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예비대

 


1. 설명
3.1. 계급


1. 설명


警察豫備隊.
군대가 없는 국가에서 폭동 진압, 재해 상황시 구조 등 경찰을 보조하기 위해 만든 집단을 말한다. 줄여서 경비대라고도 표현한다.
경찰예비대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여러 제반 조건으로 정규군을 설치하기 어려울 때 준군사조직으로 치안 업무를 보조하는 부대를 두는 것이다.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은 정규군을 두기엔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해안경비대나 경찰 내 육상특수부대로 군의 업무를 갈음하는 경우가 있다.
공공부대도 넓은 의미에서 경찰예비대로 볼 수 있다.

2. 대한민국


Constabulary Police Reserve.
미군정기 초기에 미국소련과 갈등을 피했다. 그때문에 점령한 한반도 남부에 정규군을 두는 대신에 기존에 존재하는 경찰[1]에게 기본적인 치안 업무를 맡겼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1946년에 경찰예비대를 설치하였다. 이 집단이 조선경비대였고 해안 순찰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해안경비대도 설치되었다. 그때문에 조선경비대 초기에는 군사훈련이 아닌 폭동진압훈련 등 경찰과 비슷한 훈련을 하였다. 다만 장교들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등 군 출신인 인물이 많아 실제 훈련은 알음알음 군대식으로 했다.[2] 다만 미국도 일단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만든 것이라서 1947년에 소련과 관계가 틀어지자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탈바꿈하는 걸 묵인했다. 1948년에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이 되었고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이 되었다.
초반의 장교계급은 아래와 같았다.
  • 1946년 1월 15일-1946년 11월 30일: 참위-부위-정위-참령-부령-정령[3]
  • 1946년 12월 1일 이후: 소위-중위-대위-소령-중령-대령-준장[4]-소장-중장-대장[5]
계급의 경우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부사관 호칭이 달랐다. 1962년에 가서야 합쳐진다.
  • 조선경비대(1946년 1월 15일-1946년 11월 30일): 참교-부교-특무부교-정교-특무정교-대특무정교
  • 조선경비대(1946년 12월 1일 이후): 2등중사-1등중사-2등상사-1등상사-특무상사
  • 조선해안경비대: 3등병조-2등병조-1등병조-병조장

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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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察予備隊(けいさつよびたい). National Police Reserve.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 일본군은 해체되었고, 해체 및 해외 국민 및 병력의 귀국 등 기타 행정 업무를 처리할 일본 육군의 제1복원성, 일본 해군의 제2복원성만 남겼다. 그러나 1947년부터 미국은 방침을 바꿔 일본에 군사조직을 재편성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주일미군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일본에 치안 공백이 생기자 더글러스 맥아더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에게 치안을 담당할 부대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고 1950년 7월 26일에 경찰예비대가 생겼다. 이들은 초기에는 경찰 업무를 보조하는 부대였으나 점차 군사업무도 맡게 되고 1952년에 보안대로 개편되고 1954년에 육상자위대가 된다. 그리고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을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군대를 재건하는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며,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입소 후 "난 경찰이 되려고 왔는데, 이건 그냥 군대잖아?"라며 퇴소해버리기도 했다. 일본 사회당 대표가 헌법 최고재판소에 경찰예비대 위헌에 대한 소송 건을 제출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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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관구대는 관동 지방, 제2관구대는 홋카이도혼슈 동북부 일부, 제3관구대는 혼슈 서부와 시코쿠, 제4관구대는 혼슈 일부와 규슈, 오키나와 등을 담당했으며 이런 분할은 육상자위대의 방면대로 이어진다.
상당히 조직이 급결성됐기 때문에 75,000명이 두 달만에 입대했다. 초기 인원은 일본 육해군 장교 출신은 들어오지 못 하게 했고 사관생도까지만 허용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서 파입된 인원들이 간부를 구성했다. 일단은 간부 임용하기가 여의치 않아서 미군 고문관이 훈련과 지휘를 맡고 입대자들은 전원 2등경사 신분으로 훈련을 받았다. 간부 자원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이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다른 훈련병들과 교육을 받다가 에타지마에 위치한 일본해군병학교 시설에 가서 간부 교육을 따로 받았다. 경찰예비대의 성격이 군으로 탈바꿈하자 군 업무에 익숙지 않은 간부 자원들은 대삽질을 반복했고 한국전쟁에서 군경력자 출신 지휘관들이 잘 싸우자 미국은 생각을 바꿔 좌관급 장교까지 경찰예비대에 입대를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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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받는 경비대원들.

3.1.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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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감(警察監) - 중장
  • 경찰감보(警察監補) - 소장
  • 1등경찰정(1等警察正) - 대령
  • 2등경찰정(2等警察正) - 중령
  • 3등경찰정(3等警察正) - 소령
  • 1등경찰사(1等警察士) - 대위
  • 2등경찰사(2等警察士) - 중위
  • 3등경찰사(3等警察士) - 소위
  • 1등경찰사보(1等警察士補) - 상사
  • 2등경찰사보(2等警察士補) - 중사
  • 3등경찰사보(3等警察士補) - 하사
  • 경사장(警査長)陸士長 - 상병
  • 1등경사(1等警査) - 일병
  • 2등경사(2等警査) - 이병
[1] 해방 직후에 23,000명 규모였다.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경찰이 그대로 인수되었다.[2] 백선엽 같은 경우엔 각개전투 등 실질적인 보병 훈련을 하는 바람에 경찰 훈련을 하라는 미국 고문관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3] 대한제국군의 계급명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장성 계급이 없었다. 한국군 첫 장성은 1947년 2월에 손원일송호성이 준장 진급하면서 첫 탄생.[4] 최초의 준장 진급자는 손원일과 송호성이며 중국 중앙군 소장 출신인 김홍일특별임관으로 준장으로 임관했다. 김홍일은 건군기에 참여한 장교들 중에 유일하게 사단급 이상을 지휘해본 경력이 있는 군경력자였다. 다만 지휘관이 아닌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북한군엔 소련군 사단 참모장 출신인 남일이 유일했다.[5] 최초의 대장 진급자는 1952년에 진급한 백선엽이었다. 1946년에 소위로 임관해서 6년 만에 대장 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