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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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2.1. 빚이 늘어났던 시기
2.2. 알바왕 시기
2.2.1. 최저 수준의 생활
2.3. 빚 청산 이후
2.4. 사망
3. 사상
3.1. 의지 & 절제
3.2. 신용 & 신뢰, 시간 엄수
3.3. 선의 & 고객 감동
4. 방송 출연
5. 관련 도서
6. 신빙성?


1. 소개


7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10년 만에 3억 5천만 원에 달하는 빚을 갚은 인물로, 이후 해당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도 출판하고 방송에도 나와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2. 생애


1960년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부터 옷 가게, 식당, 과일 가게 등 자영업을 해 왔다. 1995년 쯤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의 시계 도매업 사장이 싼 값에 사업을 정리한다는 소문을 듣고 ‘헐값에 내놓는다니 이참에 사업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사업을 인수했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 망청 쓰며 생활했다.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 했으니 잘 될 턱이 있겠어요? 처음엔 사장 소리도 듣고 잘 될 때는 하루 순 수익이 100만 원이 넘을 때도 있었어요.

빚이 늘어나기 전의 그는 '반백수 반건달'이었다고 자평했다. 술, 도박을 좋아했고 돈을 빌리면 염치없이 안 갚기도 했다. 아들이 학생일 시절부터 그는 '아버지와 한 잔 하자'며 소주를 권하기도 했다.

2.1. 빚이 늘어났던 시기


하지만 1997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IMF 외환위기가 닥쳐 오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경기가 안 좋아져서 거래처가 하나 둘씩 끊겼고 어음이 부도나는 경우가 많았다. 매출도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시계방은 문을 닫게 되었다. [1] 빌려준 돈도 많았는데 상당수 떼이고 말았다.
그는 한 방에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곳 저 곳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지만, 큰 돈을 노리고 투자했던 돈들은 도리어 빚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이 씨는 2000년 초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처갓집 땅도 다 팔아야 했고 형제들 돈도 가져다 써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남은 빚이 3억 5천만 원이었다.
아내는 갑상선암으로 투병중이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아들은 대학을 가고 싶어 재수생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충격 받아 가출했다[2]. 그는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했다. 아내를 차에 태우고 부산에서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로, 또 부안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빚쟁이들이 찾아올까 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 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 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 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 어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구속을 당하기 때문에, 그 돈과 아파트를 판 돈을 합쳐 어음을 회수했다.
채권자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빚에 쫓기면서도 그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돈 못 받아서 복장이 터지는데 전화까지 안 받으면 채권자들이 얼마나 숨이 넘어가겠냐는 것이다.
그 후 실의에 빠져 1년 가까이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2.2. 알바왕 시기


마음을 다잡고, , 담배, 노름을 끊었다.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지만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를 고용해줄 정상적인 직장이 없다. 거기다가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성이라 노무직, 일용직도 구하기 힘들다.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경 주민등록을 회복하기 전에는 아르바이트 외에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운전면허스타렉스 승합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직장이 구해지지 않자 목욕탕 청소 아르바이트부터 도전했다. 하지만 집에서 목욕탕 청소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40평도 넘는 대중목욕탕 청소를 하려니 시간과 힘이 엄청나게 들 뿐 잘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집의 목욕탕을 연습 삼아 청소해보려 하자, 부인이 "그렇게 막 하면 돼? 순서를 정해야지!" 하고 말했다. 집 청소를 연습해보면서 목욕탕 청소 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벽에 신문 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을 벌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다시 음주와 도박에 빠졌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가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다시 깨달았다. 그 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기장판이 작동하지 않자 방이 매우 추웠다. 3일 뒤, 그는 니퍼를 가져와 '''스스로 송곳니 2개를 뽑았다'''. 이 정도로 혹독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과거의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피가 철철 나고 눈물이 흘러서 한참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나약해질 때마다 뽑은 송곳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생전 그가 잘 웃지 않았던 이유였다. 매일 아침 이를 닦을 때 혀로 빈자리를 훑으며 의지를 다시금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는 7개로 늘어났다. 목욕탕 청소, 떡 배달, 신문 배달, 학원 차량 운영, 폐지 줍기 등 근면과 성실, 시간 엄수를 무기 삼아 하루 24시간 중 2시간 잠을 자고 22시간 노동을 했다.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 ~ 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 ~ 80만 원, 떡 배달 150만 ~ 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세후 450만 원 정도 생겼고, 스타렉스의 유류비가 100만 원 정도 들어서 남은 돈은 350만 원이다.
빚 갚기 직전에는 550만 원이었다. 사우나 청소 60만 원, 도시락 60만원, 학원차 운전 60만 원, 신문 속지 작업 30만 원, xxx 신문 발송 80만 원, 신문 배달 3곳 합쳐서 100만 원, 전단지 배포 30만 원, 떡 배달 70만 원, 신문 판촉 수당 30만 원.
당시 그의 일과
06:30 - 09:30
떡 배달 준비 및 3군데 마트에 떡 배송.
09:30 - 11:30
떡 도시락 포장 작업
11:30 - 12:30
한국GM 군산공장[3] 떡 배달
12:30 - 13:00
빈 시간
13:00 - 20:30
태권도 학원 차량 운전
20:30 - 23:30
떡 포장 작업 및 한국GM 군산공장 야간 배달
23:30 - 24:00
빈 시간.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잠을 잔다.
24:00 - 02:00
목욕탕 청소
02:00 - 03:30
배달할 신문에 광고지를 삽입하는 작업.
03:30 - 05:00
신문 배달
05:00 - 06:00
신문 배달이 끝나면 집에 들러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06:00 - 06:30
빈 시간. 떡 공장으로 이동.
(식사와 취침은 중간 중간에 빈 시간을 이용한다)
방송에 출연하던 날은 4개의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실제로는 요일에 따라 아르바이트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1주일을 통틀어서 7개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할 때는 10개도 했다.
차량을 사용한 아르바이트가 많기 때문에 하루 400km 정도를 이동했다. 전주에서 군산까지 떡배달을 할 때 졸음운전을 했다가는 큰일나므로 차 위에 올라가서 몸을 흔들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방법으로 잠을 깨웠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운전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2009년GM대우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그 외에 폐지 수집으로 부수입도 올렸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았다. 월 2톤 가량 주워 월 20만 원 정도를 받았다.
결국 2008년 10월 29일 마침내 10년에 걸쳐 3억 5천만 원의 빚을 모두 갚았다. 그는 마지막 빚을 송금하면서 오열했다. 빚을 다 갚았다는 기쁨도 있었겠지만, 빚을 만든 것에 대한 후회, 10년 간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일했던 역경, 사업을 하던 시절 생각 등으로 온갖 감정이 몰아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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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남은 빚 100만 원을 송금하면서 총 3억 5천만 원을 모두 갚는 이종룡
깜깜한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다가 넘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을 붙잡고 주저 앉아 울기도 했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돈 한 푼 못 받은 채 잘린 적도 부지기수. 추운 겨울 젖은 신발을 신고 배달을 할 때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처음 2년 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게 3년 정도였다. 그러다 2004년 쯤부터 떡집 공장 주인 아주머니가 후에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아침밥을 떡으로 주기 시작했다. 그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식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밥먹는 것과 아르바이트 시간 엄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그는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달리면서 컵라면을 먹은 결과 제시간에 도착한 적도 있다.
컴퓨터를 거의 모르다 보니 모든 아르바이트 구인 정보는 생활 정보지에서 얻었다.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언제든지 일감이 떨어져서 잘릴 수 있기 때문에 생활 정보지를 보면서 조건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 장소는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떡 공장, 학원, 목욕탕 모두 그의 승합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2.2.1. 최저 수준의 생활


5살 연상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10년 동안 버는 족족 빚을 갚고 생활비에는 한 푼도 보태지 못했는데도 10년 넘게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씨는 자신을 구해준 건 가족이라고 말했다. 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재수를 해 가며 서울로 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으로 수포로 돌아가 고졸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자리를 잡은 아들은 가끔 와 아버지가 지내던 거처의 냉장고도 채워주고 다달이 용돈도 부쳐주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가끔 아들에게 대학 못 보낸 미안함을 내비치면, 요즘 대학교 대학원을 나오고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며 자기는 제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너무 미안해 마시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한다고 했다.
아내는 사업이 망한 후 아침밥을 줄 때 반찬 없이 밥만 주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을 보고 차츰 반찬을 늘려주었다. 계란말이가 나온 것을 보고 아내가 자신을 어느 정도 용서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내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 결혼했기 때문에 미안함이 더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했듯 빚 때문에 처갓집 땅마저 팔아야 했다.
이 씨는 10년 동안 3억 5천만 원이란 빚에 시달렸던 이유도 1억 원의 빚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 값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빚을 갚지 않고 버티다가 빚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집을 줄이고 사업 규모를 줄이고 먹고 자는 것을 줄여서라도 빚은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단순히 생활비를 아끼고 지출을 줄이는 것으로는 거액의 빚을 갚을 수 없다. 차를 가지고 다니니 기름 값이 나갔고 일을 하자니 밥도 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씨는 술을 끊어야 했다. 한 달 용돈은 '''2만 원만 썼다'''. 옷과 신발은 주워다 입었다. 길에서 주운 전기장판을 썼는데 합선되어서 불이라도 날 까봐 노심초사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취미 생활은 신문이나 글을 읽는 것이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좋은생각>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두 식구는 10년 간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20만 원짜리 월세방에 살았다. 집이 좁아 가재 도구 사이에 끼여 불편하게 자야 했다. 빚을 다 갚고 나서 돈을 모아서 4천만 원 짜리 전세방으로 이사를 갔다.

2.3. 빚 청산 이후


그 후에도 "내 몸이 편안하면 다시 옛날에 방탕했던 모습이 나올까 봐 일을 포기를 못하겠어요"라면서 7개의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며 연 5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2009년에는 '''3억 5천만 원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2.4. 사망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당연히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몸이 남아 날 수가 없었고 결국 2012년에 대장암으로 쓰러진 뒤 2014년 2월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몸을 돌보지 않는 극단적인 노동도 결국 몸에 해롭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애도해 주었다.
사실 첫째로 지적되는 원인은 그가 2008년 경까지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두번째로 그는 장기간에 걸쳐 식사를 불규칙하게 했다. <3억 5000만 원의 전쟁>에 따르면 그는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처음 몇 년은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기 위해 저녁밥도 굶었다. 포만감에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루 스케줄에는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다. 늘 굶거나 급한 대로 밥을 물에 말아서 대충 먹었다. 식사를 하느라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굶더라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장에서 공짜로 주는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며 빈속을 채우거나, 심지어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동하는 동안 뛰면서 컵라면을 먹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대장암은 적은 수면과 관계가 아주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쪽이 원인일 가능성이 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고인의 아들은 언론이나 출판사에 자세한 언급을 거부했다.

3. 사상



3.1. 의지 & 절제


  1. 망했다고 생각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 그는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열심히 일했다.
>“학벌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이 인생에 아무리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의지만큼 강력한 것은 없어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술 주정뱅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술주정뱅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요. 너무 뻔하고 흔한 얘기 같죠?(웃음) 근데 제가 살아가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는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실제로 뭘 하면 그게 더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한 번 해 볼까?'라는 식으로 안 되면 금방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1. 빚이 있으면 철저히 절제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가다 위주의 고된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하루 22시간 일하고, 잠을 하루 2시간 자고 용돈을 한달 2만원 쓰는 등 인간을 벗어난 수준의 절제를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빚쟁이로 전락한 후에도 술, 담배, 노름을 끊는 데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는 나쁜 습관을 문신에 비유했다. 한 번 생기면 파내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3.2. 신용 & 신뢰, 시간 엄수


  1. #3 신용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빚쟁이가 되는 과정에서 은행, 주위 사람에게서 신용을 잃은 그는 신용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1. 신용과 신뢰는 시간 엄수에서 나온다.
그는 초기의 구직 과정에서 고생을 하면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일을 맡을 수 없고 지각을 자주 하는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신용과 신뢰를 얻기 위해 시간 엄수를 했다.
  1. 하찮은 아르바이트라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한다.
학력도 고졸이고 기술도 거의 없었지만 꾸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4]
>“신문 배달이며 목욕탕이며 떡 공장이며, 일하는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더라고요. 대부분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못해요. ‘아르바이트’ 하면 필요할 때 잠시 들렀다가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은 그만둬야지’ 했어요. 힘들 때마다 쉽게 그만둘 생각을 품었던 건 그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였죠.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는 직업이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아르바이트는 쉽게 그만둬도 직업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떡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 직원들이 일이 힘들다거나 보수가 적다고 쉽게 그만 둘 때 타이르기도 했어."
>"돈이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 할 일이 있고 또 열심히 살 수 있는데 그저 돈만 바라보고 일을 하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거야."
그가 돈이 안 오르는 자리에 일부러 오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어차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만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잘리거나 해서 아르바이트 포트폴리오 (...) 상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을 때는 그만뒀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힘들다고 그만두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둬야 할 때는 최소 15일 전에 알려서 고용주가 사람을 새로 뽑기 좋게 배려했다.

3.3. 선의 & 고객 감동


그는 신문 판촉을 하려고 아파트를 돌아다니던 중 문 앞에서 울고 있는 어린이를 발견했다. 부모님은 나가고 없는데 아이는 열쇠가 없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 하고 있고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루 22시간 일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 하는 자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아이를 달랬다. 그리고 매달 몇백 만 원의 빚을 갚고 있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밥값을 쥐어주었다. 아이를 달랜 다음 보험 회사에 다닌다는 아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신문 판촉을 하러 온 이종룡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열쇠가 없어 울고 있어 밥값을 주었으나 부모님께서 빨리 오셔서 아이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며칠 후 아이 부모가 이종룡에게 차를 한 잔 사드리겠다며 집으로 초청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 부모는 이종룡의 빚 갚는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며칠 후 아이 부모가 이종룡의 이름을 대고 여러 군데에서 신문 판촉을 대신해주었다.

4. 방송 출연





방송에 출연한 이유를 묻자, 사람들에게 '''"이겨내지 못할 절망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5. 관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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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간 중간마다 이종룡씨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실려 있어, 그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각 장의 마지막에는 이종룡씨의 간단한 조언이 기술되어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실생활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은 프리랜서 작가가 함께 저술했다.

6. 신빙성?


그와 관련되어서 방송에 나온 내용이나 으로 나온 내용은 전문가의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객관적인 신뢰성이 매우 부족하다. 관련된 학술 논문에 피인용된 사례도 전혀 없다. 흥미 위주의 방송에서 "~카더라"식으로 방송되었을 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얘기에 가깝다. 따라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방송에서는 휴식보다는 노동에 집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방송에서도 은연중에 휴식이 많이 언급되었다. 눈치빠른 사람들은 해당 방송을 찾아보면 일부 아르바이트들이 요일차 시간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해당 시간이 휴식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서울병원 주은연 수면 클리닉 교수 (신경과)는 수면장애에 대한 인터뷰에서 “일주일 동안 하루 4, 5시간씩만 자면 체내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인 것과 같은 심각한 심신 장애 현상을 보일 수 있다”며 “학습 능률과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소 수면 시간, 즉 "사람이 하루에 최소한 어느 정도 자야 건강을 유지하는지"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4시간 이하로 잠자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의사학자의 주장은 5~6시간이다. 빡빡한 학교 일정으로 잠을 적게 자는 집단인 고3 수험생의 경우에도 평균 6시간 정도의 수면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잠을 하루 1~2시간 정도만 자고 8년 가까이 생활한다는 게 의학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상업적인 이유로 과장,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3일 정도의 단기간은 가능할지 몰라도, 5일 이상 연속적으로 을 거의 못 잔 상태라면, 신체의 면역 체계가 약화되어 감기 등의 질병에 걸리기 매우 쉬운 상태가 된다. 특히 과로를 하면 감기 등에 걸려서 강제로 을 쉬게 하면서 더 이상 과로하지 말도록 경고하면서 재충전하는 것이 신체의 매커니즘이다.
미국 국립수면재단(NSF: National Sleep Foundation)에서도 최소 6시간~10시간의 수면을 권장한다. # 신체 활동이 적은 사무직 종사자나, 학생 신분이라면 6시간 정도로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육체 노동 강도가 심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2~3일 정도도 아니고, 수 개월, 수 년 이상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6시간 이하를 자면서 버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육체 노동 종사자라면 최소 7~8시간 이상은 자야,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법적인 일(도박, 성매매, 마약, 밀수, 사채 등)을 제외하고 합법적인 일로 가정해서, 제대로 된 직업으로 사회에서 인정되지 않는 아르바이트 또는 임시직 수준의 일자리 중에서 단기간에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건설 현장 노동에서 타일 운반 인부 등을 한다고 가정해도 한 달에 200~300만 원 이상 벌기 힘들다. 단순 육체 노동 강도로는 거의 끝판왕 격인 택배 물품 상하차 아르바이트도 1개월 만근한다 가정해도 300만 원 수준이다. 을 거의 안 자며,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거리 만으로 장기간 고소득을 올렸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다.
단, 이종룡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인터뷰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사항은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1] 이종룡은 자신이 게으르고 사치스러웠던 탓이라고 자평했다.[2] 2009년 여성동아 [3] '군산 대우자동차'. 2018년 5월 말을 끝으로 폐쇄되었다.[4] 이씨가 일한 알바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래 일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