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댄토니
1. 소개
미국-이탈리아 이중국적을 지닌 농구인으로, 별명은 '아르센 뤼팽', '콧수염(Il Baffo)'이다.
'''NBA에서 성공한 해외파 감독 중 몇 안되는 감독'''이면서도 공격농구의 귀재이자 리빌딩의 달인으로 불리지만, 주전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감독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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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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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시절의 모습. 오른쪽이 댄토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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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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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수생활 전성기인 밀라노 시절의 모습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댄토니는 1951년에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멀렌에서 태어나 같은 주의 헌팅턴에 있는 마샬 대학교 재학 중 농구선수로 활동하다 1973년 NBA 드래프트 전체 20번으로 뽑혀 캔자스시티-오마하 킹스에 입단했다. 이후 스퍼스까지 세 팀을 거치며 형편없는 선수 생활을 보내다 1977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명문 팀인 올림피아 밀라노로 이적해 1990년 은퇴할 때까지 농구 세리에A 우승 5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유로리그 우승 2회, 코라치 컵 우승, FIBA 인터컨티넨털 컵 등을 우승하여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계인 이유로 이탈리아 국대에 뽑혀 1989년 유로바스켓에 출전하기도 했다.
2.2. 감독 시절
2.2.1. 초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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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코라치 컵 우승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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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사포르타 컵 우승 당시 모습.
1990년에 은퇴하자마자 친정팀인 올림피아 밀라노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임기 4년 동안 1990년에 세리에A 결승전 준우승, 1992년에 유로리그 4강에 진출, 1993년 코라치 컵 우승을 이룩하는 등 나름 양호한 성적으로 수완을 인정받아 1993년에 베네통 트레비소로 이적해 1995년 코파 이탈리아 및 유로피안 컵[2] 우승, 1997년 세리에A 우승도 이루어 상승 일로를 걸었다.
2.2.2. 덴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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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덴버 너기츠의 코치, 선수 인사부장으로 일하며 TNT 해설위원으로도 일하다가 단축시즌으로 치루어진 1998/99 시즌에 감독직에 승진했지만 팀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성과를 못 보고 한 시즌만에 쫓겨났다.
2.2.3. 피닉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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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에서 쫓겨난 1999년에 샌앤토니오 스퍼스의 스카우터로 일하다가 2000년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코치를 거쳐 다음해에 이탈리아로 돌아가 트레비소에서 한 시즌간 일한 뒤, 2002년에 피닉스 선즈의 코치로 들어와 프랭크 존슨 감독을 보좌하다 2003/04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던 2003년 12월 10일에 감독으로 승진했다.
런 앤 건 농구에 조예가 깊은 이탈리아 리그시절 동료 마크 이아바로니 코치의 보좌를 받은 댄토니의 피닉스는 첫 시즌에는 플옵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2004년 오프시즌에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FA로 풀린 '''스티브 내시'''[3] 가 영입되면서 피닉스 특유의 팀컬러인 공격농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쉬와 기존 멤버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숀 매리언,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레안드루 바르보사 등이 어우러진 댄토니의 피닉스는 2004-05 시즌에 '''리그 전체 승률 1위(62승 20패, 승률 .756)를 기록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NBA 역사상 이 정도로 공격에 치우친 팀[4] 이 1위의 성적을 거운 것은 처음이었던데다가 '''댄토니가 보여준 공격적인 팀운영과 전술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수준'''이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내쉬는 '''정규시즌 MVP'''에 올랐으며 댄토니 역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패하며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에는 전년보다는 주춤했지만 '''정규시즌 MVP를 2연패한 내쉬'''의 활약에 힘입어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5] 했다. 그리고 댄토니의 피닉스는 또다시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지만 이번엔 자신들이 4번시드로 밀어냈던 댈러스 매버릭스에 패하여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이듬해인 2006-07 시즌에는 61승 21패, 그 다음 시즌인 2007-08 시즌에도 55승 27패로 댄토니의 피닉스는 정규시즌에 최상위권의 성적을 계속 기록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시즌만큼의 힘을 쓰지 못했다. 스타더마이어 등 주축선수들의 부상이 계속 이어지는 악재 역시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6]
결국 2008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1승 4패로 탈락한 후 댄토니는 구단과 결별하고 닉스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다.[7] (피닉스 통산 5시즌, 정규시즌 253승 136패 승률 .650, 플레이오프 26승 25패 승률 .510)
2.2.4.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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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그는 2008년에 새로 부임한 도니 월시 단장이 주도한 팀 재건의 일환으로 뉴욕 닉스에 부임, 그는 '런 앤 건'을 닉스에 이식시키고자 뼈를 깎는 노력을 다했다. 이전까지 단장 겸 감독이었던 아이재아 토마스의 이도저도 아닌 답답한 농구에 등을 돌렸던 뉴욕의 팬들은 댄토니식 화끈한 공격 농구에 다시 경기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전 시즌보다 9승이 올라간 32승을 올렸으며, 그보다 더 고무적인 건 열광적이기로는 NBA 1등을 달리는 뉴욕의 팬들을 다시 불러모은 효과를 소득으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2009/10시즌. 댄토니 스타일의 농구가 빛을 발해 시즌 초반 9경기에서 6승 3패라는 호성적을 거뒀고, 이 과정에서 고액연봉자들이 좋은 활약을 보인 틈을 타 발빠르게 샐러리를 비워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알 해링턴, 잭 랜돌프, 자말 크로포드, 래리 휴즈 등의 고액연봉자들을 모두 팔아치우는데 성공했다. 댄토니 체제하에서 태업 논란까지 일으키며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된 스테판 마버리를 바이아웃으로 내보냈고, 급기야 먹튀의 대명사 제롬 제임스까지 처분해 버리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후 2010년 팀의 샐러리는 2007년에 비해 무려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월시가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던 일명 똥치우기를 해낸 것이다.
2010/11 시즌에 영입된 댄토니 감독의 제자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중심이 되면서 뉴욕의 성적은 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시즌중에 카멜로 앤서니와 천시 빌럽스를 트레이드 영입. 이 때 출혈이 상당히 크기는 했다만, 팬들은 아마레와 카멜로, 천시가 이끄는 공격 농구에 열광했다. 최종 성적은 42승 40패. 정확히 10년만에 찾아온 5할승률, 그리고 7년만에 찾아온 플레이오프였다. 비록 1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러나 월시 단장이 고문으로 승진한 2011/12 시즌에 천시 빌럽스를 드래프트로 팔고 타이슨 챈들러를 새로 사서 앤서니-챈들러-아마레 삼총사를 축으로 우승에 도전하고자 했으나, 빌럽스의 부재로 백코트가 약해져 성적이 부진해졌고, 결국 댄토니는 2012년 3월 14일에 사임했다.
2.2.5. 레이커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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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시즌 종료 후 전통의 명문 LA 레이커스는 다시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기존의 코비 브라이언트, 파우 가솔 콤비에 더해 드와이트 하워드와 스티브 내쉬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이른바 '판타스틱 4'라고 불린 강력한 선발라인업을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서로 시너지가 나지 않는 선수들의 플레이에 잇따른 부상 등의 문제가 겹쳐 1승 4패라는 부진한 출발을 끊게 된다.
이에 레이커스는 마이크 브라운 감독을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으로 댄토니를 영입하게 된다. 취임 당시 5승 5패[8] 인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진출 자체가 불투명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는 댄토니 취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아 레이커스의 승률은 5할 즈음에 그치고 있었다. 이에 코비 브라이언트는 시즌 말미에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긴 출장시간을 자청하다가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만다.[9][10]
하지만 코비의 분전[11] 에 힘입어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열리던 날 경쟁자인 유타 재즈가 멤피스 그리즐리스에게 패하고, 레이커스는 휴스턴 로켓츠에게 승리하면서 서부 7위(45승 37패)로 정규시즌을 마친 것.[12] 굴욕적으로 플옵에 탈락할 위기에서 댄토니가 팀을 간신히 건져낸 셈이다.
이후 진출한 1라운드 상대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당시 샌안이 리그 후반기에 부진한 상황이 있었기에 LA가 몇 경기 승리를 챙길 것이라 예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가볍게 스윕당하며 시즌 종료. 총 4경기 중 10점차 이내의 경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하워드가 휴스턴으로 떠나며 레이커스의 판타스틱 포는 허무하게 해체되고 만다.
다음 시즌인 2013-14시즌에는 부상에서 회복 중이던 코비가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76경기 결장)한 데다가 피닉스 시절에는 댄토니의 분신과도 같았던 내쉬마저 부상과 노쇠화에 시달리며(67경기 결장) 레이커스는 부진한 성적(27승 55패)으로 플레이오프에 여유있게 탈락하고 만다.[13] 시즌 종료 후 댄토니는 부진한 성적에 책임을 지며 사퇴했다.
2.2.6. 휴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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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서스 코치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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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츠 감독 취임 기자회견 당시의 모습.
레이커스에서 사임한 뒤, 야인 생활을 거쳐 2015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코치를 지냈고, 이후 다음해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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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시즌 성적표 : 55승 27패 승률 67.1%. 이 결과는 댄토니 부임전 기록인 41승41패 보다 높을 뿐만아니라 팀을 완전히 다른 색깔로 변모시켰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름값에 비해 그다지 좋은 시너지를 내지 못했던 하든, 하워드 빅2를 해체시키면서도 성적은 오히려 상승했고, 플옵 진출이 간당간당하던 휴스턴을 당당히 리그 전체 3위의 팀으로 올려놓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고, 이는 피닉스 시절에 이은 본인 커리어 2번째 감독상 수상이다.
17/18 시즌에는 사상 초유의 8대 1 트레이드로 NBA 넘버1 볼 핸들러인 크리스 폴을 영입해 본인의 팀 색깔을 한층 강화시키며, 정규시즌에서 서부 컨퍼런스 1위를 기록했다. 65승 17패. 그리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붙었으나 홈 어드벤티지에도 불구하고 3승 4패로 탈락하였다. 시리즈 통산 3-2로 앞서게 된 5차전 승리 직전 폴을 부상으로 잃은 것이 치명타였다.
한편, 올해의 감독상을 백투백으로 받나 싶었지만, NBA 사무국에서 올해의 감독상 후보로 브래드 스티븐스(보스턴 셀틱스), 드웨인 케이시(전 토론토 랩터스, 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퀸 스나이더(유타 재즈)를 발표하면서 수상이 불발되었다. 감독상은 케이시 감독이 수상했다.
19/20 시즌, 크리스 폴과 러셀 웨스트브룩을 맞바꾼 초대형 빅딜을 감행한 시즌. 댄토니 본인의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해이므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제임스 하든이 무시무시한 폼을 보여주며 시즌 초반 컨디션이 왔다갔다하는 웨스트브룩 이하 팀 선수들의 머리채를 잡고 홀로 팀을 캐리하고 있지만 어떠한 관리도 없이 하든의 몸과 마음을 갈아대고 있다. 그러나 하든의 폼이 천년만년 이어질리는 없었고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하든의 폼이 수직낙하하면서, 팀도 서부 컨퍼런스 상위시드 경쟁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댄토니는 하든과 반대로 폼이 계속 오르기 시작한 웨스트브룩을 지원할 수 있는 전술을 짜기 시작했고, 웨스트브룩이 16~17 MVP 시즌급 모습을 보여주면서 짭잘한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웨스트브룩의 대선전에 힘입어 휴스턴은 서부 컨퍼런스 상위시드 경쟁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고, 댄토니는 프런트의 지원 아래 아예 여기에 판돈을 모조리 때려넣기로 결심하고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주전 센터 클린트 카펠라를 애틀랜타로 넘기고 3&D 자원인 로버트 코빙턴을 데려와 극단적인 스몰 라인업으로 대권에 도전할 것을 선언했다.
스타팅 라인업이 모두 2m 이하 신장의 선수로 구성된 이 극단적인 스몰 라인업은, 공격시에 모든 선수가 3점슛 라인에 위치하면서 자연스레 상대방의 빅맨을 밖으로 당겨낸 이후 넓어진 페인트존을 웨스트브룩과 하든이 돌파하여 공략하는 것이 대전제로, 두 사람이 돌파할 때 3점 라인에 있던 상대팀 수비수가 페인트존으로 따라붙으면 킥아웃해서 외곽의 양궁부대에게 볼을 돌려서 외곽 지원을 하도록 시스템을 짜게 된다. 수비시에는 P.J. 터커가 센터로 뛰면서 헬프 디펜스에 능한 선수들을 주로 배치하여서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게 되는데, 졸지에 터커는 34살의 나이에 자신보다 15cm는 더 큰 빅맨들을 맡게 되는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카펠라의 출전시간을 줄여가면서 스몰 라인업을 준비하던 댄토니는 트레이드 데드라인 종료 이후 첫 경기인 서부 1위 레이커스전에서 본격적인 스몰 라인업을 꺼내들었고 완벽한 경기력으로 레이커스를 잡아내면서 혹사는 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감독이라는 호평아닌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작을 데뷔시켰다.
카펠라 이적과 초스몰라인업 가동 이후 첫 10경기에서 휴스턴은 7승 3패를 기록했다. 강호 보스턴과의 2경기를 모두 잡아냈고, 서부에서 순위경쟁을 벌이는 유타와는 1승 1패[14] 를 기록했다. 대체로 좋은 경기력이 나오는 경기가 많았지만 약한 리바운드로 인해 하위권 피닉스에게 36점 차로 털리고 최하위권 뉴욕에게 패배하는 등 예상했던 불안정성 역시 드러나고 있다.
정규시즌에서는 최종 4위를 기록했고 1라운드에서는 5번 시드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 맞붙어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시리즈를 따냈다.
이어진 2라운드에서는 르브론 제임스와 앤써니 데이비스가 버티는 서부 1위인 LA 레이커스를 맞이해서 1차전을 완벽히 잡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2차전 패배 후 소속 선수인 대뉴얼 하우스가 코로나 버블 지침을 위반하여[15] 경기에 뛰지 못했고 이로 인해 로테이션이 꼬이는 악재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팀은 악재와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4연패, 1승 4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시리즈 패배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대뉴얼 하우스가 주력 로테이션 선수이긴 했지만 핵심 선수급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번 패배는 로스터 활용이 좁고 주로 활용하는 선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댄토니 스타일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16]
2020년 시즌종료로 계약이 만료된 댄토니는 휴스턴과 결별을 통보했다. 곧 70살이 되는, 은퇴를 고려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도 현역 감독으로 더 활동하고 싶어했으며 필라델피아, 인디애나 등의 팀에서도 차기 감독으로 선임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감독으로는 임용되지 못하고 대신 피닉스 선즈 시절에 영광을 함께 했던 스티브 내쉬가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브루클린 네츠에 코치로 합류하게 되었다.
3. 감독 스타일
기본적으로 볼핸들러의 공격능력을 중시하고 2:2 픽앤롤 이후 파생되는 공격패턴이 많다. 댄토니 오펜스의 핵심은 픽앤롤의 위치가 중앙이라는 것. 원래 픽앤롤이라는 공격은 기본적으로 맨투맨을 스크린으로 한번 흔들어서 균열을 주는 것이고 빅맨의 수비수가 가드,빅맨 사이에서 밸런스를 약간 잃었을때 가드가 뒷공간으로 흘려 넣는 패스를 굴러가는 빅맨이 받아 득점하면서 마무리 짓는게 일반적이지만 현재 룰에선 이런 득점이 많이 나오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역방어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댄토니는 그런 픽앤롤의 위치를 중앙으로 옮김과 동시에 나머지 선수들을 있는대로 넓게 배치해서 코트를 넓힌다. 코너에 둘을 넣고 45도 (30도에 가까운)에 하나를 더 넣어서 아래 위로 세명, 그리고 앞뒤로 내쉬와 아마레, 슛거리가 제일 긴 선수와 골대 가까이에서 덩크로 가장 많은 득점을 하는 양 극단의 선수를 픽앤롤 시킴으로써 코트를 열십자로 나눈다. 저런 배치 때문에 픽앤롤이 시작되면 반대 사이드의 선수가 백업을 올수도 없었을뿐더러 앞선에 있는 선수가 옆으로 가서 롤하는 선수의 볼을 긁어내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쪽으로 킥아웃이 나가서 그 선수 마크맨이 와이드오픈이 되는 구조. 거기서 수비 로테이션이 구멍이 나고 오픈된 선수가 다시 패스해도 오픈이 나고, 헬프 안가면 뒷공간에서 덩크가 터지고 픽앤롤 뒤에 이뤄지는 횡패스도 매우 빠르다.
이 전술은 부분지역방어의 파탄을 꿰뚫어냈다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까지 본 바로 이 오펜스 자체를 묶는 수비는 단 하나뿐인데 그건 픽앤롤의 시작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고 댄토니의 오펜스를 많은 팀이 차용한 만큼 지금은 거의 모든 팀이 3점 라인 밖에서의 헷지와 빅맨의 헬프수비에 의존한다. 초기에는 대다수가 스위치를 허용하면서 빈틈을 일단 막아보고자 했으나 지금은 가드들이 그런 상황 자체에 적응해서 빅맨과 완전히 스위치되면 자유투넣듯 점퍼를 성공시켜버린다. 픽앤롤 자체를 무산시키지 않고선 어떤 식으로든 구멍이 난다는걸 모두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축구에서 공격수들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압박하듯 처음 협력수비가 이뤄지는 위치가 3점라인 근처에 형성되는 것. 더욱이 과거에 비해 선수이동이 잦아지면서 꽉 짜여진 패턴의 오펜스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댄토니 오펜스는 가진 위력에 비해 요구조건이 크지 않기에 선수배치 그 자체만으로 단기간에 대단한 화력을 보여준다.
댄토니 감독은 2000년대 중반 피닉스 선즈를 이끌고 대혁명을 일으켰다. 스몰볼과 3점슛, 스페이싱, 픽앤롤 등을 강조한 화끈한 공격농구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현대농구를 바꾼 이를 꼽을 때, 댄토니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대권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끝내 인사이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번번이 플레이오프에서 무너졌다. 정규리그에서는 통하고도 남았지만, 수비가 강조되고 느린 템포로 경기가 진행되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골스, 마이애미, 샌안 등 댄토니볼의 영향을 받은 팀들이 우승하는걸 지켜보는 동안 댄토니 본인은 한번도 우승을 해내지 못했다.
리그의 환경을 크게 변화시킨 명감독이지만 그만큼 동전의 양면처럼 단점도 명확하다. 첫 번째는 핵심선수들을 극단적으로 혹사시키는 점이 마이너스로 통한다. 플옵도 아닌 정규시즌부터 7~8인 로테이션을 돌리며 주요 자원들을 갈아넣기에, 댄토니의 팀은 기용자원의 한계를 드러내며 체력적으로도 언제든 방전될 위험을 갖고 있다. 벤치자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10인 이상은 물론 12~13인 로테이션도 안정적으로 운영할 줄 아는 포포비치, 부덴홀저[17] 등의 감독들과 대조되는 부분. 이 때문에 댄토니가 맡은 팀들은 PO에서 정규리그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거나,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완전치 못한 전력으로 PO에 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완전체 전력으로 임해도 정규리그에 비해서는 경기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제임스 하든인데, 매 시즌 36분 이상 뛰는 강철 체력의 하든이지만 정작 PO에서 활약이 정규리그때보다 다소 떨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역시 댄토니 감독의 주전 혹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다.
휴스턴 뿐만 아니라 이전 최고 전성기인 피닉스 선즈시절에도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포함해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매년 쏟아졌고, 특히 뉴욕 닉스와 LA 레이커스 시절에는 그의 커리어 평가가 극도로 악화된 최악의 시간이었다. 특히 레이커스 시절에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2012-13시즌 당시 무려 4경기 연속 풀타임을 출전 시킬 정도의 극단적인 혹사를 강행하다 아킬레스건 파열로 끝내 선수생명이 조기에 끝나버리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2013-14시즌을 끝으로 댄토니 감독 역시 레이커스에서 경질된다. 코비 역시 복귀 이후 예전만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물론, 전성기 시절보다 더욱 강렬해진 탐욕으로 인해 팬들의 뭇매를 맞다가 초라하게 은퇴하고 말았다.[18] 이런 혹사들로 인해 일부 국내 팬들은 '''댄성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부르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는 워낙에 공격 농구를 중시하는 신봉자인 만큼, 수비 전술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즉, 공, 수 밸런스가 부족하다는 것. 이런 농구 스타일이 정규리그에서는 통하면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지만, PO에서는 아무래도 수비력이 좋은 팀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이 상식. 이 때문에 PO에서 약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공, 수 밸런스가 부족한 팀의 특성상, PO 무대에서 강팀을 만나면 여지없이 고전하게 되는 것. 피닉스 시절 샌안토니오 스퍼스도 같은 맥락이다. 극단적인 공격농구 만으로는 당시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하던 샌안토니오와 그렉 포포비치 감독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평가가 많이 떨어졌다. 성과 자체는 확실하지만, 정작 커리어 내내 우승이 없고, 뚜렷한 한계로 인해 과연 한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4. 역대 감독 성적
5. 여담
2008년에 '유로리그 최고의 선수 50인'에 선정되었고, 2015년에 올림피아 밀라노 구단은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 결번시켰다.
형인 댄 댄토니는 소캐스티 고등학교 농구팀을 35년이나 지휘한 바 있으며, 이후 동생따라 피닉스 선즈, 닉스, 레이커스를 거쳐 2014년부터 모교인 마샬 대학교의 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2010년대에 빠른 페이스의 스몰라인업은 강팀들에게도 유행하게 되어 마이애미 히트를 위시로 샌안토니오 스퍼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등의 우승팀들도 자주 사용하는 전술이 되었다.
[1] 스폰서가 베네통인 탓에 흔히들 '베네통 트레비소' 또는 '베네통 바스켓'이라고 부른다.[2] 1998년에 라이문도 사포르타 전 레알 마드리드 부회장을 기리기 위해 '사포르타 컵'으로 개칭했다가 2002년에 사라짐.[3] 피닉스로 옮겨오기 전의 내쉬는 MVP급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슛이 정교하고 패스가 좋지만 떨어지는 수비 때문에 평가절하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닉스에서도 약한 수비력이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댄토니가 그의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전술을 맞춰줌으로써 MVP급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4] 해당시즌 경기당 '''득점 1위'''(!!!)에 경기당 '''실점도 1위'''(...)였다. 다만 리그에서 페이스(공수전환 속도)가 가장 빠른 팀이었음을 감안하면 실점에 비해 실제 수비력이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5] 당시 피닉스는 서부에서 3위의 승률이었지만 디비전 우승팀이었던 덕분에 승률 2위였던 댈러스를 밀어내고 2번시드를 차지했다. 그리고 댈러스는 또다른 디비전 우승팀 덴버에도 밀려 4번시드에 그쳤다. 하지만...[6] 소위 7인 로테이션에 선수 혹사가 심한 댄토니 본인의 감독 스타일이 내구성 약한 선수들과 겹쳐 계속된 부상을 불러왔다.[7] 계약기간이 남아있었음에도(D'Antoni had two years and nearly $9 million remaining on his contract with the Suns) 스스로 팀을 떠난 것. 출처 : https://www.espn.com/nba/news/story?id=3389987[8] 브라운 경질 후 감독대행인 버니 비커스태프 하에 4승 1패 기록[9] 원래부터 출장시간 관리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댄토니였지만 이 떄는 해도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부상 직전 6경기에서 코비의 출장시간은 47분 37초 - 47분 04초 - 42분 32초 - 47분 20초 - 41분 6초 - 48분 이며 부상당한 경기에서는 44분 54초 간 뛰다가 종료 3분 6초 전에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중 연장전으로 간 경기는 없다. 즉 코비는 거의 모든 시간을 코트 위에서 뛰었던 셈이며 부상당한 경기과 그 바로 전 경기는 교체조차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뛰었다는 것. NBA의 주전급 스타들의 평균 출장시간은 대략 36분 전후라는 걸 생각하면 무지막지한 혹사인 것이다.[10] 댄토니는 코비가 더 뛰고 싶어서 자청했다고 변명했지만 그런 선수를 다독이면서 출장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감독의 몫이다. 오히려 선수의 무리한 고집을 그대로 받아줬다면 직무유기가 되는 것일 뿐이다.[11] 마지막 불꽃을 태운 7경기 동안 팀은 6승 1패를 거뒀다.[12] 코비가 팀의 80번째 경기에서 부상당했던 덕분에 그의 공백이 마지막 2경기 정도로 적었던 덕분이기도 하다.[13] 댄토니 식 농구에는 역량이 뛰어난 볼핸들러가 필수인데 코비와 내쉬의 결장이 길어져 이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서 빈약한 수비만 공략당한 것.[14] 1패를 당한 경기가 유타에게 유리한 판정이 여럿 나와 논란이 된 경기여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15] 자신의 호텔 방으로 허가되지 않은 외부 여성을 들였다. 3,4차전을 결장한 뒤 5차전 직전에 버블에서 추방당했다. 팀 사기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특히 5차전)으로 보인다.[16]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2016년, 2019년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스테픈 커리와 케빈 듀란트라는 팀의 핵심선수를 부상으로 장기간 잃은 악재를 딛고 파이널까지 진출했었던 사례와 대비되는 결과이기도 하다.[17] 단, 부덴홀저 감독은 2019-20시즌 PO에서 5번 시드 마이애미 히트에게 무기력하게 2라운드에서 1승 4패로 패한 이후 평가가 떨어지긴 했다. 정규리그 운영은 리그에서 최고를 자랑하지만 PO무대에서 임기응변이 부족한 것. 그런데 임기응변과 전술적 다변화가 부족하다는 측면에서는 댄토니도 부덴홀저를 나무랄 처지가 못된다(...)[18] 마지막 시즌에는 성대한 은퇴투어를 다니는 등 화려하게 은퇴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요소고, 내적인 요소로 경기력 측면만 보면 20년 동안 원클럽맨이었던 NBA 아이콘, 명색이 조던 후계자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커리어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