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선거구 개편''
김정례[A]
조순형[A]

'''제12대'''
'''이철'''
김정례

''선거구 개편''
이철[B]
조윤형[C]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갑)'''
''선거구 개편''
이철[D]
김정례[D]

'''제13~14대'''
'''이철'''

제15~17대
유재건




'''이름'''
이철 (李哲, Lee Chul)
'''출생일'''
1948년 3월 18일 (76세)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군
'''본관'''
영천 이씨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학 / 학사)
'''가족'''
아내 전명옥[1][2], 슬하 2녀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2·13·14
'''종교'''
무종교천주교(세례명: 베드로)
'''현직'''
희망래일 이사장
'''약력'''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전국학생 대표위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의장
제12·13·14대 국회의원
통합민주당 원내총무
도쿄대학 객원교수
와세다대학 객원교수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국민통합 개혁신당 추진위원회 운영위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철도공사 사장
국제철도연맹 아시아지역 의장
1. 개요
2. 생애
3. 한국철도공사 사장 시절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전 기업인이다.

2. 생애


1948년 3월 18일,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63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징집되어 병역을 이행하였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문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서 다시 투옥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정례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구호는 '''돌아온 사형수.'''
[image]
이 때 국가안전기획부의 방해 공작이 어찌나 심했던지[3] 성북구 일대의 건물주들이 죄다 이철의 선거사무소 임대를 거부했고, 결국에는 미아리 텍사스촌의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에(.....) 겨우 입주해서 선거운동을 했다. 게다가 안기부 요원과 전의경들이 쫙 깔려서 감시한 탓에 텍사스촌의 영업까지 방해받는 지경에 이르자, 텍사스촌 업주들과 건달들이 선거사무소에 쳐들어와 퇴거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도저히 오갈데가 없었던터라 이철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10여년전부터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에 사형선고까지 받는 등의 온갖 우여곡절을 알게 된 텍사스촌 업주들과 건달들이 이철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이철의 정체(?)를 알게 된 주변 상인들까지 합세하여 선거운동을 도와 결국 당선되었던 것.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허경구, 홍사덕, 장기욱, 조순형 등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데 앞장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노태우 정권이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를 밀어붙이려 하자 박찬종 등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여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이끌어냈다. 또한 1988년 말부터 시작된 5공 청문회 때도 노무현, 이해찬 등과 함께 활약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4]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김상현 등의 통일민주당 잔류파에 합류하여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91년 꼬마민주당이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3선 의원이 되었고, 민주당 원내총무까지 지냈다.[5]
1995년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새정치국민회의 유재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노무현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하다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정계를 떠났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정몽준국민통합21에 창립멤버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여, 노무현과의 후보 단일화 과정에 관여하였다. 대통령 선거일을 하루 앞둔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자 이에 반발하며 국민통합21을 탈당했다. 당시 기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북구·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형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6]

3. 한국철도공사 사장 시절


'''철도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내일로 홍보 문구.

2005년 6월부터 2008년 1월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철도 갤러리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데, 주로 '''이Fe'''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 시기에 한국철도공사 내에서 여러 굵직굵직한 일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사태'''와 2007년 역사적인 첫 남북철도 시험운행, KTX-산천(당시이름 KTX-2) 개발 등이 있었다. 한국철도공사의 사명을 공식적으로 '''코레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철도 동호인들에게 꽤나 많이 까였는데, 그 이유는 이철 사장 재임 시절 수많은 철도 간이역들이 폐역이나 무정차크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장 이철 사장이 사임할 무렵에도 서부경전선 화순군 관내역 5개가 또 없어졌을 정도. 또한 통근열차나 완행 무궁화호 열차도 이 시기에 수익성을 이유로 대부분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잡음 속에서도 한국철도공사는 긴축운영에 따라 공사 창립 이래 역대 최초로 '''흑자(!!)'''를 기록했으며, ##, 1970년대부터 자가용의 보급으로 가세가 기울어가던 철도의 가치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후임 사장들의 연이은 불명예 사퇴와, 한국철도공사의 쌓여만가는 부채, 철도 민영화 사태등으로 공사내부가 어수선해지자, 최근 들어 철도 동호인들에게 재평가를 받고있다. 또한 충북영동국악와인열차의 전신인 와인시네마 트레인과 레일크루즈 해랑, 바다열차 같은 관광열차가 이철 시대의 작품이다. 이후 수익성이 높은 관광열차에 대해 크게 신경쓴 사장이 최연혜 정도밖에 없는 것을 생각하면 유능한 편은 맞다.
물론 까인 것만은 아니다. 청년들의 혜자관광상품으로 알려진 '''내일로'''가 바로 이철 사장 때 나온 것이다.
하지만 비판받아야 하는 점도 많은데,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사태는 "비정규직으로 회사가 일방적으로 바꾸고, 말 안 들으면 짤라버려도 된다"는 인식을 기업가에게 심어주며 대한민국의 비정규직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퇴임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노동계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무엇보다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사태는 '''2020년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수도권 전철 중앙선 개통식 당시에 철도노조가 이해찬 총리가 온다고 하자 개통식장에 난입하는 일도 터졌을 정도.
이철의 커리어 중에서 앞서 언급했던 민주당 원내총무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 그래서 민주당 시절 함께했던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이 총무님'''으로 불리다가, 한국철도공사 사장 취임 후에는 '''이 사장님'''으로 격상(?)되었다고. 한국철도공사 노사 분규 당시 이철이 노조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주자고 건의했을 때는 가뜩이나 노조 측이 자꾸 약속을 파기한 것에 열불난 노무현이 '''"이 총무님, 그건 안 돼요!"'''라고 또 예전의 호칭으로 순간 돌아갔었다고 한다.

4.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신한민주당
'''121,004 (40.55%)'''
'''당선 (1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갑)
무소속
'''40,652 (31.15%)'''
'''당선 (1위)'''
1990년 민주당 입당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갑)
민주당
'''61,719 (49.70%)'''
'''당선 (1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갑)
통합민주당
34,555 (31.82%)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갑)
열린우리당
35,280 (43.43%)
낙선 (2위)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창당

1987 - 199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7]

1995 - 1997
합당[8]

1997 - 2000
합당[9]

2000 - 2002
탈당

2002
창당
정계 복귀

2002 - 2003
탈당

2003 - 2005
창당

2005 -
탈당
정계 은퇴

6. 관련 문서





[1]코코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 코코엔터프라이즈는 과거 짱구는 못말려 등을 수입했던 애니메이션 제작, 수입 업체이며, 다이아몬드 개발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2] 현재의 아내는 후처로, 2000년 전처와 이혼하고 2002년에 재혼했다.[3]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은 안기부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관제 야당'''으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공천 탈락한 인사가 민한당이나 국민당으로 와서 출마하는 경우가 있을만큼 사실상 여당의 2중대, 3소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신한민주당이 '''선명 야당'''을 기치로 출범했으니 당연히 방해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1월 18일 창당한 신한민주당의 기세를 어떻게든 누르기 위해 '''한달도 채 안된 2월 12일로 총선 날짜를 잡는 치졸한 꼼수까지 부렸다.'''[4] KBS의 다큐멘터리88/18 초반에 허화평 전 청와대 정무1수석에게 질문하는 인물이 바로 이철. 영상[5] 이철의 정치적 커리어 중에서 가장 존재감 있는(?) 직책이기도 한 탓에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자세한건 후술.[6] 그의 뒤를 이어 민주당 당적으로 이 지역구에 출마하게 되는 전재수는 총선 3수 끝에 20대 총선에서 당선된다. 21대 총선에서도 당선.[7]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8]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9]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