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공방전

 


1. 개요
2. 형주의 중요성
2.1. 형주 공방전의 단계
3. 형주 정복
3.1. 형주 대여의 경과
3.1.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
3.1.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
3.1.2.1. 남군(강릉)
3.1.2.2. 무릉
3.1.2.3. 장사
3.1.2.4. 강하
3.1.2.5. 계양
3.1.2.6. 영릉
3.1.2.7. 양양
3.1.3. 결론
3.2.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
3.2.1. 조익의 이십이사차기의 주장
3.2.2. 리둥팡의 주장
3.3. 번외: 손권의 주유 견제?
3.3.1. 반론
3.4. 연의에서의 묘사
4. 익양대치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
4.2. 청니 대치
4.3. 유비의 서천 점령
4.4. 익양의 대치와 악화되는 결속
4.5. 215년, 익양대치 - 노숙제 대 관우뢰
4.6. 노필의 의견과 익양대치
4.7. 결말
4.8. 연의에서의 모습
5. 번성 공방전
5.1. 발단
5.2. 관우, 천하를 진동시키다
5.2.1. 번성 공방전과 7군의 궤멸
5.2.2. 조조, 천도(遷都)를 말하다
5.3. 바뀌는 전세
5.3.1. 서황#s-1의 용맹
5.3.2. 손권의 칭번과 회남전선
5.3.3. 여몽의 계략
5.3.3.1. 오나라의 준비
5.3.3.2. 한편 그동안 관우는
5.3.3.3. 여몽의 형주 점령
5.3.3.4. 여몽의 심리전
5.3.3.5. 육손의 유비 잔당 처리와 촉의 군사활동
5.3.4. 관우, 최후를 맞다.
5.4. 결과
5.5. 관우의 패인
5.6. 연의에서의 묘사


1. 개요


삼국시대에 형주를 두고 위촉오 삼국이 벌인 삼파전 양상의 전쟁.
당시 조조관우의 북진과 7로군 궤멸에 '''진심으로''' 천도까지 논의할 수준이었으며, 이때 손권은 가만히 유비를 지켜보다가는 주도권까지 빼앗기는 상황, 거기에 유비는 관우의 북진이 성공하게 된다면 한 번에 주도권을 잡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때문에 아직 익주와 한중 쪽을 수습 중이던 촉을 제외한 삼국이 각자 주력군까지 내보내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것이다.
적벽대전 이후부터 관우가 죽은 219년까지 형주에서 관우를 비롯한 유비군과, 조인을 필두로 한 조조군 그리고 손권군이 격돌한 형주의 정벌과정, 익양대치, 관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특별한 명칭은 없으나 이 문서에선 편의상 '형주 공방전'으로 명명한다. 이 전투에서 촉이 패배함에 따라 제갈량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촉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 사실상 촉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역이라 봐도 무방하다.

2. 형주의 중요성


[image]
형주(荆州)는 후베이성 남쪽 후난성과 경계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우한(武汉), 서쪽으로 싼샤, 북쪽으로 징먼과 접한다. 양쯔강 유역의 평야지대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며 호수와 강이 밀집된 지역이다.
중국의 중앙부에 위치해서 서의 익주, 동의 양주, 북의 사주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로 유비, 조조, 손권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닌 땅이었다. 또한 위가 차지하고 있던 이북 지역을 제외하면 그나마 개발이 잘 되어있던 땅이었다.[1]
제갈량원대한 계획의 기본적인 밑그림은 형주와 익주를 얻어 양쪽에서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손권은 강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유표#s-1 때부터 호시탐탐 강하 등을 노렸을 만큼 오랜 시간 탐내온 땅이었다. (합비에서 번번이 진출이 막히자 그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게 된다.) 위의 입장에선 형주를 손아귀에 넣게 되면 유비와 손권의 명줄을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조조 생애 그 세력이 다른 제후들에 비해 가장 압도적이었던 때가 적벽대전 직전의 형주를 막 손에 넣었을 당시였다.
상업의 요충지였던 데다가 영토의 넓이만으로 따져도 한반도 전체를 웃도는 넓이다. 또한 형주를 제외하고 보면 유비는 익주만을, 손권은 양주 각각 한 주만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니 둘 모두에게 형주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땅이었다.[2]

2.1. 형주 공방전의 단계


'형주를 빌리는 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사건으로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고, 노숙은 손권에게 남군을 빌려 유비를 주라고 권유하는데 성공해 형남 4군을 나눠 형주를 감독하게 한 사건이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사람을 파견하여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삼군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군사를 보내어 삼군을 함락시켰는데, 당시 조조가 한중을 공격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유비는 익주를 잃을것을 걱정했고, 사신를 보내 손권에게 화합을 구하고, 상수를 그어 형주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후세에는 "형주를 빌린다"는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 배경
적벽대전 후, 손권은 유비와 연맹을 결성하여 승승장구하여, 1년에 걸쳐 조인군을 강릉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조조군은 남양군 및 양양으로 퇴각한다. 손유 연합군은 형주 자사부의 나머지 토지를 탈취하였다. 그중 유비가 형남 4군을 공략했다. 전후 동오대도독 주유는 형주치소 남군의 태수(太守)로, 유기가 죽은 후 유비가 형주목(荆州牧)이 되었고[3], 주유는 강남의 지역을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비는 장강 남안의 유강구에 진을 치고 공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손권이 유비를 두려워했고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우호를 다졌다.
2. 땅을 빌리다
후에 유비는 주유가 그에게 준 땅이 적어서, 무리를을 수용하기에 부족하였기에 친히 경구에 가서 손권을 만나, 자신에게 관리를 맡기고 형주를 감독할 것을 청구하였다. 주유는 상서를 올려 반대하고 유비의 가택연금을 건의하였다. 이에 여범도 찬성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으로 손권은 형주를 빌려주지도 않았고 유비를 가택연금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210년) 주유가 병사하고 노숙이 대독을 계승하자 노숙은 남군을 빌려 유비를 준다면, 형남 4군을 다르게 나누어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確認他分得荊南四郡), 형주를 전권하도록 하는 건 조조를 상대로 적을 세우는 것과 같다. 오와 강회 간 조조와 대치하는 동안 동오의 압력도 분산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고 손권을 납득시켰다. 이로써 손유연맹은 공고해졌다.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붓까지 땅에 떨어뜨렸다.
(이전에) 주유, 감녕은 손권에게 익주를 공격하라고 권했다.손권이 유비에게 공동 진출을 요청하자 유비는 혼자서 촉을 취하려 하여 종실 유장을 차마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쌍방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3. 형주토벌
건안 20년(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해 유비에게 장사, 영릉, 계양 삼군을 유비를 구하게 했다. 유비가 말하길 내가 "량주를 얻은 뒤에 형주를 꼭 드리겠소" 손권은 이를 유비가 거짓말로 시간끄는 일이라고 보고 장사, 영릉, 계양 삼군에 장리를 임명했지만 관우에 의해 추방당했다. 손권이 크게 노하여 여몽이 이만 군마를 이끌고 삼군을 탈취하였다.
여몽이 3군을 공격한 후, 노숙과 관우가 회담하고, 회담에서 관우는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선 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까?"라고 반박했다. 노숙은 우리가 성심껏 자본과 땅을 빌려 준 것은, 너희의 병사들이 장판에서 패하고 먼 곳에서 와도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관우를 꾸짖었다. 이제 너희는 익주를 받아서 갚을 생각도 없고 우리는 지금 삼군만 구하고 있는데 돌려줄 생각도 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었다. 아직 노숙이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땅은 인덕이 있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말참견을 하고, 노숙은 악을 쓰며 호통을 치고, 말과 얼굴색이 모두 엄했다. 관우는 칼을 들고 일어나 "이것은 나라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눈짓으로 그에게 떠나라고 했다.
4. 상수의 맹약
당시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익주를 잃을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 손권에게 화해를 구했다.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하고 유비와 쌍방이 화해하고,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였다. 강하, 계양, 장사 이동은 손권, 남군, 영릉, 무릉 이서는 유비에 속한다.
5. 후속 쟁탈
219년 관우가 북쪽 번성을 공격했다, 손권의 대도독 여몽이 틈을 타 '백의도강'으로 기습해 남군, 영릉, 무릉 3군을 차지했다. 221년, 유손 쌍방은 이릉대전를 벌였다. 손권이 다시 이겼고 그 후로 쌍방은 다시 대전이 없었다.

3. 형주 정복



3.1. 형주 대여의 경과


  • 이 항목은 형주를 대여했다는 의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대의 의견을 보고 싶다면 아래 항목을 봐주세요.
208년, 유표#s-1가 죽고 적벽에서 조조가 대패한 뒤, 손권은 주유정보를 시켜 조인을 필두로 서황, 우금#s-2, 진교 등이 지키고 있던 강릉을 공격하게 한다. 한편 유비 역시 주유와 함께 조조를 추격하면서 강릉에 도달하였고(선주전) 주유와 함께 강릉을 포위한다.(이통전) 여기서 장비+1천으로 주유의 2천 병사와 교환하여 장비도 공격에 참여(오록), 이렇게 위와 촉의 기록에선 유비군이 강릉공략에 참여한 것으로 나오며 산양공재기 등 몇몇 기록에서는 유비가 주공이라는 기록까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유비의 관직이다. 유비의 당시 관직은 '''영예주목 좌장군 의성정후'''[4] 로 심지어 오의 군주인 손권은 당시에 기껏해야 잡호장군 수준인 토로장군, 회계태수에 불과했다. 즉, 당시 진격하던 손유연합군에서 유비는 명목상으로는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총사나 다름이 없고 주유를 비롯한 손권 측의 어떤 장수들보다 명목상 절대 우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거느리고 있던 군세도 손권 측이 간신히 동원한 군세에 그리 뒤지지 않고 이미 중원에서도 명성이 널리 알려진 관우와 장비 같은 명장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남군공방전에서 유비의 발언권이나 공적 우선권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5]
어쨌거나 주유는 우선 감녕을 시켜 이릉을 공격하게 하고 이에 놀란 익주를 지키던 습숙이 주유에게 항복한다. 악진전과 문빙전의 기록을 이때로 본다면[6] 관우는 악진, 문빙에 의해 패퇴하였고 이후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현과 상양현의 장이 악진에게 토벌되어 공격받아 격파[7], 병참이 문빙에게 불탔으며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형주에 있던 조조군 장수들의 목적은 관우, 더 나아가 유비와 주유의 남군 포위망을 뚫으려는 의도였는데, 관우는 조조군의 이름난 장수들을 혼자서 상대로 탱킹을 하여 자칫하면 앞뒤로 고립되어 낭패를 볼 수 있던 위기상황을 버텨내 귀환했다. 훗날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통째로 진수한 건 단지 신뢰하는 2인자가 아닌 혼자서 힘든 상황에도 고군분투하여 버텨내는 모습을 높게 평가해서다.[8]
하지만 곧이어 이릉에서 1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던 감녕은 조인이 보낸 5천 명의 군사한테 포위당한다. 여기서 다른 장수들은 모두 군사를 나누어 본진 방어와 감녕 구출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여몽능통이 본진을 지키면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그에게 지키게 하고 자신과 주유는 이릉을 구원하러가면 될 것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5백의 군사로 험한 길을 막으면 패주하는 적의 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주유는 이 여몽의 계책을 그대로 따른다.
과연 일은 여몽의 예상대로 되어 이릉에서 조인을 격파하고 말 3백 필을 얻는 등 기세를 올리고 조인도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나 유비 측에서 출전한 관우가 강릉 북쪽에 퇴로를 차단하자 이통이 군대를 직접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주유와 유비의 포위망으로 진입하는 용력에 의해 격파됨에 따라 조인군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9]
이처럼 상황은 조인군에게 썩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진교가 천인이라고 놀랄 만한 조인의 용력 등에 힘입어 강릉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오나라 내부에서는 정보와 주유가 서로 좌우대독으로 임명되어 비록 모든 일은 주유가 처리했으나 정보는 스스로를 노장이라 생각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주유는 이 와중에 오른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고 치명적인 부상마저 입는다는 것.
한편 208년 12월, 그동안 유비는 유표#s-1의 장자인 유기를 형주자사(荊州刺史)으로 상표하고 추대하여 형주 영유의 명분으로 삼는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 주석 한위춘추에 따르면 유비가 번성에서 탈출할 때 어떤 이는 유종과 형주의 관원을 위협해 남쪽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유형주(劉荊州, 형주목 유표)가 죽을 때 내게 고아를 맡겼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죽은 뒤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겠소'라고 거절한다. 기록으로 보면 유표는 유비를 아들들의 후견인 격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유기는 이전부터 유비의 핵심참모 제갈량을 중시했는데 여기서 유비-유기 세력은 이미 결친했던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유비는 그 명분을 이용해 유기를 형주자사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적벽 이전 유비가 강하에 머물면서 주유가 만난 사람이 유기가 아니라 유비라는 점에서도 이 시점에 강하에 유비가 세력을 잡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유비와 유기가 차지했던 강하는 하구성을 비롯해 5현이고 이는 강하군 전체의 반쪽이었다.[10]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군사들을 이끌고 형남을 순시하여(무력시위일 것이다.) 형주의 네 군을 지키던 태수들인 조범, 한현, 유도, 김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자기 영지로 편입했고[11] 한편 조조 휘하에 있다가 반란했다가 하후연에게 토벌된 여강뇌서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12] 뇌서의 이런 선택은 곧 유비가 반 조조 세력 중에서도 필두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자 유비의 세력이 커졌다는 증거이다.[13] 그가 거느렸던 세력은 유비에게로 고스란히 흡수되어 머릿수가 곧 군사력인 동시에 경제력이었던 고대 사회 꽤나 큰 소득과 영향을 줬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유비군의 군대는 원래 있던 2만을 훨씬 넘게 되었다. 재밌는 부분이 양주의 여강 사람들이 유비에게 투항했다는 점인데 실제로 여강(廬江) 지역은 손권이 양주의 지배자가 되자 손권에게 반항하다가 도륙당한 지역이었으며 적벽대전 당시에도 두 마음을 품어 구강군과 함께 손유가 토벌한 지역이었다.[14] 이는 그동안 용병, 객장 취급 받던 유비가 귀부를 받는 위치가 되어 서주 이래로 다시 한 세력을 이끄는 군벌의 위치로 변모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군사중랑장이 되어 영릉, 계양, 장사의 세 군의 부세를 담당하고 이로서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15]학보가 영릉태수, 요립이 장사태수, 조운이 계양태수로 임명되고 손권 쪽은 장사와 무릉 쪽의 일부를 점령한다.[16] 이 와중에 손권이 합비 공방전 1차에서 장제#s-2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서 삽질한 것은 덤. 그러나 조조 역시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조조는 적벽의 패전 이후에 합비-여강 지역의 세력가들의 반란에 직면하고, 이 반란을 이용한 손권에게 많이 고생했다. 2차 합비전투 이전에 유비에게 항복하게 되는 뇌서를 비롯한 여강 토착세력, 진란 같은 원술 잔존세력등이 반란을 일으킨 통에 하후연, 장합, 장료, 장패 등의 1선급 장군들이 나가 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어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는 순조롭게 세력을 키워 나갔다.
209년 12월, 장장 1년여를 끈 혈전 끝에 주유는 화살을 맞고 상처입은 몸으로도 일어나서 군대를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감찰하는 등 그의 수명을 깎아먹는 분전으로 계속했고 유비 역시 포위망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조인군의 사상자가 많아졌다. 오록(吳錄)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하길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된다며 장비가 천 명을 거느리며 주유를 따르고, 주유가 2천 명을 나눠 유비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유비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라고 했으며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결국 조인은 견디지 못하고 강릉을 버리고 도망친다. 강릉을 점거하는데 성공한 손권은 주유를 남군 태수로 임명해 강릉에 머물게 하고 정보를 강하 태수로 임명해 사이현에 머물게, 여범을 팽택 태수, 여몽을 심양 현령에 임명한다.
격전을 치러가며 강릉을 점령한 쪽은 주유였지만, 그 1년의 기간 동안 유비는 잠시 형남의 4개 군을 순시하며(引兵南徇四郡, 자치통감의 기록) 형남 4군을 모조리 독식하고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17] 적벽대전에서부터 형남 정벌에 이르기까지 워낙 전공이 확고하다 보니, 내심 형주에서 유비를 완전히 배제하고 싶었을 주유도 어쩔 수 없이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남안)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18]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애시당초 '유비는 뒤에서 싸움을 관망만하고 주유가 혼자 공략해서 유비에게 땅을 주었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강표전의 내용과는 달리 산양공재기, 선주전 등에선 유비가 조조 상대로 싸움의 주체인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주유과 함께 남군을 공략했으며 관우가 후일 단도부회에서 주장했듯 '오림의 땅에서 유비군 역시 조인을 상대로 갑옷도 벗지 않고 싸워서' 얻은 땅이 남군인데 어찌 한 뼘 땅이라도 유비가 지분이 없었겠는가? 강표전은 애당초 유비군이 이전 기록에서 유비가 뒤에서 관망했다고 주장했다가 손성의 디스를 받는 등 적벽 전후 싸움을 오인들의 공으로만 돌리는 서술을 했는데 여기서 주었다는 것은 더 정확히는 유비가 싸움을 통해 주유가 줘야할 얻은 지분을 받아갔다고 하는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애시당초 선주전 본전에는 4군 점령 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형주목으로서 추대되어 공안을 다스렸다는 얘기뿐이다. 공안은 곧 무릉군 잔릉현이니 강표전의 기록과는 달리 유비가 땅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4군을 정복하고 직접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래에서 서술된 왕무횡의 서술과 같다. 또 형주민들이 유비가 형주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여겼으면 조조가 차지한 곳을 제외한 형주 일대가 유비의 지배에 들고 일어났겠지만 그런 기록은 없으며 형남 4군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가 '순시'하는 무력시위만으로도 다 유비에게 쉽게 넘어왔고 조조에게 항복한 형주, 유표의 관원들과 병사들 다수가 조조를 버리고 남으로 내려가 유비에게 귀부하는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한다. 이는 당시 형주 인심이 조조나 손권이 아닌 누구에게로 쏠리고 있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이 무렵 유기가 병으로 죽자 부하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한다.(群下推先主為荊州牧. : 선주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목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領荊州牧, 영형주목), 유비는 손권을 상표하는 형식으로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에 서주목(徐州牧)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劉備表權行車騎將軍,領徐州牧. : 오주전). 흥미롭게도 손권은 유비가 유기를 형주목으로 취임시키거나, 그 뒤를 이어 유비 자신이 형주목으로 취임하는 것을 거의 방관했다. 손권은 주(州)라는 행정체계와 주목(州牧)의 관직이 가지는 실질적인 업무절차나 상징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여 형주목 지위를 단순한 허명 이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권은 이미 형주의 양양, 신야, 완, 강하를 제외한 형주북부의 여러 군(郡) 태수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주목(荊州牧) 선언에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비의 생각은 이와는 달랐다. 유비는 이전에 서주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 형주 속관들로부터 추대를 받는 요식절차를 거치는 등. 형주 지배의 명분을 쌓는 행동을 보인다. 유비는 손권이 유비의 형주목 취임을 '동의'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사실까지도 형주에서 지배권을 넓히고 형주인 신하의 지지를 결집시키는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손권의 실책으로 볼 수 있는데, 형주에서 영토는 넓히면서도 정작 중요한 주목(州牧)의 지위를 유비가 날로 먹는 걸 항의 한마디 없이 지켜만 본 탓에 유비가 형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적벽대전~남군공방전 당시까지 유비는 사방장군 가운데 하나인 좌장군(左將軍), 손권은 잡호장군급인 토로장군(討虜將軍)이라 세력의 크기와 장군직의 관위가 맞지 않는 상태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력은 유비 쪽이 많이 약한데 관위는 손권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 기묘한 상태를 일단 손권을 좌장군보다 우위인 거기장군에 올려 우위에 놓는 형태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유비는 이때 유-손 동맹에서 손권의 우위를 인정해준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이라서 거기장군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는 의미므로 정식 거기장군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여기서 손권의 본거지인 양주목(揚州牧)이 아니라 가지고도 있지 않은 서주목(徐州牧) 취임은 좀 뜬금없이 보이는데, 이는 손권의 북진(北進) 욕구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유비가 4군과 공안을 차지하고 여강 수만명의 항복을 받고, 유표의 잔존세력을 흡수해 세력이 불어나자 이제서야 뭔가 좀 불안감을 느꼈는지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에게 바쳐서 동맹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대해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은 건안 14년에, 유비의 나이는 49세고, 손권은 29세, 그의 여동생은 대략 20여 세니, 거의 50의 늙은이에게 시집간 것으로, 사서의 글에선 "여동생을 바쳐 우호를 굳혔다."(進妹固好)라 했으니, 네 글자로 크게 희롱할 만했다고 했다. 손권이 세력이 커진 유비가 두려운 나머지 꽃다운 나이의 여동생을 바쳤다며 비꼰 것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209년 12월에 결혼했다고 하고 삼국지집해에 적힌 혼인 날짜는 왕욕(王昙)[19]이 말한 바에 따르면, 대략 건안 13년(209년) 12월로, 14년(210년) 봄에 경(京)에서 혼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유비는 이 손부인이 오빠를 닮았고 시중드는 하녀 백여 명이 모두 칼을 가지고 곁에 서있어서 유비는 들어갈 때마다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국역 자치통감에는 주를 달아 손권이 28세 유비가 49세인데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나이가 25세 전후라면 왜 아직까지 시집을 안 갔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의미심장한 주석까지 달아두었다. [20] 결과적으로 손권이 여동생인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다지 양자의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후 자치통감에 따르면 210년, 조조군에 복종한 유표의 부속(部屬, 관원, 병사) 중 대다수가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에게로 와서 귀부했다. 유비는 대담하게도 주유가 준 땅이 좁아 유표의 옛 무리들인 자신의 부하들을 받아들이기 부족하다며, 스스로 경구를 방문하여 손권을 직접 만나 형주의 일을 자기관리로 맡겨 도독하는 것을 청구(요구)했다.(자치통감 66권,통감절요 23권), 자치통감전역 이때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작아 백성들을 안돈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후에 손권으로부터 형주의 여러 군을 빌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광을 비롯한 자치통감 편찬자들은 강표전의 '여러 군을 빌린다'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는지 유비가 형주를 관리하는걸 요구하기 위해 경구로 왔다고 기술했다. 어쨌거나 이런 행동은 이미 형주목의 지위를 날로 먹고 이미 손권이 거기장군, 서주목을 상표하는 댓가로 유비가 형주목인 것을 인정해 자신의 형주 지배를 용인하는 제스쳐를 취했으며 속관들의 동의까지 다 받아 실질적인 형주의 권한은 다 유비 손아귀에 있는 마당이니 손권으로 하여금 형주목인 유비 자신이 형주 전체를 감독하게 하여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남군(강릉)의 나머지 땅까지 차지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21]
자치통감에 주를 달은 호삼성은 '이 여러 군'을 해석하길 유비가 남부 4군(영릉, 장사, 무릉, 계양)을 빌리고 또 강, 한 사이 땅을 빌리려고 한다고 해석했는데 노필은 '형주 8군에서, 남양(南陽), 장릉(章陵)은 오의 소유가 아니고, 주유가 남군을 다스리고, 정보가 강하를 다스려, 또한 결코 타인에게 기꺼이 넘겨줄 것이 아니었다. 윗 글에서 "주유가 남안 땅을 나눠 유비에게 줬다."는, 바로 유구에서 영을 세운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남 4군을 이름이 아니다. 만약 이미 강남 4군을 줬고, 다시 강, 한 사이의 4군을 아우르고자 하면, 장차 주유, 정보는 어느 땅에 있으란 것인가? 또한 공근(公瑾)이 바야흐로 선주를 깊이 꺼려, 상소하여 함부로 토지를 나눔을 근심하였는데, 어찌 수긍하여 갑자기 4군을 주겠는가? 이 남안의 땅은, 다만 유구에 영을 세운 땅에 한정됐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겨우 남안 유구의 땅을 가져, 땅이 협소해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하였기에, 비로소 손권으로부터 형주의 여러 군을 빌린 것이다. 이주는, 전후로 모두 잘못됐다'고 했다.
왕무횡의 경우엔 한 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주가 남으로 4군을 거둬들이고, 공안에 영을 세웠으니, 공안은 즉 무릉군 잔릉현으로, 남군과는 관련된 곳이 없다. 남안 땅을 나눈 것은, 소재지를 알 수 없다.(호주에선 남안을 남 4군으로 여기나, 4군은 곧 유비가 직접 취한 곳으로, 주유가 나눠준 곳이 아니다.)

이때 유기가 강하태수로, 강남으로 달아난 후, 위가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면구(沔口)에 주둔시켰고, 오가 정보를 강하태수로 삼아, 사이(沙羨)을 치소로 삼고, 선주가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아, 남으로 4군을 거둬들여, 각각 병력으로 이를 점거했는데, 누가 기꺼이 땅을 주며 타인에게 나눴겠는가? 또한 주유는 선주가 경구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토지로 유비에게 기반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힘써 말했는데, 어찌 기꺼이 스스로 땅을 나눠 그에게 줬겠는가?

선주가 형주를 모두 거느리고자 하여, 근거지가 광대해, 북쪽으론 양양으로 향하여 완(宛), 낙(洛) 과 통할 수 있었고, 서쪽으론 무(巫), 자귀를 통해 촉(蜀)을 엿볼 수 있었으니, 겨우 땅이 적어 부족했기 때문에 준 것은 아니다. 진지(陳志) 촉선주, 오주전 모두 형주를 빌리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노숙전에서 노숙이 형주를 빌려주는 것을 권한 건 주유가 죽기 전이니, 아마도 차례를 잘못 본 것이다. 오직 정보전에서 "주유가 죽고, 정보가 영남군태수(領南郡太守)를 대신했다. 손권이 형주를 나눠 유비에게 줘, 정보는 돌아가 강하태수를 겸했다."라 하니, 이가 분명하다.

통감에선 주유가 건안 14년 12월 강릉(江陵)을 점거하여, 15년 주유가 죽어, 그가 죽은 게 언제인지 상세하지 않으니, 아마도 여름, 가을 사이다. 선주가 경구에 이른 것은 봄이고, 그가 형주를 빌린 것은 가을, 겨울 사이에 해당된다. 관우가 양양태수가 돼, 강북에 머무르고, 장비가 의도태수(宜都太守)가 돼, 자귀를 치소로 삼음이, 모두 남군을 얻은 후의 일이다. 여러 전을 참고하니, 대략 그 실상을 알겠다. 그러니 강표전에서 이르는 "땅을 유비에게 주다."와 "유비가 형주의 여러 군을 빌리다."란 말은, 모두 전해들은 망령된 소리로, 근거로 삼기엔 부족하다'

라고 강표전 기록 자체를 깠다.
다시 유비가 경구를 방문한 이야기를 하자면 적벽대전 시기까지만 해도 손권에게 있어 유비가 조조와 대적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우방이었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조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시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유비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점차 손가 내부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떠올랐는데, 유비가 경구를 방문하자 눈에 불을 켜고 유비를 억제할 기회만 찾고 있던 주유는 즉각 손권에게 글을 올렸다. 내용은 당연히 유비의 힘을 꺾어놓고 그의 세력을 오히려 자신들 쪽에서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유비는 용맹하고 영웅다운 자질이 있으며, 곁에 거느리고 있는 관우와 장비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들입니다. 결코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유비를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吳)에 눌러앉게 하여 그를 위해 화려한 궁전을 지어주고 아름다운 여인과 진귀한 물건을 많이 내려주어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비에게서 떼어낸)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 쪽에 배치하고 저 주유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능히 대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토지를 분할해 줌으로써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에 있도록 한다면, 이는 마치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는 것과 같아 끝내 연못 속에 남겨둘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범도 이런 주유의 의견에 찬동한다. 하지만 주유의 이 계책은 이미 유비 측의 참모인 제갈량이 눈치채고 유비에게 간언하고 유비도 경계하고 있는 상태였다. (방통전)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가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유비가 주를 관할하기를 청했을 때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아무튼 나중에 위나라에도 손권이 토지를 유비에게 이용하도록 했다는 소식이 들어갔는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들은 조조는 편지를 쓰려고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기까지 했으니 일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전에 손권이 그 자신의 입으로 언급하였듯, 유비가 비록 당장의 세력은 손권보다는 미약해도 그 재능과 명성은 조조에 버금갔다. 이는 심지어 조조 본인마저도 몇 차례에 걸쳐 인정한 바 있다. 그런 걸물을 동맹으로 둘 수 있음은 당장 조조라는 강적을 상대하고 있는 이상 이득이 아닐 수 없고, 또 같은 맥락으로 봐서 적벽대전 이후 불어난 유비의 힘과 야심을 끝까지 억제하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손권의 생각이었다. 당장 공손찬을 시작으로 조조, 여포, 원소, 유표 등 숱한 군웅들이 그를 제거하려 하거나 이용해먹으려 애썼음에도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는 전례도 손권이 주유의 계책을 선뜻 승낙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유비가 쉽게 굴복될 사람이 아니라고 본 주유의 제안을 거절하고 유비가 떠날 때 서로 화기애애하게 조조를 물리치고 황제를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유비가 경구로부터 되돌아갈 때, 손권은 비운(날아가는 구름 무늬가 있는 배)에 타고서, 장소, 진송, 노숙 등 열 명 남짓과 함께 유비를 전송해, 대연회를 개최하고 이별을 고했는데, 장소, 노숙 등이 자리를 비운 뒤, 손권 한 명이 남고 유비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유비는 이야기가 흘러 나와 주유를 찬미하며 말했다. "공근의 문무 계략은 만명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기량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필시 오랫동안 신하의 상태로는 없을 것입니다." [22] 여기서부터 이미 유비는 손권을 견제의 대상으로만 봤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맹 내에서 자신에게 딴지를 거는 주유에 대한 견제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아마 둘 모두일 것이다.
유비는 손권을 만나고 돌아온 후 공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권과 헤어질 때 했던 말과는 달리 "손거기는 상체는 높지만 하체는 낮소, 그의 아래가 되기는 어렵소, 나는 그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데, 사실상 자신은 손권의 동맹이지 밑에 소속된 게 아니라는 것을 주변에 알린 것이다.[23] 거기다가 나중에 방통에게 주유가 자신을 붙잡아 둘 작정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유 녀석 완전히 내 생각을 꿰뚫고 있군! 공명이 위험하다고 했는데 진짜였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때 유비는 그때 나는 위급하여 응당 요청해야 할 것이 있어 갈 수밖에 없었다며 손권이 막아야 할 곳은 응당 북쪽이고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제갈량의 만류에도 오나라로 갔다고 고백한다. (방통전) 즉, 유비는 오나라가 남군 땅을 얻었어도 그 땅을 방비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이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해도 조조를 막는 위치이니 땅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노숙 역시 오나라의 역량으로 형주를 아우를 수 없다고 판단, 마찬가지로 유비에게 땅을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노숙전 한진춘추) 실제 당시 형주에서 오나라 영향력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주유손유와 함께 서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24] 남군을 공략할 때부터 부상을 입어 무리를 심하게 했는지[25] 갑자기 픽 쓰러져서 노숙을 후임으로 해달라는 말과 유비를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린다. 손권은 주유의 후임으로 노숙을 임명하고 남군 태수로는 정보를 임명한다.
그리고 손권은 노숙이 주유의 뒤를 잇자 이전에 유비가 직접 손권이 있는 경구에 가서 주를 도독하기를 요구했을 때 노숙이 주유와 여범의 계책을 반대하면서 했던 "안 될 일입니다. 장군은 신무명세인 분이시라고는 하나, 조공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경지이며, (우리 군이) 형주(남군)에 주둔한 직후인지라 은총과 신의는 아직 널리 퍼져 있지 않습니다. 유비에게 이를 빌려주어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조의 적을 늘리는 한편, 우리 측의 당파를 늘리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라는 말을 곧 받아들였다.[26] 이로서 손권 측은 유비에게 남군의 나머지를 빌려준다.[27] 손권이 형주(남군)를 나눠 유비에게 주자, 정보는 다시 돌아와 강하를 다스렸고, 손권은 노숙의 의견에 따라 장사와 예장을 분할해 예장을 분할해 파양군을 만들고 장사군을 분할하여 한창군을 만든 후 노숙을 한창태수로 임명하여 육구로 옮겼다. 그리고 유비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에 봉했고, 상랑은 유비가 형주를 정벌하자 자귀, 이도, 무산, 이릉 네 현을 맡게 되었다. 이로 보아 4군 외에 촉으로 이어지는 임강군(의도군)도 유비가 장악한 듯하다. 한진춘추에는 건안 15년, 유비가 임강을 의도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고 오록에는 유비가 남군을 나눠 의도군을 세우며, 이도, 한산, 이릉 3현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3.1.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


여기서 문제점은 오에서 형주의 부분들을 유비에게 빌려준 시기다. 자치통감에서는 주유가 죽고 노숙이 권력을 잡은 후에 손권에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라고 주장한 다음 한창태수가 되어 육구로 옮기고 손권은 노숙의 의견에 따라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노숙전에는 유비가 경구로와서 땅 좀 더 달라고 요구할 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고 주장하고 손권이 이를 따른 일로 되어있고 건강실록도 이때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 윗 부분에서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라 경구에서 유비가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하고 주유가 죽은 이후 노숙이 땅을 빌려주자 주장하여 남군이 온전히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합의한 것으로 작성하였다.
일단 노숙전에 따르면 주유의 대에 빌려준 남안을 제외한 강릉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주유가 죽자 정보가 남군태수가 되었고 노숙은 처음에는 강릉에 주둔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형주 땅을 유비에게 빌려준) 후에 내려와서 육구에 주둔했다고 기록한다. 정보전에 따르면 정보는 남군태수로 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나누어 주자 이때 다시 강하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자치통감의 기술대로 남군의 나머지 부분은 주유가 죽은 다음에 강릉에 있던 노숙이 빌려준 것이 확실하다.

3.1.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


선주전만을 봤을 때에는 손권이 남군을, 유비가 강남 4군(장사, 무릉, 계양, 영릉)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서와 그 주석에서는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말이 나오고, 또 손권이 실제 강남 4군 일부에 어떤 영향력을 나타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기록과 그런지 아닌지 논쟁거리가 되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각 군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3.1.2.1. 남군(강릉)

남군(강릉)의 경우는 209년 주유조인을 물리친 다음에 강릉의 강남 쪽을 주자 공안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선주전 주석의 강표전에 있고 자치통감에는 남안[28] 땅을 나누어서 유비에게 줬다(周瑜分南岸地以給備)고 기록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의 경우 유비 역시 남군 공방전에서 지분이 있었으므로 시혜적으로 빌려줬다 의미가 아니라 원래 유비가 정당히 얻었어야 할 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왕무횡의 견해를 빌리자면 애당초 유강구, 즉 공안은 무릉군 잔릉현이니 강릉자체를 빌리기 전까지 유비는 땅을 빌린적이 없고 강표전이 왜곡한 것이다.
남군의 나머지 부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주유가 죽고 노숙이 뒤를 이은 후 빌려줬다는 것을 정보전, 노숙전에서 관직의 이동으로 알 수 있다. 정보가 남군태수를 지내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자 강하태수를 지낸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송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서도 손권과 유비가 형주를 나누면서 남군이 유비에게 속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3.1.2.2. 무릉

몇몇 오 측 기록 때문에 논란이 되는 부분. 황개전에 무릉만이를 무찌르고 그곳의 태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시기에 관한 정보도 어디의 태수인지도 안 나와있어 이곳이 무릉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수많은 의견이 난무하는 상황. 무릉이 손권 쪽에 들어가게 되면 익양대치 때 손권이 무릉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말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사실은 215년에 장사태수로 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것은 황개#s-1.1.1 문서 참조.
주태전에 주태가 형주를 평정한 이후 '''잠(岑)에 주둔하였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잠현 땅은 무릉군에 속하며 남군과의 경계에 있는 '''상수 서쪽의 땅'''이다. 사실 이건 유비가 무릉을 점령하여 주둔할 때 무릉 일부인 이쪽 땅은 주태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호삼성의 의견대로 주유가 공안을 줄 때 같이 줬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전 버전에선 유수구 전투 이후 기록이라고 적어 놨는데 확인 결과 유수구 전투 이전 기록이다.
사실 선주전 기록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다. 무릉만의 세력 때문에 양측의 통치력이 모두 미치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유비가 무릉태수 김선을 항복시켰지만 태수를 임명하지 않았으니 문제라는 것인데 물론 선주전에 무릉태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이 부분은 유비가 직접 무릉을 다스렸기에 무릉태수는 굳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공안이 무릉과 가깝기도 하고 후에 무릉만이들이 유비에게 협력한 것도 유비가 직접 다스려서 그렇다는 게 이 설의 근거. 결정적으로 선주전 주석인 헌제춘추에는 유비가 강릉을 얻은 이후에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남군 자귀현)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어 무릉엔 유비가 직접 주둔한 것으로 여겨진다.

3.1.2.3. 장사

장사군은 유비가 장사태수 한현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기에 치소(임상현)는 유비가 장악했다. 그러나 장사군의 전 영역을 유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주전에 따르면 210년에 손권이 장사군을 분할하여 한창군을 세웠기 때문이다. 장사군 북쪽 경계는 장강이며, 바로 이웃하여 주유가 주둔한 파구가 있다. 따라서, 손권 역시 장사군의 일부 영역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땅을 빌려줬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분할했다고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과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나누어,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은 장사군으로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한창군으로 독립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사군은 처음부터 유비 소유였다가 강릉과 한창군을 교환한것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일단 손권은 예장군의 일부를 나누어 파양군을 세웠고, 원래 남군태수인 정보를 강하태수로 옮기고 노숙을 한창태수로 삼았으며 (장사군의 북쪽 경계이자 예장군에 인접한) 육구에 주둔한다. 자치통감에서는 이 모든 행정구역 조정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자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기술하고 있다. (魯肅勸權以荊州借劉備,與共拒曹操,權從之。乃分豫章爲番陽郡,分長沙爲漢昌郡;復以程普領江夏太守,魯肅爲漢昌太守,屯陸口。)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동오의 군부 우두머리격이 주유에서 노숙으로 바뀌면서 동오의 대전략도 크게 변하게 되는데 주유는 익주 점령을 시도하려 했었다, 유비가 도움을 안 주니 아무 소용 없었지만. 반면 노숙은 손유동맹을 최우선시하면서 대 조조 방어전선의 길이를 줄이고 방비를 튼튼히 하려 한다. 주유의 강릉태수 시절, 강릉과 공안의 위치를 보면 양양방면에서 조조의 육군이 남하할 경우 동오가 유비를 지켜 줘야 한다. 반면 강릉을 유비에게 주면 어떻게 될까?
손권이 장사군에서 한창군을 분할한 게 210년인데 이후로도 장사는 여전히 유비의 세력하에 있었다. 노숙은 처음에 강릉에 주둔했다가 한창태수가 되어 육구로 옮겼다. 전후경과를 보면 장사군의 일부였던 한창군과 남군의 일부였던 강릉일대를 양 세력이 교환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동오는 장강을 기반으로 하는 수군중심의 방어라인을 구축하게 된다. 강릉방면의 육로 방비는 대신 유비가 맡게 된다. 한창군은 강릉 동남쪽이다. 유비가 있는 강릉을 격파하지 않는 이상 조조의 군사는 육로로 한창군까지 내려올 수 없다. 주유시절과 비교해서 입장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동오의 이득은 이 점이다. 방어라인을 좁히고, 꽤 부유한 땅인 장사군 일부를 얻고, 자신없는 육지 지역의 방비를 유비에게 맡기게 된다. 잃은 것은? 군사적 요지 강릉을 잃은 건 결국 형주 방면에서 북쪽 양양이나 서쪽 익주로 진출하는 걸 포기했다는 뜻이다. 강릉 없이는 대규모 원정부대를 뒷받침할 수 없으니까. 결국 노숙은 주유의 공세적인 대전략을 수세적으로 고친 셈이다. 물론 완전히 수비에만 전념한 건 아니다, 형주 방면 대신 다른 방면의 공격로가 있으니까. 바로 합비다.
그리고 유비의 이득은 무엇인가? 제갈량의 융중대 계책을 실행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말해 형주에서 필요한 곳은 두 곳이다. 익주에서 형주로 나오는 통로인 의도군(남군 서쪽). 그리고 북진하는 대규모 원정대의 보급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인 강릉. 유비가 진정 천하를 꿈꿨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릉을 얻고자 했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

3.1.2.4. 강하

익양대치 때 손권쪽으로 분할했다는 말과 연의에서 유비가 손권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고 유비가 빌렸거나 얻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인을 물리친 후에 정보는 강하태수에 임명되어 사이(沙?)현[29]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고 주유가 죽은 후 잠시 남군태수로 임명되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준 후에는 다시 강하태수로 임명되는 등 자기네가 다스린 지역을 유비군에게 넘겨준 적은 없다. 정보가 죽은 후 하구를 관할하는 것은 손교라는 기록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 확인 가능. 물론 위나라가 다스리고 있는 문빙이 태수로 있는 강하 쪽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으니 관계 없다.
[image]
오른쪽 위에 네모 친 것이 사이성, 그 오른쪽 아래가 夏口亦沔口
[image]
위의 지도의 서쪽부분. 가운데에 네모 쳐진 것이 하구다.
다만 하구 쪽은 강하태수로 유기와 유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손권이 가지고 있는 강하는 208년에 황조를 죽이고 함락시킨 악현, 사이현을 비롯한 장강 남쪽 지역이다. 사이는 원래 강하군의 치소인 서릉 대신 황조가 거성으로 삼은 곳인데, 손권은 그 성을 함락하고서 도륙하였다(屠其城). 악현은 황조를 토벌하고 호종이 악현장이 됐다. 이 지역들은 사이현의 하구를 포함한 곳을 빼면 장강 남쪽이다.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감녕은 이후에 당구(當口)에 주둔했는데 조일청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 당구는 반드시 손교가 다스히던 하구와 가까운 곳이라고 했는데 손교는 정보의 뒤를 이어 하구를 다스렸고 정보는 사이현을 다스렸으니 감녕의 당구는 하구(夏口亦沔口) 주위가 되고 이를 보아 손권은 사이현 주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기가 유비와 함께 하구로 갔다는 것에서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의 땅은 하구와 석양을 비롯한 강북의 강하의 땅이 된다. 여기서 유기가 하구에 주둔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연의에 따라 손권이 강하를 버렸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기가 황조가 죽은 이후에 하구에 갔음을 보고 하구가 하구(夏口亦沔口)라며 지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손권은 사이성을 버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경 면수주를 보면 알 수 있듯 유기와 유비가 간 하구는 양수와 면수를 거쳐 가는 곳이니 아래에 그림에서 揚水, 沔水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유기가 있는 하구는 사이성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있는 상류의 지역으로 아래 그림에 해당한다. 즉, 사이성이 함락되자 유기는 하구에 주둔하게 된 것.
정리하면, 적벽대전 당시 유비와 유기는 하구를 중심으로 강하군의 서쪽과 남쪽을 지배하고 있었고 본래 강하군 산하인 기춘후국은 손책과 손권의 꾸준한 공격으로 사이현과 함께 동강하군으로 분리된 상태다. 북쪽의 조조는 기존의 안륙현(安陸縣), 남신후국(南新侯國), 208년에 신설한 석양현(石陽縣) 중심으로 유비는 하구성(夏口城), 운두현(雲杜縣), 경릉현(竟陵縣), 하이현(下雉縣), 주현(?縣)을 중심으로 손권은 기춘후국(?春侯國), 사이현(沙羨縣)을 중심으로 강하를 삼분했다. 가장 큰 부분을 먹은 건 유비지만 조조와 손권이 점거한 부분을 합치면 여기에 육박한다.
어쨌든, 유비,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는 이후 소리없이 손권에게 넘어가는데, 다만 유비가 공안땅을 받은 것은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이며(강표전) 따라서 형남 4군 평정 당시까지는 유비, 유기가 하구지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설이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후 유비는 공안땅을 받고 그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손권은 유비가 옮겨간 이후 하구를 가져간 것으로 보이고 이에 대해선 유비가 땅을 빌리고 하구땅을 손권에게 사실상 넘겨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춘후국과 사이현을 중심으로 한 손권 측의 동강하군은 이후 기춘군으로 변했고 210년경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남군을 대여받았으며 210년경 남군태수 정보가 강하태수로 전임했다. 손책 시절 주유가 태수를 역임하고, 손권 시절 정보가 태수를 역임한 동강하군은 210년 당시엔 손권이 기춘군을 설치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보가 태수로 임명된 강하군은 어디일까? 원래 유비가 점거하고 있던 하구 쪽 강하군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유비가 남군을 얻으면서 자리를 비워주고 손권이 하구 쪽 강하군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냥 계속 유비가 하구를 가지고 있다가 익양대치 당시 유비가 남군을 가져가는 대신 강하를 손권 땅으로 넘긴다는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동강하군이 기춘군으로 바뀐 시점이 210년경 어느 시점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정보가 우선 (동)강하태수로 부임하고 그 다음 기춘군으로 바뀌었다고 봐도 상관이 없다. 중국어 위키백과 손오행정구역(孫吳行政區劃) 문서에 따르면 '동한의 구군인 강하는 건안 15년(210년) 손권이 정보를 강하태수로 두었는데, 이때에서야 비로소 강하군 강남쪽 여러현을 갖게 되었다, 건안 20년(215년)에 오나라와 촉나라의 형주분할안 이후에야 강하 전군을 소유했다'고 되어 있다.(東漢舊郡,建安十五年(210年)孫權以程普為江夏太守,始有江夏郡江南諸縣,建安二十年(215年)吳蜀分荊州後據有江夏全郡) 애시당초 남군 공략 이후 공략에 참여한 유비가 본인의 지분으로 공안을 가져간 것이라면 첫 번째 가설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선주전 본전에도 4군 점령 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공안을 다스렸다는 얘기뿐이다. 이때 유비가 강하태수를 누구를 임명했는지는 나오진 않으나 적어도 이렇게 볼 시엔 하구 땅은 익양대치 이전까지 유비의 땅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손권은 새로이 축성하여 하구를 새 중심지로 삼았다.

3.1.2.5. 계양

손권이 거기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전종의 아버지인 전유가 계양태수로 임명되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209~219년이기에 익양 이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없다. 어쨌든 이 지역은 조운이 계양태수가 되면 알 수 있듯 촉이 점령한 과정이 자세한 편.

3.1.2.6. 영릉

한참 위에서 언급한 호삼성이 쓴 강남 지역을 이미 얻었는데 강한 지역 네 군을 유비가 달라고 요구했다를 빼면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여기를 손권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관우가 쌀을 가져간 상관이 있던 곳이다.

3.1.2.7. 양양

원래 이곳은 조조가 점령한 이후 쭉 조조의 땅이었다.
연의에는 제갈량이 남군을 얻고서는 양양도 얻었다고 하지만 연의의 설정오류다. 나중에 유비가 주지도 않았는데 조조 땅으로 나오기 때문.
나중에 220년에 손권이 서쪽으로 오자 조비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인을 시켜서 양양과 번성에 불을 지르고 번성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잠시 손권이 진소#s-2라는 듣보잡을 이용해 점령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인한테 털리고 뺏긴다.

3.1.3. 결론


손권 쪽은 주유 사후 주유와 강릉을 같이 공격했었던 유비[30]를 강릉에 두어 조조를 막을 생각으로 원래 유비가 얻었던 지분인 공안 이외의 남군땅을 내주어 원래 강하 하구에 위치해 있던 유비가 근거지로 삼게 했다. 적벽대전부터가 유비를 이용해서 혹은 유비와 함께하여 조조를 막자는 것이었으니 일리가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이후 형주는 유비의 근거지가 되었지만, 유비 쪽은 이미 형주의 소관들과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형주목이 되었고 빌린 건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빌린 남군뿐이라 여겼으므로 자기한테 정당한 형주의 지배 권리가 있다고 여겼으니 조조와 맞서는 것 이외에는 굳이 땅을 오에 줄 생각이 없었다.[31]한편 손권은 손권대로 실제로는 형주의 일부지역을 얻어놓고 그 지역을 지킬 자신이 없었으므로 유비를 불러서 그 지역을 조조로부터 진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제까지 대여하라는 시간적인 얘기도 없이 토지를 증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형주를 다 빌려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에서 준 공식 직함을 보면, 유비도 손권에 크게 꿀릴 것은 없는지라, 세력이 약할 때 굽혔지만, 세력이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춘 후로는 굽힐 이유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손권은 유비를 포섭하기를 바라고 유비는 손권을 이용하였으니 이를 각자 서로 반대 입장에서 보면, 빌렸냐, 아니냐 등의 이유로 해석이 서로 달라진다고 본다.

3.2.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


이 주장은 청나라 고증사학의 명사인 조익이 쓴 《이십이사차기》의 주장을 골조로 한다. 조익은 분명히 훌륭한 학자이고 장지동이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를 읽는 것으로 정사(正史) 통독을 대신할 수 있다.

라고 평했을 만큼 책 또한 뛰어난 책이지만, 이 내용의 기본 가정이 "오나라의 몇몇 기록은 날조라 믿을 수 없다"인 만큼 일단 이것을 적용하게 되면 형주 대여에 관한 기록은 조익이 인정한 《오서》내용과 《위서》와 《촉서》밖에 없게 되는데, 《위서》에 관련 내용이 있을 리 없는지라 결국 남는 것은 조익의 의견밖에 없으므로 항목을 따로 만들어 기술한다.[32]
재미 중국인 사학자 리둥팡도 형주를 대여했다는 설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조익의 주장 밑에 실어두기로 한다.

3.2.1. 조익의 이십이사차기의 주장


다음 링크는 이십이사차기의 형주 대여 부분을 링크로 달아놓은 것이다.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되어서 서점이나 도서관 등지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걸 가져오면 저작권법 위반이기에 유저 번역본을 올린다. 원본 링크 참고로 여기서 게시글을 올린 사람이 노숙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부분은 노숙전에 주석으로 딸린 오서의 기록으로 관우가 저런 주장을 하고 노숙이 반박하자 아무 말도 못했다는 부분이다. 위치로 치면 노숙전의 후반부. 아마도 당시 참고할 수 있던 김원중의 정사 삼국지 번역본에 주석 번역이 안 실려 있어서 못 찾은 모양이다.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은 오나라 사람의 사후 견해로부터 나왔고, 당일의 상황이 아니었다.

원래 빌려준다는 것은, 본래 자기가 소유한 물건을 타인에게 임시로 주는 것이다. 형주는 본래 유표의 땅으로, 손씨가 소유하던 토지가 아니다. 조조가 남으로 내려온 당시, 손씨의 강동 6군은 바야흐로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해 두려워해, 여러 장수가 손권에게 조조를 영접하길 모두 권하나, 손권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때마침 유비가 제갈량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어, 손권은 겨우 유비에 기대 함께 조조를 막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는 다만 조조를 막는 것을 원했지, 감히 형주를 바라면서 얻고자 하지는 생각 따윈 없던 것이다.

제갈량전을 보면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할 때, 손권이 곧 이르길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에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소." 라고 한 다음 곧 주유, 정보 등을 파견해 제갈량을 따라 유비에게 이르러, 힘을 모아 조조를 막게 한 것이 보인다.

이것은 유비가 조조를 막는 주체고, 손권 자신은 협력자로 가담하고자 한 것이다. 제갈량이 또한 이르길 "장군께서 예주와 같은 마음으로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면, 형오(荊吳)의 세력은 강해져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룰 겁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때 이미 천하삼분의 설이 존재하고 있어, 손권에게 형주를 취하라 의뢰하고 이를 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33]

오지를 보면 적벽의 전쟁에서, 주유와 유비는 함께 조조를 격파했고 산양공재기를 보면 화용(華容)의 전투에서 유비는 홀로 조조를 추격했고 촉지를 보면 그 후 조인(曹仁)을 남군에서 포위하며, 유비가 몸소 진중에 있었으니 일찍이 오군의 병력만 단독으로 출진한 적이 없었고 유비는 앉아서 성과를 누린 것이 아니다.

강표전은 '조조를 격파한 이후, 주유가 남군태수가 되었고, 남안의 땅을 분할하여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유표의 관리 및 병사들 가운데 북군으로부터 탈주한 자들은 모두 유비에게 몸을 맡겼다. 유비가 받은 땅만으로는 물자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손권으로부터 형주의 몇 개 군을 차용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노숙전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유비가 수도에 방문하여 손권에게 형주를 도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을 때, 노숙은 그에게 형주땅을 빌려주어 공동전선을 펼쳐 조조에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했다.[34]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토지를 분여하여 지원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마침 편지를 쓰고 있어서 들고 있던 붓을 땅에 집어던져 버렸다. 이후 노숙은 관우와 만나서 형주를 돌려달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가 경의 가문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경의 가문이 멀리서 패주하여 왔으며 그 기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손권도 또한 노숙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으나, 다만 현덕에게 토지를 빌려주라고 내게 권한 것은 단점이다라고 말했다. 이것들이 형주 대여설의 유래이나, 이 모두 오나라 사람들이 기술한 것이 그 출전이다.[35]

조조를 격파한 후, 유비가 경구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니, 손권은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 보냈고, 주유가 은밀히 상소하여 유비를 경구에 남기길 청하나,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고, 영웅을 끌어들여 오랜세월 힘을 합치는 것을 정당하다 여겼으니, 이는 손권이 바야흐로 유비가 형주에 없어, 장막이 되지 않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조조가 화용의 위험에서 탈출해 기뻐하며 여러 장수에게 이르길 "유비는 나와 동류이나, 다만 계책이 나보다 조금 늦을 뿐이다."라 한 기록이 산양공재기에 있다. 조조가 손꼽는 이는 오직 유비로, 일찍이 손권에겐 언급조차 미치지 않았다.

정욱은 위에 있었으면서도 유비가 오로 들어간 것을 들었는데, 논하는 이 다수가 손권이 반드시 유비를 죽일 거라 여겼지만, 정욱은 "조공께선 천하에 적수가 없어, 손권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유비에겐 영웅의 명성이 있어, 손권이 필시 그를 지원하여 자신을 방어할 것입니다."라 하니 이 이야기가 정욱전에 있다. 이는 위나라 사람 또한 오직 유비를 영걸로 손꼽아, 손권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이제 병력을 논하면, 제갈량이 처음 손권을 보며 이르길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전사들 가운데 귀환한 자들과, 관우 휘하의 수군이 정병을 합하여 일만이 되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또한 손권이 주유 등의 수군을 파견함이 3만 명에 불과했음이 제갈량전에 있다.[36]

즉 유비보다 병력이 10배가 아니었다.[37]

게다가 이때 유표의 장자 유기는 오히려 강하에 있었고, 조조를 격파한 후 유비는 곧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으려고 상표했었는데 손권은 일찍이 이에 대해 아무런 다른 소리가 없었으니, 형주는 본래 유기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한 남으로 4군을 정벌하니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모두 항복했다. 유기가 죽고, 많은 신하들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음이, 촉지 선주전에 보인다.

유비가 곧 제갈량을 파견해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거느리게 하고, 그곳에서 조세와 부역를 거둬 군수물자로 올리게 했음이 제갈량전에 보인다.

또한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한 것이 관우전에 있고, 장비가 의도태수,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아, 남군에 있음이, 장비전에 있다. 조운을 편장군(偏將軍), 영계양태수(領桂陽太守)로 삼은것이 조운전에 있다. 이렇게 장수들을 파견해 각지에 주둔케 함은, 오직 유비가 지휘한 것으로, 애초에 손씨에게 아뢰지 않았던 것은 이곳 형주가 본래 손권의 땅이 아니었기에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비가 필시 손권에게 아뢰지 않았고 손권 또한 와서 유비를 전혀 막지 않았다.

그 후 삼분의 형세가 이미 정해지고, 오나라 사람이 적벽의 전투를 그제서야 떠올리고, 유비는 오의 병력에 기댔어 싸웠다고 여겨 마침내 형주는 응당 오나라가 가져야 할 땅이라 말하였는데, 유비가 이에 근거했기에, 비로소 이때부터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이 있게 됐다.

본디 조조를 막을 때를 생각하면 유비가 진실로 손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손권 또한 유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38]

손권은 이때 그저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어찌 이미 형주를 취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관우가 노숙에게 대답하길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 말한 것이 노숙전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결론이다.

그 후, 오 촉이 세 군을 두고 쟁탈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형세가 일변하여 상수를 경계로 화의를 맺고, 장사, 강하, 계양을 나눠 오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촉에 속하게 했으니, 가장 공평하고 타당한 것이었다.[39]

그래놓고선 오의 군신들은 관우의 북벌을 노리고, 형주를 습격해 이를 가지고는, 도리어 오로지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을 날조하여, 그들이 형주를 취한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즉 오의 군신이 간교하게 거짓을 말하나, 형주를 빌려줬다는 명분은 마침내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퍼져 전해져, 모두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게 돼, 견고해져 깰 수 없게 됐고, 오히려 이러한 곡해가 거듭되어 촉에까지 흘러 들어갔으나, 이는 남의 말을 귀로만 듣고 받아들인 견해다.

조익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조를 강남에서 몰아낸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세운 공적은 상당했다. 유비 측 참모 제갈량은 손권에게 참전의 당위를 설명하고 전략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연합군 병력 상당수는 유비의 지휘를 받으며 전투를 치루었고, 이후 형주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을 보면 유비의 공적은 더욱 뚜렷하다. 형남 4군(무릉, 영릉, 장사, 계양)은 명실상부 유비가 독자적으로 얻은 영토이며, 손권이 유비에게 빌려줬다고 말할 수 있는 땅은 남군(강릉) 땅에 한정되어 있다. 더군다나 유비는 전임 형주목인 유표의 장자 유기의 후견인으로, 형주의 영유권이 유비에게 있음은 타당하다. 당시 오나라가 형주 땅을 지배한 바가 없을뿐더러 손권은 당장 눈 앞의 조조와 싸우기 위해 유비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형주에 신경쓸 여유조차 없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유비가 배치한 각 지역의 장수를 보면 유비의 지배와 영향력이 공고했다. 적벽대전이 끝난 다음 촉과 오는 서로 합의하여 형주를 나누어 가졌으나, 관우의 북벌을 기회로 삼아 손권 측이 불시에 습격하여 형주를 탈취하였다. 이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원래 형주는 빌려준 땅이었다'라는 설을 날조한 것이다.
조익뿐만이 아니라 청대에서는 이에 대해 키배를 흔히 벌였고 이에 대한 내용은 각종 삼국지 선주전 집해들에 수록되어 있다.
근대사학자인 여사면은 《중국대역사》에서 조익의 설을 인정하였다. 《삼국사화》에서 그는 형주는 손권의 것이 아니므로, 나중에 유비에게 빌려준다는 말은 헛소리라고 했다.

3.2.2. 리둥팡의 주장


재미 중국인 사학자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 교수의 경우 자신의 저서 세설삼국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유비는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기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부하들에게 자신을 형주목으로 추대하게 했습니다. 사전에 손권과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았지요. 손권은 유비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를 쫒다가 강릉성까지 갔을 때 일찍이 손권은 강릉의 맞은편 기슭인 유강구에 주둔하겠다는 유비의 계획에 동의한 바 있습니다. 이 유강구는 작은 곳이며 무릉군 잔릉현에 속합니다. 법률적으로 이 땅은 유비에게도 속하지 않았고 손권에게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엄밀하게는 당시 이미 조조에게 투항했던 형주자사 유종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땅은 이미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통제하에 있었지요.

유비에게는 유강구에 군대를 주둔시킬 자격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새로운 성을 쌓고 공안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손권이 주객전도의 입장에서 유기의 강하군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정보를 강하태수로 임명한 것에 비하면 유비의 행위는 동의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고, 감정으로나 실질적으로 손권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이 형주 몇 개 군의 기반을 위해 두번이나 유비와의 평화를 깹니다. 나중에 손권 휘하의 문인들은 곧 '형주를 빌렸다'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손권이 동맹을 저버리고 관우를 습격했던 악행을 은폐하려 들지요.

당시 한 왕조는 아직 망하지 않았고 천하는 여전히 한 왕조의 천하였습니다. 영토는 당연이 황제의 영토였지요. 한 헌제 본인이 그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사람은 형주나 다른 어떤 주라도 남에게 상으로 주거나 빌려줄 권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권이 형주 전체를 유비에게 빌려주지 않았고 유강구와 남군 강릉현의 일부만을 빌려주었다고 말합니다. 강릉은 남군의 수현이고 손권 측이 점령한 형주의 수현이기도 했지요(조조측의 형주는 이미 양양현을 수현으로 삼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서 강릉과 남군은 하나로 혼동되었으며 형주와 하나로 혼동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형주를 빌렸다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강릉을 빌렸다는 말입니다. 강릉을 빌렸다는 것은 사실 유강구를 빌렸다는 것이지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어쨌거나 '형주를 빌렸다'는 말이 억지로 통하기는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엄밀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사람을 기만하는 느낌을 줍니다. 유강구는 절대 남군 강릉현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무릉군 잔릉현에 속했지요 손권은 이 유강구를 점령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유비에게 빌려줄 수 있습니까?(중략)

삼국지 노숙전은 거듭해서 그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노숙은 한동안 남군에 주둔하다가 육구로 주둔지를 옮겼습니다. 육구는 육계에서 장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오늘날 호북성 가어현의 서남쪽이자 적벽의 동쪽이지요.

왜 노숙은 남군에 머물지 않고 육구를 물러나 주둔했을까요? 이일은 좀 미심적습니다. 예전에 저는 자치통감 권67의 어떤 단락을 읽고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자치통감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손권은 일찍이 주유와 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를 보내 익주를 취해고자 유비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그의 동의를 구했다. 유비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손권은 조조가 적벽에서 패했다고 해서 '창해에서 말의 물을 먹이고, 오나라의 수도에서 군사를 시찰하겠다'는 생각을 접었거나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나 유비와 익주목 유장은 일가붙이의 먼 형제이니 만약 그가 손 장군께 지은 죄가 있다면 이 사람의 낯을 보아 용서해주시지요.' 손권은 유비의 반대를 중시하지 않고 숙부 손정의 큰아들 손유를 파견해 여러 수준을 이끌고 하구로 가서 주둔시키며 성급한 태도를 취했다. 유비는 손유의 수군이 공안성 북쪽의 장강을 통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관우를 강릉에 주둔시키고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며 제갈량은 남군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잔릉에 머물렀다. 손권은 하릴없이 손유를 소환했다"[40]

삼국지 손유전에는 손유가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했다가 유비의 대규모 공세에 서진을 저지당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관우전과 정보전에는 손유가 수군을 이끌고 서진한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요. 게다가 관우가 강릉의 방어를 맡게 된 것은 정보가 강릉을 떠나 강하태수의 임지로 돌아간 건안 20년 여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41]

당시 손권과 유비는 사이가 좋아져서 형주의 각 군을 다시 나누고 재배치해 상수를 경계로 삼었습니다. 손권은 남군을 유비에게 주었고, 유비는 장사군에 계양군을 더해 손권에게 주었습니다. 건안 19년 4월에 이미 장비와 제갈량, 조운은 모두 오늘날 호북과 호남지역을 떠나 유비를 도와 유장을 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자치통감의 그 단락을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중략)유비는 노숙과 관우 두 사람과 익양에서 단도부회의 상황을 연출한 뒤 자진해서 손권에게 장사, 영릉 계양 3개군을 양보하기로 합니다('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양보였습니다.) 오직 남군 하나만을 교환조건으로 걸면서 말입니다.(후략)

한마디로 리둥팡의 주장은 유비가 형남 4군과 공안을 가졌고 손권이 강릉을 가졌는데 유비가 공안, 나아가서 형주 전체를 빌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며 강릉은 손권이 계속 가지고 있었고 익양대치 때 남군과 장사, 계양을 바꾸고 상수를 경계로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유비에게 땅을 빌려 줬다는 오주전, 노숙전, 노숙전 주석 한진춘추를 부정해야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리둥팡의 주장에 따르면 자치통감의 해당기록이나 이런 주장들은 단순한 소문과 야사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다른 기록을 부정하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손권은 유강구(공안)를 점령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유비에게 빌려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타당성이 있으며 유비가 설령 땅을 빌렸다고 해도 (리둥팡은 억지로 말이 통하긴 한다면서) 강릉만 빌렸을 뿐이며 헌제춘추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거기에 관우의 북벌을 기회로 삼아 손권 측이 불시에 습격하여 형주를 탈취하였고 이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원래 형주는 빌려준 땅이었다'라는 설을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리둥팡도 하고 있다.
그외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관우가 악진과 대치했던 청니대치의 경우 선주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즉, 오나라가 조조세력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 악진이 남군을 쳤고, 남군의 오나라 군대가 공안에 주둔해 있던 관우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고, 관우가 이를 도와 청니에서 대치했다고 하면 말이 된다.
또 관우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이 기록의 시기는 유비가 형남 4군을 거두어 들인 시점 직후라고 볼 여지가 있다. 따라서 당시는 남군공방전이 한창 진행중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유비가 관우를 '''북쪽으로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도록 주둔시킨 것이다. 선주전과 관우전의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앞뒤가 맞는다.
유봉전에는 '유장은 부풍의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라고 했다. 유장전에 따르면 장송이 조조에게 모욕을 당하고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한 후 장송이 돌아온 후에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는 유장의 지친이니 통교할 수 있다고 했으며 유장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법정을 보내 유비와 우호관계를 맺고, 곧장 또 법정 및 맹달에게 영을 내려 병사 수천을 보내어 유비를 도와 수비토록 하였는데 법정은 마침내 돌아왔다'고 한다. 따라서 유장전의 말을 신뢰한다면 한창 남군 공방전을 치루고 있을 유비에게 병력을 보낸것이고 남군공방전 전역이 끝나고 주유가 강릉을 차지하자 법정이 이끄는 익주군이 돌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자치통감에서는 211년에 병사 4천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3.3. 번외: 손권의 주유 견제?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 형주 일대를 흡수한 후 손권은 자신의 영향권에 들어온 형주 일대를 분리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주유를 남군태수에 임명하고, 유비에게 나머지 형남 일대를 점령하도록 묵인하는 한편, 유비와 혼인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손권과 주유의 유비 견제'를 뚫고, 유비가 교묘하게 움직여서 형남과 손부인이라는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즉, '손권&주유 vs 유비'라는 정치적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실제로 주유의 움직임은 유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손권은 과연 어떨까?'''
주유의 견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손권은 유비에게 지나칠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남군공방전 이후의 현실이었다. 주자사, 형주목 선포와 같은 정치적 퍼포먼스도 묵인하고, 형남은 거저 먹도록 방치하는 등, 어떻게 보면 거의 호구처럼 느껴질 정도.
'적벽 직후의 손권'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볼 경우 이 것은 이전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손권이 이 이시점에서 자신의 세력 내부에서, 누가 자신의 가장 큰 잠재적인 '내부 경쟁자'으로 보일까? 망명객인 '유비'가 아니라 손책때부터 손오 내부에서 군권을 잡고있던 ''''주유''''라고 볼 여지가 다분하다.
당시 시점에서 주유는 명백하게 적벽대전의 주역이다. 이때, 주유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서 적수가 없었던 조조를 정면에서 꺾었으며, 형주에 주둔하던 조조군 역시 순식간에 정리하여 형주를 집어삼켰다, 본래부터 주유는 손책의 친구였으며, 손권은 어머니의 권유로 주유를 형님처럼 모시기로 하였으니, 형식상 부하이긴 했으나 결코 단순한 부하라고 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적벽대전에서 노숙과 함께 대표적인 주전파였고, 실제로 전투에 나서서 승리와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손오 내부에서 주유의 정치적 위상은, 정황상 급상승했을 것이며 그러므로, 손권은 주유에게 새롭게 흡수한 형주의 핵심지인 남군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주유는 군사적 능력은 조조 격파로 검증이 되었고, 마흔도 되지 않은 젊고 패기 넘치는 장수인 데다가 유장의 파촉 정벌 같은 야심만만한 대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유가 앞으로 더욱 군사적 성공을 거둔다면, 완전히 날개를 달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주유라는 인물을 '''고작 '강동 6군'을 직할지로 두고 있는 손권이 감당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시점에서 손권에게 견제해야 하는 상대가 있다면, 유비가 아니라 주유가 되지 않을까는것이 손권의 주유견제론의 주장이다. 유비가 "오랫동안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건의를 받았을 때 손권의 내심은 어떨까. "그럼 주유, 당신은 어떨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적벽대전 직후, 유비에게 좀 비상식적으로 보일 만큼 과도하게 퍼주는 손권의 행보는 '''지나치게 갑자기 위상이 올라가버린 주유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토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기록을 이렇게 대비해서 보면, 주유와 유비를 대치시키는 구도가 나타난다. 물론 우리는 주유는 손가의 충직한 부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유의 일생을 보고 '사후평가'하는 것이다. 적벽대전 직후의 주유는 그 엄청난 공적을 세운 것 만큼이나, 손권에게는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상대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불안감이 유비에게 형남점거를 허용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비는 그에 부합하듯이 주유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못된다고 손권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손권의 주유 견제론은 손권은 주유가 이렇게 일찍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키워줘버린 유비와 마찰을 빚으면서 자신이 벌인 짓을 '설거지' 하는 것이, 이후 유비와 손권의 형주공방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드라마 신삼국에서 채택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3.3.1. 반론


유비를 손권이나 주유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한다는 게 조금 사실과 다르다 여겨지긴 한다. 손권 역시 유비를 끝내 제어 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주유전.

또, 손권의 지배권이라는 게, 주유-정보를 필두로 한 회남 출신의 군대를 기반으로 강동사족들을 통제하는 형태기 때문에, 강동사족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시점에서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너무 이르다. 또한 유비가 커진 건 형북에서 조인과 1년넘께 대치하느라 형남을 유비가 먹어버린 게 컸고, 유비가 커졌는데 유비세력과 다투는 건 북방의 조조가 있는데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조조가 실제 군사원정까지 보낼 능력이 209,210년에 없었더라도 손권이 장희의 1천 명을 4만 명 뻥튀기로 적은 서신 하나에 속은 것을 보면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 조조가 실제로 초군에서 합비까지 209년 3월부터 12월까지 실제론 방어목적이라었다 하더라도 군대를 움직인 점 등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유비와 손권의 세력차이가 형남 4군+공안+여강의 수만명 항복까지 받고 자리보전 할 명분이 확고 한 유비의 세력을 고려시 단기간에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등이 손권이 유비를 경계하게 할 요인으로 있었다.
또 합비에서의 대 실패, 남군공방전에서의 손실 구강현, 당도현 반란도 적벽대전 종료 이후에 진압해야 했던점, 입촉 시도 역시 결국 공동작전으로 계획해야 했어야 했으며 유비의 동의 없이 단독 행동을 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해진다. 유비가 굽신대는 이유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남군대여를 통해 유비군의 세력확대 및 손권과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손권이 유비와 세력 차이가 나더라도 이를 쉽게 제압할 입장이 아니었다. 주유전의 손권이 생각한 끝까지 유비를 제압하지 못할거라는 인식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또 노숙전을 보면 노숙은 손권에게 말할 때 유비에 대해 '(우리의) 당파'라고 칭하면서 이를 늘려야 한다고 봤지 유비를 부하 뉘앙스로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손권과 유비의 동맹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준다기보단 일단 힘의 우위가 손권에게 있는 이상 결혼동맹 등을 통해 유비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확고한 아군인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사리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손권이 유비를 통제하는 것은 유비를 위협하는 손부인의 군사를 유비 측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감지되지 않고 유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입촉과 천하 삼분을 완료한다. 이런 유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선 손권의 입장에선 주유의 힘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주유 견제론을 수용하자면 그것은 일단 유비를 손권이 제거할 명분이 없고 유기를 앞세워 형주를 점령하는 유비를 강대한 조조가 있는 상태에서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손권이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주유나 견제하자는 심리로 유비를 좀 더 밀어주었다가 맞을 것이다. 유비 역시 세력비에서 밀리는게 사실이었으므로 납작 엎드려서 손권에게 기면서 세력을 키울 때까지 명분을 주지 않으며 독니를 숨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결국 손권이 유비에 비하면 세력비가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손권-노숙이 조조와 대치하는 유비에 대해 입촉 상황을 이용해서 마구 흔드는 것이라고만 봐도 충분하다. 그렇게 손가락 튕기면서 계산하며 유비를 남군까지 떼주면서 키워주었고, 이 과정에서 손권은 유비를 자신의 사냥개로 시험해 볼 수 있는지 실험해 봤다고 봐도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손권 본인은 호구가 되긴했지만.
또 강표전만 살펴 보자면,

劉備之自京還也,權乘飛雲大船,與張昭、秦松、魯肅等十餘人共追送之,大宴會敘別。昭、肅等先出,權獨與備留語,因言次,歎瑜曰:「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顧其器量廣大,恐不久為人臣耳。」

유비가 경에서 돌아가게 되매 손권은 비운대선에 타고 장소, 진송, 노숙 등 10여명과 함께 그를 따라 전송하며 대연회를 열었다. 장소, 노숙 등이 먼저 가자 손권 홀로 유비와 함께 남아 얘기를 나눴는데 유비는 얘기를 하다가 주유를 찬탄하며 말했다. "공근의 문무주략은 만인의 영걸이라, 그 기량이 광대함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까가 두려울 뿐이오."

瑜之破魏軍也,曹公曰:「孤不羞走。」

주유가 위군을 깨뜨리자 조공이 말했다. "주유에게 패했으니 고는 (패하여) 달아남이 부끄럽지 않구려."

後書與權曰:「赤壁之役,值有疾病,孤燒船自退,橫使周瑜虛獲此名。」

뒤에 손권에게 편지하여 말했다. "적벽싸움에서는 마침 질병이 있어 고가 배를 태우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주유가 이렇게 이름을 헛되이 얻게 할 줄이야."

'''瑜威聲遠著,故曹公、劉備咸欲疑譖之。 '''

'''주유의 위엄과 명성이 멀리 떨친 까닭에 조공, 유비가 모두 그를 의심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당시 오나라 역사가들은 오히려 조조와 유비가 먼저 손권과 주유를 이간시키고자 했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과 주유의 관계는 외부에서 이간시키려고 할 정도로 오히려 탄탄했다는 얘기가 된다.

3.4. 연의에서의 묘사


연의에서는 남군에서의 전투에서는 실제 정사에서 유비가 남군공략에 참여한 것과 달리 주유조인금창까지 얻어가며 혼자 피터지게 싸운 것을 제갈량의 계책으로 빈집털이+뒤치기하여 날로 먹은 걸로 되어 있다.
남군 공략 직전에 유비와 주유가 합의하는 상황에서도 주유를 깎아 내리는 묘사가 그대로 나온다. 공략 전 주유는 유비에게 '우리가 먼저 남군을 공략해 보겠다. 만약 우리 오나라가 차지하지 못한다면 유비군이 차지해도 좋다'라고 아예 공언을 해버린다. 노숙이 이 부분을 지적해도 '설마 내가 유비에게 남군을 양보한다고 생각하시오? 어차피 손가락만 튕겨도 남군은 우리 것이니 예의상 그렇게 말해줬을 뿐이오.'라고 말하며 자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 자만심이 남군 공략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
또한 주유가 금창을 얻게 된 이유도 언급된다. 적벽에서 대패한 조조가 허도로 돌아가기 전 사전에 계책을 써서 조인에게 건네주고, 남군이 위기에 처하자 조인이 이 계책을 써먹는다. 계책이란 일부러 수비병들이 도망치는 척 해서 오군이 남군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성 안에 매복했던 조조군이 기습공격을 하는 것. 이 일로 오군은 큰 피해를 입고 주유도 중상을 입었다. 여기에 주유가 자신의 부상을 이용해서 자기가 죽은 척 하고 조조군을 유인해서 다시 큰 피해를 입힌 뒤 남군성을 점령하러 갔더니, 조운이 이끄는 유비군이 어느새 남군을 차지한 꼴을 목격하게 된다.
추가적으로 진교가 촉으로 배신해서 형주(강릉)와 양양마저 계책으로 뺏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진교가 조인의 인수(증명 도장)를 빼돌리고 이를 이용해서 조조군이 강릉과 양양을 비우게 만든 뒤 빼앗은 것. 그리고 주유의 금창은 터져버린다.
노숙이 적벽에서 힘들어 이겨놓고 조인도 힘들게 물리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하자 제갈량은 유기를 보여주며 유기가 죽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한다. 형주 네 군은 정사처럼 남군 전투 중에 손권군과 함께 조조와 싸우는 도중 유비가 얻은 게 아니라 남군을 얻은 이후 유비군이 따로 싸워서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별 다른 기록이 없는 전투를 만들다 보니 여기서 가공인물들이 한 다스가 생겨난다. 대신 황충위연이 합류하는 장면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유기가 죽고 나서 노숙이 형주를 돌려달라고 하자 제갈량은 앞서 약속은 가볍게 깨버리며 이번에는 서천(익주)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변명을 하고, 노숙은 또 그것을 좋다고 받아오며 노숙을 어리숙한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주유가 제안하고 여범이 찬성했지만 손권이 결국 실행하지 않은 미녀 육탄공세의 계책을 손권이 손상향을 유비와 결혼시킬 때 진짜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주유는 여기서도 발린다. 제갈량은 사전에 조운에게 계책이 담긴 주머니를 주고, 이 계책으로 유비를 구해냈다. 손상향은 유비에게 진심으로 반해서 설날 성묘를 간다는 핑계로 유비와 함께 떠나고 뒤늦게 손권이 부하들을 보내 추격하자 손상향이 감히 누구에게 창칼을 들이대냐며 강짜를 부려서 물리친다.
또한 노숙전에서 조조가 놀라 붓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연의에서는 조금 더 극적으로 표현한다. 조조가 동작대를 세우고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크게 열었다. 신하들이 조조를 찬양하는 글들을 올리고 조조 또한 흥에 취해서 직접 시를 쓰려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유비가 형주를 완전히 차지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놀라서 붓을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유비는 본래 용과 같으나 물을 차지하지 못했다. 유비가 형주를 얻었다는 것은 용이 큰 바다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크게 한탄한다.
마지막으로 주유가 서천을 치겠다고 한 것을 연의에서는 서천을 친다는 구실로 유비를 죽이려는 가도멸괵 계책으로 바꿔버리고 그런 주유의 계략이 제갈량에게 간파당하자 터졌던 금창이 악화되어 죽는 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주유보다 제갈량이 더 뛰어나다고 보여주기 위한 판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 정사에서 유비 역시 주유와 함께 남군을 공략한 주체임에도 연의에선 오나라 혼자 힘들여 싸웠는데 난데없이 유비 측이 나타나 힘 안 들이고 낼름 갈취한 것처럼 보이게 서술해서 그냥 통수꾼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양측 모두 묘하게 쌍으로 깎인 것.

4. 익양대치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패배하여 그 기세가 꺾이고, 서로간의 필요성으로 동맹을 맺고 있지만 형주 일부를 빌려주고는 형주는 다 마땅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손권과 별로 돌려줄 마음도 손권을 도울 마음도 없는 유비의 사이는 배송지의 말마따나 ''''비록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얼음장 위를 걷는 듯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은 조조가 워낙 강대하여 서로가 손을 잡고 있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권은 이렇게 유비에게 땅을 빌려준 다음에 촉을 칠 계획을 세우고 유비에게 이에 대한 협력을 요구한다. 유비 측에서는 어차피 형주를 넘어서 촉 땅을 다스리지는 못하니 우리 땅이 저절로 될 것이라며 보내자는 쪽과 어쨌든 손권에게 서촉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을 때 은관이 나서 오나라가 촉을 쳐서 안 된다고 주장하자 '''안 그래도 촉 땅을 가질 계획을 가지고 있던''' 유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손권에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이런 유비군의 움직임에 손권은 뭔가 낌새를 챘는지 손유를 보내 단독으로 유장을 치려고 하나 유비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신의를 잃을 순 없다, 장군은 한실과 종실을 도와야 한다며 공격하면 안 된다면서 안 들어주면 산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를 하며 막는데 그래도 손권이 손유의 수군을 진군시키려 하니 유비는 아무 말 못 하고 쪼는 대신 관우를 강릉, 장비를 남군 자귀현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하면서 자신이 장악한 형주 전체에 무력으로 충돌해서라도 막겠다는 제스쳐를 취한다. 유비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손권은 그의 생각이 어쨌든 간에 유비를 무시하지 못하고 일단은 물러나게 한다. 사실 이미 유장이 장송의 계책을 받아들여 법정을 먼저 유비에게 보내 화호관계를 맺고 했으니 신의 타령이 나온것으로 보인다. 유장이 유비에게 병사까지 파견할 정도였다.
한편, 211년 조조는 종요에게 명을 내려 한중장로를 공략하라 말한다. 이에 마초는 불안감을 느끼고 관중의 군벌들을 규합, 조조에게 대항한다.
불안하기로는 익주의 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송이 유비를 불러 견제할 계획을 말하자 장송은 법정을 추천해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전후로 엄청나게 선물을 보낸 유장의 청을 받아 수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촉으로 들어와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42]
한편, 조조군은 이때 마초의 봉기를 물리친 후였다. 한편 청니에서는 관우와 악진이 대치 중이었고 손권이 위나라의 공격에 유비에게 SOS친 것을 이용.[43] 유비는 유장에게 군사와 병량을 요청하고 손권을 지원하러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걸 보고 마음이 성급해진 장송의 실수로 내통혐의가 드러나 처형이 되자 유비는 본격적으로 유장과 전쟁을 벌인다. 213년 방통이 전사하자 관우는 그대로 남아 형주를 지키고 제갈량, 조운, 장비가 추가로 파견되었다.[44]

4.2. 청니 대치


이렇게 손권이 유수구에서 조조와 싸우고 유비가 서촉을 먹을 동안 관우는 청니에 있었다. 당시 유비군은 형주에서 1차로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s-1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그리고 얼마 후 제갈량이 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 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오나라나 주군 유비의 도움 없이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45]

4.3. 유비의 서천 점령


한편, 214년 유비가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끌어들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하여 유비는 서천을 점령한다. 그리고 유장을 형주로 내쫓아 버린다. '''신의를 잃어버릴 수 없다며 치는 걸 반대한 인물이 도움을 요청한 유장의 뒤통수를 쳐서 날려버린 다음에 형주로 내쫓아 버린 것.''' 이런 유비의 움직임에 '''손권은 유비가 한창 서천에 가 있을 동안 손부인을 시켜 유선을 볼모로 삼기 위해 끌고 오게 하지만''' 제갈량의 명령을 받은 장비조운에 의해 실패한다. 관우는 이 사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불온한 행동을 자주했고 형주와 오의 경계지역 분쟁에서 노숙은 이러한 촉의 적대감을 높이지 않기 위해 항상 우호적으로 잘 덮으려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익양대치로 이어진다.

4.4. 익양의 대치와 악화되는 결속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익주를 얻었다는 말을 들은 손권은 그동안 언제까지 남군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태도를 바꾸어 건안 20년, 사자(손권전에선 제갈근)를 보내 형주를 얻길 원한다고 통보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형주 전체가 아니라 형주의 여러군을 돌려 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후일 익양대치로 모든 분쟁을 끝내고 더이상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런 영향일 수 있겠다. 이에 유비는 "양주를 얻으면 마땅히 형주를 다스리게 주겠소.(또는 모름지기(須) 양주(涼州)를 얻으면(得), 응당(當以) 형주(荊州)를 그대(相)에게 주겠소(與))"라고 말하였다.(선주전, "須得涼州,當以荊州相與", 자치통감 "乃盡以荊州相與耳")[46]
유비가 형주를 오에 주겠다고 약속한 건 이때가 처음으로, 양주를 점령한 뒤에 준다는 반환 조건 이야기가 나온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전엔 양측이 반환 조건을 명시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익양대치에서 형주 3군을 빼앗기자 신속하게 남군으로 가서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대치한 결과를 보면 유비는 진짜 형주를 다 줄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는 손권에게 땅이 부족해 강릉을 얻을 목적으로 형주를 감독하게 해달라 요구한 적이 있었기에 형주를 주지 않을 수는 없다고 봤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 같다. 당시에는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지 않아 익주의 방비가 뻥뚫린 상태였고 조조가 마초를 격퇴하고 양주를 점거하고 남하할 기세를 보이던 상황이라 유비 입장에서 양주의 일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손권도 조조를 상대로 환현을 점령하면서 스스로 조조를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유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손권은 이를 듣고 '''"이는 거짓말이니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면서 곧장 요청없이 본인 독단으로 유비가 독자적으로 얻었던 형남 4군 가운데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는데 관우는 그들을 바로 내쫓아 버린다.[47] 손권은 몹시 대노하여 장군 여몽에게 선우단, 서충, 손규와 병사 2만 명을 주어 장사, 계양, 영릉을 빼앗게 하며 여대손무 등 장수 10명도 추가적으로 더 보낸다. 손권의 경우엔 그동안 아래로 보던 유비가 이런 자세로 나오니 일단 조조를 생각하지 않고 화가 나 공격하고 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세 군에 편지를 보내니 장사와 계양은 냅따 항복한다.(손권전)
다만 여기서 장사태수 요립은 도망치고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가 음산성으로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이들은 여대에게 즉시 격파되고 여대는 남아서 장사를 지킨다.
이렇게 두 군을 어이없게 뺏겨버린 유비는 몸소 5만 대군을 이끌고 공안으로 내려가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한다.(선주전) 이런 유비의 움직임에 손권은 노숙에게 1만 군대를 주어 관우와 대치시키게 하고 학보가 지키던 영릉을 공략하던 여몽에게는 영릉은 버리고 빨리 돌아와서 노숙을 도우라고 한다.
여몽이 편지 한 장으로 항복시킨 장사와 계양에 비하면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장사를 점령하고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에서 학보의 옛 친구 등현지득템한 여몽은 이를 이용해 영릉을 단숨에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등현지에게 "저항하는 것은 자유지만 이미 유비, 관우도 격파됐다며 지금 원군의 가망은 없다"고 구라를 까며 오히려 오군은 계속해서 원군이 오고 있다고 더블 구라를 까면서 가진 힘의 차이를 보면 함락은 당연하니 항복하라는 것.
이런 등현지의 말을 들은 학보는 항복할 뜻을 전한다. 등현지가 이 사실을 여몽에게 알리자 여몽은 곧바로 네 장수에게 백 명의 병사를 주고 학보가 나오면 성문을 점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학보가 항복하고 자신의 장수들이 성문을 점령한 것을 확인하자 여몽은 학보의 손을 잡고 같이 배에서 내린 후에 손권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준다. 이걸 보고 유비는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다는 것을 안 학보는 '''땅 속으로 숨고 싶어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항복 권고를 내리고 성공하거나, 학보의 친구 등현지를 빠르게 확보하는 등의 신속한 움직임을 보면 여몽은 미리미리 상당한 수준으로 첩보전을 준비해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주 남군을 재패한 여몽은 손하[48]를 남겨 적에 대비하게 하고 자신은 노숙군에 합류한다. 거기다가 반장, 감녕, 손교[49] 등의 군대도 속속 도착한다.
안성현의 장 오탕중랑장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노숙과 여대에게 격파되며 사건 종료.[50]

4.5. '''215년, 익양대치''' - 노숙제 대 관우뢰


노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관우를 마주보는 형태로 강의 북쪽에 성을 축조한다.(노숙제, 魯肅堤)[51]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때 3백 명의 병사를 가지고 있던 감녕이 자신에게 5백 명만 증원시켜주면 관우가 자신의 침 뱉는 소리만 듣고도 건너오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노숙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감녕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강변에 관우를 감시하는 망루를 세우게 한다.[52] 이에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땔나무를 엮어 진채를 만든다(관우뢰, 關羽濑) 이전부터 양측에 분쟁이 있을 때마다 노숙이 우호적으로 진무시켰는데 이런 대치 상황 속에서 관우와 노숙은 서로 군사를 백보 밖으로 주둔 시키고, 오직 장군들만이 단도 하나씩만을 지니고 만나 대면하기로 한다. 노숙의 부하들이 관우의 속셈의 무엇일지 모른다며 노숙을 만류하지만 노숙은 서로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관우를 만나러 간다.
이 자리에서 관우는 '유비도 조조와 싸웠는데 왜 우리의 땅을 뺏느냐'고 말하지만 이에 노숙이 '장판파에서 깨진 상태에서 도저히 조조군을 이길 가망이 없이 도망치던 유비를 도와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53]며 대답을 했다.관우가 이에 적절한 답을 내놓기 전 한 장수[54]가 일어나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라 노골적으로 말하자 관우가 눈짓으로 그를 물러나게 한다. 결국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회의는 말 그대로 파토가 나게 된다. 당시 양군의 상황은 그 정도로 악화일로였다.
오나라 입장에서도 이 상황은 유리하지만은 않았는데 과거 형주 수군의 주력은 황조, 그리고 죽은 황조 아래에 있던 황조 수군의 잔여병력을 수습해 다시 수군을 창설한 유기군이다. 그리고 유기가 죽은 이후, 이 형주 수군은 자연스레 유비 밑으로 편입되었다. 황조의 수군은 오 수군을 애먹이기도 할 정도로 오군에 뒤지지 않은 강군이다. 거기다 강하군이 유비의 세력권이었다는 점은 오군으로서는 큰 위험이다.
양군의 대군이 대치하여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감이 드높던 그때, 유비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훗날 양홍이 말하다시피 '촉한과 이와 입술의 관계'인 한중이 조조에게 굴러떨어지자 유비는 위기감을 느끼고 손권과 협상을 벌여, 이 자리에서 형주를 분할하여 상수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다.''' 여몽이 형남을 점령한 이후의 영토 이동으로 보면 영릉을 유비 쪽으로 넘기고 유비 쪽에 남은 강하 일부를 오에 넘기고 대여로 되어있던 남군은 대여가 아닌 유비측의 영유권으로 바뀌는 것으로 끝내겠다는 것. 아, 그리고 불쌍하게 여몽의 거짓말에 속아 항복한 학보는 영릉군과 함께 유비군에 돌아간다.

4.6. 노필의 의견과 익양대치


앞서 유비가 땅을 빌리러 왔다는 강표전 배주를 보고 삼국지집해의 편찬자 노필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낸바 있었다.

노숙전에서 이르길 유비가 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보고, 형주를 모두 거느리길 청하니, 오직 노숙만이 손권에게 이를 빌려줘, 함께 조공을 막으라고 권했다. 조공이 손권이 토지로 유비에게 기반이 되게 함을 듣고, 바야흐로 글을 쓰다, 붓을 땅에 떨어트렸다. 또한 노숙이 관우를 꾸짖길 "국가가 각각 다르나, 본래 토지를 그대들에게 빌려준 것은, 그대들의 군이 패해 멀리서 와, 의지할 곳이 없는 까닭이었소."

배주(裴注)에서 인용한 한진춘추(漢晉春秋) 에서 이르길 노숙이 손권에게 마땅히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라고 권했다. 다시 오서(吳書)를 인용해 이르길, 노숙이 관우에게 이르길 "주상께서 예주의 몸이, 머물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셔, 토지와 사인의 힘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보살펴 주게 함이 있으셨소."

여몽전(呂蒙傳)에서 손권이 이르길 "자경이 나에게 현덕(玄德)에게 땅을 빌려주라 권한 것이, 그의 한 가지 결점이었소." 제갈량전에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길 "예주께서 달아나 여기에 이르셨으니, 장군의 힘을 헤아려 이를 대처하십시오." 이상의 이러이러함에 근거하면, 선주가 형주의 여러 군을 가진 것은, 진실로 손권이 빌려준 것이다.

그러나 본전(선주전)의 아랫 글을 상고하길 "선주가 남으로 4군을 정벌하니, 4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한 제갈량전을 상고하길 "조공이 적벽에서 패해, 선주는 마침내 강남을 거둬들여, 제갈량에게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거느리게 했다." 이 두 열전에 근거하면, 4군은 모두 선주가 자력으로 정복한 것으로, 오가 빌려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일의 정세를 추구하면, 선주는 기울어진 채 한진(漢津)으로 달아나,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하여, 진실로 자경이 이른 바와 같이, 적벽전의 승에서 공이 없지 않았기에, 손권이 그가 직접 형주의 여러 군을 취함을 허락해도, 저항하지 않았으니, 임시로 빌린 것과 다를 게 없어, 마침내 각각 일설(一說)을 믿었고, 또한 유, 손의 후일 분쟁의 발단 원인이 됐다. 이에 제각기 여러 군을 다퉈, 조씨가 마침내 중원에 웅거했으니, 제갈승상표(諸葛丞相表) 안에서 "오가 다시 맹약을 어겨, 관우가 실패하고, 자귀(秭歸)에서 넘어져, 조비(曹丕)가 황제를 칭했습니다."라 일렀다.

즉, 유비는 형주를 다 돌려주겠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익양대치로 3군을 가져가고 분쟁을 끝낸다. 이는 유비가 스스로 형주에 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 증거로 막상 익양대치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방어하려고 했고 익양대치 이후 협약에서 형주를 분할하는 형태로 소유하려고 했다. 위에서 나온 노필의 말따라 유비는 당시 정세상 자신이 형남 4군을 차지했으니 형주의 일부(남군)만 빌렸다고 생각했고 손권은 당시 정세상 유비가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형남 4군을 먹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전부 빌려줬다고 생각했다 보는 게 타당하다.
노필의 말 따라 유비는 정세가 자신에게 따르는 걸 보고 형남 4군을 자력으로 얻은 것이고 이미 손권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인정했으니 형주의 영유권은 내심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고 새삼 손권과 경구에서 만나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요구한 것도 유비 통제 밖이던 강릉을 빌리기 위해서 한 말일 것이다. 반면 노필의 말 따라 손권은 애당초 자신이 적벽에서 공이 있다고 여겨 유비에게 형남 4군을 취하는것을 허락했고 유비가 그에 저항하지 않았으니 형주 전체를 임시로 빌린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유비가 확실하게 반박하지 못한 것을 보면 형남 4군 정벌은 손오 측의 묵인하에 이뤄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렇게 유비가 형남 4군을 차지하는걸 막을 생각을 못 냈다가 나중에서야 형주 전부를 빌려갔다면서 익양대치를 일으킨것이 사실에 부합한다. 물론 이는 적벽대전과 남군공방전은 주유와 유비가 동맹으로서 동시에 같이 치룬 전쟁이고 유비 측의 공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손권이 간과한 것이다.
애당초 당시 손권이 형남 4군을 먹을 여력이 되는지부터가 의문으로, 손권세력은 강릉과 합비전선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유비가 힘을 보태어 강릉에서 같이 싸웠을 정도로 후달리는 상황이었는데 유비가 형남 4군을 먹은것을 방치했다면 모를까 시혜적 의미로 기회를 베풀었다는건 손권측 입장만 반영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니 형주 전체를 주기도 싫고 현실적으로도 융중대의 가장 중요한 퍼즐인 데다가 촉한의 2인자 관우가 형주에 단독으로 부임해있었기 때문에 주기도 어려웠다. 또한, 손권이 하는 짓이 얄미웠던 것도 사실이고. 유비는 익주를 얻고 안정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북쪽의 조조와 맞서 한중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형주 전체를 요구하는 손권의 입장에 맞서 동맹인 손권을 자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립서비스를 했지만 정작 익양대치가 일어나자 유비의 복심(腹心) 중 하나인 관우는 대놓고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는 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까?"라고 대놓고 노숙에게 반박했다. 비록 노숙의 말따라 동오의 도움은 받았지만 유비군은 손오와 동등한 동맹으로서 같이 조조를 격파했으니 남형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게 유비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또 이 말이 나올 당시엔 일단 입촉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 익주를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유비에게 있었다. 북쪽으로는 조조가 한중정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이거에 신경 안 쓰고 익주를 놔둘수는 없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은 유비가 형주를 감독하러 경구에 오기 이전부터 형주목이었고 형남 4군과 공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강릉을 얻기 위해 형주 전체를 감독한다는 명분하에 강릉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주전에서 유비가 '돌려주겠다'라고 말했다고 손권 입장에서만 쓰인 글과는 달리 자치통감은 선주전이 더 맞다고 보고 형주 여러군을 달라는 손권의 요구에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다 주겠다'라고 쓰여졌다. 이는 유비가 형주를 빌린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는 것이며 어차피 일단 익주를 안정시켜 한중을 얻을 시간을 벌고자 하는 말일 뿐이다. 이렇게 한중을 얻어 융중대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영유하고 있는 남형주와 함께 진군해 량주와 북형주를 손에 넣고 상용을 손에 넣어 량주-한중-상용-북형주의 루트를 완성시키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반면, 노숙이 손권의 입장을 대변하여 관우의 말을 반박하며 말하는 대로 손권 입장에서 보면 유비 이놈은 참 나쁜 놈인 셈인데 적벽에서 구원해주고(사실은 같이 싸운거지만), 남군을 빌려주어 결과적으로는 익주까지 얻었음에도 형주를 반환하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철저히 결과론적인 생각이다.)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유비에게 재촉까지 하지만 유비는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고 한다. 사실 이말은 시간을 끌면서 당장 반환하지 않겠다라는 얘기니까. 량주를 언제 얻을지도 모르고 얻을수 있을지도 모르고 얻는다해도 말이 또 바뀔 수가 있다. 그러니 분노한 손권은 무력을 동원하여 남군과 무릉군을 제외한 3군을 무력으로 뺏는다. 노숙은 오나라가 은혜를 주어 의탁할 곳도 없던[55]. 또 손권 입장에서는 유비가 자신을 입촉하지 못하게 속인 것까지 더해 입촉 때까지 유비의 꼭두각시처럼 놀아난 것에도 분노했을 것이다. 유비가 위기에서 벗어나 성장했으니 형주는 사실상 자기들 땅이라고 하는 것이고 관우 역시 유비군이 위급한 상황에서 오나라의 도움을 받아 조조를 격파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에 대해선 반박하진 못한다. 이로서 오나라와 손권은 '왜 은혜를 갚지 않느냐? 우리는 너희 사정봐주면서 3군만 반환하라고 했다.' 라고 주장했다.
유비는 손권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니 아예 주기가 싫었던 것 같고 손권은 유비의 상황이 나빴을 때와 좋았을 때가 언행이 다르니 분노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인구 문제도 겹쳤을 텐데 남군 하나와 나머지 세군의 인구는 비교가 안된다. 3군의 인구수가 월등히 많다. 물론 당시 조사된 인구수가 없어서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후한서 군국지 기준이다. 그러니 유비 입장에서도 짜증날 만한 상황인 것이다. 다만 남군의 위치가 전략적으로도 양번을 얻기 전까지는 위나라에 대항하기에 유리하여 촉한 입장에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주의 인구는 생각 외로 많지 않은데 손권은 그것 때문에라도 눈에 보이는 형주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나라는 호족들이 사병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곳곳에 산월족이 있었으니 안심할 수 있던 상황만은 아니었다. 지도로 보면 땅덩이가 크니 인구도 많고 발전도 잘되었다 오해하기 쉽지만 발전이 시작된 것은 오나라부터이고 남북조시대를 거쳐 남송 시대나 돼서야 발전을 거의 완료했다고 하니까.
애당초 손권이 유비가 유기의 뒤를 이어 형주목이 되고 형남 4군과 공안을 차지한것을 두려워해 여동생을 바쳤고 그 후에야 유비가 손권을 방문했다는 선주전의 기술로만 봐도 손권이 유비가 차지한 형남 4군과 공안에 대하여 실제 지배권을 행사했다거나 유비가 손권의 밑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보는것이 합당할 것이다. 유비에게는 또한 유기를 이었다는 확고한 명분이 있기까지 했다. 또한 노필은 제갈승상표(후출사표)를 인용해 오나라가 다시 맹약(익양대치 후 3군을 분할한 것)을 어겨 관우가 실패한 것(형주를 차지한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익양대치 후 서로 여러군을 다투다가 맹약으로 형주를 분할한 것으로 분쟁이 끝났음에도 오나라가 형주를 쳤음을 말하고 있다.

4.7. 결말


이로써 형식적으로 형주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부터는 땅을 빌렸느니 돌려주느니 이런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 측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56]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 큰 불만을 품었다.[57]
또한, 형주를 기반으로 유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손권 측에서는 유비를 부려서 조조를 막겠다는 주유 - 노숙의 전략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노숙의 뒤를 이은 대도독 여몽. 한편 유비 측에서도 관우는 손권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파국을 낳는 원인이 된다.[58]

4.8. 연의에서의 모습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자 손권은 장소#s-3의 계책을 받아 제갈근의 가족을 가짜로 가두고 형주를 받아오게 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와 짜고 장사, 영릉, 계양 땅을 돌려주기로 '''말만 하고''' 실제로는 관우가 모두 다 거절하고 손권이 보낸 관솔도 내쫓는다. 여기에 유비와 제갈량의 연기도 추가. 일부러 유비가 화를 내며 노숙에게 '내 아내(손부인)를 멋대로 꾀어서 데려가기까지 했으면서 형주를 돌려달라고? 돌려받고 싶으면 힘으로 뺏아가라고 하게. 하지만 나에겐 촉 41주와 대군이 있어.'라고 강짜를 부린다. 여기에 제갈량이 형의 가족을 생각해서 타협을 해 달라고 간청하는 척하자 위의 장사, 영릉, 계양의 반환을 해주는 척 하는 것.
단도회의 대화 자체는 정사나 연의나 흐름은 비슷하다. 다만 이 잔치 자체가 노숙이 관우를 잔치로 불러들여 관우를 설득해서 형주를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이자는 계획을 세우는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관중이 관우 측에 유리하게 각색했다고 하는데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 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참여한 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정사에선 관우가 참가한다고 하자 관우의 부하들이 말리는 장면은 없고 관우가 곧바로 응한 것만 나오며, 노숙은 단도회를 제안한 후 관우와 만나려하자 걱정하는 부하들에게 태연하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 이후에 단도회에 참석한다. 물론 연의에서도 결론은 협상 결렬인데 여기에 관우가 술에 취한 척하며 노숙에게 접근, 큰 칼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위협해 노숙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가고 손권은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손권은 형주를 치려고 하지만 조조의 공격한다는 말이 들리자 모든 군사를 합비와 유수로 옮겨 이들을 막기 위해 힘 쓰느라 공격을 못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조조는 정사와는 반대로 부간의 조언에 따라 공격 포기. 여기에 막간극으로 복완복황후, 목순의 조조 암살 기도 사건이 들어가기도 한다. 복황후가 죽은 후 조조의 딸이 헌제의 황후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서촉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했는데 이에 제갈량의 계책으로 인해 정사와 같이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넘겨주고 합비를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몽의 활약으로 점령한 장사, 계양, 영릉? 그딴 거 없다. 그리고 합비에서의 결과는 알다시피 안습.
익양대치 자체는 연의에서는 거의 묘사되지 않지만, 일단 존재하는 기록이기는 하므로 삼국지를 소재로 한 몇몇 경극에서 다루기도 한다. 물론 삼국지 문화의 특성상 '''오호대장군 올스타 앞에 개관광당하는 오나라'''같은 묘사가 많다. 안습.

5. 번성 공방전



5.1. 발단


216년, 조조는 마침내 위왕(魏王)이 되고 이 무렵 탕거(宕渠)에서 장합장비의 교전이 일어나 장합이 크게 패함으로써 '''한중 공방전'''의 서막이 오른다. 218년 법정의 건의로 북진을 한 유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선 조조가 대치하였으나 이미 유비가 요충지를 다 거머쥔 상태에서 나오지를 않았고, 219년에 결국 조조가 그런 유비를 끌어내지 못 하고 철수를 하면서 유비는 한중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계속된 승리에 촉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윽고 유비는 한중왕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형주를 지키는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s-2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59]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다. 그러나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60]과 자신의 아들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고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편,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나 218년 10월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고 219년 정월에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이에 관우는 후음과 연계하여 북진을 하는데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5.2. 관우, 천하를 진동시키다


[image]

5.2.1. 번성 공방전과 7군의 궤멸


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s-2, 허유#s-2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무제기에 따르면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61] 조인은 이미 봄 정월에 후음을 참하고 번성에 돌아와있던 걸, 관우가 여름/가을에 북진을 했으므로 후음과 연계되었다기 보단 그런 반란을 기회로 독자적으로 북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는 급히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하고(遣于禁助曹仁擊關羽)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자치통감온회전에는 아예 이전부터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62] (자치통감에 따르면 큰비, 장맛비(潦)에 따라)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현군(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있는 군사)로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예리하므로(자치통감에 따르면 용맹하고 교활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홍수를 이용해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63]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관우 스스로는 무리를 인솔해 조인을 번에서(於樊) 공격하였고 조인은 좌장군 우금과 입의장군 방덕 등에게 번성의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64][65] 조인이 이렇게 우금과 방덕을 북쪽에 주둔하게 한 것은 조인 역시 자신의 군대가 외떨어진 현군임을 인식하고 번성을 둘러싸고 있는 면수를 통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북쪽을 보완한 포진으로 보인다. 성에 남아 있던 조인이나 만총이 방덕처럼 따로 성을 나서서 번성 인근 면수 물가를 방어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면수를 장악한 관우의 선봉이 도착하면 번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은 성에 의지해 번에서 공격하는 관우를 상대하고 북쪽은 방덕, 우금에게 맡겨 수비하게 한 것이며 그래서 번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관우와 그를 막으려는 방덕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만총전에 따르면 우선 관우가 양양을 포위하니 만총은 정남장군 조인을 도와 번성에 둔치며 이를 막았다고 한다. 즉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면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당시의 전투에서 번성에 주둔하던 방덕은 자기가 직접 관우와 싸워 관우를 죽이겠다고 맹세했으며 그 말대로 친히 관우와 백마를 타고 교전해 백마장군이라고 불리며 관우군의 두려움을 샀으며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이렇게 번성에서의 싸움이 벌어지기를 한달, 8월 장장 십여일간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였으므로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는데도 수몰되었고, 우금의 칠군 역시 수엄칠군고지가 방덕보다도 더 번성 북쪽에 있었음에도 마찬가지로 수몰되었다.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우금전에 따르면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다고 하는데 수엄칠군고지 자체는 평지에 가까운데 여기서 북쪽으로 몇km 이동하면 물을 피할수 있는 해발 100m가 넘는 구릉지 언덕이 나온다. 갑자기 내린 비로 미처 그곳으로 피할 판단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66] 수해를 피한[67]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궁지에 몰려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68]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후일 육손에게 격파된 남향태수로 곽목이 나타는 걸 보면 관우는 따로 남향태수를 임명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것이다.
오주전(손권전)에 따르면 관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때마침 한수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방덕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들[69]을 사방에서 큰 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죽이고 일출 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고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장수 한 명과 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70] 관우는 방덕의 형제가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성방어에 있어 수군의 존재는 필수불가결, 조인이 바보가 아닌이상 수군의 존재가 중요하다는걸 알고 있었을터, 그럼에도 관우의 수군만이 번성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청니 대치의 사례를 보더라도 관우와 조인이 강릉과 양양 사이의 어디에서쯤엔가 한판 붙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때 조인의 수군이 함께 박살났다고 가정한다면 이해가 가는 일. 병력이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배들은 그럴 수도 없으니까. 수군이 괴멸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없었다면 번성과 양양은 관우의 수군이 장악한 면수에 둘러싸인 꼴이 되므로 조자효가 대비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현군이 되었다는 온회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위 수군의 질이나 양이 애초부터 관우의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거나 하는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관우는 장판 전투 전까지 수군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후 유기의 수군과 합쳐 수가 불어났을 것이다, 이후 10여 년간 장강에 있는 강릉의 특성상 수군을 더 증원했을 것므로 조조군의 수군보다 물량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무제기에 애당초 조인이 번성에 주둔한 것 이유가 조조가 조인을 시켜 관우를 먼저 선제공격 해 토벌[71]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대대적인 원정으로 강릉이나 이릉을 점령하기 위해선 훗날 조비의 남정에서 보이듯이 수군을 증원하는게 필수적이므로[72] 수군을 구비하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무제기에 언급되듯이 조인은 당초 관우를 먼저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관우가 주둔한 강릉을 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하다는 걸 위나라 상층부에서 모를 리도 없었다. 조인전과 다른 기전을 살피면 조조가 마초를 처음 토벌할 때 조인이 소백(蘇伯), 전은(田銀)을 행(行) 효기장군으로서 토벌한 다음에 조인이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까지 번성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후음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조인이 효기장군이었던 213년(조조 위공 즉위) 이후 어느 시점부터 219년까지 계속 번성에 주둔하면서 관우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후일의 조비의 남정처럼 강릉을 토벌하기 위해 수군을 준비하지 않을 리는 없을 것이다.[73]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7군이 주둔한(훗날 수엄칠군고지라고 불린다)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자치통감 등을 살펴 전투 과정을 상고해 보면 7월, 관우는 번에서 공격했고 방덕과 지원군으로 온 우금은 번성 북쪽에 진을 쳤으며 방덕은 친히 나서 관우와 더불어 교전했다. 8월, 관우는 홍수가 나자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당장 수로를 장악한 관우 입장에서 본진에서 진군 시간 줄이고 효율적으로 전투하고자 한다면 위군은 수군이 없다고 추정되는 상황에서 관우가 평지에 적과 대치하며 진을 쳤다가 큰 비가 오자 적을 붙잡아 둔 상태에서 진을 슬그머니 물렸다고 볼 가능성도 충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양측에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재해인데 치열하게 싸운 한쪽은 열흘이란 시간 동안 대비를 못한 채 수몰되고 한쪽은 은근슬쩍 안전한 곳으로 군세를 이동시킨 다음 기세등등하게 배타고 와서 화살을 쏘아대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사로잡았다. 전술적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74],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75]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관우는 면수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엄이 서황을 따라,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다. 수몰과 관우의 공격 이후 번성에는 인마 수천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후일 오나라가 양양까지 당도조차 못 하고 후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완벽한 적기로 인식했을지도. 번성은 5, 6장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위나라 최고사령관은 포위당해 위험에 빠졌고,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구원군 총사령관은 사로잡혔다.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76] 당시 관우가 뒤흔든 화화의 기세는 정말로 중원을 뒤흔든 수준이었다. 관우가 불러 일으킨 추종자 무리들은 수도 근방을 위협했다. 당시 조조의 영토인 예주 일대에서 관우 추종 세력들이 들고 일어난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것도 다 이점 때문일 것이다.

5.2.2. 조조, 천도(遷都)를 말하다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우금은 홍수에 당했을 뿐,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8월, 조조는 서황#s-1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218년 김의, 경기, 위황, 길본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에서[77]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78]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5.3. 바뀌는 전세


조인을 포위시키고 칠군을 섬멸시킬 때까지 관우는 완벽했고 그 위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바뀌어 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남자들은 두명이었지만 진짜 관우에게 치명타를 안긴 사람은 따로 있었다.

5.3.1. 서황#s-1의 용맹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맹달에게 구원군을 여러차례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군악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 미방#s-1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79]에 있던 병량까지 마음대로 취해가면서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80]
10월, 서황#s-1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을 했다. 조엄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즉,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장료, 하후돈, 서상, 여건, 배잠, 여공 등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지만 환계의 조언에 따라 은서주개를 파견했다. 한편 12영(營)[81]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일단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려 적군의 시선을 돌리다가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은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10겹의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촉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와 부방도 죽었다. 동시에 번성 내부에서 사기가 오른 주둔군마저[82] 만총 등의 지휘로 양측에서 힘을 합쳐 공격하자''' 관우는 결국 포위망을 걷어내 버릴수밖에 없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서황이 10겹이나 되는 참호와 방책을 뚫고 적을 이겨 포위를 함몰하고 다수를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며 자신이 30여 년간 병사를 운용하며 옛날 병력을 운영한 자들의 말을 들었지만 곧바로 적의 포위망에 돌입한 자는 일찍이 없었으며 번성과 양양이 포위당한 일은 거, 즉묵 포위 때 보다 더 극심했으니 서황은 손무나 사마양저를 뛰어넘는다고 했다. 거, 묵의 포위라는 것은 과거 전국시대, 연나라의 악의가 제나라의 모든 성을 다 떨어뜨리고 거와 즉묵만 남아 제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뜻한다. 즉 조조는 그만큼 관우의 포위를 위태롭게 보았고 그 상황보다도 위험했던 관우의 포위를 병력의 증원을 받아가며 부쉈으니 서황에게 최고의 칭찬을 한 것이다. 이후 서황이 이끄는 병사들의 엄정한 태도를 보고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위에서도 상용 동부의 공백을 언급했지만 관우는 자신이 분명 번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자신했다, 실제 호삼성의 평론에서도 관우가 쉽게 퇴각하지 않는것을 '여태까지 얻은 공로를 무위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했고 관우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절호조의 기회였을 것이다.[83] 실제로 당시 조인군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고 만총전을 보면 양양의 여상도 포위된 상태. 한번 지원군만 제대로 와준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그냥 만용만은 분명 아니었다는 것. 면수의 완전 장악, 번성과 양양의 완전포위...관우가 유리한 기세를 타고 취할 수 있는 이점은 얼마든지 있었다. 불안정한 요소라면 사적인 감정으로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는 미방[84], 부사인 같은 공대 내부의 적이나 겉으로는 호의적으로 굴지만 실은 언제 뒷통수를 칠지 모르는 손권과 오나라, 밍기적 거릴 뿐 제대로 지원군을 보낸 마음조차 없는 상용의 군대. 결국 이것들이 관우의 기세를 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관우군은 군세를 몇 갈래로 나눈듯한 정황이 보인다. 첫째가 번성 북쪽의 언성이고 둘째는 관우의 본진. 셋째가 사총과 위두라는 곳이다. 이때 기록을 보면 '관우가 몸소' 5천을 이끌고 서황을 역격하러 왔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관우의 본진 외에 병력을 이 세력들로 분산해 양번을 감싸고 있었던 걸로 해석 할 수 있다. 사총에는 10겹의 녹각과 참호가 있었으며 이를 보면 관우는 증원군만 아니라 포위를 풀려는 시도에 대해서 철저히 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참호야 말로 방어에 있어 수비 보병이 큰 우위를 가지게 하는 요소. 허나 서황의 돌파 당시 이 곳은 관우가 겨우 지원한 5천 보기와 함께 결국 돌파당하고 마는 지점이 된다. 이것은 어찌된 것일까, 관우가 이 지역에서 수많은 지원군을 받은 서황을 상대로 급하게 5천 명의 보병과 기병밖에 동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준비한 대비태세에 비해서 병력이 너무 적었기에 준비가 무색하게 밀려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관우는 결코 그냥 서황을 맞으려 한것이 아닌 만큼 이쪽에서 맹달의 지원병력이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면 도움이 안 되었을 리가 없다. 충분한 수비를 구축해놓고 시간을 끌려던 속셈에 가까웠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알레시아 공방전과 완전한 대입은 어렵겠지만 일단 개념상으로는 비슷한 그림이다. 즉 '주력군은 성을 포위하고 포위망 바깥쪽엔 참호와 바리게이트를 쳐서 외부군도 역으로 격퇴한다' 이렇게 포위망 안에서 적을 맞기 위해 녹각과 참호를 준비했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매번 재촉하던 병력은 오지 않았으며 이 지역 수비를 맡고 있던 군대는 서황의 페이크에 속아 군대를 철수시키는 등 관우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충분히 모은 정예대군을 가지고 서황이 급격히 들이치고 관우가 직접 포위하는 군대의 일부를 빼서 긴급지원해 포위망이 얕아지자 그 사이를 노린 만총까지 안쪽에서 호응하니 결국 관우가 철저하게 준비한 포위망 한 구석은 무너지고 만다. 관우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전부 좌절된 것이다.[85] 사실 이것도 궤멸단계까진 아니었고 관우는 어느 정도 피해를 보곤 이대로는 양번 포위망 유지는 어렵고 양양에 집중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해서 병력을 후퇴시킨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 피해는 입었지만 서황군과 조인군이 관우가 병력을 수군으로 태울 때 뒤쫓아 피해를 입힐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병력이 오지 않는 이상 이런 철저한 준비를 갖춘 포위망이 의미없으니 우월한 지리적 여건을 선점하고 있다는 전술적 우위, 양양과 면수를 이용해 수비를 굳히고 전선을 고착화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후 양양이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고 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쨌거나 아직 위군은 관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오히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의 수군이 면수를 장악하였고 (번성포위망에 있던 병력이 양양으로 물러간 탓인지) 양양은 완전히 위군과 연락이 끊겨 굳건히 포위되었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서 건너서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86]
만약 손권의 공격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관우는 형주를 위나라의 블랙홀로 만들어버리며 위의 대다수의 전력을 형주 지방에 묶어놨을 것이다. 번성을 점령하고 남양/허창 방면으로 진군은 힘들었겠지만 전선을 고착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고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만 흘렀더라면 촉내에서 유비와 제갈량이 한중에서 관중으로 진군. 위군의 상당수가 형주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관중 진격은 위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87] 장안이 떨어졌다면 낙양과 허창까지 지척이라 위의 입장에서 관우에게 시달리던 때 이상으로 천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유력한 도시는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이 될테고.[88]
어쨌든 이렇게 서황#s-1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89],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5.3.2. 손권의 칭번과 회남전선


10월, 사마의와 장제의 제안처럼 손권이 번국을 칭하며 관우를 토벌하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조조는 이에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도 후일 조조가 주둔한 마피에 장료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후돈도 소집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219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며 회남에는 여러 주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양주자사였던 온회는 연주자사 배잠에게 적(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하였다. 온회전에 따르면 이후 조서가 내렸고 배잠과 예주자사 여공 등을 불렀다. 온회는 지금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는 건 먼 곳의 백성들을 동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 곧 (소집) 밀서가 당도할 것이라고 했으며 느긋하게 있던 배잠에게 서두르라고 말했고 과연 그 말대로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온회는 아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회남에 있던) 장료 등은 오래지 않아 각기 소집되었고, 온회가 예측했던 것처럼 되었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조조는 회남전선을 박박 긁어 모아 이곳을 텅 비우고 형주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동소전에 따르면 관우가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조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5.3.3. 여몽의 계략



5.3.3.1. 오나라의 준비

당시 여몽은 병을 핑계대어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다.[90] 그리고 당시 명성상 애송이나 다름없는 육손[91]을 후임으로 내세워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후임이 된 육손은 대충 "나 초짜니 잘 봐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다.(혼자 싸우시려니 힘드시겠다. 나도 좀 보태주겠음)" 이라며 북벌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당시 관우의 병력은 4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맞 상대하는 위군은 물경 10만이 넘어가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이 상황에서 육손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관우는 한 시름 돌렸다고 여기고 남군에 주둔시킨 병력을 위군을 상대하기 위해 빼낸다. 여몽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여몽전에 나오는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노숙 등이 유비와 힘을 합칠 것을 주장한 것은 조조의 위협 때문이었는데, 여몽은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면서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우를 환대하면서 위장술을 펼쳤지만 관우도 경계심을 풀지는 않아 남군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관우가 위군을 상대할 때 그는 다시 손권에게 자신이 병을 핑계로 물러나 적을 방심하게 한 후 공격을 하자고 한다. 손권이 이 일을 시의에게 물으니 그 또한 이 계획에 찬성하고 오범마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데다가 전종, 육손 또한 관우를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을 진술한터라 손권 역시 이 제안을 승낙하고 손교와 여몽을 좌우 도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정보과 주유의 예시를 들자 그만두고 손교에게 여몽의 뒤를 봐주게만 한다.
한편 관우가 계획대로 남군의 병력을 위군과의 전선으로 보내어 방비가 허술해졌지만 아직 형주를 공격할 명분은 없던 오군이라 적당한 구실만 찾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 관우는 우금의 포로 때문인지 미방의 수송 때문인지 육손의 편지를 보고 육손이 협조적으로 나설거라 오판했는지 양식이 부족해져 '''상관(湘關)'''[92]의 지역의 쌀을 마음대로 취하니 오나라 군대는 이에 지체없이 남군과 공안으로 공격을 가한다.

5.3.3.2. 한편 그동안 관우는

손권은 마지막에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 공격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조조의 신하들은 이를 손권의 말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했으나 동소가 나서 이 사실을 번성과 관우의 본진에 편지를 쏘아넣게 하니 번성의 병사들은 용기백배. 아직 번성과 양양과 면수 일대를 점거한 상태였던 관우는 무슨 생각인지 이것을 보고도 주저할 뿐 돌아가지 않는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관우는 비록 손권의 편지를 보았으나 스스로 강릉과 공안의 수비가 굳어서 손권이 단시일 안에 뽑아버릴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물의 기세를 통하여 번성에 다가갔는데 이를 풀어놓게 되면 반드시 앞서 세운 공로를 해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가 미루는 이유다.

라고 해석을 하였다.
과연 관우는 오나라의 국경에 둔영의 관측소를 세워둬 언제든지 신호가 오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안에 병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몽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그의 예상을, 아니 당시 형주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5.3.3.3. 여몽의 형주 점령

윤달[93]

,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을 붙잡았다.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버리고 투항했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오서 오주전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오서 여몽전

손권은 은밀히 서쪽으로 군사를 파견하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도록 하여 공안과 남군을 신속하게 점령하도록 했다. 육손은 곧장 진군했다. 그는 의도태수를 겸임하고 무변장군(撫邊將軍)으로 임명되고 화정후(華亭侯)로 봉해졌다.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樊友)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각 성의 관리나 이민족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투항했다. 육손은 금. 은. 동.의 관인을 청하여 방금 귀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해는 건안 24년(219) 11월이다.

오서 육손전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 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94] 관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관우가 경계를 위해 세워둔 둔들을 들키지 않고 정복한 여몽은 예전에 익양대치에서도 편지 두 장으로 장사, 계양 두 군을 항복시키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등현지를 이용해 영릉을 얻은 것처럼 이번에는 기도위로 있다가 손권에게 쫓겨난 우번을 손권에게 억지로 부탁해서 끌고온 후 이용하기로 한다. 우번전에 의하면 우번은 의술에 능했으므로 여몽 본인의 지병 문제도 있긴 했을 것이다.
당시 수비 책임자는 남군의 미방#s-1과 공안의 사인[95]이었는데 당시 미방은 군량을 태워먹은 죄로 관우에게 심한 꾸짖음을 들었고 이에 두려움을 품고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우번이 사인에게 언급한 것처럼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여몽은 우번에게 사인을 설득하게 한다.
이렇게 우번이 만나게 된 사인.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사인은 관우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군수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는 등의 일로 관우에게 질책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우번은 그를 직접 설득하려고 하나 의외로 사인은 공안을 지키면서 우번을 만나주지도 않는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사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편지 왈,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으니 내응이 있었다는 거쯤은 알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으로 육로를 끊으면 살 길이 막히는데 여기서 버텨봐야 니 가족만 망하고 싸워도 살 길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사인은 이 편지를 읽고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우번은 사인의 항복을 확인하자마자 이는 휼병[96]이니 응당 사인을 남군으로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한다고 하니 여몽은 우번의 말 대로 사인을 데리고 미방이 있는 남군으로 간다.
애시당초 상황상 협박편지로 항복한 사인 같은 사람에 비해서 서주부터 유비를 따르고 동생은 유비와 결혼도 했고 촉에 형 미축이 있는 미방은 남군태수로서 임명되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불화했고) 이에 미방이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미축전에 전한다. 그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결정적으로 군수물자를 태워먹은 일 때문에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품어서 '''대놓고 이전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97] 사인을 보자 별 미련도 없이 시원스레 성을 넘겨주고 만다. 그것도 '''쇠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대접까지 하면서.''' 정사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배반의 주체를 명백히 미방으로 한정짓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의 항복은 미방 본인의 독단이었기에 남군성 사람들로는 "이게 뭥미?"의 상황. 우번 말대로 내응이 있어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군이 나타나고 그 내응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98]이었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몇몇 사람이 복병을 만들어 성급하게 연회를 여는 여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우번이 이를 예측하고 한창 성 밖에서 축하연을 벌이고 있던 여몽에게 경고를 하고 여몽 또한 우번의 말을 들어 관악을 장악한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

5.3.3.4. 여몽의 심리전

그런 강릉 군민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그곳에 잡혀있던 우금과 관우와 그의 장수, 병사들의 가족들을 붙잡았는데 여몽은 그들 모두를 위로하고 보살폈으며, 군대의 약속을 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까지도 내린다.

민가를 돌아다니며 요구하거나 빼앗는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라.

여몽은 그 말을 지켜 여몽과 같은 군 사람이 공적인 물건인 관의 갑옷을 지키기 위해 민가에서 삿갓 한 개를 빼앗아서 갑옷을 덮는 사건을 발생했을 때도 군령을 범했는데 고향사람이라고 용서할 수는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군영 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길에 떨어져있는 것조차 줍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기로[99]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 이제야 소식을 들은 관우는 돌아오는데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몽이 원하던 바.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이 병사와 장수들의 가족들이야 말로 여몽이 미친듯이 잘 대해주던 그 사람들인지라 그런 그들의 말을 듣고 편지를 받은 관우의 사자가 돌아와 가족들이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보여주고 얼마나 잘 지내는지를 말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심지어 평소보다 더 잘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고 저절로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5.3.3.5. 육손의 유비 잔당 처리와 촉의 군사활동

한편 여몽이 이렇게 형주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일 동안 육손은 남은 유비의 잔당들을 처리한다. 219년 11월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가 의도군을 버리고 달아나니 여러 성의 장리와 만이 군장들이 모두 항복했다. 육손이 금은동의 관인을 청하여 이제 막 귀부한 이들에게 임시로 내려주고 병사 3천 명을 장군 이이에게는 수군을, 사정에게는 보병을 이끌고 험요지를 끊게하고 촉장 첨안(詹晏)[100], 진봉을 공격하게 해 첨안을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는다.
또한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해 대파했다.[101] 자귀의 대성[102]문포, 등개 등이 이병[103] 수천 명을 규합해 서방(촉한)과 서로 연결했지만 육손이 다시 사정을 거느리고 문포, 등개를 치자 문포, 등개가 달아나 촉에서는 그들을 장수로 삼았다. 그 후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유인하자 문포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항복하는데 이 앞뒤로 참획하고 초항하여 귀부시킨 자가 모두 수만 명을 헤아렸다. 장흠 또한 면수를 장악하며 관우가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을 차단하며 손환은 관우의 병사 50명을 잡고 수많은 말과 병기들을 얻었다.
한편 유비는 관우를 구하기 위해서 11월부터 성도에서 구원군을 보내고 장군을 임명하는 등 전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자귀,의도 근처에서 관우의 잔당들을 받아들이고 이들로 하여금 육손을 공격하게 했고 육손은 이를 막았다...로 정리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유비의 군사활동은 관우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잡혀 참수될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촉한의 행적은 관우군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게 됨(11월 이후)-관우군 잔당을 모아 육손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 관우 사망(12월)으로 정리 될 수 있을 듯하다. 관우의 죽음 역시 즉시 알려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5.3.4. 관우, 최후를 맞다.


적을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관우는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하고 손권에게 관우의 처리를 떠맡긴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104]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 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 명이 주둔했을 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5]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106]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107] 배송지는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 리나 거리가 된다며 손권이 직접 관우의 목을 치라 명령하진 않았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렇기에 관우는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은 곧 참살당했고 그 수급은 허도의 조조에게로 보내진다. 관우의 시신은 제후의 예로서 장사지내졌다. 이때 손권은 촉에 있다가 유비에 의해 공안으로 쫓겨난 유장을 얻고 그를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은 죽었다.
관우가 최후를 맞은 직후에도 형주 일부에서 저항은 계속되었다. 손권이 강릉에 도착하니 모두 다 항복하지만 반준만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손권은 직접 반준을 찾아가 설득시켜 아군으로 만들고 그를 이용해 무릉의 만이들을 규합한 패잔군 번주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한다. 또 거짓 항복했던 습진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패한다. 그럼에도 습진은 영릉의 7개 현을 들어 스스로 소릉태수로 칭하며 촉을 섬기면서 저항했다. 요화 역시 포로로 잡혔으나 도주하여 동쪽으로 진군 중인 유비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릉대전에서도 살아남아 촉의 멸망까지 지켜본다. 한편 역시 촉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 왕보는 유비의 이릉대전에 참가하나 실패하고 전사했다.[108]
하지만 손권이 강릉을 점령한 즈음에 대규모 역병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손권은 애써 점령한 형주의 조세를 면제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다독여야 했고 때마침 오나라 군부의 기둥이라 할만한 여몽과 장흠을 동시에 잃는 손실까지 겪는다.[109] 이런 질병과 더불어 중요한 상장들을 잃은 데다가 이후 곧이어 이릉대전과 조비의 남정으로 인해 손오는 이 방면에서 더이상의 확장을 이루진 못했다.[110]

5.4. 결과


관우는 죽었다. 촉은 형주를 잃었고 제갈량이 생각한 천하 삼분의 계획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형주에서 유비가 북벌을 위해 구축하며 준비했던 인프라나 정예수군을 비롯한 수만 병력의 손실, 그리고 관우라는 최고 에이스를 잃은 참담한 결과로 인해 파죽지세였던 촉의 기세는 꺾였고 오히려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유봉의 삽질과 그로 인한 맹달의 이탈로 인해 요충지 중의 요충지 상용을 잃기까지 했다. 상용이라도 보전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북형주를 견제할 수는 있었을테고 촉한의 북벌루트를 좀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촉한은 이후 이릉대전 이후 동맹이 된 오나라의 형주를 칠 순 없어 대신 상용 수복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제갈근은 후에 화친을 원하는 손권의 명에 따라 유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문득 들으니, 깃발과 북소리가 백제(百帝)성에까지 이르렀다 하니, 혹자는 신과 의논하길 오왕이 이 주(州)를 침입하여 취하여 관우를 위해하여서, 그 원한이 깊고도 커서 화친에 의당 답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하니, 이것은 작은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지 큰 것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폐하를 위해 그 경중(輕重) 및 대소를 논해보자면, 만약 폐하께서 위세를 굽히고 분노를 버리시고, 이 제갈근의 말을 잠시 살피신다면 계책을 세워 결정할 수 있으니, 다시 후왕들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관우와 친한 것이 선제(先帝)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보십니까? 형주와 천하 중 어느 것이 크고 작습니까? 모두 다 원수삼아 미워한다면,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 되겠습니까? 만약 이 수를 살피신다면,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이 말인 즉슨 오나라 입장에서도 형주를 통수쳐서 빼앗고 관우를 습격해 죽인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것과 같다. 다만 유비에게 한실부흥의 대업을 상기시키며 오나라를 치는것보다 위를 먼저 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비는 이후 양번까지 소개하고 완을 최남부거점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는데 이때 성을 불태웠다는 묘사로 봐서는 성 자체를 한번 해체한 것일 것이다. 손권이 이 지역을 잠시 점령하는 건 양양을 먹은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텅 빈 땅 들어간 거니까. 적벽 이후 해릉 광릉 라인서도 비슷한 소개 과정이 있다. 뭐 조인과 서황이 손쉽게 되찾지만 말이다.
이후 조비가 한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자 촉한을 건국해 제위에 오른 유비는 분노에 휩싸여 4만 대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 이릉대전이 발발해 처음에는 선전했으나 육손의 계략에 결국 대파당하여 수많은 무장들이 죽어 촉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릉대전의 대패로 실의에 빠진 유비 자신도 곧 관우를 따라가고 말았다.
오는 장강의 수비라인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그토록 그리던 형주 땅을 손에 넣었지만 후에 이릉대전의 발발과 뒤이은 조비의 남정으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했다. 간신히 촉과 위를 격퇴했지만 양양은 끝내 점령하지 못해 당초 계획한 형주 방어선 계획은 한쪽이 뚫린 채 미완성으로 남았고 오가 받은 상처는 매우 컸다. 더구나 수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뒤로 제껴버린 그 서주를 얻기 위해 수없이 합비를 공격하는데 국력을 소모해야 했고 끝내 합비의 벽에 좌절을 해야 했다.
한중 공방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흔들리던 위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형주-이릉대전으로 이어진 오와 촉의 싸움으로 두 나라는 국력을 많이 소모해 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비도 이릉대전이 끝난 뒤에야 뒤늦게 오를 총공격하는 바람에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 삼국구도를 고착시켜 버렸고 위 역시 이 구도에서 결정적인 이득을 얻진 못했다. 만약 조비가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릉대전 도중에 촉과 함께 오를 쳤다면 오는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형주를 잃고 유비가 죽고 인재들이 손실된 뒤 제갈량의 북벌은 처절하게 진행된다. 형주를 잃었기 때문에 익주에서 산을 타고 서량을 공격하는 한정적인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고 위는 단순화된 촉의 북벌루트를 방어할 수 있었다. 결국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에서 과로로 쓰러져 죽는다. 그전까지 적벽대전, 입촉, 한중전 승리 등으로 '드디어 유비가 팔자를 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보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시리어스함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흔히들 관우가 죽을 때 삼국지를 처음 덮고, 유비가 죽을 때 삼국지를 두 번째 덮으며, 제갈량이 죽을 때 세 번째로 덮는다고 한다.[111] 장비가 죽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덮을 생각도 안 난다고. 형주 공방전 즈음으로 초반부터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던 유관장 삼형제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에 촉빠들의 눈물샘을 심히 자극한다.
근본적으로 제갈량이 융중대를 유비에게 처음 건의했을 때는 유표의 형주를 온전히 승계해 형익을 아우르는 대전략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조의 진공 및 유종의 항복으로 인해 이 대전략은 중도에 수정되어야 했고 유비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내려가느냐고 신속하게 남형주를 장악하지 못했기에 형주의 수복은 이전부터 형주를 노리던 손권과 같이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비는 형남 4군과 남군까지의 점령을 동등한 동맹으로 보았고 형주에 있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만하다 여겼지만 손권은 유비를 한 수 아래로 보고 형주를 자신이 온전히 소유한 것이며 강릉에서 유비가 주유와 함께 공격한 공적은 온전히 손오의 공적이며 나머지 유비가 차지한 형남 4군 역시 자신의 영토로 여긴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노숙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비가 이미 형주에서 인심을 얻었고 손권은 강릉을 얻었지만 아직 완전히 형주를 어우를 역량이 되지 못했기에 사실상 유비를 형주에서 방어선을 줄이고 조조의 탱커 역할을 하도록 강릉을 빌려주었다. 이후 손권은 대놓고 유비를 미혹시켜 포로로 삼으려 하거나 사실상 혼인동맹을 가장해 자신의 누이인 손부인에게 관리와 병사를 이끌고 유비가 주둔한 공안 옆에 성을 쌓고 유비를 핍박했고 종국에는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납치하여는 시도까지 해 유비와의 동맹은 완전히 파탄났다. 한편 유비 역시 원래의 대전략을 위해 형주가 필요했으므로 해당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빌린 남군을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역시 자신의 대전략을 위해 손권이 익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양측의 목표와 명분, 대전략이 충돌했기에 결국 익양대치로 일단락 했지만 전반적인 양측의 우호를 주장하던 노숙이 죽고 관우와 여몽이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고 두 장수가 각자 추구했던 궁극적인 전략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니 형주의 분란은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 되지도 못하고 양측을 약화시킨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5.5. 관우의 패인


  • 병력과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상관의 군량미 탈취를 하든 안 하든, 수비병력이 없다면 동오는 무조건 기습공격을 할 작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병력과 군량미가 부족한 상태에서 번성에 허도까지 점령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번성도 제대로 점령하지 못했고 상용의 유봉, 맹달은 현지 안정화를 이유로 지원을 포기했다.[112]

결국 관우는 물량을 모아 승부하는 위군을 회전에서 격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패하여 번성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가 특별히 경계하는 바람에 위군 예비병력이 수없이 대기중이었으니 천혜의 요새인 번성과 양양을 점거하지 않고서는 이 병력을 막는게 어려웠다.
동오의 침공이 없었다면 관우가 수상전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양양과 면수를 점거하여 대치 국면을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육전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치 국면 이상으로는 어려울지 몰라도 최소한 회군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친절하고 사대부에게 엄했다는 말이 있는데 막상 여몽이 형주를 먹고나서도 반란가능성 높으니 바로 장악하라는 우번의 말과 엮어보면 형주호족들이 관우랑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다.(유비가 서주를 장악했을 당시 조표같은 도겸의 구장이 반란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눈물흘리며 나왔다는 사인은 그냥 일 때문에 욕먹은 감이 있고 사실상 사이가 나빴던건 반준과 미방이 전부인데 이 둘은 물자담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우가 형주공방전으로 전선을 늘인감이 있긴 하지만 롬멜처럼 위오에서 보급로를 끊었다는 말도 없는데 고질적 보급 부족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애초에 일을 제대로 했는지 의심해 보는 게 맞는다.[113]
다만 갑자기 생긴 포로 수만 명에 대해선 이들도 할 말이 있다. 지금처럼 먹고 살 식량이 풍족한 시대도 아닌데, 갑자기 밥먹일 사람이 두 배로 뻥 튀겨졌다, 거기다 얘들은 딱히 밥준다고 우리편 될 애들도 아니다. 느닷없이 포로 3만 명을 감시할 인원도 짜내야 하고 위랑 싸우기 전에 오나라에 3군을 준만큼 주변에 공출할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동오의 기습공격. 물론 관우 측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손오동맹 측과 조조가 팽팽한 상황에서 동맹의 빈집털이를 하진 않을 거라고 기대를 한 것, 여몽이 병을 앓고 있다고 여몽을 대신해서 온 육손 등을 얕본 것이 패착이었다.
  • 융중대(천하삼분지계)에서 언급된, 익주와 형주의 연계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형주 남군이 넘어간 이후에 촉에서 계속 의도, 자귀, 무현등에 잔존한 관우 패잔병에 지원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물리적인 문제로 서로 연계가 안 되었다고 보긴 어려운 부분이고[114], 한중왕 즉위 이후 유비가 한중과 익주의 안정화를 위해 여러 정책을 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익주의 정비가 완전치 않아서 그랬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익주의 정비를 생각하지 않고 단독으로 조위의 중심부(+잠재적인 오)를 염두에 두고 출전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방전쟁 설이나 한중 공방전 조공설을 따른다면 칠군수몰 등으로 인한 전선 확대와 조조의 위기감은 촉으로서도 꽤 뜻밖의 일일 테니 참작의 여지도 크다.
  • 한중에서 얻은 승리와 반란을 사주해서 기세를 탄다는 점은 좋았지만 위의 이유 때문에 북형주 점령이 성공할 확률은 낮았다. 촉군이 위군에 특별히 동원병력이 많거나 병력 질이 압도적인 상황이 아니라서 공성은 물론 회전도 이긴다는 장담이 없었고 마침내 공성전 회전 모두 실패했다.
이것이 일종의 예방전쟁으로 벌어진 전역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설을 따른다면 관우는 병력을 빼야 될 시기를 놓쳤다고 봐야 한다(지나친 성공에 고무되든, 상황이 여의치 않았든). 사실 관우 스스로도 멧돼지에게 물리는 흉몽을 꿨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사서에 수록된 걸로 봐선 실패를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예처럼 관우 본인도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조급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에 집중된 조조의 압력을 풀어 내기 위한 조공의 성격으로 유비가 위군 견제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과만 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 있으나 당대 전후에도 총사령관으로서 물리적인 우위를 점한 다음에 공격을 나간 사례가 적지 않으므로 이는 관우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관우가 독단으로 북형주 공격에 나선 것이 아니라 유비의 명에 따른 것이라면 결국 유비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겠다. 물론, 이 역시 한중전의 조공 성격이라면 이런 확전에 대해 완전히 유비의 책임이라고 보긴 어렵다.
원인이 어느 쪽이든, 관우와 형주군의 능력 이상으로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 가장 문제였다.

5.6. 연의에서의 묘사


이 부분은 위의 두 개와는 달리 대부분의 '''전투''' 기록만은 일치하는 편이다.
다만 손권의 혼인 논의에서는 손권 자체를 쥐새끼라고 욕해 모종강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

라며 관우를 깐다.
또 관우가 거짓항복을 시도한 기록이 연의에는 나와있지 않으며 이릉대전 때 죽는 왕보#s-1가 관우의 죽음을 알고 성벽 아래로 투신자살하며 이후 여몽이 이후에 피 토하고 죽는다던가 등의 관우 죽인 녀석들 복수를 소설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서는 아예 '''하늘로 승천한다'''. 도망치던 중 잡히기 직전 하늘에서 "운장은 그만 싸우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관우와 관평은 싸움을 그만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즉 관우는 유비를 돕기 위해 내려온 신이란 얘기. 흔히 알고 있는 관우가 잡혀죽는 내용은 모종강본으로 사서의 내용에 근접하게 묘사하였다.

6. 이에 대한 평들




7. 기타 창작물




[1] 물론 장강 이북의 양양, 강릉, 남양 같은 곳을 가리킨다. 장강 이남의 4군은 그렇지 못하다. 무릉만으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이 많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후한서 지를 보면 인구는 꽤 있었다.[2] 물론 손권은 나중에 교주도 얻지만, 이 땅은 본래 사섭 일족이 다스리며 오나라에 신종하는 자치구역의 성격이 강했다. 본디 남방교역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쓸 만한 땅이었으나 손권과 여대가 이 땅을 직속으로 다스려보겠다고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손권 말년부터는 반란의 메카가 되어 별 쓸모없는 땅이 되어 버렸고 오나라 말년에는 진나라에 넘어가기도 했다.[3] 손권을 거기장군 서주목으로 올려 손권의 양주 지배를 확고히 해준 대가로 손권이 형주목으로 삼았다.[4] 거기에 영웅기에 따르면 유표가 병에 걸리자 유비는 영형주자사(領荊州刺史)로 올랐다. 영웅기의 저자 왕찬은 당시 형주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고 유표의 이름으로 외교문서를 대필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외교 쪽 일을 담당했을 테니 유비를 조정에 상표한 것을 본게 확실할 것이다.[5] 손권이 6군의 군주고 유비가 땅 한뙈기 없는 난민 신세라고 하면서 유비가 종속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적벽대전 당시 유비는 유기와 함께 강하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강표전에서도 엄연히 양측관계를 처음부터 '동맹관계를 맺었다'(結同盟誓)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치통감과 제갈량전에서도 '지금 장군께서 진실로 맹장(猛將)에 명령하시어 수만 군사를 통솔하여 유예주와 함께 협칙(協規, 협정과 규칙을 세움, 협력함)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을 격파하면 조조는 북으로 돌아갈 것이고 형, 양의 세력이 강해져서 정족(형주의 유비, 양주의 손권)의 형태가 됩니다'라고 하자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이 문제를 여러 부하들과 논의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둘간의 관계가 처음부터 협력관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자치통감과 노숙전에도 손권이 보낸 노숙과 유비, 제갈량이 만나 '즉시 함께 수교하기로 정하였다'(即共定交)라고 했다. 즉 동맹간의 역학관계에서 힘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유비와 손권은 동맹이 맞다. 유비는 이후 주유를 맞이할 때도 동맹으로서 가보지 않는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고 자치통감과 오주전에서조차 익양대치로 동맹관계가 파탄났다가 다시 화해할 때 '다시 곧바로 동맹을 맺었다.'(更尋盟好)라고 써서 이전의 동맹상태를 나타내고 있다.[6] 청니 대치 때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중국 위키백과에서는 이때로 적혀있어서 남군 전투 때로 둔다.[7] 본디 임저와 상양은 208년부터 양양에 속했는데 적벽대전 이후 관우에게 호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 이후 다시 조위에 넘어갔는지 조예시절에 양양남부도위에 소속된다.[8] 본래 관우는 육군 위주로 병력이 운용되는 하북 쪽 출신임에도 수군도 능숙히 다뤘다.[9] 이 내용은 이통전에만 있는 데다가 자치통감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시기가 모호하다. 어쩌면 조인이 1년 후 강릉을 잃고 달아날 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편 한동안 이통이 관우를 쳐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지만 정확하게는 포위망을 쳤다고 해야 한다.(중국어 위키백과) 이통 항목에도 적혀있다. 즉, 어디까지나 도주에 성공했지 포위망을 무너트리지는 못했다.[10] 강하군이 손권과의 접경지역이었고 실제로 치열한 전투가 있던 만큼 그에 대비한 군량이 축적되어 있었다고 봐야한다. 유비가 강하로 도망친것은 208년 9월이고 적벽대전은 208년 11월에 끝나며 직후 유비가 형남 4군을 차지하기 위해서 행동을 개시한다. 강하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인만큼 2만을 몇개월 먹여살릴 군량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11] 무제기에도 12월에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고 나온다.[12] 당시 강하는 유비 땅이었으므로 이곳을 거쳤으리라 보인다.[13] 심지어 손권은 한당을 보내어 진란을 구원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뇌서는 유비에게 간 것이다.[14] 적벽대전 당시 손권이 3만의 군세를 가지고도 정작 주유, 정보에게 2만만 떼어준 것은 손권이 양주의 이런 불온한 움직임을 컨트롤 할 필요성이 있어서였을 것이다.[15] 부세라는 것은 세금을 어떻게 내야하는지 정한 후 그만큼 거두어 들이는 세금을 뜻하는것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세금을 매겨야할지 행정체계가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게 이전의 행정체계를 계승한 것이든 제갈량이 새로 만들었든지 간에, 또 제갈량은 이렇게 거둔 세금을 군대의 무기와 양식으로 채우게 했다고 나오는데 즉 지방에서 거둔 세금을 중앙에 있는 유비에게 보내 군대를 육성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쯤되면 유비가 형남 4군을 평정하고 행정체계를 일찌감치 구축했다고 봐도 좋으리라.[16] 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17] 유비는 (자치통감과 무제기에 따르면) 강남 여러 군을 208년 12월 경에 얻었다고 했는데, 이때 관우와 장비에게 잠시 강릉 전선을 맡기고 유기를 형주자사로 올린 다음 강남을 '순시' 한 듯 하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에는 조운이 편장군으로 강남을 평정하는 데 종군했다고 나오므로 유비가 심복장수인 관장조를 나누어 조운이 4군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18] 유구(油口)라고도 한다.[19] 1760~1817, 청나라의 문인, 학문을 위해 모든 것을 살피고, 시문은 공교하고, 그림을 잘 그리며, 협객을 좋아하며, 병가의 말과 통했다. 당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광사(狂士)'라고 불렀다.[20] 현대에는 여성이 20대 초중반에 결혼해도 빨리 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고대에는 여성이 20대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불과 5~60년 전 무렵까지 현대사회까지도 이런 인식이 존재했다.[21] 선주전에서는 '유기가 병들어 죽자 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바쳐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구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정을 끈끈히 얽어맸다.' 라고 써서 동등한 관계로 묘사했으며 산양공재기에선 아예 '유비가 돌아와, 좌우에게 이르길 "손거기(孫車騎)는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 그의 아랫사람이 되긴 어려우니,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곧 밤낮으로 길을 재촉했다.'라고 썼다. 즉, 유비는 어디까지나 동맹의 입장에서 일단 형주를 대여하고 힘의 차이를 인정했지만 스스로를 손권에 종속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2] 이 사건은 강표전에 언급되며 조조의 행동과 함께 주유를 의심하게 만드려는 유비의 행동으로 나온다.[23] 선주전, 어떻게 번역하면 '''손권을 아랫사람으로 삼기엔 어려우니'''란 번역이 될 수도 있다. 건강실록에는 "손거기의 기운은 두루 넉넉하나 그의 아랫사람이 되기는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4] 사실 강릉 앞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는 가운데 일을 진행시켜야 하며 강릉성 혼자 물자를 대기는 무리고 보급을 위해 장강 남쪽에서 물길을 점유하는 유비군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천하삼분이라는 계획이 있는 유비군이 상황이 어렵다는 식으로 제대로 협조를 할 리가 없다. 이후의 유비조차 익주 안의 내응으로 익주에 무혈입성하고 나서 익주를 정벌했다.[25] 화살로 어깨죽지 쪽 급소를 맞았다, 당시에부터 부상이 대단히 심해서 조인과 싸우다가 물러났을 정도, 연의에선 이 부상을 가지고 조인을 격파했다고 각색했다.[26] 손권 측이 본인들이 얻은 형주 남군땅 인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형주를 얻음으로써 조조를 형주에서 단독으로 막을 수 있다는 역량이 있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형주에서 인심을 얻은 유비를 강릉에 두어 조조 상대로 방패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조가 재차 남침해 온다면 손권은 막아낼 재간이 없다. 만약 유비에게 형주를 내 준다면 조조가 쳐들어 왔을 때 우선 유비부터 돌파해야한다. 친유비파의 실제 목적은 유비를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것이다.[27] 이에 관한 것도 아래 시기 참조.[28] 호북성 강릉현 양자강변.[29] 사선으로 읽어야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에는 사이현으로 읽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30] 적벽대전 이후의 이 부분이 오측 본전 기록에는 전부 누락이라 오서만 보면 유비는 강릉 공략에 아무런 지분도 없으면서 강릉을 그냥 얻은 걸로 착각하게 만들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배송지가 주유전에 오록 주석을 붙어놨긴 하지만.[31] 후일 적절한 시기가 되어 양주를 먹으면 돌려준다는 것은 진심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 형남 4군과 강하땅은 유비가 직접 얻은 땅이므로 형주를 적절히 갈라먹겠다는 의사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32] 경우에 따라서는 형주 대여 관련해서는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오나라쪽의 관련 기록, 오나라의 기록을 보고 쓴 진수의 '삼국지 오서', 또 삼국지를 보고 쓴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호삼성의 '통감주'의 기록된 내용 상당수를 논박 또는 날려버릴 수 있다.[33] 그러니까 제갈량이 당장 형주는 우리가 먹을 거라고 했는데도 손권은 입도 뻥끗 안 했다는 소리다.[34] 위에서도 나오지만 이 기록은 노숙전 본전만 아니라 노숙전 주석 한진춘추의 기록에도 있다. 조익의 주장으로는 '오나라인들이 꾸며낸 사실이 후대 사서들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35] 조익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둘째치고 이에 대해 통감집람(通鑒輯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주의 동남 문호(門戶)는, 오, 촉의 세력이 필시 다툴 곳이었다. 그러나 두 영웅이 서로 다투고, 조조가 천자를 데리고 제후에게 명령하여, 마침내 평화롭게 한(漢)의 제위를 바꿀 수 있었다. 손권이 진실로 의론에 만족하지 못하여, 사익을 취하는 과오로 인해, 유비가 사양할 수 없었다."[36] 건강실록에 따르면 실제로 1만은 손권이 중군으로 가지고 있었고 오로지 2만 명만이 주유와 정보에게 있었다.[37] 이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은 없는데 강표전에서 주유가 병력이 적음에 실망하는 유비더러 '님은 우리가 공을 세우는걸 지켜보시라' 라고 했던 기록을 뜻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유비가 2천 명만을 가지고 관망했단 기록이 있기 때문. 이 기록은 손성부터가 오인들이 공을 독차지 하려는 말이라고 대차게 디스했고 자치통감도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2천 명을 가지고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38] 다른 번역: "이것은 과거에 둘이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하고자 했음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유비만이 손권에게 빚을 지었으며 손권은 유비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39] 다른 번역: "이는 무릇 서로가 의논함에 있어 쉽게 성사되도록 한 것이다." (촉이 양보한 것이라는 뉘앙스)[40] 이 기록의 원전은 오나라 사람 원엽이 쓴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이다.[41] 리둥팡이 어떤 기록을 보고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세한 기록은 자치통감, 정사 삼국지를 통틀어 없다. 다만 정보전에 '손권이 형주를 나눠 유비에게 주자, 정보는 다시 돌아와 강하를 다스렸고, 탕구장군으로 승진하여 죽었다.'라는 기록은 있다.[42] 이때 여대가 한중을 공격하려고 했던 기록이 있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갔는지는 불명.[43] 정작 쳤는지 안 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나라에는 관련 기록이 없으며 삼국지집해에서는 오나라에서는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고 유비가 뻥카친 것이라고 했다.[44] 이 셋이 떠난 시점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45] 제갈량이 2차로 떠난 부분은 언젠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46] 선주전(유비전)에서는 '當以荊州相與'라고 말해 (손권이 사자를 보내 형주를 얻길 원한다고 하니 양주를 얻으면) '응당 형주를 주겠다'라고만 했지만 오주전(손권전)에서는 '乃盡以荊州與吳耳'라고 써 (손권이 제갈근에게 형주 여러 군을 구하게 하니) '형주를 오에 '''다''' 주겠다'는 식으로 유비의 발언이 바뀌어 있다. 손권 측이 유비의 발언을 형주를 다 주겠다는 식으로 해석했다는 증거이다.[47] 당연하지만 여긴 남군 공방전 이후 온전히 유비의 영토인데 다른 세력 관리들이 나타나 '이제 이곳은 오의 영토임' 이러면 누가 그냥 놔두겠는가. 강경파인 관우가 아닌 화친파인 제갈량이 있었어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48] 자치통감에는 손하로 되어있다.[49] 오주전에는 여몽이 손교, 반장과 같이 도착했다고 되어있다.[50] 여기나 위에 있는 여대 얘기는 여대전에만 실린 얘기며 자치통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215~22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 확실할 뿐 이때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다.[51] 본래 이름은 노숙성이었으나 후일 기능이 제방으로 바뀜에 따라 이름도 바뀌었다. 국내 사이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 검색되지 않지만 구글에서 鲁肃堤라 치면 검색 결과가 나온다.[52] 일단 여기에 넣어두었지만 이때의 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감녕#s-4참고.[53] 근데 유비에 대한 지원으로 따지면 솔직히 오나라보다 유기가 더 많이 해 주었다. 당시 유비군 절반 이상이 강하태수였던 유기의 군사들이었고 오나라가 군사 보태준 기록은 유비가 장비와 군사 1천 명을 오나라 측 군사 2천 명으로 교환한 기록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면 손권 측도 겨우 3만밖에 동원하지 못한 주제에 2만 명으로 같이 싸운 것에 대해서 생색을 낸 것. 물론 유비가 자력으로 조조와 싸울 상황이 아니었긴 했지만 손권도 손유 동맹 아니었으면 항복하자는 호족들 눈치가 보이는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위에서도 얘기 나왔듯, 애시당초 유비는 남군만 빌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손권은 유비가 자력으로 얻은 땅까지 빌려줬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54] 연의에선 주창이다.[55] 엄밀히 말하자면 당시 유비가 강하 하구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 말은 틀렸다, 노숙이 은근히 강하는 유기, 유비 소유였다는 걸 빼버린 것,[56] 협상 시점에서 오는 형남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유비 측 잔당을 일망타진하는 덴 실패했으며 익양에서 관우와 노숙이 대치하고는 있었지만 후방엔 문제가 없었던 반면, 유비는 익주를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조조가 한중에서 장로를 공격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57] 익양 대치 이전 무릉군을 손권이 점유했다고 가정한다면 그 난리쳐서 얻은 게 고작 군 하나뿐이다.[58] 217~219년 즈음 오지의 여러 인물들의 기록을 보면 오나라 전체적으로 관우를 치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에 대해서 배신이라고 굳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일단 저 거슬리는 유비부터 치고 봐서 이득을 얻자는 시각이 팽배했던 것. 어차피 서로 감정 상할 대로 상해있었고 손권은 노숙이 죽은 이후 노숙이 남군을 빌려주라고 요청한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59] 정작 여몽이 죽고나서 손오는 이전과 같이 합비를 공략해 서주, 예주를 지속적으로 노렸다.[60]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61]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62] 자치통감과 온회전에서는 이 당시 219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였다고 한다.[63] 물론 이 홍수 이용은 양번 함락까지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칠군이 3만이나 살아나 항복하는 사태는 관우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복하겠다는데 익사하게 놔둬도 안되고 항복 받아주면 보급이 문제고, 칠군이 날라가버리면 원군은 또 올 테고 말이다.[64] 조인은 방덕에게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번성 북쪽 10리에 주둔하게 했다.[65] 관우가 처음 공격을 시작했을 때 '羽率衆攻曹仁於樊'라고 했는데 이는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관우전 본전에서도 '羽率衆攻曹仁於樊'이라고 동일하게 적고 있다.[66] 자세한 지도1, 자세한 지도2, 더 자세한 지도1,더 자세한 지도2[67] 양양 남쪽에 보면 현산이라고 고지대가 있는데 관우는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군사들을 뺐을 가능성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양양-번성의 고지감제가 가능한 현산에 진을 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관우가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방덕과 직접 싸우고 있었다가 방덕이 북쪽으로 이동했으므로 관우도 번성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즉, 지형문제라기 보단 우금군은 대부분 전력을 일단 보존했다는 점에서 그냥 '관우보다 준비와 대응이 부족했다'로 끝날 문제다.[68] 물에 빠져 죽거나 관우의 공격에 죽은 위군은 제외한 수치다. 원래 7군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만 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편 화양국지에 따르면 7군의 규모가 3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거의 전군이 사로잡힌것이 된다. 한편 중국어 위키백과 번성지전(樊城之戰) 문서에선 1군의 규모를 12,500명으로 보는데 이는 조조가 직접 펴낸 손자병법의 주석 손자략해(孫子略解) 4권에서 조조 스스로 말하길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길 12,500명을 군이라 할 수 있다(曹操曰:《司馬法》曰:「萬二千五百人為軍。」)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면 7군은 8만 7천 500명이다. 즉 아주 보수적으로 봐도 7군은 3만 명이고 많이 보면 10만이 넘는 대군이다.[69] 조인전 기록의 경우 성안에 수천 명으로 수비했다고 나오는데, 방덕이 얼마만큼의 병력을 들고 갔는지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까놓고 방덕에겐 수만명의 병력을 들고 가게하고 조인이 본진 수천을 들고 수비할 수도 있는것이고. 확실한 것은 자치통감과 방덕전에 따르면 방덕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그가 이끄는 관리와 무사들 역시 항복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방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조인이 상당한 병력을 지니게 했다고 보인다. 애시당초 조인이 방덕을 의심했다면 선봉으로 삼아 성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을 터이다.[70] 연의에선 주창에게 자맥질 싸움 끝에 사로잡힌다.[71] 218년 1월 경기, 위황의 난에서 관우가 강성해 이들이 관우와 손을 잡으려 한 것처럼 언제 허도의 반조조세력과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조조가 관우를 위협으로 본 한 요인이 되었을것이다.[72] 게다가 조비의 남정 당시 오나라의 수군은 관우의 수군에 못지 않게 많았다.[73] 조인이 강릉의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걸 위나라 수뇌부도 알았을 것이다. 후일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부임한 왕창이 승리와 수비를 위해서 주둔하던 완에서 신야로 관서로 옮기고 배가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니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오나라와의 마찰이 없었을 당시에 부임한 왕창이 북형주에 수비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 쓰이는 배가 있다고 증언한 것도 그렇거니와 왕기 수군이 있다는 증언을 하며 육군과 나란히 농사를 지어 군대의 자제와 식량 조달을 해야한다고 했다. 조인이 번성에 있을 당시엔 관우를 토벌하기 위한 공격을 위해서든 수비를 위해서든 위나라 소속 북형주에 수군이 왕창 때보다도 더욱 더 필요했을 텐데 이 당시 위나라 수군 관련 기록이 없는 건 미스터리다.[74] 만총전에서 만총의 언급에 따르면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이미 겹현 아래에 있어, 허도로부터 이남의 백성이 어수선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관우의 장수와 군사들이 허도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던 것, 이 말인 즉슨 완성과 그 일대 고을들이 관우가 예주로 진출하던 말건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번성 이북은 관우의 무리에게 무주공산이나 다를 게 없었다는 말이다. 원소 이래로 조조의 근거지 예주와 황제가 있는 허도 근처에서 깽판(?) 친 인물은 관우밖에 없다.[75] 육혼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76] 참고로 현대에 와서는 번성(샹양 시)에서 허창(쉬창 시)까지는 중간에 (난양 시)를 거쳐서 차타고 3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 그러니까 서울-대구 거리 정도다.[77] 삼보결록주에선 경기, 위황의 난 당시 아예 관우가 강성하여 조조는 업에 가 있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까지 있다.[78]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하였다고 한다.[79] 위에서 나왔다시피, 영릉이 손권의 영역이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80] 당연하지만 번성에 있던 관우가 직접 털었을 가능성은 낮다. 관우 휘하의 부하들이나 후방의 미방이었을 것인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보급담당자인 미방이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약탈의 시점에 이미 오나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자.[81] 동한무렵, 병사들이 주둔하던 곳을 말할때, 많은 수의 병사가 주둔하던 곳 : 營, 적은 수의 병사가 주둔하던 곳 : 塢라 한다.營은 邊郡(변군: 변방의 군, 국경지역)에 많이 있으며 塢는 內地郡國(안쪽의 군, 국)에 많이 있다. - 중국통사 中 [82] 서황측이 몇번 화살로 편지를 보내 지원군이 온 사실을 알렸다.[83] 조조의 천도론도 그게 실질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나이먹고 사람이 바뀌어서로 해석하기엔 무리인 구석이 있다. 이미 번성과 양양은 사실상 관우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관우가 증원군을 이용하고 보급이 충실했다면 관우의 인수를 받아 허도 인근을 들 쑤시는 수많은 반군들과 내통해 정말로 허도가 위험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뜩히나 한중공방전으로 위신이 떨어진 조조인데 허도까지 위협받고 황제가 있는 허도가 함락 위기에 몰린다면 조조세력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여지가 있었다. 조조 역시 다음 해 1월에 바로 죽어버리는 만큼 자신의 남은 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을 터, 만약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관우가 이런 식으로 황제를 탈취하고 중원에서 설치고 다닌다면 조비가 위왕 자리를 계승하더라도 위나라 내부 사정이 너무나도 불안정해질 공산이 컸다.[84] 특히 미방은 남군의 군사기물을 깡그리 불태워 날려먹고 관우의 질책을 받자 불만을 품고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리가 만무, 오히려 자기가 지원을 명분으로 상관의 쌀을 마음대로 취해 오나라에 명분을 제공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85] 유비는 후에 유봉맹달의 결정에 큰 원망을 품었다. 관우의 전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을 터이나 개나소나 '당연히' 보내주는 최소한의 증원을 전혀 하질 않아서, 이길 전장도 지게 만들어서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86] 양양과 번성이 천혜의 요새인 이유는 면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도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의 몽골군이 양양과 번성을 쳤을 때 면수를 장악하고 번성이 먼저 함락되자 양양도 뒤이어 항복한 사례가 있다, 관우의 사례와는 좀 다를지 몰라도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을 고립시켰다는건 생각보다 크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87] 강이야말로 최적의 방어요소로 방어군에게 엄청난 방어적 이점을 주는데, 관우는 비록 번성에서 서황만총의 협공으로 격퇴되어 물러났으나 이 시점에서 이미 수군을 동원한 면수 완전장악과 양양 완전 포위 함락직전이라는 성과를 달성한 상태였다. 즉 면수를 끼고 관우 본인이 양양에 도착해 완전 포위되어 함락 직전인 양양을 기어이 함락시키고 위군 상대로 방어전에 돌입할 경우 촉군이 완전히 수군으로 장악한 강을 끼고 결사적으로 버티면 위군은 대체 어떻게 공세를 해야 할지부터가 난감한 상황이 오고야 만다. 흔히 아무리 밀약을 맺었다 한들 하후돈장료를 회남에서 완전히 뺀 게 조조의 노망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관우는 조조로서도 최대한 물량을 모으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인 손권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야 한다는 도박수를 내걸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손권은 그토록 원한 '''회남의 공백'''이라는 결정적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 도박수에 조조의 의도대로 충실히 따랐다.[88]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결국 손권이 꿈에도 그리던 합비성을 포함하여 수춘을, 선전한다면 서주 일대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국력 차이가 크게 줄어든다는 말.[89] 무제기에서는 10월 조조가 낙양으로 돌아와 지원군을 보냈다고 하였고 조엄전에는 열흘 후면 지원군이 도착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조조가 10월 초경에 낙양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이고 번성에서의 심리전, 이후 양양 포위까지 합치면 해당 전투는 10월 중순부터 벌어졌다고 추측하는 게 가능하다.[90] 주전파인 자신이 전선에서 떨어져 관우를 안심시키려는 계략이긴 했으나, 실제로도 여몽은 지병이 심해 그해 219년 사망한다. 관우가 경계를 안한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다.[91]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183년생이니 36살.[92] 상관은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근방이다. 호삼성 주석에 따르면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라고 하고 조일청이 말하길 '방여기요 75권에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 81권에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潇,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촉한과 손오의 경계 지역, 혹은 완충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93] 219년의 윤달은 윤10월이다, 날짜 순서는 10월 → 윤10월 → 11월 → 12월.[94] 밑에서 우번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내응자의 도움이 컸을 가능성이 크다. 호삼성은 미방과 사인이 배반하지 않았다면 관우가 알았을것이라는 설을 내세운다.[95] 부사인이 아니다. 여몽전, 손권전, 계한보신찬에는 모두 사인(士仁. 성이 사, 이름이 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직 정사 관우전에서만 부사인(傅士仁)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정황상 오기의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96]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97] 실제로 정사의 주석인 오록 기록에는 미방이 남군성의 군사기물을 태워먹은 실수로 인해 손권과 내통했다고 기록했다.[98] 당연하다. 20여 년을 넘게 유비를 섬기고 군주의 인척이기까지 하고 그의 형은 유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내통한다는 걸 예측하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99] 60~70 이상 된 노인들[100] 자치통감에는 담안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주석에는 첨이 성이라고 기술돼있어 상충한다.[101] 방릉은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102] 大姓 명족, 호족[103] 夷兵, 이민족 군사[104] 田福生 著 《關羽傳》 中国文史出版社 2007年出版 ISBN 978-7-5034-2022-1 第十二章 孤立無援,飲恨千古 第三節 兵敗麥城,章鄉之難 之 困守麥城.[105] 이렇게 될 경우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의 죄가 더해진다. 관우를 단순 돕지 않은 것 외에도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106]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107]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연의나 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108] 연의에서는 맥성에서 관우와 관평의 목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자살한 걸로 나온다.[109] 여몽의 급사 자체는 이전부터 앓아온 지병 때문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장흠까지 동시에 죽은 만큼 장흠은 이 질병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형주 공격에 참전한 또다른 장수 손교도 이 때 사망. 감녕도 이 즈음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15년설과 219년설, 관우를 잡은 후 반장이 감녕의 군대를 이어받았다.)을 보면 역병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우의 최후에 대해서 오나라 장수들이 이 시점에 많이 죽어서 관우과의 교전으로 오나라 장수들이 죽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우선 여몽은 이전부터 지병이 심각했고, 손교는 후속 부대를 맡았으며 장흠은 면수에서 죽었고 감녕은 어느 년도에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작 최전방에서 관우를 추격한것은 주연반장인데 이 두 사람은 관우를 잡은 후에도 무사했다. 따라서 갑작스런 역병에 의한 잇달은 죽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110] 사실 무릉 같은 경우에는 계속 반란이 일어나 오나라가 통제를 못하는 지경이었다.[111] 다른 말로는 던진다는 과격한 말도 있다.[112] 유봉의 치명적인 잘못이긴 하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유비도 사정은 비슷했다. 물론, 유비는 여력이 없어서 지원을 못 했을테니 유봉에게 지원을 기대했을 것이다.[113] 특히 미방의 경우엔 사전에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상관 쌀 탈취도 그렇고) 고의적으로 보급에 소홀했을 가능성이 높고 반준 역시 관우랑 화목하지 못했단 걸로 업무태만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그나마 미방은 남군태수였으니 실질적으로 실무엔 이 사람이 더 가까웠을 텐데 보급은 어디갔는지 모를 정도고 형주 함락되자 손권이랑 말 한마디하고 바로 태세전환해 버린다.[114] 당장 익양대치 때는 관우가 3군을 빼앗기자 유비가 곧바로 직접 지원을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