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르

 

'''곤도르
Gondor'''

[image]
'''문장'''
'''존속 기간'''
SA 3320~TA 3019
'''위치'''
가운데땅 동부
'''국가 체제'''
군주제
'''언어'''
아두나익
서부어
신다린
퀘냐
'''민족'''
누메노르인
두네다인
신다르
난도르
'''수도'''
오스길리아스(SA 3320 - TA 1640)
미나스 티리스(TA 1640-)
'''통화'''
카스타르
'''성립 이전'''
누메노르
'''반지전쟁 이후'''
곤도르-아르노르
'''테마곡'''

1. 개요
2. 국력
3. 역사
3.1. 건국 초기
3.2. 전성기
3.3. 쇠퇴기
3.3.1. 동족분쟁
3.3.3. 전차몰이족의 침략
3.4. 왕가의 단절, 미나스 이실의 함락
3.5. 통치 섭정의 시대
3.5.1. 곤도르와 로한의 우정
3.6. 반지전쟁 시기
3.7. 제 4시대
4. 주요 지명
4.1. 행정구역
4.1.1. 국왕 직할령(Royal Ward)
4.1.2. 주(Province)
4.1.3. 산하 공국(Fief)
4.1.4. 준주(Territory)
4.1.5. 군사통제 지역
5. 역대 지도자들
5.1. 곤도르의 역대 국왕
5.2. 곤도르의 역대 섭정
6. 역사적인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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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르(Gondor)는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다. 어원은 돌이라는 뜻의 Gon과 땅이라는 뜻의 Dor, 즉 돌의 땅이라는 뜻이다. '곤도오''곤도얼' 식으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톨킨의 설정에 따르면 요정어에서 r은 확실한 떨림음이기 때문이다. 제1시대의 국가 곤돌린[1]과는 다르다. 다만 톨킨이 초창기부터 구상했던 곤돌린에서 곤도르라는 지명(+문화)을 구상해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2. 국력


'''제 3시대 인간계 최강의 국가'''. - 사실상 서부를 제외하면 중간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사우론의 세력을 제 2시대에 패퇴시켰으며, 최전성기 시절에는 중간계 전역의 바다를 지배하고 중간대륙 서부전역의 절반가까운 곳을 국토로 삼았으며 하라드의 왕자들을 볼모로 삼는, 명실공히 중간대륙 최강의 초강대국이었다. 엘론드의 평가로는 '''누메노르를 연상시킬 정도로 위대했던 국가.''' 그리고 이 위세는 엘렛사르 시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엘렛사르는 살아있는 인간들 중 무력으로는 가장 강력하고 지력으로는 가장 현명했던 사기캐였다.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의 예언에 의하면 '''엘렌딜 이후 모든 선조들의 영광을 부활시킬 자'''가 바로 아라고른이니 위세는 완전히 부활했을 것이다. 제2차 반지전쟁 당시 미나스 티리스로 지원온 곤도르의 지방군이 3천명인데 이것은 해적의 발호 때문에 원래 동원가능한 병력의 1/10만 차출한 것이라 언급되어 있다. 즉, 전성기 이후 내전+전염병+전차몰이족이라는, 훈족, 몽골 제국에 비견될만한 강력한 기마군단의 침략에다가 1000년 가까이 이루어진 모르도르와의 밀고 밀리는 전쟁으로 인해 '''2천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쇠퇴하고도 수도 방위대를 제외한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할 정도의 국력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기에 수도 방위대, 해군 등을 합치면 대략 전체 군사 수는 4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톨키니스트들이 유추해본 곤도르의 전체 인구 수는 제3시대 사이 변동치를 생각하면 100만~200만 정도 라고 한다. 고대에 군의 인구대비율이 1~2%정도에 머물렀다는 사실로 미루어 최대 500만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확실한 것은 인구수=국력이나 다름없는 시대에서 곤도르의 인구는 중간계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을 달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문화와 기술 역시 인간들의 나라 중 중간계 최고 수준이다. 로한에 비하면 기병보단 보병의 비율이 훨씬 높으며 데네소르가 우린 로한에 비해 말과 그리 친하지 않다고도 언급한다. 그렇지만 백조 기사단같은 두네다인 혈통의 매우 뛰어난 기병 전력도 보유하고있다. 완전한 곤도르의 소속이라기엔 애매한 감이있지만 형제와도 같은 소속 출신이라 할 수 있는 북부 두네다인 순찰자들도 펠렌노르 전투에서부터 모란논 전투까지 기병으로서 기여했다.[2] 기병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병종이 전부 갖춰져 있으면서 평균 이상은 하는 굉장히 튼튼한 로스터를 가지고 있다. 궁병의 경우 활의 대가 요정족 만큼은 아니지만 오크 따위는 우습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궁병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보병의 경우 난쟁이 만큼의 정신 나간 단단함을 가지진 못했지만 튼튼한 중갑옷과 큰 방패로 무장하고 대열을 갖출 수 있는 견실한 중보병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기병 또한 로한의 기병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중갑옷을 걸치고 적진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을 퍼부울 수 있는 중기병대를 소수 보유하고 있기에 어느 병종이든 모자람이 없다. 심지어 이들은 해군까지 운용하며 기술력 마저 우수하다. 평균 이상의 질과 많은 머릿수라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론과의 최전선에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
국가의 상징은 미나스 티리스 꼭대기의 있는 흰색 나무로, 국기는 백색 성수와 그 주위에 팔란티르를 상징하는 7개의 별이다. 왕가의 문양은 이와는 조금 다른데, 국기 위에 왕을 뜻하는 왕관이 그려져 있다. 곤도르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은 왕관으로, 알카린 대왕 시절에 옛 시절 투구를 본떠서 제작한 것이다. 소설에서의 묘사 또한 궁성 경비대의 투구와 매우 흡사하나 좀 더 고급스럽게 생기고, 이마 부분에 여러 보석이 박혀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냥 왕관.
참고로, 톨킨은 곤도르의 왕관을 이집트의 왕관인 헤젯(hedjet)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했는지, 곤도르군의 투구를 보면 키가 크고 위가 뾰족한 헤젯이 연상된다. 다만 투구를 뺀 갑옷 등의 나머지 복식은 동로마 제국의 것과 유사하다.
[image]
3시대 동안 곤도르의 영토 변화가 나타난 지도. 푸른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곤도르이다. 가장 작았을 때가 처음이며, 마지막 노란색 부분은 반지전쟁을 끝내고 곤도르의 왕으로 정식 즉위한 아라고른이 확장한 영토다[3]분홍색은 제3시대 중반에 에오세오드족에게 양도하여 세워진 로한이며, 초록색 지역은 그보다 앞서 곤도르 내전기 시대에 왕위를 찬탈하고 폭정을 떨쳤던 카스타미르와 그 후손들이 장악한 곤도르를 보여준다. 해당 시기 파란색은 북방으로 쫓겨간 엘다카르 왕과 그 동맹들의 세력권을 보여준다.

3. 역사



3.1. 건국 초기


곤도르는 엘렌딜이 세운 망명 누메노르 왕국의 후계국으로 엘렌딜 사후 그의 두 아들들에게 나뉜 왕국 중 남쪽을 뜻한다. 원래는 엘렌딜이 북쪽과 남쪽 둘 다 다스리는 대왕이었지만 길갈라드와 협력하기 쉬운 북쪽 아르노르만 직접 통치하고, 이실두르아나리온이 각각 미나스 이실미나스 아노르에 머물면서 남쪽인 곤도르를 공동 통치했다. 이후 엘렌딜아나리온이 사망한 뒤에 한동안 이실두르아르노르와 곤도르의 2대 대왕으로서 공동 통치하며 전후 질서를 바로 잡았다. 한편 이실두르는 절대반지의 매력에 빠져 아르노르의 국보로 삼고 대신 그 것에 대한 기록을 곤도르에 남기게 된다.[4] 또한 그는 검은문 양편에 거대한 이빨탑을 건설하였고 두르상과 키리스 두아스를 세워 모르도르를 철저히 감시토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실두르는 동생 아나리온을 생각하며 백색나무의 묘목을 미나스 아노르에 심은 후 곤도르를 아나리온의 아들 메넬딜에게 맡겨두고 아르노르로 떠난다. 아르노르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아르노르와 곤도르 양국의 대왕임을 선언하려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실두르가 창포벌판의 재난으로 사망하면서 두 왕국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으며 곤도르는 메넬딜의 자손들이, 아르노르는 이실두르의 막내 발란딜#s-2과 그 자손들이 계속 대를 이어 나가게 된다.

3.2. 전성기


본래 곤도르는 아노리엔 지방과 이실리엔 지방, 안두인 하류로 이어지는 연안 지방만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제 3시대 500년부터 하라드림동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541년, 제 8대 왕인 로멘다킬 1세가 동부인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지만 550년, 그의 아들이었던 투람바르가 동부들인들을 대파하고 동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830년, 12대 왕인 타란논은 해군을 양성하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시킨다. 933년, 13대 왕인 에아르닐 1세가 움바르를 점령하지만 936년에 폭풍우로 실종되고 만다.
이윽고 1000년 대에 곤도르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1015년, 움바르에서 쫒겨난 검은 누메노르인들이 하라드인들을 이끌고 움바르를 포위 공격하였고 전투중, 14대 왕인 키랸딜이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1050년 마침내 15대 왕인 햐르멘다킬 1세가 하라드를 정복하면서 움바르의 포위를 풀었고 하라드인들은 완전히 쇠망하며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이 시기 '''곤도르의 국력은 최절정기'''에 달해 '''누구도 감히 곤도르를 공격하지 못했다'''. 안두인 강 북쪽의 북부인들도 곤도르의 북쪽 영역의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하라드의 왕자들은 곤도르에 볼모로 보내어져 곤도르의 궁정에서 살아야했다. 곤도르의 강역은 '''북으로는 켈레브란트 벌판과 초록숲 남쪽, 서로는 회색강, 동으로는 룬 내해, 남으로는 하르넨 강과 움바르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거의 중간계 서부의 절반에 가까운 국토를 보유한 셈이다. 모르도르는 황폐한 곳이었으나 키리스 웅골과 모란논 등에 요새와 탑을 세우고 쉴 틈 없이 감시했다. [5]

3.3. 쇠퇴기


최전성기를 이루던 곤도르도 1000년이 지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특히 곤도르에게 닥친 3가지의 시련인 동족분쟁, 대역병 그리고 전차몰이족의 침략은 곤도르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힌 대재앙이었다.

3.3.1. 동족분쟁


햐르멘다킬은 위대한 선박왕이었으나, 그의 아들 아타나타르호부견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곤도르의 부귀와 영화에만 탐닉했으며, 그의 통치 아래 곤도르는 '''보석따위는 곤도르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기돌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유했으나 실상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곤도르의 전성기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될 일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했던 일이라고는 평범했던 왕관을 날개가 달리고 화려한 보석이 달린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전부였다.
1240년, 17대 왕인 나르마킬 1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예 국가 경영에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조카였던 미날카르에게 섭정을 맡긴다. 1248년, 미날카르는 북부인들 중 가장 강한 로바니온의 왕 비두가비아의 원군과 함께 동부인들을 격파하고, 룬 내해 동쪽의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안두인 강 서쪽 림라이트 강까지 요새화하고, 이방인들이 에뮌 무일 이상 진출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넨 히소엘 입구에 이실두르아나리온의 모습을 본땄다고 전해지는 '''아르고나스'''를 세우게 하였다.
또한 북부인과 우호를 돈독히 하고 싶은 미날카르는 그의 아들 발라카르를 로바니온에 대사로 보내 머물게 하였으며, 발라카르는 그곳에서 로바니온의 왕인 비두가비아의 딸 비두마비와 결혼하고 그 곳에서 아들 엘다카르를 낳게 된다. 이는 훗날 엘다카르의 큰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곤도르인들은 모국인 누메노르인의 순수혈통을 중시하는 사회로 두네다인의 핏줄을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즉 신라의 성골과 진골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왕가의 일원이 두네다인이 아닌 일반 북부인과 결혼한 사건은 곤도르 귀족들에게 크나큰 반발을 일으켰다.
1432년, 결국 20대 왕인 발라카르가 죽자 동족분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인 21대 왕, 엘다카르는 반대파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는데 우선 '''그가 곤도르가 아닌 로바니온에서 태어난데다가 어머니 또한 두네다인이 아닌 북부인이기 때문에 혼혈아로 간주되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과 가장 가까운 왕족이며 곤도르의 대함장으로서 해군기지가 있던 펠라르기르움바르의 큰 지지에 힘입은 작은 할아버지의 손자 카스타미르가 내전을 일으키니, 엘다카르의 대관식은 열리지도 못하였다.
1437년, 결국 카스타미르가 이끄는 반란군은 엘다카르가 있는 수도 오스길리아스를 포위 공격하였다. 별다른 성벽이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는 불타고, 그곳에 있던 거대한 팔란티르는 안두인강에 빠져 소실되었다. 엘다카르는 로바니온으로 달아나고, 찬탈자 카스타미르는 스스로 제 22대 곤도르의 왕위에 오르고 6촌인 엘다카르의 맏아들 오르넨딜을 처형해버리고 만다. 그의 잔인무도한 모습에 미나스 아노르미나스 이실의 주민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북부로 달아난 엘다카르는 로바니온에서 북부인과 부근의 북부인들을 모으며 때를 기다렸다.
1447년, 엘다카르가 군사를 이끌고 카스타미르를 응징하러 오니, 이미 10년전에 벌어진 오르넨딜 처형사건으로 인해 카스타미르에 등을 돌린지 오래된 이실리엔아노리엔, 칼레나르돈도 이에 호응하였다. 마침내 '''에루이 여울에서 양 세력의 결전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엘다카르가 카스타미르를 죽이고 승리, 왕권을 회복'''하였다. 카스타미르의 아들은 펠라르기르로 달아나고, 엘다카르는 이를 뒤쫒아 펠라르기르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1년 후, 남은 반란군은 모든 배들을 이끌고 다시 펠라르기르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곤도르 해군이 반란군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엘다카르에게는 사실상 해군이 없었으므로 반란군의 탈출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탈출한 반란군은 움바르를 빼앗고 현지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동족분쟁은 마무리 된다.
동족분쟁의 결과 곤도르는 움바르를 다시 빼앗김으로써 남쪽영토를 많이 상실하고, 다시 해적과 하라드림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과거 아르파라존사우론을 사로잡은 상징적인 지역을 잃었다는 점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비록 동족분쟁으로 곤도르의 인구는 많이 감소했지만, 엘다카르와 함께 온 북부인들이 이곳에 많이 머물면서 어느 정도 보충이 되었다. 북부인들이 곤도르의 주민으로 편입되면서 누메노르와 북부인의 피는 점점 섞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누메노르인의 지혜와 수명이 북부인의 피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누메노르인의 권능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이는 축복의 땅이었던 옛 누메노르를 잃은 누메노르인에게서 발라의 축복이 서서히 떠나갔기 때문이었다.[6]

3.3.2. 대역병


동족 분쟁의 상처는 깊었다. 곤도르는 움바르를 잃어버렸고 하라드림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다시 움바르 해적들의 약탈을 받게 되었다. 결국 1634년, 25대 왕인 미나르딜이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이에 그의 아들인 텔렘나르움바르를 멸망시키기 위한 대함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1635년 겨울, 로바니온부터 휩쓸기 시작했던 대역병은 곤도르에게도 손길을 뻗쳐왔다. 특히 인구가 집중돼있던 아노리엔 지역과 칼레나르돈 지역에서 많은 수가 죽었고 왕이었던 텔렘나르와 그의 자식들 모두 병사하고 만다. 그가 죽으면서 움바르 공격도 흐지부지 되었고 미나스 아노르에 있던 백색나무마저 시들어 죽고 말았다.
1640년, 대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곤도르는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내전에 이어 대역병까지 휩쓸고 지나간 오스길리아스는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27대왕 타론도르는 이에 수도를 미나스 아노르로 옮기고 백색나무의 묘목을 다시 심었다. 이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는 곧 모르도르에 대한 방어선이 허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7]
하지만 이 대역병으로 인해 동부인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감히 곤도르로 쳐들어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8]. 이에 곤도르는 움바르 해적들에게 전선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810년, 28대 왕인 텔루메흐타르움바르를 공격하여 카스타미르(가운데땅 세계관)의 후손들을 모두 죽이고, 움바르를 다시 수복하였다.[9] 그리고 움바르다킬이라는 칭호를 덧붙였다

3.3.3. 전차몰이족의 침략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략 100여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동부인들은 다시 힘을 회복하였고 다시 침략을 시작하였다.
1851년, 돌 굴두르에 있던 사우론의 꼬드김을 받고 거대한 전차를 몰고 다니는 전차몰이족이 북부인들의 영토로 대규모의 침략을 해 왔다.
1856년, 29대왕인 나르마킬 2세는 로바니온의 왕 마르하리의 군대와 함께 어둠숲 아래 평원으로 출전하여 전차몰이족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완패하였고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하지만 곤도르군은 후위대로 있던 마르하리의 기병대가 큰 활약을 한 덕분에 전멸은 면하고 이실리엔으로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10] 이 결과로 곤도르는 이실리엔을 제외하고 안두인 대하와 에뮌 무일 동쪽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11]
한편, 전차몰이족은 여세를 몰아 로바니온으로 쳐들어갔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데일인들과 섞였고 마르하리의 아들 마르위니가 이끄는 잔존 세력들은 어둠숲과 안두인 사이의 기슭을 지나 바위섬 캐락과 창포벌판 사이의 안두인 골짜기에 정착하여 초대 군주가 되니, 이들이 곧 에오세오드였다.
1899년, 곤도르는 남부의 위협이 제거[12]되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로 한다. 마르위니는 다시 전차몰이족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곤도르에 경고를 하였으며 동시에 노예가 된 북부인들에게 전차몰이족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한다. 마르위니의 경고대로 전차몰이족은 다시 곤도르를 침략하나 곤도르와 마르위니가 숨겨둔 기병대의 후방공격 을 받고 대패하였다. 동시에 로바니온에서도 북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전차몰이족의 저항이 거센 바람에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한편, 곤도르와 아르세다인왕국은 오랜 단절을 끊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이들은 앙그마르나 전차몰이족이 누메노르 생존자들을 없애려는 단일한 목적에 의해 움직인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에 아르세다인의 왕자 아르베두이와 곤도르의 공주 피리엘의 혼인으로 더욱 굳건한 관계를 맺는다.
1940년, 에오세오드에게서 다시 전차몰이족의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입수되었고 곤도르의 왕 온도헤르는 이에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온도헤르는 적들이 북쪽과 남쪽에서 모두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군대르 둘로 나눠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남부전선에는 왕실의 일원인 에아르닐에게 지휘권을 줘서 펠라르기르에 주둔토록 했다. 그리고 북부전선은 왕인 자신이 스스로 지휘하였는데 이는 오래된 곤도르의 관습[13]이었다.
1944년, 마침내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아르닐은 절반의 군대와 함께 안두인 강을 건넜고 나머지는 일부러 포로스강의 여울을 무방비로 둔 채 남부 이실리엔에서 북쪽으로 40마일 정도 되는 곳에 야영하였다. 한편, 온도헤르는 북부 이실리엔을 통과해 다고를라드 평원에 군대를 배치하기로 하였다.[14]
10월 4일, 온도헤르는 45년전 승리했던 전투를 생각하며 적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막 검은 문을 지나고 있었다. 또 외조카 미노타르가 우익부대, 당시 도르엔에르닐[15]의 제후 아드라힐이 좌익부대를 이끌며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다고를라드에서 비로소 그들의 자리를 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차몰이족은 룬해에서 집결한 뒤 로바니온과 칸드의 군대와 합류하여 곧장 서진한 다음 곤도르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이에 전열이 무너진 온도헤르의 군대는 급히 우측으로 방향을 돌려 맞섰고 후미에 있던 미노타르에게 자신의 좌측을 지원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온도헤르는 중무장한 기병대와 이륜 마차들의 돌격에 대비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위대와 기와 함께 급히 낮고 둥근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공격이 그 기를 향해 퍼부어져 '''그 기는 노획되었고 그자신과 호위대 그리고 맏아들이었던 아르타미르가 전사'''하였다. 그 후, 이들은 곤도르군의 전열 깊숙히 질주하여 대혼란을 일으켰고 많은 자들을 죽음의 늪까지 몰고 가서 대부분 전멸시켰다.
이제 왕의 외조카 미노타르가 지휘권을 잡았다. 전차몰이족의 주력부대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온도헤르를 전사시킨 기병대와 이륜 마차들은 퇴각하였고 그 사이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먼저 그는 자신의 기를 세워, 가까이에 있는 중앙부대의 남아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관할에 있는 자들을 재집결시켰다. 그 후, 자신의 후위에 있던 좌익의 아드라힐에게 전령을 보내 당장 후퇴할 것을 명하고, 자신은 안두인 강 동쪽에서 가장 좁은 지역인 카이르 안드로스와 에펠 두아스 사이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방어선을 치고 미나스 아노르로 가는 길을 최대한 방어하려고 했다. 이 후퇴의 시간을 벌기 위해 미노타르는 몸소 후외대를 결성하여 전차몰이족의 전진을 저지해보려고 했다. 또한 아드라힐에게 남쪽의 에아르닐을 찾아 이 재앙과 현재 상황을 전하도록 명했다.
또한 미나스 아노르에 있는 둘째 왕자 파라미르에게도 급보를 보내려는 찰나, 에오세오드의 군사들이 방어선에 합류하여 그가 전사하였음을 알렸다.[16]
비록 이실리엔의 땅은 전차몰이족에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곤도르군이 친 방어선도 수적으로 우세한 전차몰이족의 주력부대의 돌격 앞에 무너지고, 미노타르도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후위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아드라힐을 찾아 남쪽으로 달아난다. 북부 이실리엔까지 들어와 진격을 멈춘 전차몰이족들은 진지를 차리고, 두 차례의 완승에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곤도르의 군대가 모두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남부전선에 있던 '''에아르닐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포로스강을 건어 근처의 하라드와 칸드의 연합군을 전멸시키고, 급히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후퇴하던 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성급하게 곤도르의 멸망을 자축하던 그들의 캠프를 기습하여 대부분 전멸'''시키고, '''달아나는 이들도 쫓아와 죽음늪에서 모두 죽이니''', 연합군은 죄다 몰살되었다. 하라드와 칸드는 이 패배로 치명타를 입었고 더 이상 곤도르를 함부로 침공하지 못했다. 이후 곤도르는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게 되었다.

3.4. 왕가의 단절, 미나스 이실의 함락


전차몰이족과의 전쟁으로 곤도르는 왕과 두 왕자마저 죽어 직계혈통이 끊어졌고 이에 '''이실두르의 직계후손이자 아르세다인의 왕자였던 아르베두이는 온도헤르의 사위로서 곤도르의 왕권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후린 가문의 섭정 펠렌두르가 우리는 아나리온의 후손이 아니면 왕위에 올릴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이에 아르베두이는 곤도르는 대왕 엘렌딜에서 시작했으며, 그가 두 아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이고, 또 그가 죽은 후 대왕 이실두르아나리온의 아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뿐이지, '''왕권을 양도하거나 엘렌딜의 왕국을 쪼개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누메노르의 후손으로서, '''남자든 여자든 제일 가까운 친족이 후계자가 되는 누메노르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섭정 펠렌두르가 이를 단칼에 거절해버리고 온도헤르 왕의 7촌 조카뻘 되는 장군 에아르닐을 왕위에 올렸다.
사실 섭정의 결정은 좀 복잡한데 누메노르의 옛 법도를 따라 여성의 왕위계승이 인정되었다면 섭정은 그의 아내 피리엘의 계승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서 남편이었던 아르베두이가 곤도르의 왕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섭정은 곤도르의 왕은 아나리온의 후손이여야 한다는 법칙에 준해 아르베두이의 왕위계승을 거부했다. 누메노르 멸망 이후 누메노르의 문화를 이어받은 두네다인들은 대부분 가부장적인 계승을 선택했고 곤도르의 왕가도 계속 그렇게 이어져 왔으니 섭정이 억지를 부린 거라곤 할 수 없었다. 섭정의 결정엔 '''예전 동족분쟁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뻔 한 경험이 있는 곤도르'''에 또다른 왕위계승 문제를 만들기를 피하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또 왕과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온도헤르왕의 방계혈족이 존재했다.
결국 아르베두이의 요구는 묵살되고, 에아르닐 2세가 곤도르의의 제 32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직접 아르세다인에 사자를 보내 자신은 엘렌딜왕국의 불화를 원치 않으며, 필요하면 모든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아르베두이도 그리 강한 집착은 없으므로 그냥 넘어가지만, 그의 주장은 훗날 그의 후손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3년, 아르베두이는 위기를 감지하고 곤도르에 원군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에아르닐 2세는 아들 에아르누르를 함장으로 하여, '''파견이 가능한 모든 군대'''로 대함대를 구성, 회색항구로 파견하였다.[17] 하지만 이듬해,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앙그마르의 대공세가 시작되었고 치열한 공방전 끝네 아르세다인의 수도인 포르노스트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아르베두이는 북부언덕에서 저항하지만 결국 북부 포로켈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키르단은 자신에게 도망온 아라나르스에게 소식을 듣고 아르베두이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보내지만 아르베두이가 탄 배는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였다. 원래 배가 떠나기 전 포로켈 인들은 여름까지 기다린 후 떠나라고 조언했었다. 결국 아르베두이가 탄 배는 빙산과 부딪쳐 침몰하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포르노스트와 아몬 술의 팔란티르도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한편, 뒤늦게 도착한 곤도르의 군대는 '''아르세다인의 잔존세력, 에리아도르 지역의 요정들이 보고 경악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 당시의 기록으로는 '''포를론드, 하를론드, 미슬론드까지 세 개나 되는 항구를 배들이 가득 채웠는데도, 정박하지 못해 기다려야 했던 배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고무된 키르단은 '''린돈의 요정군대'''와 '''남아있던 두네다인'''을 모두 모았고 '''에아르누르의 군대'''와 도중에 참전한 '''호빗궁병'''과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포르노스트 서쪽 평원에서 벌어진 이 대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곤도르 기병대의 후방공격으로 앙그마르의 군대는 대참패하였고 카른둠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 에텐무어스에서 에아르누르가 이끄는 곤도르의 기병대가 그들을 따라잡았고 남쪽에서도 임라드리스에서 나온 글로르핀델의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남은 앙그마르군은 또 다시 크게 패했고 마침내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앙그마르의 마술사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18]
그를 본 이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마술사왕이 특유의 괴음을 지르며 에아르누르에게 흑마를 달려 덤벼드니, 에아르누르는 물러서지 않고 싸우려고 했지만 그가 탄 말이 겁을 먹어 주인을 태운 채 달아났다. 이에 마술사왕은 고약하게 비웃지만 글로르핀델이 백마를 타고 나타나니, 그의 주위에 감도는 기운에 마술사왕은 어둠 속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에아르누르가 돌아와 그를 쫓으려 하나, 글로르핀델은 그의 운명은 인간 남자(man)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며 추적을 말렸지만 에아르누르는 아까 당한 불명예를 씻고 싶어 분을 참지 못했다.[19]

1977년, 에오세오드는 거주하고 있던 창포벌판과 바우바위 사이의 지역이 비좁았던 관계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고 있었다. 마침 북쪽에서 앙그마르가 무너진 소식을 듣고 에오세오드는 모든 백성을 이끌고 저 멀리 북쪽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곤도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곤도르는 위급할 때 이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위치킹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미나스 이실을 공격하였다. 미나스 이실의 주민들은 2년 동안 방어했지만 그들을 도우러 올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20] 그리고 위치킹은 이 성을 미나스 모르굴[21]로 개명하게 된다.
미나스 이실의 함락으로 이 곳에 있던 팔란티르사우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에아르닐 2세는 팔란티르의 사용을 금하게 된다. 대신 백색산맥 지대에 아몬 딘을 비롯한 거대한 봉화대를 설치하였으며 아노리엔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방벽인 람마스 에코르를 건설하였다.
2043년, 에아르닐 2세가 죽고 아들 에아르누르가 곤도르의 32대 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치킹은 68년 전 에텐무어스 에서의 대결을 비웃으며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분노한 에아르누르는 출전하려 하지만 섭정 마르딜의 만류로 참았다. 대신 미나스 모르굴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미나스 아노르를 미나스 티리스(감시의 탑)로 개명하였다.
2050년, 마법사 군주는 다시 도발을 해왔고 이에 참지 못한 에아르누르는 미나스 모르굴로 향한 후 소식이 끊기게 되었다.[22] 하지만 문제는 마지막 왕이었던 에아르누르가 자손이 없었고 가까운 친족들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나머지 왕족들은 오랜 내란으로 많이 죽었고 남은 왕족들은 댓수가 멀었고 다른 민족들과 혈통이 섞였으며 무엇보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적합한 계승자가 없었다. 따라서 마르딜을 시조로 하는 섭정가문이 대리통치를 하는 기묘한 국가체제로 변화하였다.
이후 섭정의 후계자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왕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치 섭정은 옥좌에 앉지 못하고[23] 왕관과 홀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대신 섭정의 권력을 나타내는 흰 봉을 사용하게 되었다.

3.5. 통치 섭정의 시대


곤도르를 통치하게 된 섭정 가문은 후린 가문으로 불렸으며 미나르딜 왕의 섭정이자 누메노르 귀족 후손이었던 에뮌 아르넨의 후린이 시조였다. 원래 섭정은 로멘다킬 1세가 만든 직위로 세습이 아니었으며 황족을 임명했다. 예를 들면 나르마킬 1세는 자신의 조카 미날카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나르딜 왕은 귀족이었던 후린을 섭정으로 선택했는데 마르딜 이전에는 그냥 조언자 정도의 섭정이었다. 그러나 에아르누르 왕이 실종되고 왕위가 공석이 되면서 마르딜 때부터는 왕에 적합한 자가 돌아올 때까지 권력을 대행하는 통치 섭정이 되었다. 물론 그 후 부자 또는 형제, 조카 등 친족 계승이 이루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실상 왕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정확히 통치섭정으로서는 후린의 후손 마르딜 보론웨가 시조였다.
하지만 그건 섭정 가문내의 일이었고, 왕이 돌아올 때까지 섭정들은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서쪽에서는 왕조가 끊긴 것을 안 던랜드인들은 충성 맹세를 저버렸고 남쪽에서는 움바르 해적들이 출몰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모르도르와 동부인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혈맹이었던 에오세오드는 저 멀리 북쪽으로 이동하여 소식이 끊긴지 오래였기 때문에 '''곤도르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왕통이 단절된 후 왕위를 노린 잦은 변란으로 곤도르는 기울기 시작한다.
2475년, 대규모의 모르도르군이 이실리엔을 휩쓴 다음 오스길리아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만 당시 통치 섭정이었던 데네소르 1세의 아들 보로미르가 이를 격퇴하고 이실리엔까지 회복하였다. 하지만 곤도르의 피해도 커서 오스길리아스는 황폐화되었고 안두인 강을 연결한 다리도 파괴되었다. 게다가 그 자신도 부상을 입었고 결국 사망하였다.
2489년, 보로미르의 뒤를 이어 12대 통치섭정이 된 키리온은 해적들이 들끓는 남부보다 방어하기 어려운 동부에 더 많은 첩자를 보내 방비하기 시작하였다.

3.5.1. 곤도르와 로한의 우정


2501년, 전차몰이족의 일족인 발코스가 동부에서 몰려와 북부인들을 학살하고 이들을 내몬 다음 로바니온을 차지하였다. 또한 돌 굴두르의 영향을 받아, 창포벌판의 남부 안두인 계곡까지 모두 황폐화 시켰다.
2510년, 로바니온의 발코스가 곤도르로 남하할 움직임을 보이고 안개산맥의 오크들도 위협이 되자 키리온은 과거에는 혈맹이었지만 지금은 저 멀리 북쪽으로 이동한 에오세오드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돌 굴두르의 어둠지역을 통과해야하는 어려운 임무이기에 여섯 명의 자원자를 모집하여 하루에 2명씩 짝을 지어 밀사를 파견하기로 한다.
그러나 오직 한 명만이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하였다.[24]
3월 25일, 사신은 에오세오드에 도착하여 에오세오드의 지도자인 에오를에게 전갈을 전했고 에오를 또한 곤도르가 무너지면 에오세오드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 곤도르를 돕기로 결정한다.
4월 6일, 에오세오드는 대략 7천명 정도의 모든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돌 굴두르에 도달했을 무렵, 그 어두움에 두려움을 느끼고 망설였지만 갈라드리엘이 새하얀 안개로 어두움을 밀어내며 그들을 도우니,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한편, 키리온은 에오세오드가 와줄 지 회의를 느끼며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올드를 지날 무렵 이미 안두인강을 건넌 발코스족이 후방에서 대거 출현했고 퇴로를 끊어버렸고 북쪽의 림라이트강을 넘어 켈레브란트 벌판까지 밀어붙였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안개산맥의 오크들이 대거 출현하여 앞뒤가 모두 막힌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때, 발코스 후방에서 에오를의 기병대가 기습공격을 펼쳤고 발코스는 크게 패해 달아났다. 에오를은 이들을 마저 추격하여 칼레나드론 평원에서 발코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모든 이들은 키리온이 에오를을 데리고 가 대연회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에오를에게 석달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미나스 티리스로 돌아간다.
석달 후, 키리온은 에오를과 함께 성산[25]에 올라 칼레나르돈의 소유권을 에오를에게 양도한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에오를은 칼레나르돈에서 살 것이며 곤도르와의 우정은 영원하고 곤도르의 적은 곧 그들의 적이라고 맹세하였다. 이에 키리온은 퀘냐로 '''이 맹세는 누메노르의 영광과 엘렌딜의 신념이 함께 할 것이고 발라와 일루바타르가 보살필 것이라고 맹세'''한다.
이렇게 곤도르와 로한의 동맹은 시작된다.
2758년, 움바르와 하라드인들로 구성된 해적들이 곤도르 해안에 상륙해 산맥을 넘어 로한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던랜드인들과 동부인들까지 합세하여 공격하니 로한은 대패하고 나팔산성[26]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벌였다.
이듬해, 곤도르 군대는 해적을 격파한 다음, 백색산맥 동서로 원군을 보내 로한에 있던 던랜드인들과 동부인들을 큰 패배를 안겨주어 몰아낸다.
2885년, 이번엔 반대로 대규모 하라드인들의 군대가 곤도르로 쳐들어오니 곤도르는 로한에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로한은 쌍둥이 왕자를 곤도르에 파견하였고 연합군은 하라드군을 완벽하게 개발살내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쌍둥이 왕자는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곤도르 섭정 투린 2세는 위로의 뜻으로 막대한 금을 보낸다.
2901년, 대규모 모르도르군이 이실리엔 지역을 휩쓸었고 이에 많은 주민들이 이실리엔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곤도르는 비밀 은신처인 헤네스 안눈을 세우고 이실리엔의 순찰자[27] 부대를 결성하게 된다. 또한 카이르 안드로스 섬을 요새화하게 된다.

3.6. 반지전쟁 시기


2970년, 로한에 있던 소롱길이 곤도르에 와 섭정인 엑셀리온 2세를 섬기게 되었다. 소롱길은 이 당시 데네소르와 처음 알게 되는데 데네소르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정체는 바로...
2980년, 소롱길은 엑셀리온 2세에게 건의하여 움바르를 기습 공격한다. 그는 많은 해적선들을 불태우고 항만의 수장을 죽인뒤 돌아오게 된다. 이 공격으로 움바르 해적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펠라르기르까지 온 후, 그는 많은 이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작별인사의 메세지를 남기고 북쪽으로 떠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소롱길 스스로 유능했던 데네소르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고 아직 능력도 부족한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2984년, 데네소르가 26대 섭정이 되었다. 그는 오랜 전란으로 폐허가 된 오스길리아스를 수복하여 요새화하였고 끊어진 다리도 재건하였으며 람마스 에코르도 보수하였다.
하지만 2988년, 그의 아내가 죽으면서 침울해진 나머지 깊은 탑 안에서 홀로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력을 자신한 나머지 사용이 금지된 팔란티르에 손을 대게 된다. 그 결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기타 입수하기 어려운 정보들을 얻게 되지만 사우론과의 의지 대결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실제 나이보다 늙게 되고, 오만과 절망감만 늘어갔다.
3018년 7월, 나즈굴들에 의해 오스길리아스 동쪽이 함락되지만[28] 서쪽은 보로미르파라미르에 의해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29]
3019년 3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대규모 전투인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가 벌어졌고 불가능할 것 같던 이 전투에서 곤도르는 승리하였다. 이어 아라고른과 그의 7천명의 군대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모란논으로 향했다. 치열하게 싸우는 도중 그들이 내건 신의 한 수가 성공하였고 사우론은 패망하고 만다.

결국 오랜 동맹이었던 로한의 구원과 더불어 왕 아라고른이 귀환하여 반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아르노르와 곤도르 두 왕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데네소르의 차남 파라미르가 통치권을 반납하면서 통치 섭정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도 파라미르는 에뮌 아르넨을 영지로 받아 영주가 되었고 왕의 섭정이 되었다. 즉, 마르딜 이전의 섭정으로 회귀한 셈이다.

3.7. 제 4시대



엘레사르 왕의 치세 아래 곤도르는 로한을 제외하면 곤도르의 '''전성기의 국토를 포함한''' 과거 모든 영토를 회복했다. 에레보르 및 데일과는 평화협정과 동맹을 맺었고, 하라드와 동부에서도 우호적인 이들과는 기꺼이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누른의 자유민들은 자치령으로서 곤도르의 이름으로 보호된다. 다만 '''백색나무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하라드의 먼 벌판과 룬 내해 너머에서 직접 엘레사르 왕이 에오메르 왕과 함께 출정하여 전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화를 원하는 이들과는 평화협정을 맺되 '''적대적인 이들에게는 무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엘다리온 왕에게 통치권이 이어지게 되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4. 주요 지명



4.1.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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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국왕 직할령(Royal Ward)


  • 아노리엔 - 민돌루인 산과 안두인 대하로 둘러싸인 지역. 곤도르의 수도권에 해당되는데, 이 지역에 미나스 티리스(서)오스길리아스가 자리잡고 있다.지명의 기원은 태양(아노르)과 아나리온에 해당하는 셈.
  • 이실리엔 - 안두인 강 건너편과 에펠 두아스 사이에 자리잡은 지역. 한때는 아노리엔과 함께 곤도르의 수도권이자 군사적인 요지였다. 중심지는 미나스 이실과 동오스길리아스[30]였지만, 미나스 이실이 함락된 뒤로는 모르도르의 침략에 정면으로 노출된 위험한 땅이 되었다. 지명의 기원은 달(이실)과 이실두르. 반지전쟁 시기에는 동오스길리아스마저 함락되고 이실리엔에는 오직 파라미르 휘하의 유격대만 남아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4.1.2. 주(Province)


  • 레벤닌 - 시리스 강과 안두인 대하가 만나는, 안두인의 하류 지역에 자리잡은 지역으로, 곤도르의 바다로의 출입구로써 번영한 주이다. 중심지는 펠라르기르. 반지전쟁 당시 펠라르기르는 움바르 해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 라메돈 - 벨팔라스 영지와 백색산맥 사이에 자리잡은 주로 중심지는 칼렘벨, 영주는 반지전쟁 당시 앙그보르이다.
  • 롯사르나흐 - 아노리엔 남측에 위치한 영지로 중심지는 아르나크, 영주는 반지전쟁 당시 포를롱이었다.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 안팔라스 - 곤도르 서쪽 대부분을 관할하고 있는 주로 중심지는 론드 갈렌, 반지전쟁 당시 영주는 골라스길이었다.
  • 칼레나르돈 - 안개산맥과 켈레브란트 강, 안두인 대하 서쪽으로 자리잡은 광활한 초원지대. 제3시대 2510년 이후로는 로한인들이 나라를 세워 곤도르의 동맹국이 되었다. 정황상 칼레나르돈의 중심지는 아이센가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하론도르 - 일명 남곤도르라 불리며, 하르넨 강 북쪽과 안두인 사이에 자리잡은 지역. 하라드 민족과 치열하게 치고받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움바르로 이동하기 위한 중요한 지역이였다.
  • 모르손드 - 백색산맥에 위치하여 중심지는 에레크로 추정된다. 반지전쟁 당시 영주는 두인히르로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4.1.3. 산하 공국(Fief)


  • 벨팔라스 - 이실두르 왕이 친척[31]을 제후로 봉한 이래로 자치 공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중심지는 돌 암로스. 반지전쟁 시점에서는 임라힐이 벨팔라스 공국의 영주이다.
  • 모르난 - 백색산맥 근처에 자리잡은 또다른 공국이다. 핀나스 겔린과 그 일대이다. 반지전쟁 당시의 영주는 히를루인[32]이다.

4.1.4. 준주(Territory)


  • 안드라스트 - 안팔라스 주 서쪽의 돌출된 반도 지역.[33]
  • 움바르 - 아르파라존이 사우론을 굴복시킨 역사가 있는 곤도르의 주요 대도시인 움바르항이 있는 지역이다. 누메노르의 전성기 시절 타르앙칼리몬의 시대에 왕당파 누메노르인들이 주요 거점으로 삼았었는데 사우론이 누메노르 인들을 타락시킨 이후 검은 누메노르인으로 불리는 발라를 불신하는 이들의 거점이 된다. 곤도르의 선박왕인 에아르닐 1세 시절 몇 차례 시도 끝에 곤도르의 영토에 편입시켰으나 원체 멀리 떨어져 있고 군사적으로 긴장이 감돌던 지역이였다. 이후엔 왕위계승전쟁에서 밀려난 방계 왕족들이 자리잡아 곤도르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 해적들의 중심지로 쇠락했다.
  • 톨 팔라스 - 안두인 하구에 자리잡은 큰 섬. 반지전쟁 당시 움바르 해적들에게 점령되어 거점으로 삼아졌다.

4.1.5. 군사통제 지역


  • 고르고로스 - 모르도르의 중심지인 바로 그 지역. 곤도르의 최전성기에는 이 지역에 탑과 요새가 설치되어 모르도르를 물샐 틈 없이 감시했다고 한다.
  • 에네드와이스 - 사르바드를 거점으로 북왕국과 연결되는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있는 지역이었으나 북왕국과 소원해지고 벌목할 숲도 남아있지 않기에 방치되었다.[34]
    • 사르바드 - 이 곳은 아르노르와 곤도르의 접경지역으로 두 왕국이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5. 역대 지도자들



5.1. 곤도르의 역대 국왕



5.2. 곤도르의 역대 섭정



5.3. 텔콘타르 왕조



6. 역사적인 유사점


동로마 제국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톨킨 옹 본인도 미나스 티리스가 비잔틴풍 도시라고 밝힌 적 있다. 로마 제국에서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이 분리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난 뒤 동로마 제국이 남은 것처럼 엘렌딜의 초기 왕국에서 아르노르와 곤도르가 분리되었고 아르노르가 몰락하고 난 뒤 곤도르가 남았다. 위치적으로도 비슷한데 동로마 제국이 남쪽과 동쪽의 외세 민족으로부터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곤도르도 마찬가지로 남쪽과 동쪽의 민족들로부터 중간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판에서도 이 점을 반영하여 미나스 티리스의 비잔틴식 건축양식을 볼 수 있고 곤도르 사람들의 복식이 동로마 제국의 것과 유사하다.
이집트에서 따온 것들도 많은데 톨킨은 곤도르의 왕관을 이집트의 헤젯 왕관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곤도르군의 투구를 보면 키가 크고 위가 뾰족한 헤젯이 연상된다. 또 옛날에는 이집트가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다 카더라는 설도 있었는데 톨킨이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메노르가 아틀란티스에 해당된다는것을 보면 어느정도 들어맞는다. 그밖에도 고트족. 랑고바르드족의 역사도 상당수 섞여있다.

[1] 곤돌린의 뜻은 '바위의 노래'를 의미하는 퀘냐 온돌린데의 변형이며, 중의적으로는 '숨은 바위'를 의미하는 신다린이다. 물론, 둘이 이름이나 성격이 비슷하긴 하다.[2] 이들도 텔콘타르 왕조에선 엄연히 곤도르 소속이 된다.[3] 북쪽으로는 최대 에래보르쪽까지 서쪽은 옛 아르노르 땅 까지.[4] 훗날 반지전쟁 시기에 간달프가 보던 기록이 바로 이 것이다.[5] 그래 봤자 사우론은 나즈굴들과 함께 또 다른 곳(추정컨데 모리아)으로 달아나나서 다시 세력을 키우려 들었을 것이다.[6] 실제로 역대 곤도르왕들의 수명을 헤아려보면 대가 내려갈수록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건 아르노르또한 예외는 아니었다.[7] 애초에 여의도에 수도가 있었는데 관악산 밑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자연스럽게 북한산 쪽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8]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곤도르로 쳐들어왔을 것이다.[9]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10] 하지만 이 전투에서 마르하리 또한 전사하고 만다.[11] 하지만 여전히 곤도르의 군대는 강력했고 전차몰이족들도 진격을 못하여 로바니온 정복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12] 이미 그의 조부시기에 움바르는 곤도르 영토가 되었고 하라드인들은 내분이 일어나 있었다.[13] 왕이 주요 전투에 나서고 왕위 계승자는 수도에 남는것.[14] 이 시기 아직 안두인강 북쪽에 세워둔 요새들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적들의 도강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도헤르에게는 어떠한 경고도 전해지지 않았고 이에 온도헤르는 느린 속도로 이동하게 되었다.[15] 이 지역은 돌 암로스가 있는 지역으로 곤도르 건국전부터 엘렌딜의 먼 친척들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곤도르가 건국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여전히 이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었다.[16] 곤도르의 국법으로 왕의 모든 아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아들 파라미르는 마치 반지전쟁 때의 에오윈 공주처럼 변장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였고 죽음의 늪 쪽을 후퇴하다가 적들에게 포획되었다. 마르위니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결국 파라미르는 그의 팔에 안기어 죽었고, 그가 왕자라는 사실은 몸수색을 하다가 왕자의 인장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17] 허나 온도헤르 왕이 이끌던 주력의 소멸로 인한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원군은 지체된다.[18] 사실상 발악에 불과했다. 앙그마르 군대는 완전히 '''몰살'''당했기에 빡친 마술사왕만 덩그러니(...)남아 발악한 상황이나 다름없던 것. 세가지 재앙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곤도르는 에리아도르의 인간과 요정족들이 처음 볼 정도로 거대한 군세를 '''원정군'''으로서 조직하고, 아르세다인이 수백년 동안 처절하게 싸워가며 쇠락해가고, 끝내 멸망당하고만 마국 앙그마르를 단 몇 차례의 전투만으로(...)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의 국력을 보유했던 것이다. 더 대단한 점은 얼마 전 왕과 주력이 날아갔던,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나라의 저력이라는 점이다. 곤도르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는 부분.[19] 이 사건은 훗날 곤도르의 왕계가 끊기는 계기가 된다. 이 때의 사건을 두고 위치킹은 두고두고 에아르누르를 조롱했으며 결국 에아르누르가 실종되는 원인이 된다.[20] 대단위 원정군을 보낼 능력을 가진 나라가 20, 30년만에 본토 방위가 안될만큼 나라가 막장이 될만한 큰 일은 없었다. 지원군이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고 보는게 옳다고 본다.[21] 마술사의 탑이라는 뜻.[22] 왕관 등 왕의 상징물은 안들고 갔다는게 그나마 다행. 실종된 후 가묘처리되었으며 왕관은 라스 디넨의 에아르누르 왕 가묘 위에 놓여졌다. 영화에서 마지막에 아라고른이 쓰는 그 날개달린 왕관이다.[23] 영화를 보면 데네소르가 높이 설치돼있는 옥좌에 앉아있지 않고 그 아래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4] 사신의 이름은 보론디르로, 에오세오드와 같은 북방인 혈통을 이어받아 승마에 능숙했다. 그는 켈레브란트 벌판의 전투에서 전사했다.[25] 로한어로 할리피리엔. 엘렌딜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로한의 건국 이후에 유해는 미나스 티리스에 이장하고 봉화대로 쓰이게 된다.[26] 이 전투에서 로한의 왕 헬름은 홀로 괴력을 발휘해 싸우다가 동사한다. 그 이후 혼버그 요새는 헬름협곡의 요새라 불리게 된다.[27] 영화에서 보면 파라미르가 이끌던 부대. 이들 또한 두네다인의 후손이었다.[28] 이 전투는 사실상 데네소르가 얼만큼 준비하고 있는가 떠보려는 의도가 강했다.[29] 이 전투 후 보로미르는 깊은골로 향한다.[30] 오스길리아스는 안두인 대하를 중심으로 동오스길리아스와 서오스길리아스로 나뉘며, 도시 한가운데의 거대한 다리 위에 왕궁이 있었다.[31] 여러가지 정황상 엘로스의 후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32] 아름다운 히를루인 이라고 불리는 미남으로 펠렌노르 평원 전투에서 전사한다.[33] 엘렌딜 일파와 다른 누메노르 일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잠시 곤도르의 산하에 들어갔으나 독립했다.[34] 북왕국 아르노르가 갈라지며 건국된 카르돌란의 영향 아래에 놓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