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

 

'''Potsdam Conference'''(영어)
'''Потсдам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러시아어)
'''Die Potsdamer Konferenz, Konferenz von Potsdam'''(독일어)
'''ポツダム会談'''(일본어)
[image]
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1. 개요
2. 결과
2.1. 합의 사항
2.2. 냉전의 시작
3. 같이보기


1. 개요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세실리엔 궁전[1]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이 5월 9일 나치 독일 항복 이후 유럽의 재건과 태평양 전선 종결을 논의한 회담이다.
미국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클레멘트 애틀리 총리[2],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이 참석하였다.
중국 대표 장제스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엔 무리라고 판단,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회담 중인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련이 제외된 이유는 당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45년 8월 8일)를 하기 전이었다.
이로 인해 고등학교 교과서 중에는 포츠담 회담을 미/영/중끼리 했다는 서술이 있는 경우도 있고, 나무위키 포츠담 회담 과거 문서에는 본문에 미/영/소만 표시되는 등 중구난방서술의 원인이 되었다.

2. 결과



2.1. 합의 사항


  • 일본
유럽에서의 전쟁은 5월 9일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됐지만, 일본 제국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임에도 1억 총옥쇄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 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없는 일본 제국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3]
  • 독일 / 오스트리아
독일 / 오스트리아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을 통치하기로 결정된다.[4]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의 정확한 영역이 정해져서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부 영토의 대다수를 상실하고 이 영토는 폴란드와 소련에게 귀속된다.[5] 전쟁 당시 피난 간 피난민을 포함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바깥에 살고 있던 800만 명의 독일인이 고향을 잃었고 그밖에 중동유럽 일대에 거주하던 700만 명의 독일인이 추가로 추방된 건 덤. 당연하지만 히틀러가 다른 나라에게서 강탈한 영토는 원상복귀가 이루어졌다.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은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뜯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6] 소련의 점령 지역이 작센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지역이었던만큼 영/미 측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시설 중 10%를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탈나치화, 비무장화[7],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됐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이 해체가 된다. 연합국은 아예 '독일의 경제력은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한다.'라고 결정짓고 독일을 경공업 국가로 만드려고 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냉전으로 인해 싹 다 초기화된다.[8]
  • 그 외
서방 측은 스탈린에게 폴란드에 멋대로 공산당 정부를 세운 것에 거세게 항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에 임시정부를 세운 뒤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스탈린의 기만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런던에 존재했던 폴란드 망명 정부는 말 그대로 새가 됐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는 1990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는 런던에서 계속 머무르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한다.[9] 그래도 영국 측에서 노력을 한 끝에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자유 폴란드군은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이 허락됐다...는 것은 표면상이고, 실제로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사자 풀 뜯어먹는 소리를 듣으며 박해받았다. 소수는 처형되었고, 거의 대부분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덧붙여서 인도차이나 일대에서도 전후 질서가 계획되는데, 베트남의 분리가 최초로 결정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이북지방은 장제스국민정부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으며, 이남지방은 영국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던 것. 하지만 전쟁 직후 제 코가 석자라 베트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영국은 일찍이 동남아에서 세력을 구축했던 프랑스에게 이 지역을 맡겨버렸고,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찍어누르면서 베트남은 30년 가까이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10]

2.2. 냉전의 시작


이미 5달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웠고, 특히나 자유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던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을 뒤집어버리고 스탈린이 폴란드에 공산당 통치 체제를 세운 사실은 서방측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스탈린에게 우호적[11]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뇌출혈로 사망한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12] 역시 서방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처칠은 원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소련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고, 처칠의 후계자였던 클레멘트 애틀리노동당 출신임에도 스탈린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고 시도했다.[13]

3. 같이보기



[1] 호엔촐레른 왕가의 여름 궁전이었다.[2] 처음에 참석한 건 윈스턴 처칠이다. 당시 영국은 1940년 5월 이래 대독 전시 거국내각으로서 보수-노동 연립정권이 유지중이었으나 독일의 항복 이후 자연스레 연립내각이 해체되고 7월 5일 총선을 치뤘다. 그러나 개표결과는 처칠이 포츠담으로 출발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유럽대륙에 주둔중이거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장병들의 투표권 문제를 위해 개표가매우 지연되었기 때문. 처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보수당이 이길 거라 생각하고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는데 포츠담에서 그만 선거에서 패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사진 하나만 찍고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다.[3] 여담으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하여 미국이 원폭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당히 받아쳤다.[4] 베를린, 은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해서 따로 사등분된다.[5]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잃은 영토는 1937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 독일 영토의 25% 가량이었다.[6] 물론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은 돈되는 거라면 싹 다 털어가려고 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이 뜯어말렸다. 이 때 처칠이 스탈린에게 했던 말이 '말에게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 하잖소'.[7] 그러니까 아예 군대를 해체시킨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에선 10만명의 보유를 허용했지만 이번엔 얄짤없었다.[8] 독일 뿐 아니라 일본 역시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전범국가였던 이들에 대한 공업 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 공언했지만 6.25가 터지자 몽땅 백지화되고 산업시설이 마구 들어섰다.[9] 여담이지만 현재 폴란드의 헌정체제인 폴란드 제3공화국은 자신들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보고 있다. 애초에 폴란드 망명 정부가 1990년 자발적으로 해체한 이유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어서이고.[10] 월남전 탓에 잘 알려진 남베트남, 북베트남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이후 미국이 이 일대에 개입하면서 부터이다. 포츠담 회담과는 별개의 일.[11] 덕분에 냉전 기간 내내 루스벨트는 정계, 학계를 가리지 않고 스탈린의 야망을 과소평가해서 냉전을 불러일으켰다고 가열차게 씹혔다.[12] 해리 트루먼은 전반적으로 반공적인 성향이 루스벨트보다 강했으며, 소련의 공격적인 팽창주의 대외 정책에 철저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의 일이지만 트루먼 독트린이 가장 좋은 예이다.[13] 다만 애틀리 정권하의 영국이 소련에 제트엔진을 제공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긴 했다. 여기서 영국이 제공한 제트엔진을 복제한 엔진을 사용한 전투기가 MiG-15이고 이 기체는 한국전쟁 중 UN군에게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