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KBO 리그
1. 개요
2020년을 기준으로 KBO 리그의 심판위원회에는 54명[1] 의 심판이 있다. 대부분 프로선수 출신으로, 프로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선수 출신[2] 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오히려 프로선수 출신이 드물고 그나마 선수 출신이라고 해봤자 아마추어 선수 출신이다.
심판이 되길 원하는 일반인이나 비선수 출신 아마야구 심판을 채용하지 않기에 프로야구 심판계가 폐쇄적인 집단이라는 말도 있지만, 후술할 심판들의 근무환경상 일반인이나 부업 겸으로 하는 아마야구 심판이 프로야구 심판으로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이 크다.
루킹삼진이 발생하면 구심은 타자 스윙같은 표식이 없는 상황에서 삼진임을 주위에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 일반 스트라이크에 비해 훨씬 호쾌한 몸짓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선언한다. 이 동작도 심판마다 각양각색이라서 나름 야구의 볼거리 중 하나. KBO의 심판들의 삼진콜 그냥 간단히 손만 올리는 심판도 있고 어퍼컷을 하는 심판도 있다. 모션이 과격(?)한 심판과 삼진 많이 잡는 투수가 만나면 재밌는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KBO 심판들의 삼진콜1삼진콜2삼진콜(영상)
또 심판들마다 스트라이크콜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다.KBO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콜
1.1. 비선수 출신 심판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주인공 김범수(임창정 분)는 비선수 출신임에도 자신의 꿈을 좇아 마침내 야구 심판이 되어 한국시리즈에도 출장한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심판 육성 시스템이 완전하지가 않아 비선수 출신 일반인이 선수 출신을 따라잡기는 상당히 어렵다. 한국에서 비선수 출신이 프로야구 1군 심판으로 나온 적은 아직까지 없다.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과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확률과 같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일반인이 심판이 될 수 있는 길은 KBO와 대한야구협회 등이 공동주관하는 야구심판 양성과정의 10주간의 일반과정 강좌[3] 를 수강해야 하는데, 성적 우수자에 한해 아마야구 심판들이 수강하는 고급과정을 수강할 수 있다[4][5] .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전문과정은 KBO심판학교의 전문과정[6] 이 아닌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지원자들을 위한 고급과정으로 지원자들은 3주동안 남부지방으로 내려가서 고등학교 전지훈련 팀들간 심판 판정을 바탕으로한 실전연수, 저녁에는 룰북필사[7] 로 연수 종료후 심판학교 교수진들이 판단하여 대한야구협회 소속 심판으로 위촉이 된다. 그리고 대한야구협회 소속 심판으로 1년 이상 활동해야 KBO 심판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야구심판 양성과정이 비교적 짧고, 복잡한 룰[8] 을 숙지하기엔 일반인으로서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심판 포메이션은 타구에 따라 주자의 위치에 따라 2심, 3심, 4심이 각각 위치해야 하는 위치가 다 정해져 있고 그것들을 숙지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즉 비선수 출신을 안 뽑는 게 아니라 못 뽑는 거다.
일반 사회인야구에서 2심을 많이 보지만 4심을 보는 사회인야구 심판들도 있는데 바로 협회 소속 심판들로 가장 유명한 곳이 서울시야구소프트볼협회 심판들과 대한야구위원회(KBC)[9] 심판들이 가장 유명하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비 선수 출신 일반인이 프로야구 심판이 된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2001년에 입사한 엄재국이 있다. 엄재국은 대학교 동아리에서 야구를 시작해, 대한야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야구심판학교를 통해 프로야구 심판이 되었다. 그러나 2군에서만 3년 있다가 결국 사표를 쓰고 현재는 사회인 야구 심판을 보고 있다.
2017년 제9기 KBO 심판학교에서 일반과정 우수자는 KBO 심판 및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심판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최근에 최규순 심판으로 인한 비리 문제가 현재 KBO심판 출신들이 선수출신들이 전부들이고 선후배간 유착 가능성이라는 여론이 많아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2017년 시즌 종료후 명지전문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시행하는 KBO 심판학교 9기서부터는 교육커리큘럼을 변경하고 비선수 출신과 선수 출신의 1대1 비율 채용을 한다고 명시를 해놓았다. KBO 심판 통합관리시스템 및 비선수출신 심판의 길 열어
2. 역사
한국실업야구 시절 심판들은 부업 삼아 심판을 봤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심판을 따로 뽑았다. 총 15명을 뽑아 전임심판 9명과 지방 주재 6명[10] 으로 나눴고, 다시 전임심판은 3명씩 3개조로 각 지방주재 심판 1명과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KBO에서는 심판들만 뽑았지 이후 별다른 지원을 안 했기에 심판들이 자비를 들여 스스로 유니폼도 맞추고 장비도 샀다고 한다.
1986년에는 심판 전임제가 시행되어 심판 18명을 3개조로 나누어 주심을 볼 수 있는 전임 심판10명을 선정하여 이 전임심판들만 주심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위의 전임심판들을 각조에 3명씩 3개조(C조 제외)로 배치하여 돌아가면서 주심을 보게 하였다. 참조
원래는 KBO 총재 직속기구였으나, 1996년 한국시리즈 때의 판정시비로 인해[11] KBO 사무총장 관할의 심판부로 격하되기도 했다. 1999년 심판위원회로 다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KBO 사무총장 관할기구다. 또한 같은 연유로 1997년부터 경기감독관제도가 신설되어 심판의 경기 진행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공채 시험을 실시해 심판을 뽑고 있다. 하지만 심판위원회가 KBO의 하위기구이다 보니, KBO의 예산에 따라 좌우지되는 경우가 많아 예산 부족으로 신규 심판을 뽑지 않은 해도 있었다.
2.1. 2000경기 출장 심판
3. 구성
심판위원회는 KBO 산하에 있다. 1, 2군 총괄은 위원장과 차장이 담당하고, 1군에는 6개 팀을 두고 있다. 팀장의 인사권은 위원장에게 있다. 각 팀장은 4명의 팀원과 함께 움직이고 경기마다 주심, 1루심, 2루심, 3루심, 대기심을 정한다[14] . 1개 조씩 순번대로 돌아가며 2군으로 내려가거나 비디오 판독실 심판을 맡으며 휴식 기간을 갖는다.
정규시즌 심판 로테이션은 3루심→1루심→2루심→주심→대기심→3루심의 순서대로 돌아간다. 즉, '''당일 2루심이 누군지를 파악하면 다음날 주심을 예측할 수 있다.'''[15][16]
심판 공채시험에 합격해 2군에서 대략 5년 정도 활동해야 1군으로 승격될 수 있다. 1군에 속한 심판이 오심 등으로 인해 제재를 받으면 2군 소속 심판이 승격되기도 한다. 한편 퓨처스리그에서는 심판 수 부족으로 3심제로 운영될 때도 있다.
3.1. 역대 KBO 심판위원장
3.2. KBO 심판위원 명단
2020 시즌 기준으로, 직책 - 입사년도 - 생년월일 순.
1군은 5~6명, 2군은 3~4명으로 심판조를 구성하며, 경력이 오래된 심판이 조장을 맡는다.[26]
심판의 번호는 유니폼 소매에 표시되어 있으며 매년 나오는 KBO 연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2.1. 1군
3.2.2. 2군
3.2.3. 은퇴 심판위원
4. 문제점
4.1. 대우 및 근무환경
1년마다 계약하는 계약직으로 정년은 없데다가 4대 보험과 퇴직금도 없다. 1999년 김광철[80] 전 심판위원장이 사임한 후 KBO에 퇴직금 지급을 요청하며 법정소송을 벌이면서 법원으로부터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허나 2000년대 심판 관련 기사에서는 심판들에게 퇴직금이 없다고 나온다. 아무래도 반노동정서가 강한 우리나라 법상 심판은 자유직업 소득자로 분류되기에, 법정 소송 후 계약서를 수정해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퇴직금이 나오지 않는 것은 비단 심판 뿐만 아닌 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기자가 한국프로야구 심판협회에 접촉했을 때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시겠지만 한국프로야구 심판협회는 KBO 산하기구[79]
입니다. 그렇다보니 예산 문제는 고사하고 심판들의 복지도 늘 KBO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집행이 가능합니다."그 관계자는 이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2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심판들이 현장에서 부상을 당해도 단순치료비 외에는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공에 맞아 치아가 깨져도 깨진 치아에 대한 치료비만 지원받을 뿐 그로 인해 야기되는 다른 치아의 부상에 대해서는 전혀 지원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공에 맞아 깨진 치아로 인해 다른 치아의 임플란트 시술을 한 심판이 여럿 있지만 모두 '''사비'''로 해결했다고 한다. 한국프로야구는 지난해 사상 첫 700만 관중을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 기사 출처
2000년대까지는 특별한 기준 없이 큰 잘못만 안 한다면 재계약은 보장되었지만 2007년부터 3진 아웃제가 시행되었다. 1군에서 3번의 명백한 오심으로 제재를 받으면 2군으로 강등되고, 이후 2년간 1군 승격이 되지 않으면 면직된다. 또 2군에서도 3년 단위로 최하위 고과를 받는 심판은 자동 면직된다.
경기운영위원(경기 감독관)[81] 이 심판 판정에 대해 고과측정을 해, 고과에 반영한다. 초임심판의 연봉은 3천만원 정도고, 1군에서 활동하는 심판들의 평균 연봉은 6천만원 정도. 여기에 각종 수당이 지급되기에, 20년 가까이 활동한 심판은 총 수령액이 1억원을 넘기도 한다. 그렇긴 해도 평균적으로 비교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국의 경우 메이저리그 심판의 연봉은 적게는 8만 달러에서 많게는 15만 달러 정도다. 일본의 경우 1군 심판 평균 연봉이 1천만엔이고 출전 수당도 구심은 3만 5천엔, 누심은 2만 4천엔을 받고 있고 출장비나 용품비[82] 도 별개로 나온다.
선수들과 달리 3경기마다 이동을 하기에 시즌 당 이동거리는 선수들에 비해 더 길다. 또 특급호텔에서 묵는 선수들과 달리 여관에서 머무는 일이 많다. 유영구 KBO 총재 시절에 관광호텔에서 머무르라고 숙박비가 더 올랐지만, 관광호텔은 경기장과 거리가 멀어 여전히 여관을 이용한다고.
주심의 경우 보호대 때문에 여름엔 한 경기를 치르고 나면 2kg이나 빠진다고 한다. 그만큼 땀을 엄청나게 흘린다는 뜻인데, 예전에는 심판들을 위한 샤워실은 없었지만 최근들어선 늘고 있고 리모델링도 하고 있다고 한다.
심판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보니 휴식일 없이 매경기 참가해야 한다[83] 아이러니하게도 빡빡한 일정 탓에 피로 누적과 부상이나 질병, 오심에 대한 징계 등으로 전 경기 개근하는 심판은 드물다. 심판을 많이 뽑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나오겠지만, 2008년에는 예산 문제로 아예 신규 심판 채용조차 하지 않은 일도 있다. 그나마 2010년부터는 심판을 2명 이상 뽑고 있지만 경험 문제로 최근에 충원된 심판들이 1군으로 승격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심판노조가 1999년에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파업을 했는데 57명의 심판이 해고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파업을 이어나갔었다. 또한 미국내 여러 스포츠들 중 비디오 판독을 제일 늦게 도입했고 메이저리그 심판들에 대한 처우를 계속 개선해 오고 있지만, 일부분은 적당히 타협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1990년 가네다 마사이치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이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타카기 토시아키 심판을 폭행해 30일 출장정지와 벌금 100만엔 처분을 받고 폭행당한 타카기 심판은 사표를 제출하고 심판직을 그만두는 사건이 일어나자, 심판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항하기 위해 심판노조를 결성해 마찬가지로 처우 개선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심판노조가 없기에 이러한 낮은 처우가 개선되기에는 더 많은 시일이 걸릴 듯하다.
4.2. 오심 논란
요즘은 모든 경기가 TV로 중계되고 인터넷의 활성화로 심판의 판정을 즉각 확인할 수 있기에 오심에 대한 논란이 늘어난 것이지, 비단 오심 논란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야구 출범 후부터 계속되어 왔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오심 관련 논란은 똑같이 벌어진다. 다만 미국에서는 심판이 규칙대로 경기를 진행하고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지만, 한국에서는 심판이 하나하나 판정을 정확하게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기에 오심 논란이 크게 불거진다는 말도 있다.
역대 KBO 심판 중 최고 심판으로 손꼽히는 이규석도 완벽하게 심판을 본 시합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심판은 없다.참조[84] 아무리 뛰어난 수비수라도 실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심판들이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오심이 나오면 TV에서는 계속 그 장면이 반복되어 나오고, 팬들은 KBO 홈페이지 등에 오심에 대한 성토와 함께 오심을 저지른 심판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심지어 일부 극성팬들은 오심을 저지른 심판 본인은 물론이고 그 심판의 가족들까지 인신공격을 하기에 이로 인해 심판들 역시 오심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다. 스트레스 때문에 심판 출신들은 대부분 60대 초반에 단명한다는 말도 있다. 선수들이 실책을 하거나 각종 플레이 실수를 저지르면 그것에 대해 실드를 쳐주는 팬이라도 있지만, 심판들은 팬이 없기 때문에 실수하면 항상 비난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다만 애초에 선수가 플레이 상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심판이 경기를 공정하게 판정하지 않고 오심을 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다. 오심은 스포츠 자체의 근간을 뒤흔들어 버리기 때문.
심판들의 자체적인 노력만으로는 오심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오심을 줄이기 위한 대안 중 하나로 비디오 판독이 있다. 한국에서는 2009년부터 타구의 홈런 여부를 가리기 위한 비디오 판독만을 실시한다. 다만 방송사의 비디오를 보고 판단하기에, 방송사 카메라가 타구를 잘 못 잡은 경우 판정도 애매해지는 문제가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2008년부터 타구의 홈런 여부를 가리기 위한 비디오 판독을 실시했고, 2013년 들어 타구의 파울, 페어 여부 판독도 실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메이저리그에서도 주자의 아웃, 세이프 여부나 볼, 스트라이크 판정은 여전히 심판의 고유 권한으로 판단해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는다. 거기다 비디오 판독을 도입한 이후로도 중계화면으로조차 확인 가능한 오심을 비디오 판독을 거친 이후에도 전혀 번복치 않는 등 심판들의 자질 문제가 심각하다. 심지어 오심에 대해 항의하는 선수들을 단순히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장을 시켜버리고, 선수와 감독에게 반말을 하는 등 권위적으로 선수들을 깔아뭉개고자 하는 특징이 있어 심판으로서의 자질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비디오 판독 외에 다른 종목처럼 외국인 심판 도입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KBO에서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 이 말이 나온 게 2007년 김호인-허운 파벌 싸움 때 심판들이 보이콧을 선언하자 하일성 당시 사무총장이 심판 충원을 위해 외국인 심판 도입도 고려한다는 인터뷰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 KBO와는 사전 협의 없이 스스로의 생각을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 말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연봉 때문에 메이저리그 심판을 데려오기는 힘들고, 그나마 데려온다고 해도 마이너리그 심판 정도 밖에 데려오지 못한다. 설령 외국인 심판을 도입한다고 해도, 한국에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을 정해놨지만 미국에서는 심판의 재량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상황에 대한 판정이 심판마다 다를 수도 있다.
한편 2008년 이광환 당시 우리 히어로즈 감독은 심판들의 능력이 떨어진다며 실력향상을 위해 2군에서 적어도 1000경기는 심판을 보고 1군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서는 5년간 2군에서 심판을 봐야 1군 경기에 출장할 수 있고, 일본도 1군 승격까지 3년에서 5년 사이로 한국보다 조금 더 짧은 편이다. 아무래도 이광환 감독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미국의 사례를 든 듯하다. 미국에서는 심판들이 10년에서 12년 정도 마이너리그에서 심판을 봐야 메이저리그로 승격되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그 심판은 마이너리그 선수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과 고달픈 생활을 해야하기에 많은 심판들이 중도에 포기하기에 거르고 걸러진 심판들만이 메이저리그로 승격된다. 물론 그런 메이저리그 심판들도 오심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적어도 KBO의 심판들처럼 권위적으로 선수들을 깔아뭉개는 일은 매우 적다.
오심 빈도가 높은 심판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심판의 판정 역량(과 후술할 태도)이 전체적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4.3. 태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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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가르시아의 항의를 무시하는 임채섭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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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는 사람은 카림 가르시아.
팬들은 오심 문제와 함께 심판들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나아가 심판들의 자질과 수준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 심판들의 경우엔 모두 선수 출신이고 그렇다 보니 코칭스태프나 선수들과는 선후배 사이다. 그래서 심판 판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선수들에게 심판들은 자신이 야구계 선배임을 내세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 선수들의 항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미 팬들과 구단 사이에서도 과도한 항의는 도리어 차후 불리한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파다하게 퍼진 지경이다. 반대로 감독들, 특히 연배가 많은 노장 감독에게는 자신들이 야구계 후배이기에 저자세로 대한다.
하지만 이는 같은 야구인이라도 외국인에게는 예외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부임 초기부터 심판 판정에 대해 항의를 많이 했다. 이때 로이스터 감독과 동행한 통역에 따르면, 로이스터 감독이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심판들이 반말로 답했다고 한다. 로이스터감독을 무시하는 강광회 주심의 행동2010년 카림 가르시아는 임채섭 심판 판정에 항의를 했다가 징계를 받았는데, 임채섭 심판이 대놓고 무시하며 조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카림 가르시아는 징계가 부당하다며 이에 대해 비난을 했다가 결국 심판실에까지 찾아가 머리 숙여 사죄했다. 카림 가르시아의 사례 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수가 등판할 때는 '선수 길들이기'라고 스트라이크 존도 평소와 달리 짜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한국 심판들에게는 오심을 인정하는 모습이 없다. 메이저리그의 짐 조이스 심판은 2010년 6월 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경기에서 9회 2사 후 1루 땅볼을 세이프로 선언해, 아르만도 갈라라가의 퍼펙트 게임을 날려버렸다. 경기 후 조이스는 자신의 판정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며 갈라라가에게 사과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짐 조이스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꼽은 공정한 심판으로 선정되었다. 물론 조이스가 평소 공정한 판정을 하는 심판이라고 평판이 좋았던 탓도 있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한 영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심판들은 오심을 범하면 '오심도 경기의 일부', '우리나라 심판은 만 번 중 한 번만 실수에도 과도한 비난을 받는다'라며 변명만 일삼고 있다. 진정한 프로는 실수를 부끄럽게 여기고, 실수에는 책임을 져야한다. 팬들은 오심을 범한 것에 대한 인정과 재발방지를 바라지, 판정을 뒤집고 오심이 일어나기 전 상황으로 돌아가 다시 경기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태도와 관련된 문제는 해당 심판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심판위원회의 상위 기구이기도 한 KBO 역시 문제가 있다. 심판위원회의 상위 기구이기도 한 KBO는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판정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중재해 심판진에 대한 오해를 줄이는 한편, 심판들에게도 오심으로 인한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지속적인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심에 대해서는 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평가해 확실한 제재를 내림으로써 심판에 대한 팬들의 신뢰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KBO도 지금처럼 오심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심판위원회와 똑같은 입장을 반복하는 제 식구 감싸기로 일관하는 이상 팬들의 심판들에 대한 불신이 풀릴 리 없다.
비단 KBO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해설위원들의 자세도 문제가 있다. 심판의 오심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심판이 오심을 하지 않도록 계속 주의를 주기 보다 오심에 대해 침묵하거나 감싸는, 오심에 대한 미온적인 반응은 도리어 팬들의 분노만 산다. 다만 때때로 방송에서 오심에 대해 과도하게 비출 경우, KBO나 심판들이 이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때문에 방송사도 오심에 대해 묵인할 때가 종종 있다.
5. 국내 영상판독 도입
2014년 전반기에 오심논란이 심화되자 결국 7월 하반기부터 심판의 판정에 대한 영상판독이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심판의 오심이 의심될 경우 영상판독을 요청할 수 있으며, 오심으로 결정되면 판정이 번복되게 된다. 영상판독은 중계화면을 보고 해당판정이 있은후 30초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 즉, 30초가 지나면 그 판정에 대해서는 영상판독을 제기할 수 없다. 이닝이 종료되는 경우는 10초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 8월 4일까지 영상판독 요청은 총 19회 제기되었으며 이 중 8건의 판정이 번복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심판 합의 판정제 항목 참고. 2017년부터는 비디오 판독 제도로 개선되었다.
김병주 심판팀장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팬들이나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상판독 도입으로 인해) 심판이 편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번복이 되면 마음적으로 엄청나게 압박이 온다고 하며 (판정 번복이 될 경우)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한다. 언론에서 욕은 안 먹는데 그것 하나는 좋고 나머지는 다 똑같다고 한다. 팬들이 예전에는 심판에 대한 불신이 있었는데 (영상판독 도입 후) 불신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6. 사건·사고
[1] KBO 가이드북에 따른 것인데, 이 가이드북은 매년 3월쯤에 제작된다. 그런데 KBO 심판은 매년 4월 초에 정식 채용되기에 KBO 가이드북과 달리 신규 심판이 더 있을 수도 있다.[2] 이 경우 아마야구 심판 경력을 하다가 채용된 경우가 많다.[3] KBO 심판학교 교수진들은 전부다 KBO 1군심판들 및 대한야구협회 심판위원(전부 KBO 1군심판 출신의 심판위원이다. KBO 심판 은퇴하고 후진양성으로 강의를 한다.)이고 KBO 2군심판 및 대한야구협회 소속 심판들이 조교로서 강의를 한다.(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앞에서 교수들의 강의를 하면 이 심판들이 어떻게 판정내리는가를 몸소 보여준다.)[4] 단 일반과정을 수료해도 수료증은 나온다.[5] 일반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비디오머그에서 영상으로 취재한 바가 있다.[6] 여기에 전문과정은 KBO 심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사설 아카데미에서 맨 처음 교육을 받거나 앞서 말한 일반과정 수료자 들이 듣는 포메이션 전문과정으로 사설 아카데미나 일반과정자들은 심판 포메이션에 대해서 정확하게 숙지를 못하여(사설 아카데미는 포메이션 교육을 안하고 심판학교 일반과정자들은 10주 교육기간동안 2심, 3심, 4심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인리그에서 많이 하는게 2심으로 학교 졸업하고 2심만 보면 3심이나 4심 포메이션 다 까먹는다.) 포메이션 과정을 수료 및 숙달을 위한 과정이다. 지원자들도 일반과정 수료자들 아니면 5년 이상의 사회인 야구 심판 경력이 있어야 한다.[7] 참고로 전기수에서 미리 룰북 필사를 해서 8기수 부터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도장을 찍은 빈 공책에 룰북필사를 하는걸로 바뀌었다. 지못미...[8] 미국의 경우엔 심판에에 많은 재량을 부여해 룰북이 50페이지 정도로 얇지만, 한국은 플레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정한 일본의 규칙을 많이 참조해 룰북 자체가 두껍다.[9]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아니라 대한야구위원회 (Korea Baseball Committee)로 전 국민생활야구연합회 중앙심판위원들이다. KBO 심판학교 포메이션을 그대로 사용하는 몇 안되는 심판 조직이다. 서울시협회 및 몇몇 심판협회를 빼고는 포메이션 없이 심판들 보는곳이 많다.[10] 이 6명은 지역협회 소속 심판들로 KBO에 소속된 심판이 아니었으며 이듬해인 1983년부터 지방주재심판이 폐지되면서 전임 심판제로 변경되어 KBO 소속 심판들만 프로심판을 보게 되었다.참조[11]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이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에 '''노히트 노런 패배를 당한 직후''' 당시의 심판진 구성이 불공평하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김 감독은 당시 심판진 중에 상대팀 연고지인 인천광역시 출신 심판(허운, 김호인 등)이 유독 많았고 이 때문에 해태가 판정에 대해 불이익을 당했다고 불만을 표했다. 결국 이 판정시비는 6차전 도중 최해식이 스트라이크존 시비로 퇴장을 당하면서 극에 다다르게 된다.[12] 한국야구 최고 명심판이라고 불리는 심판. KBO리그 초기출범 심판 및 최초 2000경기 출장 심판[13] 한국시리즈 3차전[14] 원칙적으로 2루심은 그 다음 경기 주심을 보고, 주심은 그 다음 경기에는 대기심으로 빠진다.[15] 단 시즌 중후반 1군심판들이 휴식기간을 갖는 동안 퓨쳐스 선임심판들이 합류하여 심판조가 6명이 되는 경우,로테이션이 3루심→1루심→대기심→2루심→주심→대기심으로 변경된다.[16] 포스트시즌에는 당일 우선심이 누군지를 파악하면 다음날 주심을 예측할 수 있다.[17] 1983년 김진영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의 이른바 '잠실 이단옆차기 사건'과 연관돼 있다. 김진영 감독은 당시 삼미 주자의 득점 상황에서 심판 판정 시비가 벌어지자 불만을 호소하며 그물망 밖에 있던 이기역 위원장을 향해 냅다 이단옆차기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경기가 MBC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됐고 더구나 이 분으로 추정되는 높으신 분(대부분의 매체에서 사실로 단정짓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이 이 경기를 집관한 바람에 김진영 감독이 구속되는(...) 흑역사가 생겨났다.[18] 김광철 위원장 이후 위원장은 모두 프로심판 출신이다.[19] KBO 명지전문대학교 야구심판학교 1~6기.[20] 이 때만 직함이 심판실장이었다.[21] 룰북을 토대로 강의를 하는데 KBO 1군심판 교수한명하고 나눠서 룰 강의를 진행한다.[22] 아들인 황인태도 KBO 리그 심판위원이다.[23]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였다.[24] KBO 명지전문대학교 야구심판학교 7기 이후 교장수행중.[25] 역대 심판위원장중 최초로 임기후 심판위원으로 복귀했다.[26] 단, 경력이 많은 심판이라도 조장직을 오래 맡으면 조장직을 다른 경력이 많은 후배 심판에게 넘겨준다.[27] 1991~1992년에 태평양에 몸 담았던 김병주(마산상고 출신)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경남고 출신.[28] 아내인 김민서씨도 대한야구협회 소속 (아마추어) 심판이다.[29] 고교 졸업 당시 LG에 지명받았으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지명권이 풀렸다.[30] 최동원의 동생.[31] 강진성의 아버지.[32] 권명철 두산 코치의 동생이라는 헛소문이 계속 돌고 있는데 권명철은 인천고, 권영철은 대구상고(현 상원고) 출신으로 전혀 관련이 없다.[33] 2018년부터는 오히려 스트존을 잘 못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결국 2020년 6월 13일 삼성 라이온즈와 kt wiz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경기내내 일방적으로 불리한 역대급 최악의 편파판정을 보여주며 신뢰가 바닥을 쳤다. 이 판정으로 평생 한 번뿐인 고졸루키의 데뷔전을 거하게 망쳤다.[34] 흔히 김풍기 심판으로 알려져 있는 혼 짤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35] 김준표 전 심판의 아들[36] 문선재-문진제의 작은아버지[37] 김경기의 사촌형[38] 2016년 12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심판위원장직을 수행한 후 평심판위원으로 복귀하였다. 다만 심판위원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현장에 심판으로 경기에 출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1군에 소속되지 않고 2군에서 적응 기간을 가진다.[39] 퓨쳐스 선임 심판[40] 황석중 심판의 아들[41] 차영화 전 KIA 코치의 아들.[42] 퓨처스 선임 심판[43] 퓨처스 선임 심판[44] 퓨처스 선임 심판[45] 1989년 생,위의 이민호 심판(1970년 생)과 동명이인[46] 송유석의 아들.[47] 1군 출장경기/2군 출장경기[48] 심판을 그만둔후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삼미 슈퍼스타즈 코치를 역임했다, 1982년 KBO 원년 개막전 3루심[49] KBO 리그 원년에 심판번호 1번을 달았던 심판이다. 1번 심판의 영예를 안고 1982년 3월 27일 원년 개막전의 구심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역사적인 개막전을 며칠 앞두고 야구인들과 저녁 술자리를 갖던 중 "내가 개막전에 구심을 맡기로 했는데 대통령 각하께서 개막전 시구를 하신다고 그러네"라고 말했던 것이 화근이 돼 개막전 구심 자격을 박탈당했고 기관원들로부터 잡혀갔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1급 경호 비밀에 해당하는 대통령의 동선을 스스럼없이 흘린 것이 죄목이었다. 결국 개막전 구심은 아래 명단에 있는 김광철 심판이 봤다. 참고로 김광철 심판의 심판 번호는 2번.[50] 심판위원장으로 재직중인 1990년에 심판을 1경기 본 기록이 있다.[C] A B C D E 단,1990년부터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51] KBO 심판중 최초로 1500경기 출장을 한 심판, 1982년 KBO 원년 개막전 1루심[52] 황인태 심판의 아버지[53] 1997~1998년 심판실장으로 재직중에 심판을 1997년 20경기, 1998년 7경기 본 기록이 있다.[54] 단, 1999년~2005년은 심판위원장.[55] 단, 1998년에는 아예 출장경기가 없고, 1999년~2005년에는 2군 경기 출장 기록만 있다.[56] 단, 1991년부터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57] 단, 2006년~2007년은 심판위원장[58] 단, 2007년 1군 출장 기록 없음.[59] 2008년부터 2013년은 심판위원장으로 재직 도중인 2010년 1군 1경기 출장 기록이 있다.[60] 1989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1] 1990년에는 1군 출장경기가 없다.[D] A B C D E F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2] 김익수 심판의 아버지[63] 2001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4] 1990년, 2004~2005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5] 1990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6] 1990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7] 1990년,1993~2003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8] 1991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69] 1991, 2005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0] 1991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1] 1992~1994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2] 1993,1996, 2001~2002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으며 1999~2000년에는 출장 기록이 전무하다.[73] 1994, 1996, 2002~2003,2005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4] 1994,1996,2006~2007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5] 2002년을 제외하고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6] 유일한 비선출 출신 심판위원[77] 2003~2006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8] 2004~2007,2008년에는 1군 출장 경기가 없다.[79]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의 경우 심판협회가 산하기구가 아닌 독립적인 기관이다. 한국 심판협회도 KBO로부터 독립 시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80] 프로야구 초창기 심판이기도 했다.[81] 경기운영위원의 업무 중 경기 감독 부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심판의 관리와 감독이다.[82] 참고로 한국에서 심판 장비는 수요가 적다보니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BMC에서 장비가 나오면서 사회인야구에서는 BMC장비를 차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엘리트야구급 이상에서는 사실상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의 장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선호하는 스타일에 따라 장비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장비를 돌려 사용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처음 심판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장비를 빌려 차는 경우는 많지 않다. 프로텍터나 렉가드의 끈을 타이트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몸 사이즈가 비슷하지 않다면 빌려주는 것도 쉽지 않다. [83] 다만 2014 시즌에 한정하여 휴식일이 생겼다. 2015시즌부터는 kt wiz의 리그 참여에 따라 매일 5경기가 열리므로 심판도 5개조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에 대비해 한 시즌 앞서 5개조로 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2014 시즌에 심판 자질 문제가 유독 이슈가 되고 있는 이유 중에는, 심판조가 늘면서 경험이 부족한 심판이 한꺼번에 1군으로 올라왔다는 것에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84] 일례로 1991년 한국시리즈 당시 3차전 8회 2아웃 정회열 타석의 2-2에서 투수 송진우의 바깥쪽 직구에 대한 볼 판정은 지금도 논란거리이다. 송진우 본인은 아직도 그 공을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본 기자들은 그 공은 스트라이크를 줘도 할 말이 없는 공이었다고 인정한다. 반대로 당시 주심인 이규석은 아직도 그 공은 볼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이후 당시 포수였던 유승안의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유승안의 인터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이 판정 하나로 송진우는 흔들려 무너졌고, 결국 빙그레는 해태에 또 패배했다. 이 판정에 뒤집힌 대전아재들이 심판실을 점거하고 난동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