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건
1. 천안시 독립운동가, 이종건
이종건은 1906년 5월 14일 충청남도 목천군 수신면(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3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 은사인 이승규와 안재홍의 주선으로 중국 망명을 감행했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뒤 산시성 태원에 있는 성성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와 신학문을 익혔다. 그 후 1931년 9월 베이징에서 한족동맹회에 가입하여 한인 동포들과 교류하고 일제 밀정을 색출해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1931년 10월 일제 밀정이었던 신모(申某)를 처단했고, 이로 인해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상하이로 도주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종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교민 자치기구인 대한교민단에 들어갔다. 그는 대한교민단 의견대원을 맡아서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밀정 및 친일파를 색출해 처단하는 임무를 겸임했다. 또한 1932년 1월에 조직된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31년 12월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출신 의원에 선임되었다가 1933년 3월 사임했다.
이종건은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한 뒤 한국독립당 난징 지부에서 이광제, 박찬익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1934년 2월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했다. 그는 한인특별반에서 지청천, 이범석, 오광선, 조경한, 윤경천, 한헌 등의 교관들에게 민족 의식과 군사 교육을 이수받은 뒤 1935년 4월에 김승곤, 김일곤, 신화균, 박재혁 등 60여 명과 함께 졸업했다.
이종건은 졸업 후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활동했고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그곳에 가입했다. 이후 그는 지청천이 이끄는 민족혁명당 군사부에 편입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고, 민족혁명당의 군사부 요원으로서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중국 군경의 협조를 받으며 일본군에 대한 정탐 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일제 시설 파괴 공작 등을 전개했다.
1937년 12월, 이종건 등 80여 명의 청년들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에 입교했고 1938년 초 성자분교가 호북성 강릉현[1] 으로 옮겨진 뒤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5월 24일에 졸업했다. 이후 그를 비롯한 80여 명의 졸업생들은 교관 김홍일의 인솔 아래 조선민족혁명당 본부가 있는 한커우[2] 에 도착했다. 민족혁명당은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는데, 정작 이종건이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활동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을 맡았고, 조선의용대가 나중에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을 때 지대본부 요원으로 명기된 기록은 남아있다.
1942년 5월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잔류 병력이 광복군이 합류했을 때, 이종건 역시 합류했고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광복군 제1지대 본부요원 겸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한동안 중국에 남아있다가 1946년 봄 조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0년 6월 19일(국가보훈처 자료) 또는 1962년 1월 4일(국립현충원 자료)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종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통영군 독립운동가, 이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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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10월 17일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염호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만주로 망명해 유하현 삼원보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1919년 남만주에서 결성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 재만동포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8월 대한통의부에 참여, 산업위원과 실업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3~24년에는 군무국장(軍務局長)과 선전부장(宣傳部長)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7월 12일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꾀하기 위해 개최된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 김동삼과 함께 대한통의부 대표로 참여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 학우회(學友會),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의성단(義成團), 변륜자치회(卞倫自治會), 고본계(固本契), 대한독립군단 등 10개 단체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했다.
1925년 1월, 이종건은 정의부 중앙집행위원과 생계위원장에 선임된 동시에 무력사령부 부사령이 되었으며, 동년 12월 23일에 선전위원, 선전위원장, 산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1928년 5월 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 외 18개 단체 대표 39명이 모여 민족유일당촉성 문제를 협의할 때 정의부 대표로서 참여했지만, 회의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통합 단체에 가입하고 모든 단체를 해산하자는 '전민족유일당조직 촉성회파'와 기존 단체를 유지하고 이를 통합하여 새 조직을 만들자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로 분열되었다.
이때 김종건은 지청천, 김원식, 김상덕 등과 함께 전민족유일당조직 총성회파를 지지했고, 1928년 8월에 개최된 정의부 제5회정기중앙의회에서 전민족유일당협의회 방향으로 의견을 정리한 정의부의 결정에 반발해 정의부를 탈퇴하고 재만유일당책진회(在滿唯一黨策進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 1929년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보안부위원장(保安部委員長)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17일 신빈현[5] 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일본 영사관 순사대에게 급습받았고, 1월 19일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당 군사령 김관웅(金寬雄) 등 간부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32년 11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출소 후에는 고향에서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냈다.
해방 후 1946년 2월 1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에서 유동열, 김원봉, 이규채(李圭彩), 김희남(金熙南), 김산, 최윤동 등과 함께 국방위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했으며,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입헌기념식에 참석했고, 1947년 6월 24일에 서재필 귀국 환영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좌우합작을 주창하던 민주주의 독립전선의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1947년 4월 11일, 이종건은 민주주의독립전선 동료들과 함께 미군정 최고 책임자인 하지 중장과 회담을 벌였다. 그러나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낙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고 1958년 5월 2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종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민선4기 홍성군수 이종건
- 이종건(정치인)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