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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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무려 '''최우수 심판상''' 수상소감을 말하는 사진이다.
KBO 심판 No.29
전일수 (全日洙 / Il-soo Jeon)
'''생년월일'''
1968년 7월 2일 (56세)
'''출신지'''
경기도 수원시
'''학력'''
유신고 - 경성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1차 지명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 (1991~1992)
LG 트윈스 (1992~1995)
'''가족'''
아들 전진우
1. 개요
2. 선수 시절
3. 오심
3.1. 2009년 5월 12일 SK vs LG戰 작심
3.2. 2010년 6월 8일 한화 vs LG戰 작심
3.3. 2010년 6월 22일 삼성 vs 두산戰 오심
3.4. 2012년 6월 19일 LG vs 한화戰 오심
3.5. 2015년 10월 11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 넥센 vs 두산戰 오심
3.6. 2016년 7월 9일 KIA vs 두산戰 오심
3.7. 2016년 7월 23일 두산 vs LG戰 오심
3.8. 2017년 7월 9일 삼성 vs 넥센戰 오심
3.9.
4. 연도별 성적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야구위원회 산하 KBO 리그심판위원. 현역 시절에는 태평양 돌핀스LG 트윈스에서 투수로 활동한 바 있다.

2. 선수 시절


1984년 경기도에서 두번째로[2] 유신고등학교 야구부가 창단되었을 때 창단멤버로 입학하였다. 그해 1학년들로 꾸려진 팀인데도 불구, 봉황대기에서 장충고를 제압하고 32강에 오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6년에는 대붕기 군산상고와의 8강전에서 투수로 결승 3점 홈런을 쳐내어 유신고 최초로 4강에 오르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해 조규제, 양용모, 송구홍, 염경엽 등과 함께 한일고교야구대회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유신고 졸업 후 경성대에 진학하였고, 1987년에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시범경기에 대비한 아마추어 1차 국가대표팀[3]에 선발되었다. 그해 부산산업대는 백호기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다음해 경성대로 교명이 변경된 후, 전일수는 백호기에서 4경기 22이닝 동안 2자책점만을 내주며 0.82의 평균자책점~에 4승을 거두며 개인 우수투수상을 거머쥐었고, 그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한편, 한미아마추어야구선수권대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의 대표팀에는 선발되었으나, 두 대회에서 신통한 성적을 내지 못한 탓인지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이후 대학야구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고, 182cm의 큰 키에서 나오는 강속구와 좋은 체력들을 높이 평가받아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 지명을 받고 계약금 3,800만원에 연봉 1,200만원으로 계약한다. 당시 입단 계약한 신인들 중 가장 최고 대우를 받았다고 하며 특히 구단에서는 10승 정도의 성적을 바랐다고 하니 기대가 아주 컸음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아마추어 시절 혹사 탓인지, 어깨부상으로 단 3경기 나와 5이닝 동안 7.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안습한 성적만을 남겼다.[4] 이 때문에 그해 말 정동진 감독의 권유로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유신고 시절 타자로도 활동했고, 홈런도 몇 차례 쳐낸 바 있는 등 타격감각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높이 산 듯하다. 하지만 끝내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였고, 1992년 시즌 중에 방출되었다.[5]
방출 이후 LG 트윈스에서 단돈 150만원의 연습생으로 계약하였다. 이적한 후 1993년, 재활을 통해 다시금 투수로 전환한다. 당시 투수 인스트럭터였던 김성근의 지도를 받았으나, 이적 첫 해에는 패전처리 투수로 4경기 출장하여 6이닝 3실점(1자책) 3탈삼진 0.75, 1패만을 올렸다. 1994년에는 4월 29일에 OB 베어스를 상대로 5이닝 무실점 1삼진으로 입단 4년 만에 데뷔 첫 선발승을 올리는 등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서 3승을 올리는 등 제법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으나, 시즌 중반부터는 중간계투 요원으로 더 많이 출장하였다. 최종 성적은 30경기 출장하여 45이닝 20실점(17자책) 25탈삼진 3.40, 3승. LG의 마지막 우승에 쏠쏠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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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선수 시절.
하지만, 이듬해인 1995년에는 3월에 시범경기 출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결국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고질적인 목디스크 탓에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그 때문에 한때 시속 140km를 상회하던 구속이 120km도 나오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그해 10월 30일에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어 사실상 방출되었다.
1996년 4월부터 KBO 리그 심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및 동영상 뉴스에 인터뷰가 나오지 않고 있다.

3. 오심


사람들 사이에서 오심으로 악명 높은 심판이 바로 전일수 심판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정도까지는 LG 트윈스에게 굉장히 악의적인 작심을 했기때문에 인식 또한 좋지 못했다. 이후엔 딱히 악의적인 작심을 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개눈깔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스트존이 병맛이고 누심으로 나가도 오심이 많다.

3.1. 2009년 5월 12일 SK vs LG戰 작심


LG 트윈스가 9회 말 공격 전까지 8점 뒤져있다가 극적으로 9대9를 만들어서 연장전에 들어간 이후 편파적인 스트라이크 존을 형성하여 SK에게 유리하게 심판판정을 하여 SK가 LG에게 6점이나 앞서게 만들었다. 여기서 제일 큰 관건은 우규민이 던진 공에 모창민이 맞자 몸에 맞는 공을 선언하며[6] 우규민을 퇴장시켰다. 그런데 잘 보면 손에서 빠진게 눈에 보일 정도로 고의성이 없었고 컨트롤 부족이라고 밖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전일수 심판이 우규민을 퇴장시키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후에 투수로 '''최동수'''가 올라오고 나서야[7] 겨우 이 짓을 멈췄다.

3.2. 2010년 6월 8일 한화 vs LG戰 작심


https://youtu.be/bfHx_odkmC0
5회말 2사 상황에 이병규가 타석에 들어섰는데 2스트 노볼 상황에 바깥쪽으로 들어간 공을 삼진처리 했다. 하지만 그 공은 포수가 미트를 돌려 잡을 정도로 빠진 공이었는데[8] 전일수 심판이 의도적으로 삼진을 선언했다. 안 그래도 경기 내내 LG한테 불리한 심을 해왔고 5회말 이병규 본인의 타석때 저런 공을 스트라이크 선언하니 당연히 이병규는 격분했고 이게 어떻게 스트라이크냐고, 말도 안된다며 거세게 항의를 했다. 그런데 전일수 심판의 행동이 가관인게, 어이없다는 듯 씩 웃더니 '''"야, 야, 너 안 들어가?"'''를 외쳤고 이병규가 계속 말을 이어나가자 곧바로 이병규를 퇴장시켰다. 이병규는 본인이 퇴장당한 이유를 인정하지 못하며 왜 퇴장당해야하냐며 더 거세게 항의했고 이를 본 송구홍 코치와 유지현 코치도 항의하러 전일수 심판에게 갔다.[9] 평소에 화 잘 안내기로 유명한 박종훈 감독[10] 또한 격분한 모습을 보이며 경기가 지연되기까지 했다. 이 이후에 한동안 전일수 심판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다.

3.3. 2010년 6월 22일 삼성 vs 두산戰 오심



3.4. 2012년 6월 19일 LG vs 한화戰 오심


http://m1.daumcdn.net/thumb/R750x0/?fname=http%3A%2F%2Fcfile6.uf.tistory.com%2Fimage%2F15616C3F4FE13AEB11E60A
5회 초 무사2루 이병규(9)타석, 이병규는 번트를 대고 1루에 전력질주하여 세이프되었으나, 당시 1루심 전일수 는 아웃 판정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병규는 1루심 전일수에게 거친 항의를 하였고, LG 1루코치 김인호가 1루심 전일수를 밀치면서 퇴장당하였다.
김인호 코치는 벌금 50만원, 전일수 심판은 아무 징계 없이 이 오심 사건은 일단락된다.

3.5. 2015년 10월 11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 넥센 vs 두산戰 오심


http://news.kukinews.com/news/article.html?no=314564
6회 초 1사 후 박병호의 타석, 풀카운트에서 장원준의 6구가 박병호의 무릎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공을 포구한 양의지도 스트존에 들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박병호의 스윙 여부를 1루심에게 물었을 정도로 명백한 볼이었으나 전일수 심판은 박병호의 스윙 여부와 관계없이 스트존에 들어왔다고 판정하여 박병호가 삼진아웃 되었다. 어지간한 불쏘시개는 다 건드리고 다니는 야구 기자들도 스트라이크 볼 판정 가지고 기사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위의 링크된 기사와 같이 노골적으로 심판의 오심을 따지는 기사가 쓰였을 정도로 논란이 됐었다.

3.6. 2016년 7월 9일 KIA vs 두산戰 오심


'''임찬규 보크 사건 이후 다시 나온 홈스틸 상황에서의 보크'''
9회 초 2사 2ᆞ3루 상황, KIA 3루주자 김주찬은 홈스틸을 감행하였다. 두산 투수 이현승은 특유의 흔들거리는 동작을 하다가 급하게 포수 양의지에게 송구를 하였고, 3루주자 김주찬이 런다운에 걸려 아웃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이현승의 투구동작이었다.
http://m.dcinside.com/view.php?id=tigers&no=9352189&page=&recommend=1
원래 투구 동작시 완전 정지를 한 후 투구를 해야하나, 이현승의 경우 완전정지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심판진 4명 어느 누구도 보크를 지적하지 않았고, 김기태 감독이 어필하려고 나왔으나, 받아주지 않고 그냥 들어가게 하였다.
야만없이지만 기아가 보크 판정으로 인하여 7-6, 1점차 리드가 되고, 마무리 임창용이 9회를 마무리 했다면 기아의 승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승패가 갈려버린 중요한 판정을 전일수를 포함한 4심이 모두 놓쳤다는 것은 심판의 자질이 심히 의심되는 부분이다.
다만 2회 초 백용환의 번트타구를 병살타 처리했지만 이를 파울판정하여 실점으로 이어졌던 오심도 있었던 만큼 기아는 오심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만화가 최훈이 보크 판정에 관한 내용을 만화로 그렸다.http://m.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223&aid=0000000919
KBO 자유게시판에도 판정에 대한 항의와 징계촉구 글들이 올라갔다.
이후 보크 사건에 대하여 '전혀 보크가 아니었다'라고 해명하였다.

3.7. 2016년 7월 23일 두산 vs LG戰 오심


7회 말 1사 주자 2, 3루 2볼 1스트라이크 상황. LG 타자 채은성의 타구가 3루 허경민 쪽으로 향하였다. 그 공을 허경민이 원바운드 캐치 후 홈으로 바로 던졌다. 3루 주자 박용택이 홈으로 질주하였으나 포수 박세혁이 태그에 성공하였다. 즉, 원심은 아웃. 그러나 여기서 LG에서 합의판정을 신청하였다.
약 5분여간의 합의판정 결과 후에 '''판정이 뒤바뀌었다!''' 세이프가 된 것이다. 합의판정을 5분을 넘겨가면서 해놓고, 애매하면 원심 그대로라는 것도 이번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9회에는 김재호가 내야 땅볼을 치고 1루에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확실하게 세이프가 됐는데 아웃을 선언했다가 합의판정으로 번복되었다.

3.8. 2017년 7월 9일 삼성 vs 넥센戰 오심


8회 말 구자욱의 4,5구와 다린 러프의 8구 스트라이크 삼진콜은 "이 심판이 삼성에 원수졌나"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했다. 하지만 2회 김민성 타석, 7회 초 이정후 서건창 타석, 8회 초 이택근 타석 등 경기 초중반에는 넥센팬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태평양존 적용으로 넥센이 이득을 봤다고는 절대 볼 수 없는 경기였다. 오히려 8회 초까지 5대2의 접전인 경기였다가 8회 말 삼성의 2점 추가 후 5점차에서 구자욱과 러프의 스트라이크 콜이 나옴으로써 넥센은 경기도 내줬고 삼성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해버려서 넥센만 억울해졌다. 5점차에서는 심판 퇴근존으로 볼 수 있지만 경기 초반에 오심한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

3.9.


11회 말 정진호 타석에서 김대우의 3구가 명백한 보크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이크 판정과 함께 정진호의 보크 어필에 '''보크가 아니라는 손짓'''을 내보이면서 동태눈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다.
그래도 이는 박종철 3루심이 보크 선언을 함으로써 임찬규 보크 오심 사건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는 않았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1
태평양
3
5
0
0
0
7.20
6
0
3
0
2
1.8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2
태평양 / LG
1군 기록 없음
1993
LG
4
12
0
1
0
0.75
6
0
3
0
3
0.75
1994
30
45
3
0
0
3.40
48
4
22
1
25
1.56
1995
1군 기록 없음
<color=#373a3c> '''KBO 통산'''
(3시즌)
37
62
3
1
0
3.19
60
4
28
4
30
1.42

5. 여담


  • 아들 전진우동산고-연세대 졸업 후 2019년 9라운드에 SK의 지명을 받았다. 아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인 듯. 전진우가 대학 3년을 수술과 재활로 날리고 4학년 1학기는 학점 미달로 출장 정지를 먹었을 때 멘탈을 다잡아줬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1987학번[2] 1975년에 남양주 심석종합고등학교에 경기도 최초로 야구부가 창단되었다.[3] 당시 조계현, 이강철, 송진우, 박동희, 김태형, 김동수, 양용모, 김경기, 강기웅, 강영수, 송구홍, 최훈재, 노찬엽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엔트리에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4] 당시 2차 1라운드로 같이 입단한 동기생 염경엽 또한 0.175의 타율로 덩달아 까였다. 염경엽은 현역 시절동안 커리어 하이가 1994년 기록한 0.212의 타율이었던 만큼 멘도사 라인을 좀처럼 벗어 나질 못했다.[5] 나중에 알고보니 어깨부상이 아니라 목디스크 였다고. 어쨌거나 이 때문에 지속적으로 선수 생활하는데 문제를 준 것도 사실이다.[6] 이 당시 모창민이 타석에 들어서기 전, 나주환이 번트를 데려고 방망이를 갖다대었고 이 과정에서 누가봐도 번트를 대려고 방망이를 더 내밀었는데도 몸에 맞는 공 판정을 내렸다. 원래는 몸에 맞는 공이 아니라 스윙 판정이 나왔어야 하는데도 이 짓을 한 것.[7] 최동수가 올라온 이유는 이 날 연장 12회까지 가게되어 계투진들이 조기 퇴근을 했고, 투수진들 중에 그나마 다음날 선발 등판 예정이었던 심수창만 남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심수창을 등판시켜서는 안됐기에 지명타자로 출전한 최동수를 투수로 올린 것.[8] 지금 기준으로는 스트라이크 선언을 해도 납득이 되는 코스이나 이 당시의 존은 지금 존보다 좌우로 공 한 개는 더 좁았기때문에 볼이 됐어야한다. 후술되어있듯 이런 이유때문에 코치진들까지 거세게 항의한 것이지 억지는 아니다.[9] 허나 전일수 심판은 두 코치에게도 '''"뭐?"''' 거리며 갑질하는 행동을 했다.[10] 감독직을 하며 화내는 모습이 3번밖에 없었다. 퇴장 당할때, 이 날,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로진백 항의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