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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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現 키움 히어로즈 감독. 한화 이글스와 두산 베어스를 거쳐서 현대 유니콘스에 은퇴한 내야수로 주로 내야 유틸리티 백업으로 활동했다.
2. 선수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박찬호, 박재홍, 정민철, 조성민, 임선동, 염종석, 송지만, 이영우, 박종호. 차명주, 김종국, 최기문, 손혁 등과 함께 한국 야구 최고의 황금세대로 꼽히는 전설의 92학번 중 한 명이었다.
박찬호, 손혁과 공주고 동기생으로[2] 고려대학교를 거쳐서[3] , 1996년 1차 지명으로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한화의 주전 유격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3루수로 뛰게 되었다. 하지만 파워 포지션인 3루수치고는 거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교한 3할 타자도 아니고 그저 2할 6푼 ~ 2할 7푼 정도의 어중간한 타율을 기록하는 타자라서 확실하게 주전을 꿰차지는 못했다. 하지만 클러치 능력은 어느정도 있어서 3루수 포지션을 반 고정으로 맡았으며 타선은 주로 하위타선에 기용되었다. 선발 출장을 하지 않을 때에는 대타로도 종종 기용되었다. 화끈한 타격과 세밀한 주루플레이로 한화의 주축으로 떠오른 입단 동기인 이영우와 송지만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2.2. 두산 베어스 시절
1999 시즌 중 전상렬과 묶여서 김경원과의 2:1 맞트레이드를 통해서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3루에는 김동주, 2루에는 안경현이 버티고 있는 두산의 내야진에선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야 유틸리티 백업으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1999년엔 박정태의 31경기 연속안타 행진을 끝낸 다이빙 캐치를 선보이기도 하였다.[4]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3연패를 당해 팀 분위기가 어두웠지만 선취점을 얻는 안타를 쳤고 그 후 팀은 3연승을 거두어 7차전까지 이끌고 갔다. 2001년 포스트시즌에선 주전 유격수인 김민호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그 자리를 메우면서 수비 면에서는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공격면에서 맹활약하면서 2001년 준 PO MVP에 오르는 등, 2000년과 2001년 두산에서 나름대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2.3. 현대 유니콘스 시절
그 뒤로도 준수한 백업으로 활약하다가 2005년 FA 신청을 하였다. 하지만 두산 베어스는 당시 장원진-안경현-손시헌-김동주 라는 내야진이 있었고, 홍원기는 준수한 백업이긴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 노쇠화 기미가 보인다고 판단해서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하마터면 FA 미아가 될 뻔도 했다. 다행히 사인 앤드 트레이드의 형식으로 장교성을 상대로 트레이드되며 현대 유니콘스로 건너가게 된다. 결국 몇 경기에 못 나왔으며, 2008시즌 초에 박노준 단장에게 전력분석원 제의를 받고 은퇴했다.
한편 현대 팬들과는 여러가지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현대만 만나면 타이론 우즈, 장원진과 더불어 날아다녔을 정도였기 때문이다.[6] 더군다나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도 맹활약을 해서 현대를 꺾고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으니...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넥센 히어로즈의 전력분석원을 거쳐서 2군 수비 코치로 부임했다. 2011시즌을 앞두고 김성갑 1군 수비코치가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자, 1군 수비 코치로 보직 이동했다. 2011시즌부터 2015까지 꾸준히 1군 수비코치를 맡았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팀이 암흑기 탈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12시즌 이후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야수비가 발목을 잡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팀 DER수치를 보면 넥센은 항상 하위권이며, 12시즌 이후로는 오히려 매년 퇴보하고 있다. 내야수비진 한명 한명의 이름값은 국가대표 수준이지만, 실제 내야수비 조직력이 좋다고 보긴 힘들며 페넌트레이스나 포스트시즌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불안한 수비가 팀을 무너뜨리곤 했다. 그래도 강정호가 버텨주던 14시즌까지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강정호가 피츠버그로 떠나고 서건창이 부상후유증으로 수비가 무너진 2015시즌에 히어로즈 수비의 실체가 드러나며 까임의 빈도가 늘어났다.
3.1. 2015년
2015년 히어로즈의 수비율은 0.980으로 뒤에서 세번째이며, 평균 대비 수비 승리 기여라는 스탯은 뒤에서 9위이다.(포지션 조정 포함) 그럼에도 매년 코치진에 잔류하기 때문에 철밥통이라고 불리고 있다.
2015년도 가장 잘한 일로는 김하성을 키워낸 일 같다. 그리고 항상 선수들이 주변에 많은 코치인걸 보면 성격이 좋고 친근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3.2.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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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그나마 수비를 잘하던 박정음부터, 무릎부상 이후로 수비력이 저하된 서건창도 미숙한 플레이를 종종 보여주면서 다시 까임의 지분이 늘고 있다.
3.3. 2018년
2018년 스프링캠프부터 박찬호를 임시 인스트럭터로 불렀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농담 삼아서 "식사 2끼로 수락을 받았다."라고 했다고.
3.4. 2020년
2020년 시즌을 앞두고 공주고-고려대 동기인 손혁이 키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자 그를 보좌하여 수석코치직을 맡는다. 수비코치로는 무능하지만 팀 내 인심은 골고루 얻고 있는 만큼 이쪽이 낫긴 하다. 그리고 그 해 1월 '''야구 코치 최초로 1급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3.5. 2021년
1월 21일 키움 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았다. 일단 구단에서는 "면접을 본 유력 후보군 중 1명이지만 감독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선수단을 오랫동안 지켜본 코치 중 한 사람으로 팀 사정을 잘 아는 코치인 만큼 과거 감독 후보군으로 꼽혔던 동갑내기 설종진 고양 히어로즈 감독과 함께 차기 감독감으로 부정되지 않고 있다.
오전 10시 30분, 곧바로 홍원기 코치를 제6대 감독에 선임하고 고형욱 전 단장을 2년 만에 다시 단장으로 선임했다는 구단의 공식 발표가 나왔다.
부임기간 동안 히어로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의 대거이적이 확실시 되고 있으므로 성적과 리빌딩 두마리 토끼를 목표로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선수수급 방법이 한정적인 팀 특성상 여기서 삐끗하면 다시 긴 암흑기에 돌입할 수도 있으니 홍원기 감독의 어깨에 구단의 미래가 달려있다.
4. 기타
- 선수시절때부터 별명이 원기옥이었다. 처음엔 이 별명에 대해 심리적 부담감을 느껴져서 꺼림직스러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 예전부터 동료와 팬들과 오랫동안 정들었던 별명이었기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 '넥센팬이 선수에게 준 초콜렛을 선수 몰래 빼돌려서 딸에게 선물했고 그걸 아내는 SNS에 인증했다'는 오해가 있었다. 당시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를 비롯한 넥센 팬덤에서 들고 일어났었는데 이후 딸의 SNS에 이는 사실이 아니고 그냥 한 투수가 조공받은 물품을 두고 간 걸 가져왔다는 말로 해명했다.
- 위에서 언급한대로 박찬호와는 학창시절 동기로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박찬호의 비공개 결혼식에 지인 30명만 초대했을때, 노모 히데오와 함께 초대받은 단 2명의 야구인 중 한명이었다. 내 덕에 찬호 ML 갔죠 박찬호, '공주고 합숙소 이탈사건' 15년만에 '폭탄주 화해'
- 퀴즈 대한민국 107회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 형인 홍헌기도 야구선수였다. 1988년 홍익대 야구부 창단멤버였으나,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뒤 실업야구 포스콘 야구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남양 홍씨 당홍계 36세손 '基'자 항렬, 성우 홍범기의 친척뻘에 해당된다.[2] 박찬호와 손혁, 홍원기 세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부터 야구를 같이한 죽마고우이다. 참고로 공주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박찬호가 3루수, 홍원기가 투수였으나 박찬호가 투수로 전향하자 홍원기가 박찬호 대신 3루수를 보게 돼서 홍원기가 타자로 전향하게 되었다. 당시에 박찬호의 투수 전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투수들의 학부모의 반대가 더욱 심했는데, 더군다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학교의 에이스였다. 홍원기 본인이나 부모로써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게된 셈이라 자연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세 사람의 졸업 이후 감독은 경질되고 야구계를 떠나게 된다.[3] 고교 동기인 손혁과 함께 진학했으며 조성민, 김종국과 같은 92학번이다.[4] 이 때문에 홍원기는 직후 롯데팬들에게 걸쭉한 욕설을 들어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아재 문서 참조. 하지만 당시 박정태 본인은 오히려 홍원기 때문에 자신의 기록이 더욱 빛날 수 있었다면서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5] KBS N SPORTS 더 레전드 "믿음으로 이룬다 국민감독 김인식"편을 보면 자세히 나온다. 다만 이때는 배경이 2001 PO. 1차전 1:1 동점 상황에서 8회말에 결정적인 알까기 실책으로 분위기를 현대에 내어준 후 5:1로 경기가 종료된 후 홍원기는 메일로 욕을 수십 통 받고 새벽 4,5시까지 못 자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날 자신도 모르게 '아 오늘 선발 라인업에 안 들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인식은 특유의 믿음의 야구를 발휘, 그냥 유격수 9번타자로 넣었다고. 그에 감명받아서 무엇인가라도 보답할 생각이었나 홈런을 계속 때렸다고. 김인식 특유의 믿음의 야구를 잘 보여준 사례로 나온다.[6]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이 우승했다면 MVP는 홍원기가 받았을 것이 유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