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수
- 대한민국 국군/인물, , 가톨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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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許三守
1936년 9월 18일 ~ (88세)
대한민국의 군인, 관료, 정치인.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2. 생애
1936년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부모가 징용당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1]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국어가 서투르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기에 또래들보다 학교에 더 늦게 가게 되었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사람이 열심히 하면 무서운 법. 공부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부산의 1류 고등학교인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육군사관학교 동기이기도 한 김진영과 김진영의 소개로 알게 된 허문도와 고등학교 동문이다.[2] 이후 경쟁률이 37:1에 육박했던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 진학해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고 특히 육군사관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했던 유도는 졸업 당시에 2단을 땄을 정도였다.[3]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김진영, 허화평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허화평과 단짝이었다.
이후 방첩대에 들어가 윤필용을 상관으로 모시게 되었고 허삼수의 능력을 알아본 윤필용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적극 추천해 월남전 방첩장교로 가게 된다. 월남전 참전 당시 미군의 지원을 업고도 각종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 등으로 몸살을 앓고[4] 월맹군에게 얻어 터지던 지엠 정권과 남배트남을 보며 부패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렸던 허삼수는 노태우의 처남이였던 김복동에 의해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돌아왔고 보안사에서도 무능하고 부패한 직원들을 강제 예편시키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대령)이었던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하였다. 5.17 내란이 종료되고 1980년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면서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1980년 9월 대통령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허화평,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렸으나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허화평 등과 함께 전두환의 친인척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것이 허화평과 허삼수의 권력이 지나치게 세다는 지적이 있어서 1982년 12월 사정수석비서관직에서 경질되었으며 이후 허화평과 함께 미국에서 체류하였다.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미국의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학술 연구에 매진하였다. 본인 역시 50살이 넘은 나이에 진지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고 정치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전두환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삼김을 필두로 한 야당의 공세와 상대 후보였던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선거 전략에 말려들어 낙선하였다.[5] 하지만 지역위원장을 역임하며 재기를 꿈꾸던 허삼수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서 노태우와 김영삼의 막강한 지원을 업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설욕하였다.[6][7]
1996년 김영삼 정부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으로 기소되었다. 1996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부산고등학교 후배인 신한국당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5.18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가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 특사로 전두환 등과 함께 석방됐다. 석방 이후 국제장애인협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지금은 고문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평생 친구 허화평이 징역을 계기로 보수 논객으로 전향한 것과는 달리 허삼수의 경우는 장애인을 돕는 사업에 매진하며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고 있다. 2014년 내란 전과로 인해 중지된 연금을 지급해달라고 장세동, 정호용 등과 함께 국가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며 같은 이유로 서훈이 취소된 훈장 역시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있다. 80살이 넘은 현재에는 거의 근황이 전해지지 않지만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거나 수영을 하며 건강 관리를 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전형적인 꼴리건이라는 말이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2005년작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차광수가 연기했다. 사실 제5공화국의 허삼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 많은데 드라마 방영 당시 감수를 맡으며 제작진에게 여러 차례 자문을 해주는 등 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허화평,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공했던 장세동, 제작진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박철언과는 달리 허삼수 본인이 어떠한 의견도 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본인 역을 맡은 차광수와의 싱크로율도 낮은 편이고 허삼수가 한 일이 허화평이 한 일처럼 표현되어 있는 등 고증오류가 심하다는 말이 많다. 사실상 허삼수의 이름을 빌린 제작진이 만든 허구의 인물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 행적을 보면 허화평 못지 않은 브레인에 학구적인 조용한 성격으로 보이는데 다혈질에 거의 허화평 2중대 격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실제로는 조용한 성품이나 상남자형으로 그려진 정호용과도 비슷하다.
4.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5. 소속 정당
[1] 당시 보통학교에서 소학교로 명칭이 변경되던 시기.[2] 고등학교 동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안면식이 있던 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수 정예 학교가 아닌 이상 3년 동안 전교생 얼굴을 다 알고 졸업하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절친으로 묘사되었으며 극 중에서 허삼수는 허문도, 허화평과 반말을 주고 받지만 허문도와 허화평은 서로에게 존대말을 쓴다.[3] 지금은 고령인 관계로 유도는 그만두었지만 체력 유지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해서 수영을 통해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다고 한다.[4] 당시 남베트남과 지엠 정권의 부정부패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수준이였다. 미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가 다음 날이면 노점상에서 팔리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5] 정치 신인이였던 노무현이 허삼수를 "5공 적폐"로 몰며 적극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했다. 노무현을 천거했던 김영삼 역시 "반란군 총잡이"라며 여기에 가세하여 노무현이 당선되는데 큰 도움을 준다.[6] 이때 김영삼은 "반란군 총잡이"라며 허삼수를 몰아붙이던 13대 총선에서와 달리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그를 "충직한 군인"이라고 치켜세우며 허삼수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YS, 그의 미친듯한 깜짝쇼가 그리워라[7] 허삼수 역시 네거티브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노무현을 "말만 많고 능력은 없는 정치인"이라고 깎아내렸다.[8]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