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텐

 

'''데니스 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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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아시안 게임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챔피언'''
[image]

[image] 쑤 밍
(2007)

[image] '''데니스 텐
(2011)'''

[image] 우노 쇼마
(2017)


'''동계 유니버시아드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챔피언'''
[image]

[image] 페터 리버스
(2015)

[image] '''데니스 텐
(2017)'''

[image] 마테오 리초
(2019)


'''카자흐스탄선수권 남자 싱글 챔피언'''
[image]

스타니슬레프 구세프
(2005)

'''데니스 텐
(2006)'''

압잘 라킴갈리예프
(2007)
압잘 라킴갈리예프
(2007)[13]

'''데니스 텐
(2010)'''

블라드미르 루디
(2011)




[image]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동메달 획득 당시'''
<colbgcolor=#428ce8> '''이름'''
데니스 유리예비치 텐
Денис Юриевич Тен
Denis Yurievich Ten[1]
'''국적'''
카자흐스탄[image]
'''출생'''
1993년 6월 13일, 알마티
'''사망'''
2018년 7월 19일, 알마티(향년 25세)
'''신체'''
168cm
'''종목'''
피겨 스케이팅
'''소속'''
올댓스포츠
'''가족'''
아버지 유리 텐, 어머니 옥사나 텐, 형 알렉세이 텐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노비스 시절
2.2. 2006-07 시즌
2.3. 2007-08 시즌
2.4. 2008-09 시즌
2.5. 2009-10 시즌
2.6. 2010-11 시즌
2.7. 2011-12 시즌
2.8. 2012-13 시즌
2.9. 2013-14 시즌
2.10. 2014-15 시즌
2.11. 2015-16 시즌
2.12. 2016-17 시즌
2.13. 2017-18 시즌
3. 고려인 3세대
4. 사망
5. ISU 공인 최고 점수
6. 수상 기록
7. 기타


1. 개요


카자흐스탄 국적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고려인 혈통이다.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당시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리스트였다. 카자흐스탄 역사상 빙상종목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2022 알마티 동계올림픽[2] 유치를 위한 홍보 대사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피겨 스케이팅 불모지였던 카자흐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소수 민족인 고려인 사회에서는 단순히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상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 영웅이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 가라테, 수영, 테니스 등 여러 스포츠를 섭렵했으며, 음대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 년간 피아노와 성악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조기교육 덕분인지 곡 해석 능력을 비롯한 음악성과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선수로 4회전 점프, 우아한 비엘만 스핀, 과감하고도 섬세한 스텝 시퀀스 연기 또한 큰 장점이다.
하지만 대회마다 보여주는 기량에는 기복이 있어, 매 시즌 초반 대회인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시즌 후반 대회인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등의 주요 대회에서는 기량이 급격히 올라와 메달을 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시즌에 한 번만 날아다닌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듣기도 했다.
한국에선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민긍호 선생의 후손으로도 잘 알려진 선수이기도 하다.
2018년 7월 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중심가에서 2인 1조 강도와 맞서 싸우다 안타깝게 요절하고 말았다. 장례식은 21일, 데니스 텐이 어릴 적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소망을 그리며 훈련했던 알마티 발루안 숄락 경기장[3] 에서 엄수되었다. 알마티 시민장으로 치뤄졌으며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 장관이 대통령의 조사를 대독했고, 주 카자흐스탄 김대식 한국 대사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과 카자흐스탄 시민 약 2만 여명이 참석하였다.[4] 카자흐스탄 전역에서는 3일 동안 모든 오락 프로그램이 결방되었고 모든 방송은 흑백으로 전송되었다. 카자흐스탄의 국가적 피겨 스케이팅 영웅이기도 했지만 고려인에게는 그 이상의 자긍심이었던 데니스 텐의 비극적인 요절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원 김상욱 원장과 알마티 고려극장장을 지낸 김 겐나지 선생은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이 데니스 텐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데니스 선수는 단순히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많이 딴 선수가 아니라, 카자흐스탄 시민들의 자랑이자 자긍심 그 자체였습니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고 난 후,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짓밟혔던 자존심을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세워주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고려인 동포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우리 고려인 동포 사회는 정말 큰 애통, 또 비탄에 빠졌습니다.

“데니스와 같은 영웅은 앞으로 당분간 우리 곁에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단순히 국제적인 피겨 선수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인품과 놀라운 끈기 그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으로,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을 때 허허벌판에 뿌리 내리기 위해 악전고투하며 보여준 근면과 성실성을 그대로 갖추었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다. ”


2. 선수 경력



2.1. 노비스 시절


만 12세의 나이로 2006 카자흐스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2.2. 2006-07 시즌


주니어 대회에 참가 가능한 연령이 되어, 주니어 그랑프리 6차 2006 JGP 네덜란드 대회에 출전해 10위를 기록했다.

2.3. 2007-08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2차 루마니아 대회 6위, 4차 에스토니아 대회에서는 10위를 기록했다. NRW 트로피 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하고 2008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16위를 차지했다.

2.4. 2008-09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1차 프랑스 대회 4위, 6차 벨라루스 대회에서는 우승을 하며 따라 생애 첫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다. 대한민국 고양시에서 열린 2008-09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5위에 오르며 한국팬들의 주목을 끌었다.[5]
2009 사대륙선수권에 출전하며 시니어 데뷔를 하였고 최종 순위 9위를 기록하였다. 2009 주니어 세계선수권2009 세계선수권에서 각각 4위와 8위를 하며 국제적인 피겨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2.5. 2009-10 시즌


시니어 그랑프리에 데뷔하여 스케이트 아메리카컵 오브 차이나에서 각각 7위와 10위를 기록했다. 2년 만에 열린 카자흐스탄 선수권에 출전해[6] 우승했다.
2010 사대륙선수권에서 10위를 하며 올림픽 직전 점검을 마쳤다. 참가자 중 최연소 선수였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11위에 올랐다. 쇼트 경기 직전 그룹 웜업 때 <카자흐스탄의 소수민족인 한국계 커뮤니티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유명한 민긍호 장군의 후손>이라는 멘트로 소개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주니어 세계선수권세계선수권에 모두 참가하여 각각 9위와 13위를 기록했다.

2.6. 2010-11 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NHK 트로피에서 각각 11위와 12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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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
2011년 2월 17일 자국에서 열린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했다.''' 참고로 동계 아시안 게임 피겨 남자 싱글 부문 우승자 중 '''일본이나 중국 국적이 아닌 선수는 데니스 텐이 처음'''이다. 2011 세계선수권에서는 14위를 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2.7. 2011-12 시즌


네벨혼 트로피에 출전해 9위를 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스케이트 아메리카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모두 5위를 차지했다.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은메달을 따고 카자흐스탄 선수권에서는 우승했다.
2012 사대륙선수권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 이번 시즌도 주니어 대회인 주니어 세계선수권과 시니어 대회인 세계선수권에 모두 출전해 각각 4위와 7위에 올랐다.

2.8. 2012-13 시즌


네벨혼 트로피에 출전하여 7위를 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스케이트 캐나다로스텔레콤 컵에서 각각 6위와 9위를 기록했다. 이후 카자흐스탄 선수권에서도 우승했다. 2013 사대륙선수권에서는 12위를 차지했다.
분명 예술적이고 재능있는 선수였지만 정상급이라고 불리기엔 애매했던 데니스 텐의 경력이 화려하게 꽃핀 계기는 2013 세계선수권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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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세계선수권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 합산 점수 266.48점을 기록하며 패트릭 챈의 267.78점에 이어 불과 1.3점 차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91.56점으로, 패트릭 챈의 98.37점에 이어 2위를 했으나, 프리 프로그램에서는 단독 4회전 점프와 트리플 악셀 2개가 포함된 고난이 프로그램을 거의 클린에 가깝게 연기하면서 174.92점을 기록한다. 전년도 챔피언인 패트릭 챈은 169. 41점을 얻어, 프리 프로그램에서는 데니스텐이 5.31점 앞서며 1위에 올랐다. 프리 경기 양상이 이러했던 탓에 남자 싱글 경기가 끝난 후 대중들은 물론 필립 허쉬와 조니 위어 등을 비롯한 피겨계 인사들조차 "데니스 텐에게 금메달을 수여해야 한다, 진정한 1위는 데니스 텐이다" 라는 의견을 표명한다. ISU에 청원 운동까지 일어났으며 챈플레이션(Chanflation)이라는 말도 생겼다. 패트릭 챈이 무려 세번이나 넘어지는 등 실수투성이였던 프리에서 홈 이점으로 점수를 퍼받았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유명 스포츠 평론가이자 올림픽 취재 전문 기자인 필립 허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파력했다.

Denis Ten should have been world champion in 2013 after his stunning performances to music from “The Artist.” Remarkably, he used it as a 2-part story in short and long programs. Home cooked judging in Canada gave the title to Patrick Chan.

2013 세계선수권 우승자는 단연코 데니스 텐이었어야 했다. 영화 "The Artist"의 OST에 맞춰 정말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프로그램으로 내용이 이어지는 구성 또한 기발했다. 개최지의 캐나다 심판들이 자국 선수인 패트릭 챈에게 말도 안되는 금메달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과 피겨계의 의견에 대한 데니스 텐의 반응은 "은메달로도 만족한다. 챈은 남자 싱글의 기준이라 불릴 만한 선수다."였다.

2.9. 2013-14 시즌


시즌 초반부터 발목 부상과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치아까지 빠지는 등 고전하던 데니스 텐은 급기야 장염으로 스케이트 아메리카를 기권하였다. 하지만 두번째 대회인 컵 오브 차이나에서는 그랑프리 시리즈 개인 최고 성적인 4위에 올랐다.
이후 카자흐스탄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3연패를 달성함과 동시에 통산 5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올림픽에 앞서 열린 2014 사대륙선수권에서는 4위에 그쳐 아쉽게 포디움에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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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소치 동계올림픽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등장,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첫 번째 점프에서 착지 실수를 하며 9위를 기록했지만, 전년도 세계선수권 준우승자답게 '''다시 한번 프리에서 분전하며''' 결국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는 당시 소치 올림픽에 57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이었다.
참고로 금메달리스트 하뉴 유즈루와 은메달리스트 패트릭 챈 두 선수 모두 프리에서 계속 넘어지거나 손을 짚는 등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탓에 경기를 관람한 일부피겨팬들은 차라리 큰 실수가 없었던 텐에게 동메달을 수여하고 금/은메달은 없는 경기로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하뉴 유즈루패트릭 챈과 더불어 남자 싱글 포디움을 일본인(하뉴), 중국계(챈), 한국계(텐)의 아시아 선수가 독점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피겨 스케이팅 전 종목을 통틀어 올림픽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2.10.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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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트로피 에릭 봉파르
2015 사대륙선수권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4위, 트로피 에릭 봉파르에서 동메달을 따며 본인의 첫 그랑프리 메달을 얻었다. 이후 챌린저 시리즈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도 우승했다.
2015년 2월 14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15 사대륙선수권에서 잘 뛰지 않던 4회전-3회전 컴비네이션 점프를 프리에서 성공시키는 등 엄청난 분전을 펼쳐, 남자 싱글 역대 세번째로 높은 점수인 '''289.46점'''으로 쇼트 1위, 프리 1위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차지하며 시니어 데뷔 이후 ISU 공식 메이저 대회에서의 첫 우승을 일궈냈다. 이로써 2015 세계선수권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오르며 미국 TIME지에 고국 카자흐스탄의 피겨계를 홀로 짋어진 텐의 위상, 민긍호 장군을 비롯한 한국과의 인연 등을 조명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2010년 부터 8년을 함께 한 코치 프랭크 캐롤은 데니스 텐에 대해 "영리하고 지적이며 생각이 많고 섬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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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세계선수권
2015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무려 '''음악이 잘못 나오는 사고'''가 일어났다. 단순한 음악 사고로 보기에 의심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인데, 아예 다른 부분이 아니라 앞 부분과 매우 흡사한 중간 부분이 나왔고, 이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데니스 텐이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준비 자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급하게 두 번째로 음악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 황당무계한 상황을 지켜보며 엄마처럼 안타까워하는 안무가 로리 니콜의 얼굴이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이 음악 사고 때문에 데니스 텐은 평소와는 달리 손을 덜덜 떠는 모습까지 보였고 초반에 점프 후 크게 넘어져 펜스에 나뒹구는 실수를 했다. 결국 쇼트는 아쉽게도 3위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프리 프로그램에서는 다시 1위를 하면서 종합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 황당무계한 음악 사고만 없었다면, 데니스 텐이 챔피언이 되었을 거라는 팬들의 분노와 억울함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 '''데니스 텐'''을 검색하면 나오는 연관 검색어 중 하나가 바로 이 '''데니스 텐 사기극'''이다.

2.11. 2015-16 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트로피 에릭 봉파르에서 각각 9위와 4위[7]를 차지했다. 이후 챌린저 시리즈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우승 등 B급 대회 3개에 출전하여 세계선수권 전에 컨디션을 점검하였다.
2016 세계선수권에서는 11위를 차지했다. 이후 팀 챌린지 컵에 아시아 팀으로 참가하여 개인 7위, 팀은 동메달을 따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2.12.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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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트로피 드 프랑스
2017 알마티 동계 유니버시아드
부상으로 스케이트 아메리카를 기권하고 트로피 드 프랑스에서 은메달을 땄다. 자국에서 열린 2017 알마티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우승했다. 2017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2017 세계선수권에서는 각각 10위와 16위를 기록했다.

2.13. 2017-18 시즌


2017년 8월, 평창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올댓스포츠의 <아이스페스타 >에 출연하기 위해 한국에 온 바로 다음날, 오프아이스 연습을 하다가 '''오른쪽 발목 인대 중 2개가 파열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하여, 당시 그를 진료한 강남 세브란스와 유나이티드 병원의 의료진들은 1년 이내에는 다시 스케이팅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아이스페스타 공연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인사말만 전했으며, 이후 수 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며 재활을 한 후, 로스텔레콤 컵엔테르나시오노 드 프랑스에서 각각 9위와 8위를 차지했다. 올림픽 직전 사대륙선수권에서는 15위를 기록했다.
해당 시즌 활동한 ISU 피켜스케이팅 남자 싱글 선수 중 10위의 포인트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인대 파열 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상의 여파와 당일 컨디션 난조로 쇼트 프로그램에서 점프 실수를 연발한데다가 평소 실수가 거의 없었던 스핀과 스텝까지 놓쳤다.
그토록 염원하던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었건만 선수 경력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 프로그램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타티아나 타라소바는 "이 상황은 그에게 모욕이나 다름 없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귀국 직후 카자흐스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컨디션 난조로 잠시 기권도 생각했지만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불참할 수 없었다. 참가한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지만 경기 중계 방송에 비친 데니스 텐의 표정은 그야말로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3. 고려인 3세대


2009 세계선수권에서 8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 뒤 한국 피겨팬들에게 그가 구한말 의병장인 민긍호 선생의 현손자[8]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로 인해 한국 피겨팬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사게 되었다. 본인도 의병장의 자손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만 14살 때인 2008년 일본 아이스 쇼에 초청된 후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일장기 문양의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한국 피겨팬들에게 "명색이 의병장의 후손이라면서 무슨 철없는 짓이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무조건 반일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두둔하는 의견이 더 많았다. 우리 나라 아이스쇼에 초청된 외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흔들거나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자기 나라에서 비난 받아야 하는가? 어쨌든 데니스 텐은 이 일장기 해프닝에 대해 '어린 나이에 한 경솔한 행동이었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고 사과한바 있다.
애초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하여 허허벌판이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까지 당하며, 해방 후에는 남북분단으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억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미안해서라도 저런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로 비난 못할 듯 하다. 뿌리를 잊지않고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소수민족인 한국계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만해도 대단한데, 단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반일감정을 강요하는 것은 도의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옳지 않다. 게다가 일장기는 일본의 국기일 뿐이고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상징이 아닌데 이걸 머리에 썼다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한국계 혈통일 뿐 외국에서 나고 자란 외국인이다.''' 한국인이 이런 행동을 해도 비판하는게 옳지 않다.
2010년 KBS에서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들을 취재했는데 당시 외할머니인 세레나 민 여사(민긍호 의병장의 친손녀)를 통해 고조부 민긍호 의병장의 업적과 생애를 처음으로 상세히 알게 되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2010년 이전에는 민긍호 의병장에 대해 그저 한국인 장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데니스 텐은 이후 한국 역사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고 민긍호 장군에 대한 논문까지 썼으며,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물론이고 러시아, 일본, 미국 매체와의 수많은 인터뷰에서 빠짐없이 민긍호 장군을 언급하며 한국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올댓 스케이트 아이스 쇼에서 2014년부터 공연하면서 예술성과 음악성, 성실한 태도, 좋은 매너 등으로 국내 피겨팬들 사이에서 단순히 민긍호 의병장의 현손자로서가 아닌, 예술적인 스케이터로서 인기를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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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이모 할머니는 우리 형제, 사촌들에게 민긍호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처럼, 마치 요즘 사람들이 슈퍼맨 이야기를 듣듯 들었습니다. 마치 재미있는 동화 같았습니다." 2010년 역사스페셜 한일강제병합 100년, 잊혀진 전쟁 1907 - 1편 대한제국을 사수하라!
2010 사대륙선수권에 출전했던 데니스 텐이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위치한 그의 외고조부인 민긍호 의병장의 산소를 처음 방문해서 했던 말을 보면 그가 산소를 방문하기 전엔 민긍호 의병장의 이야기가 실제의 이야기가 아닌 구담으로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만 받아들여 그에게 민긍호 의병장의 이야기가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래 그의 인스타그램의 글을 보면 2010년 민긍호 의병장의 산소를 갔다온 이후 외고조부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고, 2008년과 2014년은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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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3일, 대한항공의 서울/인천발 오사카행 티켓을 올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도시에서 3시간 더 있다가 (오사카에) 간다"(3 more hrs in my favorite city and then off to... :))는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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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민긍호 의병장의 산소[9] 사진을 올려놓고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In Wonju, visiting my great-great grandpa's tomb. So honored and proud to be born as the descendant of the Korean general Min Geung-ho. He fought for Korean independence in the 1900s and is said to have won a hundred battles. In 1962 he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of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the most prestigious civil decor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for his efforts for Korean independence. I visited the grave in 2010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t happened to be right before the Olympic Games in Vancouver. Since then my life completely changed and today's visit left totally different impressions on me. He is the real Hero. And it is indeed a huge responsibility to carry his genes & moreover to meet expectations. Dear Grandfather, I dream to become as great as you were some day."[10]

"원주에서 내 고조할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했다. 한국인 장군 민긍호의 자손으로 태어나 대단히 영광이고 자랑스럽다. 그는 1900년대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백번이 넘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1962년, 그는 한국독립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나는 2010년에 이 무덤에 생애 처음으로 방문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완벽히 바뀌었는데 오늘의 방문은 완벽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는 진짜 영웅이다. 그리고 그의 피가 내게 이어지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정말 큰 책임이다. 할아버지, 내가 언젠가 당신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길 꿈꿉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후 어김없이 이 '의병장 후손'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으며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독립의병장이셨던 외고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꾸준히 들었습니다. 2011년 미국으로 훈련지를 옮겼는데 그 때부터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을 많이 공부했죠. 외고조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 분으로 받은 영향이 저를 강하게 만들었어요."

"외고조할아버지가 독립의병장이라는 얘기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꾸준히 들었어요. 하지만 한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알게 됐죠. 원주에 있는 외고조할아버지의 묘역을 처음 찾았을 때는 강렬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 그 분을 더욱 존경하게 됐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갈라쇼에서 김연아와 파트너가 되었다. (I was the luckiest.) 이때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는지 2014 올댓스케이트 아이스쇼(5/4~6)에 게스트로 출연, 한국에 왔다. 아이스쇼가 열리기 3주 전에는 민긍호 선생의 묘역이 있는 강원도 원주시를 찾았다. 데니스 텐은 민긍호 선생의 묘역에서 돌을 가지고 왔다면서, 미신을 믿지 않지만 외고조부에게 영향을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돌을 언제나 캐리어에 간직한다고 밝혔다.
2014년 6월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스케이터 3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알렉세이 야구딘, 스테판 랑비엘, 김연아[11]를 꼽았다.
2014년 8월, 김연아의 소속사인 올댓 스포츠와 2018년까지 4년간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4. 사망


2018년 7월 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자신의 승용차 백미러를 훔치던 괴한들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칼이 오른쪽 허벅지 대퇴 동맥을 찔러 피를 3리터가 넘게 흘렸으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숨졌다. 허벅지뿐만 아니라 자상이 10개였고, 갈비뼈 쪽 자상이 치명타였다.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이 참살 당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직접 나서서 범인들을 체포하고야 말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 지휘 하에 카자흐스탄 정보 기관, 경찰이 총동원되어 범인을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사건 다음날인 7월 20일 범인 2명 중 한 명 누랠리 키야소프(Нұрәли Қиясов)가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리고 7월 21일 나머지 범인 한 명 아르만 쿠다이베르게노프(Арман Құдайбергенов)도 체포되었다.
데니스 텐의 장례는 21일 알마티에 있는 발루안 숄락 경기장에서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와 알마티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같은 카자흐스탄의 스포츠영웅이자 고려인 3세인 골로프킨도 미국에서 카넬로와의 2차전을 앞두고도 열일 제치고 달려와 참석했다. 또한 데니스 텐과 인연을 맺었던 김연아 선수가 추모글을 올리기도 했다. 더불어 손현주, 고창석과 함께 '백년만의 귀향 - 집으로' 에 사절단으로 출연한 최다빈 또한 민긍호 선생의 후손인 데니스 텐의 묘를 찾아 추모했다.
그리고 지난 25일 세번째 피의자 자나르 톨리바예바(Жанар Толыбаева)가 주범들의 사전 공모와 범행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불고지죄와 절도혐의) 구속되었다.
2018년 7월 27일에 데니스 텐의 사망 이후 사촌동생인 카자흐스탄 국립의대생인 김맥심 씨의 인터뷰 기사올라왔다.
범인들에게는 징역 20년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법원은 징역 18년형을 선고했다. 데니스 텐의 가족들은 우발적 살인이라고 볼 수 없는 여러가지 의혹들을 제기하며 항소할 계획임을 밝혔다.

5. ISU 공인 최고 점수


'''ISU 공인 최고점수'''
<colbgcolor=#428ce8> '''쇼트'''
97.61(2015 사대륙선수권)
'''프리'''
191.95(2015 사대륙선수권)
'''총점'''
289.46(2015 사대륙선수권)

6. 수상 기록


올림픽
동메달
2014 소치
남자 싱글
세계선수권
은메달
2013 런던
남자 싱글
동메달
2015 상하이
남자 싱글
사대륙선수권
금메달
2015 서울
남자 싱글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1 아스타나·알마티
남자 싱글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2017 알마티
남자 싱글

7. 기타


  • 생전에 음악 작곡영화 제작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안타까운 사고을 못다 이루었다. 텐의 사망 후 인터넷상에는 영화제작되길 바란다는 이 잇따랐는데, 이에 티무르 베크맘베토프[12] 감독은 고인이 된 텐에게 영화를 바치고 싶다며 제작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텐이 직접 작사 및 작곡을 한 곡이 여러개였는데, 그 중 한 곡은 제목이 알려졌고, 다른 하나는 Cloud in the sky이라고 알려져 있다.
[1] Ten은 정씨키릴 문자로 음역한 말이라고 한다. 실제 러시아어 발음은 '지니스 텐[dʲɪˈnʲis tɛn\]'이다. 러시아어에서 외래어나 외국어의 경우 те는 대부분 구개음화 하지 않은 тэ처럼 발음한다.[2] 개최지로는 불과 4표 차이로 중국 베이징이 최종 선정되었다.[3] 처음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을 때에는 카자흐스탄에 실내 링크가 없어서 야외에서만 연습을 하다가, 발루안 숄락 경기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몇년 동안 알마티 시내 쇼핑몰을 전전하며 연습했다.[4] 카자흐스탄 뉴스에 따르면 장례식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린 시민들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5] 이 때 처음으로 한국 방송사의 인터뷰와 취재가 있었다.[6] 2007년 준우승(다른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었으나 소수민족이라 차별 받아 2위가 되었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이후 2008년과 2009년에는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7] 2015 트로피 에릭 봉파르 대회는 파리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프리 경기가 취소되어 쇼트로 최종 순위가 결정되었다.[8] 증손의 아들. 일제강점기연해주로 이주했다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후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친손녀인 세레나 민 여사(2017년 11월 작고)의 외손자이다.[9] 이 산소의 모습은 말끔히 정비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낡은 표지판 하나에 의지해 가파른 모래 비탈길을 기어올라가야 나타나는 정리되지 않은 봉분이었다. 그러던 것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서 이 모습이 된 것. 2010년 방영된 역사스페셜에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10] 출처 [11] 데니스 텐이 김연아를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그랑프리 대회로, 그 당시 김연아의 사인을 받고 싶어서 8번이나 시도했었다고 한다.[12] 원티드의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