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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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고종황제의 5남[4] 의친왕 이강의 친왕비이다.
2. 생애
1880년(고종 17년)에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났다. 직후 잠시 양주군에 머물다가 1881년(고종 18년)에 한성부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본관은 연안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11대손이다.[5]
1893년(고종 30년) 12월 6일에 의화군 이강과 혼인했고#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으로 봉해졌다.#[6] 일설에 따르면, 광해군의 견제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왕후가 친정에 다시는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라 일러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김사준이 처음에는 혼사를 거절했으나 왕실에서 신부를 마음에 들어하여 혼인을 밀어붙였다한다.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0년(광무 4년) 8월에 남편 의화군이 의친왕으로 승격했지만, 그는 여전히 군부인이었다. 1905년(광무 9년) 10월 5일에 서봉 대수훈장을 수여받았고#, 순종 즉위 후인 1907년(융희 원년) 10월 2일에야 비로소 의친왕비(義親王妃)로 정식 책봉받았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의친왕이 '이강공(李堈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강공비(李堈公妃)'로 불렸다. 1917년에는 아버지 김사준이 감옥에서 죽는 슬픔을 겪었다. 김사준은 고종 망명을 꾀하는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하던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발각당해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이었다. 1924년 1월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훈이등 수보관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7년에 왕공족 직제가 사라지면서 평민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전후 서울로 돌아왔다. 1955년 8월 9일에 남편 의친왕이 죽기 직전에 천주교에 귀의해 세례를 받았고, 같은 달 14일에 의친왕비도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리아(Maria)#. 이후 구왕궁 사무실에서 매달 지원하는 생계비 3만 9천 원 중에서 1만 5천 원은 자녀들에게 나눠주었고 남은 돈으로 생활했다.#
1964년 1월 14일에 칠궁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하에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리 홍유릉 권역에 있다. 1996년에 후손들이 서삼릉 묘역에 있던 남편 의친왕의 유해를 의친왕비 묘로 이장해 합장했다.
3. 여담
- 1964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 내용이다. 하루는 의친왕비의 친정에서 고종에게 산삼 한 뿌리를 진상했었다. 왕이 먹는 것은 모시는 사람들이 먼저 먹어보는데, 미리 산삼 뿌리를 씹던 내시가 "독이 든 삼"이라고 말하며 뱉었다. 그 얘기를 들은 고종은 "당장 (의친왕비의) 부모와 삼족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한 대신이 이 광경을 보고 그 산삼을 씹어삼킨 후 고종에게 "이 산삼은 진품이니 버리시려거든 신에게 내려주십시오"라고 말해 의친왕비의 가족들은 화를 면했다.#
- 남편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대신 의친왕이 밖에서 낳은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아꼈다. 오히려 의친왕이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 그 생모가 하소연을 하면 그 아이들을 사동궁으로 데려다 기르기도 했다고. 그래서 의친왕의 자녀들도 의친왕비를 '지밀어머니'[7] 라 부르며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오죽하면 어릴 때 계동궁[8] 이기용[9] 의 양자로 입적했던 의친왕의 7남 이광(호적명 이해청)은 인사동 경성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 사동궁에 매일 들러 집(계동궁)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 의친왕의 서자녀들 뿐 아니라, 다른 황실 가족들도 잘 챙겼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갔던 덕혜옹주가 광복 이후 귀국했을 때엔 그가 좋아하던 섭산적, 떡볶이 등 맛있는 음식을 여러 번 만들어주었고 그 뒤로도 음식이 생기는대로 덕혜옹주에게 먼저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궁에서 나온 반기[10] 중 사동궁이 제일 후했다는 평판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서열 상으로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순헌황귀비 사후에는 나이로 봤을 때 황실 여성 중에서 두 번째로 연장자였기에 그에 따른 책임감도 있었던 듯 하다.[11]
- 의친왕의 5번째 딸이자 의친왕비와 가장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던 이해경 여사가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내용이다. 의친왕은 대부분 사동궁 밖 후실들 집에서 지내다 병이 나면 후실과 그 소생들을 모두 데리고 사동궁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친왕이 밥상을 받을 때 의친왕비와 이해경 여사가 자리를 지켰는데 다른 상 하나가 뒷방(후실과 그 소생들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더란다. 그래서 이해경 여사가 "어머니도 안 드셨는데 밥상이 저기로 들어가요?"라고 묻자 의친왕비가 "네 아버지가 귀여운 아이들이 밥도 안 먹었는데 밥이 들어가시겠니?"라고 했다한다. 그러자 이해경 여사가 화가 나서 "어머니는 목석이세요?"라고 하자, 의친왕비는 "내가 인간하고 결혼했니, 법하고 결혼했지" 라면서도, "그래도 죽으면 네 아버지랑 함께 묻힐 사람은 나여"란 말을 했다고 한다.#
- 위에 언급한 인터뷰 때 이해경 여사가 남긴 다른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가끔 어릴 때 먹던 시래깃국이 그립다며 상궁들에게 부탁해 먹었다고 한다. 이해경 여사도 일부러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시래깃국을 같이 먹었다고.해당기사
- 의친왕비가 의친왕의 장남 이건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쓴 한글 편지 일부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명은 〈의친왕비 김씨의 서간(義親王妃 金氏 書簡)〉. 총 3점이며 편지 2매와 봉투 1매가 1조를 이룬다. 10월 6일에 썼다는 것만 적혀있고 연도는 쓰여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4. 매체에서
[1] 김수덕(金修德)으로도 알려져있으나 김덕수가 맞다고 한다.출처[2]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세례를 받을 때 작성한 세례증명서에 세속명이 김숙으로 적혀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가 〈경향신문〉에 올린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도 김숙으로 언급했다.[3] 24세손 'O기(基)' 항렬.[4] 영아 시절 사망한 아들을 제외하면 차남이다.[5] 김제남 → 김규 → 김홍석 → 김호 → 김상윤 → 김식 → 김재정 → 김한 → 김승연 → 김덕수 → 김사준 → 의친왕비#.[6] 작호는 본관지 황해도 연안에서 따왔다.[7] 지밀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다. 저기서 말하는 '지밀어머니'는 '사동궁 안채를 쓰는 어머니'란 뜻이다.[8] 숙종의 3남 연령군의 종가.[9] 흥선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로 계동궁의 종주였다.[10] 잔치나 제사를 지낸 뒤 목판에 몫몫이 담아서 주변에게 나누어 주던 음식.출처[11] 영선군부인 광산 김씨가 1878년 생으로 의친왕비보다 2살 많았다. 나머지는 전부 어렸다. 순정효황후(순종의 황후)는 1894년 생, 이방자(영친왕의 부인)는 1901년 생이다. 심지어 흥친왕비는 시백모(남편의 큰어머니)인데도 의친왕비보다 3살 연하였다.[12] 기사 원문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라고 적혀있다.[13] 당시 본명 이상인으로 활동. 현재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