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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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래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1986년 서울연극연출가그룹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최양락이 대학로에서 관객모독 한국 초연에 출연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아서[2] , 당시 유머 1번지, 한바탕 웃음으로 등을 연출하고 있던 수 많은 코미디언들을 배출시킨 김웅래 PD에게 이창훈을 추천하였고, 김웅래 PD 또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3] 큰 감명을 받고 대학로 극장 앞 커피숍에서 매일 같이 이창훈과 만나서 "TV에 출연만 하면 넌 반드시 스타가 될 수 있다, TV출연만 승락하면 주변 연극인들도 TV에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 등의 말을 하며 이창훈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이창훈은 당시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같이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는 말에 TV출연을 승락하여 브라운관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최양락이 그 소식을 듣고 엄청 반가워하며 곧장 이창훈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코미디를 가르쳤다고 한다. 물론 최양락이 이창훈보다 훨씬 어리고 이창훈은 최양락이 개그를 하기 전부터 쭉 연극을 하던 사람이고 연극에서 웃긴 역할도 종종 했었다고 하니 개그를 가르쳤다기보다 TV 방송에 맞는 개그연기를 알려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긴 하다.[4]
(조금 과장을 보태면) 영구의 심형래와 더불어 한국 코미디계의 <맹구>라는 전설의 캐릭터를 이끌어낸 당사자 답게 이후, 1990년대의 매우 유명한 개그맨으로 활동했었으나, 1999년 모친의 병 간호를 이유로 모든 TV 방송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5] , 이후 2005년에 본업이었던 연극 무대로 돌아오면서, 현재는 연극 무대에서만 활동을 하고 있다.
모 인터뷰 기사를 통해 보면, TV나 코미디언으로서의 삶으로 인해 인기를 얻고, 나름대로 부를 축적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가고자 했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이미지의 타격으로 인한 괴로움이 컸던 탓[6][7] 인지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며 살고 있지만[8] , 맹구라는 캐릭터가 준 <바보 캐릭터>라는 캐릭터성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9]
동생 이미영이 밥은 먹고 다니냐?에 출연하면서 근황을 전했는데, 지금은 연예계에서 은퇴하여 비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2. 코미디언 시절
이창훈은 1990년 3월 KBS의 코미디 하이웨이 코너 '첫사랑 주식회사'로 데뷔를 하였다. 1980년대 KBS에서 방영된 흘러간 옛 사랑, 아쉽게 헤어진 사랑을 찾아주는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 드라마인데 원래 단막극이였다가 그가 출연하고부터 미니 시리즈격으로 연장되었다. 참고로 "사랑을 찾아드립니다" (원제목은 Finder of Lost Loves 로 1984~85년까지 ABC를 통해 방영했다. 시즌 1, 모두 23화로 끝나서 그다지 인기는 얻지못했지만....)란 제목의 미국 드라마의 설정과 주요 에피소드들을 그대로 베껴 만든 것이다. 이 원작이 1980년대에 KBS1에서 심야드라마로 더빙 방영했기 때문에 원작을 기억하던 이들도 꽤 되었다.
이후 1990년 7월, 유머 1번지의 "맨손의 청춘" 코너에서 목욕탕 때밀이 "이달용"이라는 팔푼이 캐릭터로 출연[10] , "난 짜장은 정말 싫어. 난 짬뽕!"[11] "난 죽어도/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바이벌은 안 해!"라는 유행어와 바보짓을 한 후에 상대편이 보통 이마를 칠만한 타이밍에 손가락을 튕긴 후 양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치는 유행동작으로 일약 스타 코미디언으로 등극하고 1990년 KBS 코미디 신인상을 받는다.[12]
1991년 한바탕 웃음으로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로 출연,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코미디계의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막나가는 표정연기와 유연하면서도 이리저리 비틀어지는 몸을 활용한 몸개그[13] , 동작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짓은 심형래의 영구조차도 압도할 정도. 주특기는 몸개그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엉망진창으로 전달하기, 그리고 양 손으로 가면을 흉내낸 모양을 만들며 외치는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은 선생님의 질문에 맥락없이 "배트맨~"을 외치는 것이다. 단 맨처음 봉숭아학당에 배트맨이 등장한 배경은 '베토벤을 아는 사람'을 찾던 선생님에게 맹구가 운명교향곡이나 "베"자로 시작하는 것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배뜨맨~"[14] 이라며 반전개그를 날린 것인데, 이것이 호응이 좋자 다음 방송에도 계속 쓰게 된 것. 또 답해볼사람 하면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고 답변을 하려고 하는데 맹구가 "저요 저요" 하면서 난리를 치고 결국 답변권을 얻어내는 것이 히트를 쳤다. 당시 초중고에서 하도 따라해서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 당시 SBS로 많은 선배들이 이적한 가운데 KBS의 자부심을 지켜낸 공이 컸다.
1992년 6월 10일, 무허가 술집 '뿌르보'를 차리고 접대부 10여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 영업을 했다는 이유로 이창훈은 구속당했다. 7월 28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자숙기간 동안 구속 전 계약을 했던 어린이 영화를 촬영하였다. 이후 연극계로 돌아갈까 했으나 어린이 팬의 복귀요청이 엄청났을 정도로 최정상에 있었기에 당연히 주변에서 말렸고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극중에선 등교길에 논두렁에 빠져서 입원했다는 이유로 빠졌고, 이후 봉숭아 학당은 잠시 오서방 독주 체제로 가다가 "정신이 돌아온 맹구가 귀환하다 머리를 부딪혀... 바보가 되다."라는 설정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비난도 받고 공백기도 가졌지만 도저히 막을 수없는 인기로 인해 1992년 KBS 코미디 대상을 차지하게 된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숭아학당이 막을 내리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인실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초대 봉숭아 학당에서 진짜 마무리 된 후 그동안 쩌리였던 하회탈 남희석이 제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이창훈을 따라가지 못해 잊혀지고 얼마 후 2대 봉숭아 학당은 불명예 종영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심현섭이 개그 콘서트에서 봉숭아 학당을 재현하면서 제3대 맹구(=심맹구)가 되었지만, 도저히 이창훈의 오리지날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도 심현섭의 경우는 이미 '사바나추장 개그'로 히트를 친 직후에 한 역할이라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코믹바보연기의 거성 이창훈의 '호감형 바보 스타일' 대신 심현섭 스타일의 '능글능글한 바보 스타일' 맹구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도 받으며 나름대로 오래 버틴 편.
1996년 12월 7일 SBS의 웃으며 삽시다에 출연했다.
1990년부터 달룡이나 맹구 캐릭터로 어린이 영화나 비디오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이 어린이 영화들은 지금 보자면 표절 및 매드비디오에 가까운 쌈마이한 물건들이다. 첫 어린이 영화 출연작 <짬뽕 홍길동>을 비롯해 <맹구와 북두신검(극장영화)>이라든지, <맹구짱구 스트리트 화이어(비디오 영화)>라든지... 어린이 영화 배우로 이창훈을 주로 기용한 사람은 왕룡이다. 드래곤볼의 어린 오공 머리를 재현한(...) 당시 아역배우 허성태같이 왕룡 영화에 자주 나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왕룡의 필모그라피를 감안하면 명예 왕룡사단수준으로 이창훈을 굴렸음을 알수가 있다.
전성기 코미디상 시상식 등에서 분장 안한 이창훈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미남상이고 바보연기 만큼이나 진지한 역도 어울리는 희극인이지만 달룡이 캐릭터와 맹구 캐릭터가 너무나 강렬해서 이후에 그가 잡게 되는 역, 특히 진지한 역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혹평을 듣게 되고, 방송에서 결국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다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방송활동을 접고 만다.[15] 사실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이창훈은 본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어서 정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굉장히 컸으며 맹구를 그만 둔 이유도 정극연기와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방송활동을 중단한 뒤에는 많은 연극무대에 참여해 왔고 노모가 병에 걸려 드러눕자, 모든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산을 쏘다니며 약초를 캐서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한다.
거의 10년 가까이 맹구 때문에 고생했는데 본인도 맹구가 이렇게 오래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실제 공수부대 출신[16] 인 이창훈은 동작그만에 하사 계급을 달고 출연했었는데 '''매우 멀쩡한 사람'''[17] 으로 나오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무척 많았다.[18] 덕분에 에피소드 후기로 갈수록 이하사의 말투가 맹구마냥 어눌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종영된 작품인 KBS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도 출연한 적도 있고 코미디 하이웨이에서는 암행어사 역이나 신혼부부 역을 맡기도 했는데 모두 똑똑한 달룡이(...)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에게는 역시나 혹평 일색이었다. 나중에는 이런 기믹을 역이용해서 하바드라는 학생용 책걸상 광고까지 등장할 정도. 아주 멀쩡한 이창훈씨가 상품 소개를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 목소리(의 성우)로 "에이~ 분위기 너무 잡는다~!" 하면 특유의 맹구 표정으로 "하바드니까." 라고 광고를 끝맺는데, 표정은 영락없는 맹구인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멀쩡한 이창훈의 목소리인 게 압권(...). 당시 광고 모음
방송생활 말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코미디 특집기획 '도망자'[19] 에서도 굉장히 진지한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 이 작품분위기 자체가 코미디치곤 상당히 어둡고 진지하긴 했다. 밥풀떼기로 유명했던 김정식을 비롯한 코미디언들의 정극 연기가 돋보인 작품.
폐암으로 투병하다가 지금은 수술 후 '''암을 극복해서''' 연극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선 직후에는 김태희, 양동근 주연의 영화 그랑프리에도 우정출연하기도 했는데, 맹구의 모습을 보인 건 아니고 자칭 '경마전문가'로 말만 떠벌떠벌하는 개그캐릭터로 나왔다. 얼굴을 보고 "어? 맹구?"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관객들이 스탭롤 올라가는 거를 보고 역시나!!! 했었다고...
3. 가족
배우 이미영이 이창훈의 여동생인데 전영록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이창훈은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인 전보람, 전우람 등의 외삼촌이 된다.
1992년 설특집 KBS 한바탕 웃음으로 봉숭아 학당에 맹구 이창훈과 전영록 이미영이 모두 출연한 적이 있다.
4. 여담
- 평소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오빠와 마찬가지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한때 오빠의 캐릭터로 인해(배우 이미영이 아닌, 맹구 여동생이다!이런 식으로) 본인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봉숭아학당에 맹구 여동생 역할로 특별 출연도 했었다.[2] 초대 관객모독같은 작품은 연극계에 전설의 레전드로 전해진다.[3]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라는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4] 또 연극톤과 방송에서 쓰는 대사톤이 다르다보니, 방송에 맞게끔 강약 조절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연기로 분류되지만, TV에서 하는 연기와 무대에서 하는 연기방식은 차이가 있으며, 그외 무대연기는 조명과 동선의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방송연기는 카메라가 동선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쳐서 관객있는 공연계열의 방송개그꽁트를 짜더라도 관객보다 카메라 워크를 고려하여 마지막에 웃긴 감정선이 크게 살아나게 짜야 해서 간단하지 않으니, 이창훈 입장에서 성공한 방송 개그맨에게 배울 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연극에 종사하다가 브라운관에 데뷔해서 연극 특유의 과장된 톤과 발성을 고치지 못하고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꽤 많은데 대표적으로 데뷔 초기의 성동일이 있다. [5] 실질적으로는 2001년 방영한 KBS 월화 드라마 '미나'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이었다.[6] 위에 상술한 대로 본인이 코미디언으로의 길을 선택했던 결정적인 이유 중에 '''동료 연극인들도 같이 출연시켜서 인지도를 높여주겠다'''라고 했던 윗분들의 말씀을 믿고 코미디의 길에 들어섰지만 정작 본인만 승승장구하고, 연극계는 여전히 침체기에 있는 부조리에 괴로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연극과 방송은 분명 체계와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방송국에서 출연시키고 싶어도 쉽지는 않았을꺼다. 방송은 적절히 애드립도 치고, 방송작가들과 PD들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만들고 편집해서 만들어가지만, 대본과 동선이 절대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연극과는 아무래도 너무 다르다. 이창훈 처럼 개인의 역량이 크지않은 이상 연극배우들이 방송에 쉽게 적응하기는 힘들다.[8] KBS 코미디 40주년 특집 때도 임하룡, 최양락, 이봉원 등 원로 코미디언들이 출연했지만 이창훈은 등장하지 않아서 맹구 역할은 김준호가 맡았다.[9] 사실 연극배우의 삶이 지금도 아르바이트랑 병행하면서 하는사람이 허다한데 당시에는 더 심했고 배고팠다. 그런면에서 방송, 행사, CF, 밤무대 등으로 부를 축적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캐릭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10] 다만 달용이 캐릭터는 바보 캐릭터이면서도 좀 색다른 면이 있어서, 뜬금없이 유식한 소리를 그럴듯한 타이밍에 하기도 한다.[11]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중화 요리에서 짬뽕의 주가가 짜장면급으로 올라가게 된다. 원래는 짬뽕보다 중국 우동이 더 보편적이었다.[12] 하나 더하자면 가수 민해경의 광빠돌이 기믹도 있었다. 후렴구 부분을 요상하게 따라부른다던가 하면서 빠질하는 식. 초대형 민해경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는데, 업소 광고용 브로마이드를 몰래 떼어갔다가 걸려서 죽도록 맞을뻔했다고...[13] 인터뷰에서 본인이 어릴 때 별명이 뼈없는 놈이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자신이 만들었으나 몸은 연습한다고 나오는것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14] 한국에서 당시 영화 배트맨은 딱 봉숭아 학당이 시작하던 그시기에 개봉을 했는데, 사실상 한국에서 슈퍼맨보다 뒤늦게 개봉한 배트맨을 슈퍼맨과 동급 인기로 만든 건 맹구다.[15] 어떤 한 캐릭터가 초대박을 치고 그 후광이 후에 배우/가수경력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는 수두룩 하다.[16] 예비역 중사 이다.[17] 상위에 사진을 봐도 알지만, 맹구 분장을 안 한 인간 이창훈씨는 지금의 이미지로 봐도 훈훈한 미중년, 미노년의 인상이다.[18] 근데 이 역은 각기 개성적인 원 내무반 친구들에 비해서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이상한 역할이었다.[19] 도망자 Plan.B와는 무관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9년 김종래 원작만화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의원인 윤태호(이창훈 분)가 억울한 살인누명을 쓴채 포도대장(김정식 분)에게 쫓기는 한편 유일한 사건의 단서인 목점여인을 찾는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한국형 스릴러였다. 원작만화는 2003년에 애장판으로도 출간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