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여

 

均如
923.8.8 ~ 973.6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고려 초기의 승려. 속성은 변(邊)씨로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 사람이다. 신라 말기에 정치 파벌에 휘말려 남북으로 갈라진 화엄종의 통합에 힘썼으며 광종의 전제 정치와 불교 정책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

2. 생애


923년 황주 교외의 둔대엽촌(遁臺葉村)에서 변환성(邊煥性)과 점명(占命)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나이가 당시 예순 살이었고 임신해서 일곱 달만에 낳았으며 태어나기 6년 전인 천우(天祐) 14년(917년) 태몽으로 누런 봉황 암수 한쌍이 품에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태어났을 때 얼굴이 너무 추해서 부모는 이런 애는 키우기 싫다며 들에 버렸는데 까마귀가 날아와서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균여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15세 때 사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출가해 중이 되어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 영통사(靈通寺)의 의순(義順) 밑에서 수행했다. 그의 집안 자체가 독실한 불교 신자 집안이었던 듯하다. 아버지 변환성 역시 화엄경을 자주 읽었고 누나 수명도 법화경을 읽고 남동생 균여와 토론할 정도였다고 한다.
광종 4년(953년) 후주(後周)에서 사신을 보내 광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게 되었는데 행사날 비가 계속 내려 의례를 거행할 수 없었다. 이때 화엄종 승려로 국사(國師)였던 겸신(謙信)의 천거로 균여가 기청(祈晴)법회에 나아가 강연하자 곧 비바람이 걷히고 하늘이 밝아졌고 이에 광종은 균여를 극진히 존경하여 그에게 몸소 9번을 절하고 그를 대덕(大德)에 봉하고는 그의 가족에게 토지노비를 내렸다고 한다.
이후 광종 9년(958년) 개경의 불일사(佛日寺)[1]에 벼락이 친 변고를 물리치기 위한 소재도량에 초청되어 강연하거나 궐내 내도량에 머물면서 광종의 정치 자문을 맡게 되었다.
광종 14년(963년) 광종이 발원해 지은 귀법사(歸法寺)의 초대 주지승이 되어 입적할 때까지 귀법사에 머무르는 등 광종의 치세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균여는 신라 의상의 법맥을 잇는 화엄종 승려로써 958년에 의상이 지은 화엄일승법계도를 해설한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나 화엄경의 요체를 해설한 <십구장원통기>를 짓기도 했는데 이는 신라 말기에 남악과 북악으로 갈라져 있던 화엄종 교단의 통합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균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화엄종은 화엄사관혜(觀惠)가 주도하는 남악과 해인사희랑(希朗)[2]이 주도하는 북악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기 견훤왕건의 지원을 받으며 정치뿐 아니라 교리, 사상적으로도 대립하게 되었다. 균여 자신은 북악파이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남악파와의 통합을 추구해 각지의 사찰을 돌며 승려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거나 자신이 화엄종 이론서를 지어 양측의 교리 해석차이를 없애려 애썼다.
균여의 화엄 사상은 성상융회(性相融會)를 특징으로 하는데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융합시키는 이론으로서 화엄 사상을 근간으로 법상종 사상을 융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화엄 법계관을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豎盡法界)로 나누어 수진법계에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의미를 살피고 횡진법계에서는 그 가운데 원칙적인 ‘하나[一]’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두 법계를 종합한 체계를 주측(周側)이라고 하여 횡진법계를 근간으로 수진법계까지 융회하였다. 곧 원칙적인 하나 속에 전체를 통합하고 그것을 일체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나아가 성속무애(聖俗無碍) 사상으로 성과 속의 차별까지도 융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균여의 행적은 향찰로 지은 11장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이다. 원효가 그랬던 것처럼 노래보현보살의 10가지 소원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인데 작품 자체는 불교 포교의 목적으로 쓰여져서 문학성을 높게 쳐주지는 않지만 향찰로 적힌 가사뿐 아니라 한역된 한시 원문도 함께 전해지고 있어 향가 연구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3] 당시 보현십원가는 대중에 널리 퍼져서 가끔 담벼락에 낙서로 쓰이거나 노래를 부른 사람의 병이 낫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 한시로 번역되어 전해진 이 노래는 당시 송나라의 황제와 신하가 '부처님의 글'이라 칭송하고 사신을 보내어 균여에게 예를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균여의 저술들은 광종 9년(958년)에서 광종 13년(962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광종이 왕권 강화책 및 호족 억제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던[4] 시기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화엄종 교단의 통합을 위한 균여의 행적을 차라리 '정치승려'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균여의 불교 사상은 대각국사 의천이 송에 유학해 천태종을 배워오기 전까지 고려 화엄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강조하면서 "균여는 교(敎)만 있고 관(觀)이 없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5] 그러면서 아예 "균여의 글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볼 가치도 없다"며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균여의 저술을 빼버렸을 정도. 의천이 균여를 비판한 것은 한국 불교사의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6]
균여의 행적을 전하는 전기로 문종 29년(1075년) 진사 혁련정(赫連挺)이 지은 균여전이 있다. 그는 기존에 만들어진 균여의 전기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균여의 전기를 다시 짓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혁련(赫連)이라는 성씨가 실제 중국에서 존재했던 것을 감안하면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7]
균여는 광종의 왕권 강화책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존재였지만 그 역시도 광종의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균여전에 따르면 개관(開寶) 연간(968-975)[8] 당시 균여가 주지로 있던 귀법사의 정수(正秀)라는 승려가 균여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참소했고 광종은 분노해 균여를 죽이고자 했지만 대궐에 나타난 균여의 모습을 보고 그가 다른 뜻을 품었을리 없다고 생각하고 귀법사로 돌려보냈는데 그날밤 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대왕이 참소를 믿고 법왕(法王)을 욕되게 했으므로 반드시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했고 다음날 송악산 북쪽 기슭에서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수많은 소나무들이 저절로 넘어지는 변고가 일어났고 법왕을 능멸했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듣고 놀란 왕은 궐내에 소재도량을 세웠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만년에 균여가 불교계 내지 정계로부터 견제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일화이다.
다만 위 내용들은 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핵심은 광종이다. 광종은 왕실을 위해서 선교 양종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선종은 중국에서 법안종을 일부러 끌어들여서 통합시켰고 교종은 균여를 통해서 통합시킨다. 그리고 둘을 통합시키려고 했는데 이 작업이 실패한다. 균여가 마지막 순간에 광종의 편을 들지 않고 화엄종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의천의 비판 가운데 교관겸수에서 교는 있으나 관이 없다는 것은 실천이 없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의천의 저 교관겸수 이론 자체가 교선 통합을 위한 논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균여가 교선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균여의 일화를 보면 광종이 균여를 불러 죽이려다 못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송악 북쪽의 소나무들이 넘어졌다고 되어 있다. 소나무는 말 그대로 송악을 구성하는 일부이고 이들이 넘어졌다는 것은 광종에게 반발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 광종의 적이었던 고려 중앙 귀족들이다. 교종 사찰들은 상당수가 고려 귀족들의 손에 있었고 이들이 반발한 것이다. 이러니 광종이 통합 주체로 삼으려고 했던 천태종을 중국에서 배우고 온 의천이 균여를 비판하고 균여전이 문벌 귀족 전성기인 문종 시기에 쓰여지고 균여가 있던 귀법사가 무신정변이 일어난 다음에 고려 중앙 귀족들을 대신해서 교종 승려의 난의 주축이 되는 전개가 벌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3. 대중 매체에서


제국의 아침에서는 탤런트 정승호가 맡았다. 광종과는 정종 치세에 서경 공역을 감독할 때부터 친교를 맺었고 광종이 초기에 호족들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습을 보이자 정신을 차리라고 간했다가 광종의 본심을 알자 감복. 이후 유랑민들이나 병자들을 수용하고 보살피기 위해 사찰 공사에 힘을 쏟는 등 성자같은 모습도 보여준다. 한편 불교를 정비하고 보현십원가를 짓는 이야기도 나오는 등 뛰어난 인물임도 부각된다.
말년에 숙청에 반쯤 중독된 듯한 광종에게 사람 좀 그만 때려잡으라고 충언을 올리다가 심기를 거슬려 자신도 죽을 뻔했지만 결국 균여까지 때려잡을 수는 없었던 광종이 정신을 차리게 되고 이후로는 광종이 서거하기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나레이션으로 언급된다. 드라마시청률 문제로 급히 막을 내리느라 광종 치세 후기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지만 아마 이 부분이 상세히 나왔다면 중요한 역을 계속 맡았을 듯.


[1] 광종과 그의 형 정종의 생모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를 위해 세운 원찰이기도 하다. 지금은 터만 남았다.[2] 희랑은 최치원이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도 하는 등 최치원과도 교류가 있었으며 해인사에 그의 목조좌상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3] 균여의 보현십원가를 번역한 것은 최행귀(崔行歸)라는 인물로 그는 중국의 문학만 우리가 본받고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도 좋은 것은 중국에 알리자는 취지로 보현십원가를 번역하였다고 한다.[4] 노비안검법 실시(956년), 과거제 시행(958년), 공복 제도 제정(960년) 등.[5] 의천의 교관겸수는 화엄학이 그저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해명하는 교학(敎學, 교리 체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심성(心性)의 본래 모습을 체득하는 관행(觀行, 실천 수행)도 함께 해야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었는데 의천은 균여에 대해 교학은 뛰어났어도 관행은 부족했다(이론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수행으로 실천할 줄을 몰랐다)고 비판한 것.[6] 이때 의천이 빼버린 균여의 저술은 재조대장경 조판 때에 다시 수록되었다.[7] 여담으로 중국에서 혁련이라는 성은 주로 흉노계 사람이 사용했었고 당나라 말기까지 혁련씨 성을 쓰는 인물이 있었음을 구당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8] 보면 알겠지만 균여가 죽은 시기와도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