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하인츠 리들레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선수이다. 별명은 '''에어 리들레.'''
1990년대 중후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클럽의 최전성기를 이끈 헤딩 스페셜리스트이다. 국가대표로써는 로타어 마테우스,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등과 함께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해 우승 멤버가 되었고 뒤이어 1994년 미국 월드컵 때에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했다.
우리에게는 3차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2번째 골을 넣은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키는 180cm로 스트라이커치고는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점프력이 탁월하여 헤더에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별명이 에어 리들레(Air Riedle)였다. 이런 타입은 훗날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물려받았다. 클로제 역시 키는 182cm 정도로 공격수치고는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점프력이 좋아서 헤더 골을 많이 넣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리들레는 TSV 엘호펜과 SV 바일러의 유소년팀을 거친 후 1983년에 FC 아우크스부르크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이곳에서 그는 1986년까지 3년 동안 활약하였다. 이후 그는 SpVgg 블라우 바이스 90 베를린에 입단했지만 그의 영입을 절실히 원하던 SV 베르더 브레멘의 오토 레하겔 감독[1] 이 적극적으로 러브 콜을 보내 결국 다음 해인 1987년에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다. 그는 브레멘의 첫 시즌인 1987-88 시즌, 33경기에 출장하여 18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보았던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은 곧바로 그를 국가대표에 발탁시켰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오토 레하겔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리들레는 86경기에 출전해 총 38득점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했다.
그리고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이 끝난 후 세리에 A의 SS 라치오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그는 처음으로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 그의 이적료는 무려 1,300만 마르크였다고 한다. 그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라치오에서 활약하면서 84경기에 출전해 30득점을 기록하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93년에 다시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돌아온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하였다. 도르트문트에서 그는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는데 1995년과 1996년에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2연패 달성을 이끄는데 크게 공헌했고 또 1997년, 그는 유벤투스 FC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2골을 득점하여, 팀의 3-1 완승을 견인함과 동시에, 도르트문트의 첫 번째 빅이어를 안겨주었다.
이런 리들레의 활약에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도 관심을 보였고 결국 그는 1997년에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서 리버풀 FC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 32세였던 리들레는 이제 서서히 선수로서 노쇠화가 오기 시작했고 독일과는 또 다른 영국의 축구 풍토에 대한 부적응 등으로 인해 주전 자리를 꿰차는데 실패했다. 그리하여 저조한 활약을 보이다 결국 2년 후인 1999년에 풀럼 FC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선수 말년을 보낸 뒤 2001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국가대표 커리어 전반에는 루디 푈러와 위르겐 클린스만에 이은 독일의 제3의 공격수 옵션이었다. 88년부터 92년까지 독일 대표팀은 기본적으로 푈러와 클린스만 투톱 체제였고 리들레는 이들의 교체 멤버로 활약했다.
90 월드컵 때 클린스만과 푈러의 교체 멤버로 투입되며 우승 멤버가 되었다.
92 유로 때도 역시 독일 대표팀은 푈러, 클린스만 투톱 체제로 갈 예정이었지만 푈러가 첫 경기에서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이후 리들레가 클린스만과 투 톱을 이루며 활약하게 되었고 리들레는 대회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이후 푈러가 은퇴했고, 리들레는 클린스만과 투톱으로 94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독일은 저조한 경기력으로 8강에서 조기 탈락했다. 대회 이후 독일 대표팀은 세대 교체에 들어갔고, 마테우스, 클린스만, 헤슬러를 제외한 나머지 90 월드컵 우승 멤버들과 함께 대표팀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클린스만과 리들레는 나이가 거의 비슷했고 클린스만은 국대 커리어 전반기에 득점력이 저조한 편이었기에 클린스만 대신 리들레를 주전으로 써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특히 리들레가 처음으로 주전으로 활약했던 92 유로에서 리들레가 득점왕에 오르면서 한 경기 더 뛴 클린스만보다 확실히 더 나은 결정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94 월드컵 때부터 클린스만의 득점력이 확 살아났고, 이에 쓸놈쓸로 유명한 포크츠 감독은 기존부터 주전이었던 클린스만을 주전으로 눌러 앉히고 리들레는 키르스텐, 비어호프에 밀려 대표팀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2.2.1. 1988 서울 올림픽
리들레는 1988년, 위르겐 클린스만 등과 함께 서독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때 리들레는 대표팀 주전은 아니어서 잠비아와의 8강전 단 1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고 그마저도 전반 29분에 부상으로 이탈되고 말았다. 당시 서독은 중국, 튀니지, 스웨덴과 함께 A조에 속했는데 1차전에서 중국을 3 : 0으로 꺾은 뒤 2차전에서 튀니지를 4 : 1로 대파하며 2경기만에 8강 진출을 확정지었으나 3차전에서 스웨덴에 1 : 2 패배를 당하며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그리고 8강에서 잠비아를 4 : 0으로 대파하였고 4강에서 브라질과 1 : 1로 비긴 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치렀으나 그만 2 : 3으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탈리아를 3 : 0으로 대파하며 동메달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2.2.2.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그의 본격적인 첫 국제 대회는 바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당시 서독은 유고슬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콜롬비아와 함께 D조에 속했다. 리들레는 1차전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선 벤치에서 대기했고 이 때 서독은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루디 푈러의 맹활약에 힘입어 유고슬라비아를 4 : 1로 대파했다. 2차전 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선 후반 26분에 위르겐 클린스만과 교체 투입되어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서독은 루디 푈러의 멀티골과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우베 바인이 각각 1골씩 터뜨리며 5 : 1로 대승을 거두었다. 3차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도 리들레는 벤치에서 대기했는데 팀은 1 : 1로 비겼다.
서독의 16강 상대는 바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였다. 이 때 리들레는 후반 32분에 위르겐 클린스만과 교체 투입되었다. 서독은 후반 6분, 클린스만의 골과 후반 40분에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추가골을 터뜨려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었고 후반 44분에 로날드 쿠만에게 페널티 킥 만회골을 내주긴 했지만 2 : 1로 승리를 거두어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동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리들레는 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독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맞아 다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전반 25분에 터진 로타어 마테우스의 페널티 킥 결승골에 힘입어 간신히 1 : 0으로 꺾고 4강에 올랐다.
그리고 4강 상대는 라이벌인 잉글랜드였다. 리들레는 전반 38분에 루디 푈러의 교체 선수로 투입되었다. 당시 서독은 후반 15분에 터뜨린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골로 앞서갔지만 후반 35분에 게리 리네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90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연장전을 치르게 되었고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아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이 때 리들레는 3번 킥커로 뽑혀 승부차기에 나섰고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반면, 잉글랜드 측에선 4번 킥커 스튜어트 피어스와 5번 킥커 크리스 워들이 실축하여 결국 서독이 승부차기 4 : 3으로 승리해 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서독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이래로 3개 대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한 셈이다.
결승전 상대는 바로 지난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아르헨티나였다. 리들레는 불행하게도 결승전에서는 뛰지 못했다. 그러나 서독은 후반 40분에 터진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페널티 킥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아르헨티나를 1 : 0으로 꺾고 1974년 서독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3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리들레는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우승을 맛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2.2.3. 유로 1992
SS 라치오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리들레는 당연히 유로 1992에도 출전했다. 이 대회는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후 출범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출전하는 국제대회였다. 당시 독일은 소련이 붕괴되고 탄생한 독립국가연합 축구 국가대표팀,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와 함께 2조에 속했다. 1차전 상대는 바로 독립국가연합이었다. 이 경기에서 리들레는 루디 푈러와 함께 중앙 투 톱으로 출전했다. 하지만 별 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1 : 1로 비기고 말았다. 짝이었던 푈러와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2차전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선 짝이 바뀌어 위르겐 클린스만과 중앙 투 톱을 섰는데 이제야 호흡이 맞았는지 리들레의 플레이는 급격히 살아났고 전반 29분에 선제골을 넣으며 본인의 첫 국제대회 골을 넣었다. 그리고 후반 2분에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쐐기골을 넣어 스코틀랜드를 2 : 0으로 꺾었다. 3차전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네덜란드였다. 이 경기에서도 리들레는 클린스만과 투 톱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리들레는 다소 부진했고 후반 31분에 토마스 돌과 교체 아웃되었다. 독일 역시 네덜란드에 1 : 3으로 패배하며 조 2위로 간신히 4강에 올랐다. 4강전 상대는 바로 스웨덴이었다. 이 경기에서도 리들레는 클린스만과 함께 중앙 투 톱으로 출전했다. 독일은 전반 11분, 토마스 헤슬러의 선제골로 앞서나가며 수월하게 경기를 풀어갔고 리들레 본인 역시 후반 14분과 후반 43분에 골을 터뜨리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 결과 독일은 스웨덴을 3 : 2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6년 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0 : 2 참패라는 치욕을 안겨주었던 데니쉬 다이너마이트 덴마크였다. 리들레는 이 경기에서도 선발 출전했다. 독일은 시종일관 덴마크를 강하게 몰아붙였지만 덴마크의 전설적인 수문장 피터 슈마이켈의 선방쇼에 막히며 좀처럼 덴마크의 골문을 열지 못했고 오히려 덴마크의 강력한 역습 2방에 무너지며 결국 또 0 : 2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원래 덴마크는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던 팀인데 원래 본선에 올라오기로 했던 유고슬라비아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나라 사정이 복잡해서 출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대신 올라온 팀이었다는 것이다.
2.2.4. 1994년 미국 월드컵
리들레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하는데 성공했다. 이 월드컵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후 출범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치르는 월드컵이었다. 당시 독일은 볼리비아, 스페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함께 C조에 속했다. 사실상 스페인을 제외하면 독일을 막을 자가 없는 '''꿀조''' 중의 꿀조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독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차전 조 최약체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리들레는 선발 출전했지만 부진한 활약을 보였고 끝내 후반 15분에 마리오 바슬러와 교체 아웃되고 말았다. 독일은 시종일관 볼리비아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력을 펼치고도 좀처럼 볼리비아의 골문을 열지 못했고 후반 16분에 터진 위르겐 클린스만의 결승골로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2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선 결장했고 이 때에도 독일은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전반 14분, 안도니 고이코에체아에 선제골을 허용하며 끌려갔다. 패색이 짙어진 독일은 후반 3분, 위르겐 클린스만의 동점골로 간신히 1 : 1로 비겼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상대인 대한민국과의 경기가 남았다.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리들레는 선발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리들레는 전반 20분, 대한민국의 최인영 골키퍼가 펀칭 미스로 흘린 볼을 잽싸게 밀어넣으며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득점하는데 성공했다. 전반 12분과 37분에 위르겐 클린스만이 넣은 골까지 보태어 전반전을 3 : 0으로 기분좋게 마친 독일은 오랜만에 대승을 거두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후반전 들어 40℃를 오르내리는 댈러스의 폭염에 노장 선수들이 즐비한 독일 선수들의 체력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틈에 대한민국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후반 7분, 황선홍의 만회골을 시작으로 후반 18분엔 홍명보가 또 1골을 뽑아내 순식간에 점수가 3 : 2로 좁혀졌다. 리들레는 최전방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과 함께 자기 진영에서 극단적인 수비만 하는 굴욕을 당했고 결국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3 : 2로 신승을 거두어 2승 1무의 전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 상대는 벨기에였다. 리들레는 이 경기에서 벤치에 대기했다. 당시 벨기에는 조별리그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덜미를 잡힐 정도로 맛이 간 팀이었지만 독일은 고질적인 체력 저하로 인해 우세한 경기력을 펼치고도 고전을 면치 못하며 결국 3 : 2로 신승하며 간신히 8강에 올랐다. 8강전 상대는 불가리아였고 리들레는 이 경기도 결장했다. 독일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후반 2분, 로타어 마테우스의 페널티 킥 골로 앞서나갔지만 후반 30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3분 후에는 요르단 레치코프에게 역전골을 허용해 1 : 2 역전패를 당하며 8강에서 퇴장해야 했다. 리들레의 마지막 월드컵도 막을 내렸다.
3. 지도자 경력
2000년 3월에 풀럼에서 뛰던 당시 감독이었던 폴 브레이스웰이 해임되었는데 리들레는 로이 에반스 전 리버풀 감독과 함께 1999-2000 시즌 잔여 기간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 하지만 이 외에는 지도자 경력은 없다.
4. 수상 목록
4.1. 클럽
-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분데스리가 우승 : 1994-95, 1995-96
- DFL-슈퍼컵 우승 : 1995, 1996
-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 1996-97
4.2. 국가대표팀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
- UEFA 유로 1992 준우승
- 1988 서울올림픽 동메달
[1] 훗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리와 맞붙었던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그 사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