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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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기자이다.
대한민국의 제11대, 제13대 ~ 16대, 제18 ~ 20대 국회의원으로, 소속 정당은 우리공화당이며[3] , 최근 지역구는 경기도 화성시 갑이다. 20대 국회 기준 현역 최다선 국회의원이자 최경환과 더불어 친박계의 좌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는 6.3 항쟁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정의로운 기자였고, 지금은 '''친박계의 좌장''', 그리고 이제는 상도동계 중에서 성향이 180도 정도로 가장 크게 변화한 인물이다.[4][5]
20대 국회의원들 중에서 수도권 지역 최고령 국회의원이자 현역 최다선 의원이다.[6]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943년,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에서 순조 때 이조판서 및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죽석관(竹石館) 서영보(徐榮輔)의 5대손인 아버지 서원석(徐元錫)과 어머니 청풍 김씨 김을순(金乙順) 사이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은로초등학교,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때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1966년 12월, 육군에 입대하였고 1969년 10월까지 34개월간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한 후 전역하였다. 그 후에는 1980년까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198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5.18특파원리포트>에 내신기자 중 한 명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기고했을 정도이다. 후에 친박계 좌장으로서의 행동과 매우 대비되는 이력이다.
2.2. 상도동계의 대표주자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7]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박실 후보와 민주정의당 허청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8][9] 같은 해 통일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 통일민주당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제1 정무장관을 겸임하였다. 이 때부터 보수정치인으로서 쭉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당내 민주계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의 간사장을 맡으면서 이회창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서 민주계 후보 4자연대를 구성하며 반 昌 흐름을 유도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출투표에서 새천년민주당 이만섭 의원(당시 8선, 전 국회의장)에게 단 8표 차이로 패하면서 의장이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5선이었으니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영원히 없었다'''.
2002년 5월부터 2003년 1월까지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10] 이후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대선 재검표를 주장했으나, 어찌되었던 '''노무현의 승리'''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서 결국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이후 17대 총선은 탄핵 여파가 워낙 컸던 데다가, 불법 대선자금 수사 문제로 인해 불출마했다. 그리고 서청원이 20여 년간 가지고 있던 동작구 갑 지역구는 이때 당선된 초선 의원인 열린우리당 소속의 전병헌이 12년간 가져간 뒤 20대 총선부터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김병기가 물려받았다.
2.3. 친박계 좌장으로 보수 정권 10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지지하였다.[11]
따라서, 이명박 및 친이와 사이가 상당히 나빠지면서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학살 첫 표적이 되었다. 때문에 2008년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친박연대'''를 창당해서[12] 당대표가 되었고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양정례(비례 1번), 김노식(비례 3번)의 비례대표직 금품 수수[13] 로 대법원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여담으로 충격적이지만 당시 대법원 상고심 변호사 중에서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위치한 현 대통령 문재인이 포함되었다. #[14]
그 뒤 친박연대가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왔다.[15]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서는 2013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기도 화성시 갑 선거구로 옮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6] 당시에 이미 70세의 고령이어서 그런지 심근경색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쓰냐는 민주통합당 측 공세가 있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화성시 갑 지역구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거물답게 지역구 사업에 예산을 잔뜩 끌어왔다는 후문이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비박계로 분류되는 김무성 대표와 시시건건 마찰을 빚었는데[17] ,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김무성에게 밀려 2위로 최고위원이 된 이후에도[18] 친박 좌장 타이틀이란 영향력은 건재하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을 동원해 유승민을 포함한 비박계 의원들이 공천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최경환 등 친박 의원들과 같이 '''박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진실한 친박)'''이란 민망한 표현을 쓰는 등 새누리당 내부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선거에서 참패하게 된다'''.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얻고 원내 제2당으로 밀려난 새누리당의 대참패 이후, 김무성을 포함한 지도부는 전격 사퇴 수순에 들어갔는데도 별 소식이 없다. 아마도 수도권을 제외하고 경상도 등 새누리당의 주요 텃밭 지역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어찌어찌 당선에 성공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당 내부에서 '''국회의장에 서청원을 지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친박 대표주자인 서청원의 박 대통령 마케팅으로 선거에서 참패한 것을 보면 꿈도 희망도 없다. 결국 2016년 6월 8일 20대 국회의 전반기 의장을 더민주가 맡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무산되었다.
6월 9일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선출을 위한 의원 표결에서, 현역 최다선 의원으로서 임시 의장을 맡았다. 표결 후, 당선자인 정세균 의원에게 의장석을 넘겨주었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국회의장이 될 수도 있었을 본인에게는, 꽤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듯 하다.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꿈이 국회의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위의 서술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국회의장 출마 자격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5선 시절, 즉 16대 국회부터 국회의장 자리에 도전했었고, 20대 국회에서야말로 의장석에 앉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으나, 끝내 임시 의장만 맡아 봤으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할 만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섰던 라인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당에서 청산되어야 될 구태 정치인 1호로 지목되었다. 최경환과 함께 출당처리된다 만다 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2.4. 박근혜 정권 몰락 이후
2016년 10월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비박계가 이정현 당대표의 사퇴를 요구하자, “'이 대표에게 물러나라는 건 전쟁 하자는 것”'라고 말했다.
11월 22일, 남경필 前 경기도지사가 '''비박계 인사들을 협박하고 모욕 주는 조폭과 같은 행태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면서, 서청원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고 탈당했다. # 한겨레는 사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가 마지막 정치경력에 왜 이런 오명을 남기는지 안타깝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깠다.
남경필이 폭로한 9명의 친박의원 모임의 일원이다. 이른바 '''진박 9인회'''.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 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이 박근혜에게 전해준다고 하였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2017년 7월 1일에 서청원 의원의 아들이 쌍방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기사엔 자유한국당 의원의 아들인 서 모씨라 되어있지만, 현재 자유한국당에 서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은 서청원 단 한 명밖에 없다. #[19]
자유한국당으로부터 박근혜, 최경환과 함께 자진탈당을 권유받았으나, 대놓고 불복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것은 물론이고,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하여 홍준표 대표가 서 의원에게 윤 전 부사장의[20] 진술을 번복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녹취록을 가지고 있다며 홍 대표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일각에서는 서청원 의원이 이렇게 완고하게 탈당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국회 전반기가 끝나는 2018년 6월 전까지 정계 개편이 이루어져 자유한국당이 최다 의석을 가진 원내1당이 될 경우, 서 의원 본인이 후반기 국회 의장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런 서청원 의원의 폭로에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은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한다며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다만 홍준표 대표 측은 해당 녹취록이 있으면 까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으며, 서청원 의원 측도 때가 되면 공개한다고 했기에 아마 그 때가 언제인지 지켜보고 있다. 또한, 두 측이 정치적 타협을 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나, 마치 인명진 비대위 시절에 서청원을 축출한다고 했다가, 당원권 정지 3년 징계로 타협을 본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
다만, 자유한국당이란 조직 재활용을 원하는 홍준표 입장에서도 친박의 좌장인 서청원과 최경환을 살려 놓을 확률은 낮다. 박근혜와 친박들의 횡포로 인해 망해가는 자유한국당의 당권을 잡음과 동시에 대권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부터, 속으로는 친박을 양아치 친박이라고 할 정도로 친박을 싫어하나, 망해가는 자유한국당의 당권을 잡고 당 대표가 된 이유는 자유한국당 내에서 자기 세력을 키워서 당권을 잡고 보수통합이란 명목으로 본인과 자기 세력을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시키는 의도이다.(홍준표가 서청원, 최경환의 징계를 풀어준 것도 단지 차기 당권을 잡기 위해 일시적으로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했을 뿐이다.) 그런 의도를 가진 현재의 홍준표 대표 입장에서도 친박은 정적이자 애물단지, 트롤러 그 자체일 뿐이고, 홍준표 대표도 친박을 일정 수준으로는 청산해야 자유한국당이라는 조직의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바가 드러난 바 있다. 한데 친박의 좌장인 서청원, 최경환을 홍준표가 과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놔둘까? '''친박의 다른 주축인 최경환이 구속수사를 받고 의원직 박탈은 물론, 실형이 유력한 상황인데다, 원내대표 또한 친홍-친무계의 김성태가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홍준표 대표가 서청원 등의 친박 패거리들을 싸잡아 바퀴벌레라고 비난하면서 살충제로 박멸해야 된다는 비난을 한 바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자유한국당 행사 때 홍준표의 부인과 서청원의 부인이 모두 참석했는데 서청원의 부인이 홍준표의 부인한테 살충제를 건네는 막장인 헤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출당까지 예상되던 상황이었으나 당협위원장 자리를 박탈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대선을 곧 앞두고 친박 지지층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절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출당당하면 뉴스가 크게 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성회가 차지할 듯 싶다. 사실상 70대 중반의 끈 떨어진 노의원은 원래 재선의 여지가 없으므로 큰 타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에서는 자존심은 심히 상한 것이지만 말이다.
설사 서청원이 어찌저찌 자유한국당에서 살아남는다해도 꿈인 국회의장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국회의장은 표결에서 의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한데, 자유한국당 자체도 과반엔 미달하고,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그동안 각종 구설에 올라 이미지가 바닥을 친 친박의 좌장 서청원이 국회의장이 되는 건 결사적으로 반대할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바른미래당 내 바른정당계에서도 서청원을 좋게 볼 리가 당연히 없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반대가 우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회의장 문서에 보면 나오지만, 이 자리는 보통 온건파나 중립에 가까운 사람이 많이 앉는다. 친박의 핵심이 요직을 차지하는 걸 동의할 사람은 친박 뿐일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자유한국당 내에서도 비박 중심으로 "서청원은 아니다."라는 반발이 나올 정도이다.
20대 국회 본회의에 가장 많이 결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2위인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1.6배 정도 되는 수치로, 압도적인 결석을 자랑했다. 제3당을 이끄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나,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게다가 하반기 국회의장으로 낙점된 문희상(6선)이 개근상을 받은 것으로 볼 때 상당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다만 본회의 참석률뿐만 아니라 상임위원회 참석률, 법안 발의 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서 의원의 전반적인 의정 활동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5. 무소속 시절, 그리고 자유공화당 입당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역사상 최대 참패를 겪은 후, 2018년 6월 20일에 스스로 탈당 선언을 했다. 보수계의 몰락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이유였다. 홍준표 체제에서 겨우 피했던 출당 등의 중징계가 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당의 선거 참패로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당협위원장도 아닌 서청원 의원이 스스로 보수 진영 내에서 무언가를 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치에서 물러날 것으로 예측된다.
7월 13일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 의장단을 선출하는 본회의에서 또 임시 의장을 맡았다. 본래는 전반기 국회의장인 정세균 의장이 퇴임하기 직전에 본회의를 주최해서 하반기 의장단을 선출하는게 원칙이다. 하지만 5월 29일 정세균 의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8년 재보궐선거로 인해 국회 의장단 및 상임위 구성을 위한 여야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졌기 때문에 의장단이 공석이었다. 그래서 서청원이 명목상 임시 의장 자리를 또 맡아서 의장단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후반기 국회의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문희상 의원이 맡게 되면서 결국 국회의장이라는 서청원의 꿈은 임시로 의장석에 앉아 본 걸로 끝나게 되었다.
2018년 12월 비박계 일부에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석방을 주장하자 후안무치라고 하였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 등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자, 서 의원은 "나는 5.18 당시 조선일보의 기자로서 광주에 특파돼 현장을 취재했다.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로서 당시 600명의 북한군이 와서 광주시민을 부추겼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5·18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기사. 이는 친박 세력 내에서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이 다소 갈린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서청원 본인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일화이다.[21]
2019년 12월, 당직자 출신으로 김무성 대표의 부실장을 맡은 장성철씨의 인터뷰에 의하면 청와대에서 만들어 내린 살생부에 친박 중진의원이 여럿 있었는데 무려 친박 9인회의 일원이었던 서청원, 그리고 이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살생부는 엎어지면서 무사히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박근혜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22][23]
2020년 3월, 조원진계가 중심이 된 우리공화당이 김문수계 보수정당인 자유통일당과 합당을 하여 자유공화당을 창당하자 여기에 입당하여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원 지역구인 화성시 갑 예비후보로 등록하며 9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공화당 비례대표 2번으로 공천되어 지역구로 출마하지 않았고, 대신 비례대표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공화당은 단 1석도 얻지 못하면서 낙선되었다.[24]
2021년 1월 17일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핵심 인사들이 주를 이루는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인제 전 최고위원, 이주영,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황우여, 유일호 전 부총리 등으로 이뤄진 이 모임에 최근 현역인 국민의힘 김기현, 김태호 의원 등도 합류하면서 차기 당권·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돕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김종인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기타
- 서울 동작구 갑 국회의원으로 재직할 당시에 지역민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동작구 갑 지역구가 김영삼이 살던 상도동을 포함하는 데다가[31] 특히 초선 때는 동작구의 낙후된 지역에 수도관과 도로 포장 등 도시기반시설을 마련할 수 있게 예산을 잘 끌어와서 인기 폭발이었다고 또한 상도동에 본인이 거주했기에, 지역밀착형 정치인으로서의 역할도 잘 해냈었기에, 2010년대의 흑막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랐다. 2013년 이후에는 화성시 갑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사업에 필요한 예산을 잔뜩 끌어와서 주민들의 지지가 꽤 견고했다고 한다.[32] 이 당시 서청원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송산그린시티.[33]
- 친박이였음에도 최소한의 선은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전술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견해도 그렇고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이 폭로됐을 때는 이 계엄령 모의 내용에 '여당 국회의원들은 설득시키고 야당 국회의원들은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자, "국회의원들을 완전히 무슨 바지저고리인 줄 알고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것처럼 알고 말이지, 이런 문건을 작성하는 것 자체가 나는 굉장히 불쾌하고 잘못된 것이다."라고 반응하여 친박임에도 박근혜 정부의 계엄령 모의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34][35]
- 서울 동작구(갑) 국회의원을 하면서 자신의 모교이자 지역구에 위치한 중앙대학교 총동창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는데, 투자도 없이 비리만 저지르던 김희수 재단을 방치하는 등 학교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동창회장 타이틀을 자신의 정치활동에만 써먹었다는 평가가 있다.[36] .
- 2018년 중앙대 100주년 기념식에 중앙대 출신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참석하였고 재학생과 졸업생 상대로 연설하며 패기를 보여주어 박수를 받았다.
- 이회창 前 한나라당 총재와는 한 때 껄끄러운 사이였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4선의 서청원 의원은, 민주계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 간사장으로 있으면서, 당 총재이자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고, 결국 명예총재였던 YS의 지시로 정치발전협의회를 해체하게 된다. 이후 중진 의원들의 목이 달아나는 상황이었음에도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살아남았고, 이후 昌과의 껄끄러웠던 관계가 개선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서 다시 대선후보가 된 昌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당 대표가 서청원이었다.
- 박근혜 정부 시절 주일 히로시마 영사관 총영사와 오세훈 시절에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던 서장은 前 새누리당 동작구 갑 당협위원장은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 자신의 산악회도 있었는데, 이름이 청산회로 친박연대 있을 당시 박사모랑 당 권한 두고 싸우기도 했다.
- 총재직이 폐지된 한나라당의 첫 '대표최고위원'은 이 사람이었다. 1998년에 4선의 이한동 의원이 '대표위원'을 지냈지만, 총재가 있었기에 부총재 정도의 위상에 불과했다. '대표'라는 이름으로 보수정당의 수장이 된 사람은 이 사람이 최초이다.
- 2009년 국회의원 재산신고 현황 자료에 의하면 당시 최하위를 한 사람이기도 했다. 액수는 1억을 조금 넘긴 수준. 그 전 해인 2008년에는 부채 120억원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37] 이듬해인 2010년에는 부채 7억원의 김영환 민주당 의원이 최하위를 했다. 참고로 재산순위 1등은 알다시피 13대 총선이 끝난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정몽준 의원이 계속 독주해왔다.
- 조갑제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다. 서 의원과 조갑제 모두 조선일보 기자였으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를 취재했다는 점, 그리고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평가하고 북한 개입설을 부정한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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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위공(都尉公) 경주(景霌)파. 28세 원(源) 항렬.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엄연히 다른 집안이며, 서청원 의원의 노력으로 대구 서씨 조상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 달성 서씨로 자꾸 고치지 말자. 더구나 서청원은 순조 때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죽석관(竹石館) 서영보(徐榮輔) 선생의 봉사손(奉祀孫)이다.[2]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인 정성왕후의 직계후손으로 2009년에는 종묘제례에 초헌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 종묘제례 보존회의 회장이 서청원을 소개하면서 정성왕후를 성정왕후라고 읽는 해프닝도 있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F8eM4GNEbuQ[3] 본래는 자유한국당 소속이었으나 2018년 6월 20일에 탈당했다.[4]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고인의 빈소를 방문해 "김영삼은 나의 정치적 대부"라고 했지만, 정병국, 김영춘, 김무성 등 현재까지도 현역 상도동계 직계 후배들이었던 정치인들도 현재는 사실상 그를 상도동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상 상도동계에서 '''제명#s-1당한 거나 다름없다'''. 하다못해 그 김무성도 새누리당 대표를 하면서 각종 망언들을 쏟아내고 사위의 마약 문제와 아버지 김용주의 친일 행적, 본인도 철새 행적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박근혜에게 충성을 다 한 서청원보다는 평가가 그나마 나은 편.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 기일 2주기 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는 다른 상도동계 인물들과 달리 추도식 행사 30분 전에 짧게 인사만 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5] 생각해보면 5공 초기에 민주한국당을 거쳤다는 것 자체가 상도동계에 합류한 시기가 늦다는 의미다. 이회창 시기에도 팽 당하지 않고 대표 자리를 꿰어찼으니, 그야말로 민주한국당 - 상도동계 - 이회창계 - 친박의 양지만을 누린 환승 전문가이다.[6] 8선(11, 13~16, 18~20대). 다만, 18대 국회의원의 경우는 임기 수행 중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는 게 함정. 18대 임기를 제외해도 7선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과 더불어 최다선 의원이다.[7] 모교 중앙대학교와 김영삼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지역이다.[8] 박실은 평화민주당으로 출마했고, 동작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된다.[9] 참고로, 당시 김부겸도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었다.[10] 총재직에서 물러나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던 이회창 대선후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2인자인 셈이다.[11] 지금으로서는 의외로 서청원이 친박이 되기 전에는 이명박, 이재오랑도 친분이 다소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6.3 항쟁으로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었다. 또한 서청원은 이명박, 이재오보다 YS계로서의 군번도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상호 관계가 나빠졌다 해도 예전에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청원이 친박이 되고, 이명박의 도곡동 토지 차명 소유 의혹까지 제기하면서 사이가 상당히 나빠졌다.[12] 정확히는 친박계들이 껍데기만 남은 정근모의 참주인연합에 입당해서 당을 먹어버렸다. 총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밑바닥부터 신당을 창당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13] 총 32억 1천만원을 받아서 정당 운영비용으로 썼다.[14]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당시 문재인이 대표 변호사로 있던 법무법인 부산에서 사건을 수임해서 그렇다고 한다.[15] 비슷한 시기에는 친박연대를 탈당한 미래연합의 이규택 대표와 그 세력들이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이규택 대표가 탈당한 미래연합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소멸되었다.[16] 원래 화성 갑 의원인 고희선 의원이 임기중에 사망해서 공석이 된 상태였다.[17] 애초에 둘 다 상도동계 출신이었다.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함께 했었고 친박계가 된 시기도 엇비슷했다[18] 당시는 집단지도체제였다. 20대 총선 이후 이정현 지도부가 들어서는 경선부터 당헌당규를 바꿔 단일지도체제가 되었고 2019년 6월 작성시점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19] 40살이 넘은 아들에 대한 책임을 서청원 의원의 잘못으로만 돌리기는 무리지만, 워낙 서청원의 여론이 나빠서 묻히는 편이다.[20] 서청원 의원의 친한 지인이라고 한다.[21] 이는 본인이 과거 상도동계 인사였을 때의 정치 성향을 완전히 버린 것까지는 아니라는 증거도 된다.[22] 포함된 인사는 이재오(친이) 유승민, 김세연(친유), 정두언, 김용태(비박 소장파), 김학용, 김성태, 박민식(친무), 서청원, 이인제(친박)이었다.[23] 또한 비례대표 화이트리스트도 있었는데, 강효상, 유민봉, 최연혜, 신보라, 김현아가 이들이었다. 정작 청와대에서 금뱃지를 안겨준 것이다. 김현아는 비박계 의원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원래 1명이 더 있었으나, 당선권은 아니었다고 한다.[24] 어차피 출마 하였어도 무소속도 아닌 우리공화당명을 달고 2%의 득표도 얻기힘들었을 것이다.[25]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6]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7]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28] 4~5공화국의 총선은 중대선거구제다.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동반 당선.[29] 20대 국회기준 현역 최다선.[30] 2018년 6월 20일 자유한국당 탈당
2020년 3월 3일 자유공화당 합류
2020년 3월 22일 우리공화당 당명변경[31] 다만 김영삼의 사저가 있는 행정동 상도1동은 서청원의 선거구인 동작구 갑이 아닌 동작구 을 선거구에 속해왔다.[32] 참고로 친박 핵심인 최경환과 윤상현도 흑막스런 이미지와는 별개로 지역구 내의 입지는 절대적이다.[33] 계획 자체는 2007년부터 추진되어왔으나 서청원이 화성 갑에서 당선된 이후 예산 확보에 열을 올리고 공청회와 각종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상당히 공을 들였다. 이 때문에 친박 몰락의 신호탄이 된 20대 총선에서도 압승할 수 있었는데 신도시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 승리하여 친박임에도 불구하고 의정활동만으로 젊은 층의 (친박에 대한)비토여론을 상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4] 다만 이 부분은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정권의 지지율이 60-70%를 찍었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깜빵에 간, 즉 친박이고 뭐고 다 몰락한 상황에서 한 발언이다. 진심으로 불쾌해서가 아니라 8선 국회의원의 빠른 눈치로 책임 회피를 위해 한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언 자체에서 트집 잡을 곳은 없다.[35] 전술했듯 현재는 완전히 극우 정치인이 됐지만 과거에는 온건보수 정치인이었던 것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36] 2002년에는 지역구 행사를 돌다가 술에 취한 상태로 재학생들과의 만남행사에 지각해서는 건배사를 하면서 뜬금없이 이회창 만세를 외쳐서 '갑분싸'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37]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에서 사용된 선거비용 환급이 늦어져서, 부채만 120억을 신고했다. 2009년부터는 그래도 수십억대의 재산을 신고했다.
2020년 3월 3일 자유공화당 합류
2020년 3월 22일 우리공화당 당명변경[31] 다만 김영삼의 사저가 있는 행정동 상도1동은 서청원의 선거구인 동작구 갑이 아닌 동작구 을 선거구에 속해왔다.[32] 참고로 친박 핵심인 최경환과 윤상현도 흑막스런 이미지와는 별개로 지역구 내의 입지는 절대적이다.[33] 계획 자체는 2007년부터 추진되어왔으나 서청원이 화성 갑에서 당선된 이후 예산 확보에 열을 올리고 공청회와 각종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상당히 공을 들였다. 이 때문에 친박 몰락의 신호탄이 된 20대 총선에서도 압승할 수 있었는데 신도시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 승리하여 친박임에도 불구하고 의정활동만으로 젊은 층의 (친박에 대한)비토여론을 상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4] 다만 이 부분은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정권의 지지율이 60-70%를 찍었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깜빵에 간, 즉 친박이고 뭐고 다 몰락한 상황에서 한 발언이다. 진심으로 불쾌해서가 아니라 8선 국회의원의 빠른 눈치로 책임 회피를 위해 한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언 자체에서 트집 잡을 곳은 없다.[35] 전술했듯 현재는 완전히 극우 정치인이 됐지만 과거에는 온건보수 정치인이었던 것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36] 2002년에는 지역구 행사를 돌다가 술에 취한 상태로 재학생들과의 만남행사에 지각해서는 건배사를 하면서 뜬금없이 이회창 만세를 외쳐서 '갑분싸'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37]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에서 사용된 선거비용 환급이 늦어져서, 부채만 120억을 신고했다. 2009년부터는 그래도 수십억대의 재산을 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