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다 타이지

 



'''3기 LOUDNESS'''의 멤버
타카사키 아키라
야마다 마사키
'''사와다 타이지'''
히구치 무네타카



'''TAIJI
타이지'''

<colbgcolor=#000> '''본명'''
사와다 타이지 (澤田泰司)[1]
'''출생'''
1966년 7월 12일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사망'''
2011년 7월 17일(향년 45세)
미국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섬
'''국적'''
일본 [image]
'''신체'''
173cm, A형[1]
'''직업'''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 작곡가, 프로듀서
'''악기'''
베이스 기타, 일렉트릭 기타
'''활동 그룹'''
TRASH
DEMENTIA
PROWLER
X(1985년)[2]
DEAD WIRE
X(1986년 ~ 1992년)
LOUDNESS(1992년 ~ 1993년)
D.T.R(1994년 ~ 1996년, 2007년)
KINGS(1995년)
CLOUD NINE(2000년 ~ 2001년)
音風(2006년 ~ 2006년)
TAIJI WITH HEAVEN'S(2006년 ~)[B]
THE KILLING RED ADDICTION(2009년 ~)[B]
TSP(2010년 ~)[B]
X JAPAN(2011년 ~)[B]
'''서명'''
[image]
1. 개요
2. 연주자로서의 평가
3. 생애
3.1. 음악 입문기
3.2. X에서의 활동
3.3. LOUDNESS에서의 활동
3.4. D.T.R에서의 활동
3.5. 노숙자 생활
3.6. 복귀
3.7. 그 후
3.8. 사망
4. 총평
5. 그의 악기들
5.1. 타이지의 일렉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5.2. 타이지의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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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께 영혼을 탐구하는 여행을 하고싶었어. 함께 소리와 소리의 연결다리가 되고싶었어. 친구에게 (一緒に魂 を探求する旅をしたかった。一緒に音かと音への架け橋をしたかった。友ヘ。) -TAIJI[3]

'''

사와다 타이지는 일본의 아티스트로 X와 LODNESS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솔로 활동에서 가끔 기타도 연주했었지만 메인은 역시 베이스였다. 그렇게 유명 밴드의 베이스를 담당하다가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2011년 7월17일 석연치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2. 연주자로서의 평가


  • 그의 거의 모든 커리어는 하드록/헤비메탈 신에 경도되어 있지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어프로치가 특기. 또한, 밴드의 기둥인 베이스가 굳건하지 못하면 밴드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보다도 많이 연습하고 있다 말한 적이 있다.
  • 피크를 주로 사용했으나, 검지약지를 이용한 투 핑거 피킹으로도 연주했다.[4] 슬랩 주법과 후에 타카사키 아키라에게 배운 태핑을 이용해 매우 테크니컬 한 솔로를 전개한다. 아르페지오를 사용해 리프에서 독특한 뉘앙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 처음에는 빌리 시언이나 매노워(Manowar)를 추종하며 테크니컬 한 플레이를 즐겼으나, Jealousy 레코딩을 위해 LA에 다녀온 후 곡 진행의 선명함을 돕는 프레이즈와 그루브를 중시하는 쪽으로 베이스 연주에 대한 인식을 전환했다.
  • 면전에서 후배를 칭찬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히구치 무네타카가 그의 베이스 라인을 극찬했었고, 그와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던 드러머 소우루 토오루는 "멋진 베이시스트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만나 봤지만, 사와다 타이지는 내가 찾는 드래곤 볼 중 하나와도 같은 베이시스트"라고 절찬했다. 솔로 앨범에서 직접 베이스를 녹음한 히데도 "영향받은 베이시스트는 타이지. 그 친구는 원래 기타리스트였으니까, 가려운 곳에 손을 뻗어 긁어주는 듯한 프레이즈를 연주한다"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 기타연주도 잘한다. Voiceless screaming 녹음은 말 할것도 없고 D.T.R이나 오토카제에서 기타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심지어는 요시키가 타이지를 처음 영입 할때 기타리스트로 할 생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 악기 연주 뿐만 아니라 작곡, 편곡, 프로듀싱에도 능하다. X 에서만 5곡[5] 을 작곡했고, 紅、Week end, endless rain Silent jealousy, Rose of Pain, 심지어는 Art of life도 편곡을 담당했다.[6]등 X의 명곡들을 포함해 수많은 곡들을 편곡하였다.

3. 생애



3.1. 음악 입문기


1966년 7월 12일 지바 현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7] 두 살 때 아버지 공장의 기계에 손을 넣었다가 오른손 중지 첫 번째 관절을 잃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스키를 타다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고 입원 기간 동안 병실에서 이나 올리비아 뉴튼 존, 비틀즈 등을 접했으며, 아버지가 연주하는 Romance를 보고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으로 잡고 아이언 메이든LOUDNESS, 딥 퍼플 등을 카피했으며,[8] 프로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트래쉬(Trash)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기스(GEESS)의 권유로 디멘시아(DEMENTIA)[9]라는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베이스 기타를 접하고 베이시스트로 전향한 것은 바로 이 때. 베이스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 타이지 본인은 '여러가지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에는 레이(Ray)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자서전에서 밝힌 바로는 히데를 처음 만난 것도 디멘시아 시절이며, 이때 히데가 있던 '요코스카 샤벨 타이거'의 공연을 보고 "와 우리 디멘시아는 쨉도 안되는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개인의 악기 실력'과 '밴드 합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특히 X 초기 시절에는 히데가 합주 연습에서 한 번도 틀린 걸 본 적이 없다고 한 걸로 보아 히데가 합주 연습을 강하게 밀고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때 히데의 카리스마에 반해 먼저 인사를 청해서 친해졌는데 X 시절에 히데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한다.
베이시스트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타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X의 메이저 2집 Jealousy#s-1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은 타이지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는데, 팀의 기타리스트인 히데가 '''너무 어려워서 못 치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LOUDNESS 가입 당시 기타리스트 '''타카사키 아키라''' 앞에서 기타를 연주했는데, 타카사키도 그의 기타 실력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3.2. X에서의 활동


1986년에 Yoshiki의 열렬한 영입 시도에 엑스(X)에 정식 가입, 이때부터 가장 잘 알려진 예명인 'TAIJI'를 사용한다. Yoshiki의 끊임없는 제안을 들으며 그는 '''"이 사람이라면 음악 외에 무언가가 될 것 같다"'''라며 X는 가입하게 된 배경을 밝히기도. 당시 재적하던 밴드에 Taiji가 추천하던 기타리스트를 소개하는 교환의 형식으로 X에 영입되었다고 한다.
요시키의 말에 따르면, 타이지는 Anthem을 굉장히 좋아했고, 본인도 Anthem을 좋아하긴 했지만, 요시키 본인은 Anthem 같은 음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타이지와 자신은 팀워크나 다른 면에서는 굉장히 잘 맞았다고 한다. 초창기 멤버들이 모두 싸워서 나간 멤버들이지만 타이지는 조금 달랐다고...
인디 시절부터 멤버에게 부과되는 지출이 컸던 X JAPAN의 초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음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으나 돈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돈 되는 물건은 다 팔아먹고, 전기도 끊기고, 나중에는 편의점에서 빵을 훔쳐서 연명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거쳤다. 한 번은 멤버들끼리 같이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난 후 멤버들의 지갑을 다 털어봐도 돈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히데가 '뛰어'라고 해서 멤버들 모두 도망을 갔는데, 히데가 워낙 저질 체력이다 보니(...) 타이지가 직접 업고 도망쳤다고 한다.
혼자서 가이세키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요리에 소질이 있다. X 때 YOSHIKI의 집에서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타이지가 밥을 해줬었고 별 볼일 없는 재료로 만들었었는데도 맛이 있었다고 한다.[10]
TAIJI가 만든 요리 사진이 올라와있는 TAIJI의 블로그 글
TAIJI가 요리하는 사진
YOSHIKI로부터 X 가입을 권유받을 당시 TAIJI는 자신이 생각한 음악을 제대로 연주할 사람은 TOSHI와 YOSHIKI라는 판단하에 당시 2명 외에 X 멤버를 교체해 줄 것을 요청했고 YOSHIKI는 이를 승낙하며 TOSHI와 YOSHIKI만 남은 X에 가입한다. 이후 PATA가 가입하였지만 TAIJI는 트윈 기타 체제로 기타와 베이스를 병행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껴 잠시 탈퇴했었고 이후 HIDE가 가입하고 나서야 재가입하여 X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X에 대한 반감 때문에 X 재적 시절을 흑역사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음악적으로는 이후의 행보에 비해 미진할지 몰라도 금전적인 면에서만큼은 리즈시절이었고 그의 빛나는 편곡 능력도 이 시기가 황금기였다.
X JAPAN으로 개명하기 전 X의 명곡들은 거의 모두 타이지의 편곡을 거쳤다. 결국 X의 대부분의 음악에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발휘되었다고 평가된다. Weekend, Rose of Pain, , Silent Jealousy 등 짜임새 있고 드라마틱 한 X의 음악은 모두 타이지의 손을 거쳤다. 뛰어난 연주 및 편곡 실력으로 하여금, X의 음악적 완성도와 라이브를 지탱했다고 평가된다. 당시 X가 록 밴드로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요시키의 멜로디와 타이지, 히데의 편곡이라는 구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X의 음악적 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탓에 현재까지도 TAIJI의 탈퇴에 아쉬움을 표하는 팬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Yoshiki와 인세 배분 문제 등으로 사이가 벌이지고, 음악성 차이 등의 이유로 타이지는 1992년 엑스를 탈퇴한다. 그러나 그 탈퇴의 과정을 보면 차라리 해고에 가깝다고 해석된다. Yoshiki 의 자서전에 의하면, X에 타이지가 필요했음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등 트러블이 심화되면서 결별했다고 한다. 그만큼 Yoshiki의 독선적인 면모만큼이나 타이지의 트러블 메이커적인 면모도 X와의 결별에 한몫한 듯하다. [11] 1989년 라우드니스의 한국 공연을 따라가는 바람에 TV에 4명만 출연하기도 했고, 1990년에는 말도 없이 친구 야기 사토시의 밴드를 도와주는 등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에서 해고당했다. 그리고 타이지는 X에서 해고되자마자, 그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던 타카사키 아키라의 권유로 Loudness에 가입한다.
요시키와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요시키의 독단적인 해고로 알고 있으나 타이지가 직접 쓴 자서전에 의하면 요시키는 탈퇴 통보만 했을 뿐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고한 건 "검은 힘"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아무래도 평소에 스탭들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걸 생각하면 검은 힘이 뭔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금전 문제로 싸워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동안 요시키와 타이지의 길고 길었던 싸움을 금전 문제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라고 한다. 금전 문제도 요시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인디 시절부터 엑스터시 레코드 설립, 메이저 정규 앨범 발매 전까지 상당한 부분의 금액을 요시키 모친의 지원으로부터 충당하였다고 한다. X를 회사로 따지자면 투자한 지분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멤버들은 이 부분을 알고 있었기에 불만이 있었어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타이지만이 불만을 표출했고, 결국엔 X를 탈퇴한다.
다만 타이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요시키가 부상 중에 분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그의 드러밍 실수를 지적하는 등 X 시절 자신의 모습은 직구밖에 모르는 트러블 메이커였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요시키에 대해서 굉장히 우호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실제로 1992년도 탈퇴 이후 2011년도 사망 전까지 요시키를 욕하거나 원망하는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12][13]

3.3. LOUDNESS에서의 활동


라우드니스의 멤버로 재적했을 때는, 본명인 사와다 타이지(沢田泰司)로 활동했다.
1989년 라우드니스의 한국 공연을 따라가면서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라우드니스가 눈여겨보던 인재였다. SOLDIER OF FORTUNE의 초반 녹음을 X와 같은 스튜디오에서 했던 아키라는, '''"X의 멤버 중 제대로 연주하고 있는 건 타이지 한 명뿐"'''이라고 말했으며 이 무렵 개인적으로 태핑을 가르쳐주었는데 타이지는 그걸 곧바로 익혀서 Rose of pain 연주에 써먹었다.
라우드니스 가입 후 타이지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전임 베이시스트인 야마시타 마사요시가 "잠깐 쉬고 싶다"라며 탈퇴하면서 후임으로 추천하는 식으로 가입했는데, 당시 하드록과 헤비메탈계에서는 타이지를 '''아이돌 밴드 짓이나 하던 비천한 놈''' 취급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당시 타이지는 무대에 오르는 것에 일종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라우드니스 공연장마다 타이지에게 쏟아지는 기존 라우드니스 팬들의 야유였다. 투어 공연 내내 X 시절 극성팬들의 만행이 말로 못 할 만큼 심했기 때문에, 타이지 본인에게까지 그 불똥이 튄 것이다.
참고로 이 당시의 힘들었던 타이지를 격려하고 감싸줬던 사람이 라우드니스의 드러머 히구치 무네타카였다. 가장 따뜻하게 라우드니스로 잘 왔다고 반겨주었고 타이지를 비난하던 반응에 대해 보호를 해주었다.
하지만 음악적 역량은 이때가 리즈시절. 마이크 베세라를 해고한 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보컬인 E.Z.O야마다 마사키가 가입했고, 하프 다운 튜닝에다 판테라 스타일의 파워 메탈로 방향을 선회한 1992년작 셀프 타이틀 앨범 LOUDNESS는 타카사키 아키라가 스스로 '''최강의 멤버로 제작된 최강의 록 앨범'''이라 자신한 만큼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으며, 연주자로서 내공이 쌓인 멤버들 역시 절정의 테크닉을 보여주며 Loudness의 제 2의 전성기를 만들어낸다. 이 당시의 라우드니스 영상을 본다면 가히 엄청난 포스가 느껴진다.
앨범 판매량은 오리콘 차트 2위를 기록했으며,[14] X 시절의 타이지를 기억하는 사람들 덕에 라우드니스는 청소년과 여성 팬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고 기존의 록 전문잡지들뿐 아니라 비주얼 계열을 주로 다루는 SHOXX에 전문지 YOUNG GUITAR까지 취재 공세도 이어졌다. 투어인 Welcome To Slaughter House는 전회 매진을 기록하는 등, 일부에서는 이때가 Loudness의 진정한 전성기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 당시 타이지는 대선배들로 가득한 라우드니스의 멤버들에게 밀리지 않는 패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당시 투어 영상 중 TWISTED
하지만 이 시기 즈음하여 라우드니스에는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타카사키 아키라와 소속사 사이의 갈등이 날로 심해졌고, 지분 조정으로 워너 뮤직과의 불화에다 과거 음반 판권 문제까지 벌어지는 등 문제가 이어지자, 1993년 야마다 마사키가 탈퇴 의사를 내비쳤으며 그 때문에 라우드니스가 임시 해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줄 알았던 타이지는 개인 사무소 TAO 코퍼레이션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고 타카사키 아키라의 뒤통수를 친 격이 되었다. 그래도 그를 아꼈던 아키라는 '''라우드니스에서 활동한다면 눈감아 주겠다'''고까지 했으나, 타이지는 개인 팬클럽인 가솔린 카우보이를 만들면서 1993년 11월 라우드니스를 탈퇴한다.

3.4. D.T.R에서의 활동


D.T.R에서의 예명은, 발음은 같고 한자는 다른 사와다 타이지(沢田大司)였다.
자기 음악을 하고 싶었던 타이지는 보컬리스트 타케우치 미츠오, 기타리스트 후지모토 타이지 등과 함께 D.T.R을 결성했고, 첫 앨범인 DIRTY TRASHROAD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지만, 당시 일본 메탈이 암흑기였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선방했다. 악곡의 완성도나 연주력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고 기존 하드록/헤비메탈 청자들에게도 인정받았으나, D.T.R의 전성기는 이 앨범으로 끝이었다. X 시절의 팬들은 타이지를 보러 오는 것일 뿐 그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2집 DARING TRIBAL ROAR는, 악곡의 퀄리티와 상관없이 세일즈에서 참패했다.[15] 이때 찾아온 일본 메탈 암흑기는 그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나는 절대 X JAPAN을 따라 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달리 비주얼계에 모습을 드러냈고 당시 라우드니스와 사이가 극히 좋지 않았던 ROCKIN'F에 출연하는 등, 결국 그를 아끼던 타카사키 아키라까지 그에게 실망하게 된다. 게다가 이혼까지 겹쳐 전 재산을 탕진했고 양육권까지 빼앗기며 인생이 막장으로 떨어졌고, 그는 길거리에 나앉으며 '''노숙자'''가 된다.

3.5. 노숙자 생활


기타 한 대, 수통 하나, 냄비 하나, 룩색 하나를 가지고 우에노 공원 근처에서 노숙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노숙자에게 폭행을 가하는 범죄행위인 소위 '''"홈리스 사냥"'''의 피해자가 되어 턱이 부러지고 이가 4개나 나가는 등,[16] 이 시절의 타이지는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왕년의 록스타가 그야말로 거지가 되었다.
타카사키 아키라는 그가 행방 불명자로 등록되었는데도 아끼던 후배의 몰락을 마음 아파하며 그의 통장에 꼬박꼬박 인세를 넣어주었고, D.T.R 시절의 인세도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17]
의절했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임대 아파트를 구하여 살 수 있었으나, 매일 근처 강변에서 자살 기도를 하는 비참한 상황.
그가 이런 방황을 끝낸 계기는, X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hide의 죽음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졌을 때, 항상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준 건 hide뿐이었습니다. 그는 늘 나에게 말했어요. '타이지, 너라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함께 영혼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던… 친구에게…'''

hide 부고를 받고 참여한 장례식이 재기의 발판이 된다. 옛날의 음악적 동료와 재회, 지원이 이어지고 재기의 찬스를 얻게 되는데, "홈리스 사냥"으로 인해 깨진 치아를 본 Yoshiki가 200만 엔을 건네줬다고 한다.

3.6. 복귀


히구치 무네타카의 도움으로 COZY POWELL FOREVER 앨범에 세션으로 참가하면서, 재기의 뜻을 다진다. 그 여세를 몰아 투어에도 참전. '''친구의 죽음을 딛고 일어난 실력 있는 뮤지션의 컴백'''이라는 타이틀도 얻어 화려한 재기를 하려던 찰나… 그놈의 ''''''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투어 첫날부터 급성 간염 진단을 받고 불참하는 바람에 투어 자체가 무산될 뻔했지만, 라우드니스의 베이시스트였던 야마시타 마사요시 덕분에 투어는 진행될 수 있었다.

3.7. 그 후


1998년 밴드 Cloud Nine을 결성하지만, 어쿠스틱 음악을 하고 싶다며 탈퇴하고 자기 여동생 사와다 마사요(후에 Sister MAYO라는 예명으로 활동)와 함께 밴드 오토 카제(音風)를 결성. 오토 카제에서는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를 겸임했다.
2005년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다리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록계 신인들과 함께 타이지 위드 헤븐스(TAIJI with Heaven's)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X JAPAN닛산 스타디움 공연 때 '''티켓이 너무 안 팔려서''' Yoshiki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는 공연에 게스트로 참전하면서 개런티를 무려 '''500만 엔'''이나 요구했다.[18] 그 공연의 결과는 '''닛산 스타디움 사상 최소 관객 동원'''. 결국 그는 공연을 준비하던 기획팀에게 수전노로 찍혀버렸고, 이 사실들이 알려지며 평가가 악화되었다.

3.8. 사망


2011년 7월 16일 나리타로부터 사이판으로 향하는 항공기 내에서 옆자리에 앉은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北見輝美)[19]와 말다툼을 하던 끝에, 창을 주먹으로 치거나 좌석을 차는 등 난동을 부렸다.[20] 그리고 곧바로 달려온 승무원을 폭행하고 매니저의 신고로 사이판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나를 붙잡았다가는 X JAPAN 팬들이 가만 있지 않을걸?'''

이 말[21]을 남긴 채 체포된 타이지는 즉시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침대 시트를 이용해 자살을 기도했으며, 결국 뇌사상태에 빠졌고, 가족의 동의를 받아 인공호흡기를 뗀 후 7월 17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불명예스러운 소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마저도 사실관계와 다른 것으로 보도자료가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22] 보도 내용과 다르게 자살 시도에 따른 상흔이 없고,[23]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가 타이지인 척 하며 유족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구치소 측에서 검시 결과를 은폐하는 등 부정이 드러나면서 사인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24] 부인 아카츠카 토모미를 비롯한 타이지 유족의 구명활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6년 12월 29일 일본 외무성 재사이판 영사사무소에서 진상규명에 착수한다는 보도가 발표되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X의 전성기 시절의 핵심 멤버 두명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은 셈이다.
아래는 타이지 사망 진실규명 사이트에 있는 타이지의 의문사에 대한 글이다.
X의 베이스 연주자로 데뷔해 많은 밴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TAIJI는 2011년 7월 17일 사이판에서 사망했다. 
그의 부고는 일본에서 보도돼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사망 원인 등 구체적인 사건 내용과 경위 등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뚜렷해졌다. 
TAIJI는 체포되어 감금되었다가 그곳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후 구치소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현지 언론은 TAIJI가 "자해행위를 제출해 ICU에 끌려갔다"고 처음 보도했다. 
그러나 이튿날 보고서는 TAIJI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발표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사이판 경찰과 FBI 모두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전혀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부검이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망 보고에서 명백해졌다. 
이 같은 내용은 사건 발생 나흘 만인 15일 TAIJI의 가족과 일본 국민에게 처음으로 전달됐다.
이 4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이후 기체 내 기압으로 시체가 비대해지고 분해돼 부검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TAIJI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으며, 사건 이후 그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현 상황에서는 이 문제조차 풀리지 않는다. 
사건 발생 후 이런 상황 전개 외에도 사이판에서 법적 절차가 제대로 진행됐는지,
왜 사건이 전혀 공표되지 않았는지, 시신이 제대로 치료됐는지 등 국제 현안이 여기에 얽혀 있다. 
TAIJI의 추도식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은 TAIJI의 평법 부인 아카츠카 씨는 사건 발생 후 줄곧 혼자 사이판으로 갔다. 
또 당시 사이판 내 여러 기관에서 개별 기록을 수집해 왔으며, 사실관계 규명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는 TAIJI가 구명 치료를 받고 있던 병원으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임상 기록을 잃었다고 말했다. 
2015년 7월 17일, TAIJI 서거 4주년을 맞이해,
아카츠카 토모미씨는 자신의 저서 "TAIJI - TAIJI SAWADA"(TAKARAJIMASHA,Inc)를 발표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슈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TAIJI의 품위를 지켜주는 것 뿐만 아니라
향후 국제 사회에서 유사한 사건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4. 총평


실력도 출중했고, 주변에 조력자도 많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으나, 언제나 그의 재기를 막았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음악적인 역량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이 모두가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ANTHEM시바타 나오토LOUDNESS야마시타 마사요시, ANIMETAL/CANTA의 마사키 등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본기와 테크닉을 가진 베이시스트이며 X의 하드록적인 면을 전적으로 떠받치던 편곡 능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였다. 당장 일본 헤비메탈의 대표 밴드인 LOUDNESS의 전성기 중 하나로 타이지가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시절이라 인정받는 것만 해도 어디서든 탐내고 빛났을 뮤지션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관리에 실패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 맡았던 팀마다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며, 자기 절제가 되지 않아 그의 인생은 나락과 파멸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쓰러지고 일어서고 다시 쓰러져도 일어서고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추락했던 그의 위상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하다못해 한명이라도 타이지가 잘못 걸어갈 때 옆에서 진심으로 설득해주며 무절제하게 폭주한 그의 성격을 바로잡아주는 이가 있었다면, 아니 그에게 유일하게 바른 소리 해주던 hide라도 살아 있어서 그의 옆에서 바로 잡아주었다면 하는[25] 아쉬움이 크게 남는 뮤지션이다.
특히 히데를 처음 만났던 '디멘시아' 시절부터 'X' 시절까지 타이지는 히데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꾼 적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팬들이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5. 그의 악기들


타이지는 원래 '''기타리스트'''였다. 따라서 기타를 먼저 나열한 후 베이스를 나열한다.

5.1. 타이지의 일렉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 KILLER사의 KG-YOKE : 드롭 D 튜닝용 기타로 과거 타이지의 사이트에서 흘러나오는 BGM은 이 기타로 작곡한 것이다. 가격은 고가의 킬러 기타다운 700,000엔이다. 현재는 단종.
  • KILLER사의 KILLER Proto type : 타이지가 오토카제에 있었을때 라이브에서 자주 등장한 기타.[26]
  • KILLER사의 Killer W-NECK VULTURE Wing : 이름에서 알 수있는데 더블넥 기타다. 베이스와 기타가 같이있으며 이 기타는 타이지 전용 모델이라 시판되지 않는다.「WEEK END」의 pv에서 히데가 더블 넥 기타로 연주 하는 씬이 있는데 사실 이 기타가 아니라 히데의 기타로 위에는 12현, 아래는 6현으로 이루어진 기타로 mockingbird 타입의 더블 넥 기타이다.[27] 이 기타가 진짜 연주가 된 적이 있는 건 D.T.R 시절에 「APOCALYPSE」를 연주해 타이지의 기타 실력을 보여주였다. 참고로 이 기타는 2가지 바레이션이 있는데 디자인을 제외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 Ovation사의 어쿠틱 기타 : 이 기타로 X에서 Voiceless screaming을 연주했다. 타이지가 생전 가장 아끼던 기타라고 한다. 그렇지만 Ovatiin사의 어떤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했는지 까지는 불명.

5.2. 타이지의 베이스


  • KILLER사의 KB-CRIMINAL PHOENIX : 타이지의 시그네쳐 이 말 한마디로 이 베이스의 설명은 끝난다.
...라고 할 수 있으나 좀 더 정확한 설명을 하자면 타이지가 기존에 사용했던 베이스와는 달리 기교적 테크닉보다는 안정적인 테크닉을 주로 사용했다. 물론 타이지의 연주는 안정적인 베이스나 기교적인 베이스나 일반인이 들으면 다 기교적으로 들리겠지만.
또한 검은 바탕에 자개로 새겨진 불사조가 있고 넥 뒤에 타이지의 사인이 있어서 간지가 철철 흐르는 베이스이다.
가격은 45만 엔으로 현재 시판 중이고 2만 엔을 추가하여 왼손잡이용으로 변경이 가능하다.
참고로 피닉스 모델뿐 만 아니라 여러 바리에이션이 있다. 군인(?) 디자인인 CAMOUFLAGE도 있다. 이 베이스는 타이지의 시그네쳐가 아니므로 당연히 타이지의 사인은 없다.
  • KILLER사의 Impulse JJ 15 & Impulse PJ 15 : 타이지의 기교적 베이스로 유명한 베이스.
위 프로필 사진에서 들고 있는 베이스가 이 베이스이다. Blue Blood 앨범 녹음 당시 타카사키 아키라에게 태핑을 배우고 Rose of pain에서 그 태핑을 써먹는 건 타이지의 손꼽히는 레전드이다. 검은색 모델에 빨간 장미가 그려져 있는 Impulse BlackRose이 Impulse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가격은 15만 엔 정도로 현재 시판 중.[28]
  • KILLER사의 KB-DESPERADO : X에서 탈퇴할 무렵과 Cloud 9시절에 사용했다. D.T.R 시절엔 녹음용으로 사용. 레스폴처럼 동글동글한 모양에 거칠고 찌그러지는 소리가 특징인 베이스.
  • KILLER사의 KB-VULTURE FRETLESS : 이 기타는 Dir en grey의 Toshiya가 사용한 베이스로 유명하다. 일단 타이지도 이 베이스를 소지하고는 있었지만 타이지는 이 베이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펜더사의 71년산 재즈베이스 : Jealousy 녹음 당시 미국에서 타이지가 직접 손에 넣었다고 한다. 가격은 시가 라고 한다.
  • 뮤직맨사의 스팅레이 : 이 베이스는 71년산 재즈베이스와 마찬가지로 Jealousy 녹음 당시 미국에서 손에 넣었으며 위에서 말한 DESPERADO나 CRIMINAL을 사용하기 전까지 X에서 라이브로 사용하였고 라우드 네스에서는 녹음용으로 사용하였다.
  • 페르난데스사의 WARLOCK : 타이지가 인디 시절 사용한 베이스이다. 디멘시아에 있었을 때 친구로부터 받았다는 베이스이다.
참고로 HEATH도 WARLOCK을 사용했는데 회사가 다르다. 타이지는 페르난데스사의 시판 모델을, HEATH는 버니사의 오리지널 모델을 사용했다.
[1] 그의 성인 사와다의 한자가 정자체인 澤인지 약자체인 沢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햇갈려서 둘다 표기했었으나 그의 묘비를 보면 澤로 정자체를 쓰는 것이 확인되었다. [image][1] 초기시절에는 자신의 혈액형을 B형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자료에는 타이지의 혈액형이 A형이 아닌 B형으로 표기되어있기도 하다.[2] 이미 1985년도에 X에 가입했다가 의견 충돌로 탈퇴하고 그 후 1986년에 재가입했다.[B] A B C D 사망했으나 명예 멤버로 간주된다.[3] Dear Friend(for HIDE) - TAIJI의 나레이션 중 일부[4] 베이스에서 핑거 피킹을 할 경우 주로 검지와 중지를 쓰지만, 그는 어릴 적에 오른손 중지 첫 마디를 사고로 잃었기 때문에 중지를 피킹에 사용할 수 없었다.[5] Dear loser, Phantom of guilt, XCLAMATION(히데와 공동 작곡), Desperate angel, Voiceless Screaming.[6] 애초에 Art of life는 Jealousy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고 Art of life 발매 전에 타이지는 탈퇴하지만, Art of life까지는 타이지의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7] 여동생이 마법전대 마지레인저의 엔딩곡을 부른 시스터 마요다. 시스터 마요의 본명이 사와다 마사요(沢田雅世/澤田雅世).[8]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상당히 딥 퍼플스러운 리프가 많다.[9] 치매라는 뜻.[10] 요시키가 타이지가 해준 밥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11] Yoshiki는 자서전과 영화에서 타이지가 자신과 함께한 맹세를 어긴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다만 맹세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12] 한 인터뷰에서 요시키의 카레 사건과 목욕물 사건을 언급하며 타이지에게 요시키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으나 타이지는 자신의 재적 때는 그런 경우의 일은 없었고,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답했다.#[13] 사족으로 여러 인터뷰에서 후임 멤버인 HEATH에 대해서도 '대인배적인 사람', '유쾌한 사람'이라며 우호적으로 언급한다. HEATH 역시도 타이지 사망 당시 'X JAPAN이 든지 다른 곳에서든지 다시 한 번같이 연주하자'라고 약속했었다며 회상하기도 했다.[14] 이 당시가 일본 메탈의 암흑기였던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적이다.[15] 타이지는 이 앨범을 '''"내 방랑 생활의 계기가 된 앨범"'''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16] 이 이후 활동에서 타이지의 모습을 보면, 살이 많이 붙기도 했지만, 턱 모양이 굉장히 부자연스러워 전성기 시절(X 및 라우드니스)과 비교해보면 외모의 차이가 많이 난다.[17] 타이지는 히데의 죽음을 겪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방황 생활을 끝낸 후 인세가 어느 정도 모여있단 걸 알게 되었고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전전할 수 있었다. 타이지 자서전 中 [18] 타이지가 돈을 요구하게 한 것이 타이지 본인의 선택이 아닌 다른 배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19] 타이지위드 헤븐스의 한국 공연 취소 후부터 그의 매니저를 맡았다.[20] 현지 경찰 및 매니저 주장[21] 그러나 사건 당시는 타이지가 X JAPAN을 탈퇴한지 약 20년이 지난 상태였고 타이지가 있을 당시에는 X JAPAN이 아닌 X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또, 타이지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JRR : 괜찮으시다면 X에 대해, 그리고 X JAPAN의 재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Taiji : 저에게 있어서는 기타인 히데와 파타죠. 저는 X JAPAN이 아니에요, 저는 X입니다.」 「JRR : X와 X JAPAN은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다릅니다. Taiji :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제 안에, 제 마음 속에 X는 살아 있어요. 그래서 제가 과거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최대한 현재를 만들고 싶으니까요.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 X JAPAN이 재결합한다면 그들이 정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이처럼 타이지는 자신을 X JAPAN이 아닌 X라고 칭하였다. [22] 당시의 승객이나 승무원의 증언도 너무 없다.[23] 대신 입가에 테이프 자국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4] 이 사건이 있고난 후 타이지 공식 홈페이지에 누군가가 타이지의 부모님인 척 하며 글을 쓰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25] 실제로 타이지는 잠깐이긴 했지만 히데의 죽음 이후로 정신 차리고 음악을 진지하게 하려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X에서 그가 갖가지 말썽에 휘말리고 멤버들과 불화가 있을 때도 유일하게 그를 따뜻하게 대해준 건 히데 뿐이었다.[26] 사실 이 기타는 라우드네스의 타카사키 아키라의 그 독특한 기타의 기본이 되는 기타이다. 특징은 플로이드 브릿지가 아닌 튠 오 매틱 브릿지 라는 것.[27] 쉽게 생각하면 지미 페이지의 그거와 비슷하다고 보면된다.[28] Black Rose는 2014년에 아쉽게도 단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