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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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의 前 축구선수로, 포지션은 센터백(스위퍼, 리베로#s-5)이다. 은퇴 후 지도자를 거쳐 현재는 행정가로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외부 고문 직책을 맡고 있다.
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1996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한 역대 두 번째 수비수[1][2] 로 등극했으며, 현재까지 마지막 독일인 발롱도르 수상자로 기록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도르트문트의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되는 전설적인 인물[3] 이자, 동독 출신의 축구선수 중 가장 성공한 선수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통일되기 전 동독의 중심지역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마티아스 자머는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클럽 디나모 드레스덴의 유스팀에서 축구 커리어를 시작한다. 아버지 클라우스 자머는 SG 디나모 드레스덴의 감독이었는데, 1985년 성인팀에 데뷔한 자머는 뛰어난 기량으로 디나모 드레스덴을 이끌었고, 어린 시절부터 동독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 팀의 주축으로 성장해 나간 자머는 1989년, 1990년 연속으로 이 디나모 드레스덴을 동독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독 국가대표에서도 20경기 넘게 국가대표경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그의 커리어에 변화가 온 것은 1990년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 통일 독일의 초기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때문에 동독인들이 크게 고통받아야 했고 동독의 명문 SG 디나모 드레스덴도 분데스리가팀의 재력을 앞세운 공세에 한계를 느껴야 했다. 결국 자머는 통일 직전 UEFA컵 4강전에서 소속팀을 이기고 결승에 오른 분데스리가 VfB 슈투트가르트의 제의를 받고 슈투트가르트로 옮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즌 활약한 자머는 1990-91 시즌에 정식으로 동독 리그와 통합된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뒤, 이탈리아 명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다. 하지만 인터밀란에서의 1992-93시즌은 이탈리아 적응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이탈리아 생활을 포기하고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로 돌아온 자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팀에 몸 담게 된다. 당시 도르트문트를 지휘한 감독이 바로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이다. 히츠펠트의 리베로 시스템에 최적화된 그는 리베로로 전향하게 된다. 히츠펠트 감독이 부임하고 스테판 샤퓌자, 칼 하인츠 리들레 투톱과 떠오르는 신성 라스 릭켄이 공격을 지휘하는 도르트문트의 후방을 책임진 자머는 맹활약을 펼쳐 나가면서 강호이자 명문팀으로 거듭나게되며 결국 도르트문트는 1994-95시즌에 무려 32년만의 감격적인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1995-96 시즌에도 우승하면서 분데스리가 2연패를 달성했고, 이듬해 UEFA 유로 1996 우승까지 이끌며, 1996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잉글랜드의 간판 스타 앨런 시어러, 브라질의 호나우두까지 1표 차이로 제치면서, 독일 선수로는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발롱도르 위너가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6-97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파죽지세로 올라와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물리치고 결승에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와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유벤투스 FC와 만나 무릎이 좋지 못한 상태였지만 출장을 강행한 자머의 수비와 칼 하인츠 리들레, 라스 릭켄의 골로 3-1 승리, 팀의 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다.
그러나 우승 후에도 부상에 많이 시달려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했고 급격히 체력관리와 부상관리에 어려움을 겪은 자머는 1999년에 32세의 나이로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SG 디나모 드레스덴에서의 활약으로 동독 대표팀에 승선한 자머는 통일 전까지 동독 국가대표로 23경기 6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통일 후 첫 메이저 대회였던 UEFA 유로 1992에 출전하여 활약했지만 결승전에서 덴마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하지만 8강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 1:2 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하는 최악의 삽질로 녹슨 전차라는 오명을 뒤집어 관중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잃고 중심없이 휘청이고 있었다.
당시 자머는 에펜베르크의 파트너로 중앙미드필더로 뛰었으며 그때까지 팀의 핵심이었던 로타어 마테우스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로 대표팀과 멀어졌고 이렇게 중심없이 표류하던 전차군단을 다잡은 인물이 바로 서독 출신 주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중앙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묄러, 마테우스의 리베로 자리를 계승한 동독 출신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의 3인방이었다.
UEFA 유로 1996에서 이 3인방의 활약을 토대로, 독일은 2년전의 치욕을 뒤로한채 조별리그에서 크리스티안 치게, 안드레아스 묄러의 골로 체코를 2-0으로 가볍게 제압한데 이어 클린스만의 두 골, 자머의 한 골로 러시아를 3-0 으로 대파하는 등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고. 8강전에서는 떠오르던 강호인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위르겐 클린스만의 선제골, 자머가 결승골을 넣으며 돌풍을 잠재웠다. 이어진 4강에서 개최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클린스만이 결장한 상황에서도 자머, 묄러가 중심이 되어 승부차기 끝에 팀을 결승에 진출시켰고, 결승에서 마침내 체코를 2대1로 꺾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6년 만에, 그리고 통일 독일의 첫 우승을 차지한다. 거기에 자머는 이 대회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수비수로는 정말 드물게 유로 1996 대회 MVP를 차지하고[4][5] , 수비수로서는 사상 두 번째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자머는 30대로 접어들면서 무릎에 항상 부상을 달고 사는 유리몸이 되었고 이때문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부상으로 승선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자머가 빠진 공백을 메우지 못한 독일 수비진은 유고슬라비아에 2골을 내주는 등 불안한 모습을 노출시키다 기어이 크로아티아와의 8강전에서 경험 부족의 수비수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쓸데없는 반칙으로 퇴장당하며 이후 내리 3골을 내주며 탈락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자머는 다시는 독일 축구대표로 복귀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독일 축구는 UEFA 유로 2000까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6] 결국 자머의 조기 은퇴로 세대교체에 또다시 실패한 전차군단은 1994년 미국 월드컵때 들었던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다시 듣게 되었고,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한 UEFA 유로 2000에서는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별리그 최하위 탈락이라는 수모를 받게 된다.
3. 플레이 스타일
원래 미드필더 출신으로 세련된 테크닉과 넓은 시야를 겸비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할 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테우스의 국가대표 은퇴이후 리베로로 포지션을 옮긴 뒤에는 훌륭한 판단력을 살려서, 절묘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당대 최고의 리베로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4. 지도자 시절
1999년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99/00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강등위기에 처하자 리그 경기 5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급하게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이 소방수로 임명된 우도 라테크 감독과 함께 남은 5경기 동안 2승 2무 1패로 리그 11위를 기록, 팀을 1부리그에 잔류시켰고 시즌 종료 후 우도 라테크에게 감독직을 넘겨 받아 2000/01 시즌 도르트문트 감독으로 임명된다. 전 시즌 리그 11위권에 머물렀던 도르트문트를 곧바로 리그 3위로 끌어올렸으며 2001/02 시즌에는 얀 콜레르, 마르시우 아모로소, 에베르통의 삼각편대를 앞세워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FC 바이에른 뮌헨을 극적으로 따돌리고[7] 5시즌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UEFA 컵 에서는 준우승을 차지 한다. 2002/03시즌에는 초반 5경기에서 1승 4무를 기록하며 무패를 달렸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리그 중반 로스톡, 뉘렌베르크, 하노버 같은 반드시 잡아야 할 하위권팀들에게 무승부 등 발목을 잡히면서 리그 3위에 만족했야 했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리그 1,2위는 챔피언스 리그 직행, 3위는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부터 출발하였는데 2003/04시즌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에서 탈락하며 UEFA 컵으로 추락하였다. 재정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도르트문트 였기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여 고액의 TV 중계권료를 확보하는게 최우선이었지만 챔피언스 리그 진출실패로 무산되었고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며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2003/04시즌 초반 1군 스쿼드 중 11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할 판이었다. 당시 리그 초반 부상당한 선수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로소(무릎 부상), 얀 콜레르(폐렴), 오토 아도(십자인대), 프링스(십자인대), 콘세이상(금섬유 파열), 로시츠키(맹장 수술), 기 드멜(십자인대), 메첼더(아킬레스건), 페르난데스(발목 부상), 에바니우손(십자인대), 데데(무릎 부상)>
주전 11명중 4명이 십자인대, 2명이 무릎부상이라는 FM같은 게임이라도 뒷목을 잡을만한 부상 릴레이가 이어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분전하여 리그 6위로 끝마친다. 다만 팬들사이에서도 자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자머에게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경질된 지 얼마 안 되어 자머는 또 다른 친정팀인 Vfb 슈투트가르트의 펠릭스 마가트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슈투트가르트는 알렉산드르 흘렙, 케빈 쿠라니, 안드레아스 힌켈, 필립 람 같은 당시에는 어린 유망주들이 포진되어 마가트의 지도 아래 분데스리가의 돌풍을 이끈 팀이었는데 자머는 부임 이후 빠르게 팀을 수습하며 리그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자머의 베스트 11 위주의 기용 고집으로 다른 벤치 선수들과 불화를 겪으며 팀워크가 저해되었고 리그 막판에 부진을 겪어 리그 5위를 기록하여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머는 1년 만에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머의 후임으로 온 감독은 조반니 트라파토니.
그 이후 2006년 독일 축구 연맹의 기술 이사로 5년 계약을 맺으며 주로 11~18세 유소년 팀을 담당하며 유소년들에게 스포츠 과학으로 새롭게 체계를 만든 독일 축구 연맹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또한 요아힘 뢰프 감독이 이끄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술적인 부분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5. 행정가 시절
2012년 FC 바이에른 뮌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단순히 사무실 업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티아스 자머도 감독 출신인 만큼 훈련장과 홈&원정 경기 등 선수단과 항상 동행하면서 선수단을 체크하다 2016년 질병으로 인하여 사임을 하게 되었다.
2018년 4월, 자머는 같은 보루센 레전드인 제바스티안 켈과 함께 도르트문트의 보드진에 합류하면서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빌트지에 따르면 보루센의 새로운 보드진으로 합류하며 주로 회장인 한스-요아힘 바츠케와 함께 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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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록
6.1. 대회 기록
6.1.1. 선수
- VfB 슈투트가르트 (1990~1992)
- 분데스리가: 1991-92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3~1999)
- 분데스리가: 1994-95, 1995-96
- DFL-슈퍼컵: 1995, 1996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6-97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96
- US컵: 1993
6.1.2. 감독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0~2004)
- 분데스리가: 2001-02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96
- UEFA 유로 MVP: 1996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6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1996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90-91, 1994-95
- ESM 올해의 팀: 1994-95
- 옹즈 드 옹즈: 1996
7. 기타
독일의 레전드급 선수라면 다 한번씩은 거칠 FC 바이에른 뮌헨을 선수 시절 단 한번도 거치지 않은 안티 바이에른이'''었'''다. 특히 도르트문트 팬들에겐 레전드. 하지만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서 스포츠 디렉터 자격으로 바이에른 뮌헨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사장과 함께 앞장서서 도르트문트를 견제하며 비난하고 도르트문트의 선수 이적에 간섭하고 있다. 당연히 친정팀 팬들 입장에선 클럽의 전설적인 선수가 다른 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친정을 괴롭히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 지금은 다시 친정팀의 단장으로 복귀했으니 다행이지만...
[1] 역대 최초는 1972년 프란츠 베켄바워. 이후 2006년 파비오 칸나바로가 수상하면서 세 번째 수비수가 되었고, 그 이후로 수비수가 발롱도르를 수상한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 오히려 2006년 이후로 수비수가 수상 가능성은 커녕 포디움(최종 후보 3인)에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가뭄이 지속되다가, 2019년이 되어서야 버질 판데이크가 최종 2위를 차지하였다.[2] 1996년 당시 호나우두와 경합하여 한 표 차로 승리했다.[3] 선수 시절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및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감독으로서도 도르트문트에게 분데스리가 우승을 안겨준 인물이므로 사실상 모든 면에서 도르트문트 최고의 레전드임엔 틀림이 없다. [4] 현재까지 UEFA 유로에서 대회 MVP를 수비수가 차지한 것은 이 때의 자머가 유일하다.[5] 이 대회에서 보여준 자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 유로 1976에서의 프란츠 베켄바워와 2006 독일 월드컵의 파비오 칸나바로와 함께 단일 메이저대회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로 평가 받는다.[6] 이때문에 자머를 대신해 마테우스가 '''39'''살의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컴백했다.[7] 도르트문트의 승점이 70점, 레버쿠젠은 69점, 바이에른 뮌헨은 68점이었다. 최소 한경기만 무승부를 기록했어도 뒤집힐수도 있는 상황이었다.[8] 동독 축구리그[9] 동독 FA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