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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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역 확장의 역사. 현재의 법정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된 관계로, 동-리 단위 이하의 자잘한 경계변화는 생략되었다.


1. 상고~남북국시대


영도구 동삼동 조개무덤 유적 등을 통해 신석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좌동 등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구석기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구석기 시대 자체가 정착생활이 아닌 수렵 및 채취로 먹고 살던 시기다. 때문에 신석기와 다르게 정주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잠시 거쳐간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현미경으로 발견한 기장(식물)조(식물)는 기원전 5,000년 것으로 보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 자료 중 하나다.
원삼국시대 지금의 부산 땅에는 삼한변한진한의 여러 소국이 있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지금의 부산 북부에 장산국 혹은 내산국/거칠산국[1]이 있었다. 이외에 후한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와 접경한 국가로 독로국이 등장하는데, 거제도설과 부산설이 있다. 부산설의 경우, 독로국이 동래(東萊)의 어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독로국은 고고학적으로 지금의 동래구 수안동, 낙민동, 명륜동, 복천동, 칠산동에 있었다고 보며, 초기에는 넓은 의미의 가야 권역으로 낙동강 건너편의 구야국(금관가야)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본다. 현재와는 반대로 대체로 김해의 금관가야 쪽이 주도권을 쥐고 부산 지역이 그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신라가 전성기를 맞기 전까지는 김해와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거칠산국탈해 이사금 대 신라의 장군 거도의 활약으로 우시산국(울산? 영해?)과 함께 신라에 우걱우걱 당했다고 하나 이 연대는 학계에서 대개 신뢰하지 않는다. 고고학적으로는 대개 4세기 이후 부산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뚜렷해진 것으로 보여 그 때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 경쟁하던 금관국이 한동안은 대등하게 맞선 것으로 보이나, 4세기 후반에는 점차 쇠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라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은 고대 부산지역에 있던 소왕국 지배계층의 대표적인 유적인데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제외하면 남부지방 최대급의 고분군 중 하나고 보물급 유물이 많이 출토됐다. 복천동은 1969년 주택공사 중 고분 일부가 파괴되어 우연히 드러나서 긴급조사한 뒤 2008년까지 8차례 조사했다. 여기에 복천박물관이 있다. 한편 연제구 연산동에도 상당한 규모의 연산동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영향을 받아 불교식 화장 문화가 번성해 대형 무덤은 사라졌고 범어사, 장안사 같은 사찰이 창건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옛 장산국과 내산국은 신라에 합병된 이후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다. 거칠산군은 2개의 영현을 거느렸는데 대증현(大甑縣, 부산진구)과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기장군)이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경덕왕 때인 757년에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데 거칠산군은 동래군, 갑화양곡현은 기장현, 대증현은 동평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동평은 지금은 공식 행정구역 이름은 아니고 주민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지명이다. 동평(지명) 문서 참조. 기장현은 뒤에 양주로 이속되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웠기에 그런지 태종대, 해운대 등 신라시대에서 유래하는 지명이 꽤 남아있다.

2. 고려시대


후삼국시대~고려 초기에는 수도가 더 먼 곳으로 가버려 지리적 정치적으로 변방이 되었다. 고려는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동래군이었던 부산지역의 격을 낮춰 속현으로 만들었다. 동래현은 울주군에, 동평현과 기장현은 양주군(양산)에 포함시켰다. 동래현은 지금의 동래구, 금정구, 해운대구, 수영구, 남구, 연제구 지역이고 동평현은 부산진구, 영도구, 사상구, 사하구, 북구, 동구, 중구, 서구이며 기장현은 기장군이다. 동평현은 나중에 조선 초기에 동래현과 합병된다.
동래 정씨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대표적인 고려시대 유적인 동래 고읍성지와 온천동 차밭골 유적에서 나온 기와에서 정씨 호족 세력의 존재가 재확인되었다. 수영구에는 고려가요 정과정의 무대가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 동래현은 동래도호부, 동래군, 동래부라는 여러 명칭으로 계속 바뀌었지만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일본과의 교역과 외교 관문으로 지정되어 격이 높아졌다. 조선 측의 사절단인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중심지 에도까지 갔지만, 일본 측의 사절단은 주로 부산까지만 왔다.
태종세종대왕 때에 왜구에 대한 교린책으로 문호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지만, 1443년 계해약조를 맺으면서 이곳이 염포, 제포(울산, 진해)와 함께 일본 상인들에게 개항되는 3포로 확정되었다. 조선 전기에 대일외교의 관문으로서 부산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경상 관찰사의 통제를 받던 부산 지역(지금의 동래)은 군사 거점인 부산진이 설치되자 행정적인 위치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15세기 말 즈음에 '釜山'이라는 지금까지 쓰이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는데, 음이 같은 부산인 '富山' 등의 표기가 혼재되어 있기도 했다. "釜山은 동평현(지금의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라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증산(甑山 : 시루 모양의 산; 동구 좌천4동 소재)', '가모령' 등 인근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볼 때 '가마솥 모양의 산'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후 16세기 잦은 왜구들의 침략, 특히 삼포왜란으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동래현은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고 지금의 울산에 있었던 경상좌수영도 부산으로 옮겼다. (지금의 수영구, 수영강의 유래가 되었다) 16세기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왜구가 늘면서 3포는 열리고 닫히고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 때는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부산포 해전, 다대포 전투의 전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기유약조를 맺으면서 부산포 한 곳만을 개방하고 사신왜관에 머물러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2] 이로 인해 부산 지역은 무역항으로 성장하였으며, 통신사가 출항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단순히 조선통신사가 배를 타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통신사를 위한 특산물을 동래부에 모아 보급했고 15~50일 정도 부산에서 체류하며 부산의 명소를 돌거나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주요 기점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는 특히 조선에서 산출량이 적었던 (화약의 재료), (청나라와 연결되는 화폐 단위), (상평통보의 재료) 등이 많이 수입되었다.

4. 개화기


1871년 서계 문제로 일본은 왜관에서 깽판을 벌였고,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 직후 개방[3]되어 일본전관거류지가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에게 수탈에 가까운 수준의 무역에 많이 시달렸고 두모진 해관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만 들어온 것은 아니고 청나라 조계지가 지금의 부산역 앞 지역[4]에 설치되는 등 국제적 항구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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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동래부 및 주변 지역의 행정구역 상황. 양산군 영역이었던 구포(좌이면)는 1906년 동래부로, 대저(대상면, 대하면)는 김해군으로 편입되었다.

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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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한 부산부 및 동래군의 행정구역 상황.
'''사실 이 윗부분의 모든 역사는 '동래'의 역사이다. 원래 부산은 동래부 관할의 한 지역이었을 뿐이었다'''(동래부 부산진, 동래부 부산포 등).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포 일대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어 일본에 문호를 열면서부터였다.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고, 1914년 부산부의 개항장 이외 지역(현재의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를 제외한 나머지 전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여 본격적으로 '부산'이란 이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부산이 상급 행정구역명(부산광역시)이 되고, 동래가 그 하급 행정구역명(동래구)이 된 것. 이를 수도권의 인천광역시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개항으로 인천도호부의 제물포가 항구로 성장하고, 1914년 개편으로 개항장 주변만 제물포부가 되고, 나머지 원인천은 인천군으로 분리되었다가 인천군을 잡아먹은 제물포시가 제물포직할시 → 제물포광역시로 성장하고 인천은 문학동, 관교동, 학익동, 선학동, (주안동) 일대를 관할하는 자치구 이름(제물포광역시 인천구)으로 남게된 셈이다.
1910년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부산부 개항장 지역(현재의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 부산진구 범천동)만을 부산부로 남기고, 나머지 면 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시켰다. 이 때 동래와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도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동래군의 읍면 지역들이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 기간 부산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 치하 부산은 거주민 복리에 관계없이 단지 일본에서의 인구와 물자이동의 편리성에만 중점을 두고 도시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도시계획이나 대한인(大韓人)의 복지 계획이 미비했고, 기존 한인의 중심권인 동래 일대를 일본 문화를 강제적으로 침투시켜 종속화[5]했다. 강제적으로 시작된 부산의 도시화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불러왔고, 도시는 부를 찾아 들어온 일본인이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한인, 일본으로 도항하려는 한인 등으로 가득 차게되었다. 식민도시로서의 특징인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거주 구역또한 나뉘어져 전자는 지금의 중구 부평동 일대에, 후자는 지금의 범일동 일대에 위치하게 되었고 대개 빈자들의 거주지는 고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부산은 일본 자본의 침투와 근대 시설의 건립 등이 빠르게 이루어졌는데[6]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이니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부산의 중요도를 가리키는 일례로 당시의 경부선 철도는 부산 방향이 상행, 서울 방향이 하행이었는데 이는 부산잔교역부관연락선을 통해 일본 본토의 도쿄역까지 이어진다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였으니 경성이 아닌 도쿄가 모든 철도의 기점이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현재 도시철도의 전신인 부산전차도 이 때 개통되었는데, 한반도에서 노면전차가 달렸던 도시는 경성부, 평양부, 부산부 3개 도시 뿐이었으니 당시 부산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개항 이후 구한말까지 부산은 경상도 내의 평범한 도시였으나 일제강점기 시절 도시 개발을 거쳐 성장하면서 경상도 전통의 대도시였던 경주시, 상주시[7] 등을 제치며 1930년대를 거쳐 평양 다음의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외국인 거주인구까지 합치면 일부 년도는 평양을 제쳤으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고 내국인 인구는 평양이 부산을 항상 앞섰고, 1944년 인구 조사에도 내외국민 다 합쳐도 평양은 부산보다 큰 도시였다.

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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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광복 당시 부산부와 동래군의 행정구역 상황.
광복 이후 1949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63년 부산시가 '''(정부 직할) 부산시'''로 승격됨과 동시에[8] 동래군 구포읍(대부분이 현 북구), 사상면(현 사상구), 북면(현 금정구 북부), 기장면 송정리(현 해운대구 송정동)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이로서 옛 동래부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모두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동래군의 영역은 현 기장군 영역과 일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군 명칭을 기장군으로 개칭하지 않고 계속 동래군으로 유지해 오다가[9], 결국 10년 후인 1973년 동래군을 완전히 폐지하고 양산군에 병합하였다.[10] 이렇게 병합된 동래군 최후의 영역(즉 현재의 기장군)은 훗날 1995년 양산군에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됨으로써 다시 부산(동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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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내무부 직할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동래군에서 구포읍, 사상면, 북면,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해 온 부산진구와 동래구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로써 옛 동래도호부의 영역을 모두 회복했다. 또한, 1957년부터 1973년까지 같은 이름의 군(동래군)과 구(동래구)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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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직할시 시절 휘장과 상징 설명
  • 1963년 부산시가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내무부 직할 부산시로 승격되어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었다.[11] 이와 함께 동래군 구포읍, 사상면, 북면 및 기장면 송정리가 부산시에 편입되었다. 구포읍과 사상면은 부산진구로, 북면과 기장면 송정리는 동래구로 편입되었다.
  •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기장군 영역.
  • 1975년 부산진구와 동래구의 각 일부를 분리하여 남구를 설치하였다.(7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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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김해군 일부(대저 일대)를 편입하고 북구를 설치할 당시 부산직할시의 행정구역 상황. 대저 일대를 편입한 북구의 면적이 어마어마하다.
  • 1978년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 전역(신호리 제외, 녹산면으로 이관) 및 가락면 일부를 부산직할시에 편입하고[12], 편입된 지역과 부산진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북구를 설치하였다.(8구)
  • 1980년 동래구에서 해운대구를 분리 설치하였다.(9구)
  • 1981년 직할시란 명칭이 도입되어 부산직할시로 명칭이 바뀌었다.
  •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를 분리 설치하였다.(10구)
  • 1988년 동래구에서 금정구를 분리 설치하였다.(11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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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김해군 일부 및 의창군 천가면(가덕도)을 편입하고 강서구를 설치할 당시 부산직할시의 행정구역 상황. 이 상태로 1995년 광역시 출범 전까지 이어졌다.
  • 1989년 김해군 가락면, 녹산면 및 의창군(현 창원시) 천가면을 부산직할시에 편입하고, 편입된 지역과 북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강서구를 설치하였다.(12구)
  •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며 광역시란 명칭이 도입,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개칭되었고, 남구에서 수영구를, 북구에서 사상구를, 동래구에서 연제구를 분리 설치하고, 양산군 중 옛 동래군(1914년 이전에는 기장군)에 해당되는 영역을 편입하여 기장군을 설치하였다.(15구 1군)
광복 후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부산으로, 광복직후에는 9월 총파업으로 사회주의 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13] 6.25 전쟁 시기에는 임시수도로 지정되어[14] 대통령 관저(임시수도기념관), 정부청사(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산극장과 문화극장), 대한민국 국방부(토성초등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주요 시설들이 부산으로 옮기고 무수한 사람들의 피란 행렬이 이어졌다.[15] 10월 27일 서울을 수복하자 정부는 귀환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전쟁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발췌 개헌을 비롯한 정부의 활동은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에서는 가장 흑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했는데,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 피해가 가장 심각한 곳이기도 했다.[16]
전쟁이 끝나고 정부는 서울로 귀환하였으나 부산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인구수가 커졌다. 반면 인구가 비등하였던 평양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부산이 평양을 확실하게 제치게 되었고, 부산은 확고한 한반도 제2의 도시로 남았다.[17] 이후 박정희 정권 시기부터 한국 경인공업지역과 함께 남동임해공업지역으로 국내공업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성장하였으며, 공업화와 산업화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한국의 최대 수출항 역할도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중앙정부 주도의 산업화는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장을 이끌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지역민의 불만과 바람은 충분히 수용하지 못해 주택문제나 환경문제 등의 기본적인 문제는 미해결된 상태였다. 한편으로 마산과 함께 부마민주항쟁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부산대학교에는 부마 항쟁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는 10. 16 기념관과 기념비가 있다.
성장일로를 달리던 부산은 전두환 집권 이후 지역 기반 대기업인 국제그룹, 동명목재 두 곳이 상납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날아가고, 성장관리도시로 지정되어 공장 이전이 사실상 막히는 규제를 당하여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부산지역의 공장수는 전두환 집권전인 1979년까지 매년 증가하다가 잠시 감소 후 1982년부터 다시 증가하여 1985년에야 겨우 1979년의 수준을 유지했고, 수출업체수는 1980년까지 증가하다가 1986년에야 겨우 1980년의 542개 업체를 겨우 뛰어넘었을 정도.
1995년 양산군 장안읍, 기장읍, 정관면, 일광면, 철마면을 관할로 하는 기장군이 설치되었고(즉, 1914년 동래군에 병합되기 이전의 기장군이 다시 부활한 것이며, 또한 1973년 동래군의 폐지 직전의 영역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진해시 웅동2동의 일부[18]를 병합하여 '''부산광역시'''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내무부 관련 문서에 따르면, 양산군 웅상읍(현 양산시 웅상출장소)과 김해군(현 김해시) 대동면,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 웅천2동 전역의 부산 편입 또한 고려되기도 했으나 이들 지역의 부산 편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1995년 부산 시역 확장은 추후 양산군 웅상읍, 김해군 대동면, 진해시 웅동2동 나머지 지역의 부산 추가 편입을 전제로 부산시청이 동의한 사항이기도 하다(내무부 문서에 나오는 내용임).
인구는 한때 390만 명까지 성장하였으나 현재는 양산시, 김해시, 창원시 등으로 인구가 빠져나가고, 전통 강호인 경공업이 쇠퇴하면서[19] 300만 명 초반 대까지 감소할 전망.[20] 인구의 노화 또한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서 고령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대도시의 주택값 하락[21] 등이 가장 먼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2011년에는 인구감소폭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
[1] 기록마다 이름이 다른데, '장(萇)'과 '내(萊)'가 거친 땅에서 자라는 풀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고 '거칠산'과 '장산', '내산'이 의미상 통한다고 보는 추측도 있다.[2] 현재 동래 왜관 자리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다. 간척 등을 통해 현재는 바다와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3] 같이 약조한 원산은 1881년, 인천은 1883년에 개항되었다.[4] 화교 밀집지역을 거쳐 지금의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졌다.[5] 동래에서 개발된 동래온천의 경우, 한인과 일본인이 합동경영하면서 규제를 피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6] 과거에 용두산과 대칭되는 용미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부산부청을 짓기 위해 용미산을 깎아버려 산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고 한다.[7] 이 두 도시는 일제강점기 초중기 동안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8] 단 당시의 승격시의 명칭은 부산직할시가 아닌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정부(내무부)직할의 그냥 부산시'''로 독립이 되었다. 시장도 부산직할시장이 아닌 그냥 부산시장이었다.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명칭이 변경된건 1981년 경상북도 대구시경기도 인천시가 각각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되기 3개월 전이었다. 단,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 명칭도 함께 쓰였다. 직할시 승격식(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참석했다.)에서도 '부산직할시'로 쓰였고 지역 언론에서도 '부산직할시'를 썼으며 부산교통공사의 전신인 부산직할시지하철건설본부는 1981년 1월 1일에 설치되었으나 실제 부산직할시 개칭은 동년 4월 4일에 이루어졌다. 즉 (정부 직할) 부산시 시절에도 부산직할시 명칭은 쓰였음을 알 수 있다.[9] 심지어 동래군청도 기장으로 이전하지 않고 부산 시내(동래구)의 원래 위치를 그대로 유지했다! 수안동에 있는 동래부동헌이 1973년까지 동래군청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 심지어 1973년 이후에도 동래부동헌 건물은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쓰였다고 한다.[10] 오히려 부산 시내(동래구)에 있던 기존 동래군청(동래부동헌)보다 새로운 주인(?)이 된 양산군청이 기장 지역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덩달아 기존 양산군과 기장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양산군에서 1986년 기장 지역을 관할하는 동부출장소를 설치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불편을 느낀 기장 주민들은 동래군 부활(사실상 옛 기장군 부활)을 주장해 왔다.[11]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명칭이 변경된 건 1981년 7월 1일에 경상북도 대구시경기도 인천시가 각각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되기 3개월 전인 4월 4일이었다.[12] 이때 편입한 지역은 여러 개의 를 묶어서 행정동마냥 하나의 법정동으로 편성했다는 특징이 있다.[13] 이는 당시 경상도 지역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강세였던 것도 있었지만, 광복 직후 당시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 실패, 구(舊) 친일파 출신 경찰들의 쌀 강제공출, 경상도 전역에서 퍼져나간 전염병(이때, 군정청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경상도 전역을 봉쇄해버렸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등으로 인해 민심이 매우 흉흉했던데 배경이 있었다.[14] 이 때문에 부산 지역의 일부 학생들은 6. 25 전쟁 때 부산 빼고는 죄다 북한 점령하에 들어가고 부산 근처에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대구를 비롯한 경북 지역 및 마산과 대구 일대를 잇는 경남 중서부 지역이 최후 결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하필이면 그 동네에 왜관이 있어서 더 헷갈린다.[15] 이 때 부산으로 피란 가던 피란민들이 만날 곳은 정해야겠는데 부산 지리는 알 턱이 없으니 대부분은 그나마 유명했던 영도다리(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도개교라 유명) 밑에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피란민의 한의 장소로 꼽히게 되었다.[16] 보도연맹 사건의 피해가 전국구로 심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지역이 경상도 지역으로 특히 경남, 부산 지역이 가장 심각했었다. 지금도 부산지역에는 보도연맹 희생자 유가족들이 적지않게 존재하는데, 이 분들 말씀 들어보면 오랜 기간 동안 연좌제에 묶여 한(恨)이 많이 쌓였다고...[17] 그러나 지금의 평양 인구는 부산 다음의 세 번째며, 이것도 북한의 강압적인 인구 통제를 거친 것이다.[18] 법정동 상으로는 가주동과 용원동 일부. 참고로 이쪽은 산업단지 일대의 행정구역 조정을 한 것이다.[19] 특히 유명한 것이 신발 공업으로 프로스펙스가 이곳을 기반으로 하였다. 현재 유명한 업체로는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팀 화승 오즈의 후원사로 유명했던 화승이 있다.[20] 하지만 타 지역보다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은 역으로 설명하면 부산 또한 서울처럼 여러 위성도시를 거느린 거대한 지역권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양산은 부산의 배드타운의 역할이 강하지만, 창원의 경우는 일부 부산의 위성적인 역할도 있으나 대체로 독립적이며, 김해는 부산과 창원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는 면에서 제한적이다.[21] 부부 + 자식의 4 ~ 5인 정도가 거주하던 집에서 노인 인구만 수용하면 되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가구가 늘어난다. 따라서 큰 집의 집값은 떨어지고 작은 집의 수요는 늘어나지만 노인 인구의 수는 비교적 많지 않으므로 전반적인 집값은 하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