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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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仁吉
1943년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상도동계로 민주산악회 창립 멤버다. 세례명은 요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척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고모할머니가 홍인길의 할머니로 둘은 6촌 간이다.[1]
1943년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부산중학교, 경남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다가 4학년 때 제적됐다.
이후 부산직할시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다가 10.26 사건 후인 1980년 서울의 봄 때 상경해 정치에 입문했다. 1983년 김영삼 총재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민주화 조항 5개조를 걸고 단식을 시작했었다. 단식 8일 째인 5월 25일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그의 와병 혹은 죽음이 데모의 기폭제가 될 걸 우려한 서울시경이 김영삼을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집사 장학재를 타지에 억류하고 김영삼을 납치하는 사태에 홍인길은 정육점 칼을 빼들고 휘둘렀다. 전경들에 둘러쌓인 홍인길을 시경 관계자가 데리고 김영삼이 있는 서울대병원 12층으로 갔다. 삼엄한 경비 속에 병실에 누운 YS는 23일동안 단식했다. 김영삼은 지리멸렬해진 야당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게 됐고, 민주화 운동은 그 기세를 더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했고, 김영삼이 DJ와 손잡고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재정 담당 비서로 일하다가 1989년 총재비서실 차장으로 임명됐다.
1988년 13대 총선 당시 공천 과정에 개입하면서 돈 문제를 일으켜 YS와 오해가 생긴다. 당시 같은 당 박종률 전국구 의원이 서초 지역구에 나오려 했는데, 김덕룡 의원이 서초를 하겠다고 해서 밀려났다. 박 의원을 달래러 비서 자격으로 그를 만났는데, 전국구에 한 번 더 나가라는 홍인길의 말에 대신 5천만원만 만들어달라고 그랬다고. 돈은 양천구에 공천하는 댓가로 박수복 후보에게 받은 5천만원으로 융통해줬다. 공천으로 금품이 오고간 사실이 YS 귀에도 흘러들어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둘째는 너를 믿었는데 우째 이럴 수가 있냐며 혼난 뒤로 한동안 YS와 어색했다고. 양천구에는 김무성도 출마하고 싶었는데 밀려날 거 같자 YS에게 이른 거 같다는 게 홍인길의 판단. YS는 YS대로 DJ측에 약점을 잡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0년 삼당합당으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으로 옮겨가면서 홍인길도 같이 간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총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곽정출 대신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광역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고, 무소속 곽정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한보사태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되었고, 1997년 12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 때 자신은 해당 사건의 몸통이 아니라 깃털이라는 말을 남겼다.
1998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 권노갑과 함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형을 계속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는 검찰의 발표가 있었는데, 정작 70을 넘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계속 형을 살았다. 검찰이 정치권에 굴복한 사례로 기록된 사건이다. 한보 측의 돈이 홍인길에게 이동한 정황은 없었다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즈음해 한나라당에서 공천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지만 거절하고 정계를 떠나있다. 허주 김윤환의 장례식(2003년) 때부터 이제 정계를 떠나자 생각했다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는 문정수 전 부산광역시장, 강삼재 전 국회의원, 심완구 전 의원 등 상도동계 일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김영삼의 친인척이자 최측근으로 상도동계의 정치자금 관리자였지만,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아서 다른 정치인들한테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소위 YS대선자금 문제로 여러번 의혹의 대상에 올랐고, 결국 한보사태로 실형까지 살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洪仁吉
1943년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상도동계로 민주산악회 창립 멤버다. 세례명은 요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척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고모할머니가 홍인길의 할머니로 둘은 6촌 간이다.[1]
1943년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부산중학교, 경남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다가 4학년 때 제적됐다.
이후 부산직할시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다가 10.26 사건 후인 1980년 서울의 봄 때 상경해 정치에 입문했다. 1983년 김영삼 총재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민주화 조항 5개조를 걸고 단식을 시작했었다. 단식 8일 째인 5월 25일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그의 와병 혹은 죽음이 데모의 기폭제가 될 걸 우려한 서울시경이 김영삼을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집사 장학재를 타지에 억류하고 김영삼을 납치하는 사태에 홍인길은 정육점 칼을 빼들고 휘둘렀다. 전경들에 둘러쌓인 홍인길을 시경 관계자가 데리고 김영삼이 있는 서울대병원 12층으로 갔다. 삼엄한 경비 속에 병실에 누운 YS는 23일동안 단식했다. 김영삼은 지리멸렬해진 야당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게 됐고, 민주화 운동은 그 기세를 더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했고, 김영삼이 DJ와 손잡고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재정 담당 비서로 일하다가 1989년 총재비서실 차장으로 임명됐다.
1988년 13대 총선 당시 공천 과정에 개입하면서 돈 문제를 일으켜 YS와 오해가 생긴다. 당시 같은 당 박종률 전국구 의원이 서초 지역구에 나오려 했는데, 김덕룡 의원이 서초를 하겠다고 해서 밀려났다. 박 의원을 달래러 비서 자격으로 그를 만났는데, 전국구에 한 번 더 나가라는 홍인길의 말에 대신 5천만원만 만들어달라고 그랬다고. 돈은 양천구에 공천하는 댓가로 박수복 후보에게 받은 5천만원으로 융통해줬다. 공천으로 금품이 오고간 사실이 YS 귀에도 흘러들어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둘째는 너를 믿었는데 우째 이럴 수가 있냐며 혼난 뒤로 한동안 YS와 어색했다고. 양천구에는 김무성도 출마하고 싶었는데 밀려날 거 같자 YS에게 이른 거 같다는 게 홍인길의 판단. YS는 YS대로 DJ측에 약점을 잡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0년 삼당합당으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으로 옮겨가면서 홍인길도 같이 간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총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곽정출 대신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광역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고, 무소속 곽정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한보사태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되었고, 1997년 12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 때 자신은 해당 사건의 몸통이 아니라 깃털이라는 말을 남겼다.
1998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 권노갑과 함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형을 계속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는 검찰의 발표가 있었는데, 정작 70을 넘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계속 형을 살았다. 검찰이 정치권에 굴복한 사례로 기록된 사건이다. 한보 측의 돈이 홍인길에게 이동한 정황은 없었다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즈음해 한나라당에서 공천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지만 거절하고 정계를 떠나있다. 허주 김윤환의 장례식(2003년) 때부터 이제 정계를 떠나자 생각했다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는 문정수 전 부산광역시장, 강삼재 전 국회의원, 심완구 전 의원 등 상도동계 일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김영삼의 친인척이자 최측근으로 상도동계의 정치자금 관리자였지만,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아서 다른 정치인들한테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소위 YS대선자금 문제로 여러번 의혹의 대상에 올랐고, 결국 한보사태로 실형까지 살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1] 홍의원의 어린 시절 살던 집도 김영삼 대통령의 생가 근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