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준

 


潘濬
(? ~ 239)
1. 개요
2. 정사
3. 연의
4. 평가
4.1. 사서상의 평가
4.2. 일각의 음모론
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자는 승명(承明).
촉한관우 수하의 치중이었으나 후에 오나라의 태상이 되었다.

2. 정사


20대에 송충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왕찬 등에게 칭찬을 받아 형주일대에서 명성을 알렸다고 한다.이후 유표를 섬기면서 강하 지역의 종사가 되는데 부패한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법률을 재정비해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평판이 높았다고 한다. 유비를 섬길 때에는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으나, 계한보신찬 진수의 주석에 따르면 관우와는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이후 형주를 여몽에게 빼앗겼을 때 다른 촉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항복하지만 반준은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손권은 직접 반준의 집을 찾아가나 그래도 반준은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손권은 반준이 매달린 침대를 끌어내었고 반준은 베개를 적시며 통곡하고 있었다. 손권이 이에 직접 반준의 자를 부르며 그를 위로했고 그 배려에 결국 반준은 귀순을 결의한다.
'''미방이나 사인과는 달리 바로 항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의에서의 황충, 황권처럼 자신이 섬겼던 옛 주인을 위해서 절의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인지 항장이란 이유로 미방을 대차게 깠던 우번이 반준에게도 똑같이 대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반준이 항복한 다음 해에 번주가 무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함께 한 때 동료였던 습진 또한 이에 반응해 번주와 힘을 합쳐 이릉으로 향하는 유비군에 호응한다. 현지 관리가 "1만 명을 맡겨서 독을 파견해야 한다" 손권에게 부탁했지만, 손권은 들어주지않고 반준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반준은,

병사 5천 명만 있으면 생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번주는 남양의 옛 백성으로 말씨가 능숙하고 농담 같은 것은 잘합니다만, 실은 변론의 재능은 없습니다. 번주는 옛날에 주의 사람들을 식사에 불렀던 적이 있었는데, 한낮이 되어서도 식사를 끝내지 않고, 10여 명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1]

손권은 웃으며 5천 명을 주니 반준은 출격하여 번주를 쳐부수고 번주를 처형했다.
그리고 반준은 그 김에 보즐과 힘을 합쳐 습진을 죽인다.
그후 예현이 죽자 예현의 병사를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되고 분위장군, 상천전후에 임명되고 태상으로 봉해진다. 오계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결탁했을 때, 손권은 반준에게 부절을 주어 각 군대를 지휘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그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으며, 법령을 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는 대략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각 이민족들은 쇠약해졌고 모든 곳이 안정되었다.
태상으로 있을 때 반준은 군주에게 아낌없이 쓴소리하는 전형적인 충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배송지주 강표전에서 이르길 손권이 자주 꿩을 사냥하자 반준이 손권에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해, 만기(萬機)의 직무가 많고, 꿩 사냥은 급한 것이 아니며,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 끝이 파괴되어도, 모두 해가 될 수 있으니, 특별히 신을 위해서라도 이를 그치고 버리시길 바라옵니다.

라고 간언을 하자 반준이 나간뒤 손권이 꿩의 깃으로 꾸민 일산이 본래 있던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뜨리고 손권은 꿩을 사냥하지 않았다.
위나라에서 오나라로 귀순한 은번이라는 사람이 있어 말재주가 뛰어나 자연히 주거, 전종, 학보 등이 은번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면서 가까이했다. 반준의 아들인 반저도 은번과 교류하면서 그에게 음식 등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나, 이를 알게 된 반준이 화를 내면서 편지를 통해 아들을 몹시 꾸짖는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반준을 괴이하게 여기였으나, 후에 은번이 위나라에서 보낸 첩자임이 드러나고 은번이 처형되자 반준의 통찰력을 신복하게 된다. 이러하듯 반준은 유표, 유비를 섬긴 항장 출신으로써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촉의 대장군 장완이 매형[2]이라 의심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일례로 보즐의 식객인 무릉태수 위정이 손권에게 반준이 밀사를 장완에게 보내어 연락을 취하면서 촉나라와 내통해 투항한다는 이야기를 손권에게 하자 손권이 벌컥 화를 내면서

승명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결코 아니다.

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으며, 이때 손권이 위정의 상소문을 반준에게 보여주고 위정은 이로 인한 모함죄로 관직에서 파직당한다.
손권이 교사 여일을 총애할 때, 여일은 손권의 비호만을 믿고 오의 수많은 대신들을 모함하는 등 날뛰었다. 심지어는 승상 고옹이나 상대장군 육손마저 여일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당에[3] 반준은 손권에게 여일의 작태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하지만 이미 손권은 간언으로 정신차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닐 정도로 심각하게 맛이 가 있었다'''.
결국 반준은 극약처방으로 스스로 여일을 살해하고 살인범의 죄를 뒤집어쓸 생각으로 여일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여일이 미리 눈치채고 병가를 쓴 탓에 유야무야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준은 날마다 여일의 죄상을 손권에게 폭로했고 결국 정신을 차린 손권은 여일을 처형하고 반준을 칭찬한다.
그의 가족관계로 아내는 장완의 여동생이고 반저와 반비라는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다. 반준이 239년 사망하자 장남 반저(潘翥)[4]가 뒤를 이었지만 요절해 동생 반비가 뒤를 이었다. 반비는 손권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며 딸은 손권의 차남 손려의 부인이 되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의 첫 등장은 관우의 양번 출진 당시 관우의 수하였던 왕보의 평가로는 반준을 "시기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이익을 탐해 큰 일을 맡길 수 없다"며, 반준에게 빈 형주를 맡기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관우는 "상관없다"고 일축하지만 결국 왕보의 예언대로 반준은 형주 공방전에서 여몽이 형주를 빼앗자마자 역사상 기록과는 다르게 곧바로 냅다 항복했다.
다른 항장들과는 달리 유독 반준의 취급이 안 좋다. 이는 상대가 관우였던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적 후 이전 소속 세력에 칼을 들이댔다는 기록이 확실히 남은 게 반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평가



4.1. 사서상의 평가


진수는 반준을 두고 "사사로운 이익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대사를 논했다."고 평했다. 거기에 육개와 더불어 "모두 절개가 빛났으며 대장부의 기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반면 촉 입장에서 인물평을 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형주가 오로 넘어갈 때 같이 항복한 인물들인 미방, 사인, 학보와 더불어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깠다. 그런데, 덤으로 이들의 오로 항복한 것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세세한 차이가 있다. 사인의 경우, '叛' (가장 적극적인 배반을 뜻함), 학보의 경우, '譎' (속았음을 뜻함), 반준의 경우엔 '入' (단순히 들어갔다는 뜻)으로 기록되었다. 아무래도 같은 배신에도 격이 다르게 인식되었던 듯하다. 배반자라도 똑같지는 않다 - 계한보신찬의 사인, 학보, 반준의 배반

4.2. 일각의 음모론


소설 삼국지 마행처우역거나 아시아 뉴스 통신에서 연재되었던 박상진의 삼국지 탐구에서 제기된 설이다.[5]
보통 다른 항장들의 경우 이제야 올바른 주군을 만났다는 포장이 가능한 상태에서 항복하거나, 아예 세력이 소멸해서 절개나 충의를 지킬 자세력이 없거나, 어쩔 수 없이 항복하지만 이전 세력에서 입은 은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식인데, 반준은 형주공방전때 오에 투항해 이릉대전때 형주내 촉한 호응 세력을 박살냈다.[6]
여기에 미방도 엄청 까던 독설가 우번이 시간이 늦었을 뿐 결국 말 몇마디 들었다고 마음 바꿔 귀순한 반준을 지조없다고 비판 안 한 건 확실히 괴이하기 그지 없다. 손권이 반준을 위로했다고는 하는데 결국 말 몇마디 한 게 전부다. 항복한 장수들을 위로하는 거야 사실 다른 장수들도 다 마찬가지며 습진#s-2이 다시 유비에게 돌아섰던 것처럼, 반준도 기회가 있었지만 유비에게 안 돌아갔다. 심지어는 그냥 오나라에 남아서 유비군 조질 계략을 적극적으로 건의한 것도 황권이나 서서하고 비교해보면 그들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부분인 것이다.
이렇듯, 반준의 촉과 오에서의 확달라진 모습은 뭔가 개운치 못한 점이 많다. 분명 내정을 맡으라고 임무를 쥐어준 건 유비건만, 관우 때문에 할 도리를 안 한 건 좀 의아하지 않나 싶은 부분이다. 꼭 관우가 문제여서 반준이 활약을 못한 거라 보기도 뭣 한 게, 사적으로는 몰라도 공적으로 관우의 실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적인 문제일 텐데 반준은 사적 감정으로 맡은 직분 공적인 일은 다 하지 않고 태업했단 얘기가 되기까지 한다. 반준이 능력이 없었던 인물도 아니건만.
또 더해서, 반준이 손권 앞에서 눈물을 보인지 얼마 안 되어서 한때 아군이었던 동료들을 적으로서 물리친 것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다. 주를 제대로 못지켜서 빼앗겼고 그래서 눈물까지 흘렸던 인물이 마치 오나라의 오랜 중신인 것처럼 그들을 비웃고[7] 전공을 바로 세웠다는 것도 뭔가 석연치 않다. 당연히 반준이 자숙하는 게 맞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에 반해 미방은 우번에게 수모까지 당한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렇게 보면 반준도 실로 석연치 않은 인물이다. 같은 처지인 요화와 비교되고 문빙과도 비교된다.[8]
또 여러군데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방이 재주가 없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군을 통째로 갖다 바친 자임에도 소리소문 없이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반준은 반대로 승승장구한 거 보면 너무 대조적이다. 관우야 반준에게 사적으로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비가 잘못한 건 없는데, 손권에게 말 몇마디 들었다고 오나라에 항복한 건 석연치 않은 부분. 게다가 관우가 군량 때문에 고생했던 거 생각해 보면 반준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당시 반준은 치중 담당이었으니까. 사실 이 시점에서 유비한테 돌아가면 자기 죄를 무는 게 두려워[9] 바로 항복하면 체면이 안 사니까 연기를 좀 하고 항복한 거던가, 아니면 마음 먹고 언플했을 가능성도 있다. 손권이야 어차피 지가 반준을 데려갈 거 반준의 인성은 못 믿어도 능력은 있으니 반준을 자기 밑에서만 굴리면 반준에게 배신당할 염려 없고(사실 이제는 받아줄 나라도 더 이상 없고), 여기서 직접 말 몇마디 해서 데려오면 자기가 배포 크다고 언플할 껀수도 하나 생기는 것이니 반준의 오나라 귀순은 손권과 반준이 실상 서로 짝짝꿍이 잘 맞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반준이 순수하게 유비에게 충성했지만 면목이 없어서 두문불출했다고 볼 수도 있는 사한이긴 하다. 어쨌거나 소설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에서 추측한 것과 달리 미방과 비교하면 반준이 정말로 오나라에 대놓고 내통하려 했다거나 항복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형주 함락 당시 반준은 유비에게 충성했건 안 했던 결국엔 손권이라는 인물에 자신의 미래를 모두 걸어보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여일 사건의 태도에서 반준이 보여준 바를 생각해 보면, 반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욱 철저하게 손권의 직신으로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분명 유비에게도 충성했지만 손권에게 한번 항복하게 된 거 확실하게 하자는 의미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아예 이해 못할 태도는 아니다. 사실 여일은 반준과 똑같이 오로지 손권의 총애로서만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며 워낙 오나라의 중심이 된 호족들의 어그로를 끌었던 상태라, 반준이 여일을 죽인다고 해도 그를 비호할 사람들이 많았다. 반준 입장에선 손권이 지나치게 여일을 총애하여 이런식으로 손권에게 어그로가 끌리는 상황은 오로지 손권이라는 인물에게 연줄을 댄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며,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충성을 더욱 확실히 증명하려는 도박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장완과 인척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당했던 전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이 항목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 어떤 시대의 역사학자도 주장한 적이 없다는 맹점'''이 있다.[10]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은 주장인 것이 흠이다.

5.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정치력이 80대라서 내정용으로 써먹기 좋다. 단 배신자라 매력은 낮다. 의리는 낮음과 보통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연의의 모습이 더 반영된 느낌. 삼국지 1편과 4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3에서는 배신자 라는 점 때문인지 모든 스탯이 쓰레기인 양송급의 d급 잡관으로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3/무력 16/지력 68/정치력 85. 조영, 혼란을 가지고 있지만 내정송으로 쓰는 게 효율이 좋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27/지력 67/정치력 88/매력 21에 특기 4개가 모두 내정계(상업, 기술, 보수, 치안). 전투에 내보내긴 무리고, 상업 셔틀로 쓰다 후방에 태수로나 임명하자.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18/지력 67/정치력 82/매력 21로, 삼국지 10 때보다 대폭 칼질을 당했으며 특기도 없다. 그래도 김선등의 약소 세력은 정치력을 봐서라도 등용할 수밖에 없다. 의리가 낮으니 충성도 관리는 잘해주자.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18/지력 68/정치력 82로, 삼국지 11 때의 능력치 보다 지력이 1 상승했다. 그리고 전법은 기동력 약화이지만 효율성이 제로이므로 내정형 문관으로 굴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여유가 있다면 상재나 경작을 붙여서 효율을 더해주자. 어째선지 오로침공전에 '''촉나라''' 소속으로 나온다. 반면 포삼랑오나라 소속이다. 전작에서는 다소 찌질한 느낌이 들게 나왔는데, 이번작부터는 갑자기 외모에 버프를 먹었다. 전체적으로 일러스트를 보면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다.
삼국지 13에서도 전작과 같은 능력치이며 특기는 교섭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교섭으로 전법은 공격지휘다. 오로침공전에서 여전히 '''촉나라''' 소속으로 나온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1, 무력 18, 지력 67, 정치 84, 매력 21이며 전작에 비해서 정치수치가 2 상승해서 84로 소폭상향 되었고 대신 지력이 67로 1 하락했다 부여받은 개성은 동지, 진흥, 법률, 소심이다. 주의는 명리, 정책은 지역진흥 Lv 4, 진형은 학익, 전법은 업화, 저지, 구축, 친애무장은 손려, 송충, 왕찬, 장완, 혐오무장은 여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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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부사인이 오나라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투항했노라고 이름만 언급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관우 하에서의 무력했던 시절과 오에서의 명신 시절을 반영해서인지 약할 때는 한없이 약하고 강할 때는 무지막지 강하다는 이토 카이지로 패러디되었다. 제갈근이 병사하는 낙곡 전투(1)에사 고옹뭔가 험한 꼴 당하기 전에 탈출하는 기분 안 들어요?라는 대사를 하는데 반준, 제갈근, 감택에게도 적용된다(...).
조조가 주인공임에도 관우의 죽음으로 대미를 장식한 창천항로에서도 등장한다. 맥성에서 후퇴나 오와의 전쟁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관우군에 항복을 권고하는 사신으로 온다. 손권의 항복 권고문을 낭독하는 중 관우 휘하 장병들에 분노를 사며 관평은 반준을 죽이려고 까지 한다. 그러나 관우는 분노하는 관평에게 "너의 담력은 저 사내만도 못하느냐."라고 말하고 조루는 낭독 이후 눈물로 권고를 제의하는 반준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삼국지 소설 '마행처우역거'에서는 관우와 사이가 나빴으며, 우번이 미방과 달리 반준은 비난하지 않았고, 또한 소리소문없이 사서에서 자취를 감춘 미방과 달리 승진을 반복하며 탄탄대로를 걸은 것을 근거로 내통의 실세는 반준이고 미방은 곁다리였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1] 즉, 아침식사때 시작한 설전을 한낮까지 질질 끄는 머리 나쁜 놈이니 전쟁도 못할 거라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전쟁 정치 잘하면 상인과 간신배도 잘 하겠네?'와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변론은 결코 말 잘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백마비마론을 설파한 명가나 합종연횡을 주장하는 종횡가도 있었지만, 조금 어긋난 방향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들을 포함하고서도 근본적으로 학문적 담론은 상인과 간신배의 말솜씨와는 궤가 다르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변론에서 모범 답안은 주제에 대해 적절한 논리를 세운 후, 경전이나 성현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찾고, 옛 역사에서 성공한 예시나 잘못된 예시를 들어 근거를 보강하고, 현실에서 적절한 인물이나 방책을 조합시키는 것으로 변론을 마무리한다. 물론 저 모든 것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긴 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의 논술과 비슷한데, 우리 주변에서 말 잘하는 인물들이 논술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현실 정치는 인물 감식안이라던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또 달라서 변론만 잘하지 정치는 못하는 인물도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어쨌든 현실 정치는 잘하는데 변론 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그 비율이 적다. 형이상학적인 논쟁일 수도 있으나 서양과 달리 중국은 형이상학적 논쟁의 비중이 적고, 현학이 태동하는 시기긴 했지만 화북의 얘기이고, 특히 반준 발언의 맥락상 형이상학일 가능성은 적다. 결국 번주는 시골 사람들 모아 놓고 한 가지의 시사토론조차 질질 끌다가 결론을 못 내는 정도이니 아예 가치가 없는 인물이란 얘기다.[2] 장완의 여동생이 반준의 아내였다.[3] 육손은 당시 무창에 없었기에 손을 쓸 수 없었으며, 이때 이미 육손은 손권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육손 항목 참고.[4] 자는 문룡(文龍).[5] 단 이 기고문에서도 저자가 심증만 있을 뿐이라고 하고 있다.[6] 위 항장 출신으로 촉에 끝까지 충성한 왕평 같이 사람도 있지만, 왕평은 본디 익주 출신인 데다가 조조군에 사관한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고, 파서 이민족왕 두호와 부호가 조조에게 투항할때 따라 간거라 자기 의지가 크게 개입한 것도 아니었으며, 반준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은 적도 없다. 게다가 지방호족 반준과 달리 파서 이민족들과 섞여 살던 고아에, 학맥은 고사하고 글도 모르는 하급군관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자기 밑에 왕평이란 놈이 있는지도 몰랐을터. 오히려 이런 인물을 보자마자 떡하니 비장군, 아문장의 직위를 내려 차세대 무장으로 키우려한 유비의 안목이 더 기이한 것.[7] 보면 번주를 대놓고 비웃는 장면이 나오고 오나라에 저항한 다른 동료들 상대로도 전혀 애석의 념을 보이지 않는데, 이를 보면 반준이 관우뿐 아니라 촉 시절 동료들을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멸시하거나 거리낌없이 공격할 정도로 그들을 그다지 기꺼워 하지 않았으며 무시했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8] 다만 반준은 어느 세력의 중신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그 지역 호족으로서의 입장이 확고하다고 봐야 한다는 시선도 있다. 형주에 해가 된다면 관우, 유비도 과감하게 버릴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것.[9] 그러나 요화의 예를 생각하면 유비가 이를 용서했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했다. 미방, 사인, 반준 가운데는 가장 책임이 적었다고 보이니까.[10] 위나라 최후의 충신으로 알려진 사마부에 대해서도 그의 충성의 진의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