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

 



1. 개요
2. 시대
3. 영국 사회
3.1. 사회계급(Social Class)
3.1.1. 상류층(Upper Class)
3.1.2. 중산층(Middle Class)
3.1.3. 노동계급(Working Class)
3.1.4. 빈민층(The Poor)
3.2.1. 여왕: 상징적 국가원수
3.2.2. 의회: 양원제
3.2.2.1. 귀족원(상원)
3.2.2.2. 서민원(하원)
3.3. 사회상
3.3.1. 주요 키워드
3.3.1.1. 서구권
3.3.1.2. 서구권 외
3.3.2. 산업의 발전
3.3.3. 현대적인 범죄조직의 등장
3.3.4. 대중문화의 태동
3.3.5. 사회복지
3.3.6.1. 미국의 식민지화(1607 ~ 1783)
3.3.6.2. 인도 식민지화(1757 ~ 1947)
3.3.6.2.1. 경작
3.3.6.3. 캐나다의 식민지화(1763 ~ 1982)
3.3.6.4. 호주의 식민지화(1787 ~ 1986)
3.3.6.5. 말레이시아 식민지화(1826 ~ 1957)
3.3.6.6. 홍콩 식민지화(1842 ~ 1997)
3.3.6.7. 아프가니스탄 보호국화(1880 ~ 1919)
3.3.6.8. 이집트 보호국화(1882 ~ 1922, 1956[1])
4. 문화
4.1. 상류층 문화
4.3. 교통수단
4.4. 의복
5.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인 목록
5.1. 문학
5.2. 과학·공학
5.3. 철학
5.4. 예술
5.5. 기타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작품내 연도)
6.1. 소설
6.2. 동화
6.3. 그래픽 노블
6.4. 영화
6.5. 드라마
6.6. 연극/오페라/뮤지컬
6.7. 만화
6.8. 애니메이션
6.9. 게임


1. 개요


'''Victorian Era (1837 ~ 1901)'''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Great Britain no time to lose'''

대영제국은 질 날이 없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1883년

'''We are not interested in the possibilities of defeat; they do not exist.'''

우리는 패배의 가능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2]

빅토리아 여왕, 제 2차 보어전쟁에 대해, 1899년

[image]
빅토리아 시대 말기인 1901년의 런던.
근대 유럽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인 벽돌건물이 가득한 도시와 거리에 마차와 다양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다.
컬러로 복원한 빅토리아 시대 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
대영제국 시기, 빅토리아 여왕(1819 ~ 1901)이 여왕으로 즉위한 1837년부터 사망한 1901년까지 64년간의 치세를 빅토리아 시대라 한다. 동시기 한국은 세도 정치기~구한말, 미국은 서부개척시대였다.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 변혁이 있었다.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함께 허영과 위선도 함께 존재하는 시대이자, 합리주의와 발명, 탐구를 지향하던 근대 과학자와 발명가들과 전근대의 유산인 갖가지 미신과 전설, 도시괴담을 믿던 대중들이 뒤엉켜 공존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타 유럽국가들과의 경쟁을 통해 신대륙의 식민지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되고, 이후 산업혁명이 전개되며 한층 국력이 신장되면서 대영제국제국주의가 절정에 다다른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러한 배경 하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유럽문명, 과학문명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이 사회 전체에 펴져있던 시기(벨 에포크)이면서, 동시에 거대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부여되었던 비인간적이며 과도한 노동에 반발해 차티스트 운동 등의 노동운동 또한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 애니, 만화, 게임 등에서 묘사되는 근대 유럽의 모습은 바로 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혹은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를 따왔다고 보면 된다. 스팀펑크물 역시 마찬가지.
서양사에서 근대를 상징하는 시대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시대이기에 당시의 생활상을 소개하는 영상들도 여럿 있는데, 여기에 관심있다면 좋은 자료이다.
  • English Heritage(한글자막) - 영국의 전통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채널. 빅토리아 시대의 요리들을 소개하는 영상시리즈가 있다.

2. 시대



2.1. 빅토리아 시대 이전



2.2. 연표


빅토리아 시대/연표 참조.

2.3. 동시대 국가들의 수장들



2.3.1. 아메리카 대륙



2.3.1.1. 미국


2.3.2. 유럽



2.3.2.1. 영국


2.3.2.2. 프랑스


2.3.2.3. 독일


2.3.2.4. 오스트리아


2.3.2.5. 이탈리아


2.3.2.6. 교황청


2.3.2.7. 스페인


2.3.2.8. 러시아


2.3.2.9. 터키


2.3.2.10. 네덜란드


2.3.2.11. 벨기에


2.3.2.12. 스웨덴(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쪽)


2.3.2.13. 덴마크(유틀란드 반도)


2.3.3. 아시아 대륙



2.3.3.1. 서아시아


2.3.3.1.1. 이란

  • 이란 숭고국, 카자르 왕조
    • 모함마드 샤(1808-1848, 재위: 1834-1848)
    • 나스르 알딘 샤(1831-1896, 재위: 1848-1896)
    • 무자파르 알딘 샤(1853-1907, 재위: 1896-1907)

2.3.3.2. 동아시아


2.3.3.2.1. 일본


2.3.3.2.2. 한국


2.3.3.2.3. 중국


3. 영국 사회



3.1. 사회계급(Social Class)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계급에 따른 생활상을 소개하는 영상.

3.1.1. 상류층(Upper Class)


토지를 보유하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유한계급. 전근대 시대부터 전통적인 지배층으로 군림하며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다. 비록 젠트리의 등장과 근대적 시민의식의 성장 등으로 이전처럼 절대적인 지위는 아니게 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이들의 드높은 지위도 1차 세계대전으로 전근대적 귀족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역사적 상징성 외에는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게 된다.
  • 왕족
  • 귀족 - 보통 귀족원(상원)을 통해 정계에 진출했다.
    • 일대귀족 - 영국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귀족작위. 주로 대부호나 고위 공무원, 장자가 아닌 귀족의 자식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 성공회 고위 성직자

3.1.2. 중산층(Middle Class)


근세부터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중산층은 근대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며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대량생산 시대라는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젠트리: 신흥 자본가들은 이전까진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성직자, 법조인, 의사, 공무원, 사관, 대학교수(학자) 등의 전문직에도 진출하게 된다. 이후에는 교사(교육), 배우(엔터테인먼트), 예술가(엔터테인먼트), 건축가, 회계사 등도 포함하게 된다. 이들이 전문직의 주류가 되면서 전문직은 곧 젠트리의 상징이 되며, 이들은 무리해서라도 메이드를 고용함으로서 사회적인 지위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 숙련공: 빅토리아 시대 초중반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조금씩 개선되고, 노동조합이 등장하여 파업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노동계급 중에서도 비교적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 숙련공들은 경력과 숙련도를 내세워 초급 기술자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고, 삶의 여유가 생긴 이들은 여가활동에도 눈을 돌려 현대 영국 스포츠의 대표격인 축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3. 노동계급(Working Class)


일반적으로 서민 내지는 하류층으로 취급되던 신분이다. 당시 영국인의 절대다수는 이 노동계급에 속했다.
  • 노동자 계급: 초급 기술직, 공장노동자, 선원, 마부, 구두닦이, 광부, 농부, 어부, 목동, 조선공, 광대 등. 당시 영국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대부분은 저임금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 집사메이드 : 이들 역시 넓은 범주에서는 노동계급에 속한다. 하지만 집사의 경우, 몇몇 유력 가문의 집사장은 중산층 출신인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으며, 심지어 왕족의 집사는 귀족의 자제들이 종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류층 출신이더라도 상류층의 신뢰와 능력을 인정받는 이들은 젠트리에 편입되어 신분상승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에 완전히 하류층만의 전유물로 취급하긴 어렵다. 다만 집사와 달리 메이드는 실제 절대다수가 하류층 출신이었다.


3.1.4. 빈민층(The Poor)


  • 빈민층: 노숙자, 실업자, 고아 등. 당시 영국의 자유방임주의 하에서 힘든 삶을 영위했다.
  • 집시: 집시들 중에선 정착하여 평범하게 노동자로 생활하던 이들도 있던 반면, 유랑생활을 하던 부류도 상당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다지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하고 사회의 최하류층에서 표류했다. 사실 이는 주류 사회와 유리되어 떠돌아다니는 집시들 특성상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3.2. 정치 구조: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3.2.1. 여왕: 상징적 국가원수



3.2.2. 의회: 양원제


총리: 실질적 정부수반

3.2.2.1. 귀족원(상원)

지배층(귀족, 성직자)으로 구성.

3.2.2.2. 서민원(하원)

피지배층(젠트리, 중류층, 노동자계층)으로 구성

3.3. 사회상



3.3.1. 주요 키워드



3.3.1.1. 서구권


3.3.1.2. 서구권 외


3.3.2. 산업의 발전


인간과 동물의 힘을 이용하던 형태에서 증기의 힘을 이용하는 기계장치, 증기기관이 산업에 적용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특허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자본가가 탄생했다.
증기기관은 초기에는 방적기의 형태로, 이후에는 증기기관차, 증기선의 형태로 응용되면서 단순히 인간의 노동을 대치하게 되는 것을 넘어서 기존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 장거리 여행등의 전세계적 육상, 해상 공공교통수단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3.3.3. 현대적인 범죄조직의 등장


근대화를 통해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스레 갱스터, 마피아같은 현대적인 범죄조직들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무역이 활발한 리버풀, 글래스고 같은 항구도시나 공업이 크게 발달한 런던, 버밍엄, 맨체스터 같은 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후에 범죄조직들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30년대 전간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이용해 크게 성장하여 도시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했는데, 이런 갱스터들의 모습은 BBC의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잘 묘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악명높은 갱단들

3.3.4. 대중문화의 태동


이전에는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던 문화들(그림, 소설, 시, 연극, ...)이 도시중심으로 모인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즐길 수 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변해가면서, 대중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셜록 홈즈와 같은 추리소설, 대규모의 마술쇼, 르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같은 초기 형태의 영화 등 사람들의 여가시간에 즐길만한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초기 대중문화는 바다 건너 미국에 영향을 주면서 20세기 이후 주류가 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기초가 된다.
공교롭게도 빅토리아 시대, 정확히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유럽은 근대 과학의 시대이기도 하면서 중세의 미신과 오컬트의 잔재가 남아있던 과도기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현재까지 내려오는 판타지적 문화요소들의 이미지가 정립된 시기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당시 상류층과 젠트리들 사이에서 위자 보드같은 강령술이나 흑마술, 최면술과 점성술 등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 뱀파이어처럼 일부 지역의 미신에서 머무르던 도시전설이 1897년 출판된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를 통해 대중적 문화요소로 자리잡고 고딕 소설이 유행하는 등 초자연적, 초과학적인 도시전설들이 과학발전에 힘입은 파급력을 통해 그 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는 흥미로운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전근대 시대의 미신이 현대 문화요소로서의 오컬트와 판타지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3.3.5. 사회복지


1870년대 대불황 시대가 시작되자, 피지배층이었던 중류계급은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노동자 계급은 파업의 형태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로서 교육, 복지, 위생 등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이전에는 각각의 영지 내에서 자체적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산업혁명을 통해 국가라는 규모로 사회가 통합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파악하고 대응, 혹은 예측하기 위한 시스템(학문, 부처, ...)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3.3.6. 제국주의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자원을 조달하려는 움직임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원을 싼 값에 들여와 높은 값에 팔기 위해서는 식민지인의 희생이 필수였고, 결국 불만이 쌓여가서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결국 영국병등의 무기력한 상태까지 진행되게 된다.
이시기 이후에는 오히려 자국의 제품을 판매하는 형태로 무역을 전개해서 양쪽의 이익을 늘리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렇게 했을 때에만 자국의 산업이 발전하여 중산층이 탄탄해지기 때문이다. 독일이 대표적인 예이다.

3.3.6.1. 미국의 식민지화(1607 ~ 1783)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동해안에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미국스페인령은 남부 플로리다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뉴멕시코였다. 남부는 쿠바 부왕령의 일부였다.
1607년, 영국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건설한 식민지가 현 미국의 모태가 된다. 그 이후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 청교도[3]들이 건설한 식민지[4]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시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왐파노와그족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두 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뒤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 이 사람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여기서 여담을 붙이자면, 티스콴툼이 죽고 정착민들이 자력 생존이 가능해진 이후에 왐파노와그 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에서 짐작하겠지만, 필그림들은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5] 하지만 정착민들의 계속되는 확장과 더불어 왐파노와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게되고 결국 필립왕 전쟁 때, 왐파노와그들은 정착민들을 공격해서 양측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정착민들에 의해 왕파노와그 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절멸했다. 이 시기를 다룬 글.#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1732년)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사실 미국에 주재하던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무역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저기요, 그렇게 세금 의무 주시면 권리도 줘야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세금 못 내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식민지 대표들이 영국에 가서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개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기록을 봐도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세금 내기 싫다가 훨씬 많다.
여튼 영국 본토는 무시하고 인지세를 걷어서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 정도로 유지하려 들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판단이다. 소규모 권리를 인정해주더라도 실제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행사 가능한 권한의 괴리로 인한 불만은 터져나올 것이며, 결국 독립을 하던지 아니면 본인들의 힘에 걸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후자가 된다면 본토가 식민지에 먹히게 되는 셈.
그래서 점차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면서[6]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775~1783). 이에 영국은 식민지 독립을 막기 위한 약 4만여 명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에 맞서서 독립 분자(Patriot)들은('''아직도''' 미국인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의 세력 탓에 한동안 영국에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갔으나, 결국은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은 미국인들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비를 사용해 훗날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 역시 문제는 돈. 독립 전쟁 직전에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있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실상은 보스턴 차 사건 항목에도 있지만, 영국 상인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서 건너와야 하는 차보다 중남미에서 생산된 커피를 미국 상인들이 직접 들여오는 쪽이 훨씬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시대에 연방에 가입한 주가 13개였기 때문. 첫 번째로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주.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3.3.6.2. 인도 식민지화(1757 ~ 1947)

근세 이후 인도 각지에 침투하던 유럽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영국동인도 회사(영국의 경우 1757년 설립)로 요약되는데, 7년 전쟁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인도 현지 군대와 합세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지배력을 굳혔고,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라는 동인도 회사 소유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이후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각지 중소 국가들을 격파하고 영국이 전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무굴 제국 왕실은 형식적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858년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면서 무굴 제국 왕실(과 함께 동인도 회사도)이 폐지되었고, 1877년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1848~1947, 황제 즉위는 1877)으로 굳혀진다. 이 시기까지 로이의 브라모 사마지 운동 등 의식 개혁 운동과 교육의 보급 운동 등이 진행되었으나, 추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식민 지배 시기 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 회의 계통의 독립 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독립 운동 등이 계속되어 인도의 주권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대체로 인도의 독립 운동은 자치권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의석 보장을 원하는 이슬람교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반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힌두교 세력이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을 이용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 한 찬드라 보세의 활동도 있었다. 1942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 하에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 제국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들 운동을 신속하게 무력 진압했다.

3.3.6.2.1. 경작

  • 사탕수수: 당시 영국은 한 해 설탕 소비량이 7만톤에 달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대량의 사탕수수를 지배함.
  • 아편: 대 중국 무역에서 밀수출함
  • : 아삼 지역에서 재배함

3.3.6.3. 캐나다의 식민지화(1763 ~ 1982)

7년 전쟁의 끝나면서 프랑스식민지들이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짐. 이후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위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해줌.
  • 1843년 11월: 캐나다에서 '그레이스 마크스'와 '제임스 맥더멋'이 그들의 고용인인 '토머스 키니어'와 그의 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함. 이 사건은 훗날 소설 "알리아스 그레이스"로 널리 알려짐.

3.3.6.4. 호주의 식민지화(1787 ~ 1986)

1787년 영국호주 대륙의 동반부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Colony of New South Wales)로 선포한다. 그후 영국인들의 호주 대륙 해양 탐사에 따라 식민지는 차츰 넓어져가서 가장 넓었을 시절의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는 퀸즐랜드, 빅토리아, 태즈메이니아, 노던 준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대 식민지였다.
1788년 영국이 유형수들을 시드니에 상륙시킴으로써 호주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륙의 동남부를 차지하며, 대륙 개발의 거점이 되었던 지역이다.
이민으로 인구와 이민자 정착지가 증가하면서 1825년태즈메이니아가 별개의 식민지로 떨어져나간 것을 시작으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빅토리아, 퀸즐랜드가 별개의 식민지로 떨어져나갔으며, 1863년에는 노던 준주의 영역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관할로 넘겼다. 1901년에 영국의 자치령으로서 호주 연방이 결성되면서 뉴사우스웨일스는 호주의 주가 되었고, 1911년에 신수도 건설을 위해 캔버라와 그 일대를 호주 수도 준주로 떼주고 1915년에는 연방정부의 물류수송과 연방 해군의 조차를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저비스베이 준주 지역을 떼주면서 현재의 영역이 확립되었다. 오늘날에도 호주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강력하며 중요한 주이다.

3.3.6.5. 말레이시아 식민지화(1826 ~ 1957)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급진전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하고,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지배권을 모두 영국에게 위임했다(1795). 그러자 영국은 더욱 대담하게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여 페낭에 영국 상관을 설치하고, 말라카 및 바타비아를 접수했으며, 향료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영국은 페낭을 얻었고, 이 곳을 시작으로 해서 1819년에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해 갔다. 1824년에는 네덜란드와 맺은 조약(런던 협약)에 의해 수마트라, 자와(한국에 익히 알려진 자바(Java)는 영문명) 등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영국이 관할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만들기에 이른다(1826). 하지만 이 때까지의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으로의 길' 이었다.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시까지는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영국은 말레이 반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주석이 있었는데,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은 동남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계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3.3.6.6. 홍콩 식민지화(1842 ~ 1997)

당시 중국의 청나라와의 제1차 아편전쟁 이후 1842년 홍콩(정확하게는 홍콩 섬)을 양도받게되고, 이곳에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하고 총독부를 신설한다.

3.3.6.7. 아프가니스탄 보호국화(1880 ~ 1919)

독립국이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가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패전하여 사실상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7개월 뒤, 봉기가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진압한 후 아프가니스탄은 정식으로 보호국이 된다.
이후, '압둘 라흐만 칸'과 그의 후계자인 '하비불라 칸' 시대까지 친영정책이 유지되어 영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하비불라 대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아프간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들기 시작하여 아프간은 오스만 제국과 독일을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오스만과 독일과의 여러 차례 교류와, 영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프간을 방어해 낼 여력이 없음을 알게 된 '하비불라 칸'은 아프간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부활시킬 꿈을 꾸었다. 이에 하비불라는 영국에게 이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하고, 1919년 2월 하비불라는 암살당한다.
하비불라가 암살당한 이후 그의 동생인 나스랄라 칸과, 하비불라의 아들이었던 아마눌라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보수파가 나스랄라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띈 개혁파가 아마눌라를 지지했는데, 아마눌라가 분쟁에서 이기고 나스랄라를 구금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라는 극히 불안정했고 보수파들은 공공연히 쿠데타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내부 불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마눌라는 영국령 파키스탄과 인도를 침공하였다.
비록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 우월하다고는 하나, 이미 영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상당한 군인과 장비를 소모한 상태였기에 잘 해본다면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초기에는 이를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군이 상당히 진군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반격과 아프가니스탄군 사이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간군은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여러 부족들의 민병대를 규합해서 모은 연합부대의 성격에 가까웠기에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부족의 족장들을 국왕이 통제하지 못하다 보니 단합력도 떨어졌다. 결국 아프가니스탄군은 1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나중에는 전세가 아프가니스탄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둘 다 싸움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양측이 라왈핀디에서 회담을 가져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며 떠났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리도 원하는 완전한 주권국이 될 수 있었지만, 장기간 식민통치를 받고 독립전쟁을 치르며 큰 타격을 입었고 영국이 보내주던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도 사라져 한동안 재정난을 겪어야만 했다.

3.3.6.8. 이집트 보호국화(1882 ~ 1922, 1956[7])

1870년대, 이집트는 많은 이권을 영국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주식을 영국이 구입하면서부터 간섭이 심해졌다. 1879년, 이집트에선 아라비 파샤를 중심으로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Urabi revolt) 그러자 1882년, 영국은 이에 개입해 군대를 파병하였고, 반란군은 영국군에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그 이후 이집트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약 74년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8]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영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 이집트에서는 후세인 카멜[9]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10] 이집트 술탄국이 설립된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를 식민지로 병합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알게알게된 이집트인들은 영국의 적국인 독일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독립시키기 위해 친독 성향을 가지기도 했다. 할수 없이 이집트를 자국 편에 끌어들이는 것을 원한 영국은 공식적인 보호령으로 삼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이집트인들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전쟁 물자도 수탈해간 영국에 대해 분노한 이집트인들은 전후인 1919년, 대규모 반영 운동을 일으키는데, 이게 바로 1919년 이집트 혁명이다.
결국 영국은 1922년 이집트를 이집트 왕국이라는 왕국으로 독립시킨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고, 수에즈 운하도 여전히 영국 소유였다. 경제적으로도 영국에 의존하는 성향이 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령 리비아를 통하여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자국의 군대를 수에즈 운하를 제외한 이집트의 영토에서 철수시킨다.

3.3.7. 식민지 플랜테이션



4. 문화



4.1. 상류층 문화



4.2. 대중문화



4.3. 교통수단



4.4. 의복


  • 뉴스보이 캡
  • 실크햇
  • 보닛
  • 볼러
  • 프록 코트
  • 드레스
  • 코르셋
  • 정장 - 현대적인 양복은 빅토리아 시대 말엽부터 프록코트와 테일코트 등이 간소화되며 등장했다.
  • 인버네스 - 어깨부분에 망토가 달린 코트.
  • 크라바트 - 16세기 말 크로아티아에서 시작되어 매던 넥타이의 조상인 넥 밴드. 본래 흰색만 쓰였으나 영국에서 여라가지 색을 조합한 이후 다양한 색이 쓰였다.
  • 크리놀린 -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창작물에서 흔히 보이는 드레스의 치마 부분을 부풀리는 데에 쓰인 속옷이다. 1840-1860년 유행했다. 파팅게일과 파니에의 후신같은 셈. 강철 와이어나 고래수염같은 탄성이 있는 소재로 만들었는데, 새장같은 모양으로 만들었고 시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유행한 실루엣이 달라서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다. 빅토리아 후기부턴 크리놀린이 간소화된 크리놀렛, 랍스터 꼬리같이 엉덩이만 부풀리게 나온 버슬이 유행하면서 일상복으로써는 사라지게 된다.
  • 버슬 - 19세기 말 크리놀린이 쇠퇴하고 유행했던 의복. 드레스의 뒤쪽을 묶고 엉덩이를 불룩하게 강조함.

5.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인 목록



5.1. 문학



5.2. 과학·공학



5.3. 철학



5.4. 예술


  •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곡가.
  • 로베르트 슈만 -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 리하르트 바그너 -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 요하네스 브람스 -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 구스타프 말러 - 오스트리아의 낭만주의 작곡가.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오스트리아[12]의 국민악파 작곡가.
  • 빈센트 반 고흐 - 네덜란드의 인상주의 화가.
  • 장 프랑수아 밀레 -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 클로드 모네 -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 폴 고갱 -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

5.5. 기타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작품내 연도)



6.1. 소설



6.2. 동화


출판년도 순으로 기재

6.3. 그래픽 노블



6.4. 영화



6.5. 드라마



6.6. 연극/오페라/뮤지컬



6.7. 만화



6.8. 애니메이션



6.9. 게임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1868): 유비소프트에서 개발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2015년 작품.
  • Victoria 시리즈: Paradox Interactive에서 개발한 제국주의 전략시뮬레이션.
  • 프로스트펑크(1887) : 남미 파타고니아에 떨어진 운석으로 인해 발생한 빙하기에서 도시를 건설하며 생존하는 게임. 영하 120도 까지 온도가 내려가는 빙하기라는 자연재해로 인해 하루하루가 투쟁이다보니 빅토리아 시대의 문제[14] + 살아남기 위해 나오는 문제들[15]이 합쳐지니 헬게이트가 열려버리는 와중에 플레이어는 양심을 지킨다VS당장 사는게 문제이니 인권은 개나줘버린다. 를 선택하며 단순한 생존게임이 아닌 이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비판하는 철학적인 게임이다.[16]
  • 레드 데드 리뎀션 2(1899): 락스타 게임즈가 2018년 말에 발매된 서부 배경 게임.

[1] 제2차 중동전쟁 이후[2] 영어에는 Royal We 혹은 Majestic Plural 으로 불리는 보통 서구의 군주가 스스로를 복수(We)로 칭하는 장엄 복수형이라는 어법이 존재하나 위 발언은 당시 보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전시 내각이 소집된 상태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다소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총리를 꾸짖으면서 나온 것으로 정황상 본인 혼자만을 가리키기보다는 내각 전원을 칭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3]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4] 제임스타운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5]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6]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이 큰 역할을 했다.[7] 제2차 중동전쟁 이후[8] 이때부터 영국의 비공식적인 보호령이 된다.[9] 참고로 이 사람은 이라크후세인 카멜이 아니다.[10] 19세기 중반 쯤부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상황이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였다.[11] 현대 관점에서는 스팀펑크로서의 성격도 갖는다.[12] 현재 기준으로는 체코인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민임.[13] 엄밀히 말해 빅토리아 시대 배경은 아니나, 출간은 빅토리아 시대에 이루어졌고 시대적 배경인 6월 혁명은 빅토리아 시대 초기와 매우 인접한 시기이기에 이곳에 작성한다.[14] 저임금에 14시간 이상 근무, 아동노동, 계급차별, 장기 거래 등등 끝이 없다.[15] (군중을 통재하기 위한) 공개처형, 무고형, 강제 징용(매춘, 위험한 작업 등 사람들이 무조건 꺼리는 것) 등등 지도자 (플레이어)의 말이 사람의 목숨과 인생을 무조건 좌지우지 하고 이에 대해 아무도 뭐라할수가 없다.[16] 예를 들어 식량이 없다고 식인을 몰래 허용하거나 자신을 신격화해 신처럼 섬기게 하면 당연히 엔딩에서 플레이어를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