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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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기악(韓基岳)
자 / 호
명오(明五) / 월봉(月峰)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898년 1월 14일[2] ~ 1941년 6월 20일
출생지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3]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신간회 발기인 등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8년 1월 14일 강원도 원주군(현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4]에서 1891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 홍문관수찬(修撰)을 지낸 한정우(韓正愚)의 유복자(!!)로 태어났다.[5]
그의 친가인 청주 한씨 가문은 조선시대 고관을 여럿 배출한 집안이었고, 그의 12대조 한백겸(韓百謙)은 광해군 시절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던 실학파의 선구자로서 동국지리지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한기악의 직계 5대조인 한치응(韓致應)부터 아버지 한정우에 이르기까지 5대 연속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두루 고위 관직을 지냈다.[6] 그의 외가는 한양 조씨 가문으로서 외조부 조종필(趙鍾弼)은 정암 조광조의 14대손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군이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사람들이 집을 잃자, 그의 증조모는 저택을 헐어 마을 사람들에게 목재로 나눠주고 한양으로 이사를 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기악은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5대 독자로서 혼인을 일찍 해야 했기에, 1911년 아내 의령 남씨 남희정(南喜貞)[7]과 결혼하였다. 1914년 서울에서 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청년시절 미남자로 유명하였으며, 심성이 부드러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를 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예의 바르며 세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집에서 손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는 할머니를 생각하여 아무리 취해도 반드시 집에 들어갔을 정도로 효심도 지극했다고 한다.
191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나라 잃은 설움에 이승복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만주, 연해주 등을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상설, 이회영, 신채호, 이동녕으로부터 학업을 계속하라는 권유를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변영로 등 중앙학교 동기생들이 이미 가있던 도쿄에서 메이지대학을 다녔으나, 1919년 이광수, 백관수와 함께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을 준비하느라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 잠입해 송진우 중앙학교 교장을 도와 독립선언서 제작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자 이를 일본의 정치인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중국인 벙어리로 위장하여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후 상하이에서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으며, 4월 22일 이시영 법무총장 밑의 법무위원 3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보고 분노를 느껴 단상으로 뛰어올라 "내가 비록 나이 어린 청년이나 당신네들이 국민을 이끌고 나가는 처지로서 이럴 줄 몰랐다"고 통곡을 한 뒤 1919년 말경 일제의 체포를 무릅쓰고 귀국을 하였다.
그 후 일본의 문화통치 덕에 모교인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계동의 인촌 김성수 사랑채에 자주 출입하며 민족적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920년 일본의 유화정책으로 민족신문의 발간까지 허용되자, 인촌 김성수를 도와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에서 편집기자, 편집국장 대리를 맡았고,1921년에는 잠시 발행인 겸 편집인까지 역임하는 등 대활약했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1920년 7월에 조선청년회 연합기성회를 조직하여,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 운영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여 정기총회에서 대표자 중 1인으로 뽑혔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했다.
1924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의 정치부장, 경제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일제의 탄압 일변도 정책에 대해 규탄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단재 신채호의 글을 동아일보에 받아 '조선사 연구초' 등 단재의 주요 저작이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이 당시 언론인으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고,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도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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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야유회 장면 (가운데 앉은 사람이 한기악이고 한기악의 왼쪽이 유광렬, 한기악의 오른쪽이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김동환이다.)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서 나와, 좀 더 행동적인 사람들이 모여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여기서 벽초 홍명희 등과 일하였으며,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자, 송진우·민태원과 함께 사이토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8] 이렇게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 겸 기관지 '자활'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3월에는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건립운동을 벌였다.
1927년 2월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인사를 망라한 민족유일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때 이상재, 한용운, 안재홍, 홍명희, 김준연, 문일평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부터 4년간은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족언론인 가운데 중견으로서 동지들을 이끌었으며, 불의에 굴하지 않고 부정과 싸우는 데 앞장섰다. 일본 헌병이 비행 폭로기사의 출처를 추궁하며 협박하면 이를 보기좋게 물리쳤고, 전남 하의도 소작쟁의에 관한 기사때문에 일본 앞잡이 박춘금이 일인 경부를 대동하고 나타나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며 기사취소를 요구할 때에도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빳빳이 세워두었다가 일갈 퇴치하기도 하였다.[9] 또한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주먹다짐을 하며 덤빌 때에도 미소로 물리치는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전'을 조선일보에 연재케 한 것도 한기악이었다.
1930년 10월부터는 조선일보의 경영난[10] 타개에 전념하고자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업무이사가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마련해 사원들에게 제공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이때 빚을 많이 얻어 집을 팔고 왕십리밖 안정사라는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 후 1935년부터는 인촌 김성수의 배려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였고,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일제의 압박이 어느때보다도 더 험하던 시대에 교육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지조를 잃지 않고 투쟁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20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학교 사택에서 패혈심장판막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3세.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가족관계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딸이 모두 공부를 잘했다. 장남 만춘(萬春)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노팅엄대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연세대학교 이공대 학장,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차남 만년(萬年, 1925년 10월 29일 ~ 2004년 4월 30일)은 보성전문 상과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한민국 출판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조각(一潮閣)[11]을 설립하고 경영하였다. 3남 만청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장을 역임했다.
장남 만춘에게서 난 장손 민구는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였고,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차남 만년은 현민 유진오의 딸 유효숙과 결혼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4남 1녀 중에 장남 성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만년의 차남 경구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외무고시에 수석합격하고 외무부에 근무하다가 하버드대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있다.[12] 만년의 3남 준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 교수로 김덕주 전 대법원장의 딸인 김수경과 결혼했으며, 만년의 4남 한홍구는 수많은 저술과 칼럼으로 유명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만년의 외동딸 승미는 대학학력고사 전국 차석을 차지한 뒤 서울대 인류학과와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다.
한기악의 외동딸 만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춘식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의대 교수가 되었다. 만증의 차남 윤호식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1] 문정공파 31세 기(基) 항렬.[2] 음력 1897년 12월 22일.[3]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한범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5] 청주한씨 제7교 대동족보 7권 262쪽에는 한정우가 1937년 5월 2일에 별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긴 하나, 차남 한만년(韓萬年)이 그의 수필집인 『일업일생(一業一生)』(일조각, 1984)에서 '선친께서는 4대 독자의 유복자로 뒤늦게 출생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족보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6] 5대조 한치응(韓致應) : 1783년(정조 7) 생원-1784년(정조 8) 문과-종1품 판의금부사
고조부 한진정(韓鎭庭) : 1827년(순조 27) 문과-정2품 형조판서
증조부 한돈원(韓敦源) : 1846년(헌종 12) 진사-1858년(철종 9) 문과-정2품 공조판서
조부 한석동(韓晳東) : 1874년(고종 11) 문과-정7품 가주서.
[7] 남만희(南晩熙)의 딸이다.[8] 그러나 '개벽'지는 그 다음 해인 1926년 폐간이 되고 말았다.[9] 고하 송진우도 박춘금 앞에서 창피를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독한 인간이 박춘금이었으나, 그 앞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취소는 못하겠다'며 일관하였다고 한다.[10] 당시 조선일보는 식당 외상값도 갚지 못할 만큼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1] 1953년 9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설립된 출판사. 처음 출판된 책은 대표 한만년의 장인(丈人)인 유진오가 저술한 《헌법해의》였다. 1997년 5월 1일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1975년부터 매년 월봉저작상을 시상하고 있다.[12] 한경구의 부인 김시연이 현재 일조각 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