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정치인)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5대~17대, 19대 국회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소설가. 소속 정당은 민생당.
2대 째 정치인이지만 사회주의 성향인 아버지 김철과 달리 리버럴 성향을 가졌다. 정치원서도 보수 쪽에 냈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고 중도좌파 정당에 몸담는다. 그러나 안맞는 옷을 입은 탓인지 당내 주류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이인제와 함께 '''역대 가장 많은 정당을 거쳐 간 정치인'''[2][3] , '''정당 브레이커'''란 불명예 역시 갖고 있다. 2016년을 끝으로 잠정 정계은퇴 상태다.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이름을 건 방송 프로그램도 있었고 톱스타 최명길의 남편이기도 하다. 일본 태생으로 지연이 없고, 학연도 딱히 없는 약점을 부부가 함께 극복해냈다. 술은 거의 못하는 반면 담배는 하루 4갑까지 피워본 적이 있을 정도로 헤비 스모커다.
2. 생애
2.1. 정치인이 되기 전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당수를 지낸 혁신계[4] 정치인 김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부친의 옥바라지, 야당 탄압 등을 온몸으로 받아냈지만, 세 아들이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길 바라는 평범한 어머니였다고.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유치원까지 일본에서 다녔다. 귀국하는 선친을 따라 한국에 와서 사전을 펼치고 한글을 공부했다. 선친 김철은 1960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6년간 망명을 떠나 헤어져 살았다. 선친은 다시 귀국했지만 진보 정치인으로써 온갖 고초를 당했고 가족들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한길은 무뚝뚝한 아버지의 평화 통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란 구호가 어린 마음에 별로 와닿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건국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서울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그 해 이민아[5] 와 결혼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82년 장남 유진을 얻는다.
남자의 몸으로 로스쿨 공부를 하는 부인을 외조했다. 한국일보 미주지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중앙일보 미주지사장까지 지낸다. 전처 이민아도 애키우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 DA(지방검사)로 발령받지만 87년 이혼했다. 김한길 본인은 이에 대해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라고 회고했다. 이민 생활을 1984년 '미국일기'[6] 로 써내기도 했다.
이혼 후 귀국해 소설가, 기자, 방송인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1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지못한 한풀이를 하듯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총 3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7]
이 때 쯤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를 작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작곡 작사를 모두 조영남으로 협회에 등록하는 바람에 저작권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조영남이 김한길 작사라고 본인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2.2. 정치 입문
1991년 꼬마 민주당에 입당해 서울 동작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 후 14대 총선에 같은 지역구의 현역이었던 박실 의원에게 공천에서 밀렸고, 공천에 불복해 바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서 출마를 강행했으나 21.8%의 득표율(3등)로 낙선했다. 공보특별위원장 직이었지만 곧 통일국민당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보복으로 공중분해되면서 김한길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1993년 MBC <김한길과 사람들>이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로 인기를 끌었고 1995년에 톱스타 최명길과 재혼에도 성공했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된 그는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지금의 국민의힘)에 분당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다.# [8] 3년 정도 진행하던 토크쇼도 하차해야 했고, 94년 작고한 아버지의 정치적 입장과도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 분당구 국회의원 오세응과 경선까지 각오했지만, 때마침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전국구를 제안한다. 김대중 총재는 71년 대선 때 김철이 혁신, 진보계 표를 몰아줬던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모친과 아내가 손사래를 쳤다. 특히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처럼 야당 정치인이 된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고. 결국은 두 사람을 설득해 김대중 총재와 손잡고 전국구 공천을 받는다. 후보 6번으로 당선권이었고 그대로 당선됐다.
2.3. 여당 시절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TV 방송 분야를 담당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대통령의 부름으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전국구 의원을 사퇴한다. 최명길과 사이에서 첫 득남을 하는 경사도 있었다.
2000년 9월 박지원 전 장관의 뒤를 이어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다. 이어 셋째 득남을 하는 겹경사였다. 다만 이 해에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아 여론조사에 활용한 바 있다.[9]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7대 국회 전반기 건설교통위원장직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후 당 내에서 주승용, 강봉균 등의 보수성향 의원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김한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2006년 1월 정세균 원내대표의 산업자원부장관 입각으로 치뤄진 원내대표 선거에서 보수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원내대표 취임시 사학법 재개정 양보 의사를 밝혔으나 당내 반발을 맞아 물러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과의 교착 상태에서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봉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여야 원내대표였던 김한길, 이재오를 청와대로 불러 관련 여당의 양보를 권유하면서 어려움에 빠졌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당의 반발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결국 승낙했다.[10]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내며 참여정부의 2006년 지방선거를 주도했지만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지방선거가 실패하면서 김한길은 '''정당브레이커의 길을 걷게 된다.'''
2.4. 다시 야당으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매우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다시 민주당과 합쳐 '중도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가 되었지만 중도개혁통합신당계를 이끌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시 민주당이 떨어져 나간 것이 여러모로 대선에서 발목을 잡히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명문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첫째 유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사하는 비극이 겹쳤다. 2008년 1월 6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4년 뒤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광진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그 직후 민주통합당 2대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지역별 대의원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모바일 투표 및 현장 투표에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4일 당대표 경선에서는 친노계 이용섭 의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당명을 민주당으로, '''당의 상징 색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11]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분열이 예견되던 상황에서 안철수와 '제3지대에서 통합 신당을 창당한다'는 의견에 합의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킨 뒤 안철수와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이 사건이 김한길이 주도적으로 정개 개편에 뛰어든 여러 사건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후일의 20대 총선과 같은 3자 구도가 가시화 되던 상황에서 깜짝 합당을 선언한 셈이라 정국은 급변했다. 밖으로는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이, 안으로는 친노 주류의 주도권 확보가 흔들린 셈이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던 셈인데, 일단 선거가 급했던 만큼 문재인 전 후보 등의 추인을 받아 순조롭게 합당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합당의 명분이었던 기초공천 무공천에서 '회군'해야했고, 세월호 대참사 정국에서 열린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 전략공천 문제로 호남의 상당한 비토를 받아야 했다. 결국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였는데도, 광역단체장에서만 가까스로 9:8로 이기고, 기초단체장에서는 새누리 117: 새정치 80으로 패배하여 사실상 무승부를 결과로 받아들었다. 충북, 강원, 특히 호남 민심의 '옥새' 격인 광주의 승리로 선거 패배로 인한 사퇴는 모면했지만 재보궐에 정치적 명운을 건 셈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 안정된 입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보궐선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뜨거웠던 정국에서 치러진 이 선거는, 선거 전략의 부재와 잘못된 전략공천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누리당에 11:4로 완패하는 것으로 끝났다. 특히 비리로 구속된데다가 자기 지역 예산을 스스로 깎어서 평이 나빴던 서갑원을 원 지역구인 순천-곡성에 그대로 공천시켰다가, '''새누리당 이정현'''을 당선시켰다.
결국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김한길 대표는 안철수 공동대표는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안철수 대표도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지방선거 및 7.30 재보선 항목이나 안철수/정치 항목을 참조.
7.30 재보선 참패 이후 한동안 뉴스에 오르지 않다가, 성완종 리스트 사건 당시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가는 바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검찰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 다루었고, 여야 인사 모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았던 성 회장이 자살하기 전날 제1야당 대표이기도 했던 김한길 의원을 냉면집에서 불러내 만날 만큼 서로 친한 사이었으니 당연히 검은 돈도 오갔을 거라 본 듯하다. 그러나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정권 실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야권의 대표적 인사에 대해서는 의혹 수준에 머무른 이야기를 통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려 한 것은 야권 탄압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립서비스 발언'에 대해 립서비스는 박 대통령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
2015년 문재인 대표가 취임한 후 친문, 친노계와 갈등을 겪은 끝에 2016년 1월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기자회견문 질의응답
기자회견 전문 동영상. YTN.
1월 7일 안철수 의원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2월 2일 국민의당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3월 11일, 민주당의 새로운 수장이 된 김종인 대표가 새누리당에 맞서서 현 야권이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여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한 갈등을 겪고 급기야는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강수를 뒀다.
3월 15일 안철수 상임대표가 더불어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을 경우 탈당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이어 3월 17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민주당과 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8석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는 바람에[12] 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는다면 필패한다고 역설한 그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 무엇보다, 이때 안철수 대표 측과도 많이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변명처럼 야권연대를 했다면 180석도 가능했을 것이라 발언했지만, 주요 정치계 인사들도 새누리당이 무난히 과반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 예상했던 상황에 기적처럼 민주당이 원내 제1당이 된 것인데다가, '''수도권 새누리당의 지지층이 국민의당으로 빠져나가 민주당에 유리해진 측면도 있기에''' 현실성이 낮은 발언. 관련뉴스
2016년 8월 24일, 김한길 전 의원의 형인 김밝힘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철수 의원이 빈소를 방문해 김한길 전 의원과 오랜만에 대면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많이 어색했었다고 전해진다. 민감한 정치 이야기는 삼가고 그냥 짧게 근황 이야기와 건강 관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10분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를 겨냥하며 패권주의를 비판하였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싸늘했다. # 당시 야권 지지자들로부터 '김망길'이라고 불리며 상왕 2호기 취급 중이다. 4월 총선 이후 힘을 잃은 그가 차후 어느 행보를 보일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반문(反文) 성향이 강한 편인 국민의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민주당과 연대를 놓고 안철수 등 지도부와 대립해서 평가가 매우 안 좋다.
그렇게 한동안 뉴스에도 오르지 않고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가, 19대 대선 정국 막바지에 안철수 후보의 지원 유세에 합류했다. 대선 후 2017년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후보로 나설 것이 예상되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2.5. 근황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에 합류하였으나, 정치활동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2018년 10월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동안 폐암[13] 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배를 하루에 서너갑씩 태우는 골초였다고. 다행히 항암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11월 25일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에 부인 최명길과 함께 출연하였다. # 폐 한 쪽을 절제해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컸다는 사실과 수술 당시 2주 간 의식 불명 상태였음을 고백했다. 치료도 잘되고 운신도 할 수 있게된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입원 기간 동안 간병인 침대에서 간호했음은 물론, 퇴원 후에도 아내 덕분에 투병 생활을 할 수 견딜 수 있었다고.
3. 방송
4. 저서
- 2006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 2000년 《김한길의 희망일기》 수필
- 1996년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 칼럼
- 1995년 《거기 그녀가 서 있는 걸 보았네》 소설
- 1993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 1991년 《여자의 남자》 장편소설, 영화로 제작
- 1989년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장편소설, 영화로 제작
- 1988년 《현대조선역사》
- 1984년 《미국일기》 수필
- 1981년 《바람과 박제》 소설
- 1981년 《세네카의 죽음》 소설
- 1980년 《대학일기》 수필
- 1978년 《병정일기》 수필
5. 비판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치던 참여정부 말기부터 청와대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에는 당내 친노 진영을 일컬어 "밀실에서 당권을 나누는 반칙 정치",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 같은 발언으로 표현하는 등 친노 진영과의 갈등을 지속해왔다. 그래서 친노 성향 지지자들에게 평이 대단히 좋지 않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 경력이 있음에도 이제는 비노계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아이러니가 있다.
대의명분이나 구체적인 정책 대안보다는 오로지 당권 장악을 목표로 철저하게 정치 공학의 관점에서 권력 투쟁에만 집중해 왔다는 악평을 듣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이제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평가되는 사람은 가차없이 버리는 성향이 짙다.
이런 경향은 참여정부 말기에 자신이 앞장서서 선거 운동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단지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사정없이 매도하면서 불과 몇 달 사이에 당을 몇 개나 만들었다 부수면서 정치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모습이나, 2014년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맡던 시절에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의 연이은 패배로 지도부에서 물러난 뒤에도 비대위 체제, 그리고 전당대회를 통해서 선출된 문재인 지도부를 사정없이 흔들어 대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18대 총선에 불출마한 뒤 잠깐 야인 생활을 했던 그가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받으려고 했을 때 친노의 좌장으로 손꼽히는 이해찬이 한명숙 당시 당대표에게 "김한길에게 공천을 줬다간 민주통합당은 망하고 말 것이다"라며 극구 만류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나돌았을까.
한때 열린우리당에 몸담았을 때 정동영을 도와 정동영계를 열린우리당의 최대 계파로 키우는 일에 기여했고, 2013년에 민주당의 새 당대표를 뽑는 선거에서는 61.7%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는 등 당내 싸움에서는 승률이 좋은 면모를 보여준 바 있지만, 정작 자기가 지휘봉을 잡은 '바깥 선거'에서는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민주당 당대표가 되고 처음으로 치렀던 선거인 2013년 4.24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새누리에게 패했다. 이때야 박근혜 정부가 갓 출범했던 시기라 정부 여당 모두 분위기가 좋았던 때였고, 또 국회의원 재보선을 치르기로 한 지역구가 거의 다 새누리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으니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가 세월호 참사라는 역대급 악재 속에서 치렀던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를 상대로 무승부를 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117 : 80으로 새정치연합이 새누리에게 완패했지만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새누리에게 9:8로 백중세를 이뤘고, 또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진영이 완승한 덕분에 대표직 사퇴까지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6.4 지방선거가 끝나고 약 한 달 뒤에 치른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은 새누리에게 무려 11:4로 참패하고 말았고, 이때 당을 이끌었던 김한길과 안철수는 결국 당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때 새정련은 김두관, 손학규 등 묵직한 중량급 정치인들까지 출마시키는 등 이 재보선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그때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던 상태였고,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 근거했던 새정연의 '정권 심판론'도 국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얻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김한길 & 안철수 지도부가 주도했던 전략공천의 실패로, 수원시 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던 손학규가 새누리의 신인인 김용남에게 패해 떨어지는 등 '지역 일꾼론'을 내세우며 각 재보선 실시 지역과 연고가 있는 신인들을 주로 내보낸 새누리에게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박근혜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이정현이 보수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호남 입성에 성공했던 선거가 바로 이 7.30 재보선이었다.
국민의당으로 넘어간 뒤에는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야권 연대를 놓고 그동안 동지 관계를 유지해 왔던 안철수와 갈등을 빚었고, 20대 총선을 앞둔 상태에서 선거대책위원장직까지 내던지는,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짓까지 저질렀다. 국민의당이 민주당과 당 대 당 차원의 야권 연대를 하지 않고도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김한길은 머쓱한 입장이 되었지만.
이 때문에 계파를 가리지 않고 범민주당 계열에서는 상당한 비호감 정치인으로 찍혀 있다는 게 현재의 평론이다. 오죽하면 그를 따르는 계파의 정치인들이 국민의당으로 가니까 민주당 지지자들 측에선 격리수용했다면서 좋아할 정도.
2014년 출판된 '삼국지 인물전'이라는 책에서 원술로 비유되었다. '총중고골(塚中枯骨)'[14][15] 이라는, 어찌보면 굴욕적일 수도 있는 사자성어와 함께.거기에 '''역사상 가장 무능한 야당 대표'''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있다.
김한길이 있을 때에는 김한길이 중심이 되거나 얼굴마담을 내세운 하나의 계파를 형성하고, 계파가 부족할 경우 민평련 등 다른 계파와 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계파의 크기가 커지면 그 계파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을 요구하는 게 거의 연례행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자기네 계파와 뜻을 달리하는 당 대표 등이 그러한 계파 이익에 응하지 않으면 언론플레이, 계파 갈등 노출 등을 통해서 당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히는게 두 번째 전략이고, 김한길 파의 계산대로 당이 언론과 내부 갈등으로 상처를 입으면 혁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김한길 계파가 주류로 나와서 당을 접수하는 것이 과거 민주당의 흔한 계파싸움 분위기였다.
그런 지저분한 수법으로 당권을 잡았다 하더라도 당을 잘 이끌었으면 다행이지만, 계파 구성원들에게 공천 등으로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하다보니 공천 등에서 민주당 지지층의 요구와는 맞지 않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내의 자기 계파에게만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교통정리가 되지만, 당 바깥 사람들에게는 '당권 투쟁에만 능하고 정작 정치 능력 자체에는 신뢰가 안 가는 인물'들이 당내 주요 위치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결국 주요 선거에서 무능력한 인물들로 선거를 끌고 가다가 선거에서 패배하면 책임을 지고 잠시 빠진다. 그러고 나서 당이 다시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면 다시 처음의 계파질을 시작해 주는 게 흔한 김한길의 스타일이었다. 괜히 총중고골 취급이 아니다.
5.1. 제2의 피닉제? 정당 분쇄기?
위에 서술되어 있지만,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김한길의 잦은 당적 변경 이력이 화제가 되었다. 피닉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인제의 경우 소속되어 있던 정당이 당명 교체 및 합당 등과 같이 타의적 당적 변경이 아닌 자의적 당적 변경(탈당 및 당 대표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만 셌을 경우 '''8회'''(무소속 포함)이고 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경우 김한길 의원 역시 '''8회'''이다.[16]
물론 진보 정당을 제외한 모든 당에 소속된 적이 있는 이인제와는 달리 김한길은 제3지대 정당[17] 과 민주당계 정당 범위 밖으로 나간 적은 없지만, 그 복잡한 민주당계 정당 계보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당에 몸담은 적이 있고, 특히 그 자신이 민주당계 정당들의 이합집산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은 점으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인제가 당을 계속 옮겨다녔다면, '''김한길은 민주당계 정당을 계속 분열시켰다.''' 이인제의 경우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당을 옮겨다녔다는 그럴싸한 이유라도 있고 반대로 그 노골적인 행보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 자신이 있었던 정당 중 새천년민주당이 여당이 되도록 공헌한 적도 있고 대결 상대가 김대중,이회창,노무현 등 거물이었던 분명히 한때는 잘나갔던 유력 대권주자였다. 반면 김한길의 경우 특이하게도 대권을 시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짧지 않은 정치경력동안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 계파를 만든 뒤 계파갈등을 심화시켜 당 지도부를 흔들어 대고 당을 쪼개버리며 당권을 차지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허나 정작 당권을 잡고 나선 한결 같이 무능하고 중도를 표방하나 어설픈 모습만 보이면서 민주당계 정당을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곤 했다. 결국 열린우리당 몰락의 시발점이 된 2006년 5.31 지방선거부터 이명박근혜 정부 기간까지 약 10년 동안 민주당을 암흑기로 빠뜨리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보수 정당에서 보낸 첩자가 아니냐는 소리가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던 것.
김한길이 당을 옮긴 이력은 다음과 같다. 참고 다른 기사
굵은 표시가 자의적 당적 변경이다. 같은 합당에 의한 당적 변경이여도 1번, 11번, 13번, 18번의 경우 소속 당원이었기에 합당에 끌려 가는 종속관계여서 자의적 변경에서 제외했고, 9번, 15번처럼 '''자신이 당대표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에는 자의적 변경에 포함시켰다. 그덕에 공동대표 직함을 2번이나 했다.
다만 3번처럼 불분명한 탈당 1건이 있다. 통일국민당이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에 당수인 정주영이 김영삼에게 정치 보복을 당하자 정주영은 의원직을 사퇴했고, 소속 의원들도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등 당세가 약화되어서 사실상 당이 공중분해가 됐기 때문이다.[20] 이후 김한길은 당적 초기화가 됐고, 1996년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기 전까지 정치 활동 없이 당적을 갖지 않은 채로 방송인 활동을 했다.
7~8번 사이에 무소속 기간은 국회의원 활동 중, 정당 소속 없이 무소속 신분이었지만 자신과 함께 탈당한 김한길계 20여 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정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적 변경 카운팅으로 치지만, 3~4번 사이 무소속으로 남아있던 기간은 정치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카운팅에 포함 시키진 않는다.
명확한 탈당이 6회, 당대표로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는 2회가 있다. 총 8번의 자의적 당적 변경이 있다. 3번처럼 불분명한 탈당도 카운팅을 한다면 총 9번.
특히 2007년 열린우리당 대붕괴 시기 6개월 간 총 4개의 당적(열린우리당(2007년 2월 탈당) - '중도개혁통합신당'(2007년 5월 창당, 6월 합당) - '중도통합민주당'(2007년 6월 합당, 8월 탈당) -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8월 입당))을 보유했던 것과#, 2015년 말에 1주일 채 안 되는 더불어민주당 당적 유지한 것이 이인제와 타이 기록(...)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정계 은퇴도 2번을 하였고 2번 복귀를 하였는데, 두 번째 정계 은퇴 선언하고 정계 복귀 전까지의 기간(2008~2012년)엔 탈당이나 입당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평당원으로 남아 있었는 듯하다.[21]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바른미래당을 결성하면서, 당적이 다시 늘어났다. 이제 김한길이 거친 당적은 17개로 늘었다. 원래는 이인제가 16개로 가장 당적이 복잡했는데, 바른미래당이 결성된 뒤부터 상황이 뒤집혔다. 이후 바른미래당이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합하여 민생당으로 합쳐져서 더 늘었다. 다만 2017년 10월 이후로는 정당 관련 활동이 없다.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1] 우리말 이름이 매우 드물었던 세대이기도 하고, 어감 역시 순우리말 같지 않은 탓에 金漢吉이라는 한자 표기로 소개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실제로는 한자 자체가 없는 순우리말 이름이 맞다. 형제들의 이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순우리말 이름인 "밝힘", "누리"라고. 그래서 중국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표기할 때 순우리말 이름이라서, 과거 우리나라 언론이 임의로 한자 표기를 했던 金汉吉(간체)으로 표기한다.중국어 위키백과의 김한길 문서.[2] 둘 다 18개의 당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인제가 불사조라고 불리울 만큼 워낙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왔다갔다한 케이스라 김한길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의외로 김한길은 2018년에 소속 정당이 바른미래당으로 합당되면서 범보수-중도계 정당으로 묶이게 되면서 진영을 이동한 셈인데, 꼬마민주당에서 통일국민당에 입당한 적이 있으므로 처음은 아니다. 굳이 따지면 그 자체가 이념 변신은 아닌 것이, 바른미래당 후신인 민생당은 또 보수계라고 보기는 애매한지라.[3] 사실 이인제와 김한길이 가장 당적을 많이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 실제로 가장 많은 당적을 가진 정치인은 김두섭이며 그 다음은 안동선이다. 당장에 이윤수, 이용희, 장기표만 해도 이 둘보다 당적이 많다.[4] 1970년대까지 진보는 지금의 발전의 뉘앙스로 통했고, 진보 세력은 보통 혁신계라고 불렀다.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의 공약에 보면 "반공계 혁신 야당 허용"이 들어있다.[5] 1959~2012.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장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한길과 결혼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스쿨을 다니며 장남을 낳는다. 이혼 후 미국에서 검사, 변호사로 활동했고 백인과 재혼도 해 2남 진성, 3남 진영을 본다. 또 한 번의 이혼(04년), 김한길과 낳은 장남의 돌연사(07년)와 뼈다른 둘째 아이의 장애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고 2009년 목사가 되었다. 갑상선 암과 망막분리증 등 중병을 앓은 끝에 2012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무교 내지 불가지론자였던 이어령 씨가 딸의 투병과 죽음으로 종교에 귀의한다. 이어령의 신앙고백 때 꼭 얘기하는 부분.[6] 개정판의 제목인 '눈뜨면 없어라'가 더 유명하다.[7] 대통령의 외동딸 김은영과 방송국 구성 작가인 강찬우의 사랑 이야기인데,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자신을 이입해 쓴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8] 김한길 자신은 본인이 신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최종 공천 단계까지 갔음에도 공천 신청을 취소하지 않아서 그 주장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9] 2004년 이 사실이 드러났을 때 공소시효가 지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10] 시간이 흘러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의원과 당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 사학법을 양보해준 건 김한길이라는 공세에 처했다. 김한길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는 편. 다만 김한길 의원 본인도 두 번의 대선에서 김대중 캠프와 노무현 캠프의 선거 전략을 총괄했던 이해찬보다 확실히 중요성이 더 떨어지는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마치 자신이 대선 승리의 주역인양 포장한다거나, 이해찬의 연대는 나쁜 담합이고 김한길의 연대는 착한 연대라는 이분법식 선거 운동을 벌였기에 딱히 선거 운동이 정당했다고 보기 어렵다.[11] 본인은 불과 3년 뒤 민주당의 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버렸지만, 정당색을 파란색으로 바꾼 이 결정이 더불어민주당까지 7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아이러니다.[12] 게다가 자신의 지역구인 광진 갑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는 국민의당 대체 후보가 낙선하긴 했지만 두자릿수 득표율을 따냈다.[13] 폐암 4기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고.[14] 무덤 속 마른 뼈란 뜻으로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15] 원술과 관련된 한자성어로 공융이 원술을 논함에 있어서 '무덤 속 그의 조상들은 현재 상황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다. 원술이 자기 능력보다는 조상 이름값만 있는 인물이라고 야유하는 말이다.[16] 불분명한 탈당 1건이 있는데 이것을 포함하면 탈당 횟수는 9회다.[17] 통일국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18] 김한길의 정치 시작을 민주당(1991년)에서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이전인 1991년 4월에 꼬마 민주당 동작 을 지구당 조직책(현재의 지역위원장/당협위원장)에 임명됐다는 기사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있다.[19] 이때 소속 정당은 없이 무소속이었지만, 함께 집단 탈당한 20여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20] 통일한국당 잔류 인원들은 이후 박찬종이 이끄는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이 된 것을 거쳐, 최종적으로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었다.[21] 김한길도 장관, 원내대표, 당 대표를 역임한 네임드 정치인이라서 탈당이나 입당 소식이 있으면 반드시 기사가 뜨게 된다.[22]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23]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4] 민주당과 신설 합당[25] 민주당과 신설 합당[26]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7]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8]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29] 대안신당, 민주평화당과 신설 창당[30] 1999.3.3 사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되기 위해서 당시 법에 따라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한 것이다. #[31] 2000.9.20 사퇴. 문화관광부장관이 되기 위해서 임기 4개월만에 전국구를 또 사퇴했다. 전국구 2번 당선에 2번 사퇴를 한 셈. #[32] 전임자 장영신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33] 2007년 당적 변경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후 대통합민주신당 합류[34] 2016년 탈당, 국민의당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