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지도자.
선수 시절에는 포수였고,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1989~1990년)와, 태평양 돌핀스(1992~1995년)의 감독을 역임했다. 한국야구의 유명 감독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덕장 스타일이다.
2. 선수 시절
대구상고 출신으로 실업야구 시대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년 간 국가대표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인사이드 워크를 중시했던 수비형 포수로 경기 전 선발로 등판하는 투수에게 상대팀 타자들의 장·단점에 대해 꼼꼼히 메모해둔 것을 전해줬다고 한다.
한국 야구 역사상 국가대표 포수, 특히 수비형 포수로서의 계보에 반드시 그 이름이 들어가는 인물.
3. 지도자 시절
3.1. 프로야구 출범 이전
대구상고 야구부 감독을 지내며 몇차례의 우승을 해내기도 했다. 대구상고 감독 시절 그가 키워낸 선수들 중에는 대구 야구가 낳은 최고 스타인 이만수도 있었다.(1학년 이만수 2학년 김시진 3학년 장효조) 이후 1978년부터 약 7년 간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지낸다.
3.2. 삼성 코치 시절 (1984~1988년)
그러다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KBO 리그 출범부터 꾸준히 영입을 타진한 끝에, 1984년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합류한다. 현역 시절 대구를 대표하던 스타 포수였던지라, 당시 대구 출신 감독이 없었던 삼성이 선수들의 갈등[1] 을 중재하고, 포수들의 기량 발전을 위해 영입했다. 실제로 그는 김영덕 감독과 박영길 타격코치 그리고 선수단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충실히 잘 소화해 냈다.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특유의 인화력과 지도력으로 선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 결과 김영덕 감독이 물러난 뒤 후임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배인 박영길 타격코치에게 양보했다.
3.3. 삼성 감독시절 (1989~1990년)
그러다가 1988 시즌 후 박영길 감독이 해임되자[2] 1989년에 후임으로 삼성의 감독에 취임한다. 그 와중에 1988 시즌 후 그룹 차원의 개입으로 장효조, 김시진 등이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고, 반대로 최동원과 김용철 등이 삼성에 오는 변화가 일어난다.[3]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 일단 1989년 시즌에서는 4위로 끝내고, PO 연패를 끊었다. 팀이 도움이 되리라 예상했던 최동원은 부상과 트레이드에 대한 거부 문제로[4] 1989년 8월이 넘어 합류하고, 결국 1990년 시즌 후 조기 은퇴를 한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정규 시즌 4위로 출발해 상위권 팀들을 잇달아 연파하면서 한국시리즈에까지 오른다. 그동안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좌절하게 했던 해태 타이거즈마저 3연승으로 격파한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LG 트윈스에게 4연패로 고배를 마셨고, 바로 감독에서 해임된다.[5][6] 사유는 재계 라이벌인 LG에게 무기력하게 4패로 물러났다는 것. 그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3.4. 태평양 감독 시절 (1992~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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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루키-싱글 A-더블 A-트리플 A 등 각 단계를 거치면서 코치 연수를 했다. 미국 연수 1년 만인 1992년, 다시 한번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태평양 돌핀스의 사령탑에 올랐다. 태평양 감독 부임 2년째인 1993년에는 롯데에서 은퇴한 김시진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부임 첫 해 1992년은 6위, 이듬해인 1993년은 꼴찌였지만 구단은 정동진 감독을 경질하지 않고 계약기간인 3년을 끝까지 지켰다. 당시 사장이 인천 연고 구단들의 역사에서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운 감독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경질을 취소했다고 전해진다. 유임 결정에 보답하듯 정동진 감독은 1994년에 성과를 내는데...
1994년에 부상에서 돌아온 투수들이 제 몫을 다하면서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하지만, 당시 상대는 이광환 감독이 이끌던 '''신바람 야구 열풍의 LG 트윈스'''였다. 결국 김재현(1975), 서용빈, 유지현이라는 신인 3총사를 앞세운 LG 트윈스에 또 4연패를 당해 준우승에 그쳤다.[7] 결국 정동진 감독의 한국시리즈 전적은 모두 LG를 상대하여 승리 없이 8전 8패가 되었다.[8] 그래도 태평양은 김성근 감독 시절에 기록한 3위를 넘어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의 공로로 태평양과 재계약했지만 1995 시즌은 팀이 현대그룹으로 매각되던 시절이라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주전 투수들의 이탈과 기존의 타선을 이끌던 선수들의 부진이 겹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해 정규 시즌을 7위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과 함께 계약 기간 1년을 남긴 시점에서 수석코치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정동진은 태평양의 마지막 감독인 셈.
비록 감독 재임 중에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재활을 시켜가면서 기다려 준 인천 지역 내 우수한 투수들은 그 뒤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이 되었으니, 정동진은 현대 유니콘스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감독이라 할 수 있다.
4. 평가
2014년 SPOTV에서 제작한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정동진 편
정동진 감독의 야구관을 요약한 글 정동진 야구
'''무조건 정신력, 참고 던져라''' 식의 마인드가 당연시되던 시대에, 부상 투수들을 수술시키고 재활군을 설치해 체계적 재활 시스템을 만드는 등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수관리, 재활 시스템의 수준을 진일보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는 삼성 감독을 떠난 후 약 1년 동안의 미국 마이너리그 연수 시절에 배운 것인데, 류중일 감독도 자신이 정동진 감독의 선수 관리 노하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특히 태평양 감독 시절 투수들을 미국으로 보내면서까지 수술시킨 과정은 훗날 재조명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992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한 후 선수들의 몸상태를 살펴본 정 감독은 투수진을 책임지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3인방의 몸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들은 전전임 김성근 감독의 무자비한 혹사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검진을 요청했고, 각각 허리 디스크와 뼈조각 발견 등의 증상이 확인되어 망가진 몸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 막 데뷔한 정민태마저도 아파서 강판되는 상황까지 초래되었고 이 역시 혹사에 따른 부상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정 감독은 미국내 토미 존 서저리 최고 권위자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에게 수술을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수술 결과를 의심하는 팀과 선수들에게 '''자신의 3년치 연봉을 다 내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나타냈고 그런 모습을 본 선수들이 이를 받아들이며 수술을 하게 되었다(다행히 수술은 성공적). 핵심 선수들의 이탈로 인해 당장의 성적은 바닥을 면치 못했지만, 그 선수들이 돌아온 94년에는 소수 강타자들(예: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에만 의존했던 약체 타선의 불리함 속에서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자신이 옳았음을 성적으로 증명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상대 팀 감독이었던 이광환이 투수 분업화 도입을 통해 KBO의 경기 내적인 요소를 바꿨다면, 정동진은 과감하게 팀의 주축 투수들을 재활시키고 그것이 성공하면서 경기 외적인 요소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94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두 감독이 우리나라 투수들의 선수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5. 이후
1996년 SBS 야구해설위원, 1997년 일구회 회장을 거쳐서 KBO 경기감독관, 규칙위원장, 유소년 육성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제자인 이만수의 요청으로 라오스에 야구지도를 가려고 했으나 건강 문제로 불발되었고 한다.
6. 기타
SBS 해설위원 시절 낫아웃 오심 사건으로 유명한 1997년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 대 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연속경기 1차전 해설을 맡았다.
구타 및 권위주의가 판치던 시절의 감독으로써는 보기 드문 덕장 스타일이었다. 대구상고 감독 시절 훈련에 무단 불참했던 선수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너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하며 얼차려 자세를 한 뒤 선수들 모두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1대 씩 때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의 감독을 때리는 것을 주저하는 중에 이만수가 나서서 정동진 감독을 야구방망이로 세게 때렸다.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동진은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만수의 고등학교 12년 선배였기 때문. 이만수는 훗날 인터뷰에서 살살 때리는 시늉만 하려고 했는데,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관련 기사 이 사건은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인" 이만수 편에도 나왔다.
[1] 삼성의 경우도 심한 편은 아니지만 대구상고(현 상원고) 출신과 경북고 출신 간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2]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게 스윕당한 박영길 감독은 PO에서 10연패를 당했다는 이유로 삼성그룹 기조실의 감사를 받았다고.[3] 이 트레이드는 최동원이 선수협 창설을 시도한 것에 대한 KBO구단들의 보복성 조치였다.[4] 훈련 부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던 상태이기도 했다.[5]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도 4연패로 우승을 놓쳐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한국시리즈는 아니지만 2000년에는 김용희 감독이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를 당해 감독직을 떠났고, 다시 10년 뒤인 2010년에는 선동열 감독이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물러나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겼으며, 2019년에는 장정석 감독이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물러나면서 당초 재계약이 유력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손혁 감독으로 교체되었다.[6]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2005년과 2016년에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를 했지만 바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7] 특히 1차전과 3차전은 이길수 있었던 경기였다.[8] 바꿔 말하면 LG가 현재까지 기록한 두차례의 우승은 모두 정동진 감독을 상대로, 한번도 패하지 않고 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