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오데르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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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부터 5월까지의 독소전쟁 전황도. 비스와-오데르 공세와 베를린 전투가 들어가는 오데르-나이세 공세 전황도이다.
Vistula-Oder Offensive,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치러진 소련군의 나치 독일을 향한 마지막 대공세이다. 이름은 소련군이 독일을 향해 진군하면서 건넌 두 개의 주요한 강인 비스와 강[1] 과 오데르 강[2] 에서 딴 것으로 영어식 명칭인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병력의 경우 독일 측은 45만 여명을, 소련 측은 220만 여명을 동원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전쟁 4년 만에 독일 본토에 진입하게 된다.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발트해에 이르는 지역을 해방시킨 소련군은 기나긴 진군으로 길어진 보급선 문제로 공세를 멈추어야 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마켓 가든 작전의 전략적 실패로 주춤거리는 연합군을 박살낼 절호의 기회로 보고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했지만 연합군의 맹렬한 저항에 실패로 돌아갔다.[3]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에 참가할 소련군은 세갈래로 편성되었다. 주공은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4] 의 제3벨라루스 전선군이었고, 조공은 우익(북방)에 홉하네스 바그라미안 대장의 제1발트 전선군, 좌익(남방)에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포진해 있었다. 소련군은 병사 170만명[5] 이었고 전차 4500여대, 돌격포 2500여대, 76mm 이상의 대구경 야포 13000여 문, 카츄샤 다연장 로켓발사기 2200여 대와 5000여 대의 항공기를 투입하였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부대는 제 3기갑군, 제 4기갑군과 전에 붕괴된 중부 집단군의 잔존부대였으며 병력은 겨우 병력 58만 명[6] 에 야포 4100문, 전차 1200대 정도에 불과하여 병력비부터 3대 1로 열세였다. 여기에 민병대인 국민돌격대(Volksturm)가 20만 명이 있었으나 무장이나 훈련이 빈약한 이들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등 전투 경험을 겪으며 숙련되고 고도로 기계화된 소련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었다.
공세는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거의 실패로 마무리될 즈음인 1945년 1월 13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 때문에 정예부대가 서부전선에 있었으므로 병력의 질과 장비가 모두 상태가 안좋은 2선급 병력이 주력으로 된 안습한 상태였으나 이제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 싸우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여기에 동프로이센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되기 전부터 독일이 구축한 참호선이 몇겹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산맥이나 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없다는 약점을 상당부분 보충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런 저항 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착실히 전진했다. 1월 28일 바그라미안의 전선군은 메멜을 점령하고 더욱 더 전진하여 잔존 독일군 부대를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 몰아넣고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우익을 차단하였다. 소련군은 이들을 포위하여 계속 공격했고, 4월 9일 이곳을 지키던 독일군은 항복하였다.
이후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차지했던 폴란드 동부를 그대로 소련 영토로 흡수하였고, 그 대신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와 동프로이센을 폴란드 영토로 내어주었다. 한편 쾨니히스베르크는 종전 후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어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 해체 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계속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소련군은 이렇게 동프로이센을 가로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쪽에서도 공세를 개시하여 순식간에 전쟁 전부터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와 당시 독일 영토인 '오스트마르크 주'였던 오스트리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남북으로 쳐들어오는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대규모였고 독일군은 가만히만 있다가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제공격을 할 계획을 세운다. 이름하여 지점[7] 작전(존넨벤데 작전)이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은 점점 베를린으로 다가오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거느린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선두 부대를 떼어놓아 진격을 멈추게 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와 노르웨이에서 점령군 병력을 끌어왔고 헝가리 방면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던 요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까지 끌어왔다. 이렇게 편성된 군을 비스툴라 집단군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병력을 누가 지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히틀러와 구데리안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빚어졌다. 히틀러가 내세운 이 작전의 지휘관은 우습게도 군 경력이 고작 위관 후보생에 그쳤던 하인리히 힘러였고 이는 역전의 독일 장성들에게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발터 벵크 장성을 밀었고 결국 힘러는 교체되었다.
소련군은 여러 경로로 첩보를 입수해 이미 독일의 작전 전모를 대략 알고 있었고 주코프는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양 군이 맞붙게 될 포메른 지방은 숲과 호수, 그리고 개천이 있었으나 대체로 기갑부대의 움직임에는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독일군은 공세를 위해 1,200대의 전차를 준비했으나, 이미 연합국의 폭격 때문에 이를 전장까지 수송할 열차가 크게 부족했다. 이 때문에 전장에 도착한 전차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소련군도 1~2월의 공세에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미 동부전선 개전 이래의 인명피해가 누적된 바람에 보병 사단의 정원이 3,000명에서 4,000명까지 내려갈 정도라 명색이 사단급인 부대가 실제로는 조금 강화된 연대급의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총 병력 숫자는 독일군보다 훨씬 많았다.
독일군은 2월 15일에 공세를 시작했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있던 소련군의 저항 때문에 전진은 매우 느렸고 겨우 수 킬로미터 정도 전진하는데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판터나 티거 같은 무거운 중전차들이 해빙기의 빙판과 진흙탕에서 제대로 굴러가지 못해서 진격에 방해가 되었다. 이에 비해 넓은 궤도을 갖춘 소련군의 T-34 전차는 빙판에서 훨씬 잘 움직였다. 설상가상으로 지휘관이었던 벵크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2월 18일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독일군의 전진이 둔해지자 주코프는 2월 19일에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무장친위대가 주축이 된 독일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많은 전차를 버려두고 후퇴하였다. 2월 24일에는 북쪽의 로코솝스키 전선군이 주코프의 반격을 지원하면서 선제공격을 날리려던 독일군은 참패하고 후퇴했다. 물론 이런 독일군의 공세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는데 스탈린과 주코프는 베를린으로 바로 진격하려던 원래 계획을 연기하고 그 동안 전선 우익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작전을 펼쳤다.
예상 외로 독일군의 저항이 거세자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북방쪽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단치히 만을 포함한 포메른(폴란드명 포모제)와 서프로이센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는 2차대전의 시발점인 폴란드 침공의 도화선이 된 도시였기 때문에, 이 도시의 점령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공세를 맡은 부대는 로코솝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었다. 이 전선군은 100만의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베를린으로 가는 주요 공세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 서방 전사가들에게 롬멜이나 패튼에 자주 비교되는 로코솝스키는 독일군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이에 맞서는 독일 제2군은 26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동안 워낙 병력 소모가 심했던 탓에 제대로 편제된 사단은 얼마 되지 않았다. 3월 부터는 한숨 돌린 주코프가 지휘하는 남방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 일부가 로코솝스키의 공세를 지원했다.
결국 3월 28일에 단치히는 소련군에게 함락되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전사자와 1만 명의 포로를 냈고, 독일 제2군은 거의 껍데기만 남고 비스와 강 서안으로 도피했으며 일부 부대는 단치히 만 북쪽에 있는 헬 반도라는 돌출부에 갇혔다.
한편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니더슐레지엔(폴란드명 돌니실롱스크)에서는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2월부터 공세를 개시했다. 4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코네프 전선군은 니더슐레지엔을 돌파하고 오버슐레지엔으로 공세를 확대했다.
이 때 독일 A 집단군(중부 집단군이 이름을 바꾼 것)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소련측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반격 작전을 실시해 소련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으로 쇠르너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고, 히틀러는 자살하기 며칠 전 쇠르너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물론 그래봐야 며칠 못 갔다). 이 때 독일군은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를 모두 사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뜻밖의 공격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코네프는 다시 재반격을 개시했고 독일군은 여기서 참패하여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 측은 독일군 4만 명이 전사하고 1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발표했다. 코네프군의 승리로 소련군은 A 집단군을 밀어붙이고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 좌익의 안전을 확보했다.
독일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총 60개 사단과 1300여대의 전차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전술적 측면에서 접근해도 마찬가지였다. A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바익셀 집단군도 소련군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으며 남부 집단군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 아니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가 깨끗하게 소멸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략적으로도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이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폴란드 곳곳에 재배치한 공업 시설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미-영 연합군의 폭격기 공습에 독일 본토 군수공장들도 제대로 가동을 못하는 상황에서 폴란드를 완전히 소련에게 내어준 것은 '''독일 군수 공업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8]
동부전선에서 동포들을 유린한 나치와 독일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소련군을 피해, 많은 독일계 민간인들이 동프로이센을 버리고 피난해야만 했다. 문제는 동프로이센에 소련군이 쇄도할 때까지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대피시키기는 커녕 피난을 금지한 나치 독일의 뻘짓 때문에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독일 민간인들의 고생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난길 와중에 연합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나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많은 이들이 죽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도 이때 발생했다.
독소전쟁 초기에 인종청소라는 미명 하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은 복수심에 가득 차 독일 민간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해하거나 강간했고 소련군 지휘부는 이를 은근히 조장하거나 묵인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인의 소련군에 대한 공포심을 증폭시키는 나치 선전에 이용되었고, 독일군은 '이길텐가, 시베리아에 갈테냐?'(Sieg oiler Siberien)라는 표어를 내걸고 종전까지 끝까지 완강히 저항하였다. 한편 180만 명의 민간인이 배를 이용하여 독일 본토, 또는 남아메리카로 피난을 시도했고, 그 와중에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9] 물론 인구 대비 전혀 작은 숫자인건 아니다. 소련군도 장병들에 의한 약탈과 성범죄의 심각성을 느끼고 즉시 단속에 나서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식량 배급을 실시하는 등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 독일인들의 민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10]
이 공세를 통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자유 폴란드를 비롯한 현지 혁명군의 의사를 무시했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 소련의 지시를 받는 사회주의 정권을 세워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전후 소련, 폴란드 정부는 새로 할양받은 영토 안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기존 영토 안에 살던 독일인들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수 많은 독일계 실향민들이 동독이나 서독으로 넘어왔다. 다만 이러한 추방은 단순한 복수의 의미보다는 독일이 독일계 민족의 거주 분포를 근거로 해당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하면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추방은 그럭저럭 온건하게 이뤄진 편이었다. 그 흔적이 바로 독일 각지에서 실향민들을 통해 전해지는 동프로이센 요리이다.
이로 인해 구 프로이센 지역의 영유권 문제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조할 것.
동프로이센 전선에서 이반 체르냐홉스키는 동프로이센 주둔 소련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2월에 공세 준비를 시찰하던 중 독일군이 쏜 포탄의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독소전쟁 개전시 대령에 불과했으나, 눈부신 재능과 혁혁한 전공으로 불과 37살에 전선군 사령관 겸 대장까지 오르며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을 찍은 천재적 군인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후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총참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가 지휘하였다.
한편 스탈린이 전선 우익과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베를린 공세를 미룬 것에 대해, 종전 후 여러 가지로 논쟁이 있었다. 스탈린의 병적인 조심성 때문에 전쟁을 훨씬 일찍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설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남방에서 진격 중이던 제2,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서 소련에게 정치적인 이익을 줬다는 설도 있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대체역사 RTS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소련군 캠페인 2번째 미션이 이 전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여기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포지션이다.
1945년 1월부터 5월까지의 독소전쟁 전황도. 비스와-오데르 공세와 베를린 전투가 들어가는 오데르-나이세 공세 전황도이다.
1. 개요
Vistula-Oder Offensive,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치러진 소련군의 나치 독일을 향한 마지막 대공세이다. 이름은 소련군이 독일을 향해 진군하면서 건넌 두 개의 주요한 강인 비스와 강[1] 과 오데르 강[2] 에서 딴 것으로 영어식 명칭인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병력의 경우 독일 측은 45만 여명을, 소련 측은 220만 여명을 동원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전쟁 4년 만에 독일 본토에 진입하게 된다.
2. 배경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발트해에 이르는 지역을 해방시킨 소련군은 기나긴 진군으로 길어진 보급선 문제로 공세를 멈추어야 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마켓 가든 작전의 전략적 실패로 주춤거리는 연합군을 박살낼 절호의 기회로 보고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했지만 연합군의 맹렬한 저항에 실패로 돌아갔다.[3]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3. 동프로이센 공세
공세에 참가할 소련군은 세갈래로 편성되었다. 주공은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4] 의 제3벨라루스 전선군이었고, 조공은 우익(북방)에 홉하네스 바그라미안 대장의 제1발트 전선군, 좌익(남방)에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포진해 있었다. 소련군은 병사 170만명[5] 이었고 전차 4500여대, 돌격포 2500여대, 76mm 이상의 대구경 야포 13000여 문, 카츄샤 다연장 로켓발사기 2200여 대와 5000여 대의 항공기를 투입하였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부대는 제 3기갑군, 제 4기갑군과 전에 붕괴된 중부 집단군의 잔존부대였으며 병력은 겨우 병력 58만 명[6] 에 야포 4100문, 전차 1200대 정도에 불과하여 병력비부터 3대 1로 열세였다. 여기에 민병대인 국민돌격대(Volksturm)가 20만 명이 있었으나 무장이나 훈련이 빈약한 이들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등 전투 경험을 겪으며 숙련되고 고도로 기계화된 소련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었다.
공세는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거의 실패로 마무리될 즈음인 1945년 1월 13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 때문에 정예부대가 서부전선에 있었으므로 병력의 질과 장비가 모두 상태가 안좋은 2선급 병력이 주력으로 된 안습한 상태였으나 이제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 싸우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여기에 동프로이센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되기 전부터 독일이 구축한 참호선이 몇겹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산맥이나 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없다는 약점을 상당부분 보충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런 저항 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착실히 전진했다. 1월 28일 바그라미안의 전선군은 메멜을 점령하고 더욱 더 전진하여 잔존 독일군 부대를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 몰아넣고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우익을 차단하였다. 소련군은 이들을 포위하여 계속 공격했고, 4월 9일 이곳을 지키던 독일군은 항복하였다.
이후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차지했던 폴란드 동부를 그대로 소련 영토로 흡수하였고, 그 대신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와 동프로이센을 폴란드 영토로 내어주었다. 한편 쾨니히스베르크는 종전 후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어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 해체 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계속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4. 독일군의 발악
소련군은 이렇게 동프로이센을 가로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쪽에서도 공세를 개시하여 순식간에 전쟁 전부터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와 당시 독일 영토인 '오스트마르크 주'였던 오스트리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남북으로 쳐들어오는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대규모였고 독일군은 가만히만 있다가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제공격을 할 계획을 세운다. 이름하여 지점[7] 작전(존넨벤데 작전)이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은 점점 베를린으로 다가오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거느린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선두 부대를 떼어놓아 진격을 멈추게 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와 노르웨이에서 점령군 병력을 끌어왔고 헝가리 방면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던 요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까지 끌어왔다. 이렇게 편성된 군을 비스툴라 집단군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병력을 누가 지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히틀러와 구데리안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빚어졌다. 히틀러가 내세운 이 작전의 지휘관은 우습게도 군 경력이 고작 위관 후보생에 그쳤던 하인리히 힘러였고 이는 역전의 독일 장성들에게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발터 벵크 장성을 밀었고 결국 힘러는 교체되었다.
소련군은 여러 경로로 첩보를 입수해 이미 독일의 작전 전모를 대략 알고 있었고 주코프는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양 군이 맞붙게 될 포메른 지방은 숲과 호수, 그리고 개천이 있었으나 대체로 기갑부대의 움직임에는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독일군은 공세를 위해 1,200대의 전차를 준비했으나, 이미 연합국의 폭격 때문에 이를 전장까지 수송할 열차가 크게 부족했다. 이 때문에 전장에 도착한 전차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소련군도 1~2월의 공세에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미 동부전선 개전 이래의 인명피해가 누적된 바람에 보병 사단의 정원이 3,000명에서 4,000명까지 내려갈 정도라 명색이 사단급인 부대가 실제로는 조금 강화된 연대급의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총 병력 숫자는 독일군보다 훨씬 많았다.
독일군은 2월 15일에 공세를 시작했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있던 소련군의 저항 때문에 전진은 매우 느렸고 겨우 수 킬로미터 정도 전진하는데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판터나 티거 같은 무거운 중전차들이 해빙기의 빙판과 진흙탕에서 제대로 굴러가지 못해서 진격에 방해가 되었다. 이에 비해 넓은 궤도을 갖춘 소련군의 T-34 전차는 빙판에서 훨씬 잘 움직였다. 설상가상으로 지휘관이었던 벵크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2월 18일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독일군의 전진이 둔해지자 주코프는 2월 19일에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무장친위대가 주축이 된 독일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많은 전차를 버려두고 후퇴하였다. 2월 24일에는 북쪽의 로코솝스키 전선군이 주코프의 반격을 지원하면서 선제공격을 날리려던 독일군은 참패하고 후퇴했다. 물론 이런 독일군의 공세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는데 스탈린과 주코프는 베를린으로 바로 진격하려던 원래 계획을 연기하고 그 동안 전선 우익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작전을 펼쳤다.
5. 포메라니아 공세
예상 외로 독일군의 저항이 거세자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북방쪽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단치히 만을 포함한 포메른(폴란드명 포모제)와 서프로이센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는 2차대전의 시발점인 폴란드 침공의 도화선이 된 도시였기 때문에, 이 도시의 점령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공세를 맡은 부대는 로코솝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었다. 이 전선군은 100만의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베를린으로 가는 주요 공세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 서방 전사가들에게 롬멜이나 패튼에 자주 비교되는 로코솝스키는 독일군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이에 맞서는 독일 제2군은 26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동안 워낙 병력 소모가 심했던 탓에 제대로 편제된 사단은 얼마 되지 않았다. 3월 부터는 한숨 돌린 주코프가 지휘하는 남방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 일부가 로코솝스키의 공세를 지원했다.
결국 3월 28일에 단치히는 소련군에게 함락되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전사자와 1만 명의 포로를 냈고, 독일 제2군은 거의 껍데기만 남고 비스와 강 서안으로 도피했으며 일부 부대는 단치히 만 북쪽에 있는 헬 반도라는 돌출부에 갇혔다.
6. 실레시아 공세
한편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니더슐레지엔(폴란드명 돌니실롱스크)에서는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2월부터 공세를 개시했다. 4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코네프 전선군은 니더슐레지엔을 돌파하고 오버슐레지엔으로 공세를 확대했다.
이 때 독일 A 집단군(중부 집단군이 이름을 바꾼 것)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소련측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반격 작전을 실시해 소련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으로 쇠르너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고, 히틀러는 자살하기 며칠 전 쇠르너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물론 그래봐야 며칠 못 갔다). 이 때 독일군은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를 모두 사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뜻밖의 공격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코네프는 다시 재반격을 개시했고 독일군은 여기서 참패하여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 측은 독일군 4만 명이 전사하고 1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발표했다. 코네프군의 승리로 소련군은 A 집단군을 밀어붙이고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 좌익의 안전을 확보했다.
7. 결과
독일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총 60개 사단과 1300여대의 전차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전술적 측면에서 접근해도 마찬가지였다. A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바익셀 집단군도 소련군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으며 남부 집단군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 아니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가 깨끗하게 소멸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략적으로도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이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폴란드 곳곳에 재배치한 공업 시설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미-영 연합군의 폭격기 공습에 독일 본토 군수공장들도 제대로 가동을 못하는 상황에서 폴란드를 완전히 소련에게 내어준 것은 '''독일 군수 공업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8]
동부전선에서 동포들을 유린한 나치와 독일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소련군을 피해, 많은 독일계 민간인들이 동프로이센을 버리고 피난해야만 했다. 문제는 동프로이센에 소련군이 쇄도할 때까지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대피시키기는 커녕 피난을 금지한 나치 독일의 뻘짓 때문에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독일 민간인들의 고생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난길 와중에 연합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나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많은 이들이 죽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도 이때 발생했다.
독소전쟁 초기에 인종청소라는 미명 하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은 복수심에 가득 차 독일 민간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해하거나 강간했고 소련군 지휘부는 이를 은근히 조장하거나 묵인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인의 소련군에 대한 공포심을 증폭시키는 나치 선전에 이용되었고, 독일군은 '이길텐가, 시베리아에 갈테냐?'(Sieg oiler Siberien)라는 표어를 내걸고 종전까지 끝까지 완강히 저항하였다. 한편 180만 명의 민간인이 배를 이용하여 독일 본토, 또는 남아메리카로 피난을 시도했고, 그 와중에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9] 물론 인구 대비 전혀 작은 숫자인건 아니다. 소련군도 장병들에 의한 약탈과 성범죄의 심각성을 느끼고 즉시 단속에 나서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식량 배급을 실시하는 등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 독일인들의 민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10]
이 공세를 통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자유 폴란드를 비롯한 현지 혁명군의 의사를 무시했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 소련의 지시를 받는 사회주의 정권을 세워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전후 소련, 폴란드 정부는 새로 할양받은 영토 안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기존 영토 안에 살던 독일인들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수 많은 독일계 실향민들이 동독이나 서독으로 넘어왔다. 다만 이러한 추방은 단순한 복수의 의미보다는 독일이 독일계 민족의 거주 분포를 근거로 해당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하면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추방은 그럭저럭 온건하게 이뤄진 편이었다. 그 흔적이 바로 독일 각지에서 실향민들을 통해 전해지는 동프로이센 요리이다.
이로 인해 구 프로이센 지역의 영유권 문제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조할 것.
8. 여담
동프로이센 전선에서 이반 체르냐홉스키는 동프로이센 주둔 소련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2월에 공세 준비를 시찰하던 중 독일군이 쏜 포탄의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독소전쟁 개전시 대령에 불과했으나, 눈부신 재능과 혁혁한 전공으로 불과 37살에 전선군 사령관 겸 대장까지 오르며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을 찍은 천재적 군인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후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총참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가 지휘하였다.
한편 스탈린이 전선 우익과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베를린 공세를 미룬 것에 대해, 종전 후 여러 가지로 논쟁이 있었다. 스탈린의 병적인 조심성 때문에 전쟁을 훨씬 일찍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설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남방에서 진격 중이던 제2,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서 소련에게 정치적인 이익을 줬다는 설도 있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대체역사 RTS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소련군 캠페인 2번째 미션이 이 전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여기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포지션이다.
[1] 폴란드어 명칭으로 영어식으로는 비스툴라(Vistula), 독일어식으로는 바이크셀(Weichsel) 강이라고 한다.[2] 원어 Oder는 독일식 명칭인데, 정작 독일어 발음상으로는 오데르가 아닌 오더라는 표기가 정확하다. 폴란드어식로는 오드라 강이라고 한다.[3] 디데이에서 3달 정도 지난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서유럽엔 이미 1백만 이상의 연합군이 들어와 있었고, 매 순간순간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겨우 1개 야전군 규모로 포위기동을 시도해도 포위는 커녕 잘못하면 역포위 섬멸을 당할 처지였다. 심리전과 날씨를 이용한 기습으로 그나마 공세라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4] Генерал армии[5] 영문 위키피디아는 220만 여명으로 추산함을 참고할 것.[6] 영문 위키피디아는 45만 여명으로 추산함을 참고할 것.[7] 지점이란 태양의 남중 고도가 가장 높거나 낮은 때를 말한다. 일년에 두 번 있는 동지와 하지를 통틀어 말하는 말이다.[8] 출처: 데이비드 M.글랜츠 '독소전쟁사', 324p[9] 이러한 피해를 모두 합쳐도 소련이 입은 민간인 피해보다 까마득하게 낮은 수치라는 것을 알아야한다.[10] 단순히 독일인들에 대한 민심을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전투를 비롯한 독일 영내 전투, 그리고 점령 이후에도 소련군의 비행에 분노한 독일인들이 소련 점령군들에게 테러 및 저항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방의 눈치도 봐야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