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sh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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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가수 겸 X JAPAN의 멤버이자 리더.
2. 생애
친가는 치바 현 타테야마 시에서 기모노점을 운영했고 꽤나 부유[1] 했다. 아버지는 요시키의 매년 생일마다 각종 악기를 선물하고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했으며, 종종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학교까지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시키의 아버지가 그가 10살의 나이일 때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업난에 절망해 자살했고 이 일은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어릴 때 소아 천식을 앓아서 초등학생 때는 1년에 4개월 정도는 병원에서 지낼 만큼 몸이 약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몸이 좀 좋아졌는데, 사춘기가 와서 머리를 염색하고 흡연을 하는 날라리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담당하고[2] 교내 피아노 연주도 담당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뽐내며 교내 문제아이자 음악 천재로 독특한 학교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락에 눈 뜨기 시작한 그는 15살 때 어머니를 졸라 드럼 세트를 선물 받았는데, 더욱 록 밴드에 심취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여전히 불량 학생이었지만 음대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토시[3] 와 함께 록 밴드 KISS의 공연을 보게 된다. 그 둘에게 이 공연은 굉장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반드시 밴드를 만들자"라고 했다고. 고교 졸업 후에 두 사람을 주축으로 X 결성. 활동 당시부터 거의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으며 독단적인 리더십으로 밴드를 운영하기에 이르는데 이 독단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다른 멤버들과의 불화도 자주 일었던 바,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전임 베이시스트였던 TAIJI와의 트러블이나[4] 보컬리스트 토시와의 트러블.[5]
근래에 요시키와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은 GACKT로 각트는 요시키를 의외로 재미있는 인물이라 말하였는데, 보통 사람들로서는 전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폭발하거나 하는 식의 희한한 사례들을 예로 들어가며 요시키를 두고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장난감 상자 같은 인물이라 평가했다.[6]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면 리허설 때 먹었던 카레가 매워서 테이블 뒤집어엎고 그대로 집에 가버렸다거나[7] 사진 촬영하러 간 사진사인 시노야마 키신의 스튜디오 샤워기 물이 뜨거워서 그대로 집에 가버렸다.해당 블로그 영상 참고
각트와 함께 결성한 밴드인 S.K.I.N.의 미국 공연 때 서로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던 이후 이를 계기로서 상호 간의 친분이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추측도 있었지만 이에 관해서는 2014년 1월 각트를 향한 “요시키는 잘 지내냐”는 한 팬의 질문에 각트가 “여전히 다투기는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답변, 요시키 역시 각트의 새 노래인 “P.s I LOVE you”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S.K.I.N의 재결성에 대해 언급을 하기도 함으로서 둘 사이의 친분에는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었다.[8]
1986년에 설립한 인디즈 레이블 Extasy Records[9] 는 LUNA SEA, Zi:Kill, LADIES ROOM, GLAY를 비롯한 많은 밴드들 및 아티스트들이 거쳐 간 바 있으며 이와 같은 사례들로 말미암아 한때는 비주얼계 밴드들의 메이저 데뷔 등용문으로서 여겨지기도 했다.
늘상 반복되는 작품의 발매 연기와 "긴급"을 붙인 공연 중단 등으로 관련 업계에서의 악평이 자자한 바[10]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순간에마저 그 화려한 전적이 거듭되어[11] 현재 일본 내 그 어떤 레코드 사와도 제대로 된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보이며, 이와 같은 사정들로 인해 재결성 이후의 신곡 "I.V"와 "JADE"조차도 CD 화하지 못하고 웹 다운로드로만 판매했다. 도쿄돔 라이브 DVD와 블루 레이들은 전부 인디즈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지만 2013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인 "YOSHIKI CLASSICAL"의 경우 워너 뮤직 레이블을 통해 일본 내에서도 발매가 되었는 바 이것은 해외 발매 본과 함께 계약이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4년의 베스트 앨범도 워너에서 발매했다.
원래 집안이 상당한 재력이 있었고[12] 직접 레코드 사를 설립하여 사업가로서 활동했던 경험도 있었던 탓인지 그간 쌓아 온 재력과 인맥이 절륜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본업인 음악 활동보다도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니는 경우가 더 잦은데, 일본 국내 외를 막론하고 온갖 기금 마련 행사나 시상식에 참여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몇몇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어[13][14] 고이즈미 전 총리가 개인적으로 호감을 표한 "Forever Love"가 자민당 CM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아이치 만국박람회 이미지송의 제작에 참여, 2012년에는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로고송을 제공하기도 했다.
2014년 10월 자신의 밴드 X JAPAN을 통해 2012년의 L'Arc~en~Ciel에 이어 아시아 아티스트 사상 두 번째로 뉴욕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단독 공연을 성사 공연의 뒷풀이 자리에서는 B'z의 마츠모토와 GLAY의 타쿠로의 모습도 보였다.
2015년, 방송을 통해 드디어 X JAPAN의 새 앨범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2015년 2월 본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15곡이 수록된 마스터 CD의 사진을 올렸다.[15]
2018년에는 hyde와 함께 홍백가합전에 참여했으며, 2019년에는 자신의 우상인 KISS와 함께 스페셜 스테이지로 합동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 이력
X의 메이저 데뷔 2번째 앨범 "Jealousy"가 밀리언을 달성하는 등 한참 인기 절정기를 달리던 1991년 12월 요시키 본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곡을 모은 "YOSHIKI SELECTION" 선곡집을 발매했다. 이례적인 인기를 끌어서 클래식 차트 상위에 올랐다. 이 앨범은 국내에도 2000년 정발되었다.
같은 해(1991년) TM NETWORK(TMN)의 코무로 테츠야와 함께 프로젝트 V2를 결성했다. 12월 5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사망 200주기를 기념한 라이브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이듬해 1월 발매된 V2의 유일한 싱글은 40만 장을 상회하는 판매량을 보이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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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월 당시 솔로활동 소속사였던 TOSHIBA-EMI에서 기획하여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편곡과 프로듀싱을 거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X JAPAN의 기존 곡을 클래시컬하게 편곡한 "YOSHIKI Presents~Eternal Melody"을 발매하였다. 20만 장 정도로 역시 클래식 계에선 이례적인 판매고를 기록. 신곡으로는 "Amethyst"가 새로이 작곡되어 클래식 곡으로 수록되었다.
1993년 11월 3일, TBS 방송사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인 NOA라는 유닛의 "今を抱きしめて"가 발매, 요시키 작사[17] , 작곡, 편곡 및 프로듀스 담당으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대단한 인기와 주목을 받았던 싱글이며[18] Eternal Melody에 수록된 "Amethyst"를 담은 싱글이 같은 해에 발매되었다.[19]
1994년 영국 밴드 퀸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협업, 공동 프로듀서로 싱글 "Foreign Sand"를 발매했다. 1번 트랙 "Foreign Sand"의 작곡과 편곡을 담당, 2번 트랙 "Final Destination"은 로저 테일러가 작곡했고 요시키는 로저 테일러와 공동 편곡을 담당했다. 역시 TOSHIBA-EMI의 기획.
같은 해(1994년) GLAY 데뷔 싱글인 "RAIN"의 작사 및 공동 작곡, 편곡 및 프로듀스를 담당했는데, 현악과 피아노 등 자신만의 색채를 너무 입혀서 훗날 GLAY는 라이브 구현도 어려운 편곡이며 자신들의 분위기도 아니라면서 새롭게 편곡해서 앨범에 수록한 전례가 있다.
1996년 11월, 본인이 작곡하여 당시 라이브 투어 오프닝 곡으로 쓰이던 "Amethyst"를 재 수록한[20] 두번째 클래식 선곡집 "Yoshiki Selection 2" 발매. 이 선곡집은 전작 만큼의 반향은 없었다.
1997년 12월 31일, 같은 해 4월 보컬 토시의 탈퇴 요구[21] 로 촉발된 팀의 와해로 인해 은퇴 발표 후 도쿄돔에서 거행된 THE LAST LIVE를 마지막으로 X JAPAN은 일단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1998년 기타노 쇼코의 Begin(6월)과 薔薇と緑(10월) 두 장의 싱글을 발매하면서 이 곡들의 프로듀싱과 작사 작곡 편곡을 도맡았다. 그녀는 저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딸로 이 곡의 PV 감독은 부친인 거장 기타노 다케시가 맡았다. 하지만 요시키와 기타노 다케시 이 두사람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활동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같은 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던 X JAPAN의 동료 멤버 hide가 비슷한 시기에 남겼던 솔로 및 공동작업들이 얼터너티브 록, 일렉트로니카, 인더스트리얼, 하드록, 팝과 재즈까지 고루 결합한 결과물로 음악가로서의 본인의 이상의 실현과 상업적 성공까지 고루 거두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가 되는 부분.
1999년 5월 1일, 그 전해에 사망한[22] X JAPAN의 동료 hide의 헌정앨범 "hide Tribute"에 도입곡 격인 "Introduction" 및 엔딩곡인 "Goodbye"를 본인이 담당.
"Intriduction"은 hide의 솔로 1집에 수록된 "Eyes Love You"를 피아노 솔로로 편곡, "Goodbye"는 hide의 솔로 2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던 동명의 곡을 피아노 및 현악을 활용한 소편성 클래식으로 재편곡하여 수록하였다.
같은 해 11월 12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주선으로 헤이세이 덴노의 즉위 10주년 기념일 날 피아노 협주곡 Anniversary라는 곡을 헌정하고 피아노 연주를 맡기도 했다.
2000년에 설립한 Extasy Japan에서 신인 및 데뷔시킨 밴드들을 야심차게 프로듀스 해보기도 했지만 히트작을 내지는 못했다[23] 그리고 회사는 도산, 사실 Dir en grey 정도를 제외하면 프로듀스 성공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록밴드인[24] TraxX의 일본 데뷔 프로듀스를 맡았고 자신이 작곡 및 편곡까지 담당한 "Scorpio"와 X JAPAN 시절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TEARS"까지 제공했다. 기획사[25] 에서 한일 양국에서 100% ROCK이라는 문구와 엑스재팬 해체 이후 전혀 보지 못했던 드럼위에 앉은 요시키의 사진을 게재하며 거하게 홍보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26]
동시에 솔로 프로젝트로 Violet U.K.를 10년 넘게 기획해오고 있다고 밝히며 콜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 2000년에 세븐일레븐 광고로 선보인 곡들이나 2002년에 나온 Last Live의 DVD에 프로모션 영상이 수록되었다. 그동안 요시키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했다던 음악인 Violet U.K.의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2002년 갑작스럽게 코무로 테츠야의 그룹인 globe에 객원 멤버로 참가하기도 했다. globe의 경우는 싱글 "Seize the Light" 발매. 그외 다카라즈카 극단에 제공한 곡을 보컬 케이코가 부른 데모 음원 하나만 떠돌고 있을 뿐, 사실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도쿄 시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Yoshiki Symphonic Concert featuring VIOLET UK란 콘서트를 거행, 훗날 이 공연은 2005년 DVD로 정발되었다.
2003년, 2005년 아이치 만국 박람회의 주제곡을 맡아서 하와이 출신의 일본인 혼혈인 여성 보컬 DAHLIA 의 곡 "I'll be your love" 2년 먼저 싱글화, 도입부에 바로 나오는 주선율의 멜로디는 좋으나 단조로운 구성으로 인해 정작 감상 후에 기억에 남을만한 주제 선율이 없었고 요시키의 편곡 성향에 있어 가장 불만으로 많이 제기되는 후렴부의 의미없는 반복과 불필요한 현악남용도 여전했다. 그리고 보컬 역시 신인급 아티스트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불안한 가창과 일본어 발음의 미숙함 등에서 문제가 있었다
2005년 3월 Eternal Melody 2를 발매하였다. 2000년에 도입부 데모만 살짝 공개했던 히데의 추모곡 "Without You"의 클래시컬 버전이 수록되었다. 99년 공개된 천황 즉위 10주년 봉축곡 "Anniversary"도 최초 음원화, 그외에 원래 음원조차 공개되지 않은 Violet U.K의 클래시컬 곡이 수록되었던 것까지는 좋으나, 그 옛날 93년 Amethyst 싱글의 커플링 곡 "今を抱きしめて"부터 96년 X JAPAN 싱글로 발매된 "Longing~절망의 밤"에 2002년 심포닉 콘서트 실황 음원까지 그간 발매했던 음원들이 트랙리스트의 대부분을 빼곡히 채우고 있으니 그저 별 노력없이 수입만 챙기려는 재활용반이라 보는 견해가 다수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요시키 본인의 기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니… 어쨌든 국내에도 정발이 되었으나 X-JAPAN의 인기와 요시키 본인의 인기와 주목도가 하강세에 접어든지가 오래되었던 시기였던 만큼 판매량은 낮았다.
2005년 9월 22일에 Violet U.K 데뷔 앨범 발매를 다시 고지했으나 보란듯이 연기. 계속되는 발매 연기로 소속사가 소송. X JAPAN의 정규 마지막 앨범 DAHLIA가 포함된 Atlantic 산하에서 발매된 음원의 본인 소유 저작권을 넘기는 걸로 일단 합의를 한 후 계약을 해지했다.
2012년 9월 Violet U.K. will finally debut in 2013!이라는 티저를 띄웠으나 물론 역시나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2013년 9월 요시키의 솔로 앨범 YOSHIKI CLASSICAL이 발매 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Violet U.K 활동과는 상관없다는 사실. 신곡은 제일 첫 트랙 "MIRACLE"이 전부이며 그외 최근에 온라인 음원으로 발매된 "Golden Globe Theme"(2012)이 '최초로 CD화 되었다' 정도로 의미부여할 수 있으며, 같은 곡이 Quartet(4중주) 버전으로 재편곡된 버전도 수록되어있다. 나머지는 과거에 발매한 Eternal Melody 1, 2의 수록곡이 대부분이다.
일본판과 해외판이 다른 것도 특징. 일본 내 발매본에는 2002년에 치뤄진 본인 클래식 콘서트에서 연주된 "The Last Song" 클래식 버전이 실황 녹음으로 실려있고 해외 발매본에는 그 대신에 무려 1993년에 Eternal Melody 1에서 수록된 "Say Anything"의 클래식 버전이 수록, 그외 곡 순서가 상이하고 재킷 사진 차이 정도가 다르다. 일단 일본 및 세계 동시 발매이며 일본판은 오리콘 앨범 차트 주간 4위로 데뷔, 차트에 8주간 머물렀으며 iTunes 클래식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4. 음악적 성향과 역량
감성적이면서 유려한 멜로디를 잘 잡아내나 록-메탈계 리스너들의 경우 음악성에 대해 상당 부분 지적을 한다.[27] 90년대 일본 음악시장이 분명 거대했지만 90년대 초 일본 시장내에서 자국 내 메탈 밴드가 밀리언을 달성하고 1년 내에 40만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을 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주간 오리콘 차트 1위에 싱글과 앨범을 자주 올린 것 또한 사실로 작곡가로서 멜로디 메이킹 능력이 이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28]
주로 발라드에서 그 멜로디의 장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밴드 X를 인디계의 유망주에서 일약 메이저 밴드로 확실히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게 된 발라드 Endless Rain[29] 1992년 NHK 홍백가합전 주제곡이자 이후 X JAPAN의 곡으로 발매되어 요시키 개인 및 X JAPAN 역사상 최다 싱글 판매작인 Tears(1993년 발매, 83만장 판매) 같은 곡에서 멜로디 감각은 최근작(?)인 "Without You"(2005, 클래식 버전으로 발매, 히데 추모곡으로 작곡됨), "Scarlet Love Song"(2011, 극장용 애니메이션 "Buddah"의 O.S.T), 정말 극히 최근작인 "Golden Globe Theme"(2012)에서도 여전하다. 2000년의 어느 일본 예능프로그램에서 그 유명한 마츠다 세이코가 리포터로 LA의 요시키 자택을 방문했을 때 즉석에서 피아노로 만든 곡이 해당 프로그램의 로고송까지 되었다고.
X 시절 베이시스트였던 TAIJI의 편곡 비중이 컸던 WEEK END, 紅, SILENT JEALOUSY 들과는 사뭇 다른 후기 X JAPAN 시절의 곡은 경시하는 식으로 록이나 메탈 계열의 곡을 편곡하는 성향에 있어 특정 리스너층이 불만을 보이는 예가 많은 편이다.
인디즈 데뷔 앨범인 "Vanishing Vision"부터 바로 그 타이지의 해고 전에 발매된 마지막 음반인 "Jealousy" 까지의 앨범과, 원래 "Jealousy" 수록곡으로 기획되어 타이지가 편곡과 녹음에 참여했었던 미니앨범 "Art of Life", 그리고 타이지 탈퇴 후 기타 리프 제작의 상당수를 도맡던 히데마저 사망한 뒤에는 기타 파트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맴버 교체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음악적 스타일이 상반되었던 문제[30] 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니 요시키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을 수 있다. 현재는 곡 사이사이에 클래식을 삽입하고 있다. 단, 기타 세션은 스기조가 맡고있다.
엑스 해체 이후 요시키가 프로듀싱한 곡들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는 특징 중 하나로, 본인이 좋아하는 피아노와 관현악이 주 멜로디를 연주하는 식으로 곡을 구성하고 있고 기타와 베이스음은 뒷배경으로 밀려나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이도 맴버 교체에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할 수 밖에.
X 시절 타이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툭하면 치고 싸웠지만, 능력 면에서는 최상의 궁합이었다는 평. 실제로 요시키 작곡-타이지 편곡 콤비는 X 초창기 시절 많은 명곡들을 만들어냈다.
작사의 원천은 자살. 어릴 적 아버지가 자살한 모습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 자살과 죽음에 대한 가사가 굉장히 많다. 엑스재팬의 대표곡인 "Blue Blood", "TEARS"[31] , "Week End"과 "Silent Jealousy"만 하더라도 자살이 소재로 쓰였을 정도. 특히 TEARS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한 곡이다. Say Anything의 경우 유년기에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던 자신의 모습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Tears는 성장한 자신이 어느 날, 이국(L.A.)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이다.
90년대 한참 X JAPAN의 인기가 국내에 드높던 시절 한국에만 들리던 소문으로 전세계적으로 3위의 드러머 안에 든다는, 참으로 근거없는 헛소리가 유행했다. 우선 드럼 "실력"에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실력이라는 것이 성적처럼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연주하는 장르도 다르며, 같은 장르라고 해도 연주자에 따라 각자 연주하는 스타일이 있는 법인데 순위를 매긴다는 자체가 넌센스. 실력이 아닌 '''인기''' 투표는 실제 있긴 하지만 어떠한 드러머 관련 인기 투표에서도 요시키가 3위권 안에 들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요시키 본인은 '''속주'''와 '''파워'''로 승부한다고. [32] 물론 80년대의 시대를 반영해보았을 때, 요시키의 드러밍 자체는 '그가 과연 당대 최고의 드러머인가?'라는 질문에는 확답을 할 수 없지만 '프로드러머로써 손색이 없는 실력인가?'라는 질문에는 확실히 프로드러머로써 실력을 갖춘 드러머라고 말할 수 있음은 확실하다.
'드럼 실력에 있어서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관해서는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레코딩에서는 종종 세션을 기용하기도 했으며 작곡이나 프로듀싱 등 이것 저것을 다 하기 때문에 프로 드러머로서의 자각은 다소 부족한 것일지도...' 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우선 종종 세션을 기용하기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자면, 적어도 X, X-JAPAN 작품 내에서는 퍼커션을 제외한 모든 드럼을 그가 쳤다. 단, 논란이 되는 것은 DAHLIA 앨범에서 쓰인 컴퓨터로 찍은 '전자 드럼'인데(SCARS와 DRAIN), SCARS의 경우 HIDE의 요청에 의해서 전자 드럼을 찍었다.[33] 오히려 요시키는 어쿠스틱 드럼으로 녹음을 고수했고, 전자 드럼으로 하자는 HIDE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결과적으로 어쿠스틱 드럼과 전자 드럼이 혼재되어 녹음) 이는 '드러머로서의 자각'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인더스트리얼 장르에 부합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34]
80년대 후반 인디즈 시절부터 90년대 초 젤러시 투어 시절까지는 더블 베이스 연타와 같은 스피디한 연주도 즐겼으나[35] 1995년 달리아 투어 시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플레이를 다소 자제하는 경향을 보임과 동시에 그 속도의 저하도 현저해졌다. 드럼을 칠 때의 특유의 자세와 그 세팅에서 비롯한 데미지 때문에 경추부의 디스크에 시달리고 있는 바, 1996년 3월 달리아 투어 나고야 공연에서 쓰러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대에 오를 때는 쭉 목에 깁스를 채운 상태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Eternal Melody』(1993)
1993년 4월 21일 발매. X JAPAN의 곡들을 클래식 버전으로 리메이크하였다.
『ETERNAL MELODY II』(2005)
2005년 3월 23일 발매.
『YOSHIKI CLASSICAL』(2013)
2013년 8월 27일 발매.
5.2. 컴필레이션 앨범
『Yoshiki Selection』(1991)
1991년 12월 12일 발매.
『Yoshiki Selection II』(1996)
1996년 11월 4일 발매.
5.3. 미니 앨범
『Yoshiki Melodies Classics -Japanese Edition-』(2013)
2013년 9월 25일 발매.
5.4. 싱글
「Amethyst」(1993)
「Foreign Sand」(1994)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의 합작.
「BLUE SKY HEAVEN」(2009)
「ゴールデングローブのテーマ」(2013)
「Red Swan」(2018)
L'Arc~en~Ciel의 hyde가 피처링.
5.5. 피처링 싱글
「クリスタルピアノのキミ」(2011)
X JAPAN의 보컬 Toshl의 싱글에 피처링.
「春の願い」(2011)
X JAPAN의 보컬 Toshl의 싱글에 피처링.
「Miracle」(2018)
사라 브라이트만의 싱글에 피처링.
「ZIPANG」(2019)
hyde의 싱글에 피처링.
6. 여담
- X 활동 초기에는 멤버들과는 달리 신비주의 컨셉의 일환으로 X의 상징이자 X 그 자체라는 식으로 프로필란의 생년월일이나 혈액형 등을 전부 X로 표기했었으며 본명 역시도 밝히지 않았었다. 재일 교포 아닐까라는 의심아닌 의심을 사기도 했다.[36] 국적이 북한이라는 낭설이 퍼지기도 했으나 2009년에 자서전을 내면서 자신의 출생 및 성장과정부터 X에 대한 각종 사연과 비화들을 모두 공개했다.
- 쿠도 시즈카와 연인 관계였다. 1994년 3월 10일, 쿠도 시즈카는 공백기를 틈타 미국 헐리우드에 있는 요시키의 저택에 놀러갔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상당한 양의 알코올을 섭취하고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만취 상태로 요시키가 운전하는 페라리에 동승했다. 로스 앤젤레스의 선셋대로를 주행 중에 요시키는 음주운전 과 속도위반으로 현행범 체포되었고, 이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교제도 덩달아 알려졌다. 나중에 요시키가 자서전에서 쿠도 시즈카의 첫 인상을 두고 티비나 사진에서보다 늙어 보였다(...)고 한 통에 안 좋게 헤어진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냥 서로서로 좋게 쿨하게 헤어졌으며 쿠도 시즈카가 결혼 한 후에도 2002년까지 요시키의 레이블인 엑스타시 레코드에 소속돼 있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2002년 서울 소년원에서 재능기부 차 위문공연을 가진 사진이 요시키의 굴욕이라는 짤방으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37] 필름기그의 개최로 방한하게 된 김에 친분이 있던 박삼중 스님의 제의로 일종의 재능기부 형식으로 국내 가수와 합동 공연을 펼친 것이라고 한다.
- 2011년 엑스재팬으로 내한했을 당시 팬서비스로 여자 한복을 입으며 팬들에게 충공깽을 안겨주기도 했다.#
- 한국에서 90년대~00년대 초반까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됐던 것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00년대 중후반~10년대 초반까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서 엄청나게 폄훼되고 각종 비방과 음해에 시달린 인물이기도 하다. 요시키의 음악적 역량이나 퍼스낼리티에 있어선 여러 논란이 많지만 적어도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친한파인 건 분명한고, 전성기 때 뛰어난 멜로디 메이킹 실력으로 한국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음악적 영감[38] 을 불어넣어 한국 대중 음악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일조[39] 하는 등 지금까지 한국에 꾸준히 득을 줬으면 줬지 절대 해를 끼친 적 없는 요시키 입장에선 억울하고 어이없는 노릇일 듯...
- 가령 <요시키의 만행>이라는 짤이 한동안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닌 적#이 있는데 이 짤에 담겨 있는 콘텐츠는 일부 사실[40] 이 있긴 하지만 주로 일본의 타블로이드 연에계 잡지나 니찬넬 같은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등지에서 요시키와 엑스재팬을 싫어하는 일본 전통파 록 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날조와 왜곡과 과장이 극대화된 에피소드들과 가십들로 점철돼 있다. 이 내용의 출처는 지금은 사멸화된 '다음 카페 <일본록디비보기>'#인데 그 카페 운영자는 다년 간의 인디뮤지션 경력이 있는 재일교포 3세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엑스재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본 굴지의 록 뮤지션들(자신이 선호하거나 존경하는)은 인지도도 거의 없고 과소평가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일본 현지에서 생각하는 엑스재팬의 실체에 대해서 한국인들에게 아마 거의 처음으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했다.
- 예를 들자면 한동안 한국에서 일본 최고의 밴드로 알려졌던 엑스재팬이 대중적인 인기도나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에선 비즈나 미스치루 등 일본의 진짜 국민 밴드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다든지, 자발적인 탈퇴로 알려졌던 타이지가 사실은 요시키에게 해고된 사실이라든지, 엑스재팬이 해체된 결정적 계기가 보컬 토시의 사이비 종교 때문이라든지 하는, 지금이야 다 알려졌지만 2000년대 초중반 쯤에선 한국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객관적인 정보를 토대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엑스재팬의 위상을 한국 네티즌들에게 알려줬다. 또한 라우드니스나 Anthem, VOW WOW 등 일본의 레전드 메탈 밴드들을 비롯해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주류 밴드들은 물론이고 인디에서 활동하는 비주류 밴드들까지 망라해 일본의 록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파하여 비주얼 계를 제외하면 일본 록 팬들이 별로 없던 한국에서 일본 록 팬덤이 형성되는 데 분명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당장 이 곳 나무위키에 등재된 일본 록 가수들에 대한 콘텐츠만 보더라도 <일본 록 디비보기> 운영자가 풀었던 썰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러나 이에 반발한 한국의 엑스재팬&비주얼 록 팬들과 계속 대립각을 세운 것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오랜 인디 뮤지션 경력을 갖춘 일본인'이란, 일반 한국 네티즌으로선 일본 록을 논하는데에 있어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 입지를 악용해 갈수록 확인될 수 없는 낭설이나 괴설, 날조된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유포하는 경향을 보였다.
- 위에서 언급된 <요시키의 만행>이라는 짤만 보더라도 요시키가 본 조비한테 폭행당했다는 게 설사 사실인지언정 그건 정통한 일본 연예계 관계자도 알기 힘든데 제3자가 그 내막을 다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게 록 세계의 비화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된 내용이라면 본조비라는 세계적인 록스타가 일본의 유력 록스타를 폭행했다는 식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만큼 난리가 날만한 해외토픽 급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론 전혀 확인 불가능한 에피소드다. 우리로 치자면 어느날 갑지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터넷 상에서 퍼진 '마르코와 배정남 난투극' 수준의 공신력 제로의 헛소문을 마치 사실인 것마냥 국내 네티즌들에게 소개하는 격이다. 또한 요시키가 호테이와 트러블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맞았다는 얘기 역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정말이지 한국으로 치자면 디시발 썰에 불과한 내용을 일부 사실과 뒤섞어서 한국의 엑스재팬과 비주얼 록 팬들을 조롱하는데 악용한 측면이 있었다.[41]
- 다만 저런 루머와 낭설과 괴담들이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일본 현지 록 팬들 사이에서 횡행했을 만큼 한때 요시키와 엑스재팬에 대한 이미지가 최악이었던 것은 분명 사실[42] 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요시키 본인의 불성실한 활동력과 경솔한 언행에 따른 것으로 전적으로 본인이 자초한 것이기에 요시키 본인이 상당 부분 감수해야 될 오명이다. 한국의 연예계에 비유하자면 원래 안티가 별로 없던 원빈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작품 활동이 전무한 채로 계속 공백기가 길어지다보니 근래 들어선 안티가 꽤 형성되고 일부 헛소문까지 퍼지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물며 맨날 복귀한다는 둥 공연할거라는 둥 신곡&신작 음반 발매할 거라는 둥 계속 뻥카만 날리면서 팬들을 기만하고 아무런 활동도 안 하고 극히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한 요시키인데, 일본 내에서 여론이 악화되지 않는다면 외려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 계속해서 퇴보하는 음악성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일반 대중의 취향이 록 매니아들 수준으로 까다로운 건 아니다. 실제로 음반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좌우하는 건 음악적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매스 미디어 출연 같은 해당 뮤지션의 적극적인 대외 활동 같은 게 더 핵심적으로 작용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메탈 밴드로서의 면모를 상실한 X JAPAN 말기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록 평론가나 메탈 팬덤 사이에서 평가는 안 좋았을지 몰라도 대중적 지지도에 있어선 결코 하락세라고 보기 힘들었다. 당시 싱글 앨범으로 발매된 곡들만 보더라도 외려 음악적 퀄리티에 있어선 절정에 달했던 시기보다 더 많이 팔리면 팔렸지 결코 적게 팔리지 않았다. 메이저 3집
가 전작에 비해 상업적으로 실패한 건 사실상 컴필레이션 앨범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탈 밴드의 음반으로선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다고 볼 수 없는 60여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때 당시 요시키의 건강 악화와 멤버들의 솔로 활동 등으로 엑스 재팬의 대외 활동이 뜸한 와중에도 그런 대중적인 인기도를 구가했는데, 아마 그 때 당시 음악적 퀄리티를 떠나서 엑스 재팬의 모습으로 음악 활동을 더 성실히 했다면 더 많인 대중적 지지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엑스 재팬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요시키를 비롯한 멤버들이 대외적으로 비교적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복귀 후 별다른 음악적 성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요시키와 엑스 재팬에 대한 비판 여론은 상당 부분 불식됐다.
- 아이돌 마스터 샤이니 컬러즈 1주년 CM에 출연하였다. 섹시한 목소리로 게임명을 읇는게 일품.
- 2019년 고성-속초 산불로 피해를 입은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억 원을 기부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미국 비영리 공익 법인을 통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는 배우 이병헌과 친분이 있는데 이병헌, 이민정 부부가 산불 피해 지역에 1억 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 2019년 8월 쿄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를 겪은 쿄애니에 1000만 엔을 기부했다. 기부를 잘 하지 않는 일본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기부천사로 칭송받는 중.
- 2019년도 홍백가합전 꿈을 노래하자(夢を歌おう)에서 KISS(밴드)와 함께 "Rock and Roll All Nite"를 협연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특기인 특별히 만든 피아노를 치고, 나중에 에릭 싱어랑 드럼으로 협연하였다.
-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한국에서 귀신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 지금은 폐지된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서 2005년도에 방영된 내용으로, 한 주부가 저주받은 티셔츠를 샀다고 제보했다. 대량으로 사온 구제 옷 중에 처녀귀신 형상이 그려진 티셔츠가 있던 것. 제보자는 그 티셔츠를 보자마자 놀라서 기절할 뻔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악몽과 공포감에 시달리다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티셔츠를 동네 뒷산에 묻었는데, 불 태울까 고민도 했지만 티셔츠의 저주가 두려워서 그대로 묻었다고. 하지만 티셔츠를 버린 뒤에도 증상이 가시질 않아서 제작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제작진이 뒷산에 가서 문제의 티셔츠를 확인해보니, 그 형상은 여자도 귀신도 아닌 요시키였다.(...) 티셔츠의 전말을 알게 된 주부는 그 뒤로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당시 팬들의 반응
[1] 집안이 부유했다는 얘기는 절반만 옳다. 한국에서는 요시키 집안의 재력이 다소 과장되는 경향이 있는데, 요시키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시키 음악의 영원한 라이트모티브가 된 아버지의 자살은 '''사업 난'''에 따른 것이었고 남편의 자살로 어쩔 수 없이 어려워진 사업을 떠맡게 된 요시키의 어머니는 어린 요시키를 키우며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어머니는 재테크로 돈을 벌음) 요시키 역시 엑스가 히트 치기 전까지 인디에서 상당히 빈궁한 생활을 한 걸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디 시절 말엽부터 요시키 어머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인디 레이블 기준으로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펼쳐 <Vanishing Vision>이 큰 히트를 친 걸 보면 아마 시기에 따라 사업의 성쇠에 부침이 컸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TAIJI가 엑스에서 해고된 계기가 요시키가 혼자서 타 멤버에 비해 인세를 2배 독식했던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한때 요시키가 천하의 나쁜 놈 취급받기도 했는데 실상은 이런 속 사정이 있었기에 타이지 혼자서 마냥 정당하다고만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요시키 집안이 무슨 대단한 부자라서 밴드 활동 자금을 여유 있게 댔던 것도 아닌데, 다른 멤버들이 바보라서 요시키 혼자 인세를 2배 독식했던 것을 그냥 넘어갔던 게 아니었다. 물론 타이지가 문제 제기 한 시점이 메이저 진출 후 엑스가 큰 히트를 치면서 큰 수익을 올리던 시점이었으니 인세 지분 비율을 어느 정도 재조정해야 했던 건 타당했다.[2] 이 밴드부가 치바 현 대회에 나가 우승도 했다고 한다.[3] 폭주족 양아치였던 요시키와 달리 Toshl는 매우 평범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둘의 노는 세계가 전혀 달랐지만 X 결성까지 할 만큼 절친으로 잘 지냈다.[4] 타이지 생전의 자서전 '전설의 밴드 X의 생과 사'에 수록된 인세와 관련 문제에서 비롯된 스튜디오 뮤지션(세션)으로서의 별도 계약, 그리고 해고나 다름없었던 일방적인 탈퇴 요구 등.[5] 요시키 본인도 스스로 인정한 바 있는 토시를 노래 부르는 기계나 다름없이 취급했던 점 등. 그 때문에 나이 들면서 토시의 목소리가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그 노래 때문에...[6] LA에서 자신의 스텝진들과 식사를 하던 각트를 찾아 온 요시키에게 각트의 스텝진들이 식사를 권하자 3번을 거절하더니 4번째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먹으라면 먹을게!"라고 대답(…). 근데 너무 잘 먹어서 한 번 더 먹기를 권하자 갑자기 또 버럭 화를 내면서 "알았어! 그렇게 먹으라고 하니깐 먹을 거야!"라고 대답(…). 각트로서는 이런 요시키가 재미는 있을지언정 이해는 할 수 없었다고.[7] 나중에 hide에게서 무슨 일인지 연락이 왔는데 요시키가 '카레가 너무 맵잖아'라고 하니 히데는 '할 수 없지'라고 바로 수긍했다고 한다.[8] 다만 각트가 주변 인물들과 불화가 있더라도 이를 잘 해결하는 편이고, 직접적으로 누군가와 다툰다는 식의 언급 등은 잘 하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서 일부에서는 여전히 “둘이 꽤나 심하게 싸우는 거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9] 현재는 활동 중단.[10] 흔히 지적되곤 하는 온갖 베스트의 남발을 비롯한 과도한 상업화 러쉬보다(사실 베스트 앨범을 몇 개를 돌려 팔던 자기 이름을 걸어 콘돔을 팔던 뭘 팔든 간에 이건 그냥 안 사면 그만 문제는 없다. 다만 좀 없어 보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11] 신작 연기, 마스터 테이프 분실 사건, 레코드 사와의 불화 등.[12] 인디 시절부터 엑스터시 레코드 설립, 메이저 정규 앨범 발매 전까지 상당한 부분의 금액을 요시키 모친의 지원으로부터 충당하였다고 한다.[13] 이전 문서에서는 "요시키가 고이즈미 준이치로로 대표되는 극우 자민당 세력과도 친분이 있다" "그런 쪽의 인맥도 가지고 있다"라고 서술돼 있었는데 이는 어폐가 있다. 일단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인물 자체가 역사관이나 한국에 대한 인식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연령대 일본인 정치가를 기준으로 보면 "극우"라고 표현하긴 어려운,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캐릭터이다. 당장 2020년 현재 아베 신조의 치세 동안 일본이 한국에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이즈미는 그나마 양반이었다는 것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요시키가 자민당 정계에 인맥이 있다는 말 역시 무리인 게 자민당 CM송으로 X JAPAN의 곡이 쓰인 건 고이즈미 개인 차원의 선호에 따른 것이지, 당 차원의 어떤 교류나 교감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이즈미가 퇴임한 후 요시키는 자민당과 어떠한 교류도 없다.[14] 오히려 일본 현지에서 요시키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빚어진 건, 요시키가 우익(?) 성향의 고이즈미 전 총리와 교류를 활발히 했을 때가 아니라(일본에서 연예계 인사들의 정치 참여는 한국에 비해 훨씬 더 개방돼 있고 활발하다.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연예인이 정관계 인사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보 성향이 의외로 강한 일본의 지식인들, 시민 사회도 이렇게 요시키가 고이즈미와 친분을 다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고 그러진 않았다.), 요시키의 열렬한 팬인 고이즈미 당시 수상의 주선으로 1999년 11월 평화주의자라는 아키히토 일왕 즉위 10주년 기념행사 때 자신의 곡 <Anniversary>를 헌 정곡으로 연주했을 때였다. 곡 자체는 상당한 명곡으로 평가(특히 요시키 이후 행사에 참여했던 대중 뮤지션들에 대한 평가가 안 좋기에, 특히 2019년 11월에 있었던 30주년 기념식에 참여한 아라시에 대해선 평가가 매우 안 좋기에, 2019년 11월 말 기준으로 일본 현지에선 요시키가 주도한 10주년 기념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요시키의 명성이 올라가는 실정이다.#)받았지만, 일본에서 일왕은 공적인 영역에선 성역화를 넘어서 아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 인물인데, 왕실 행사에 대중 뮤지션이 참여하는 건 그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한 파격적인 일이었기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을 초월한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됐다. 당시 도쿄대의 진보 성향의 교수들(이 중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담긴 여성 혐오, 과거사 부정을 비판한 <무라카미 하루키론: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라는 명저로 국내에도 어느 정도인지도가 있는 고모리 요이치 교수#도 포함돼 있다.)이 '대중 뮤지션은 정치에 이용돼선 안 된다'는 요지로 요시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낼 정도(요시키는 수취를 거부했다고 한다)였다.# 다만 이러한 금기를 요시키가 깬 후 2009년 일왕 즉위 20년 기념엔 EXILE의 아츠시가, 2019년 30주년 기념엔 아라시가 참여했는데, 모두 요시키보다 음악적으로 평가가 떨어진다.[15] 사진으로 봐서는 The Last Song, Jade, Beneath The Skin, Hero의 순서로 보인다. 나머지 트랙에는 Scarlet Love Song, Born To Be Free, I.V 등의 선공개된 곡들이 묶일 듯...이었지만 2015년 공개한다던 새 앨범이 2016년 3월로 다시 밀린 것으로 봤을 때 트랙리스트에 변동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16] 드럼 일부 연주는 Silent Jealousy 와 똑같다. 마침 Jealousy 앨범 활동기여서 그랬나...[17] 白鳥 瞳(시라토미 히토미)는 요시키의 가명이다.[18] 2013년에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19] 今を抱きしめて의 클래시컬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싱글에만 수록되어 있어서 나름 희귀성을 인정받던 이 트랙은 2005년에 발매된 ETERNAL MELODY 2에서 또 재 수록된다.[20] 해당 음원은 "Eternal Melody"와 요시키 솔로 싱글에 수록된 그 음원 그대로다.[21] 훗날 부인으로부터 전도받은 "홈 오브 하트" 라는 사이비 종교로 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그녀 또한 원래부터 사이비 종교 교주의 내연녀였으며 X 시절의 명성과 부를 노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22] 불의의 사고라는 설이 우세하다.[23] 자신의 전 연인이었던 쿠도 시즈카를 영입해서 "深紅の花"라는 곡을 주고 프로듀서로서 싱글을 발매했다. 사실 쿠도 시즈카는 왕년의 대스타였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나 가창력도, 미모도 예전만 못한 그녀가 음악으로 성공하긴 불가능했다. 다만 그녀의 음원 성적과는 별개로 같은 해에 일본 연예계 최고의 인기남인 2살 연하의 기무라 타쿠야를 잡아채서 결혼에 골인한 행운의 여자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그외 여성보컬인 Shiro와 밴드 BEAST、Revenus 등의 아티스트 들을 프로듀스했으나 역시 히트작을 내진 못했고 지금은 잊혀진 상태.[24] 어느 정도 독자적인 문화로서 궤도에 올라 있었던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인디씬이 홍대 인근에서 한참 불타오르고 있었던 시기로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표방키도 했으나.. 트랙스는 명백히 멤버 개개인의 독자성과 자립으로 이루어져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밴드가 아닌 대형 기획사의 주도 하에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돌 밴드였다.[25] 국내 기획사는 SM엔터테인먼트이었고 일본 기획사는 당시 SM이 제휴했던 최대 레이블인 AVEX TRAX.[26] 이들의 실패의 최대 원인으로 연주력 음악성을 논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연주력 가창력 문제 등은 초반에는 미흡하더라도 일단 주목을 끌면 시간을 들여 차차 개선을 시켜나가면 나중에는 좋게 해결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악성이라는건 문제를 삼기에 앞서 뭐가 옳고 그른지 기준 자체도 모호하고 진짜 문제는 그 당시 트랙스의 외적 컨셉이 그 당시의 트렌드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도저히 흥행이 될수가 없었던 것에 있었다. 같은 시기에 데뷔한 동방신기와는 대조되는 부분. 그나마 트랙스의 멤버였던 노민우는 빼어난 외모와 나쁘지 않은 연기력을 통해 현재 연기자로 활동 중인데 TV 드라마 락락락의 주연을 맡는 등 배우로서의 입지를 제법 굳힌 상태다.[27]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편곡을 담당하던 TAIJI가 탈퇴했으니 당연한 일이다.[28] 더군다나 엑스재팬의 총 음반 판매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요시키의 비중이 커졌던 X JAPAN 후기의 곡들이니만큼 더더욱 그렇다.[29] 한국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 김민종의 "나를 위해" 등의 원곡이다. 즉 당시 많은 한국가요들이 대놓고 베낀 곡. 일본에서도 X JAPAN 최고의 발라드로 인기가 높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와 인기가 훨씬 높았던 대표곡. 요시키의 발라드곡들은 확실히 한국인 감성에 훨씬 더 호소하는 바가 큰 것으로 보인다.[30] 요시키와 토시는 관현악이 잘 접목되고 따뜻한 분위기의 발라드를 요구한 반면 히데와 타이지, 파타는 강렬한 하드락과 헤비메탈을 요구했었다. 이 문제가 타이지 탈퇴의 원인중 하나가 되기도.[31] 우리나라에서 M.C The Max가 '잠시만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한 그 원곡이다.[32] 드럼이나 음악에 있어서 BPM이 800이나 900이라고 말한다는 건 드럼이나 음악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의 발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론 상 보았을 때 BPM 200의 16비트 스트로크와 BPM 800의 4비트 스트로크 이 둘의 속도는 같은데 몇 비트의 스트로크인지 쓰지도 않고 그냥 BPM만 말한다는건 저 사람이 더욱 더 음악에 대한 문외한임을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음악에서 이를 BPM 800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이런 경우는 BPM을 200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요시키의 속주는 유명했지만 세계의 타 드러머, 아니 국내 인디 씬에서만 보더라도 요시키의 드러밍이 독보적으로 뛰어난 속도를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내 드러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드러머 임용훈의 스트로크 영상을 보면 BPM 220의 16비트 필인 연주도 굉장이 빠르며 버거워 보이는게 사실. 스트로크가 아닌 트윈페달의 속도만 보더라도 유럽이나 미국 데스메탈계열 드러머들의 페달링을 보면 기관총의 소리가 날 정도로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괴물들이 굉장히 많다. 해당 본문에 적혀있는대로 드러머들의 실력을 순위매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넌센스인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말도 되지 않는 말들로 요시키 자체를 띄우려는 악성 광팬들이야 말로 요시키를 더 욕먹이는 일임을 알도록 하자.[33] GISS 119 97년 2월호 http://www2s.biglobe.ne.jp/~reiko/database/text/temp/0103.html[34] 그리고 곡에 컴퓨터로 찍은 전자 악기를 사용하는 것과 연주자로서의 실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4집 Kid A 이후 기타 사용을 현격하게 줄이고(Kid A에서는 대부분의 곡에 아예 기타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디사이저나 사운드 모듈 등의 디지털 악기를 적극 활용하지만, 그 누구도 조니 그린우드가 기타리스트로서 자각이 부족하다거나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타리스트로서 굉장히 높이 평가 받는다.[35] 이에 관해서는 Vanishing Vision에 수록된 I'LL KILL YOU, Blue Blood에 수록된 オルガスム, Jealousy에 수록된 Stab Me In The Back과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36] 토시가 방송에서 실수로 그의 본명을 말해버린 것이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디즈 극 초기에는 싱글 I'll kill you 뒷면에서도 쓰여져 있듯이 본명으로 표기했다.[37] 초라해 보이는 사진 속의 모습과는 달리 전 날 그가 입국하던 당시의 공항에서는 그를 보러 온 팬들로 인해 온통 난리가 났었으며 이 당시의 상황은 공식 발매된 LAST LIVE DVD에도 수록되었다.[38] 분명 엑스재팬의 음악적 전성기는 요시키와 타이지의 역관계가 균형을 이룰 때였지만 한국 팬들과 뮤지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뭐라해도 요시키표 록 발라드이다. 일본 본토에선 이런저런 논란을 빚었던 메이저 3집 앨범 가 과거 한국에선 가장 인기 있던 앨범이었다. 사실 일본에서 역시 메탈 팬덤이나 록 평론가들 사이에선 초기~중기 스피드 메탈 곡들이 높은 평가를 받지만 대중적으론 요시키표 록 발라드가 압도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다. 예를 하나 들자면, X japan의 극팬으로 유명한 일본의 전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요시키표 록발라드만 선호하지 정작 록 팬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X japan의 메탈 곡들은 아예 들어본 적조차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에서 메탈이라는 장르는 어디까지나 서브컬처에 가깝고 대중적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메탈 밴드는 X japan이 유일무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39] 이런 평가가 불편할 사람도 있겠지만 90년대까지, 아니 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가요계는 일본 음악을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표절하는 관행이 성행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뮤지션들에게 가장 많은 표절을 당한 게 요시키와 엑스재팬이라는 건 이젠 공인된 사실이다. 표절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엑스재팬의 멜로디나 비주얼, 스타일을 참고, 모방하는 제작자와 뮤지션이 많았다는 건 한국 대중음악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치부다.[40]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 짤에 담긴 17가지 정보 가운데 14번 타이지 해고 사건, 15번 글레이 부당 계약, 17번 호테이 토모야스와의 트러블 정도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잘못된 정보이거나 확인되지 않은, 그리고 확인될 수도 없는 루머와 낭설과 괴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에 가까운 정보마저도 과장과 악의적인 왜곡이 많은데 타이지 해고 같은 경우는 요시키 잘못이 더 크긴 하지만 타이지 역시 분명 문제가 있었고 요시키는 지금도 글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41] Anthem의 보컬 사카모토 에이조가 애니메탈을 결성하게 되는 계기에 관해서는, 소니뮤직의 중역이 택시기사를 하던 사카모토 에이조의 택시에 우연히 탑승했는데 연말이 쓸쓸하여 함께 가라오케에 가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고 택시 기사인 그 역시 쓸쓸한 연말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가라오케를 갔는데 애니메이션 노래를 엄청난 샤우팅으로 부르는 그의 모습에 경악해서 그를 애니메탈 프로젝트의 보컬로 낙점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때 국내 일본 록 팬들 사이에서 마치 정설인 것마냥 알려진 내용인데 바로 이 소문의 출처가 바로 <일본록디비보기>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웹에서 출처는 커녕 그럴듯한 이야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무런 신빙성이 없는 괴설이다. 지금과 같이 해외의 정보를 해당 언어로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아무런 레퍼런스가 없는 카더라통신이 재일교포가 소개하는 현지정보라는 필터를 거쳐 마치 사실처럼 전파되었고 엑스재팬 및 요시키에 관해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쉬이 짐작해볼 수 있다.[42] 아베 슈지의 만화 엘리트 건달 28권 <사부로, 노래합니다! 헬로우 로리타!> 편에서 신랄하게 조롱당한다. 작중 요시키는 '토시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어원은 토시와 요시키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 B급 개그 만화 수준인터라 스토리가 어딘지 조잡하고 엉성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이 에피소드 만큼은 요시키와 비주얼계를 풍자하며 상당한 수준의 스토리 구성 능력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비주얼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00년대 중반 비주얼계 암흑기 시절 비주얼계가 직면한 문제점(과도한 비주얼 지향에 따른 실력 저하, 음악성을 도외시한 과도한 선정성, 기성 밴드들과 비교해 현저히 잦은 멤버들 간의 불화와 이에 따른 이합집산, 대중적 지지도의 몰락과 컬트화 등등)을 적확히 파악하고 비판하고 있다. 다만 진지하게 지적하자면 작가는 요시키(토시키)를 무슨 탐미주의의 화신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요시키와 엑스재팬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요시키의 음악적 성향과 콘셉트는 작가가 생각하는 탐미주의와 별 관계 없다. 그런 기믹은 Malice Mizer 계열 비주얼 밴드들이 잘 활용했지 요시키와 엑스재팬이 내세웠던 음악과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다. 요시키가 비주얼 록의 대부라는 이유만으로 비주얼계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셈. 이 부분만 빼놓곤 다 타당한 지적이다. 작중에서 BOØWY 노래가 종종 언급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작가가 록 음악 팬인 듯싶다. 00년대 중반 비주얼계의 암흑기 시절 일본 현지에서 요시키와 비주얼계에 갖던 극히 부정적인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