 '''꼽힌다..카더라.''' 당대를 전후해도 오리 이원익, 대동법의 김육 같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이들이 있다. 다만 5대 재상이고 말것 없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에 비해서는 네임드 명재상이라 보면 되겠다.[1]
대략 세대를 따지면 정철, 류성룡, 이원익(1547년) 세대보다는 조금 뒤고 이항복(1556년), 이덕형(1561년), 정경세, 이수광 (1563년) 세대에 속하였다. '''서인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덕행을 쌓아 수문(首門)이 되었다.
2. 생애
아버지는 쇄미록을 기록한 오희문이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이다. 오윤겸은 다른 인재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나진 않았다. 20대에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36세의 늦은 나이에 전시 문과에 급제했는데, 그것도 갑과 을과도 아닌 병과였다. 그 전에는 능참봉이나 송강 정철의 종사관 같은 미관 말직에 종사했다. 그가 등과하는 1595년은 임진왜란 중이었고, 그와 동세대인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미 대사헌을 거쳐 참판, 판서를 다는 당상관이었다.
사실 오윤겸은 과거 시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과거 시험을 보기는 했는데 과거 시험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시하지 않고(...), 다 써 놓은 답안지에 다른 사람이 실수로(?) 먹물을 쏟아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평강 현감으로 있을 때 우연히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야사에 따르면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사윗감을 구해달라고 해서 오윤겸을 추천했더니, 이산해는 사위 이덕형(李德馨)과 같은 준재를 고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오윤겸과 같은 답답한 인간을 소개해주냐고 절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대인(待人) · 접물(接物)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보수적인 성격이지만 유화스럽게 상황을 이끌어나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는 또한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가장 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오윤겸의 벼슬 운은 전쟁이 지나고나서도 순탄치 않았다. 전후에도 북인 공세기는 지속되었고 이때 그는 성혼을 변호하다가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으며[2] , 평안도 안주 목사, 경상도 동래 부사를 전전해야했다. 오윤겸이 돌아온 것은 광해군 때(1610년)였지만, 당상관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묘 배향 문제로 물러난다. 조식의 문하로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하던 정인홍과 부딪쳤던 것이다.[3] 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1613년 계축 옥사로 인목대비의 지친들이 대거 잡혀들어가자 스스로 외직을 자처했다.
이렇게 지방관의 세월이 길다보니 이때의 업적이 더 많은데,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고 세금을 줄여주거나 인사를 하는대 있어 청렴하게 수행하였다는 평을 받는 청백리였다.
이후 정3품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이 해 1617년(광해군 10년) '''조선 통신사'''로 다녀와 포로 송환에 기여했는데, 이때 '''풍랑으로 죽을 뻔 했고''', 북인의 득세가 계속되자 다시 물러났다가 1622년(광해군 14년)에 다시 명나라 희종 (명 4대 암군의 마지막인 천계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왔는데, 역시 해로로 갔다가 '''풍랑으로 또 죽을 뻔 했다.''' 특징은 서인이지만 계속 북인 정권과 인목 대비 폐비에 반대하면서도 궂은 일은 도맡아 했다는 것.
이렇게 광해군 조정에서 오래 일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공신이 아닌데도[4]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영의정이 된 이원익과 비슷한 케이스. 지조가 있었는지 선조 말 1601년, 구사맹[5] (具思孟)이 그의 아들 구성[6] (具宬)을 대사성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평소에 대소관료들에게 벼슬할 만한 사람들을 추천 받아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니 인조조차도 자기가 쓰고자 하는 측근(잡류)들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제서야 외직과 사신을 전전하던 60대의 오윤겸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판서를 역임한건 물론이고, 이괄의 난에서 왕을 공주까지 호송한 이후로 우의정에 오르더니, 정묘호란에는 자전과 중전을 강화도로 호송했으며 기어이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가 추진하는 생부 정원군(定遠君)의 원종추숭(元宗追崇)을 반대했다. 사실 이건 이귀 빼곤 거의 모든 서인들이 (김류까지!) 반대했던거긴 하지만 여하간 할 소리는 하면서도 좌천 당하진 않았다.
오윤겸은 서인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했기에 그래서 오윤겸은 남인 같은 서인이요, 이수광(李睟光)은 서인 같은 남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오윤겸과 이수광은 폐모론에 반대하며 외직을 떠돌은 점, 그런 소수파였음에도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점[7] , 이수광 역시 광해군 시절 명의 사신으로 마테오 리치와 자주 접했다는 점, 인조 반정 이후 대사간(이수광) / 대사헌(이수광 - 오윤겸 - 이수광 역임) 콤비를 이뤘다는 점,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같이 인조를 호송했다는 점 등 여러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이수광이 정묘호란 직후(1628년) 이조 판서의 자리에서 사망해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다. [8]
졸기에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고 평한다. 이후 좌의정을 역임하다가 병자호란 직전에 죽었다. 향년 77세.
3. 여담
오윤겸의 아버지와 조카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아버지는 조선 중기,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중요한 일기 쇄미록 (보물 1096호)을 남긴 오희문이고, 조카는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1609년 ~ 1637년)이다. 병조 좌랑, 부교리를 지내고 청나라에 끌려가 스물 여덟 나이에 (아버지가 죽은 다음해) 죽었다. 오달제는 이 공로로 훗날이긴 하지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겸하여 평생 벼슬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 오희문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국내 대하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고 일본 대하 드라마에서는 조선 통신사 종사관, 정사로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2001년 NHK 대하 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산다이(접시꽃 도쿠가와 삼대) 34화 편에 쇄환사 겸 회답사 정사로서 나오며 40화에서는 국서(國書)에서 예조 참판 이름으로서 등장한다. [9]
후손은 해주 오씨 추탄공파이며 관련 인물로는 영조 때 친 영조파 소론의 영수 오명항, 현대에 와서는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이 있다.
[1] 굳이 따진다면 황희, 맹사성, 류성룡은 기본으로 들어가고 거기에 나머지 두 명을 채우는 형식이다. 이항복은 5번 재상을 역임한 점과 전쟁 때의 명재상으로서 손꼽히는 편이고, 이원익과 오윤겸은 성품이 원만하면서도 곧고 청렴하며 무당파였던 점, 김육은 대동법을 세운 점이 높이 평가된다. 정조 시대 채제공을 넣는 경우도 있으나 이건 남인 한정. 선조 초기의 재상인 이준경을 넣기도 한다. 그냥 애초에 다 좋은 분들이니 4대 5대 따질것 없이 좋은 점을 본받으면 될 일이다.[2] 영의정이었던 이항복도 이 일 때문에 물러났다.[3] 정인홍이 좀 무리를 한것은 사실이다. 차라리 조식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이언적까지 몰아 공격하다가 명분을 많이 잃게 되었다.[4] 공서파가 아닌 청서파였다는 이야기다. 그 이전에 광해군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고.[5] 인조의 외조부[6] 인조의 외삼촌[7] 지봉유설은 이때의 작품이다.[8] 맏아들 이성구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이 된걸 보면 아마 이수광이 장수했다면 정승이 되고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성구 역시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항복의 송덕비를 북청 땅에 세워주어 북인의 미움을 사 유배된 전력이 있다.[9] 실제로는 드라마에 나온 국서에 표시된 예조 참판 오윤겸은 실제로는 작성 당시에 그는 예조 판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