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토벌전
1. 개요
후한 말인 190년, 18로 제후가 모여 적신(賊臣, 역적)[1] 동탁 토벌을 위해서 동탁군과 겨룬 전투. 정사와 연의의 세부 내용이 꽤 많이 다른 부분 중 하나다. 동탁 토벌전에 참여하는 제후부터가 연의의 창작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정사와 연의를 구분하여 이야기한다.
2. 정사
2.1. 시작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공(曹公-조조)과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삼국지 선주전 영웅기 주석)'''[2]
원소가 탈출하고 나서는 마침내 기주(冀州)로 도망갔다. 시중(侍中)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의랑(議郞) 하옹(何顒)은 모두 다 명사로서 동탁이 그들을 신뢰했는데, 은밀히 원소를 위하여 이에 동탁에게 말하길 "무릇 폐립(廢立)은 대사로써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원소는 대체(大體)에 통달하지 못하고 두려워했기에 도망간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를 급하게 잡아들이면 형세상 필히 변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원씨는 은혜를 4대 동안 베풀어, 그 가문과 인연있는 관리들이 천하에 많으니, 만약 호걸들을 거두어 무리들을 모으며, 영웅들이 이로 인하여 봉기하여, 산동(山東) 지역은 공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를 사면하여 한개 군의 태수로 배수하면, 원소는 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우환거리가 없을 것입니다"라 했다. 동탁이 이 말을 그럴 듯 하게 여겨, 이에 원소를 발해태수로 배수하고, 항향후(邟鄕侯)에 봉했다.[3] '''(삼국지 원소전)'''
동탁이 평소에 천하가 모두 환관이 충신과 어진이를 주살한 것을 미워한다고 듣고서 그것을 반영하여서 비록 무도하지만 스스로 본성을 참고 진심을 억누르고 뭇 선비를 발탁하였다. 그리하여 이부상서에 한양의 주비(周珌), 시중에 여남의 오경(伍瓊), 상서에 정태(鄭泰), 장사의 하옹(何顒) 등을 제수하였다. 처사 순상(荀爽)을 사공으로 삼았다. 당고의 화에 연루된 진기(陳紀), 한융(韓融)의 무리도 모두 공경의 반열에 올렸다. 숨은 선비도 많이 뽑았다. 상서 한복(韓馥)을 기주자사로 삼고, 시중 유대(劉岱)를 연주자사, 진류의 공해(孔骸)를 예주자사, 영천의 장자(張咨)를 남양태수로 삼았다. 동탁이 친애해서 벼슬을 높일 때 예외는 장교뿐이었다. 초평 원년(190)에 한복 등이 관청에 와서 원소의 무리 10여 인과 각기 의병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키로 동맹하고 오경, 주비 등은 안에서 주동하기로 하였다.'''(후한서 동탁열전)'''
동군태수 교모가 수도의 삼공이 주군(州郡)에다 서신을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동탁의 죄상을 상세히 설명하며 이르기를,「핍박을 받아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란을 풀어 주기를 희망하노라」고 했다.'''(삼국지 무제기)'''[4]
동탁이 마침내 태후와 홍농왕(소제)을 살해하였다.[5] 태조가 진류에 이르자, 가산을 처분해 의병을 모아,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 했다. 겨울 12월, 비로서 기오(己吾)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주 :『세어』에 이르길「진류의 효렴(孝廉)인 위자(衛玆)가 가산을 태조에게 대어 주어 병사를 일으키게 하니, 그 무리가 5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 해가 중평(中平) 6년(189)이다.'''(삼국지 무제기)'''
초평(初平) 원년(190) 봄 정월, 산동(山東=關東)의 주군(州郡)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쳤다. 신해일(10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계유일(癸酉)[6] , 동탁이 홍농왕(弘農王-소제 유변劉辯)을 죽였다.'''(후한서 효헌제기)'''
초평(初平) 원년(190), 원소는 마침내 발해에서 기병하여 종제인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孔伷), 연주자사 유대,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하내태수 왕광, 산양태수 원유, 동군태수 교모, 제북상 포신 등과 더불어 동시에 함께 군사를 일으키니, 무리는 각기 수만 명을 헤아렸고 동탁을 토벌하는 것으로써 명분을 삼았다. 원소는 왕광과 더불어 하내(河內)에 주둔하였고, 공주는 영천(潁川)에 주둔하였으며, 한복은 업(鄴)에 주둔하였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산조(酸棗)에 주둔하여 서로 맹약(盟約)하고 원소를 추대하여 맹주를 삼았다.'''(후한서 원소열전)'''
초평(初平) 원년(190년) 봄 정월,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 기주목 한복(韓馥), 예주자사 공주(孔伷), 연주자사 유대(劉岱), 하내태수 왕광(王匡), 발해태수 원소(袁紹), 진류태수 장막(張邈), 동군태수 교모(橋瑁), 산양태수 원유(袁遺), 제북상 포신(鮑信)이 동시에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수 만에 이르렀고 원소를 추대해 맹주(盟主)로 삼았다. 태조는 분무장군(奮武將軍) 직을 대행했다.'''(삼국지 무제기)'''
동탁이 황제를 죽이고 난리를 피우자 장홍은 장초와 장막#s-2 형제가 모두 태수를 역임하고 있으니 의병을 모집해 적신(賊臣, 역적) 동탁#s-1을 죽이자고 진언한다. 장초는 이를 듣고 진류에 있는 형에게 얘기했는데 장막도 평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따르기로 한다. 이에 장막 형제는 연주자사 유대와 예주자사 공주, 등 여러 태수, 자사들과 함께 산조에 모여서 단을 만들고 맹세를 하려는데 여러 주와 군의 자사와 태수는 서로 양보하고 맹주 역할을 자처할 사람이 나오지 않고 모두 장홍을 맹주로 지지해 그가 맹주가 되어 곧 제단에 올라가 쟁반에 부어놓은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적신(賊臣) 동탁을 토벌하자는 선언문을 읽었다. 장홍의 말을 듣고 격정된 기운이 흘렀고,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려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일개 병졸이든 잡부든 정서가 격앙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삼국지 장홍전)'''
2.2. 교전
처음, 동탁의 사위 중랑장(中郞將) 우보(牛輔)가 병사를 맡아 따로 섬(陝)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교위(校尉) 이각, 곽사, 장제(張濟)를 보내 진류와 영천의 여러 현을 공략하게 했다. '''(삼국지 동탁전)'''
동탁이 중랑장(中郞將) 우보(牛輔)에게 섬(陝)현에 주둔하게 했는데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삼국지 가후전)'''
이때 장사 태수 손견이 예주의 여러 군현의 병사를 이끌고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동탁이 그전에 장수 서영(徐榮)과 이몽(李蒙)을 네 번 출전시켜 노략질을 했다. 서영이 손견을 양에서 조우하여서 전투를 벌여서 손견을 격파하고 영천 태수 이민(李旻)을 사로잡아서 팽형에 처해 삶아죽였다. 동탁은 의병을 포로로 잡으면 모두 천으로 돌돌 말아서 땅에 엎어놓고서 뜨거운 기름을 부어서 죽였다. 이때 하내 태수 왕광(王匡)이 하양진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곧 동탁을 치려 했다. 동탁이 거짓 병사(疑兵, 적의 눈을 속이는 군사)를 보내어서 싸움을 걸고서 몰래 정예 병력을 소평진으로부터 하양진 북쪽에 보내어서 격파하니 왕광의 군사가 거의 다 죽었다. 다음해 손견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서 양현의 양인에 진격했다. 동탁이 장수 호진(胡軫)과 여포를 보내어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가 서로 불화하니 군중이 자절로 뒤숭숭해져서 사졸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 손견이 추격하니 호진과 여포가 패주하였다. 동탁이 장수 이각을 보내어서 손견에게 화평을 구했으나 손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대곡으로 진군하니 낙양에서 90리 거리였다. 동탁이 몸소 출전하여 손견과 제릉묘한에서 싸웠으나 동탁이 패주하고 민지에 다시 주둔한 뒤에 섬(陝) 지방에서 병사를 모았다.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에 진격하여서 다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가 또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손견이 곧 종묘를 깨끗이 하고서 여러 능묘를 정비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곡관을 나와서 신안, 민지간까지 가서 이(涞) 강을 경계로 동탁과 맞섰다. 동탁이 장사 유애(劉艾)에게 말하였다. "관동의 여러 장수가 여러 번 패하니 무능한 것입니다. 오로지 손견만이 좁아터지고 고집불통이니 여러 장군은 마땅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곧 동중랑장 동월(董越)을 민지에 주둔시키고, 중랑장 단외(段煨)는 화음에, 중랑장 우보는 안읍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중랑장과 교위를 여러 고을에 배치하여서 산동을 방어시켰다. '''(후한서 동탁열전)'''
손견이 양동(梁东)으로 옮겨 주둔하였다가, 동탁군에게 크게 공격을 받으니, 손견과 수십 기만이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손견은 항상 붉은 두건(幘)을 쓰고 있었는데, 이에 두건을 벗어 친한 주위 장수 조무(祖茂)에게 이를 쓰게 하였다. 동탁의 기병들이 다투어 조무를 추격하니, 그래서 손견은 샛길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조무는 (상황이) 곤박(困迫)해지자, 말에서 내려 두건을 무덤 사이에 씌어 놓고 기둥에 불을 놓아, 풀 속에 엎드렸다. 동탁의 기병들이 이것을 바라보고는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가까이 가서야 이것이 기둥임을 알고 이내 물러갔다. 손견이 다시 병사들을 수습해, 양인(阳人)성에서 전투를 벌여 동탁군을 크게 격파하고, 도독(都督)인 화웅(華雄) 등을 효수(梟首)했다. 이때, 혹자가 원술에게 손견을 이간질하니, 원술이 의심을 품고 군량을 운반해 주지 않았다. 양인성에서는 노양까지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라 했다. 원술이 조심스러워 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 보내주었다.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 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손견이 말하길 "동탁은 하늘을 거슬러 무도하여, 왕실을 쓸어 뒤집어 엎었으니, 지금 너의 삼족을 주살하여 사해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는데, 어찌 장차 같이 화친하겠는가?"라 했다. 다시 대곡(大谷)으로 진군하니, 낙읍(雒邑)과 90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동탁이 바로 도읍을 옮겨 서쪽으로 관중으로 들어가면서, 낙읍을 불태웠다. 손견이 앞장서 입성하여 낙읍에 이르러서, 여러 능묘를 수리하고, 동탁이 파헤쳐 놓은 요새를 바로해 두었다.[7] '''(삼국지 손견전)'''
2월, 동탁은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천자를 옮겨 장안에 도읍하였다. 동탁이 낙양에 주둔하면서 마침내 궁실에 불을 질렀다. 이 때에 원소는 하내에 주둔하였는데, 장막, 유대, 교모, 원유는 산조(酸棗)에 주둔하였고,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鄴)에 있었다. 동탁의 병사가 강대하니 원소 등이 패배하여 감히 먼저 진군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말하길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살하려고 대군이 이미 모였는데, 제군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동탁이 산동(山東)의 병사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실의 중엄함에 의지하여 이주(二周=낙양과 장안)의 험고함에 의지해 동쪽으로 향해 천하에 임하려 합니다. 비록 그가 무도함으로 행한다 해도 족히 우환이 될 것입니다. 지금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협박해 옮겨서 해내가 진동하여 돌아갈 곳을 모르는데,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한번 싸우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 했다.[8]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차 성고(成皐)를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장막이 위자를 보내 병사를 나누어 태조를 뒤쫓게 하였다.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 도착하여, 마침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을 만나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태조가 유시(流矢)에 맞고, 타던 말은 창에 찔렸다. 사촌동생 조홍(曹洪)이 태조에 말을 주어 밤에 달아날 수 있었다.[9] 서영은 태조가 거느리는 휘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힘을 다해 하루 동안 싸웠으나, 산조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또한 병사를 거느리고 물러났다. '''(삼국지 무제기)'''[10] 이때 위자는 포도와 함께 전사했다. 한편 유비는 적에게 격파당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 달아났다. '''(삼국지 선주전)''' 군대를 거의 잃은 조조는 병사가 적어 양주, 패국을 돌아 다니면서 반란을 겪기도 하면서 병사 1천명을 모아 하내로 이동해 주둔했다. '''(삼국지 무제기)'''
처음 동탁은 장사태수 손견, 하남태수 왕광을 격파하고 영천태수 이민을 붙잡으며 기세를 울렸다. 순욱전에 '''동탁이 이각(李傕) 등을 보내니 관동(關東)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진류(陳留)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사람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 당했다.'''라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해(191년) 손견이 공격해 호진과 여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독 화웅을 죽였다. 원술은 이 전과를 보고 군량을 끊었다가 손견의 설득으로 군량을 댔다. 동탁은 이에 이각을 보내 화평을 청하나 무시하고 낙양에서 90리 거리까지 진군했다. 2월, 동탁은 황제를 장안으로 옮기고 몸소 출진하나 크게 패해 낙양에서 도망친다.
2.3. 해체
유대와 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니, 왕굉(王肱)에게 동군태수직을 맡도록 하였다. 원소는 한복과 유주(幽州)목 유우(劉虞)를 세워 황제로 삼고자 모의하였으나, 태조가 거절하였다.'''(삼국지 무제기)'''
한편 산조에 주둔하던 관리들은 어느 누구도 솔선하여 동탁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군량이 다 떨어져서 흩어지고 만다.'''(삼국지 장홍전)'''
후에 한복의 군대가 안평(安平)에서 공손찬(公孫瓚)에게 패배하였다. 공손찬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기주로 들어가 동탁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안에서 한복을 습격하고자 하니 한복이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삼국지 원소전)'''
2년(191) 봄, 원소와 한복이 마침내 유우를 옹립해 황제로 세웠으나, 유우가 끝내 감당하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환도했다.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하여 기주를 취했다.'''(삼국지 무제기)'''
유우의 아들 유화가 장안에서 있었는데, 황제는 유화를 탈출시켜 유우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맞이하게 하려 하였다. 유화가 원술의 영지를 지날 때, 원술은 당시에 유우를 견제하고 있었다. 유화를 잡아서 유우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유화가 원술과 함께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승낙하고, 유우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유우는 유화의 편지를 받고, 수천 명의 기병을 파견했다. 공손찬은 원술이 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파견을 하지 않았으며, 유우를 말렸으나, 유우는 군사를 일으켰다.
공손찬은 이 점을 원술이 듣고 원망할까 두려워서 그의 사촌동생 공손월에게 수천 명의 기병을 주어 원술과 손을 잡게 하고, 유화를 잡아 병권을 뺏도록 했다. 이로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토록 했는데, 원소는 주앙을 보내어서 공격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어 싸웠는데, 패배하고, 공손월이 죽었다. 공손찬은 격노하여 말했다. "내 동생이 죽었으니, 이 재난은 원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군대를 내보내 반하에 주둔시켜 원소에게 복수할 준비를 했다.'''(삼국지 공손찬전)'''
『오록(吳錄)』에 이르길 「이때 관동(關東)의 주군에서 서로 겸병(兼竝)하여 스스로 강대해지는 데 힘썼다. 원소가 회계(會稽)군의 주우(周喁)를 보내 예주(豫州)자사로 삼고는 내습(來襲)하여 그 주를 취하였다. 손견이 비분강개하여 탄식하길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적들이 거의 격파되려 하는데 각자 이같이 하니, 내가 마땅히 누구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겠는가!"라 했다. 말을 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이르길 「처음 조공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사람을 시켜 주우에게 요청하니, 주우가 곧 병사들을 거둬어 합쳐서 2천 명을 얻어, 조공을 따라 정벌에 나서니,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후에 손견과 함께 예주를 다투었는데, 여러번 전투에게 실리를 잃었다. 둘째 형인 구강(九江)태수 주앙(周昻)이 원술에게 공격당하자, 주우가 가서 도왔다. 군대가 패배하자 향리로 돌아왔으나, 허공(許貢)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삼국지 손견전)'''
이미 원소와 틈이 벌여졌는데, 또한 유표와도 평화롭지 못하니 북으로 공손찬과 연계하였다. 한편 원소는 공손찬과 불화(不和)하여 남으로 유표와 연결하였다. 그 형제가 다른 상대와 손을 잡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과 교류하는 게 이와 같았다. 군대를 이끌고 진류(陳留)로 들어갔다. 태조과 원소가 같이 공격하여 원술을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구강(九江)으로 달아나, 양주(揚州)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그 주를 다스렸다.'''(삼국지 원술전)'''
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삼국지 무제기)'''
황제가 장안으로 이동하고 동탁의 군대가 여전히 강하자, 기약 없는 싸움에 지친 동맹은 무너진다. 원소는 아예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 대신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하나 유우의 반대로 실패한다. 그러는 중에도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공손찬은 한복과 싸워 이긴다. 한복이 불안에 떨자 원소는 한복이 자신에게 기주를 양도하게 시킨다.
사실 189년 12월~190년 2월까지만 동탁과 싸웠고 그 이후부터는 동탁과 싸운 기록이 영 없다. 서로 싸운 기록만 남아있지. 정작 동탁은 장안에서 왕윤에게 설득당한 여포의 배신으로 살해당하고 그를 죽인 여포 또한 동탁의 잔당인 이각, 곽사에게 쫓겨나 각지를 방랑하는 신세가 된다.
이렇게 동맹 내부의 사정은 복잡하게 꼬여서, 원소-조조-유표와 원술-공손찬-손견이 서로 대립한다. 원술은 유우의 아들을 잡고, 공손찬은 공손월을 보내어 원술과 연합한다. 원소는 주우를 예주자사로 삼고 주앙을 보내 손견의 보급로인 양성을 친다. 처음엔 손견과 공손월이 패하고 공손월이 죽었지만 이후 싸움에선 손견이 승리해 주씨 형제를 몰아낸다. 공손찬은 공손월의 죽음에 크게 노해 대군을 이끌고 기주로 내려오지만 이미 원소가 기주를 점령한 상태고 이후 공손찬이 유우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유우를 죽이자 원소가 공손찬과 하북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된다. 한편 손견은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해 몰아붙였다가 유인책에 빠져 전사하고 조카 손분이 잔존세력을 이끌고 원술에게 돌아갔다.
동맹은 자연히 해체되고 이후 계교 전투, 서주 대학살 등이 이어져 난세가 찾아오며 동탁 사후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자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군웅들이 저마다의 야망을 품고 할거하게된다.
2.4. 평가
반동탁 연합은 중국 역사적으로 볼때 꽤 특수한 경운데, 지방 관리들이 사병을 조직하고 서로 연합해 중앙 정부를 공격한 것 부터가 중국 역사상 드물며 거기에 그 지방 관리들 대다수가 원래부터 그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의 혈족이었던 것도 아닌 중앙 정부에 의해 발령나 해당 지역에 연고가 없는 관리들이 그 곳에서 사병을 조직했단 점은 거의 전무후무한 수준. 보통 지방연합의 반란은 버티다 못한 민중 봉기나 종친들간의 권력 암투였던 것에 반해 이 전투는 일단 그 당시 상황만 보면 황제에 의해 발령받은 지방관들이 황제와 그 측근(동탁)에게 칼을 들이민 셈이니 저 둘에 속하지 않는 특수 케이스이다.
연고가 없음에도 가능했던건 기본적으로 각 지방관들의 사병조직이 상당히 강했거나 본인부터가 유명인사였던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났다는건 해당 지역 토호들도 이당시 중앙 정부 상황을 손놓고 구경하기는 힘들 정도로 무언가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는게 된다. 그게 바로 지방관들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었던 셈.
어쨋든 이런 상황은 둘째치고 냉정하게 보면 연합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는데, 애초에 최종목표마저 제대로 정하지 않았고[11] 맹주로 부임한 원소가 모든 군벌들을 아우를 정도의 역량이나 실권도 없었다.[12] 결국 반동탁 연합의 의의는 한나라 구원보다는 수많은 군웅들이 서로의 욕심을 알아보고 군웅할거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뿐이다.
3. 연의
연의는 정사와는 꽤 다른 노선을 취한다. 정사의 요소를 여기저기 가져다가 재구성한 데다 상당히 창작이 많이 가미되고 삼국지연의의 주연 캐릭터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특징.
원소는 동탁과 대립하다 기주로 도망쳐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정사와 같다. 그 이후 조조가 도망치는 것은 정사와는 차이가 있는데, 정사에서 조조는 동탁의 임관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달아났지만, 연의에서는 왕윤에게 칠성보도를 빌려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친다. 물론 연의 쪽이 허구. 이어 등장하는 진궁의 이야기와 여백사를 살해한 일 자체는 사실로 추정되나 여기도 사실 기반으로 창작이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의 자세한 것은 여백사 항목 참조.
동맹이 모이는 과정에서 공손찬이 18로 제후에 참가하기 위해 평원현을 지나다가 유관장 삼형제가 같이 참전한다.
이후 18로 제후가 모인 뒤 원소가 맹주로 추천되고, 출전에 앞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원소는 원술에게 군량 보급을 맡기고 사수관 공격에 나선다. 이 선봉에 서는 것은 정사와 마찬가지로 손견. 그러나 제북상 포신이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동생 포충을 시켜 한 발 먼저 싸움을 걸었다가, 사수관을 지키는 화웅에게 목이 달아난다.
이윽고 손견이 와서 사수관을 공격하는데, 호진이 맞서 싸우다가 손견의 장수 중 하나인 정보가 그를 쓰러뜨린다. 손견은 이 기세를 틈타 사수관을 공략하려 했으나 예상 외로 동탁군의 저항이 강해 일단 물러선다. 그리고 원술에게 군량을 보내 달라고 청하나 손견이 공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한 원술은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 이거 때문에 손견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화웅이 이끄는 동탁군에게 야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손견은 간신히 도망치지만, 이 과정에서 두건을 대신 쓴 조무가 사망한다.
기세등등해진 화웅은 관에서 나와 18로 제후의 영채 앞으로 와서 싸움을 걸고, 원술의 장수 유섭, 한복의 장수 반봉이 차례로 나가지만 모두 패하고 만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선 사람이 관우. 원소는 관우에게 벼슬을 묻고 그가 유비의 마궁수라는 답을 하자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고, 원술은 아예 호통치며 끌어내라고 한다. 이때 조조가 나서서 중재하여 관우를 내보내도록 하고,[13] 조조에게 따끈하게 데운 술을 한 잔 내린다. 그러나 관우는 다녀와서 마시겠다고 대답한 뒤, 일사천리로 화웅의 목을 베어와서 제후들에게 내놓고 술을 마신다. 그 술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고 한다.
화웅이 패했다는 사실을 안 동탁은 자신과 여포가 직접 나서 호로관으로 나간다. 이에 18로 제후들은 그중 여덟 제후들을 앞세워 호로관으로 내보낸다. 하내 태수 왕광의 장수인 방열이 여포와 붙었지만 얼마 안 가 죽고, 첫 싸움은 여덟 제후들의 패배로 끝난다. 이어 상당 태수 장양의 부장 목순이 여포와 대적하지만 사망하고, 북해 태수 공융의 부장 무안국도 여포에게 패해 한쪽 팔이 잘리고 목숨만 건진다. 그리고 다음 날 여덟 제후들의 영채 앞에 여포가 나타나 또 싸움을 걸고, 이번에는 공손찬이 나가지만 패해서 도망친다. 여포가 공손찬을 따라잡는 순간 장비가 나타나고, 삼국지연의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삼영전여포로 이어진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여포는 호로관으로 퇴각하고, 제후들도 호로관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퇴각한다. 원소는 다시 손견에게 출진을 명하고, 손견은 출진 전에 원술에게 군량을 안 준 문제를 따지러 간다. 원술은 군량을 주지 말라고 계책을 낸 부하의 목을 베며 사죄했다. 그리고 손견에게 이각이 찾아와서 동탁이 딸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만 손견은 호통을 치며 그 제안을 거부한다.
결국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다. 동탁군도 철수하면서 18로 제후군은 자연히 두 관을 접수, 낙양까지 진격하지만 거기에는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모두 허탈감에 빠졌고, 조조가 나서서 동탁을 뒤쫓는다. 그러나 이유의 매복계에 걸려서 크게 패하고 만다.
한편 손견은 우물에서 옥새를 건져냈고, 손견은 이걸 숨겨서 병을 핑계로 장사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이미 비밀이 새나가서 원소가 그걸 안 상황이고, 손견은 원소와 크게 싸운 뒤 자신의 군사를 거두어 장사로 돌아간다. 원소는 형주 자사 유표에게 비밀리에 서찰을 보내 손견을 막고 옥새를 되찾으라고 한다. 그 이후 조조의 한탄과 더불어 동맹은 와해되고, 18로 제후는 본거지로 돌아가며 동탁 토벌전은 끝난다. 이후 한복, 손견, 동탁의 결말은 정사와 동일하고 천하는 군웅할거 시대가 된다.
4. 기타
반동탁 연합군 당시 원소, 왕광이 주둔하던 하내 지역에서는 여러 열전에서 재산 강탈, 약탈이 묘사된다. 그런 혼란을 피해서 여러 호족들은 중원으로 도피한 것으로 보인다. 위서 상림전에 따르면 왕광은 유생들을 소속 현에 파견했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에 해당하는 돈과 곡식을 내야 용서해주는 특이한 방법으로 물자를 조달했다. 그런데 왕광은 거기서 자신의 위엄을 세운다면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종족을 없애버린다. 또 위서 양준전에 따르면 양준은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군(河內)이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므로 반드시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노약자들을 부축하여 경현과 밀현(京密)의 산간(山間)으로 갔는데, 함께 따라가는 자가 백여 호나 되었다. 위서 사마랑전에 따르면 관동의 여러 주와 군에서 병사들이 일어났는데, 병력 수십만 명이 모두 형양(滎陽)과 하내로 모여들었다. 장군들은 서로 일관되게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군대를 풀어 약탈을 하여 백성들 중에서 죽은 자가 절반은 됐고, 사마랑과 사마씨 일족은 오랜 시간이 지나 하내 지방의 병사들이 흩어지고 조조가 여포와 대적하며 복양에 있을때 고향 온현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기주목 한복이 원소를 견제하여 원소의 군대를 흩어버리게 하기 위해 군량을 끊으면서 발생한 현상으로 보인다.
5. 기타 창작물
5.1. 삼국지 시리즈
반동탁연합(삼국지 시리즈) 문서 참조.
5.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매 시리즈에 호로관 전투로 등장하는데 보통 사수관 전투와 합쳐져서 등장한다. 사수관 전투가 독립적으로 구현된 건 3, 4, 6. 특히 적으로 나오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여포가 넘사벽으로 강력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호로관 메뚜기.''' 여포는 1회차에서는 절대 못잡는 기믹으로 나오는데, 그렇기에 모든 작품에서 여포 회피 루트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유비군과 조조군의 초반 스테이지로 나오며 이 게임의 극악무도한 대사밀림 현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초반에 열어야 할 문이 많은데 손견이 군량 없다고 징징댄다고 적장을 격파해도 문이 제때 안열려 죽치고 기다려야 하고 사수관을 너머 화살비 지역을 돌파해 장료와 싸울 무렵에 쓸데없이 왕방이 아군 진영으로 돌입해 원술과 교전한다. 뭐 딱히 의미있는 이벤트도 아니고 왕방이 원술에게 바로 쳐발리는데 둘이 대사를 날린다고 시간을 잡아먹어 도대체 왜 넣었는지 모를 이벤트이다. 더구나 가후를 처치하면 고순이 뜬금없이 아군이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지키라는 투석기는 안 지키고 뛰어내려 공격해와 플레이어에게 할 일을 두 번 하게 만들고 장제를 격파할 즈음에는 유비와 조조가 또 담화를 나눈다고 문이 안열린다. 그야말로 진삼국무쌍7의 총체적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스테이지라 볼 수 있다. 여기 나오는 호로관 메뚜기는 시리즈 사상 최약체로 이 시리즈에서 처음 선보인 스톰러시와 배리어블 카운터를 적절히 활용하면 게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아무 캐릭으로도 다 잡을 수 있다. 워낙 덩치가 큰데다 병졸들도 안 데리고 오는 만큼 보기 좋은 표적으로 삼고 후려패주면 그만. 오히려 아군들이 여포에게 떼로 달려들어 다굴을 놔서 공격을 자꾸 방해하는것만 거슬릴 뿐이다. 무기가 속성을 잘 받는다면 궁극의 여포까지 단번에 제압당할 정도로 예전의 위용을 대폭 상실했다.
진삼국무쌍 8에서도 등장. 오픈월드 요소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본작의 전장들이 지나치게 광활하다보니 사수관과 호로관이 분리되어 있다. 화웅은 번외 임무 처치 대상으로 등장하며, 여포 격파도 주요 임무로 나온다. 하지만 어떤 벽이던 갈고리를 타고 너무 쉽게 지나갈 수 있어서 굳이 여포를 잡을 이유가 없다.
5.3.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스토리의 첫 시작을 장식한다. 스테이지로는 사수관전투와 호로관전투 두 개가 있다. 삼영전여포도 구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장비와 맞서 싸우고 관우와 유비는 대사창으로만 나온다. 일기토 장면 자체는 허접하지만 원작 고증은 오히려 이쪽이 조조전보다 낫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앞서 튜토리얼 성격의 황건 토벌이 있기 때문에 첫 시작은 아닌 약간 뒷 이야기이고, 조조의 시점에서 사수관전투와 호로관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삼영전여포의 경우, 유관장 삼형제가 각각 여포와의 일기토가 있지만 원작에서의 3:1 승부는 게임 시스템상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따로 일기토를 한다. 조조의 시점이기에 그 뒷이야기인 동탁추격전까지 구현되어 있는데 해당 전투에서 총대장인 이유를 격퇴시키면 절영을 얻을 수 있지만 연의대로라면 패배하는 전투라 난이도가 비교적 높게 책정되어 있다.
5.4. 토탈 워: 삼국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해 18로 제후군을 비롯한 각지의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본편 캠페인이 시작된다. 말이 반동탁 연합이지 실제로는 연합 와해 직후의 군웅할거 시대로 코에이 시리즈의 군웅할거와 차이점은 손견과 동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14] 이후 코에이판 군웅할거와 같은 연도인 194년 시대도 DLC로 나온다.
5.5.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의 시작이 반동탁 연합의 결성이다. 본편 에필로그인 황건의 난이 끝나고 스페셜 에피소드로 양인 전투도 다루었다.
5.6. 연희 시리즈
연희무쌍/애니메이션 소녀대란 9화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여기선 특이하게 원소가 일으킨 것으로 묘사되었다.
5.7. 삼국
3화부터 조조 주도 및 원소를 맹주로 해서 등장한다. 대체로 연의와 비슷하나 드라마 창작인 부분도 있다.
연의에선 그나마 하급 관직이라도 있던 유관장 3형제는 여기선 공손찬 휘하도 아니고, 관직 하나 없는 그야말로 평민(몰락한 귀족)에 지나지 않았으나[1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동탁을 무찌르고 한실을 되살린다는 큰 뜻을 품고 '''3명 단신'''으로 초대도 없이 18로 제후군에 들어가려고 한다. 문지기는 사실상 평민인 유비를 무시했고, 무시당한 것에 빡친 장비가 문지기를 패는데,[16] 유비도 빡쳤는지 굳이 말리진 않는다. 다행히 그때 조조가 들어오면서 1화에 왕윤의 생신잔치 때 자신이 문전박대 당한 게 생각났는지 유비 일행이 들어올 수 있게 해준다.
관우가 화웅의 목을 따고 돌아와 사기를 높이자, 원소는 19번째 부대를 증편하고 지휘관을 유비로 임명한다. 하지만 원술이 약속했던 군량을 주지 않고 버틴 데다, 유비의 명령으로 군량을 요청하러 갔던 병사가 군량지원 담당하는 원술의 부하한테 빰을 얻어맞고 돌아와서 분하고 억울한 상황에[17] , 손견이 물자 부족으로 패했으나 제후들의 사기를 고려해 오히려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자 어이가 없어 연합에서 나오려 한다. 하지만 그때 여포가 쳐들어왔을 땐 3형제가 나가 교전해 여포를 패퇴시키고 연합 탈퇴는 잠시 미룬다. 자세한 건 여포, 유비 항목 참조바람.
그런데 우습게도 호뢰관 싸움에서 여포를 상대로 버티기 작전을 하고 있을 때 서로 보급 등 쌓인 문제로 Cabin Fever급 멱살잡고 난투극을 벌여서 조조가 포기하고 회의장을 떠날 정도로 막장인 팀웍을 보여준다. 게다가 맹주로서 별다는 일은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기심 때문에 군량도 제대로 안 대주는 데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방치만하는 원술 등의 막장 행위들이 종종 보인지라 이 연합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이 대놓고 보인다. 원술은 손견이나 유비뿐 아니라 다른 제후들에게도 보급을 제대로 안 해주거나 아예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모양. 보급을 요청하기 위해 내달려온 황개가 '우리는 보급이 부족해 내 칼도 다 못쓰게 된 판인데, 여기에서 신나게 연회벌이고 술판 벌이나?'라며 빡쳐하자 원소는 달래느라 진땀을 뺀다. 원술은 원소에게 대놓고 '손견이 공을 세우면 입지가 커져서 겁나 복잡해지는데 그 꼴 보고 싶은 거요?'라며 손견을 견제하기 위해 군량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견제한다고 했을 정도. 물론 직후 손견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원소가 원술에게 '고맙네 이 멍청아 선봉장군이 결국 패해버렸고 나까지 바보가 됐는데 이제 어쩔 거냐?'라고 까였지만.
폐허가 된 낙양성 도착 후 조조는 원소에게 공격하자고 간언하다 거절당하자 혼자서 기병 4천을 이끌고 손견 진영으로 가서 손견한테 기병 3천 명을 빌려 동탁을 치러 갔다가 대판 깨지는데 조조가 혼자 돌아올 때 원소, 원술 등은 술판을 벌여놓고 놀고 있었다. 한편 이름만 19번 부대 지휘관이지 물자도 병력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다 제후들한테 설움까지 당한 유관장 3형제는 한실의 황제들의 초상화들이 있는 곳에 가서 선조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경의를 표하는데, 그때 마침 여포한테 패주하고 돌아온 조조는 원소는 어디있냐고 유비한테 묻자 손견의 승전 축하를 위해 술판 벌인다는[18] 얘길 듣고 빡친 조조는 이들과 같이 원소한테 쳐들어간 다음, 무책임과 비겁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원소, 원술 형제 및 다른 제후들을 대놓고 신나게 깐다. 유비도 원소와 원술을 까고 조조와 함께 나가고, 손견도 병력을 끌고 강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가 전국옥새 얘기가 나오면서 원소, 원술이 병사들을 동원해 뺏으려고 하지만 역으로 먼저 매복시킨 수하들로 받아치고, 원소를 압박해서 요양을 빌미로 동맹에서 나가게 된다.
그 후 조조와 유관장 3형제, 그리고 옥새를 얻은 손견은 제 각자 갈길을 가는 데, 가기 직전 조조는 유비와 손견에게 "18로 제후들 중에 진정한 영웅은 당신 둘 뿐"이란 말을 한다. 서로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조조에게 유비는 한 왕실을 위해 일하면 벗, 한 왕실을 저버리면 적으로 만날 거라고 복선을 깐다. 유비가 떠난 이후 조조는 손견에게 전국옥새에 대해 떠봤으나 옥새에 대해 손견에게 진시황의 예를 들었던 손권을 소개하면서 두루뭉술하게 얘기를 바꾼 뒤 길을 떠난다.
여담으로 이때가 조조, 유비, 손가(손견, 손책, 손권)-훗날 중국을 세등분 할 주역들이 가장 사이가 좋았던 때였다. 조조는 유비 삼형제를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이고 싶어 공을 들였었고 손견과 손가에 대해서도 존경스러우면서도 걱정된다고 평했다. 유비도 조조와 견해가 다르긴 했지만 그와 뜻이 통했으며 손견과는 접점은 적었지만 그래도 영웅으로 평했고, 손견도 두 사람을 다른 제후들보다 나은 인물로 보는듯 했다. 이후에는 서로 견제를 하다가, 아예 전쟁을 벌이게 된다.
5.8. 김경한 삼국지
애초에 반동탁 연합이 하나로 통합된 것조차 아니고 북연합과 남연합으로 두 개가 있는 상태였다. 북연합은 원소가 이끄는 연합으로 조조, 왕광, 한복, 교모, 공주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남연합은 원술이 이끄는 연합으로 손견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싸우려는 의지를 보인 건 북연합의 조조와 남연합의 손견밖에 없었고 이긴 장수 역시 손견 하나뿐이었다. 왕광은 가만히 있다가 동탁에게 털리기만 하고 털린 뒤 원소 등 뒤로 도망쳤고 한복은 겁이 많아 일단 반 동탁 연합에 들어는 왔지만 탈퇴하려고 발악했다. 손견이 동탁의 장수 서영에게 기습당했을 때 조무에게 시켜서 손견의 두건을 쓰고 서영을 유인하라고 했다. 조무는 손견의 두건을 쓰고 도망치다가 어떤 이름모를 무덤의 망부석에 손견의 두건을 씌우고 숨었다. 추격하던 서영은 그 망부석을 손견으로 오인해서 집중사격을 가했으나 접근해서 확인해보니 그냥 망부석인 것을 알고는 실망해서 돌아갔다. 이후 조무는 고향으로 낙향해버렸고 다시는 조무를 본 사람이 없다. 이후 손견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동탁군과 싸웠고 화웅과 일기토를 벌여 1합만에 화웅의 옆구리를 베고 쓰러뜨렸다. 이후 호진과 여포는 손견이 무서워서 혼비백산하며 도망쳤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동탁은 이각을 사신으로 임명해서 손견에게 화친을 제의하지만 거절당했다. 이로인해 동탁은 울며 겨자먹기로 역대 한나라 황제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에서 손견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치열한 접전끝에 손견이 이기자 마치 조개처럼 장안성으로 들어가서는 성문을 굳게 잠궈버리고 열지 않았다.
동탁이 손견에게 털린 이후 장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자 이들 연합은 할 일이 없어져서 계속 술판만 벌이다가(...) 그 매일같이 벌인 술판으로 인해 군량이 다 고갈되어서(...)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처음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좋은 모임으로 뭉쳤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는 조조와 손견을 제외한 이들 대부분이 목표의식 없이 군중심리로 모인 무리들인 탓에 동탁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숨어서 시간을 보내자 결국 친목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아예 언급조차 없다. 유표는 손견이 반동탁 연합을 하러 간 사이에 형주자사의 치소를 무릉에서 제멋대로 양양으로 옮긴 뒤 손견의 영지인 장사를 포함한 형주에 소속된 여러 성을 개인 사유지로 만들어 버렸다.
후일담으로 반동탁 연합이 와해된 이후 손견은 유표가 도둑질한 자신의 영지인 장사성을 되찾으러 갔다가 괴월의 계략에 걸려 사망했다.
[1] 하내에서 맹주로 선언문을 읽었던 원소나 산조에서 맹주로 선언문을 읽었던 장홍이나 모두 동일하게 동탁을 적신(賊臣)이라고 칭하고 있기에 기술한다.[2] 이 영웅기 주석 바로 앞에선 유비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고 하는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주석에선 영제 말년에 유비가 낙양에 있었다고 하니 당시 유비는 고당현령직을 버리고 낙양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3] 연의에서 후일담. 이후 원소가 18로 제후의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전갈이 왔을 때 주비와 오경은 뭣모르고 "지금은 군사를 지켜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때입니다."라고 했는데 동탁이 '''"너네들 말 들어서 원소가 저렇게 개기잖아!"'''라며 성을 내서 목이 날아갔다. 정사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남 좋은 일 해줬다고 동탁의 미움을 사 살해된다.[4] 동탁이 황제를 교체하고서 인심을 잡기 위해 명사들에게 관직을 뿌리자 오경, 주비는 반동탁파 인사를 관동의 지방관으로 임명했다. 그들 중 하나인 교모가 서신을 돌려 지방관들을 모아 동탁을 치게 되었다.[5] 사실 동탁은 아직 폐위한 홍농왕을 죽이지 않은 상태였는데 소문이 퍼지길 이렇게 퍼졌다. 산조에 있던 관리들 뿐만 아니라 기오에 있던 조조도 황제 시해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광범위하게 퍼진 소문으로 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모인 반동탁 연합군을 두려워한 동탁이 홍농왕을 죽이고 만다.[6] 원굉의 후한기에는 계축일(癸丑)(1월 12일)의 일로 적혀 있고 이에 관한 주천유(周天游)의 교주(校注)는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계유일이라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정월은 임인일이 초하루고 계유일이 없으니, 범엽의 후한서가 틀렸다."라고 하고 있다.[7] 이때 전국옥새를 발견해 손에 넣게 되는데 오서, 산양공재기에서는 원술이, 후한서 원술열전에서는 손견이 얻었다고 되어있다.[8]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연합군이 산조와 하내에 따로 모인 정황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해 싸우지 못했다는 식으로 나온 뒤 조조가 전투를 촉구하는 일장연설을 해서 연합군이 모두 산조에 모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위에서도 나오듯 원소는 산조에 있지도 않았다. '위태조 폐하 빼고는 모두 겁쟁이였다'는 식으로 막 띄워주려다 보니까 생긴 오류. 이후엔 조조가 패하고 하내에 있는 원소한테 가는 것이 다시 언급된다. 물론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전혀 언급이 없으며, 원소와 한복의 불화는 후한서에서 언급된다.[9] 이 일화는 연의에서도 등장하는 일화로 조홍이 조조에게 말을 양보하여 조조의 목숨을 건진다. 여기서 조홍은 "천하를 위하여 이 홍은 없어도 되지만, 형님은 아니 됩니다."라며 자신의 말에 조조를 태웠다.[10]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일은 190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11] 당장 헌제 옹립에 제일 반발하여 차라리 유우를 부임시키고자 했던 원소는 당연히 헌제도 죽여버려야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와 정반대로 헌제를 살리는 대신 동탁만 죽여 한나라를 유지하자는게 조조, 원술등의 입장이었다. 그 외 군벌들도 크게 이 두가지나 아니면 아예 제 3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들은 끝까지 합일되지 않았다.[12] 단일군벌중엔 나름 강하긴 했으나 애초에 연합을 꾸려야했던 만큼 동탁과 비비기엔 어림도 없었고 실력은 있었으나 적자가 아닌 만큼 정통성에서도 밀렸다. 그나마 연합 군벌중에선 능력있고 조조가 띄워준 것도 있어서 맹주가 되었을 뿐.[13] 성공하면 적장이 일개 마궁수에게 죽게 되니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좋고 실패해도 고작 마궁수 한 명을 잃는 것밖에 안 되니 큰 손해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었다는 해석도 있다.[14] 코에이판 군웅할거는 손견과 동탁이 죽고 손책과 이각이 세력 계승하고 여포가 단독 세력으로 나온다.[15] 사실 이게 정사 묘사엔 더 부합한다, 정사 본전에선 영제 말년에 유비가 고당현령을 받았다고 하긴 했으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는 수도 낙양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조조의 고향 패국으로 가서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했다고 하니 영제 말년에 진작에 아무런 이유 없이 임지였던 고당현을 떠나 낙양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때문에 그곳의 관직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이 당시엔 관직 하나 없는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6] 공교롭게도 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후에 손건의 역을 맡는다. 손건, 유비 그리고 장비의 친분을 생각하면 참(...). 사실 이 배우는 손건 이외에도 다양한 배역을 이 드라마에서 맡았지만 가장 지명도가 높은 장수가 손건이다.[17] 게다가 병사의 말로는 원술에게 약속한 군량 받으러 갔는데 군량이 낙양성에서 있으니 거기에서 가져가라는 원술의 말을 듣고 원술을 질타하다가 원술의 부하놈한테 빰까지 얻어 맞으면서 인신공격까지 룸서비스를 받았는데, 삼형제의 전직을 두고 돗자리 장수, 개돼지 잡는 백정이라고 깐다.[18] 사실은 원소 원술이 손견이 얻은 전국옥새을 뺏으려고 손견의 승전을 축하한다는 구실로 축하연을 했던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