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신무문
1. 소개
景福宮 神武門
경복궁의 북문(北門)이다. 단, 정북(正北)이 아닌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 때 관료인 이현직(李顯稷. 1797 ~ ?)이 썼다.#
2. 이름
‘신무’는 ‘신령스러운(神) 현무(武)’라는 뜻이다. 4신 중 현무가 북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북쪽 문에 ‘무(武)’ 자를 넣은 것이다. #
3. 역사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두었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다 1433년(세종 15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북문을 지었다.#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4. 용도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왕이 비밀리에 궁 밖을 나갈 때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1] 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5. 특징
●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및 서문인 영추문과 구조가 같다. 단, 육축의 높이와 폭이 1자 반[2] 정도 작다.#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의 내부는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6. 여담
-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가 시작된 곳이다. 중종은 한 밤중에 승지들도 모르게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등 훈구 대신들을 불러 신무문으로 들어오게 했고, 훈구 대신들은 비밀 회의를 열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숙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한다.
-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3]
- 1954년에 경복궁이 일반에 개방될 때 신무문도 같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부대가 신무문 안쪽에 주둔하면서 폐쇄되었다. 1990년대에 군부대는 이전했지만 이후로도 근처에 청와대가 있어 보안 상의 이유로 닫혀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후로는 관광객들이 청와대 인증샷을 찍을 때 오가는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