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해외파 선수들/시즌별 정리/1990년대
1. 개요
1988-89 시즌을 끝내고 차범근이 선수 은퇴와 동시에 영구 귀국하면서 유럽 진출 1세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후 K리그의 팽창과 일본의 J리그 출범 및 성장 등으로 인해 국내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J리그에 몰려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시기 해외파는 거의 대부분 J리거였을 정도. 서정원, 노정윤 같은 소수의 선수들만이 유럽에서 활약했다가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일찍 K리그나 J리그도 되돌아갈 정도였다. 90년대 후반에는 설상가상으로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게 되면서 J리그로의 선수 유출은 심화되었다. J리그에 전성기를 보내는 선수들이 몰리자, 과거 은퇴를 준비하기 위해 일본리그로 가던 추세는 호주나 동남아시아 리그로 그 목적지가 변한다.
2. 춘추제
2.1. 1990 시즌
2.2. 1991 시즌
2.3. 1992 시즌
2.4. 1993 시즌
2.5. 1994 시즌
2.6. 1995 시즌
2.7. 1996 시즌
2.8. 1997 시즌
2.9. 1998 시즌
2.10. 1999 시즌
3. 추춘제
3.1. 1990-91 시즌
3.2. 1991-92 시즌
1991년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독일 바이어 04 레버쿠젠 아마추어팀에 입단한 황선홍은 반 시즌동안 아마추어리그를 그야말로 폭격하며 자신의 레벨과 맞지 않는 무대임을 어필했다. 그러나 1군으로 올라간 뒤 레버쿠젠에서 분데스리가 데뷔 기회는 끝내 주어지지 않은 채 2군 경기 1게임만을 소화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3.3. 1992-93 시즌
축구대표팀의 윙어 김주성이 대우 로얄즈에서 VfL 보훔으로 이적해 오랫만의 한국인 분데스리가 선수가 탄생했다. 그러나 13경기 출전에 그치며 주전으로 뛰지는 못했다. 황선홍은 프로무대에서의 출전기회를 잡기 위해 부퍼탈 SV 보루시아로 이적해 2명의 한국선수가 독일에서 뛰게 되었다. 황선홍은 초반 5경기에서 3골을 몰아치며 팀의 주전을 꿰차나 전반기에 6개월짜리 십자인대 부상을 입으면서 전력에서 이탈했고, 후반기 늦게 복귀했지만 복귀 2경기째만에 무릎 연골 파열의 부상을 입어 수술대에 올라 결국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이후 재활을 마치고 황선홍 선수는 K리그로 무대를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1대8 트레이드 파동이 일어난다.
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며 유벤투스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도 병역법 때문에 해외 진출이 불가능했던 최순호는 30이 넘어서야 프랑스에 지도자 연수를 하러 가면서 해외리그 무대를 너무 늦게 밟게 되었다. 100퍼센트 선수생활에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 2부리그에서 18경기 2골이라는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3.4. 1993-94 시즌
소속팀의 강등으로 인해 김주성은 2. 분데스리가 무대를 밟게 되었고 1년 전과 달리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는 등 적응에 성공해 팀의 분데스리가 재승격을 이끌게 되지만, 이후 팀의 대대적인 전력보강에 의해 자리를 위협받게 되어 월드컵이 끝난 뒤 친정팀 대우 로얄즈로 복귀하는 결정을 내린다.
1년 전의 최순호와 마찬가지로 80년대 대표팀 주전 윙백이었던 박경훈이 지도자 연수를 위해 찾은 잉글랜드에서 아마추어리그에 등록을 해 1년간 뛰었다. 7부리그라 출전 기록은 아쉽게도 찾기 힘들다. 당시 뛰었던 팀인 예딩 FC는 이후 인근 지역의 팀인 헤이스 FC와 합병해 지금의 헤이스&예딩 유나이티드가 되었다.
3.5. 1994-95 시즌
3.6. 1995-96 시즌
3.7. 1996-97 시즌
3.8. 1997-98 시즌
김주성 이후 뜸했던 한국 선수의 유럽진출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활발해진다. 먼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출신인 미드필더 정재권이 비토리아 FC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첫 포르투갈 리그 선수가 되었다. 정재권은 1월 초 진출하여 3개월간 5경기에 나와 1골을 넣는 등 빠르게 리그에 적응했지만 에이전트의 미숙한 일처리 + 친정팀 부산 대우의 복귀 압박에 못이겨 짧은 해외리그 생활을 마무리해야 했다.
바로 며칠 뒤엔 대표팀 주전 윙어 서정원이 RC 스트라스부르로 전격 입단했다. 앞선 1997년 포르투갈 명문 SL 벤피카 이적을 코앞에 두고도 대표팀의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정때문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을 푼 것이다. 당시 리그 종료까지 12경기를 남겨두고 강등권에 위치한 RC 스트라스부르였기에 서정원은 영입되자마자 주전으로 활약하며 12경기에 모두 나와 4골을 넣는 맹활약으로 팀을 강등위기에서 탈출시키는 대 활약을 한다.
1993년 J리그 출범부터 줄곧 일본무대를 누비던 노정윤 또한 1998년 1월 에레디비지에 깜짝 진출하면서 허정무 이후 두번째 네덜란드 진출 선수가 되었다. 또 당시 비슷한 시기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임대선수로 포항 스틸러스 출신의 라데 보그다노비치가 합류하면서 같이 뛰기도 했다. 첫 시즌이던 1998년에는 별 활약은 못했고 적응기를 가졌다.
3.9. 1998-99 시즌
먼저 진출했던 노정윤과 서정원은 월드컵 종료 이후에도 국내에 복귀하지 않고 계속 유럽에서 활동했다. 노정윤은 전 시즌보다 안정된 활약을 보이며 리그 전반기 16경기에 나와 1골을 넣는 등의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J리그에서 오퍼가 오자 1999년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하면서 짧은 유럽생활을 정리한다.
서정원은 지난 시즌의 대활약에 힘입어 팀의 에이스로 평가받는 등 전망이 밝았으나 전임 르네 지라르 감독 대신 후임으로 온 피에르 만코프스키가 이상하리만큼 서정원을 외면하며 아프리카계 선수들만 편애하는 이해하지 못할 팀 운영을 보이고 서정원은 후보로 밀린다. 당시 팀 수뇌부가 상황을 보다못해 서정원에게 임대를 제의하기도 했지만, 서정원은 계속 팀에서 경쟁하는 것을 선택했고 결국 4경기 출전에 그치며 1999년 2월 K리그 복귀를 선택하게 된다. 이 당시 스트라스부르 감독과 선수들의 불화는 비단 서정원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팀의 핵심인 서정원, 올리비에 다쿠르, 발레리앙 이스마엘 모두 팀을 떠나고, 팀 또한 강등된다.
1999년 1월엔 이상윤이 프랑스로 깜짝 진출에 성공한다. FC 로리앙에 입단한 이상윤은 4경기 출장했지만, 적응에는 실패하며 시즌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K리그로 복귀한다. 입단 초기만 해도 현지에서 서정원을 연상하며 큰 기대를 받았지만 적응에 실패하며 제 실력을 보여줄 겨를도 없이 빠르게 잊혀진것.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실패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다가올 안방에서의 월드컵에 대비하기 위해 대학 유망주들을 해외로 진출시키는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그 첫번째 수혜자가 홍익대에 재학중이던 김도용이었다. 98년 여름 김도용은 홍익대에 휴학계를 내고 터키 카라뷔크스포르와 계약하며 첫번째 한국인 터키 진출선수가 되었다. 6개월간 짧게 활약한 후 김도용은 99년 한국에 복귀해 학업을 마치고 2000년 K리그 안양 LG에 입단한다.
3.10. 1999-00 시즌
대한축구협회의 유망주 해외 진출 프로젝트 이후 여러 대학 선수들이 해외 도전에 나섰다. 고려대 출신의 수비수 박경환이 J리그 퇴단 이후 대한축구협회의 주선으로 당시 독일 3부리그은 FSV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팀의 상위리그 승격이 어려워지자 박경환은 2001년 초 K리그 전북 현대에 입단하며 한국으로 돌아간다.
99년 여름엔 수원 삼성의 2군 선수였던 박정석이 루마니아 2부리그로 임대되어 반 시즌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수원의 스쿼드 두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경기를 뛰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인데,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도 2경기 출전에 그치며 이후 독일로 재임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