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에린 스포르티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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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설립된 언론사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언론이다.
창던지기를 하는 중세 기사를 묘사한 로고는 1410년에 쓰여진 안드레아 디 바베리노의 기사도적 로맨스 '일 구에린 메스키노'(지긋지긋한 전사')의 주인공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신문에서 잡지 형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더 많은 사진을 포함하게 되었고, 잡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축구 관련 내용이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아예 축구 전문 언론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2. 상
2.1. 브라보 상
2.2. 구에린도로(Guerin d'Oro)
이탈리아의 4개 언론(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투토스포르트, 그리고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매긴 주간 선수 평점의 평균값을 구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선수에게 주는 상이다. 1976년부터 2015년까지 수여했다.
출처
2.3.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출처:Bigsoccer 회원 'Vegan10'
구에린 스포르티보에서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했던 올해의 선수 투표이다. 이 상은 국적 제한 없이 좋은 활약을 펼치기만 하면 수상 후보에 포함될 수 있었고, 잡지 구독자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했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옹즈도르와 달리 100% 전문가 투표에 의해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2.3.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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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는 투표를 통해 수상자를 정하지 않았고, 잡지에서 주관적으로 수상자를 정했다. 수상자는 디에고 마라도나. 삽화가 매우 인상적인데, 유럽 위에서 거만한 표정으로 웃는 케빈 키건, 그리고 지구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마라도나를 재미있게 표현했다. 키건은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였고, 마라도나는 1979년에 열렸던 청소년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선수이다. 구에린 스포르티보는 둘 중 마라도나가 1979년의 주인공에 더욱 적합하다고 평가하였다.
2.3.2. 1980
1980년부터 본격적인 투표가 시작되었고, 수상자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정해졌다. 각국의 전문가들이 당해의 베스트 XI를 선정한 후 그 베스트 XI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선수가 수상하는 방식이었다. 1980년 투표에는 유럽/남미 출신 25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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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루메니게가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올해의 선수를 선정하는 방식이 '베스트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만큼, 1980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3. 1981
1981년 투표는 1980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80년 투표에는 유럽/남미 출신 33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26명의 득표를 얻은 공동 1위가 세 명이나 나왔고, 구에린 스포르티보 측에서 자신들의 주관 하에 수상자를 정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기준에 의해 지쿠가 1위로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image]'''중복 수상 최소화'''
마라도나와 루메니게는 이미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쿠가 이번에 수상자가 된다면 처음 되는 것이므로, 지쿠가 받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
'''지쿠가 셋 중 가장 의미있는 해를 보냄'''
지쿠는 플라멩구 소속으로 주립 리그 우승,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달성했으며, 특히 코파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는 유럽 챔피언 리버풀을 상대로 어시스트 세 개를 기록하며 3-0 대승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81년을 기점으로 지쿠는 통산 500골 고지를 밟았다.
결국 1981년에는 지쿠가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올해의 선수를 선정하는 방식이 '베스트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만큼, 1981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4. 1982
1982년 역시 올해의 선수 선정 방식은 1980년, 1981년과 같았다. 1982년 투표에서는 유럽/남미 출신 39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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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31명의 선택을 받은 로시가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올해의 선수를 선정하는 방식이 '베스트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만큼, 1982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5. 1983
1983년부터는 올해의 선수 선정 방식이 바뀌었다. 원래는 '전문가들이 뽑은 올해의 베스트 XI에 선정된 횟수'가 선정 기준이었는데, 1983년 투표부터는 아예 올해의 선수 지정 투표가 신설되었다. 전문가 한 명당 한 명의 선수에게만 투표할 수 있었다. 1983년 투표에는 유럽/남미 출신 65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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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파우캉이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선정 방식이 바뀌었다고 Best XI 투표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2년까지의 기준(각 전문가들의 베스트팀에 선정된 횟수)을 사용하여 1983년의 수상자를 선정한다면 올해의 선수 Top 6 명단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베스트팀 투표도 진행되었으므로 1983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6. 1984
1984년 투표에서는 1983년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유럽/남미 출신 70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3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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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플라티니가 압도적인 점수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Best XI 투표도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1982년까지의 기준(각 전문가들의 베스트팀에 선정된 횟수)을 사용하여 1984년의 수상자를 선정한다면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베스트팀 투표도 진행되었으므로 1984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7. 1985
1985년 투표에서는 1983년, 1984년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유럽/남미 출신 110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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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플라티니가 또 압도적인 점수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1985년에는 베스트팀 투표가 진행되지 않았고, 올해의 선수 투표만 진행되었다.
2.3.8. 1986
1984년 투표에서도 올해의 선정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유럽/남미 출신 96명의 전문가가 표를 던졌고, 그 결과 산출된 올해의 선수 Top 3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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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라도나가 압도적인 점수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며, 상세 득표 내용을 담은 기사도 보도되었다.
1985년에 잠시 사라졌던 Best XI 투표 섹션이 다시 생겼다. 1982년까지의 기준(각 전문가들의 베스트팀에 선정된 횟수)을 사용하여 1986년의 수상자를 선정한다면 올해의 선수 Top 5 명단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베스트팀 투표도 진행되었으므로 1986년의 세계 XI도 선정할 수 있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2.3.9. 역대 포디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