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샹달 전투

 

'''파스샹달 전투'''
제1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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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17년 7월 31일 ~ 1917년 11월 6일
'''장소'''
벨기에 파스샹달, 이프르 일대
'''교전국'''
<^|1>[image] 독일 제국
<^|1>[image] 대영제국[1]
[image] 프랑스 제3공화국
'''지휘관'''
<^|1>[image] '''에리히 루덴도르프'''
[image] 프리드리히 식스트 폰아르민
[image] 루프레히트 왕세자
<^|1>[image] '''더글러스 헤이그'''
[image] 후버트 고프
[image] 허버트 플러머
[image] 프랑수아 앙트완
'''결과'''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
'''병력'''[2]
77~83개 사단
영국군 50개 사단
프랑스군 6개 사단
'''피해규모'''
사상자 21만 ~ 41만 명
포로 2만 4,065명
사상자 20만 ~ 44만 8,614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영국군의 상황
3.3. 공세 시작 : 제 1차 파스샹달 전투
3.4. 연합군의 승리 : 제 2차 파스샹달 전투
4. 전투에 대한 의문
5. 영향과 결론
6.1. 파스샹달의 변덕스런 날씨
7. 번외 : 1차 캉브레 전투
8.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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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샹달 전투(영어: Battle of Passchendaele(패션데일 전투), 프랑스어: Bataille de Passchendaele)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1917년 7월 31일부터 동년 11월 6일까지 벨기에 플란데런 지방의 파스샹달[3]와 이프르 일대에서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연합군독일 제국군 간에 벌어진 전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5번 동안 계속되는 이프르 전투 중에서 제3차 이프르 전투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베르됭 전투, 솜 전투 같은 소모전의 극치를 달리는 네임드급 전투에 가려 그렇게 인지도가 높은 전투는 아니지만 파스샹달 전투도 만만찮은 인계의 지옥도였다.
파스샹달 전투는 7월 ~ 8월까지 닥돌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 1차 파스샹달 전투와 잠깐의 재정비후 차분하게 공격하여 승리한 제 2차 파스샹달 전투로 나누기도 한다.

2. 배경


조제프 조프르의 뒤를 이은 프랑스군 사령관 로베르 니벨이 내놓은 니벨 공세(1917년 4월~5월)[4]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무의미한 소모전이 되자, 프랑스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였고,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영국 원정군만으로 공세에 나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영국 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고 곧이어 있을 미군의 참전과 더불어 주도적인 압박에 실패할 경우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1918년에 독일군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라도 독일의 전력을 반드시 소모시켜야 했다.[5]
헤이그는 플랑드르에 위치한 항구들을 일소한다는 이른바 ‘북부 작전’을 계획했고 계획의 타당성을 설명하여 유보트로 골치를 앓던 제1해군경 존 젤리코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로이드 조지 전시내각은 7월 21일이 되어서야 최종 승인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헤이그는 만약 인명 피해가 공세로 거둘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를 상회할 경우에는 공세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6]

3. 전개



3.1. 영국군의 상황


헤이그는 '북부 작전'에 대한 승인을 받았지만 뉴포르 일대에서의 독일군의 선제 포격과 공격으로 '북부 작전'은 연기되었고 곧 폐기되었다.
이때 헤이그는 결정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제5군 사령관 후버트 고프 장군에게 본 공세의 핵심 역할을 맡김으로써 제5군이 공격 위치로 이동할 때까지 ‘북부 작전’ 계획의 실행을 지연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주공을 시작하기 전에 겔루벨트 고지대의 서부 지역 점령 작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헤이그가 구체적인 공세 계획 수립을 고프에게 맡김에 따라 영국 원정군은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프가 세운 지나치게 야심찬 계획들은 앞서 언급한 헤이그의 실수들이 가져올 악영향을 더욱 증폭시켰다.
6월 말, 기본적으로 신속한 돌파 작전을 구상하고 있던 헤이그는 실제 공격 개시일이 다가오자, 갑자기 방향을 바꿔 일련의 제한된 공격을 순차적으로 감행하는 단계적 공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헤이그는 군사령관들과 작전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상하급자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프는 여전히 헤이그가 무엇보다 먼저 신속한 돌파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고프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제안은 자신이 지휘하는 제5군을 동원하여 공세 첫날에 6,000야드라는 서부전선 기준으로는 엄청난 거리[7]를 진격해 들어가 독일군 포병대의 주요 집결지를 지나 독일군의 제3방어선까지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독일군의 저항이 약할 경우 공격 부대는 제3방어선 후방의 목표를 향해 진격을 계속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2, 3일 정도 공세를 중지한 후 그 틈을 이용하여 공세 나흘째에 예정된 파스샹달 능선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대를 전방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헤이그는 현장 지휘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고프는 자신의 비현실적인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헤이그는 분명 고프에게 겔루벨트 고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지시키기는 했지만, 고프의 계획이 고지대의 점령에 초점을 충분히 맞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고 재차 겔루벨트 고지 점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다시 한 번 모호한 목표물들에 대한 잘못된 계획을 갖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가 선택한 지역은 공세를 펼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장소였다. 영국군의 공격 대상 지역은 거의 대부분 독일군이 감제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군 포대를 제압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포격을 퍼부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제 거의 구식이 되어버린 장기간의 연속 포격 전술을 다시 한 번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던 것이다.
한편 이프르 지역은 원래 산림과 초원으로 구성된 지역이었으나,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로 이 일대의 배수시설이 모두 파괴되면서 철저한 진흙 수렁이 되어 있었고 이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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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군은 이 수렁을 건너 독일군과 싸우러 가야 했다.
영국군은 2,299문의 포를 5야드에 1문씩 전개했는데, 이는 솜 전투 때 배치한 포의 10배를 넘는 수량이었다. 허버트 고프가 지휘하는 제5군은 1마일에 1개 사단을 촘촘하게 배치했으며, 근위사단과 제15스코틀랜드사단, 하이랜드 사단이 배속되어 영국 근위사단과 독일 근위사단이 대면한 이프르 북쪽 필켐과 1914년에 첫 번째 영국 원정군에 피신처를 제공했던 이프르 남쪽의 박살 난 나무 그루터기만 남은 생츄어리 숲(Sanctuary Wood) 사이에 밀집하여 정렬했다. 그리고 전투 지역에 총 508대였던 항공기 중 180대가 제5군에 할당되었다. 이들 항공기의 역할은 전선 위에서 독일군 관측 기구의 한계선인 5마일 높이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3.2. 독일 제국군의 상황


프리드리히 베르트람 식스트 폰아르민[9]이 이끄는 독일 제4군은 소규모 병력이 지키는 전방 방어 지대 후방에 구축된 콘크리트 토치카와 요새화된 농장들을 중심으로 단단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토치카들은 지상에 건설되어 있었고, 교차 사격으로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8인치 곡사포 이하의 포를 가지곤 도저히 파괴할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 3년 간의 전쟁으로 완전히 늪지대가 되어버린 이프르 지역에서 독일군은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철조망을 확장시켰으며 때로는 무너진 건물에 토치카와 벙커를 설치하여 작업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시설에 완벽한 위장을 제공했다.
그러나 메신에서 영국군이 거대 지뢰를 이용해 독일군에 큰 피해[10]를 입히자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두려움을 가져 플랑드르 선으로 전선을 후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6월 13일 특급 방어 전술가로 알려진 폰로스베르크 대령참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재정비를 통해 플랑드르 진지는 서부전선에서 지리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진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완성된 플랑드르 진지는 9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방에는 방어군 사단의 1선 대대들이 3겹의 참호선에 은신해 있었고 그 앞으로 포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에 청음초[11]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다음 전투 지대는 기관총 초소들이 차지했는데, 1열의 토치카 선이 지원했고, 마지막 후방 전투 지대에는 지원 포대 진지 사이에 산재한 콘크리트 벙커에 반격을 맡을 사단들이 숨어 있었다.
독일군은 진지를 방어하는 데 2개의 별개 대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으며 이에 따라 사단들을 재조직했다. 최초 공격을 견뎌내야 했던 참호 주둔군은 숫자가 줄어 몇 개 중대와 대대로만 구성되었다. 그 뒤 후방 전투 지대에는 반격 임무를 맡은 사단들이 배치되었고 그 임무는 1선 부대들의 고정 방어와 국지적 역공에 의해 적군 공격이 중단되면 전진하는 것이었다. 플랑드르 진지 방어군은 1917년 7월에 10개 사단으로 이루어졌다. 제3근위사단과 제11사단 같은 강하고 훈련이 잘된 정예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1km를 조금 넘는 전선에 1556문의 야포와 중포가 배치되었다.

3.3. 공세 시작 : 제 1차 파스샹달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서 점령해야 할 중요 지점은 이프르 남동쪽의 겔루벨트 고지였다. 영국군 전선에서 2마일 떨어진 이 고지는 주변 저지대보다 약간 높은 곳으로 관측에 유리했다. 그리고 겔루벨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열닷새 동안 400만 발 이상을 퍼부은 포격은 7월 31일 오전 04:00시 직전에 절정에 달했다.
7월 31일 오전 3시 50분, 고프의 제5군 9개 사단은 영국 제2군과 프랑스 제1군의 일부 포병대를 비롯해 야포 2,936문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제5군의 좌측에서는 프랑스 제1군의 2개 사단이 스테인스트라트와 부싱어 사이의 지역을 공격해 들어갔다. 영국 제2군도 제5군의 우측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공세 초기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필켐 능선의 대부분과 능선의 중요 관측소들, 그리고 겔루벨트 고지의 서쪽 끝단이 영국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독일군은 1915년 5월 이래 장악해 온 유리한 고지들을 상실했다. 고장 잘 나기로 악명 높은 전차 역시 공세 첫날엔 2대 밖에 늪에 빠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땅의 겉 표면은 말라있었다. 플루머의 병사들도 홀레베커와 리 서쪽의 독일군 전초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프랑스군은 스테인스트라트를 점령하고 빅스호터 외곽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핵심 공격 목표인 겔루벨트 고지에서 영국 제2군단은 독일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영국군은 전차까지 투입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제2군단에 할당된 48대의 전차 중 공격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단 19대뿐이었고, 이마저도 호허 동쪽의 메냉 가도를 감제하고 있던 거대한 토치카에 설치된 독일군 야포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제2군단의 공격 기세가 꺾이면서 제5군의 공격 전면은 사실상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가 오후 4시가 지나자 폭우로 바뀌면서 시야 범위도 크게 줄어들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반격에 나선 독일군이 영국군을 몰아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겔루벨트로 전진하는 제18군단과 제19군단 병사들의 머리 위로 포격이 가해졌고 포격은 선두 부대가 급히 탈출해야 할 정도로 맹렬했다. 독일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호우가 쏟아져 파괴된 전투 지역은 곧 '''걸쭉한 진창으로 바뀌었다.'''
8월 2일이 되어서도 악천후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세 초반, 제5군은 3,000야드 정도를 전진했지만, 고프가 공세 첫날의 목표로 정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다. 호우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8월 중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가 없었다. 제5군은 8월 16일 랑에마르크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고 적의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랑스 근처의 탄광 지대에 캐나다군 군단을 투입했다. 겔루벨트 고지를 점령하려는 두 차례의 시도는 메냉 가도에 근접한 인버네스 숲과 글렌코스 숲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겔루벨트 고지에 일련의 성과 없는 공격을 퍼부었지만 얻은 땅은 없었고 인명의 손실은 커졌다. 참고로 8월 4일 더글라스 헤이그는 연이은 호우로 진격에 지장이 되자 땅이 굳을 때까지 잠시 공세를 멈추고 런던의 전쟁 내각에 보고를 보낸다. "(공세는) 크게 만족스러웠고 손실은 예상보다 적었다." 물론 공세 첫날 5만 8000명이 사상자(그 중 전사자가 2만명이다)가 발생한 솜 전투보단 훨씬 적었지만 피해는 아래에 있으니 한번 확인하고 비교해 보길 바란다.
7월 31일에서 8월 3일 사이에 제5군은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7,800명이라고 보고했고, 제2군은 1,000명 이상으로 보고했다. 부상자를 포함한 총 사상자는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를 더하여 약 3만 5000명이었고, 독일군도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사활이 걸린 땅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반격 사단을 조금도 투입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왕국의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7월 31일 저녁 일기에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루프레히트는 '''희생이 얼마나 커지든 전장이 얼마나 진창이든 계속해서 공격하겠다'''는 헤이그의 결의를 알지 못했다.
8월 24일 파스샹달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중요 요충지이자 파스샹달 전투의 목표인 겔루벨트 고지에 대한 3번째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프르 방면 공세를 고프의 제5군에서 플러머의 제2군으로 넘긴다.
8월 25일, 헤이그는 뒤늦게 작전 입안 단계에서 고프에게 지휘를 맡긴 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전체 전투의 지휘와 제2군단의 전선을 제2군 사령관 허버트 플러머 장군에게 넘겼다. 헤이그는 플러머에게 3주의 시간을 줄 테니 다음 단계의 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국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압력의 공세 중지 명령을 자기 선에서 최대한 막아내었다.
8월 27일, 제1차 파스샹달 전투가 막이 내리기 직전 전쟁으로 인해 수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글렌코스 숲과 인버네스 숲을 차지하기 위한 영국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고 통과불능의 지역과 독일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전투는 중단되었다. 7월 31일 이후로 약 1만 800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행방불명자들은 상당수가 구덩이 속에서 익사한 자들이었다)되었고 5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실 1차 파스샹달 전투는 참전 군인들에게 있어 혹독한 전투였다.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전장터는 병사들에게 있어 관측과 저격의 대상이 되었고 공세를 시작하려 하면 어김없이 포탄이 날아오곤 했다. 런던의 정치가들에게 있어 이 전투는 계속해서 지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안기고 있었다.

3.4. 연합군의 승리 : 제 2차 파스샹달 전투


9월 4일 짧은 휴식기간 동안 헤이그는 런던으로 소집되어 공세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전시내각에 보여야만 했다. 기존의 고프의 방식은 당연히 미친 짓이었고 하다못해 플러머가 제시한 유기적 형태의 공세라도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를 입증해야 했다. 런던에서 수상인 로이드 조지는 곧 미국이 참전하고 러시아가 교전국에서 이탈했으며, 프랑스는 니벨 공세의 영향으로 군이 붕괴되는 것을 간신히 면한 판국에 영국군의 자원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고 헤이그는 참모총장 윌리엄 로버트슨[12]의 지지를 받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프르에서의 공세를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분명 헤이그의 전략은 무모했고 영국의 역량을 한계까지 끌어내는 것이었지만 헤이그보다 더 나은 인물과 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헤이그의 공세를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젊고 성급한 성격을 지닌 후버트 고프와 다르게 허버트 플러머는 신중했으며 자신이 맡은 병사들을 걱정했다. 플러머는 2년 동안 이프르 구간을 지휘했으며, 위험 장소를 모조리 알고 있었고 사병들의 복지를 걱정하여 병사들로부터 1차 대전의 장군 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 플러머는 다음 단계를 조심스럽게 준비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플러머는 동시에 이 기회를 이용해 보다 유기적인 공격 전술을 도입했다. 공격 시 먼저 보병들이 산병선을 이루며 전진해 나가면 방어 거점과 토치카를 우회하기 위해 느슨하게 배치된 소규모 보병 팀들이 그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각각의 팀은 밀스 수류탄 투척병과 루이스 기관총 사수, 총류탄 사수들을 보유하고 독립적인 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한 차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나가면 소규모 부대들이 후속하여 앞서 전진한 부대들이 남겨 놓은 잔적을 소탕하고 선두 공격 부대를 지연하는 후방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공격 부대 뒤에는 항상 보병 예비대가 배치되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이들은 반격에 나선 독일군에게 치밀하게 계획된 포격과 기관총 탄막 사격을 집중적으로 가할 예정이었다.
플러머는 제한된 목표물에 대한 치밀하고도 단계적인 공격 전술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이러한 전술은 고프가 시도한 것보다 한층 더 얕게 독일군 전선을 연이어 침투하는 형태가 될 것이었다. 이 무렵 비가 그치고 건조한 날들이 이어지는 등 기상 조건까지 유리해졌다. 공격에 나선 영국군은 9월 20일에서 25일에 걸쳐 벌어진 메냉가도 능선 전투 및 9월 26일에서 10월 3일에 걸쳐 벌어진 폴리곤 숲 전투와 같은 소규모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작전들에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제1안잭군단(Anzac,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다.
'조금 빼앗고 지킨다' 방식의 플러머의 공격 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면서 이프르 일대의 독일군은 유기적인 종심 방어 체계를 버리고 다시 한 번 더 많은 전력을 동원하여 전방 방어선을 지키는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심 방어 전술로는 플러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독일군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구식 방어 전술은 전방 방어선의 병사들이 영국군의 치열한 포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였다.
10월 4일 제2안잭군단이 플러머의 제3단계 공격에 투입되었다. 이 군단의 목표는 브로드세인더 능선과 겔루벨트 고지의 동쪽 끝단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영국 제10군단은 폴리곤 숲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소탕 작업을 완료했고, 뉴질랜드 사단 역시 그라펜슈타펠을 점령했다. 그러나 주요 목표물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다시 시작된 호우로 인해 전장이 또다시 늪지대로 바뀌면서 영국군은 이러한 성과를 활용하여 전과 확대에 나설 수가 없었다.
11월 6일 마침내 캐나다 군단이 파스샹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파스샹달 마을은 이 무렵 거대한 돌무더기로 바뀌었고, 11월 10일, 마침내 플랑드르 공세가 종료되었다. 무지막지한 피해를 양 측에서 입었지만, 솜 전투보다 훨씬 적은 사상자였고, 1일 평균 사상자 수도 1917년 초의 아라스 공세보다 훨씬 적었다.

4. 전투에 대한 의문


분명 영국군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목표달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피해도 솜 전투와 아라스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보다 크지 않았다.[13]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계속되는 공세가 굳이 '''필요'''했던가에 있었다.
처음 세 차례의 공격, 특히 브로드세인더 공격은 독일군에 강력한 타격을 입혔다. 플러머의 밀집된 포대는 10월 4일에 지나치게 전방으로 집결한 독일군 반격 사단들을 습격했고 많은 사상자를 낳게 했다. 특히 제4 근위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다시 한 번 전선 방어 체계를 다듬기로 결정했다. 브로드세인더 공격 이전에 독일군은 보호 탄막 뒤에서 나타나는 영국군 보병을 타격하기 위해 반격 사단들을 전투 지대에 가깝게 배치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영국군 포대의 한층 더 강하고 깊은 포격에 노출되는 결과만 초래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반대의 명령을 내렸다. 전선은 다시 적은 병력으로 지키고 반격 사단들은 후방 멀리로 내려와 그곳 진지에서 강력한 포격과 탄막으로 계획적인 되치기를 준비할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진창 위에서 수행한 작전은 본질적으로 마치 협의한 듯이 서로 똑닮았다. 공격군은 엄청난 포격으로 방어군을 기진맥진하게 한 다음 포탄이 떨어진 좁은 지대를 점령한다. 그 다음에는 방어군이 반대 방향에서 잃은 땅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결정적인 승리가 목적이라면 이는 완전히 쓸데없는 방식이었다.
대전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역사가는 야포 포탄의 신관이나 박격포 사거리 발전의 간과된 의미를 언제나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점에서 가장 열성적인 역사가조차도 헤이그가 브로드세인더 이후에 전투를 중단했어야 했다고 인정한다. 헤이그는 강경하게 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헤이그는 브로드세인더를 공격하기 전에 군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은 비틀거리고 있으며 ...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면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 직후 로이드 조지가 이프르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프랑스로 갈 증원군의 숫자를 은밀히 제한하려 했을 때, 헤이그는 참모총장 로버트슨에게 이렇게 썼다.

"영국군 홀로 대공세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공세를 최대한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10월 12일 뉴질랜드 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제3사단은 이프르 동쪽 해발 45m 고지에 남은 파스샹달의 한 부분에 도달하려 했다. 그곳 독일군의 2차 플랑드르 진지 참호선과 토치카는 영국 원정군과 적군 후방 사이에 남은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헤이그는 10월 9일 종군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제로 적군 방어선을 뚫고 있다. 적군은 온몸으로 우리에 맞서고 있다.[14]

"

독일군은 분투하여 제2안잭군단을 격파하고 안잭군단은 3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제2안잭군단을 헛된 희생으로 내몬 헤이그는 캐나다 군단에 의존했고, 캐나다 군단을 지휘한 장군 아서 커리 경은 이프르에서 병력을 잃고 싶지 않아 했으며, 헤이그가 요구한 공격은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낼 것이라 예상했다.[15] 자국 정부에 호소할 수 있고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캐나다 군단은 헤이그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참여했고 제1차 플랑드르 진지를 돌파하여 500야드[16]를 전진했고, 그 구간을 방어하던 제11바이에른 사단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아서 커리 경의 예상대로 사상자 1만 5,634명의 피해를 입었다.
한편 독일군의 경우 초반의 견고한 플랑드르 전선의 방어가 연합군의 유기적인 분대공격으로 무력화되고 공세 중 파스샹달 지역 최대의 요충지중 하나이자 격전지인 겔루벨 고지가 결국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전략을 수정한다. 앞으로 있을 1918년 봄, 독일군의 대공세(미하엘 공세)를 위해 철저한 수성전에서 파스샹달 일대의 영국군의 피해를 '''최대한 늘리자'''는 계획이었다. 결국 헤이그의 강한 공세정신과 독일군의 계획이 맞물려 수많은 인명이 파스샹달에서 사라져 갔다.[17][18][19]

5. 영향과 결론


파스샹달 전투는 동부전선에 치중하던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제 더 이상 독일군에게 또 하나의 베르됭 공세를 전개할 여유도 없었으며,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슈망데담 근처에서 10월 23일 공세를 실시하여 5km 정도의 진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프르에서 99일 동안 영국군이 많은 노력을 쏟은 것과 대등한 성과였다.
영국의 역사가 제임스 에드먼즈는 파스샹달 전투를 끊임없이 재개한 헤이그를 두둔했다. 이프르 전선에 88개의 독일군 사단을 묶어두었고, 공세에 나선 연합군 사단은 6개의 프랑스 사단과 영국군과 자치령 사단 43개 사단이라는 것이 그 논지다.
문제는 이프르 사단에 있던 독일군은 당시 전체 독일군의 1/3수준에 불과했고 헤이그의 사단은 그 절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합군의 연이은 공세로 전쟁 초와 다르게 적정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농장과 공장에서 병적에 오를 인원들을 모조리 올렸음에도 그 수가 부족하여 병자와 약자, 노령자들을 신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스샹달 전투로 청년들은 더욱더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개전 후 처음으로 영국 육군은 낙관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내가 접했던 많은 병사들과 장교들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우울증이 퍼지고 있었다." -종군기자 필립 깁스(Philip Gibbs)-

"We have won great victories. When I look at the appalling casualty lists, I sometimes wish it had not been necessary to win so many." 우리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소름끼치는 사상자 명단을 볼 때마다 승리를 위한 많은 희생이 굳이 필요한가란 생각이 든다. -전시내각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영국 정부의 경우 헤이그의 장담과 다르게 20만명의 병력이 헛되이 소모되고 헤이그를 제어하는데 실패했던 로이드 조지는 서부전선에 보내기로 한 70만의 대군 중 10만은 보내고 60만은 영국 본토에 남겨두는 초강수를 두었다.[20] 당연히 간단히 이길 줄 알았던 전투에서 인명경시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에 영국사회는 솜 전투와 맞먹는 쇼크를 겪었다. 병력 파견 중단은 더 이상 영국 전역을 초상바다로 만들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또한 독일군의 공세에 동맹인 이탈리아군이 붕괴되어 이탈리아 전선 방면으로 영프 연합군이 병력을 보내는[21] 등 1917년은 연합군에게 있어 힘든 한해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도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동부전선의 러시아와의 접전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독일에겐 한숨을 돌렸지만, 순무의 겨울로 표현되는 독일군의 저열한 식량사정과 보급,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적국에 맞서 공세든 방어든 상대방과 엇비슷한 상태로 피해를 보는 독일군은 점점 병력의 수와 질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선전포고까지 겹치면서 전투 이후 독일군은 초기 정렬된 군기상태에서 해이된 상태로 전이되어 있었다. 독일의 문학가이자 당시 용기병 중대(Squadron)의 지휘관이던 루돌프 빈딩(Rudolp Georg Binding, 1867 ~ 1938)[22]은 파스샹달 전투 이후 독일군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기가 낮거나 취약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명령을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병사들 때문에 연대가 일종의 망설임과 혼란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춘계 공세 당시 파리를 코앞에 두고 버려진 연합군 물자에 장병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결국 파리까지의 진출이 실패한다.
연이은 공세로 사기와 전력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영국군이지만 아직 헤이그에게는 본토에서 보낸 따끈따끈한 10만 신병이 남아있었고 그때 당시엔 신무기였지만 애물단지였던 탱크와 함께 동원하여 사상 최초의 전차 집중 운용 전투인 캉브레 전투를 치르게 된다.[23] 그리고 3개월의 기간 동안 영국 원정군 수십 만의 피를 흘리면서 전진한 8Km 구간은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에 도로 뺏기게 된다.

6. 답이 없는 파스샹달의 환경


"사방의 어두운 포탄 구덩이에서 부상자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못이겨 흐느끼는 가늘고 긴 신음소리와 절망감에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수십 명의 중상자들은 안전을 위해 새로이 난 포탄 구덩이 안으로 기어 들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무섭도록 자명했다. 그러나 이제 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움직일 힘이 없었던 그들은 서서히 익사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잔혹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동료들이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 믿으며 누워있는 (병사들의) 울음소리였다. 이들은 잉크처럼 새카만 어둠 속에서 죽은 자들 사이에 누워 외로이 끔찍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던햄은 내 옆에서 조용히 훌쩍거렸고 모두 비참한 죽음에 측은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후 다른 부대와 임무교대 후 복귀)이제 부상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크게 줄었다.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내려가다 보니, 그 이유는 명백했다. 포탄 구덩이 위로 물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왕립 워릭셔연대 8대대 1중대 장교 에드윈 본(Edwin Campion Vaughn, 1897 ~ 1931)의 일기 중 1917년 8월 27일에서 28일 새벽까지의 상황을 적은 내용- [24]

"황갈색 전투복의 다리와 줄지어선 머리 셋이 보였다. 신체의 다른 부분은 물에 잠겨 보이지가 않았다. 그 정면을 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차오르는 물 위로 머리룰 내밀려고 젖먹던 힘까지 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작은 구덩이에서는 라이플을 쥐고 있는 손이 보였다. 그 옆의 다른 구덩이에서는 철모와 반쯤 잠긴 머리가 보였다. 망자의 눈은 거의 같은 높이로 수면에 떠 있는 녹조류의 더껑이를 냉담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파스샹달 전투 생존자-

상술했듯 평범한 초원이던 파스샹달 지역은 3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수렁으로 변했다. 수렁 속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은 한치의 땅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고 뻘밭이나 마찬가지인 전장에서 느릿느릿 전진하는 그들에게 총알이 빗발쳤다. 하지만 진흙은 방어측의 총구멍을 막아 격발불량을 일으켜 결국엔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곤 했다. 통상의 전장터에선 보통 들것 하나에 최대 네명의 병사들이 동원되었지만 파스샹달이나 마찬가지로 수렁화된 솜에서는 1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다.
병사들은 그 지역을 이동하기 위해 나무 판자로 길을 만들었고. 그곳으로 끊임없이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길 옆의 진창으로 뛰어들었고 적지 않은 수가 빠진 진창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또한 죽지 못한 부상자들이 끊임없이 신음과 비명을 질렀고, 구덩이 속으로 차오른 물들은 부상자, 때로는 운이 없는 몸이 성한 병사들까지도 익사시켰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그 신음소리를 들으며 상당히 괴로워했다. 파스샹달 전투의 상당수의 행방불명자들이 이렇게 포탄 구덩이 속에서 익사한 자들이 차지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병사들은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병사들을 봐도 외면, 아니 구조를 포기했다. 진창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병사를 구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따라 끌려가기 때문이었다.
3달이 넘게 이어진 연이은 포격과 공격으로 무인지대의 전장은 양측의 시체들을 갈아 엎고 또 그 위에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쓰러져 죽어가는 '''인외마경'''으로 변했다.

6.1. 파스샹달의 변덕스런 날씨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영국원정군(BEF)의 정보부에서 활동하던 존 차터리스 준장은 1929년 저서 "야전원수 헤이그백작"에서 지난 80년간 기후를 분석한 결과 파스샹달 전투가 일어날 당시 인도 몬순 기후의 영향으로 근 30년 간 파스샹달 지역의 날씨가 점차적으로 습해졌다고 주장했고, 1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인 로이드 조지나 리델 하트 등 당대 1차대전을 경험한 이들이 많이 이 부분을 인용했다.
한편 1915년 영국 원정군이 기상학자 어니스트 골드의 지휘하에 기상청을 설치한 이래로 1917년 말 16명의 장교와 82명의 병사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기록을 종합한 결과 차터리스의 주장과는 반대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9년 필립 그리피스는 1916년 이전 플랑드르 지역의 날씨를 조사한 결과 큰 특이사항은 없었다고 말한다. 프랑스 그리네 곶에서 조사한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당시 플랑드르 지역의 기후를 보면 당시 8월 중 건조한 날이 각각 26일, 23일, 23일, 21일이었고 1901년부터 16년까지 8월 날 중 약 65%의 날씨가 건조한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1917년 8월은 127mm에서 84mm에 이르는 강우가 8월 1일, 8일, 14일, 26일, 27일에 걸쳐 내렸고 이것을 말릴 해는 뜨지도 않고 바람도 거의 안 불었다. 작전 당일에도 희미하게 나마 12.5mm의 작은 비가 내렸으며 8월 동안 딱 3일만 비가 안내리고 14일의 경우 1mm이하의 비가 미세하게 내렸다. 그리고 그 비가 안 온 유일한 3일도 해가 거의 비추지 않았다.
이 모든 악조건이 매일의 참상으로 벌어지는 와중에도 헤이그는 8월의 비는 내려도 햇볕과 바람이 이를 말릴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7. 번외 : 1차 캉브레 전투


1917년 11월 20일 파스샹달 전투가 끝난지 14일 뒤, 그리고 플랑드르 전역이 종료된지 10일 뒤에 캉브레에서 영국군 사상 최초로 전차를 대규모로 동원, 집중운용한 캉브레 전투가 벌어진다. 연합군측 작전계획은 연합작전으로 구상되어졌으며, 파스샹달까지도 전차는 단순히 전선 돌파용으로서 소규모로 분산투입되었다. 캉브레 전투의 주 목적은 특정 지역을 점령하기 보다는 전차 운용이 용이한 지형에서 대규모 기갑세력을 대동하고 대대적인 전차전을 벌여 적의 전력을 분쇄, 전선을 와해시켜 돌파함으로서 독일군의 주요 보급/병참기지였던 캉브레에의 타격을 가해 독일군의 전력을 깎고, 독일의 전선 측면을 아군 공격에 노출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 전투는 '''1차대전 최대의 기갑전으로 기록[25]'''되었다고 하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기갑세력을 집중운용한 전투가 되었다. -작성중-

8. 기타



  • 캐나다 영화 파스샹달은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 이 지옥같은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노래가 2곡 있다. 아이언 메이든의 Paschendale과, Sabaton의 The Price of Mile.
  • 헬레이저 시리즈의 메인 빌런인 핀헤드의 탄생 배경이 된 전투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 '엘리엇 스펜서' 대위였던 그는 이 전투에서 전우들을 다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PTSD로 인해 변태적 쾌락에 탐닉하게 되면서 결국 르마르샹의 상자를 손에 넣어 악마적 존재 '수도사'가 되어버린 것.
  • Ypres(이프르, 현지 지명 이페르)란 지명의 발음이 지금의 우리 한국인에게도 생소하고 어색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군에게도 Ypres란 낮선 발음은 발음하기 애매했다. 그래서 영국군은 Ypres란 이름 대신에 Wipers(와이퍼즈)라고 발음했고, 전쟁 중에도 와이퍼즈 타임즈란 전시신문을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
  • 파스샹달 전투는 미군이 참전하기 전, 마지막 연합군 대공세이기도 하다.
  • 파스샹달 전투 당시 무인지대 한복판에 60시간을 버틴 전차가 한 대 있었다.***
  • 3차 이프르 전투(1)-진창밭에 들어가면 제 1차 세계 대전의 주요전투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 독일제국군 최고 에이스인 붉은 남작 다음의 에이스이자 일명 "황제의 얼굴"이란 포커 Dr.I의 주인이기도 한 베르너 포스(Werner Voss, 1897 ~ 1917)가 1917년 9월 23일 파스샹달 상공에서 제임스 매커든(James McCudden, 1895 ~ 1918)이 이끄는 7대의 SE5a와 싸우다 전사했다.
  • 전반적으로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진창에 잔뜩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한 프랑스병사는 자신들이 시달리는 진창에 대해 이런 평을 내렸다. "프랑스 병사들도 진흙을 온갖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 모든 명칭은 결국 하나로 소급되었다. 진흙(melasse), 진창(gadoue), 진흙탕(gadouille), 똥(mouscaille)은 모두 진흙의 다른 이름이다."
  • 배틀필드 1의 마지막 DLC인 Apocalypse에서의 맵으로 등장했다.
  • 역사상 단 3명만 있는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의 두번째 복수 수훈자가 이 전투에서 나왔다. 이름은 노엘 고드프리 차바세로, 군의관(대위)이었다.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고,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400m 달리기 올림픽 예선까지 갔을 정도로 신체 능력이 출중했다. 그리고 솜 전투에서 이미 첫 번째 빅토리아 훈장을 수훈한 상태였다. 차바세 대위는 파스샹달 첫 번째 국면인 필켐 능선 전투에서 응급 치료소로 병사들을 옮기던 중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후송을 거부하고 이틀 동안이나 음식도 먹지 않고 응급 치료소에서 계속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두 번째 빅토리아 훈장 수훈 결정 이후 이틀 뒤에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는 영국군이 참전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두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비전투 행위로 수훈받았지만 용맹함은 다른 수훈자들 못지 않았다.


[1] 당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 연방 등이 참전하였다.[2] 정확한 수치는 양측 모두 불명이다.[3] 네덜란드어로는 파선달러(Passendale). '파스샹달(Passchendaele)'은 '파선달러'의 프랑스어 표기이다. '파스샹달'은 벨기에의 네덜란드어권인 플란데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파선달러'가 올바른 표기.[4] 엔 강에 구축된 독일 제국군 방어선을 뚫기 위한 프랑스군의 대규모 공세로서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18만 7000명의 프랑스군 사상자가 나왔고 곧 대규모 항명 파동이 일어나 니벨이 물러나고 필리프 페탱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5] 1917년 6월에 있었던 메시느에서의 작은 승리로 독일군이 약화되었다는 착각을 한 탓도 있었다.[6]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는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지난 3년 간의 전쟁으로 소득은 적은 데 반해 갈수록 인명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바람에 인력 동원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고 게다가 미국 역시 슬슬 참전하는 시기(미국은 1917년 4월 6일에 대독선전포고를 했다)에 벌어지는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운 작전에 큰 피해를 감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평소 의회와 당을 휘어잡던 모습과 다르게 "계속해서 적과 교전할 필요가 있다"며 작전에 자신만만한 헤이그를 말로 제압하는 데 힘겨워했고 결국 견해를 받아들였다.[7] 5.4km 정도 되는 거리, 이 거리를 굳이 쉽게 이야기하자면 솜전투 당시 영국군이 5개월 동안 엄청난 인명을 손실해 가며 전진한게 약 12km인데, 그 반의 약간 못되는 거리를 하루만에 돌파한다는 소리.[8] 파스샹달 지역이 있는 플랑드르 일대는 지층의 상당부분이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원에 널린 돌조차도 진흙이 굳어서 생긴 이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실트라고 알려진 진흙보다 더 고운 입자를 가진 흙이 이프르에 잘 분포되어 있었다.[9] 독일 국방군 소속 중장 한스하인리히 식스트 폰아르민(Hans-Heinrich Sixt von Armin)의 아버지. 여담으로 이 사람은 독소전쟁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113보병사단장이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같이 항복하였다.[10] 영국군 사상자가 2만 5000명이 나왔고 독일군 사상자는 2만 3000명이 나왔다. 이중 1만 명은 지뢰 폭발 당시 아예 증발하거나 토사에 매몰되었다.[11] 적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흐린 날씨나 밤에 소리를 들어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초소.[12] Sir William "Wully" Robert Robertson, 1860 ~ 1933 / 준남작(Baronet) 작위를 받았으며 이분은 영국 육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이등병에서 시작해서 육군원수까지 오르신 분이다.[13] 솜 전투에서 일 평균 2,9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라스 전투의 경우 일 평균 4,0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파스샹달의 경우 일 평균 2,12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4] 이날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군은 전면과 측면의 기관총 사격을 '''온몸'''으로 받아 결국 원위치로 퇴각한다. 결국 캐나다 군단이 고지로 가는 수렁과 시내로 둘러싼 좁은 2개의 방죽길을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 점령하였다. 캐나다 제3사단과 제4사단의 병사 2명이 빅토리아 크로스는 받은 것은 덤으로 말이다.[15] 파스샹달 전투의 마지막 달에 커리는 헤이그의 공세에 이렇게 말했다. "자살행위야, 이 무의미한 공세에 나라면 16,000명의 정예병을 헛되이 쓰지 않을 거야."[16] 약 457.2m.[17] 파스샹달 전투 후 헤이그는 33만 4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며 로이드 조지에게 건의했지만 로이드 조지는 군인뽑는 기계도 아닐 뿐더러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와 참모총장 로버트슨의 공세 를 자제시킬 필요를 느꼈다. 이는 1918년 3월까지 서부전선의 영국군에 18만 4000명 밖에 증원이 안됐고 독일군이 춘계공세 초기에 놀라운 진격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로이드 조지에게 책임을 묻기도 뭐한 것이 기존의 서부전선의 예비대로 '''최소 18일은 버틸 수 있다.'''고 헤이그 본인이 주장 했으며, 그외 병력배치는 로버트슨과 국방성이 주도했다.[18] 또한 프랑스군의 요청으로 서부지역의 영국군 담당지역을 확대(거의 프랑스 전지역을 수비하는 프랑스군에 비해 영국군의 담당지역은 비교적 좁기도 했다)하여 영국군의 담당지역은 생캉탱(Saint-Quentin)에서 32Km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바히시스(Barisis)까지 연장되었는데 이 지역까지 담당하는 고프의 제5군은 총 67.5Km에 이르는 지역을 12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수비해야 했다. 반면에 옆에 위치한 제3군의 경우 45Km의 구간을 14개의 사단이 수비하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프랑스군에게서 넘겨받은 방어진지는 매우 엉성했고, 파스샹달에서 그 효율성을 입증한 유기적 종심 방어의 개념을 이해한 지휘관은 극히 일부였다.[19] 춘계 공세 당시 가장 크게 뚫린 곳이 고프의 제5군과 그 주변 부대였다. 그리고 고프는 기존에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로이드 조지에게 찍혀서 해임되었는데 그가 파스샹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도 멀쩡했던 것은 그가 로버트슨의 파벌이기 때문이었다. ***[20] 헤이그는 파스샹달 전투 이후에도 총사령관직을 유지했지만 참모장 런슬롯 키겔(Launcelot Kiggel, 1862 ~ 1954)과 정보참모 존 차터리스(John Charteris, 1877 ~ 1946)는 해임되고 파스샹달 전투의 공세지속에 회의적이던 로이드 조지와 마찬가지로 공세에 회의적이던 육군대장 헨리 윌슨 경이 연합군 최고전쟁위원회 전쟁실행위원회 영국 대표 후보로 거론되자, 헤이그의 든든한 뒷배인 참모총장 로버트슨이 사임하고 1918년 2월 18일 헨리 윌슨(Sir Henry Hughes Wilson, 1864 ~ 1922)이 로버트슨 후임으로 대영제국군 참모총장이 되었다.[21] 파스샹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플러머가 5개 사단을 대동하고 17년 11월 이탈리아로 간다.[22] 참고로 루돌프 빈딩은 소설 "불멸 Unsterblichkeit(1922)"로 유명하며 그 외에도 히틀러의 지지자였다.[23] 참고로 이 쯤 되면 아군을 마구잡이로 날리는 이 헤이그에 대해서 비난도 하겠지만, 그는 전차 등 신무기를 거리낌 없이(고장 잘나는 애물단지인 전차가 독일군 야포에겐 좋은 먹잇감이지만 독일군 기관총엔 안 뚫린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확히는 헤이그 밑의 부하들 중 기병병과인 간부들이 탱크의 잠재성과 위력을 파악했다) 채용 및 활용할 줄 알았고 총류탄, 박격포의 근대화 및 본인 치통을 계기로 영국군에 치과를 두는 등 군 현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전후 헤이그 펀드로도 알려진 영국재향군인회를 조직하여 가난한 참전용사의 생활형편을 돌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적극적인 공세가 독일군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안긴다는 것이다. 솜 전투나 아라스 전투, 지금의 파스샹달 전투, 앞으로 있을 100일 공세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장군은 자기 부하가 20만이 갈리든 60만이 갈리든, 눈에서 피눈물도 나오지 않는 '''강철멘탈'''의 소유자인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헤이그의 별명이 야전 전문가(Master of the Field)이면서 솜의 학살자(The Butcher of the Somme), 백정 헤이그("Butcher" Haig)였다.[24] 출처 존 키건의 "제1차 세계 대전" 참고로 이 일기를 적은 후 타 부대와 임무교대를 마치고 후방으로 가던 본은 독일군의 포격으로 토치카에 숨으려다 파편을 맞고 줄지어 늘어진 채 죽은 수 많은 영국군을 보고 그 사이를 지나던 중 무언가 자기 군장을 잡은 걸 알고 기겁한다. 알고 보니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이 살려고 손을 뻗어 잡은 게 그의 군장이었다고. 그 운 좋은 생존자를 끌어낸 후 이튿날 오전에 인원점검을 통해 자기 중대 인원 90명 중 생존자가 단 '''15명'''인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에 보고서를 쓰기 전에 위스키를 퍼마셨다고 한다. 그 후 17년 10월에 정식 중대장과 대위계급을 받을 때까지 활약하며 훈장도 받았다. 1928년 군에서 은퇴 후 1931년 의사의 코카인 남용 처방으로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일기는 1981년에 출판되었고 파스샹달 전투의 참혹함을 가장 잘 전달한 기록으로 손꼽힌다.[25] 프로호로프카 대전차전의 1차대전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