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JAPAN

 



[image]
'''레이블'''
EMI
'''소속사'''
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출신지'''
일본 지바현 타테야마시
'''활동 시기'''
1982년 ~ 1997년 (해체)
2007년 (재결성) ~ 현재
'''장르'''
록 음악, 메탈, 발라드
'''멤버'''
YOSHIKI(드럼 & 피아노)
Toshl(보컬)
PATA(기타)
HEATH(베이스 기타)
SUGIZO(기타 & 바이올린)
HIDE(기타)
TAIJI(베이스 기타)
'''공식 사이트'''
The Official X Japan Website
'''링크'''

1. 개요
2. 상세
3. 멤버
3.2. Toshl[1]
3.6. HIDE[2]
4. 음악 특징
4.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
4.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
5. 일대기
5.1. X
5.1.1. 인디즈 시절
5.1.2. 메이저 데뷔
5.2. X JAPAN
5.3. 해체에서 재결성 이전
5.4. X JAPAN의 재결성 이후
5.4.1. 2008~2014
5.4.2. 2014~2017
5.4.3. 2017~현재
6. 사건사고
7.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8. 영화
8.1. We are X
8.1.1. 수상
8.1.2. 사운드 트랙
8.2. Junk story
8.3. HURRY GO ROUND
9. 디스코그래피
9.1. 정규 앨범
9.2. 싱글
9.3. 라이브 앨범
9.4. 컬렉션 앨범
9.5. 리마스터 앨범
9.6. 사운드 트랙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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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주얼 록[3]

의 창시자'''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 -HIDE

일본비주얼계 록밴드.

2. 상세


'''1990년의 X'''
1982년 일본 치바현에서 결성되었고 1997년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X라는 이름은 요시키가 지었는데, 당시 밴드명이 생각나지 않아 무심코 X라고 기입했다고 한다. 이후 X가 무한한 가능성을 뜻함을 깨달았다고. 1992년에는 세계 진출을 선언하면서 동명의 이름을 가진 밴드가 있었기 때문에 HEATH의 가입과 동시에 X JAPAN으로 개명했다. 이후 2007년 영화 쏘우 4에 수록된 OST 곡 I.V 를 발표하며 재결성하였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창조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29분짜리 대곡 ART OF LIFE를 통한 '''세계 최초의''' 심포닉 파워 메탈과 시각적 예술까지 강조한 비주얼 락이 있다.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일본의 메이저 음악 시장에 올리고''', LUNA SEA, GLAY의 신인 밴드들을 발굴하면서 비주얼계라는 일본 록 특유의 성향을 개척했다는 점, DIR EN GREY부터 나이토메아 등 수많은 후배 밴드, 팔로워를 양산해내고 있는 점, '''메탈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인 밀리언 셀러를 달성'''[4]하고 1992년에는 일본인 아티스트 최초로 3일 연속 도쿄 돔 콘서트를 성사시킨 일화[5],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를 가진 12월 31일 공연을 도쿄 돔에서 1993년 12월 31일부터 1997년 12월 31일 라스트콘서트까지 5년 연속으로 성사시켰다는 점[6] 등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일본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열고 이어나가게 되는데 크게 기여를 한 밴드이다. 그 당시 일본 문화에서는 충격 그 자체라고 불리기도 한다.[7] 활동당시엔 평론가들의 평가가 박했던게 사실이긴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일본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메이저시장에 올려 인기를 유지하게 하여 수많은 후배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것으로 고평가[8][9]를 받고 있다.
기본적인 구성은 트윈 기타로 기타 솔로 부분을 두 기타가 나누어서 연주하며, 보통 파타가 백킹 부분을 히데가 리딩 부분을 연주하였다. 근데 배킹과 리딩이 분명 따로이긴 한데, 딱히 내용상 큰 차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DAHLIA 같은 경우에는 배킹과 리드의 구분이 없어 음원만 들어서는 누가 PATA이고 HIDE인지 알 수가 없다. 단, 곡에 따라 차이는 존재한다.
여담으로 국내에선 1990년대 당시 X재팬이 무대에서 '''태극기를 찢고 태웠다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고, 당시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런 루머를 믿는 사람이 꽤 존재한다(...).[10] 국내방송에서 잘못된 정보를 멋대로 방송을 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대로 믿은 것인데, 이에 대해 국내 방송사가 사과방송을 여러 번 했음에도 정설처럼 퍼졌다. 관련기사 당시 퍼졌던 영상. 확연하게 태극기가 아님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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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멤버


'''멤버 일람'''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현 멤버[11]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TAIJI

HIDE

전 멤버



ATSUSHI
TERRY
EDDIE




HIKARU
TOMO





HALLY





JUN





ZEN





KERRY





SATORU





ISAO

'''멤버 변동 내역[12]'''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1982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1984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TOMO

1985년 6월
YOSHIKI

Toshl
ATSUSHI
TERRY
EDDIE

1985년 10월
YOSHIKI

Toshl
TAIJI
JUN
HALLY

1985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JUN

1986년 1월
YOSHIKI

Toshl
HIKARU
ZEN

1986년 4월
YOSHIKI

Toshl
HIKARU
JUN

1986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1986년 12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SATORU

1987년 1월
YOSHIKI
Toshl
TAIJI
ISAO
HIDE

1987년 4월
YOSHIKI
Toshl
TAIJI
PATA
HIDE

1992년 1월
YOSHIKI
Toshl
공석[13]
PATA
HIDE

1992년 8월
YOSHIKI
Toshl
HEATH
PATA
HIDE

1998년 1월
X JAPAN 해체
2007년 10월
YOSHIKI
Toshl
HEATH
PATA
공석[14]
2009년 5월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3.1. YOSHIKI


'''YOSHIKI
요시키
'''
'''본명'''
하야시 요시키 ( )[15]
'''출생'''
1965년 11월 2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58세)
'''공식 사이트'''
Yoshiki Official Website
본명은 하야시 요시키(林佳樹).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가 받는 '''Asian icon award'''를 수상한 경력이 있다. 또한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인'''의 '''뮤지션''' 부분에서 요시키가 뽑혔다.
X 원년 멤버로서 토시와는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의 오랜 친구[16]로 밴드 내에서의 포지션은 드럼과 피아노. 4세부터 피아노 레슨을 시작해 9세 무렵에는 드럼을, 10세부터는 트럼펫을 시작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악기를 다룰 수 있다고. X JAPAN의 리더의 포지션으로, 메인컴포져로서 역대 멤버들 중 가장 많은 작/편곡을 담당하는 한편, 여자보다 여자 같은 비주얼, 과격하고 화려한 솔로 퍼포먼스로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어필하면서 코어팬층을 형성한 멤버이기도 하다. 또한 직접 자주 레이블인 Extasy Records를 설립하여 밴드의 비지니스적인 부분을 전담하였다. 적극적인 미디어 노출과 프로모션으로 X JAPAN 의 상업적 성공을 이끈 한 축으로 평가되나, 지나친 상업주의적 노선으로 동종 업계나 팬들의 찬비양론을 불어일으키기도. 과거의 파천황적이고 독단적인 행보와 그의 사업가적 면모에 코어 팬 못지 않은 안티를 양산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Yoshiki 본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리는 편이다.[17]
어려서부터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받아오는 등, 클래식음악은 그의 음악에 큰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데, 피아노나 스트링스 등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편이다. 그가 작곡한 Endless Rain, Unfinished, Say Anything 등 발라드 넘버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인데, 이러한 멜로디 메이킹에 있어서는 탁월한 센스를 발휘한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다. 여담이지만, 작곡 시 악기를 쓰지 않고, 전 파트를 보면에 쓰면서 작곡을 한다고. 덕택에 X JAPAN 의 악곡은 높은 난이도를 자랑했고, hide 같은 멤버가 초창기에 같은 악곡을 소화하지 못해 고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철저한 보컬 위주의 작곡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따라 X의 곡 대다수가 보컬인 ToshI의 키에 맞춘 D# 스탠다드 튜닝으로 구성되어있다.[18] 보컬 위주의 작곡 스타일로 인해, 1997년에 보컬인 ToshI가 탈퇴를 선언할 때, X JAPAN의 해산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곡과 편곡에 있어, 리더인 YOSHIKI의 손을 많이 거치는 것이 사실이다. X JAPAN의 대부분의 노래는 YOSHIKI가 작곡했는데 그 중 1980년대 인디시절에 불렀던 X, オルガスム 등의 당시 세련미가 떨어졌던 곡들은 이후 베이시스트 TAIJI가 편곡을 다시 하였기에 현재까지도 라이브에서 불릴 수 있었다. 현재는 YOSHIKI 곁에서 작곡을 도와주던 HIDETAIJI가 세상을 떠났기에 YOSHIKI가 혼자서 작곡을 도맡고 있다고 생각하여 달라진 음악 스타일에 대하여 비판하는 이가 적지않다. 하지만 원인은 비교적 편곡 실력이 떨어졌던 YOSHIKI가 아니라 그들이 겪어온 시련과 앞으로의 음악성[19], 멤버 교체를 통해 기타 세션을 맡은 SUGIZO의 기존과 다른 스타일이 원인일 확률이 크다.
드럼 연주의 가장 큰 메리트는 '''속주'''와 '''파워'''. 드럼 실력에 관한 눈에 띄는 큰 단점이라면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드럼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기인 균일한 BPM 유지가 불가능하다 점이 있다.[20] 피아노 실력도 솔로 아티스트로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을 만큼 준수한 실력이다. X 라이브에서도 화려한 피아노 퍼포먼스를 보이는 건 물론이고, Yoshiki Classical이란 타이틀로 단독 투어를 돌 정도. 일본 덴노의 즉위 10주년 축전에 아티스트로 초청되어, 특별히 작곡한 Anniversary 를 연주하기도. 물론 극악의 스케줄로 몸을 혹사한 탓에 목과 허리 디스크, 건초염 등의 질환을 앓으면서 실질적 역량이 X 시절보다 축소되긴 했다.
인터넷 상의 실력적 논란과는 별개로, 일본 세간에선 헤비메탈의 투 베이스 드럼의 화려한 플레이를 널리 알린 드러머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비주얼계 드러머 사이엔 YOSHIKI를 롤모델로 언급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21]
현재는 과도한 상업성의 추구와 고질적인 신보의 발매 연기[22]로 인해, 팬들의 원성을 많이 사는 편이다.
이런 저런 논란에 휩싸이는 인물이고, 밴드 운영에 있어서 독선적이다란 평가를 받지만, 팀 보컬이자 자신의 소꿉친구인 토시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을 당시 오랜 기간 동안 그를 설득시켜 사이비 종교에서 빼내어 재기를 도와준 인물이기도 한데, 이처럼 리더로서 멤버에 대한 애정과 의리를 가끔 보여주기도 했다. 설득 당시 ''' "토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무대 위의 마이크 앞이야" '''라는 말이 토시가 재기하는데 결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할리우드 영화의 음악 감독으로도 자주 활동하는데 대표적으로 xXx, SAW, Spycies가 있다.
여담으로 X JAPAN의 곡에서 작사가 白鳥 瞳(시라토리 히토미), 白鳥 龍(시라토리 류), 橘 朋実(타치바나 토모미), 五十嵐 美由姫(이가라시 미유히메)는 전부 요시키가 작사를 할 때 쓰는 가명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2. Toshl[23]


'''Toshl
토시
'''
'''본명'''
데야마 토시미츠 (出山 利三)
'''출생'''
1965년 10월 1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58세)
'''공식 사이트'''
Toshl Official WEBSITE 武士JAPAN
본명은 데야마 토시미츠(出山利三). 3살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X의 원년 멤버로서 요시키와는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의[24] 오랜 친구였다. 요시키는 중고등학생 시절 폭주족 양아치였지만, 토시는 매우 평범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요시키가 비행을 저지를 때 토시는 선도부로써 그런 행동을 단속했다고 한다. 둘은 노는 세계가 전혀 달랐지만 후에 X결성을 할 만큼 절친으로 지냈다.
어릴때부터 맑고 깨끗하면서도 특색이 강한 미성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처음 소년기에 요시키와 밴드를 결성하던 시절에 담당하던 포지션은 기타리스트였지만 중학교 재학 중 본래 보컬을 담당하던 멤버가 사정이 생겨 밴드를 나가게 되어, 이를 계기로 요시키의 권유를 통해 보컬로 전향하였다.[25]
1987년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특유의 맑고 깨끗하면서도 특색이 강한 미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동년 가을경 X가 본격적인 밴드 활동에 앞서 팀의 재정비에 돌입한 뒤 1987년 겨울 X의 활동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기존의 맑은 미성에 허스키함을 가미하는 쪽으로 변화를 주게 되었다. 본인은 다양한 창법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 또한 밴드 활동을 위해 생목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와 더불어 X의 음악, 특히 요시키의 요청에 따라 토시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레코딩에서도 라이브에서도 있는대로 목을 혹사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활동 양상으로 말미암아 토시의 목에는 심대한 무리가 작용하였고 결국, 1995년 겨울 달리아 투어를 통해 X JAPAN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던 시점에 이르러서는 음역의 하락과 동시에 과거 컨디션이 호조일 시에 보이던 특유의 시원 시원하던 매력 역시도 상당 부분 상실하기에 이른다(이미 1993년 미국 진출 과정에서 신곡 ART OF LIFE 발표 등 무리한 스케줄때문에 성대결절이 온 적이 있다.).
성대부상 후 94년도부터 조금씩 허스키를 뺀 부드러운 스타일로 창법을 바꿔가다가 96년 달리아 투어 즈음엔 그런 스타일을 완성시켜 무시무시한 보컬능력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년도마다 기복이 심한 편.
이후 1997년 라스트 라이브와 뮤직 스테이션 및 홍백가합전에서의 마지막 무대 그리고 1998년 히데의 장례식에서 연주한 마지막 진혼가를 끝으로 X JAPAN과는 결별,[26] 이후 사이비 종교 HOH(Home of Heart)의 교주 MASAYA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HOH의 광고탑으로서의 활동을 개시, 이때 HOH에 몸담던 시기에 힐링 음악을 하는 바람에 보컬로서의 기량은 점차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런 시기, 2000년 '''한국 창원'''에서 열린 창원 락 페스티벌에 La'Cryma Christi와 함께 일본 측 헤드라이너로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HOH에 빠지게 된 계기가 좀 특이한데, 1994년 록 뮤지컬 '햄릿'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파트너가 될 여배우 오디션에 심사를 맡았는데, 이때 오디션에 합격하여 함께 공연한 여배우 모리타니 카오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27] 이 사람이 바로 현재 이혼한 전처, 그러니까 당시 여자친구였다는 거다. 그리고 1997년에 결혼했을 당시의 전처가 하필 HOH의 신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09년경 자신이 힐링 음악 연습 중에 만성 스트레스로 쓰러지면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가 쓰러진 걸 발견한 사업가 지인의 도움으로 영화처럼 HOH 탈주에 성공했고, 이듬 해 2월 11일에 HOH를 심판하는 첫 단계로 당시 아내와도 13년만에 이혼했고, 같은 해 4월 23일 HOH와 MASAYA를 법정에 세워 심판하고 해체시키는데 성공한다. 당시 전처에 의해 HOH 세미나에서 교주의 명령으로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른 건 물론이고 신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하며, [28] 사이비 종교에 빠졌을 당시 전처가 자신이 번 돈을 관리했을 정도로 갈취와 폭행 피해는 더 심해졌고 급기야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급거 입원하기까지 하고도 사람을 보고도 낯을 가릴 정도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자신을 구해 준 그 기획사 사장은 물론이고 요시키에게도 고맙다고 하니 오히려 신의 한 수가 된 셈.
그러다가 X JAPAN의 해체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 토시는 X JAPAN을 재결합하여 더 많은 돈을 바치라는 교주의 명령을 받고 요시키에게 연락하여 X JAPAN을 재결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멤버들의 도움으로 교주를 심판해내는데 성공하고 상술한 한 기획사 사장은 물론이고 거기에 요시키의 도움으로 세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오게 된다.
X JAPAN의 재결합 이후 2008년 3월에 있었던 도쿄 돔 3 Days 공연이나 동년 5월의 히데 추모 공연에서는 지난 10년에 이르는 공백으로 말미암아 생긴 기량의 쇠퇴로 인하여 X JAPAN 시절의 곡들은 부르는 것 조차도 버거워 할 정도의 처참한 모습을 보였지만 2008년 3월 도쿄 돔 라이브에서의 쿠레나이[29] 1년이 지난 2009년에 이르러서는 일단 마구 질러대는 식으로나마 어찌 저찌 X JAPAN 시절의 곡들을 부를 수는 있게 되었고,[30] 2008년 12월 31일 아카사카 블리츠 라이브에서의 쿠레나이 2010년 후반기 이후, 2011년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본 기량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31] 2011년 8월 서머소닉 페스티벌 라이브에서의 쿠레나이
최근 들어서는 창법을 기존의 쏘아붙이는 식이 아닌 고음에서의 공명감 등을 잘 살리는 편으로 변화해가고 있으며 전성기 때에도 잘 시도하지 않던 고음에서의 샤우팅을 라이브에서 심심찮게 하는 등 비록 전성기 때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컨디션이 많이 나아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017년 2월 영국 웸블리 아레나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부른 ART OF LIFE, 6분대부터 부르는 마지막 파트가 인상적이다. 현재 50대가 넘어서도 기존 X JAPAN의 고난이도 곡들을 대부분 원키로 부르는 등 꾸준히 나아지는 목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 방송 등에서 활발히 커버곡을 부르기도 하는 등 나이에 맞지않는 굉장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토시의 이런 독특한 음색은 많은 사람들을 X Japan의 팬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타이지가 LOUDNESS 탈퇴 후 결성한 D.T.R 의 보컬들은 토시에 비해 테크닉으로는 오히려 꿇릴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토시같은 음색을 기대했던 팬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또한 토시의 탈퇴선언으로 인해, 토시를 대신할 보컬리스트를 찾으려다 결국 해체를 결정한 것도 결국 토시 특유의 음색 때문.[32]
후배들이 토시의 노래를 부른 영상들에서도 대부분 '잘 부르지만 역시 토시의 목소리로 불러야 한다.' 라는 평들이 자주 보인다.
2014년 8월에는 SMAP나카이 마사히로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인 킨스마(金スマ)에 출연, 공중파 방송을 통해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이자 한편으론 가해자이기도 했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상세히 밝히기도 하였는데 사이비의 종교의 위험성과 그로서 말미암은 고난의 세월들이[33] 여실히 방송을 통해 전달이 되었는 바 시간이 남아도는 위키러들이라면 한 번쯤은 진득하니 시간을 내 해당 영상을 보도록 하자. 여기에는 전처와의 만남부터 결혼, 그리고 이혼까지 모두 담겨져 있다. 관련 영상.
2019년에는 함대 컬렉션 신년 JAZZ 페스티벌에 콜라보로 참여, '돌아갈 수 없어(モドレナイノ)'와 '제독(당신)과의 인연(提督(あなた)との絆)' 재즈버전의 보컬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토시하면 잘 발달된 특유의 턱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
'''2006년 한일 평화 콘서트에 참여했을 때 공연 수익금 가운데 일부를 기부금으로 일본군 성폭력 피해 할머니들께 전달한 적이 있다.''' 물론 시기를 따져보면 당시 한창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던 때라서 실상은 교단의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교주 MASAYA의 지령을 받고 내한했을 공산이 매우 크고, 실제로 내한 당시 한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속한 HOH의 힐링 음악을 찬양하고 X 시절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등 석연치 않은 언동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거수 일투족 대중에게 행보가 노출된 유명 록 그룹의 보컬 출신으로서, 특히 식민지배 및 전쟁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별로 없는 Toshl 연령대 일본인들[34]의 평균적인 정서를 감안한다면 그 자체로서 대단히 파격적이고 훌륭한 행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35]이다. 또한 2008년에는 내한콘서트 수익을 기름 유출로 고통받고 있는 태안 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전액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2008년 파워콘서트에서 Earth in the dark를 한국어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국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한국어를 가타카나로 표기 한 것을 보고 부른 것. 약간 어색한 발음도 좀 있으나 (사랑을 사라-은~ 이라고 한다던가) 나름대로 잘 소화해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YBUXRXx57Q
2018년 11월 21일자에 キャッToshlテレビ(캿토시테레비) 라는 이름으로 유튜버를 시작하였다. # 컨텐츠는 놀랍게도 디저트 만들기... 본인이 하고 싶어서 직접 시작한것은 아니고 메이지 식품에서 자신들의 신제품 홍보를 위해 토시를 섭외해서 제품홍보 유튜버를 시작했다. 스스로도 첫 영상에서 기간한정으로 제품홍보를 위해 개설했다고 소개한다. 물론 재미들려서 이후에도 계속 하게될지도 모른다... 현재 홍보하는 제품은 메이지 식품에서 새로나온 생크림으로 이 생크림으로 여러가지 디저트를 만들어 먹으며 홍보중. 유튜브 제목 처럼 고양이 흉내를 낸다던가(냥!) 본인이 만든 디저트를 맛보고 나 천재아니냐며 감탄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귀여운 리액션을 하고 있다. 팬들은 토시의 리액션에 충공깽하기도 하고(50대 아저씨가 디저트 만들어 먹으며 애교를 부리니..) 이런식으로 가까운 곳에서 토시를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반응. 현재 개설후 3달여만에 3만 5천여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019년 3월 이후 정전 상태…였는데 2020년 4월부터 해당 채널에 팝송 커버 영상을 게시 중.

3.3. PATA


'''PATA
파타
'''
'''본명'''
이시즈카 토모아키 (石塚 智昭)
'''출생'''
1965년 11월 4일, 일본 치바현 치바시 (58세)
'''공식 사이트'''
PATA Official Website
본명은 이시즈카 토모아키(石塚 智昭). Gibson Les Paul을 애용하는 기타리스트.[36] '파타'라는 예명은 마야 미네오의 만화 파타리로에서 따왔다고 한다.
존재감이 심히 안습하다. 단순 라이브에서의 존재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밴드에 가입하게 된 계기도 요시키의 트윈 기타 라인업 고집으로 인하여 헬퍼로 가입한 것이었고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당시 주디라는 밴드의 리더였던 파타는 요시키를 자신의 밴드로 데려오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X에 가입하게 됐다(...). 요시키에게서 처음 밴드 가입제의를 받았을 때 파타는 요시키에게 '너나 우리 밴드 들어오지 그래?'라고 하였다고 한다. 밴드 운영에서도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요시키와 타이지의 불화 사이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다가 히데의 설득으로 겨우 타이지 편을 그나마 들어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밴드 내에서의 불화를 그나마 중화 시켜주던 히데나 항상 많이 싸웠던 요시키와 타이지, 그리고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요시키에게 히데 사후 반박을 했던 히스보다조차도 못할 정도로 밴드 활동 내에서도 거의 발언력 등은 제로. 말 그대로 거의 밴드 내에서는 기타'''만''' 치는 존재. 나름대로 자기 스스로 터득한 생존법일 수도 있다. 파타가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찌보면 파타 같은 사람이 요시키에게는 가장 죽이 잘맞는 사람이라 볼 수 있으나,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점은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기타만 치는 세션이 아니라 엄연히 밴드의 멤버인 점을 감안하면...[37]
플레이 스타일은 리듬 파트와 옥타브유니즌 플레이시 저음부를 주로 담당했다.[38] 어떤 의미에서 X 음악의 기초공사를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좀처럼 나서지 않는 이미지와 기타리스트로서의 기대값 때문에 실력이 상당히 저평가되있는데, 절대 못하는 기타리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만큼이나 안정적인 연주력을 보유했는데, 기본에 충실한 블루지한 프레이즈와 특히 리듬리프를 박자 저는 일 없이 깔끔하게 소화한다. 이런 부분이 음악교육을 받지 못 한 일반인 눈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칼박이야말로 연주인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기이다.[39] 요시키와 히데의 시도때도 없이 저는 연주에 반해서 오히려 이런 부분은 파타만의 강점이였고,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음악의 안정제 역할을 수행했다. 한마디로 매력과 엣지는 없지만 기본기가 탄탄한 연주자... 음악적으로 블루스와 아메리칸 헤비메탈 취향이라 타이지와 함께 하던 시절에는 음악적으로 꽤 죽이 잘 맞는 동료였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실력은 평범한 수준으로 흔히 같은 팀 내의 히데보다 낫다 못하다를 논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히데 생전 두 사람간 연주를 비교해 보면 서로가 선호하는 바에 대한 차이점은 있었을지언정 현격한 실력차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으나[40] 해체 이전의 마지막 라이브였던 THE LAST LIVE 〜最後の夜〜 공연에서 만큼은 아티스트로서 성장하여 다방면으로 걸쳐 신경이 분산돼 기타리스트로서의 기량은 하락되어 있던 히데에 비해서는 비교적 더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준 적이 있긴 했다. 그 당시 공연을 자세히 들어보면 히데는 연습 부족[41]으로 자꾸 운지가 나가고, 박자가 절리는 걸 들을 수 있었던 반면 파타는 그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다만 유독 라스트라이브 당시에 히데와 같이 트윈솔로를 하는 파트를 리프로 때웠는데 이유는 불명하다.
팬들에게는 멤버들 중 제일가는 애주가로 꼽힌다. 인터뷰에서 받고 싶은 생일선물이 매일 줄지 않고 술이 펑펑 뿜어져 나오는 술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열성적인 팬이다. 요미우리가 시합에서 지는 날에는 신경이 예민해져,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며, 도쿄돔에서 첫 콘서트를 할 당시 자신의 리허설을 끝내고 쉬는 시간에 토시와 캐치볼을 한적도 있다고 한다. X JAPAN이 도쿄돔에서 콘서트를 개최 할 때도, 요미우리의 홈 구장에서 연주를 할 수 있게되어 기쁘다 라고 말 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인스타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만 팔로우하고 있다)
연주 앨범이었던 요시키의 솔로 앨범인 Eternal Melody와 더불어 솔로 앨범이 먼저 한국에 발매된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하다. 1집과 2집 모두 한국에 발매되었는데, 참여했던 보컬리스트가 하우스 오브 로즈(House Of Lords) 출신의 제임스 크리스찬이었던 지라 일본어 가사의 앨범이 국내에 수입 및 라이센스 금지가 되던 시절에도 영어 가사라는 이유로 멀쩡히 발매가 되었다.[42] 앨범 스타일은 X 시절과는 정반대 스타일인 아메리칸 하드 록 스타일. 평상시 그의 존재감 만큼이나 X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발매 된 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참고로 전곡의 작곡은 파타가 했지만, 히데와는 다르게 기타밖에 칠 줄 몰랐기 때문에 나머지 악기에 대한 편곡은 거의 세션 멤버들에게 맡겼다. 앨범 자체로만 보면 다른 멤버들처럼 솔로 뮤지션으로써의 실력을 보였다기 보다는 그냥 X의 스타일 이외의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시험삼아 녹음해 봤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43]
그 이외에는 솔로 활동 대신에 히데 밴드에 세션으로 참가하면서 히데와 함께 행동했다. 히데의 세션기타리스트로 활동할때 몇몇곡에서는 X JAPAN 때와는 다르게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는 파타를(심지어 헤드뱅잉도 한다.) 볼 수 있다.
소바 알레르기가 있다. 타이지와 소바의 산지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역에 도착하자마자 눈물 콧물 재채기를 하며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팬들에게 고양이 아빠라고 불릴정도로 고양이를 매우 좋아한다. https://youtu.be/VPn4HWnjZyw?t=30m33s 30분 33초에 자신의 반려묘 코테츠와 함께 등장하는 파타가 나온다.

3.4. HEATH


'''HEATH
히스
'''
'''본명'''
모리에 히로시 (森江 博)
'''출생'''
1968년 1월 22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56세)
'''공식 사이트'''
HEATH Official Website
본명은 모리에 히로시(森江 博). 1992년 1월 베이스 주자였던 타이지의 밴드 탈퇴 후 약 반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 새로이 영입된 멤버로 히데의 전 여자친구의 애인이라는 인연이 주효하게 작용해 밴드 X JAPAN에 가입하였다. 타이지의 후임을 뽑는 베이스 오디션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베이스를 연주한 일화는 오래전부터 유명하다.
주로 사용하는 악기는 히데와 같은 페르난데스 회사의 베이스로 워록 프레시전 베이스, 스탠다드 투 프레시젼 베이스를 주력으로 썼으나, 재결합부터는 재즈 베이스를 주로 쓰고 있다.
베이스로의 멜로디적인 부분을 요구해 화려한 테크니컬 플레이를 선보이는 등 X 내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던 타이지와 달리 베이스의 기본 역할에 충실했던 부분에서 X 가입 당시 타이지와 상당히 많은 비교를 받았다.[44] X JAPAN의 후임 베이스 주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화해 내는 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할 수 있다.[45] 엄연히 완벽주의로 유명한 요시키가 정식으로 주최한 오디션에서 합격한 베이시스트임을 생각할 때, 실력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 힘들다고 평가된다. 다만 타이지가 편곡 부분에 있어서 높은 참여도를 보이는 등,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확실히 어필했던 것에 반해, 자신만의 음악적 어필이 부족하고 세션 베이시스트의 인상이 짙은 히스에겐 아쉽다는 평가가 많은 듯하다. 타이지 탈퇴 전후로 사운드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애초에 타이지와 요시키의 음악적 갈등은 작편곡권 쟁탈전 양상이였고 사운드가 달라진 문제는 오히려 타이지 탈퇴 후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은 요시키가 하고 싶은대로 자신의 음악을 강력하게 하게된 이유가 크다.
합을 맞추느라 늘 요시키 쪽을 바라보면서 연주하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던 이전의 막내 시절[46]과는 달리 재결성 이후로 제법 관록이 붙은 모습이 되었으며 이전보다 뚜렷하게 들리는 베이스 사운드로 팬들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요시키, 토시에 비하면 비중이 여전히 적은 편이지만 이전에 파타와 세트로 공기 취급 당하던 시절보다는 나은 듯하다. 2009년에는 히데에 대해서 요시키와 설전이 있었으며 탈퇴 소동이 일어나면서 아이러니하게 밴드 내 존재감이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SUGIZO까지 가입하면서 17년만에 막내 탈출했다.
X JAPAN으로서의 활동 외에는 솔로로서의 활동 및 파타, 히데 밴드의 I.N.A와 함께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한 바가 있다.
[clearfix]

3.5. SUGIZO


'''SUGIZO
스기조
'''
'''본명'''
스기하라 유네 (杉原 有音)
'''출생'''
1969년 7월 8일, 일본 가나가와현 하타노시 (54세)
'''공식 사이트'''
SUGIZO Official Website
LUNA SEA의 멤버이자, X JAPAN의 재결성 후 히데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타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합류하였다. 합류 전부터 히데와 요시키와는 각별한 친분이 있던 사이이다.[47]
광장히 꾸미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참고로 현재 기타 리프를 요시키가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기타 세션은 스기조가 맡고 있다. 기타 실력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image]
또한 스기조의 집안(도쿄 교향악단)은 오케스트라를 전공하였다. 아버지는 트럼펫, 어머니는 첼로. 덕분에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학습하였다.
락에 처음 관심을 가진것은 중학교 1학년 때. YMO와 ジャパン(재팬), RCサクセション(RC섹션)를 본 순간 락 뮤지션을 꿈꾸었다고. 고등학교 2학년 전까지만 해도 놀기만 하다가 운좋게 가입한 교내 밴드에서 여러가지 테크닉을 구사하며 헤비메탈 분야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7~18살 무렵 자신의 밴드 PINOCCHIO에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꿈꾸며 구매한 첫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밴드 활동 과정에서 작곡을 위해 피아노와 키보드까지 익혔다고 한다. 이후 LUNA SEA에 리드기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가입하였다.
여담으로 개명을 두번이나 하였다. 첫 이름은 '''杉原 康弘'''(스기하라 야스히로). 첫 개명 당시는 '''杉原 悠'''(스기하라 유).
추가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6. HIDE[48]


'''HIDE
히데
'''
'''본명'''
마츠모토 히데토 (松本秀人)
'''출생'''
1964년 12월 13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사망'''
1998년 5월 2일, 일본 도쿄도 (33세)
'''공식 사이트'''
hide official web site [hide-city]
본명은 마츠모토 히데토(松本秀人). 기타리스트. 페르난데스의 시그니쳐 모델이 따로 있으나 실제 레코딩에서는 깁슨 레스폴을 애용했다고 한다. 멤버들 중 최고의 개념인이자 요시키에 이은 밴드의 2인자.[49] 본인의 영문이름을 밴드에서는 대문자로 표기하고, 솔로활동을 할 때에는 소문자로 표기했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연주력은 스피드 메탈 밴드의 프로 기타리스트로는 딱히 나쁘지않다는 평가. 빠른 속주와 고급적인 기술연주가 가능했다. 애초에 이런쪽 장르가 멜로딕한 빠른속주를 잘 연주하지 못하면 안되는 장르이다..하지만 솔로활동과 화려한 비주얼로인해 기타실력이 평가절하당하는 부분이 없지않아있다. 대신 아티스트로서의 역량과 그것을 관철키 위한 대중에게의 어필 능력과 같은 연예인으로서의 수완은 모두 다 고루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히데 본인은 악기에 관심이 많아 기타, 베이스, 드럼 모두 다 연주가 가능했으며 솔로활동 시에도 기타리프, 베이스라인, 드럼 악보까지 밴드곡으로서 필요한 모든 걸 자기자신이 직접 작곡 편곡하였다. 더불어 X JAPAN내에서도 보컬 포지션에서 공연한 내역이 있으며 해체 이후 개인 그룹인 hide with spread beaver에서 보컬을 맡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
전에 활동하던 그룹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를 접고 미용사가 되려던 참에 요시키에게 설득되어서 가입했다…는데 한국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 락킨F 1998년 11월호에서 요코스카 샤벨 타이거 시절 동료였던 키쿠치(드럼), 쿄(보컬)의 인터뷰에서 '음악을 그만 둘 생각은 없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해산 이후에도 한동안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의 히데라는 명함을 사용했었다.[50]
요시키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묵묵히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요시키의 독불장군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던 모양으로, X JAPAN 해체 무렵에 방영되었던 NHK 특집 프로 'X JAPAN의 궤적'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짜증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외에 X JAPAN의 상업화 러쉬에 열받아, "우리들이 1회용 장기말이냐!"며 술 취해서 롯폰기의 길에서 소리지른 적도 있다. 히데가 이런 실수를 했음에도 바로 다음날 "요시키... 내가 어제 무슨 말 했어...? 미안해... 기억이 안 나..."라는 등의 사과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래도 밴드에 애착이 깊었는지 토시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어 밴드를 탈퇴하고 싶다고 말하자 갑자기 '토시의 목소리 없는 X JAPAN은 상상할 수 없다'며 밴드를 해체한다는 기자회견을 연 요시키에게 반발하며 밴드의 완전 해체를 끝까지 막으려고 한 멤버이기도 했다.
X 가입 당시 원래 베이스를 맡으려 했으나 타이지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기타로 바꾸었다고 한다.[51] 초기 X의 캐치프레이즈였던 "Psychedelic Violence/Crime Of Visual Shock"는 히데의 작품. 93년을 기점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해서 솔로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솔로 시절에 X JAPAN 시절보다 더 대단한 음악을 보여줬으나 아쉽게도 1998년 5월 2일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고사로 사망.
1999년 GMV의 요시키 인터뷰 내용을 보면, 히데 생전에 뉴 X JAPAN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보컬은 기타리스트 히데가 겸할 예정이었으며 4인으로 컴백하려 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요시키에 대한 발언과 X JAPAN에 대한 회의적인 발언을 볼 때 신빙성은 전혀 없다.
히데의 사망 원인은 "과로로 인한 사고사". 히데가 사망하기 전날인 1998년 5월 1일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라이브 노래는 ピンク スパイダー. 히데가 사망했을 당시 일본 전체가 마비되어있었는데 이는 언론에서 히데가 자살했다고 잘못 보도했기 때문이였다. 이때 히데의 팬들이 자살하는 행위가 발생했고 이에 요시키는 "여러분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히데를 편히 보내주었으면 합니다."라며 팬들의 자살을 막았다.
그가 죽기 전에 자살 관련 인터뷰에서 이런 답을 했었다고 한다.

히데: 마지막 순간에 느낀다는 ESCTASY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저는 죽음이 편안한 안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죽고나면 제 팬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게다가 욕먹을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해요.

(웃음) 죽고나면 지금의 세상이 무척 그리울지도 모르죠. 제 친구들이 절 그리워할게 뻔하니깐. 그치 요시키? (웃음) 요시키가 젤 슬퍼하는 건 아닐까?

요시키: ... 별로.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히데 사망 이후 가장 슬퍼했던 건 요시키였고, 요시키는 히데를 떠나보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더 이상 널 볼 순 없지만 너의 기억은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남아 숨 쉬겠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그러니까, 안녕이라고 말하진 않을게.'''

히데의 인격에 관한 담화에는 "불치병에 걸린 어느 한 소녀와 기타리스트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후 히데는 hide with sptead beaver에서 MISERY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마유코를 상징한 곡이다.
현재 한국 가수 중에서도 히데를 롤모델로 삼기며 그를 기리는 가수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서태지GD. 그는 시대를 앞서나간 음악인으로서도, 훌륭한 인격으로서도 진정한 뮤지션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 참조.

3.7. TAIJI


'''TAIJI
타이지
'''
'''본명'''
사와다 타이지 (澤田泰司)
'''출생'''
1966년 7월 12일,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사망'''
2011년 7월 17일, 미국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섬 (45세)
'''공식 사이트'''
http://taiji-tsglaston.com
본명은 사와다 타이지(澤田泰司). 동양 최고의 베이시스트로 언급되는 인물로, 멤버들 중 연주력에 있어서 가장 좋은 평을 받았었고 히데와 함께 X의 비주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X 시절 트레이드 마크인 '노발'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52]
X 시절 명곡이라 불리는 곡들은 거의 TAIJI가 손을 댔다. 요시키의 멜로디 메이킹 감각도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없었다면 빛을 못 보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지배적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러닝 타임의 곡들에 엄청난 몰입도를 부여한 것은 타이지의 편곡이다. 요시키의 원곡에 비해 화려하고 정교해진 I'll kill You와 紅(쿠레나이)가 대표적이다.[53]
X JAPAN의 노래는 요시키의 멜로디 작곡 능력과 요시키의 멜로디를 락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가 있는 리프로 다듬는 히데의 기타 리프 메이킹 능력, 토시의 특색 있는 보컬 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의 벨런스를 적절히 조절하고 정돈하는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조화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슬랩, 태핑 등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면서도 이러한 테크닉들이 따로 놀지 않고 곡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뛰어난 베이스 플레이어이며[54], 원래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서 그런지 클래식 기타 연주에도 실력이 있어서 기타 세션까지 할 정도이다.[55]X 시절 히데와 파타에게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기타 실력이 뛰어나다. 그의 실력은 내외로 유명하여 X의 탈퇴 직후 곧바로 일본의 전설적 헤비메탈 밴드 Loudness에 곧바로 가입했을 정도다. 라우드니스의 기타리스트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TAIJI를 눈독 들여 놨었다가 탈퇴(사실상 해고) 일주일만에 곧바로 데려와 버렸다. 애용하는 모델은 킬러의 Dagger, Impulse 모델을 사용하다가 시그내처 모델인 Phoenix 베이스를 사용한다. 물론 레코딩시에는 Fender Precision Bass를 애용한다.
요시키의 독재적인 밴드 운영에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멤버였다. 가입 초창기에는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요시키에 반발하여 밴드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Endless Rain이 발라드와 락의 절묘한 궁합으로 히트하고 멤버들이 발라드 곡 작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56] 요시키가 '앞으로 앨범에 들어가는 발라드 곡은 항상 자신만이 작곡한다.'라는 의견에 반기를 들어 <Voiceless Screaming>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멤버들의 참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본래 요시키의 곡으로만 채워질 예정이었던 Blue Blood 앨범에 히데의 곡 <Celebreation>, <Xclamation>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멤버들 중 가장 창작에 비중이 적었던 토시를 위해서 자신이 작곡한 곡은 항상 토시가 작사를 하게 하였다.
결국 요시키와 잦은 마찰을 겪으며 1992년 도쿄 돔 콘서트를 마치고 해고. 공식적인 이유는 음악성 차이였지만 사실은 Yoshiki의 권고로 인한 해고성 탈퇴였다. 요시키가 혼자 다른 멤버의 두 배가 넘는 인세를 차지하는 데 대하여 항의했던 것이 그 직접적인 이유다.[57] 이미 JEALOUSY 앨범 녹음 들어갈 때부터 사실상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계약처분을 받았다. '스튜디오 뮤지션'이란 말 그대로 앞으로는 X JAPAN의 정식 멤버가 아닌 세션 뮤지션 취급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디 시절 부터 함께 밴드를 이끌던 타이지의 입장에서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철저히 붕괴시키는 계약이었을 것이다. 즉 인세 문제가 나왔을 당시에 이미 요시키는 타이지를 해고 처리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타이지의 문제도 있었다. 알콜 중독 등의 문제가 있었고 X의 연습을 빠지고 LOUDNESS친목질을 하러 놀러간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도쿄 돔 공연에서도 요시키가 타이지에게 "너는 하루만 무대에 오르고 다른 날은 다른 세션 멤버를 쓰겠다"고 했다가 히데가 요시키를 설득하고 타이지 또한 "도쿄 돔 공연 만큼은 3일 전부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다오"라고 부탁해서 겨우 무대에 섰다고 한다. 이후 벌인 해고 소송에서 패배, TAIJI는 LOUDNESS를 거쳐 Cloud Nine 등등. 헤메고 헤메이다 D.T.R의 실패로 생활고를 겪다가 이혼까지 당하고 홈리스 생활을 전전하다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홈리스 사냥을 당하면서 턱이 마비되고 치아가 4개나 부러지거나,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비운의 천재였다.
히데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깨달아 재활 후 2000년에 자서전 '전설의 밴드 X의 생과 사'를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복귀했다. 2005년에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지만, 이후 자신의 밴드인 D.T.R을 재결성하여 음악활동을 해왔다. 또한 2010년 8월 15일에는 X JAPAN의 요코하마라이브에서 게스트로 초청되어 "7인의 X"로 X를 연주하였으며, 요시키와 화해를 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2011년 7월 14일. 미국 사이판으로 향하던 비행기 내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하고 기내 좌석과 창문을 발로 차는 등 난동을 부려 체포되었다가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 병원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되었다가 17일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 락계에서도 칭송받던 베이시스트의 허무한 죽음이였다. 여성 매니저와 관련된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로 불명예스러운 소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마저도 사실관계와 다른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 내용과 다르게 자살 시도에 따른 상흔이 없고,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가 타이지인 척 하며 유족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구치소 측에서 검시 결과를 은폐하는 등 부정이 드러나면서 사인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부인 아카츠카 토모미를 비롯한 타이지 유족의 구명활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6년 12월 29일 일본 외무성 재사이판 영사사무소에서 진상규명에 착수한다는 보도를 발표하였다.'''
유족 중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이 있는데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 애니메이션판 주제가[58]마법전대 마지렌쟈의 엔딩곡을 담당한 Sister MAYO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 참조.

4. 음악 특징


음악적인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 메탈의 스타일에 가깝다. 물론 사실상 당시 멜로딕 파워 메탈은 제대로 된 명칭도 갖추지 못한 태동기였기에 이쪽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다기보단 16비트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강한 영향력에 일본식 멜로디와 편곡이 가미된 음악이 되었다.[59]
당시 영미권에서 불어온 일종의 '스피드 메탈' 장르의 음악을 일본 특유의 멜로디로 풀어나가는 음악으로 인디즈 시절을 보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워 메탈 쪽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한 듯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일본 1세대 멜로딕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볼 수도 있다.[60][61]
유럽 파워 메탈의 사생아라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유럽 쪽에서는 일본의 대표밴드로 인식된다. 특히 요시키가 일본 최고의 작곡가로 여겨지는 듯. 유럽의 유명 밴드인 아노렉시아 널보사, 드래곤랜드[62], 소나타 아티카 등이 X JAPAN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게 대표적인 예. 이는 일본 관객을 고려한 서비스임은 분명하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카테고리안에 묶는 것이 가능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 커뮤니티에서도 X를 통해 유러피언 파워메탈을 듣기 시작했다는 글은 많이 보인다.
반대로 allmusic.com같은 영미권 평론 사이트에서는 그들의 기타리프나 악곡면에서 자신들만의 것은 별로 없으나 괜찮은 밴드라는 애매한 평가를 내린다.[63]
이들의 음악의 장르는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곡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스타일은 존재하는 편이다. 최소한 리더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에서만큼은 스피디한 곡과 발라드곡 모두에서 서정성(혹은 뽕끼라고 부르는 동양적 멜로디)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스타일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리고 앨범마다 사운드도 크게 다른 편이다. 인디 1집은 헤비메탈, 메이저 1집은 파워메탈, 2집은 타이틀곡 외에는 LA메탈, 3집은 인더스트리얼 메탈에 가깝다.
다만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비판도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X JAPAN의 노래는 메탈 아카이브에서는 Heavy/Progressive/Power Metal로 구분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 바로크메탈 계열에서 파생된 멜로딕 파워 메탈 쪽으로 구분하고 있다. '바로크 메탈'이 언급되는 것은 멜로딕 스피드쪽이 기타리스트의 잉베이 말름스틴화, 밴드의 메탈리카화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공연을 매우 조용히 감상하는 특성이 있어서 메탈리카, 마릴린 맨슨 등도 '일본에서 공연은 그다지… 한국에서 공연하는게 훨씬 즐겁다'는 요지의 말들을 한 바 있는데, X JAPAN의 공연만큼은 매우 열광적이다.[64] 특히나 X의 후렴부분에서는 모든 관중들이 손으로 X표시하면서 점프하는게 압권이다.[65]
현재는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 좋아져서 아치에너미의 일본공연에서는 슬램존을 만들어놓는 관객을 종종 볼 수 있다.
시기 상으로 영미권 메탈이 전성기에 있을 때 일본 내에 등장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음악적으로는 자신들만의 특출난 메탈 리프나 사운드를 가지지는 못했다. 특히 메탈의 인기가 완전히 꺾인 90년대 중반에는 메탈이 거의 배제되고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DAHLIA를 들고나오기는 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하지 못했고 발라드로서 인기를 끌었다.

4.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


  • 12012
카와 토루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멤버들이 아닌 프로듀서 KOBAMETAL이 팬이며, 곡 '紅月', 'NO RAIN, NO RAINBOW' 등에서 그 영향이 보여진다. 그 뿐만 아니라 라이브에서도 코르셋을 주요 아이템으로 사용하거나 'We are BABYMETAL' 등을 사용하는 등 많은 오마주를 하고 있다.
기타리스트 Ryu가 팬이었다고 한다. 또한 블러드스테인차일드의 결성 초기엔 음악이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었다고 한다.
SYU와 Fumiya는 X JAPAN을 듣고 음악을 시작했다고 하며, SHO도 팬이라고 한다.
X JAPAN과 LUNA SEA를 듣기전까진 음악에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X JAPAN은 자신에겐 '바이블' 이라고...
보컬 마오가 팬이라고 한다.
보컬 RUKI와 기타 아오이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둘은 hide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다.
Siren과 Fuki가 팬이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Unsraw Yuuki
  • Versailles
X와 LUNA SEA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KAMIJO는 '일본 음악업계에서 X JAPAN의 영향을 받지않은 사람은 없을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X JAPAN을 듣고 일본의 락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09년도에 엑스재팬 팬인 멤버들로 구성된 GALNERYUS 합류 전 솔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팬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 빨도 있겠지만 프로듀서로서 요시키는 감히 비교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일본 대중 음악 역사상 역대급으로 큰 성공을 거둔 코무로 테츠야가 음악적으로 유이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천재가 바로 오다 카즈마사와 요시키라고 한다.#[66]
* 잔나비
예전에 진행했던 라이브방송에서 밴드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과 기타 김도형이 피아노로 endless rain을 연주하며 노래를따라부른적이있다.

4.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


X'''재팬'''이란 단어가 들어가는데다 1990년대엔 태극기를 찢은 밴드라는 가짜뉴스의 피해까지 입었음에도, X 재팬은 그 시절 한국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이걸 대중적인 인기라고 하면 좀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지만[67], J팝이 리즈 시절을 달리던 90년대에 아무로 나미에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큰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던 밴드가 X JAPAN이었다. 지금도 X JAPAN하면 곡은 몰라도 이름은 아는 일반 한국인들이 꽤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상당한 팬덤과 인지도가 있는 밴드인 셈.
문화적 교류가 일반인보다 수월한 당시 한국 음악 업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영향 중 하나라는게 아이러니하게도 표절(...).[68] X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ENDLESS RAIN은 국내의 많은 락발라드곡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준비없는 이별. 코드 진행은 물론 중간의 나레이션이 나오는 부분까지도 비슷하고 멜로디마저 그대로 갖다붙였다.
과거 십여년 전 국내 팬덤들 사이에서는 X JAPAN에 관해 부풀려진 소문들이 꽤나 돌았었는데, 예를 들면 BLUE BLOOD가 일본에서 네 가구당 한장씩 팔렸다는 얘기나[69] 요시키가 세계 드러머 3위라는 얘기같은게 있었다. 물론 모두 일본쪽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닌, 왜곡되거나 날조된 이야기. 이는 당시 대중적인 개방이 있기 전 일본 문화에 대한 신비주의가 불러낸 촌극.[70]
그 외에 Say Anything 같은 곡들도 신문에 언급될 정도로 국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71] 국내에서는 X JAPAN의 활동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문화 수입을 금하고 있었던 사정도 있고 해서 소수의 팬들에 의해 불법 수입(...) 되었었다. 현재는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과 동시에 적극 수용되는 형태이다.
1993년 발매한 "Tears" 라는 곡이 한국 가사로 번안되어 M.C The Max잠시만 안녕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다만 X JAPAN 팬덤 사이에서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하다. 특히 가사의 리메이크에 대한 비판이 큰데,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주 내용인 가사를 일반적인 사랑 노래로 곡의 의도를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 그 중에서도 멜로 드라마틱한 유치한 뮤직 비디오는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잠시만 안녕이 리메이크 된 계기는 요시키가 M.C The Max의 보컬 이수를 프로듀싱한 적이 있기 때문인데[72], 다만 잠시만 안녕의 개사 사건으로 인해 부친 문제도 얽혀 요시키와의 사이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TraxX노민우도 요시키에게 프로듀싱받으며 Tears를 받았는데, 여긴 엠씨더맥스와는 다르게 한국어로 번역만 하고 키와 템포만 수정하였지만 팬덤 반응은 더 안좋았다(...).
근래 X JAPAN의 재결성으로 일본에서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란 명성을 얻고 있듯 한국의 연예인&셀렙 X JAPAN의 팬들 역시 막강하다. 과거 90년대 한국에서 앨범들이 복사본으로 수십만장 팔렸다는 소리도 나올만큼 X JAPAN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는데 그때 당시 X JAPAN의 음악을 듣고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 대통령으로 불린 서태지[73], SM 엔터테이먼트 회장 이수만[74], 신화김동완[75], 발라드 가수 조성모[76], 월드스타 방탄소년단RM, 엑소찬열, 슈퍼주니어김희철, 부활김태원,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김종서#, 영화감독 곽재용[77], 배우 배두나, 이병헌이민정 부부, 이동건, 전지현[78], 감스트 등이 X JAPAN의 팬으로 알려졌거나 공개적으로 밝힌 유명 인사들이다. 샤이니종현도 중학교 때 X JAPAN과 너바나의 노래를 듣고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걸로 알려졌다. JYJ김재중 또한 2018년 X JAPAN의 팬임을 밝히고 요시키와의 만남을 가졌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 밴드들 중 하나이다. 일본 내에서만 보자면 B'z, 미스터 칠드런, 사잔 올 스타즈, 글레이, 라르크 앙 시엘 등 X JAPAN 보다 훨씬 더 롱런하고 대중적 지지도나 앨범 판매량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우수했던 록 밴드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인기는 X JAPAN이 저들보다 훨씬 더 많다. 단적인 예로 유튜브에서의 X JAPAN 관련 영상이나 곡들의 조회수와 댓글 비중이 일본보다 외국이 더 많을 정도. 물론 이는 자국 시장 내의 수요 자체가 어마어마하기에 해외 진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일본 음악계 특유의 강고한 내수지향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X JAPAN 역시 <ART OF LIFE>로 미국 진출을 추진하다 음악 외적인 이유로 실패한 뒤로는 딱히 해외 진출을 시도한 적이 없기에 이는 X JAPAN의 음악이 B'z나 Mr.Children, 사잔 올스타즈 같은 일본의 국민밴드들보다 좀 더 전세계 록 팬덤의 '''보편적인 취향'''에 더 부합하는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고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문화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X JAPAN이 한국에서 엄청나게 인기가 많고 평가절상된 걸 알고 '일본에선 잘나갈 때도 그렇게 엄청나게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밴드는 아니었는데 한국에서 인기가 이렇게 많다니 신기하다'는 식으로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취향 차이를 언급할 때 X JAPAN이 거론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한국만의 취향이 아니라 전세계 록 팬들의 공통된 정서에 가깝다. 그러니까 한국만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유독 X JAPAN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X JAPAN이 인기가 많다는 얘기. 즉 일본인이랑 한국인의 취향만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일본인이 좋아하는 록 음악과 대부분의 다른 나라 록 매니아들이나 대중들이 선호하는 록 음악이 차이가 많고, 한국인의 취향도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아무래도 음악스타일이 유럽풍 클래식에 가깝다 보니 각 나라별로 취향을 크게 타지 않고 어느정도 선호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굳이 X JAPAN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해외 록 팬들이나 대중들은 LOUDNESS, ANTHEM, VOW WOW 같은 메탈 밴드들, 그러니까 일본 내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나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에선 B'z나 Mr.Children은커녕 X JAPAN보다 더 못했던 밴드들을 더 선호하고 고평가하지 정작 '''일본의 국민 밴드들라고 불리는 B'z나 Mr.Children 등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79] 그래서 설령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일본의 주류 록밴드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한들 일본 본토 취향에 최적화된 이들의 음악으론 해외 무대에서 성공할 공산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일본과 가장 가깝고, 또 문화적 차이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면 적은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도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여튼 일본 대중 문화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밴드들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고 정작 일본의 메인스트림 밴드들은 경쟁력이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갈라파고스화라는 개념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 문화의 특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일대기



5.1. X



5.1.1. 인디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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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시절의 끝자락이자, 실력적으로 최고상태 시절의 SONY CBS AUDITION 영상
85년부터 도쿄로 올라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인디즈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본격적인 멤버가 자리잡히기까지 2년동안 TAIJI의 탈퇴 후 재가입을 포함해서 12명의 많은 멤버 교체가 있었다.
당시에는 X를 가타카나로 エックス라 표기했다. 수많은 레코드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리더인 Yoshiki가 세운 자주 레이블 Extasy Record를 통해 VANISHING VISION을 발매하고 이 앨범은 오리콘 차트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는 당시 메이져 레코드사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꽤 화제를 모았고, 이 기록은 DIR EN GREY의 I'll이 발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인디즈 앨범이 메이져 차트에 올라간 최고의 기록이었다. 현재까지의 누적 판매량은 17만 2천 장 가량.
이후 Extasy Record를 통해서 GLAYLUNA SEA, Zi:Kill등 수많은 거물급 아티스트들을 발굴해 냈다.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 히데가 픽업을 한 것이고 Zi:Kill의 경우 요시키의 말도 안되는 처분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못하다.
X의 총 판매량에 대해서는 왕창 부풀리거나 왕창 줄이는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일단 공식적 오리콘 통계에서는 총 판매량이 약 1,117만 장 정도로 추정된다.[80]

5.1.2. 메이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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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BLUE BLOOD'라는 앨범으로 SONY RECORD를 통해 메이져 데뷔. 연말에는 최우수 신인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그 해를 장식한다.[81] 'ENDLESS RAIN', 紅 등 X JAPAN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곡들이 많다.
1991년 7월, 두번째 앨범 'Jealousy' 발매. 이 앨범부터는 메탈리카블랙 앨범을 녹음했던 LA의 레코드실[82]에서 녹음함으로써 음질이 대폭 상승했다. BLUE BLOOD에 요시키의 색채가 진했다면 Jealousy는 멤버 개개인의 색깔이 잘 혼합된 느낌. 당초에는 30분에 달하는 대곡 'ART OF LIFE'라는 곡과 함께 2장의 CD로 발매하려 했으나 요시키와 토시의 건강 문제, 음반사의 실적 평가 등의 여러 문제가 겹쳐서 1장만으로 발매했다. 요시키가 아직 미완성이라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음반사 측 사람들에게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진 일화가 있다.[83]
1992년 1월 5, 6, 7일, 역사적인 도쿄돔 3 Days 콘서트.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롤링 스톤즈마이클 잭슨 같은 외국의 거물들에게나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84] 그도 그럴 것이 도쿄 돔의 수용인원은 4~5만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데뷔하기 전에 "우리는 도쿄 돔에서 공연을 할 거다!"라고 TV에 나와서 떠들었다가 또라이 취급을 받았던 X는 1992년 도쿄돔 3일 연속공연이라는 위업을 달성해 낸다. 사실 지금도 도쿄 돔에서 3일 연속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는 거의 없다.

5.2. X JAPAN


[image]
이후 세계 데뷔를 준비하며 이름을 X에서 X JAPAN으로 개명. 미국에 이미 동명의 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초에는 X from JAPAN이었으나 이 이름은 얼마 후 바로 흑역사에 묻히고 X JAPAN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HEATH를 영입.
92년 이후부터 전체적인 활동이 줄어들며 TOSHI의 MADE IN HEAVEN을 시작으로, 93년에는 HIDE가 솔로 데뷔를 하면서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개시되었다. X JAPAN의 싱글이 하나 하나 발매되기는 하였으나 활동은 많이 미비하였다.
1993년 8월, 29분짜리 한 곡이 실린 앨범 ART OF LIFE 발매.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Yoshiki의 반생이 담겨있는 곡. 곡 구상을 위해 2주간 어둠 속에 자기 감금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나온 곡이며 가사는 모두 영어. 가사에 일본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X JAPAN의 앨범 중 이 앨범이 가장 먼저 정발되었다. '자살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18세 미만금지로 판매되고 있다.[85]
1993년부터 매년 12월 30일, 31일 도쿄 돔 2일 공연. 과거에는 도쿄 돔 공연부분에서 X JAPAN은 일본 최다의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는 도쿄 돔 연말공연자리가 넘어간 KinKi Kids에 의해 깨진지 오래.
1995년을 전후로 YOSHIKI와 TOSHI가 머리를 자르면서 탈 비주얼을 시도했다. 이 시기부터 상징이었던 '노발'[86]을 풀고 화장이 옅어지면서 음악적으로도 당시 유행하던 인더스트리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1996년, 3번째 메이져 앨범 DAHLIA 발매. 전작 Jealousy로부터 5년이나 걸린 풀 앨범이었으나, 이미 곡들이 대부분 싱글 컷 되어 먼저 릴리스 되었기 때문에 꼭 BEST ALBUM 같은 인상도 든다. 앨범 전체에 YOSHIKI표 발라드의 비중이 커졌다. 초창기에 X가 가지고 있던 격렬한 느낌이 사라지고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발라드 곡이 많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취향이 갈리기도 하였다. YOSHIKI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라드가 많이 나온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1996년 DAHLIA Tour를 돌던 YOSHIKI가 스테이지 위에서 쓰러진 후 이후의 모든 스케줄이 취소, 연말의 도쿄 돔 콘서트에서야 부활하게 되었다. 팬들도 멤버들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왠지 주욱 조용하다가 1997년 9월 해산 선언. 보컬인 ToshI가 음악성의 차이를 이유로 탈퇴를 원했기 때문.[87] ToshI가 탈퇴를 표명한 것은 1997년 4월이었으며, 그 동안 1993~96년 도쿄돔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 작업을 하던 Yoshiki는 X JAPAN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보컬은 ToshI밖에 없다는 생각에 9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해체를 선언한다. 이 기자회견에 ToshI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X JAPAN의 멤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Yoshiki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
1997년 12월 31일, '최후의 밤'이라고 명명된 마지막 콘서트가 열렸다.

5.3. 해체에서 재결성 이전


[image]
멤버였던 hide가 1998년 1월부터 솔로활동을 하다 5월 2일 오전 8시 51분에 사고로 사망했다. 히데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집중되었다. 당시의 집계로는 미소라 히바리를 뛰어넘는 역대 가장 많은 인파였다. 히데를 따라 자살한 사람도 생기면서 요시키가 따라서 자살하는 행동은 자제할 것을 공식적으로 당부했다. 미국의 TIME지에 히데의 부고가 실리기도 했다.
토시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힐링음악으로 활동했으며 또 다른 멤버였던 히스와 파타는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했었다. 리더였던 요시키는 2002년도에 코무로 테츠야가 리더인 globe에 가입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당시 Malice Mizer을 탈퇴 후 개인활동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GACKT와 1999년 LUNA SEA해체 이후의 스기조, 기타리스트 MIYAVI와 함께 S.K.I.N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는데 멤버 라인업이 굉장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토시가 복귀하여 S.K.I.N의 라이브 공연은 1번밖에 진행되지 않았다.[88]

5.4. X JAPAN의 재결성 이후



5.4.1. 2008~2014


[image]
해체한지 10년만인 2008년 X JAPAN이 재결성됐고, 영화 SAW Ⅳ의 엔딩테마 I.V를 발표한다. 2008년 3월에는 부활공연으로 도쿄 돔에서 3일간 공연을 했다. 같은해 요시키가 월드 투어를 결정했으며 동남아권으로 프로모션을 다녀갔었고 한국에도 같은 해인 2008년도에 한국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재결성의 계기는 바로 돈이 필요했던 토시가 요시키를 찾아가 부탁했기 때문. 그러나 이는 사이비 교주인 마사야의 계략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요시키는 이를 알고 있었고, 오랜만에 재회한 토시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며 배려해주면서 토시의 사이비 종교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토시 문단에서 상술한대로 요시키의 도움으로 2010년경 전처와 이혼하고 HOH를 심판하면서 사이비 종교에서 완전히 탈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 공연이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HEATH의 탈퇴 소동 때문이지만, 사실은 '''히스와 그 당시 X JAPAN의 매니지먼트 였던 X JAPAN 제작 운영 관리 위원회와의 갈등'''으로 인해서이다. 한국 공연이 취소되어 한국의 내한 공연 기획사 아이예스컴은 8억 원 가량의 손해를 입었지만, 도쿄돔 공연과 타이페이 공연은 SUGIZO까지 가입한 상태로 버젓이 진행된다.
2009년 5월 1일. HIDE의 11주기를 앞두고 히스와의 갈등이 해결되었음과 SUGIZO(LUNA SEA)가 정식으로 가입함을 알렸다.
2010년 파칭코화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범인은 산쿄. 공식 홈페이지
2010년 8월 닛산 스타디움 라이브에 전 멤버였던 타이지까지 스테이지에 등장하면서 '''사상 최초 7인의 X JAPAN'''이라는 내용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Headwax사(HIDE의 회사로, 현재는 그 동생인 히로시가 사장)로부터 HIDE의 초상권 사용으로 20억 엔을 요구해서 서로간에 소송을 하네마네 이전투구 중. 정말 고인이 보면 하늘에서 통곡을 할 일이다. 아울러 아직 향후 계획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LUNA SEA 역시 '''REBOO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HIDE의 초상권 문제와 SUGIZO의 거취에 따라서 팬들의 염원이던 활동 재개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최근에 EMI의 북미 법인과 3년 계약에 성공했다. 북미 한정으로 3월 15일 싱글 JADE 발매 예정. 본 계약은 미국 법인과의 계약이고 일본 쪽 담당인 EMI 뮤직저팬과는 계약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일본 국내의 레이블과도 계약이 없는 상태라서 발매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그나마 일본 도호쿠 대지진의 여파로 무기한 중단되었다.그러나 워낙 발매 연기와 취소가 반복되던 밴드라 팬들도 안티도 다들 그러려니 한다. 아니 자연재해가 아니었더라도 연기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거라는 분위기랄까? 참고로 JADE 싱글의 편곡자로 David Campbell을 영입했는데 그는 X 시절의 명곡인 "Say Anything"의 현악 편곡에도 참여했으며 이승환의 "천일동안",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등의 편곡을 담당한 바로 그 거물급 프로듀서다.
결국 2011년 6월 29일자로 유럽-동남아-남미 아이튠즈에서 JADE가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었다.
또한 "X~七人のX~高書筫完整版(직역 : X~7인의X~옛 고서의 완전한 재판)"에서 타이지가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며 히데가 홀로그램으로 띄어진 상태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이 공연이 음악인 타이지의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만다.
2011년 7월 17일 타이지가 죽음에 의문점을 남긴채 사이판에서 사망했다.
2011년 10월 2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요시키가 골든글로브의 OST를 작곡하면서 미국에서 최우수 해외 밴드상을 받기도 했다. 참고
요시키가 페이스북에 꾸준히 곡을 레코딩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Born To Be Free와 JADE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한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 9일에는 요시키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Art of Life 2를 작곡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2014년 "HERO"로 '''컴백 예정.''' 8월 17일 신주쿠에서 뮤비 촬영 겸 공연을 했다.
세계적인 밴드 미스터 빅의 에릭 마틴이 Forever Love를 커버해서 불렀다. 링크
신곡은 그 나이대의 밴드들이 다들 그렇듯이 창작력 면에서 한계가 있고, 하다못해 옛날 곡이라도 잘 부르면 좋으려만 재결성 후의 X JAPAN은 곡 사이의 인터벌이 너무 길어졌다.
2013년에 요시키가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해서 Forever Love의 뮤직 스테이션 버전을 연주했는데, 오오시마 유코가 감동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꽤나 난리였다. 링크

5.4.2. 2014~2017


2014년 6월 17일 워너 뮤직을 통해 The World ~X JAPAN 첫 전세계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였으나 이미 그 이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FAN'S SELECTION이 8만 장 정도로 그치는 부진한 판매량을 보였는 바[89] 이 앨범 역시도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0월 1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콘서트를 했다.
이 콘서트 때문에 9월 30일-10월 1일에 이루어졌던 일본 콘서트에서 보컬 토시가 목을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했다. 그냥 힘들어서 그런 듯.
기사에는 열정적으로 19곡을 연주했다고 했지만, 사실상 별로 한 곡은 없고 중간중간 피아노 솔로, 바이올린 솔로 등을 한 곡으로 취급해서 그렇다. 실제로는 14곡 수준. 여러모로 안습. 공연 시간은 역시 거의 약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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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말, 요시키가 인터뷰로 앨범이 80%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하는 말이 "4월 완성 예정이지만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네요"이다. 자기도 욕을 먹는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2015년 2월 25일 밤 요시키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Master Album Sequences 2.24.15라고 적힌 CD 사진을 올렸다. 과연 신보가 그의 말대로 4월에 완성될까? 참고로 12개의 트랙이 나와있으며 1번 트랙은 The Last Song 2번 트랙은 Jade 3번트랙은 Beneath the skin 4번 트랙은 Hero로 예상되는데, 이럴 경우 신곡과 예전 곡이 섞인 또 하나의 베스트가 아닐까 예상된다. 링크
그리고 4월에 내온다던 앨범은 한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그러던 중 2015년 6월 22일에 XDAY IS COMING이라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신곡이 약간이지만 배경음으로 깔려 있었다. 매우 가까운 시일에 깜짝 소식이 있다고 하는 걸로 보아, 20년만의 앨범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The Last Song' 같은 기존의 곡들도 포함되긴 하지만, 사실 이 곡은 앨범에 속해 있지 않은 싱글로만 발매된 곡이었고 또한 마지막 곡이라는 뜻의 곡이 앨범의 첫 트랙이 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재결성한 다른 밴드들이 앨범을 내는 것을 보고 고통받던 X의 팬들이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새로운 앨범의 발매 일자는 기존에 말해 온 2015년 연내가 아닌 2016년 3월 11일로 정해졌다. 이에 팬들은 앨범이 나온다는 기쁨과 함께 또 미뤘다는 데에 분노하였다. 예전 Jade 때도 3월 11일 발매였으나 미뤄졌던 전례가 있어 걱정하는 중이다.
2015년 8월 20일 요시키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 투어 라이브를 발표했는데, 이는 DAHLIA TOUR 이후 약 20년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투어에 관심있는 위키러들은 참고해도 된다.
그리고 2016년 3월 11일 앨범 발매 후 다음 날 영국 웸블리 아레나 라이브와 같이 공개될 X JAPAN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트레일러가 공개 되었다.
2016년의 앨범에 앞서 2015년 10월 23일 싱글 앨범이 나온다고 덧붙였는데 요시키 본인이 레이블과의 계약으로 인해 곡명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새 앨범에 수록될 것으로 예상되는 곡인 KISS THE SKY, HERO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줄 알았는데 무관객 라이브 때 KISS THE SKY는 라이브 형태와는 완전히 다르게 앨범에 넣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특히 기자회견을 통해 요시키가 새 앨범 제작에 관해 대답한 바, 레코딩은 한창 진행중이라고
본인이 웸블리 아레나에서의 라이브는 기본적으로 20년만의 새로운 앨범 발매 기념이기 때문에, 스스로 데드라인을 그어놨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본인도 앨범을 계속 미루던 과거사가 존재하다보니 이번에도 안 나오면 본인은 업계에서 확실히 묻혀버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히 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X JAPAN이 여러가지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해 공백 기간이 길었지만 그 기간이 무색할만큼 최고의 앨범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2015년 11월 6일에 첫번째 싱글 Born to be free가 발매된다고 요시키가 SNS를 통해 알렸다.
어째서 1st Single로 표기한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JADE가 디지털 싱글이라 싱글로 치지 않는 듯 하다. 2015년 11월 26일, 2015년 NHK 홍백가합전 출장이 발표되었다. 1997년 이후 18년만의 홍백가합전 출장.
2015년 12월 1일, 일본 투어 요코하마 공연에서 신곡 Angel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일본 투어 공연을 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 팬들은 이젠 그냥 살아서 라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토시의 경우 세뇌 시절 다친 허리의 후유증으로 인해 히로시마 라이브에서 아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요시키는 건초염으로 인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 만신창이 상태로 라이브에 임하고 있다.
멤버들도 이젠 그저 돈 때문에 한다기보단 비장함이 묻어나오는 상황.[90] 요시키의 멘탈이 많이 성장하기도 해서 예전처럼 욕도 먹지 않는다.
물론 파타가 연습을 제대로 안 해서 자꾸 연주를 틀리거나, 앨범 레코딩이 심각하게 오래 걸리는 건 좀 짜증난다는 반응...
일본에서는 아직도 인기가 건재하다. 무서운 밴드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요즘 TV 출연이 잦은 탓에 젊은 층의 반응이 많다. 대체로 무서울 줄 알았지만 친근함에 놀랐다는 반응. 라이브도 인상적이라는 반응이다.
칸쟈니∞ 팬이 테레아사 드림 페스티벌에 출연한 X JAPAN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신을 보았다면서 글을 쓴 것이 요시키의 RT 덕분에 일본 내에서 꽤나 화제가 되었었다. 가창력이나 연주력 등이 뛰어난 가수들은 많지만, X JAPAN 멤버들의 연주는 카리스마 그 자체여서 분위기게 압도당한다고.
우리 나라에서는 90년대에 퍼진 빠들의 엄청난 과장 덕분에 안티가 늘어서 X JAPAN은 90년대에나 유명했지 그 이후부터는 인기 하나도 없는 퇴물 밴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 TV 출연이 잦은 엑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 무서운 이미지의 밴드라는 이미지는 있어도.
사실 십수년 전 X JAPAN에 관해 국내에 퍼졌던 이야기들 중에는 극성 팬들의 과장섞인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X JAPAN이 싫다는 측 역시도 극성 팬들의 그것에 못지않게 과장되고 허황된 비방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반일 감정으로 인해 밴드 이름부터 재팬이 들어가 있는 밴드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태극기를 태웠다는 루머가 퍼진 것이 대표적. 어디까지나 루머이긴 했지만.
오히려 젊은 층의 팬들이 늘어난 추세이다. 물론 아이돌 가수의 팬층과 같은 열광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X JAPAN의 공연을 본 젊은 사람들이 X JAPAN의 카리스마에 반해 팬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X JAPAN이 TV 출연이라도 하는 날에는 일본의 트위터가 대부분 X JAPAN 관련 내용일 정도.
현재 일본의 가수들이 X JAPAN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방송 중 관중석에 가서 공연을 보거나 해서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라시의 멤버들조차 관중석에 나가서 봤다고 고백하고, 다른 밴드의 멤버가 X JAPAN 공연에 난입해서 같이 뛰어 다니거나 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5년 크리스마스,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 출연해서 Born to be free와 X를 연주하였다.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물리치고 10여 분 동안의 엔딩 무대를 맡았는데, 엄청난 포스로 또 일본 전역에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아이돌 팬이 많아서 10대~20대의 여성 관객들이 많았는데[91]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관객들도 다같이 X 점프를 하며 흥분된 분위기였다. 게다가 무려 첫 곡인 Born to be free 때는 산타 복장을 입고 연주했다.
2015년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백팀으로 출전하여 Forever Love와 Born to be free를 연주하였다. 아울러 요시키의 피아노 옆에 타이지의 베이스와 히데의 기타를 함께 놓아 두었다.
그러던 중 2016년 1월 18일, 파타의 건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다는 발표가 났다. 팬들은 파타를 걱정하면서도 또 앨범 발매와 콘서트가 뒤로 밀리는 게 아니냐 하는 불안감에 걱정하고 있다.
결국 새 앨범과 웸블리 공연이 연기되고 말았다. 공연은 2017년 3월 4일로 미뤄졌고 앨범 발매는 잠정 보류. X JAPAN 팬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면 사건이 터졌기 때문. 물론 이번 상황은 파타가 중환자실에 입원까지 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반응이다.
2016년 3월 17일에 이르러서야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던 파타가 비로소 퇴원했음을 알렸다. 요시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파타는 안정을 취한 후, 8월 경에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발매 예정이었던 새 앨범에 대해서는 빠르면 가을, 어떻게든 연내에는 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2016년 7월 말에 Jealousy 앨범을 Blu-Spec CD로 리마스터링해서 새롭게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5.4.3. 2017~현재


결국 연내에는 내겠다던 신보는 단지 신곡 <La Venus> 1곡만이 방송을 통해 공개되는 정도로만 그친 채 감감 무소식이 되었고, 2017년 3월에 이전곡들과 또 다시 재탕한 앨범을 냈다. 다만 정규앨범은 아니고 "We are X" OST 앨범이다. 이 앨범은 Without you, La Venus을 어쿠스틱 버젼으로 녹음한 음원이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UK Top 40 Rock Albm' 차트1위를 차지(!!) 영국전체 앨범차트에서도 27위를 차지했다. 홍콩,핀란드 아이튠즈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2017년 2월말에는 영국 공연을 앞두고 슈퍼라이브를 제외하고 21년만에 뮤직 스테이션의 레귤러 방송에 출연하여 La Venus를 열창했다. 영국 웸블리 아레나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요시키의 공식 SNS를 통하여 2017년 월드투어 WE ARE X의 일본 일정이 발표되었다. 요코하마 아리나에서의 라이브는 4일 연속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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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에는 '''1988년 이후로 29년만에 팬사인회'''를 개최했다. 이어서 4월 1일에는 또다시 앨범 발매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요시키채널에 등장한 요시키는 피아노 연주를 시전하다가 갑자기 연주를 끊고는 중대선언을 하겠다면서 '''2017년 6월 30일에 뉴 앨범을 발매한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 GLAY의 히사시, LADIES ROOM의 죠지를 비롯한 패널들은 뜬끔없는 폭탄 발언에 아연실색하자 요시키는 '만우절이니까~'. 그러나 곧이어 구체적인 앨범 내용에 대한 소개까지 덧붙이면서, 신곡 13곡 사이에 오프닝 곡으로 'The Last Song' 그리고 엔딩곡은 'Art of Life'로 과거의 X JAPAN이 감싸는 듯한 구성[92]을 했다고 언급. 타이틀명은 셀프 타이틀임을 밝혔다. 그리고 7월에 시작될 월드 투어는 뉴 앨범을 위주로 곡을 구성할 것이라 올해 들어 누누히 밝혀 왔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21년만에 신보인 셈.
그러나 5월 말, 요시키의 경추 디스크가 재발해 LA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밝혀지면서 새 앨범 발매에는 또다시 적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6월에 들어서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보고가 올라와 일단 스케쥴에는 지장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6월이 아무 소식 없이 지나갔다. 오리콘과의 인터뷰에서는 6월 30일 발매는 어렵지만 '''2017년 내에는 무조건 냅니다''' 라고 했다고. 수술 때문에 드럼을 칠 수 없는 상태이며, 월드 투어 역시 어쿠스틱 투어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연말부터 2018년초 TV방송에 요시키가 출연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히데의 기일인 5월 2일까지는 앨범을 발매하고 싶다고 에둘러 말한 바 있다. 하지만 2018년 5월 2일도 역시나 아무 소식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런데 며칠 후 X JAPAN 명의가 아닌 요시키 개인 명의로 HYDE가 피처링으로 참여하는 식으로 변경됐다. 실제로 이곡에서 토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그동안 공개한 곡작업 영상에서도 토시는 보이지 않는다. 근황에 따르면 토시는 아직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개런티 미지급'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불명확하다.
2018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 무대에서 X JAPAN이 아닌 '''YOSHIKI feat HYDE, YOSHIKI feat サラブライトマン'''으로 출전하였다. 하이도와는 RED SWAN, 사라브라이트만과는 X JAPAN의 오프닝 Miracle을 연주.
또한 요시키는 홍백가합전 69회만에 최초로 홍팀과 백팀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인물이 된다.
2019년 12월 31일 역시 홍백가합전에서 요시키가 KISS와 출전했다. 팀명은 YOSHIKISS로 요시키가 어렸을때부터 존경했던 키스와의 콜라보로 夢のコラボ라는 타이틀을 지었다. 연주한 노래는 KISS의 ROCK AND ROLL ALL NIGHT.
2020년에도 X JAPAN은 라이브 콘서트 계획은 없었다. 멤버들은 모두 솔로활동에 몰두중.
또한 2020의 홍백가합전에서 코로나의 여파로 원격으로 요시키가 특별출연하였다. 또한, QUEEN의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테일러, 사라 브라이트만, BABYMETAL, Lisa, SixTONES, milet이 함께 Endless Rain을 연주했다.

6.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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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京区(분쿄 구)에 위치한 도쿄돔에서 관객 5만 명이 동시에 X의 후렴구에 맞춰 손을 X모양으로 만들고 점프를 했더니 구 자체가 흔들려 '''진도 3의 지진'''으로 측정됐던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분쿄 구의 라이브에서 이 곡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기도.
'''<BORN TO BE FREE>의 싱글 앨범 커버 사진'''에 대하여 SNS를 통해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앨범의 커버 사진에 나체의 몸에 목과 팔이 수갑이 채워진 여성의 뒷모습이 실렸기 때문.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성품화 하였다는 지적인데, 반대로 여성이 역사상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결박당해왔기 때문에 사진 속의 여성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며 앨범 재킷은 여성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다만 음악계도 예술의 한 장르인 만큼 커버 앨범에 그려진 여성 또한 예술의 일부분으로 표현됐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담고있지 않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SNS에서 발발한 사건이므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옳다.'''
2018년 7월 초 요시키 인스타에 문제의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image]바로 이 사진인데 이때 보컬 토시만 제외되어 있던 것. 기사에서는 '''Toshl와 YOSHIKI의 절연'''은 물론 '''X JAPAN의 재 해산'''이란 이야기까지 여러 불화설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더불어 신곡의 명의가 X JAPAN으로 되어있음에도 객원 보컬인 hyde를 초청하였기에 이러한 주장이 마냥 스쳐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X JAPAN 해체 당시 HIDE가 제안한 X JAPAN의 재결합 방식(객원 보컬을 초청하며 밴드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요시키는 10여일만에 요시키 채널 독점 인터뷰를 통해 표기 수정[93]을 공지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표하였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하여 토시는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오해는 지속되는 상황..
2018년 9월 28일~9월 30일, 총 3일 동안 '''紅に染まった夜'''(붉게 물든 밤)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건은 3일째 라이브 날 전국적으로 강한 태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있었던 일본 전국의 행사와 라이브는 모두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X JAPAN은 관객을 모두 돌려보내고 난 뒤 WOWOW와 요시키채널에서 생중계로 라이브를 진행하였다.
[image]


7.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X 시절에 팬 서비스로서 이벤트성으로 결성한 파트 체인지 밴드. 1988. 12. 31. 엑스타시 서밋, 1989년 8월 28일 오사카 비밀라이브, 1991년 10월 19일 닛신파워스테이션, 1991년 11월 17일 시부야 에그맨 1992년 1월 5일 파멸을 향하여에서 선보였다. 참고

8. 영화



8.1. We are X


'''We Are X'''는 2016년 영국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본의 헤비메탈 밴드 X JAPAN과 드러머이자 피아니스트, 그리고 밴드의 리더인 Yoshiki에 관한 내용이다. 감독은 스티븐 키작(Stephen Kijak). 2016년 1월 23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개봉하였고 국내 개봉은 2017년 5월 25일. 2017년 12월 13일에, Blu-ray와 DVD로 발매되었다.
YOSHIKI의 성장부터 2014년 10월 1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다.[94] 그러나 그 후, 유럽·투어 등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2014년에는 록의 성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라이브를 개최하여 비극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내용이다.
2014년 10월 11일 X JAPAN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콘서트로부터 촬영이 시작되었고 2015년 7월 4일에 발표되었다. 요시키는 당초 영화화를 꺼렸지만 윌리엄 모리스 엔데버의 마크 가이스의 권유에 의해 승낙했다.
감독인 스티븐 키작은 프로듀서로부터 제작 의뢰 전화를 받을 때까지 X JAPAN에 대해 몰랐지만,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이란 문구를 듣고 흥미를 가졌다고. 덧붙여 13~14세 무렵을 마지막으로 헤비메탈을 듣지 않았는데, X JAPAN의 음악을 듣고 승낙했다고 한다. 그 후 X JAPAN에 대해 조사하던 중 키작이 생전 처음 산 레코드인 키스의 'love gun'이 멤버인 요시키와 Toshl가 처음 산 레코드라는 사실, 키잭이 SUGIZO와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로 SUGIZO가 영국의 뉴웨이브 밴드인 자판의 베이시스트 믹 칸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한다. 키작은 요시키가 수십년간 자신의 인생과 X JAPAN을 기록한 영상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영화제작에 있어서는 제작팀이 발굴한 영상들을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키작 자신이 가장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인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한 "Longing~切望の夜~"의 뮤직 비디오의 미발표 영상이 있다.
We are X라는 제목은 라이브에서 X로 연주하는 동안 Toshl가 We are 를 외쳤을 때, 관객이 X!로 답하는 데서 떠올렸다고 한다.

8.1.1. 수상


'''세계 영화 다큐멘터리 공모전 최우수 편집 상''', '''선댄스 영화제 상''' , '''남서부 관객 타이틀 디자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방송영화비평가협회상 다큐멘터리 영화상으로 베스트 뮤직 다큐멘터리에 올라있다. 2016년 12월 13일, 제89회 아카데미상 최우수 오리지널 송상에서 엔딩·테마 "La Venus"가 뽑혔다.

8.1.2. 사운드 트랙


'''We are X'''
제목
작곡
작사
La venus(acoustic version)[95]
YOSHIKI
YOSHIKI
Kurenai(from The Last Live)
YOSHIKI
YOSHIKI
Forever Love
YOSHIKI
YOSHIKI
A Piano String in Es Dur
YOSHIKI

Dahlia
YOSHIKI
YOSHIKI
Crucify My Love
YOSHIKI
YOSHIKI
Xclamation
HIDE, TAIJI

Standing Sex(from X Japan Returns)
YOSHIKI
Miyuki Igarashi
Tears
YOSHIKI
白鳥瞳, YOSHIKI
Longing~切望の夜~
YOSHIKI

ART OF LIFE(3rd Movement)[96]
YOSHIKI
YOSHIKI
Endless Rain(from The Last Live)
YOSHIKI
YOSHIKI
X(from The Last Live)
YOSHIKI
白鳥瞳
Without You(Unplugged)[97]
YOSHIKI
YOSHIKI
2017년 3월 3일에 발매. 영국 락 & 메탈 앨범 차트[98]에서 1위에 올랐으며 이는 영국의 앨범 차트에 진입 한 최초의 X Japan 앨범이다. 앨범 출시 후 첫 주, 주간 오리콘 차트 3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영국 사운드 트랙 앨범에서는 3위, 영국 메인 앨범 차트에서는 27위를 차지하였다.

8.2. Junk story


1998년 5월 2일 사망한 일본의 음악가 hide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에서는 2015년 5월 23일, 국내에서는 2017년 5월 18일에 개봉되었다. hide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사토 후토시(佐藤太)가 감독했다. 생전의 hide를 아는 인물에의 인터뷰나 당시의 영상등을 통해서로 hide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그의 '''음악''' '''인간성''' '''정신 세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배우 츠카모토 타카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인터뷰 한 인물로는 Yoshiki, I.N.A, 森重樹一, J, 松本裕士, PATA, JOE, Kiyoshi, CHIROLYN, DIE, kyo, Tetsu, 木村世治, YANA, SEX GEORGE, defspiral, CUTT, 小杉茂, DYNAMITE TOMMY, 에릭 루스트포울이 있다.
영화의 테마곡인 '''Junk story'''는 생전에 히데가 직접 작곡한 곡이다. https://youtu.be/9xptUx0MTpA

8.3. HURRY GO ROUND


히데 사망 20주년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2018년 5월 26일 발매, DVDblu-ray는 2018년 12월 5일에 발매하였다.

9. 디스코그래피




9.1. 정규 앨범


VANISHING VISION》(인디 앨범) (1988년 4월 14일)
BLUE BLOOD》 (메이저데뷔 앨범) (1989년 4월 21일)
Jealousy》 (1991년 7월 1일)
ART OF LIFE》 (1993년 8월 25일)
DAHLIA》 (1996년 11월 4일)
X JAPAN》 (예정)

9.2. 싱글


'''넘버링 '''
'''발매일'''
'''타이틀'''
'''판매량'''
'''비고'''
'''수록 앨범'''
인디
1985.06.15
I'LL KILL YOU
-

VANISHING VISION
인디
1986.04.10
オルガスム
-

BLUE BLOOD
1
1989.09.01

313,000장
메이저 데뷔 싱글
2
1989.12.01
ENDLESS RAIN
365,000장

3
1990.04.21
WEEK END
298,000장

4
1991.09.11
Silent Jealousy
284,000장

Jealousy
5
1991.10.25
Standing Sex / Joker
261,000장

6
1991.12.01
Say Anything
538,000장

7
1993.11.10
Tears
837,000장

DAHLIA
8
1994.07.10
Rusty Nail
752,000장

9
1995.08.01
Longing 〜跡切れたmelody〜
476,000장

10
1995.12.11
Longing 〜切望の夜〜
172,000장

11
1996.02.26
DAHLIA
413,000장

12
1996.07.08
Forever Love
510,000장

13
1996.08.26
CRUCIFY MY LOVE
290,000장

14
1996.11.18
SCARS
100,000장

15
1997.12.18
Forever Love(Last Mix))
163,000장

16
1998.03.18
THE LAST SONG
92,000장

X JAPAN
17
2008.01.23
I.V.
-[99]

수록 앨범 미정
18
2011.06.08
Scarlet Love Song -BUDDHA MIX-
-

수록 앨범 미정
19
2011.06.28
Jade
-

X JAPAN
20
2015.11.06
BORN TO BE FREE
-


9.3. 라이브 앨범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 (1995년 1월 1일 발매)
《LIVE LIVE LIVE TOKYO DOME 1993-1996》 (1997년 10월 15일)
《Live Live Live Extra》 (1997년 11월 5일)
《LIVE IN HOKKAIDO 1995.12.4 BOOTLEG》 (1998년 1월 21일)[100]
《ART OF LIFE LIVE》 (1998년 3월 18일)
《The Last Live》 (2001년 5월 30일)

9.4. 컬렉션 앨범


《X SINGLES》 (1993년 11월 21일)
《B.O.X ~Best Of X~》 (1996년 3월 21일)
《BALLAD COLLECTION》 (1997년 12월 19일)
《Singles ~Atlantic Years~》 (1997년 12월 25일)
《Star Box》 (1999년 1월 30일)
《PERFECT BEST》 (1999년 2월 24일)
《X JAPAN BEST ~FAN'S SELECTION~》 (2001년 12월 19일)
《THE WORLD ~X JAPAN 初の全世界ベスト~》(2014년 6월 17일)

9.5. 리마스터 앨범


《BLUE BLOOD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Jealousy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9.6. 사운드 트랙 앨범


《We Are X》 (2017년 3월 3일)

10. 라이브 콘서트 목록




[1] 2010년까지는 TOSHI라는 명의를 사용했으나 이후 개명. 참고로 Toshl의 마지막 알파벳은 대문자 I가 아니라 소문자 L이다.[2] 밴드 활동으로는 대문자를 쓰지만, 솔로 활동으로는 hide라는 소문자를 쓴다.[3] 비주얼 계로 불리는 일본 음악 특유의 문화 중 하나로, X JAPAN 말고도 BOØWY, BUCK-TICK, D'ERLANGER, COLOR가 비주얼 록 발생에 기여하였다지만 사실상 히데의 시각적 면모가 기원이다.[4] X JAPAN의 앨범 판매량에 대해선 이래저래 말이 많은데, 일본레코드협회(약칭 RIAJ) 인증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음반은 메이저 2집 <Jealousy>와 싱글모음집 <X SINGLES>가 있다.# 메이저 1집인 <BLUE BLOOD> 역시 누적 판매량 기준으로 밀리언을 달성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과거 90년대 한국에서 X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다가 00년대 이후 그 거품이 걷히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동안 많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때 보면 전성기 때도 음반 판매량이 겨우 백만장을 한두 번 정도 넘긴 밴드가 무슨 일본을 대표하는 밴드냐는 식으로 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면 메탈 음악을 표방하는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판매량을 기록한 게 맞다. 메탈 팬덤 사이에서 X 보다 음악적으로 더 높게 평가받고, 실제로 음악적 커리어가 대단한 LOUDNESSANTHEM, VOW WOW 등 일본 메탈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레전드 메탈 밴드들도 달성 못한 게 밀리언 셀러다.[5] 1992년 1월의 도쿄 돔 3 Days 라이브 뿐만 아니라 1991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던 첫 필름 기그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수와 동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바이올런스 인 젤러시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수까지 전부 다 합산하면 근 1년간 동원한 관중의 수가 거의 3~40만명에 이른다. 물론 이것 역시도 일본 대중음악계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엄청 대단하다 볼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메탈 밴드로서는 독보적인 기록이라는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6] 1992년 12월 31일 도쿄 돔 공연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그 팝의 황제였고,1998년 12월 31일부터는 킨키키즈, J-FRIENDS 등 쟈니스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7] 일부 국내 네티즌들은 X는 거품이고 라우드니스가 일본 현지에서 훨씬 유명하고 대단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상술했듯 대중적 인지도는 X가 훨씬 높다. LOUDNESS야 일본 메탈계의 레전드이지만 X가 라우드니스보다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X는 대중적인 멜로디 구사와 매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메탈을 어필했고, 이런 대중적 행보 때문에 오히려 메탈씬에서는 그 음악성이 평가절하됐던 밴드였다. 누누이 강조했듯 메탈 음악의 인기는 일본 역시 제한적이다. 흡사 아이돌 가수 같은 인기를 누린 전성기 때 X는 메탈 밴드의 테두리에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게 맞다.[8] 일본 대중음악 역사상 메탈 뮤지션 가운데 X JAPAN보다 음악성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밴드들이 있을진 몰라도, 대중적인 인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는 밴드는 '''없다'''. 밴드들의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서 그렇지 일본 역시 헤비메탈의 인기는 상당히 제한적이기에 성공한 메탈 뮤지션들조차 메탈 팬들의 생각만큼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 인디 밴드들은 물론이거니 어느 정도 메이저에 진입에 성공한 밴드들조차 금전적 수익이 그리 많진 않아 궁핍한 생활을 하는 뮤지션도 많다. 단적인 예로, 일본 헤비메탈의 전설이라는 ANTHEM의 보컬 사카모토 에이조가 비활동기 때는 수많은 알바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고, 또 90년대 일본 하드록&메탈을 논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언급되는 실력파 밴드 SIAM SHADE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연주력에 있어선 X JAPAN보다 더 뛰어났고 음악성에 있어서도 X JAPAN에 전혀 뒤질게 없으며, 또 메탈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X JAPAN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소프트한 멜로디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론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 해 멤버들이 공사장 알바를 뛰는 경우도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메탈이란 장르 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인기와 부를 누린 X JAPAN이 후배 메탈 밴드들의 롤모델이 되고 우상이 되는건 당연할 법 하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듯, 뮤지션들 역시 오매불망 바라는 건 음악적 성취 이전에 '사회적인 성공'이다.[9] 다만 SIAM SHADE가 상업적인 성공을 못이뤘던 것에는 몇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X JAPAN의 경우 충격적인 비주얼 패션과 초밥집 라이브같은 각종 어그로를 끌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지만 SIAM SHADE는 딱히 특출난 비주얼을 선보이지 않았다. 두번째로 X JAPAN은 헤비메탈에 '''클래식'''과 '''발라드'''가 섞여서 거친 메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부드러운 클래식에 이끌려 X JAPAN의 팬으로 만들었던 반면 SIAM SHADE는 반주가 거의 메탈이고 발라드가 거의 없다. 세번째로는 보컬의 음색이다. X JAPAN 보컬 TOSHI는 기본적인 음색이 '''발라드에 어울릴 정도로 부드럽다.''' 초창기에는 성대를 일부러 긁어 락커 이미지를 선보였지만 점점 목에 부담이 심해져 스크래치를 줄여 본래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돌아온 것에 가깝다. 즉 태생부터 발라더에 가까웠기에 대중들이 토시의 음색에 이끌려 X JAPAN을 선호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10] 다만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를 찢은 밴드였다고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11] 이미 고인이 된 HIDETAIJI 마저도 X JAPAN 멤버들은 그 상징성을 감안하여 정식 멤버로 인정하고 있다.[12] 1987년 밴드 X의 5인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X를 거쳐갔던 멤버들은 정확한 가입시기 및 탈퇴시기를 알 수가 없어 그 당시에 개최되었던 각 공연별 연주자 기록을 참고로 하여 임의로 표를 작성하였다.[13]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별도 계약을 거쳐 끝내 YOSHIKI로부터 탈퇴 의사까지 종용받은 TAIJI가 1992년 1월, 도쿄 돔에서의 무대를 끝으로 X를 떠난 이래 해당 파트는 쭉 공석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었다.[14] 재결성 이후 1998년 5월 2일 의문사한 HIDE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SUGIZO가 참여했지만 당시 SUGIZO는 X JAPAN의 세션 멤버로 고용되었다.[15] 한국어로 '임 가수'(...)[16] 두 사람은 스미레구미(제비꽃 반)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을 엮는 단어로 '스미레구미'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17] 특히 타이지히데 팬덤이 강한 한국에서의 평가가 매우 박한 편이다.[18] 다만 ToshI가 감당 가능한 거의 한계에 가까운 음정을 내도록 구성했고, 그에 따라 재결성 이후의 라이브에서는 음정이 떨어진 ToshI가 과거의 곡들을 소화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다.[19] 수차례의 멤버 교체가 있었고, HIDETAIJI뿐만 과거 동료들, 친가족과의 죽음에 의한 이별을 겪으면서 영화 WE ARE X에서 YOSHIKI가 앞으로의 음악성에 관하여 발언하였다.[20] 해외 유수의 드럼 테크니션들은 확실히 격렬한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비트가 흔들리지 않는 연주자들이 많다. 당장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도 균일하지 못한 BPM 때문에 비판받는다.[21] 대표적으로 DIR EN GREY 의 Shinya.[22] 요시키 본인의 프로젝트인 VIOLET U.K.의 신보 발매 연기와 재결성 X JAPAN의 신보 발매 연기를 합산하면 그 총합이 무려 15년 이상. 특히나 2015년에는 연초부터 내일이라도 당장 앨범을 내겠다는 듯 분위기를 잔뜩 띄워 놓고서는 “올해 안에 반드시 앨범을 내겠습니다”라던 말이 “올해에는 앨범이 나오리라 생각한다”라고 말이 바뀌더니 약속의 때가 되자 보란듯이 앨범의 발매일을 또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미뤄버렸다. 그리고 2016년에는 멤버 파타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활동 자체를 잠정적으로 중단해 버렸고, 2017년에도 6월 30일에는 꼭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본인의 디스크 악화로 또 연기. 2018년엔 이야기가 쏙 들어가버렸다.[23] 2010년까지는 TOSHI라는 명의를 사용했으나 이후 개명. 참고로 Toshl의 마지막 알파벳은 대문자 I가 아니라 소문자 L이다.[24] 4살 때 유치원에서 같은 스미레구미(제비꽃반)에 속한 것이 인연이 되었는데, 요시키와 토시를 묶어 스미레구미라고 부르는 것을 밀고 있는 듯.[25] 여담이지만, 이 당시 요시키는 교내에서 안좋은 소문이 자자해, 토시의 부모님은 그와 친해지지 말라면서 '그가 너의 인생을 망칠 것이다.' 라고 했다고. 그러나 오히려 X가 잘되고 나서 이 부모라는 작자들이 토시의 돈과 유명세를 빌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팬들에게 토시의 어린시절 사진을 돈받고 파는 일까지 해서, 상처받은 토시가 사이비 종교에 가입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We Are X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과 명예로 인하여 온 가족이 무너졌다고 했다.[26] 사실 그 전부터 멤버들과의 사이가 이전같지 않다는 징조는 있었다. 1996년 멤버들이 모두 출연한 라디오에서 '이 곡에 대해 설명을 좀 해달라' 라는 질문에 대놓고 '그 곡의 가사는 요시키가 쓴 것이다. 난 요시키의 보컬 머신일 뿐이니 요시키에게 물어봐라' 라고 대놓고 얘기한다든가... 멤버들이 토시의 결혼사실을 기사로 알게 됐다든가... 당시 미국에 있던 히데는 일본에 돌아가면 결혼축하 파티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일본에 가서 만나자마자 토시가 밴드 탈퇴 문제를 얘기했다고 한다.[27] 뮤지컬 출연을 멤버들에게 알렸을 때 유일하게 히데가 만류했다고 한다. 기존의 그룹 이미지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는데 만약 그때 토시가 히데의 말을 따랐다면...[28] 심지어 X-JAPAN의 마지막 콘서트날, 히데의 장례식 당일 오전에도 심한 저주와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29] 발라드 곡을 부른 예로서는 이 영상을 볼 것.[30] 길었던 공백으로 말미암아 쇠퇴된 기량과는 반대로 목에 가해지던 부담 역시도 줄어 있었던 바 목의 상태 자체는 매우 좋아져 한순간이나마 질러대는 고음의 음역대나 파워만큼은 87~88 인디 시절이나 앨범 젤러시의 발매 직후였던 1991년, 토시 본인의 최전성기 시절과도 견줄 만한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31]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면이 없지는 않은 것이 2008년 재결성 이후 201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저음부쪽에서의 문제는 여전히 개선이 잘 되어지지가 않고 있고 고음부쪽에 있어서는 현재 밀고 있는 세트 리스트의 주요 곡들 중에서는 ENDLESS RAIN, Silent Jealousy, 紅, Forever Love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곡들은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가 가능하며 ART OF LIFE는 목 상태에 따라 완창이 가능할 때가 있고 불가능할 때가 있는 정도이지만 X의 경우 만큼은 부르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최근에 들어서는 썩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32] 만약 토시를 대신한 보컬리스트로 락커만 찾아다녔다면 당연하게도 팬들의 외면을 받을수 밖에 없다. X japan의 노래 스타일은 다른 메탈밴드에 비해 멜로디가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거기다 성대결절을 겪은 후의 토시 음색은 오히려 발라드에 더 어울리는데다 요시키가 만든 후기 메탈곡들(Rusty Nail, Dahlia,Jade 등)도 발라드 성향이 매우 짙다. 그러므로 거친 샤우팅을 구사하는 락커보다는 MC.the Max의 이수나 KCM같은 고음역대 발라더를 찾는게 더 현명할 것이다.[33] 장장 12년에 걸친 세뇌와 착취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 한화 100억원 이상에 달하는 금전의 손실(당시 토시는 이 재산 피해로 인하여 2009년에 파산 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X JAPAN Toshl의 이름을 빌어 사이비 종교의 광고탑으로서 활동하며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양산하는데 일조했던 명백한 과오와 그로 인한 명예의 실추 등.[34] 비슷한 연령대의 메탈 보컬들인 니이하라 미노루, 오노 마사토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35] 2008년 두 번째 내한 때 한국의 불우이웃에게 공연 수익금을 또 기부#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Toshl가 한국에 상당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36] 한정 수량밖에 생산이 안돼서 가격이 엄청 비싼 1959년Gibson Les Paul 커스텀 모델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히데도 하나 갖고 있다.[37] 달리아 레코딩 당시의 험악한 녹음실 분위기 속에서도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혼자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38] 다만 발라드곡에서는 주로 고음부를 담당한다.[39] 참고로 어떤 드러머는 4/4 기본박자를 한치 오차도 없는 칼박으로 유수의 명문음대를 입학했다는 악기계의 전설이 있다.[40] 두 사람이 가장 취약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부분 중 하나가 X의 솔로 부분으로, 이 부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음 하나 안 나가는 클린으로 넘긴 예가 거의 없었는데 1992년 도쿄 돔 라이브를 비롯한 X 시절은 좀 나은 편이었으나(이마저도 일단 실수 없이 연주를 하는 것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았고 실상 Stab Me In The Back이나 SADISTIC DESIRE에서처럼 매끄러운 연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달리아 투어 시기에 이르러서는 히데나 파타나 매 라이브마다 거진 음 하나씩은 꼭 나가기가 일쑤가 되어 히데가 클린일 경우 파타가 미스, 파타가 클린일 경우 히데가 미스 아니면 아예 둘 다 미스, 늘 이런 식이 되었다.[41] 개인 음악 작업, 연예 활동.[42] 비슷한 시기에 함께 한국에 라이센스 발매된 음반인 스기조의 SOUNDTRACK 앨범이나 X의 BEST OF X 앨범 등은 일본어 가사라는 이유로 연주곡을 제외하면 당시 곡들이 모두 잘렸다.[43] 실제 히데는 기타와 베이스 이외에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많이 보이며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타이지는 기타와 베이스 모두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44] X의 악곡에서 베이스가 비교적 쉽다고 기술되어있으나, 실제 X의 악곡에서 베이스 파트는 어려운 편이다. 기본적으로 X의 악곡이 빠른 템포의 메탈이고, 긴 러닝 타임 동안 리듬을 유지하면서 중간 중간 멜로디컬한 베이스 라인을 넣어주어야 하기에 난이도가 상당한 편이다. 물론 X JAPAN 체제로 재편되면서, 베이스 파트의 존재감이 줄어들고 기본적인 리듬 파트라는 베이스 파트 본연의 역할을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난이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부분이다. Drain 이나 Scars 같은 악곡에선 인트로의 베이스 파트가 돋보인다.[45] 물론 극히 일부 구간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라고는해도 Silent Jealousy에서의 솔로 파트라든지 X에서의 솔로 파트 연주분들과 같은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 그러나 단시간 안에 모든 곡을 익혀냈고 많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코딩했다고 한다.[46] 대표적으로 1994년의 白い夜에서의 紅. YOSHIKI가 폭주하자 HEATH는 당황하여 YOSHIKI만 바라본다.[47] 히데와 요시키는 후배 밴드를 육성하면서 친분을 나눴고, 이후 요시키는 X JAPAN 재결합 직전 각트의 제안으로 스기조, 미야비와 함께 S.K.I.N을 결성해 함께하였다. 스킨은 미국에서 단 한번의 공연을 마치고 X JAPAN 재결합을 계기로 해산하였다. kiss the sky와 beneath the skin이란 곡은 S.K.I.N 시절 스기조가 작곡하였다.[48] 밴드 활동으로는 대문자를 쓰지만, 솔로 활동으로는 hide라는 소문자를 쓴다.[49] 음악적으로 핵중의 핵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요시키 개인의 성격이 어땠든 밴드에서 최중요 멤버는 메인 송라이터이기 때문. 대중들이 X JAPAN 하면 떠올리는 것은 요시키가 작곡한 발라드와 스피디 넘버이지 히데의 곡이 아니다. 히데의 곡들은 요시키 노래 위주의 앨범에 일관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로 들어가는 경우기 때문에 사이드킥(?)이 맞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리프 메이킹이나 편곡도 작곡 못지 않게 중요한 분야긴 하지만 극단적으로 설명한다면 작곡된 것이 없으면 편곡할 일도 없고 리프를 만들 수도 없다. 이 문서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본인의 생전 성격이나 밴드에서의 위치도 딱 그 정도의 2인자. 물론 비주얼이나 인간관계면의 핵이긴 했다.[50] 히데가 살아있었을 당시 히데의 의상이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부분 히데가 작업한 것이다.[51] 반대로 타이지는 요시키가 타이지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경력을 들먹이며 기타리스트로 포지션을 바꿀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베이시스트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가입 초기부터 요시키가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밴드를 탈퇴했다가 히데가 베이스 자리를 양보하고 "우리가 작심하고 같이 힘을 합치면 밴드는 반드시 전설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여 밴드에 재가입하게 된다.[52]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가 X JAPAN의 비주얼은 모두 히데가 담당했다는 것인데 오히려 X 초기 인디 시절에는 히데가 음악적 부분을 담당했고 타이지가 X의 화장이나 의상 같은 비주얼을 담당했다. 이것은 타이지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공식 팬클럽이라는 Weekend에도 히데의 작품이라고 적어 놓는 오류를 범했다.[53] Vanishing Vision 당시 인터뷰를 보면, 히데가 X에 가입한 후 요시키에게 '이 곡 왜 연주 안 해? 나 되게 좋아했는데'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계기로 타이지와 히데가 설득하고, 그들이 멜로디 라인과 드럼 솔로 부분을 제외한 부분을 편곡하기까지 한다. 결국 타이지와 히데의 판단은 적중해서 紅는 그들의 대표곡이 된다.[54] Rose of Pain의 태핑 부분은 굉장하다. 아쉽게도 본인 시그네쳐인 크리미널 베이스를 사용 후에는 프렛 수가 부족하여, 솔로를 듣지 못한다.[55] Jealousy 앨범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에서 그의 클래식 기타 실력을 잠시 맛볼 수 있다.[56] 본래 요시키는 Endless Rain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했으나 타이지가 '그럼 다른 멤버들은 네가 피아노 칠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그리고 메탈 밴드가 기타 솔로도 없는 발라드 곡을 연주하냐'라면서 락 발라드 형식으로 편곡하여 앨범에 들어가게 된다.[57] 당시 타이지는 결혼 비용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였다고 한다.[58] 애니메이션 전체 시리즈 오프닝, DX에서는 오프닝/엔딩.[59] 인디즈 앨범 부클릿에는 슬래시 메탈이라고 써있기도...[60] X에 흔히 비교되는 유럽 밴드 중 하나이자 멜로딕 스피드 메탈의 태동기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Helloween의 초기 음악을 들어보면, 스래쉬 메탈을 연상시키는 강한 리프와 빠른 비트 위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기타 솔로가 가미된 형태로, 동시대 X는 이와 상당히 비슷한 음악적 접근을 보이고 있었다.[61] 실제로 일본에서 웬만큼 인기가 있는 메탈밴드는 거의 이장르에 포진되어있다. 갈네리우스,라이트브링거 등등.. 이는 현재 진행형.[62] 이 경우는 트리뷰트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보컬 요나스가 팬 서비스로 한 곡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63] 리뷰란에 네티즌들이 직접 리뷰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 이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리뷰를 통째로 지워버리기도 한다.[64] 대선배답게 공석에서 라이브를 갖게 되면 관객은 물론 같이 공연하러 온 후배 밴드들마저 소리지르게 된다.[65] 라이브 GIG 영상을 보면, 수 만명이 넘게 들어찬 도쿄 돔에서 모든 이들이 뛰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66] 재밌는 건, 오다 카즈마사와 요시키 둘 다 업계 전문가들에게 받는 고평가나 후배 뮤지션들에 미친 영향력에 비해 대중적으론 그렇게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코무로 테츠야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일본 음악계의 다른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을 놔두고 두 사람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67] 이 시절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해외 스타는 주로 영미권이나 홍콩 영화 배우였다.[68] 사실 인터넷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표절이란 개념도 희박하던 20세기엔 다수의 한국 작곡가들이 그냥 좋다 싶으면 일본 음악 막 갖다쓰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건 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까진 아예 일본 음악 자체를 리메이크로 정식 구매를 못하다보니 일단 번안곡처럼 받아 쓰되 저작권료는 일본에 주는 편법적인 경우도 있었다.[69] 이 소문이 퍼진 첫 시발점은 당시 언론사들의 오보였다고. X JAPAN의 누적 판매량을 BLUE BLOOD 한 앨범의 판매량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있었다.[70] 당시 일본 문화를 몰래 즐기던 층들 중엔 중고등학생이 상당수였는데, 아무래도 속주, 고음, 현란한 테크닉 이런걸 더 크게 받아들이기 쉬운 세대들이다 보니 현란한 속주를 선보이던 요시키가 많이 과대평가 받은 측면이 있다. (드럼 실력에서 속주는 한 부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고음병이 워낙 임팩트가 컸지만 비슷한 시기 속주병도 만만찮았다.[71] SAY ANYTHING과 ENDLESS RAIN은 일본 가라오케 내에서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곡들이다.[72] 엠씨더맥스의 개명 전 이름인 문차일드 당시 요시키한테 편지도 보내는 등 친분을 쌓았다.[73] 진작에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서태지의 '태지'가 X JAPAN의 베이시스트 TAIJI에서 비롯됐다는 루머가 끊이지 않는 것은 서태지가 X JAPAN의 팬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태지의 선호는 히데에 방점이 찍힌다.[74] 힐링캠프 출연 당시 신화의 김동완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만은 한동안 '''X JAPAN에 꽂혀서 파퓰러 댄스&팝 가수인 신화에게 X JAPAN 같은 파격적인 비주얼을 강요(...)했다'''고 한다.# 결과는 인기가 폭락하고 욕만 잔뜩 먹었다고... 사실 댄스 가수를 비주얼 록 가수처럼 치장하는 시도는 이미 H.O.T. 때 선보였다. 김동완 말처럼 이수만이 이땐 정말로 X JAPAN을 좋아했던 모양이다.[75] 신화 초기에 X JAPAN에 꽂힌 소속사 대표 이수만의 강요로 본의 아니게 X JAPAN의 비주얼을 따라 하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실제로도 X JAPAN을 좋아한다. 자신의 단독 콘서트 때 <Tears>라든지 <Say Anything> 같은 X JAPAN의 히트곡들을 빠지지 않고 꼭 부른다.#[76] 개인적인 친분도 상당해서 요시키에게 <그대 뿐이어서> 곡을 받아 5집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공연도 종종 함께 했다. 다만 요시키와 조성모의 콜라보레이션은 그리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나름대로 뛰어난 보컬리스트인 조성모에게 토시 창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통에 죽도 밥도 아니게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77] X JAPAN 극팬으로 자신이 감독을 맡은 영화 <여친소> OST로 X JAPAN의 최대 히트곡인 <Tears>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굉장히 이례적으로 멜로디만이 아닌 일본어 가사 보컬을 그대로 쓸 만큼 극팬이다. 한국 영화에서 일본 노래의 멜로디가 OST로 쓰이는 경우야 그리 드물지 않지만 일본어 노래가 그대로 깔리는 케이스는 지금까지도 드물다. 요시키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해 공개적으로 "예술가로서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78] 영화 <여친소>에 캐스팅 되면서 X JAPAN 극팬인 곽재용 감독에게 소개 받고 꽂혔다는 일화를 언급했다.[79] 실제 일본의 위상에 비해 이들의 해외 인지도는 처참한 수준이다.[80] 한때 3천만 장까지 부풀려져 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어디 네티즌의 근거없는 부풀리기가 아니라 3천만 장을 팔았다는 발언 자체는 롤링 스톤지나 영화 We are X 등 여러 매체에서 언급된 바가 있으니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정도로만 알아두자.[81] 단 1989년에 실질적으로 일본 대중들에게 히트했던 곡은 걸즈 록 밴드 PRINCESS PRINCESSDiamonds였다.[82] 후에 요시키가 사들였다가 다시 매각했다.[83] ART OF LIFE의 락 부분 편곡은 타이지가 마지막으로 편곡을 담당한 곡이다.[84] 그렇다고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한 록밴드가 X가 최초라는 말은 아니다. 도쿄돔을 개장했던 해인 1988년에는 BOØWY가 4월 4, 5일에 이틀 연속으로 해체 라이브를 개최했었고, 다음 해인 1989년에는 BUCK-TICK이 라이브를 했었다.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했었던 아티스트들 목록 참고.[85] 단 한 소절 때문이라고 한다.[86] 초기부터 94년까지 세운 머리.[87] 사실 사이비 종교단체인 Home Of Heart의 압력에 의해서였다.[88] 맴버들에게 S.K.I.N을 재결할 의향이 있느냐라고 언론에서 맴버 각자에게 물은 적이 있지만 그들은 "요시키의 선택에 달렸다."라고밖에 답하지 않았고. 사실상 요시키는 삶의 전부였던 토시를 되찾았으니 X JAPAN 이외의 다른 그룹을 도맡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89] 애초부터 악곡의 수가 턱 없이 적어 베스트 앨범을 가지고는 별다른 재미를 못 보고 있었는 바 이 점에 대해서는 BALLAD COLLECTION 53만 장, PERFECT BEST 25만 장을 제외한 거진 10만 장 이하를 밑도는 부진한 판매량이 증명한다.[90] 2018년에는 태풍으로 인해 전국의 모든 라이브 콘서트가 취소된 적이 있음에도 X JAPAN은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물론 관객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방송을 통한 일명 "무관객 라이브"를 진행하였다.[91] 우리나라 드림 콘서트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돌 팬클럽 단위로 관람.[92] 기존에 발표한 앨범 미수록곡들까지 다 들어가면 실질적인 신곡은 5곡인 것이 함정.[93] X JAPAN feat.HYDE를 YOSHIKI feat.HYDE로 수정하였다. 참고로 이 곡엔 SUGIZO도 참여하였다.[94] YOSHIKI가 11살 무렵 아버지의 자살, 4살부터의 친구이자 X JAPAN을 함께 결성한 Toshl의 사이비 종교에 의한 세뇌, 기타리스트인 HIDE의 X JAPAN 해산의 약 5개월 후의 사망, 베이시스트의 TAIJI의 X JAPAN 탈퇴와 18년 만의 무대에서의 재회 후 약 11달 뒤 사망, 요시키의 건강문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95] La venus는 X JAPAN의 신 앨범에 실리게 될 곡으로, 라이브에서 밴드 버전과 어쿠스틱 버전으로 나뉘어 불린다. 밴드 버전은 웸블리 아레나와 紅に染まった夜 라이브에서 불렀다.[96] ART OF LIFE는 29분짜리 곡이지만, 이 사운드 트랙에서는 후렴구 4분 39초만 따로 녹음하였다.[97] 이 앨범에서는 일본어 버전으로 등록되었다. 실제로 요시키가 영어 버전으로 편곡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바도 있고, 사운드 트랙에 등록된 Without You의 경우는 Unplugged(전자음을 쓰지 않은) 버전이기 때문에 편곡과 함께 이후 앨범으로 발매될 확률이 크다.[98] 영국 락 & 메탈 싱글 차트와 영국 락 & 메탈 앨범 차트이다. 영국에 의해 오피셜 차트 컴퍼니에서 가장 인기있는 총 4개의 싱글과 앨범을 결정하며(OCC) 락과 헤비메탈 장르를 다룬다.[99] iTunes 한정 발매[100] 부틀렉은 휴대용 녹음기로 공연 음원을 도청하는 불법 행위이지만 요시키는 이를 역이용해서 앨범으로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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