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1998년

 



'''KBO 리그 역대 시즌 일람'''
1997년 시즌

'''1998년 시즌'''

1999년 시즌
'''기간'''
1998년 4월 11일 ~ 1998년 10월 30일
'''참가팀 '''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 이상 8개팀.
'''스폰서 '''
올스타전 : 코카콜라
포스트시즌 : 현대자동차 아토스
1. 개요
2. 정규시즌 최종순위
3. 신인드래프트
4. 포스트시즌
5. 다른 시즌 보기


1. 개요


1998년에 열린 프로야구 시즌.
팀당 126경기씩 총 504경기가 열렸다.
1997년 외환 위기와 양대 재벌그룹인 현대, 삼성의 돈지랄로 설명이 가능한 시즌. 현대 유니콘스는 엄청난 현금을 동원해 박경완, 조규제, 전준호, 박종호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전력을 보강했고, '''돈대'''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결국 우승했다. 이는 '''인천 연고 야구단의 최초 우승'''으로 삼청태 이래 17년만의 우승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삼성 라이온즈김상진, 김기태, 김현욱, 임창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지만 정작 우승은 '''4년 후'''에 했다.
한편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되어 OB 베어스타이론 우즈가 42홈런으로 기존 1992년 장종훈의 41홈런의 기록을 경신했다. 당초 이승엽이 장종훈의 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유력했으나 8월 이후 갑자기 슬럼프에 빠진 사이 우즈가 OB의 잔여경기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을 잘 살려서 무섭게 홈런포를 쏘며 이승엽을 추월했다. 그 외에 현대 유니콘스스캇 쿨바 역시 괜찮은 활약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와 더불어 선발 투수 예고제가 이 시즌부터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스폰서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즌이기도 하여 올스타전에는 코카콜라가, 포스트시즌에는 현대자동차 아토스가 스폰서로 되었다.
이 해와 다음 해는 화요일에 휴식을 가져 수~금 3연전, 토~월 3연전 후 화요일 휴식을 시행했다.
1995년 540만 관중으로 정점을 찍은 총관중수는 1996년 449만, 1997년 390만명으로 감소를 겪은 뒤 1998년에는 300만 관중도 채우지 못하고 263만 3119명의 총관중에 그쳤다. IMF 외환위기의 영향도 있으나 같은해 프로축구의 관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메이저리그의 박찬호와 일본프로야구의 선동열, 이종범 등의 경기가 국내에 중계되면서 국내프로야구의 인기는 떨어졌다.

2. 정규시즌 최종순위


'''순위'''
''''''
'''경기수'''
''''''
''''''
'''무승부'''
'''게임차'''
'''승률'''
1
현대 유니콘스
126
81
45
0
-
0.643
2
삼성 라이온즈
126
66
58
2
14.0
0.532
3
LG 트윈스
126
63
62
1
17.5
0.504
4
OB 베어스
126
61
62
3
18.5
0.496
5
해태 타이거즈
126
61
64
1
19.5
0.488
6
쌍방울 레이더스
126
58
66
2
22.0
0.468
7
한화 이글스
126
55
66
5
23.5
0.455
8
롯데 자이언츠
126
50
72
4
29.0
0.410
이 시즌부터는 승률 계산 방식이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사용한 '승리/(경기수-무승부)' 공식으로 환원되었다. 이 공식은 다승제를 사용한 2003년, 2004년 시즌을 제외하고 2007년 시즌까지 사용된다.
현대 유니콘스가 126경기 체제에서는 사상 최단경기인 '''111경기'''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1] 시즌 초반부터 일찌감치 치고 나간 현대의 양민학살 덕에 2002년 시즌과는 반대로 승률 디플레가 심했다. 당장 정규리그 2위 삼성과 승률은 1할 이상, 경기차는 무려 14경기 차이로 벌어졌고, 준우승팀이자 정규리그 3위 LG가 5할을 간신히 넘겼고[2] 4위 OB는 5할도 못되는 승률로 가을잔치에 초대받았다. 여기에 시즌 막판 중위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역시 볼만했는데, 3위 LG, 4위 OB, 5위 해태 간 경기차가 각각 1경기 차로 최종순위가 결정되었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OB와 해태의 단두대 매치 2연전으로 최종 4위가 결정되었다. 여기서 1무만 해도 가을잔치에 참가 할 수 있던 해태는 막판에 허무하게 2연패를 당하며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3][4] 그리고 IMF 여파를 제대로 맞아 주축 선수들이 빠져나가 몇 년 간 하위권에서 맴돌던 해태는 결국 기아자동차에 인수된 뒤 KIA 타이거즈로 간판을 바꿔달고 2002년에야 다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된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이 현대, 삼성, LG 등 최상위권 재벌이라는게 특징. 이 세 팀은 공격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들만 팀 600득점을 넘겼다. 반면 전년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4강에 탈락. 해태와 쌍방울은 자금난으로 외국인과 계약하지 않았고 해태는 꼴찌 추락 충격에 뒤늦게 숀 헤어를 데려왔지만 망했다.
시즌 중 감독을 교체한 팀이 두 팀이나 있었다. 롯데는 6월 최하위에 처지자 김용희 감독을 경질하고 김명성을 대행으로 임명했고 한화는 치열한 4위 경쟁중임에도[5][6] 강병철을 올스타전 경기일에 경질하고[7] 이희수를 대행으로 세웠다. 감독교체의 효과는 있어서 롯데는 8월의 상승세로 잠시 4위에 반경기차 5위까지 올라갔고 한화 역시 막판까지 4위를 지켰다. 하지만 두 팀 모두 뒷심 부족으로 나란히 한화는 7위, 롯데는 8위로 마감했다. 양 팀은 다음해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3. 신인드래프트


한국프로야구/1999년/신인드래프트

4. 포스트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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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른 시즌 보기




[1] 무승부 없이 81승 45패[2] 이것도 7월에 5위까지 떨어졌다가 시즌 후반 주니어 펠릭스가 뒤늦게 가세한 타선의 힘과 다승왕 '''김용수'''의 대활약으로 올라온 것.[3] 이게 OB 입장에서는 진짜 극적이었는데 사실 OB는 시즌 종료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9월초에 꼴찌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많은 우천취소로 인한 많은 잔여경기에서, 그것도 홈경기보다 원정경기가 훨씬 많은 일정에서 타이론 우즈김동주의 활약으로 최대한 승수를 벌었음에도 이전 6경기 포함해서 8경기를 남겼을때 8연승을 해야만 무조건 가을잔치 합류였다. 즉 한 경기라도 지면 무조건 탈락. 사실상 가능성이 희박했는데 '''기어이 8연승을 거두며 기적적으로 4위에 올라 준플레이오프에 합류하고 만다.''' 미디어가 발달된 요즘같으면 OB의 기적이니 뭐니하면서 언론사가 시끄러울만한 사건. 그러나 OB는 이 와중에 있었던 구단 버스 전복 사고의 여파로 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4] 반면 해태의 경우 8월 중순 꼴찌 및 -13의 승패마진을 극복하며 이대진-이강철-최상덕의 쓰리펀치를 앞세워 8~9월의 대반전으로 극적으로 4위에 올라 OB와의 마지막 2연전 중 1무만 해도 4위 확보는 물론이고 2경기를 모두 가져갔을 경우 LG를 끌어내고 3위 자리까지 넘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OB와의 첫 번째 경기에서 패했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어떻게든 이겨보기 위해 임창용을 3회에 조기 투입시키는 초강수를 뒀으나 11:5로 대패하며 최종순위 5위로 내려앉았다.[5] 전반기 한화는 4위 쌍방울에 반게임차 5위였다.[6] 한화는 시즌 전 현대, OB와 함께 우승후보로 언급됐다. 1990년대 중반 투수력에 비해 현저히 부족했던 공격력을 마이크 부시조엘 치멜리스의 영입으로 장종훈에 대한 견제가 줄어들고 강했던 투수진과 함께 전력이 급상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대성이상목, 한용덕이 고군분투했으나 송진우, 정민철이 부진한 시즌을 보내고 무엇보다 부시가 초반 반짝 이후 부상으로 드러눕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그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7] 경질 시점은 한화가 4위 쌍방울과 0.5경기차 5위로 치열하게 순위경쟁을 펼치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