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이름'''
마츠모토 히데토
(まつ(もと(ひで(
'''출생'''
1964년 12월 13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사망'''
1998년 5월 2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33세)
'''국적'''
일본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신체'''
170cm | 50kg | AB형
'''가족'''
부모님, 2남 중 첫째[1]
'''활동 년도'''
1981년 ~ 1998년
'''활동 그룹'''
요코스카 샤벨 타이거 (1981 ~ 1986)
X JAPAN (1986 ~ 1997)
MxAxSxS (1993)
zilch (1996 ~ 1998)
hide with spread beaver (1998)
'''레이블'''
MCA Victor (1993 ~ 1997)
Universal Victor (1997)
Universal J (2000)
'''개인 소속사'''
Excess 24 (1993 ~ 1997)
Headwax Organization (1997 ~ 현재)
'''링크'''

'''서명'''
[image][2]
1. 개요
2. 상세
3. 사망
4. 기타
5. 음반 목록
5.1. 싱글
5.2. 정규 앨범
5.3. 정규 앨범 (Zilch)
5.4. 라이브 앨범
5.5. 트리뷰트 및 커버

[clearfix]

1. 개요



히데의 LA 일상 모습, 사망하기 몇시간 전의 스튜디오 라이브와 토크 그리고 장례식 현장을 담아놓은 다큐멘터리
(hIS iNVINCIBLE dELUGE eVIDENCE, 1998)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오셨습니다. 마츠모토 히데토 씨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3]

'''잘 가, 붉은 머리의 외계인. 네가 만든 로켓에 사랑을 담아, 아디오스... 아디오스, 아미고… 아디오스.(さらば、赤い髪のエイリアン。君の作ったロケットに、愛を込めて、アディオース… アディオース、アミーゴ… アディオース。)'''[4]

일본록 음악 뮤지션. '''일본 대중음악계에 일대 충격을 준 X JAPAN의 기타리스트이자, 솔로로는 시대를 앞서나간 팝 엔터테이너, 비주얼계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뮤지션'''이다. 기타리스트 그리고 솔로 활동 시에는 보컬, '''그리고 X JAPAN의 정신적 리더.'''[5] hide는 하이드가 아니라 히데라고 읽는다. X JAPAN의 멤버로서 활동할 때는 대문자로 HIDE,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할 때는 소문자인 hide로 표기한다.[6]
2000년대 이후 일본 록밴드들, 특히 비주얼계에 절대적인 큰 영향을 끼친[7]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애초에 X JAPAN의 캐치프레이즈였던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이라는 문구는 히데가 썼다. 이 문구에서 비주얼계라는 표현 자체가 유래되었다. 워낙 비주얼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보니 "'''비주얼계는 히데에서 시작해서 히데에서 끝났다'''"[8]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의 죽음은 일본 음악계에 현재까지도 충격적 사건으로 남아있으며 사망 소식이 전해진지 불과 1주일만에 3명의 팬들이 그를 따라서 자살해버렸고 60여 명이 입원을 하였으며 200여 명에 달하는 팬들이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5월 7일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는 무려 5만여 명에 달하는 팬들이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서 그를 추모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닐 슈트라우스(Neil Strauss)는 이 현상을 보고 "지난 몇주간 일본의 대중문화는 히데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모든 것이었다."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일본 록의 거대한 아이콘인 X JAPAN의 해체와 히데의 죽음은 신드롬처럼 록 씬에 전방위적 반향을 일으켰고 1998년, 아무로 나미에, 드림스 컴 트루, 쿠보타 토시노부 등에 의해 주춤했던 제이 록이 중흥기를 맞게하는 결과를 낳는다. X JAPAN 내에서도 큰 존재감과 인기, 솔로 활동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남겼기에, 딱히 비주얼계 후배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존재[9]이며 공공연하게 인정받은 따뜻한 성품도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덕목 중 하나이다.
히데는 공격적이고 감성적인 프레이즈를 잘 주조해냈던 기타리스트였다. 그의 실력이 정상급 기타리스트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10]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실력을 개척한 뮤지션임은 부정할 수 없다. 보컬 실력은 발성적으로 훌륭한 보컬은 아니다.[11] 그러나 자신의 넓은 장르 스펙트럼[12]에 알맞는 소화력은 높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 장난스러운 팝 펑크에선 특유의 코맹맹이 음색으로, 인더스트리얼과 하드코어 등에선 음색을 거칠게 잘 갈아내며, 차분한 발라드에서도 담백하게 자신의 음색을 변용할 줄 아는 보컬이었다.
스피드 메탈 밴드 기타리스트로서의 뛰어난 역량과 이후 이어진 폭 넓은 스펙트럼[13]의 솔로 커리어,[14] 향후 X를 넘어 일본을 대표할 만한 아티스트로서 기대를 모았고 그에 부응하듯 왕성한 활동과 창작욕을 보였지만[15] 뜻하지 않게 활동을 마감한다. 사망 이후 꾸준한 트리뷰트, 굿즈 출시, 영화 발매, 관련 공연, 홀로그램 무대, 미공개 곡 발표 등 다양한 방면으로 [16]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으며 2018년에는 사망 20주기 메모리얼 이벤트를 성대하게 열면서 그의 위대한 음악과 팬들과의 사랑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묘비에는 아직도 꽃이 마를 일이 없다고 한다.

2. 상세


중학교 2학년 시절 친구가 들려준 미국 하드락 밴드 키스의 라이브 앨범 'Alive!(1975년작)'을 듣고 락에 빠지게 되어 AC/DC, 티렉스, 더 클래시, 데이빗 보위, 아이언 메이든, VOW WOW 등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의 음악에 큰 충격을 받아 음악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모토 쿄지의 광팬으로써 많은 영향을 받았다. 패션, 기타 모델 등.
어렸을 때부터 비만으로 인해 많은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히데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히데의 친구는 바로 프라모델... 이후 밴드 활동을 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체중 감량을 감행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살이 확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달에 25kg정도..) 이후 할머니로부터 깁슨 레스폴 디럭스 모델을 선물받고 기타를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매우 고가품이었던 이 기타는 할머니가 미군 기지에서 열린 중고 장터에서 발견하고 구입하여 선물한 것이다.[17] 이 보기 힘든 고급 기타 때문에 친구들도 기타 구경을 하자며 놀러올 정도였다고. 하지만 밴드 활동 중 분실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18]
1981년 고등학생 시절 같이 연주하던 친구들과 모여서 결성한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YOKOSUKA SAVER TIGER)[19]로 데뷔, 1987년 이후 요시키의 권유로 X에 가입했다. 이때 히데가 음악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려던 것을 요시키가 붙잡아서 가입했다는 말이 있으나 요시키의 밴드 가입 권유는 사실이지만 음악을 접는다는 것은 루머이다. 일본에서 발매하는 잡지 중에 하나인 롹킨에프 1998년 11월호에서 이 사벨 타이거에서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히데는 단지 해당 밴드를 그만두는 것이었지 음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다른 밴드를 알아보는 중이었다는 내용이다. 이후 일화로는 히데가 사벨 타이거 활동 종료 이후에도 사벨 타이거 시절을 회상할 때 "언제나 가슴을 펼 수 있고 자랑스러운 밴드였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니 '히데가 음악을 접으려는 것을 요시키가 설득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이다.'라고 여지껏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빈약한 물증을 토대로 섣불리 판단을 한 '가설'이 사실로 알려진 악질적인 예가 되고 만다. 어디까지나 이 인터뷰는 히데가 아닌 샤벨 타이거의 멤버의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시키가 설득한것이 아닌 요시키와 히데가 원래 알던 사이였는데 밴드를 그만둔다고 요시키한테 말했을때 요시키가 x리허설에 오지않겠냐고 해 구경왔다가 뒷풀이때 x에 들어오겠다고 선언해 들어왔다고 한다
X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We are X>에서 '요시키를 처음 만났을 때 음악을 관두려던 참이었다.', '그때 X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미용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라는 히데의 인터뷰가 공개된다. 무엇보다도 사벨 타이거 멤버가 아닌 히데 본인의 증언이라는 점과 목소리와 영상이 직접 녹화된 인터뷰라는 점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인터뷰보다도 가장 신빙성 있다. 이것이 설령 히데가 요시키를 띄워주기 위한 하나의 립서비스에 불과한 이야기이며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라고 할지라도 여지껏 밝혀진 인터뷰 자료로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하며 이 사실을 완벽하게 반박할 새로운 인터뷰 소스를 구하는 건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듯 싶다. 이러한 모든 논란 자체가 여지껏 굉장히 문제적이었던 요시키의 행적으로 인해 생산된 것이지만 없는 걸 만들거나 있는 걸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디즈 시절부터 도쿄를 활동 중심으로 하던 인디 밴드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던 모양이다. LUNA SEA 같은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인기 밴드들의 증언에 의하면 눈에 띄는 실력, 외모, 카리스마에 의외로 자상한 성격으로 많은 밴드들의 큰 형 노릇을 했다고. 곧잘 후배 밴드들의 라이브를 보러가서 공연 후 격려의 말을 해주곤 했었던 모양. 이때 친분을 쌓은 밴드들이 많은데 LUNA SEA가 대표적이다.
X에 가입 후 타이지와 함께 X의 음악적 방향성을 잡고 있었으나 리더이자 드러머인 요시키의 독단과 횡포, 금전 문제[20] 등이 과해지면서 요시키는 평소 자신과 트러블이 있었던 타이지를 해고하고 이런 요시키의 독단에 화가 난 히데는 X JAPAN[21] 내에서 방관자 모드로 돌아서서 솔로 활동에 치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 담았던 엑스에 큰 애정이 있었던 듯. 근래에 토시가 TV 프로그램 '킨즈마 파란만장 스페셜'에서 직접 고백하길 토시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멤버들을 모아놓고 밴드를 탈퇴한다고 선언했을 때 요시키는 단 한 마디의 질문이나 설득도 없이 '''알았다'''라는 하는 식으로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지만,[22] 히데는 끝까지 토시를 붙잡고 설득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토시가 왜 밴드를 빠지려고 하는지 차근차근 듣고 토시가 탈퇴하지 않고 그 종교를 믿을 수는 없는지 여러모로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서 토시는 '그때 밴드를 깨지 않았다면 히데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죄책감도 아직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조력하는 것이 기조였던 그가 1997년에 해산 소식을 들었을 때 롯본기에서 속상함에 만취한 채 "'''우리가 1회용 장기말이냐!!!'''"라고 거칠게 울분을 토했던 사례가 있고 해산에 대한 입장을 묻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X JAPAN의 간판을 부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등 당시 밴드 해산에 대한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을 정도.
93년 X JAPAN에서의 이름 표기인 HIDE 대신 hide라는 표기의 이름으로 싱글 'Eyes Love You'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94년에는 첫 앨범 'Hide Your Face'[23]를 발매했고 96년에는 두번째 솔로 앨범인 'PSYENCE'를 발매하게 된다. 이 후 히데는 미국 진출을 목표로 미국에서 영국인 멤버 두 명과 인더스트리얼 락 그룹 지르치(zilch)를 결성하여 앨범 레코딩을 하고 솔로 투어시 세션을 맡던 멤버 7명[24]과 hide with spread beaver라는 펑크(punk)적 색채가 강한 정식 팀을 만들어 세번째 앨범 녹음을 하고 지르치 앨범 녹음에 싱글 활동도 병행했으나 안타깝게도 1998년 히데의 갑작스런 사고사로 인하여 앨범은 완성되지 못했다. 미완의 작품들은 스프레드 비버 멤버들이 모여 완성시켜 'JA, ZOO'라는 타이틀로 발매했고 얼마 후에 레코딩과 마스터링을 미리마친 zilch의 '3, 2, 1' 앨범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큰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뛰어난 앨범이다. 또한 당시 예정되었던 마릴린 맨슨과의 합동공연도 무산되었다.[25][26]
특히 멜로디를 잘 살린 기타 리프를 짤 줄 알았으며 프로듀싱 및 작/편곡의 센스가 뛰어났고 여러 장르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는 데에도 매우 능했다. 그의 솔로 넘버들과 연주는 당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보컬역시 자신의 기량안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일수 있는 작곡을 했으며 그의 주 장르였던 인더스트리얼류 록음악안에서는 흠잡을 점이 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홈페이지에 연재하던 다이어리에 언급하던 음악들을 보면 나인 인치 네일스, 마릴린 맨슨, 제인스 어딕션, 스톤 템플 파일럿츠 등 그 당시 잘 나가던 밴드들부터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 빅비트 팀들과 브릿팝, 오블리비언 더스트나 Cocco 같은 일본 락까지 정말 다양하다. 이는 뮤지션으로서 다른 아티스트들의 창작을 보고 배우며 공부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자신이 이루어낸 오만함에 갇혀 음악적인 공부를 하지 않는 뮤지션들은 정말 많다. 사족으로 사망하기 며칠 전 산 음반이 블러의 리믹스 앨범인 'Bustin'+Dronin'
'
. 이 헤비메탈,인더스트리얼,사이키델릭,당시 막 부흥하고 있던 뉴메탈 하드코어. 대중적인 팝락등 다양한 장르안에서 수준급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재능은 당시 일본음악계뿐만 아니라 서구뮤지션들을 따져보더라도 흔치 않은 재능이다.
히데의 편곡 능력은 X JAPAN의 앨범들에서도 알 수 있다. 메이져 진출 후 발매한 Blue Blood 부터 Jealousy 의 경우 타이지와 히데가 주로 편곡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타이지가 해고당한 이후의 편곡은 대부분 히데의 몫이였다. 타이지만큼의 헤비메탈과 하드락에 대한 조예는 없었지만 가지고 있는 음악적 역량으로 메탈밴드로서 구심점 역할은 충분히 해주었다. 이는 히데 사후 X JAPAN의 재결성후 요시키가 전권을 가지고 만들어낸 곡들을 들어봐도 알수 있다. 멜로디는 여전히 훌륭하지만 전체적인 곡 구성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가사를 보면 확실히 히데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이미지가 많다. 괴짜에다 사이키델릭한 면을 강조하는 면이 뮤직비디오 등에서도 나온다. 원래는 미용사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X의 헤어 스타일을 도맡아 했다는 소리가 있지만 사실 '''밴드 초창기의 멤버 비주얼 담당은 타이지였다. 그 유명한 노발(빗자루 머리)의 창시자도 타이지다.'''[27]
또한 패션 센스나 디자인 센스도 굉장히 뛰어난 걸로 알려졌다. 집안이 대대로 미용실을 했었고 가수 데뷔 전까지 미용사로 일했다. X JAPAN의 'BLUE BLOOD' 활동 당시 입업던 의상은 자신의 할머니의 옷을 개조한 것.[28] 이때 사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금발 앞에 섞여있는 빨간색 머리는 파타가 모히칸 헤어를 하면서 밀었던 부분을 자기 머리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기타에 도장된 디자인은 모두 히데 본인의 작품이다. 또한 픽업이나 내부 회로도 직접 고쳐서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3. 사망



'''타계 12시간 전 촬영된 마지막 스튜디오 라이브[29]
(1998/05/01)'''
1998년 5월 2일, 도쿄도 미나토구 아자부의 자택에서 급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일본 사회에도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사망 직전쯤까지만 해도 멀쩡히 TV에 나와서 지르치(Zilch)의 앨범 홍보[30]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사망했으니, 충격적일 수 밖에.[31]당시 인터뷰
1차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인은 자살이었다.[32] 자살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일부 팬들이 히데를 따라 자살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1m라는 어중간한 높이로 인해 얘기가 많았는데 동료인 타이지나 YOKOSUKA SAVER TIGER 시절의 동료 REM 등의 이야기로는 평소 기타 연주 후 어깨결림을 자주 호소하던 히데는 수건을 목과 어깨에 감아 찜질하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도 텔레비전 출연 등 스케줄 소화 도중 피로가 쌓여 수건이 문고리에 걸린 채 질식사한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외 당일에 다른 사람들과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는 등 전혀 자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증언도 있다. 동생의 증언 중에 술에 취해서 목이 걸린 상태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었다.
그 후 부검을 통해 일본 경시청에서 새롭게 내놓은 사인은 기도 폐쇄로 인한 질식사. 애초에 수건이든 뭐가 됐든 신체 외부에서 압력을 받아 목 졸려 사망한 것이 아닌 기도가 내부에서 부풀어올라 목이 막혀 사망했다는 부검 결과가 나왔고, 사망 당일 응급차에 실려가면서 현장에 동석한 구조대원이 기관지절개술을 시행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이 분분할 뿐 사망 자체는 거의 질식사로 결론이 난 분위기다. 그나마 근거 있는 추측은 히데가 원래 심각한 저혈압 환자였고[33] 그 전날 밤에 밴드 멤버들과 엄청난 과음을 했으며, 갑자기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던 중 쇼크로 인한 기도 폐쇄와 질식이 왔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이다. 그래서 1차 공식 발표 이 후에는 자살에서 사고사로 점점 기울여졌다.

'''히데의 장례식 보도 장면'''
팬 5만 명이 모여 긴 행렬로 히데의 마지막을 보내주는 모습. 히데의 사망으로 인해 몇몇 팬의 자살 소동이 뉴스에 보도 되었다.[34]

4. 기타


  • 집안이 대대로 미용실을 해왔던 집안이고 어릴 적부터 배워왔던 기술로 히데 본인도 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가수 데뷔 전까지 견습 미용사로도 일했었다. 훗날 자신이 가수로 데뷔를 하지 않았다면 미용사로 살고 있을 것이라 회고했다.
  • 스스로를 "그랜마보이"라고 칭할 정도로 가족들 중에선 유독 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첫 악기(레스폴 디럭스)도 할머니가 사준 선물이었다고 하고, 처음 밴드를 시작하면서 염색을 한 것에도 부모님은 모두 싫어해서 반대를 하였으나, 유독 할머니가 자신의 편이 되어 줬다. 위의 상세항목에도 나와 있듯 할머니의 옷을 개조해 무대의상으로 쓴 것 등 팬들 사이에서도 히데와 할머니의 관계는 익히 알려져 있다.
  • 타이지 자서전에 의하면 X 초기에는 히데가 합주 중에 실수한 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타이지와 음악성이 잘 맞아서[35] 발라드곡을 연주하는 것을 안 좋아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 타이지가 디멘시아에 재직시절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의 공연을 보고 디멘시아가 발렸다고 생각했다고 하니 상당히 합주연습을 강하게 밀고 나갔던 모양이다.[36]
  • 옛 그룹의 리더인 요시키와 동생 히로시는 세상을 떠난 히데를 열심히 팔아먹으며 돈을 벌었다. 베스트 앨범이나 미공개 트랙을 어설프게 짜깁기한 앨범, 티셔츠는 기본에 히데 커피잔, 히데 카레, 히데 콘돔까지 있었다.[37] 게다가 히데 사후 출시된 페르난데스의 히데 시그니처 기타는 성능에 비해 가격이 개념 없기로 유명했을 정도.[38] 단,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hide museum은 요시키가 아닌 히로시를 비롯한 유족들이 철거했다.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초에 3년 한정으로 임시적으로 개관했고, 팬의 강한 요청으로 2년을 더 연장해 2005년 9월 25일 폐관하였다. 상업주의적 면모로 요시키나 마츠모토 히로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한 한국 팬층에선 도의적 책임론을 내세우기도.
  • 히데의 사후에 만들던 중이었던 'Hurry go round'가 프로그래밍으로 완성되어 싱글 발매 되었으며 3번째 솔로 앨범 'Ja Zoo(1998)'도 나왔다. 죽고 난 뒤 1주기를 기념해 트리뷰트 앨범 'hide tribute spirits' 가 나왔는데, 참가 멤버는 호테이 토모야스, LUNA SEA, BUCK-TICK, 키요하루, SIAM SHADE, GLAY 등등. 일본에서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웬만하면 뭉치기 힘든 라인업이 오로지 히데의 추모를 위해 모여줬던 것이니 그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 취미 : 요시키와 술 마시기, 기타 페인팅[39]
  • 좋아하는 음식 : 마일드 세븐 슈퍼라이트[40], 일본주
  • 좋아하는 패션 : 파충류 느낌의 패션
  •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 : 술, 담배를 배운 것[41]
  • 호테이 토모야스와는 1994년에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깊은 친분으로 이어졌다. 그 계기가 Yoshiki의 잘못이 명백한 행동으로 인한 호테이와 요시키의 충돌이였다는 점만 뺀다면… 이 사건 이후에 히데가 호테이의 숙소로 찾아와서 대신 사과를 한 것이 계기였다. 이때부터 히데의 사망까지 알고 지낸 시간이 겨우 5년 뿐이였음에도 호테이 토모야스가 자신의 콘서트에 히데를 게스트로 초청하고 히데는 자신의 베이시스트 멤버를 호테이에게 소개해주는 등 깊이 있는 교류를 가졌고 히데의 사후 호테이가 맨 위에 나온 그 나레이션이 들어간 'Rocket Dive'가 실린 추모 앨범에 참여했다.
  • 히데는 일본 음악계에서 대표적으로 마음씨 좋고 인성도 좋은 걸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엑스터시 레코드에서 가장 출세한 LUNA SEAGLAY는 히데가 설득해서 계약시켰고, 평소에도 라이브하우스에서 실력과 재능이 출중한데 기회가 없어서 묻혀가는 후배들을 발굴하였는데 그 중 가장 성공한 것이 ZEPPET STORE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LUNA SEA를 발굴하였다고 적혀있었으나, LUNA SEA는 인디 앨범발매 전부터 이미 TV 정도는 나올 정도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밴드였고 인디 생활을 2년밖에 안 해서 히데가 발굴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LUNA SEA의 멤버 전원이 히데와 각별한 사이라 유닛 활동이나 피쳐링 등을 한 적도 있다. 히데의 인간성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선배들에게는 겸손을, 후배들에게는 섬세하게 정을 베풀어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 이런 일화도 있었다. 멤버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 밤 요시키와 함께 잠들었는데, 아침에 요시키가 하도 안 일어나길래 직접 깨우고, 멤버들과 만나서 그 얘기를 해주니 멤버들이 매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는 것을 깨우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요시키가 순순히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성격이 괴팍한 요시키가 유일하게 히데에겐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 얼마나 히데가 주변사람들에게 인상이 좋은지 알 수 있는 부분.
  • 이런 모습은 팬 대상으로도 보여줬는데 "팬들에겐 콘서트 티켓 값도 비싼데 굿즈 값마저 비싸면 안된다"라는 신념으로 히데 자신의 솔로 콘서트장에서 파는 상품들의 가격을 5천 엔 이상으로 받지 말아달라고 지시를 했고 실제로 히데의 생전 콘서트 내내 상품의 가격이 이렇게 책정되었다.
  • 그 유명한 서태지가 그의 광팬으로 추측된다.[42] 실제로 6집 <Tai Ji>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부분이 몇 개 보이며, 2002 ETPFEST때 직접 그를 섭외하면서 덕질의 최고봉에 다다랐다.[43] 물론 고인이 된 히데는 영상으로 밖에 볼수가 없었고 SPREAD BEAVER 멤버들이 공연을 펼쳤지만... 하여튼 이는 히데의 첫 해외 공연으로 남게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들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던 히데의 꿈을 이루어준 서태지에게 최고의 선물인 고인의 메인기타였던 옐로우 하트를 하사했다. 일종의 바톤 터치의 의미라고도 하고, 박물관에 있느니 좋은 음악인에게 연주되길 히데도 바랄 것이라는 말과 함께.[44] 히데의 부모님은 리셉션장에서 서태지를 만났을때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요시키가 LUNATIC FEST에서 진짜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면서[45] 돌려준게 확인되었다. 사실 서태지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스프레드 비버 멤버나 엑스 맴버들이 가지고 있는게 훨씬 어울릴거라 생각한 듯. 아님 나중에 히데 가족과 주변인들의 히데 팔아먹기를 눈치채거나. 그 후에도 서태지는 INA와 히데의 절친한 후배인 루나씨의 베이시스트 J랑 7집때 협업을 하는등 히데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 팬에 대한 사랑으로 많이 알려진 것이 불치병 소녀 키시 마유코(貴志真由子)와의 에피소드다.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마유코의 편지를 받고 DAHLIA 투어의 일환으로 개최된 1995년 도쿄돔에서의 연말 콘서트 때 공연이 끝난 뒤 만남의 자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1996년에는 마유코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일정을 캔슬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정도. 또 이 소녀를 위해 만든 곡이 'Misery'이다. 마유코는 선천성 체세증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유형의 백혈병에 걸려있는데 이런 난치병 환자들을 돕는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소개로 히데와 만나게 되었다.[46]Make a wish 재단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마지막 선물'이라는 책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발매되어있다. 마유코와의 에피소드는 어느 네티즌에 의해 만화로 그려져서 좀 더 많이 알려졌다.[47] 실화의 주인공인 마유코는 2009년 10월 2일에 히데를 따라 천국으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48] 하지만 일본에서 보도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국내에 만화로 그린 것에서는 상당한 왜곡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히데가 마유코를 대한 모습은 보도 상으로 알려진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유명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선행이다. 여기에 미화나 없는 내용을 끼워넣게 되면 인물의 행적을 오히려 욕 보이는 행동이 된다.
  • 또한 꽤나 짓궂은 면모도 있었다고 한다. 히데가 멤버들에게 카레를 해줄 테니 집에오라고 초대를 했었는데, 멤버들이 모두 술먹고 뻗어있느라, 히데의 집에 가질못했고, 결국 멤버들은 일주일 동안 히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아야했다고.
  • 상당한 헤비스모커로 항상 담배를 달고 다녔다. 실제로 히데 사진을 검색해보면 담배를 들고 있거나 피우는 사진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즐겨 피우던 담배는 마일드 세븐 슈퍼 라이트. 자기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바로 술과 담배를 배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담배는 끊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고 귀여워했다. 히데 본인도 자식을 매우 갖고 싶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19살 때부터 아이가 갖고 싶었다고...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한다. 그 이유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자신은 어떤 일도 못하고 아이랑만 지낼 거 같아서."
  • hide with Spread Beaver의 멤버였던 INA가 히데에 관련된 놀랄 만한 발표가 있을거라 밝힌 뒤 2014년 12월 10일 히데가 생전에 쓴 곡을 보컬로이드로 재현한 히데의 마지막 신곡 '子ギャル(코갸루)'와 함께 기존 곡 15곡이 보너스 트랙으로 포함된 동명의 앨범이 발매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일부 팬들은 이것이 상술이느니 마느니, 또 우려먹느냐는 평가도 하지만…
  • 애초에 스테인버그사의 보컬로이드 프로그램 프로토 타입 초안이 나왔을 시기인 히데 사망 직후 무렵부터 INA 및 hide with spread beaver 멤버들이 유가족이나 요시키 측과는 상관 없이 따로 죽은 리더를 위한 헌정의 느낌으로 생전의 히데 목소리 데이터를 하나하나 수집하여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고 처음에는 실패 가능성이 워낙 높아서[49] 음원 발매는커녕 공개하는 것조차도 꿈도 못 꿨었다고 한다.
  • 생전에 일본 국내 메이커인 페르난데스의 기타를 애용해서 시그네춰 모델이 나와있으며[50] 이 시그네춰 모델로 많은 기타 유저들이 페르난데스의 기타의 질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 사망항목에도 적혀있듯이 벌레를 싫어한다. 그리고 한창 솔로 활동 중이던 90년대 중반 때부터 인터넷을 시작하여 개인홈페이지를 만들고 게시판에서 직접 팬들의 코멘트를 보는 등 팬들과의 소통을 넓히기도 했다.
  • <악마로소이다>라는 만화의 남 주인공의 모델이 히데이다. 평범한 순정만화. 작가가 그의 팬이기 때문에 모티프로 삼았다는 말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남자 주인공의 머리색은 빨간색.
[image]
  • 애니메이션 오소마츠 상의 등장인물인 마츠노 이치마츠가 이 사람의 팬인 듯하다. 작중 직접적으로 언급한 대사는 없지만, 저 옷차림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시그네쳐 기타는 누가봐도...
    • 애니가 방영되고 나름 화제가 된 듯하며, 2018년 히데의 20주기를 맞아 공식 굿즈에서 관련 상품을 냈다!!
  • 2017년 11월 20일 여성 래퍼 허니비가 히데의 첫 밴드 SAVER TIGER와 동명인 제목으로 싱글앨범을 발매했다. 실제로 허니비는 히데의 팬이라고 하며, 장르는 힙합이다. #
  • 2018년 9월 8일 X JAPAN의 PATA와 과거 Spread Beaver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Chirolyn등이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엔딩곡으로 히데의 Pink Spider와 Rocket Dive를 불렀다.
  • 홋카이도 투어때 호텔에서 새벽 2시 3시경에 타이지가 아래층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주의를 주려고 내려갔다고 한다. 근데 내려가보니 로비 프론트에서 만취상태의 히데가 프론트 남직원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히데는 갑자기 주먹을 들어 검지와 중지를 들어서 프론트 남직원의 콧구멍에 쑤셔박았고 놀란 타이지는 바로 말리러 갔다. 무슨 원인때문에 그런 일이 난건지는 모른다고 한다.
  • 사망 항목에도 적혀있다시피 상당히 꽤 심각한 저혈압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하게 체중 감량을 하다보니 이로인해 생긴 영향인듯싶다. 이로 인해 체력도 굉장히 안좋은 편이었다고 한다.[51]
  • 인격적으로 훌륭하다 할 정도로 굉장히 착한 사람이지만 의외로 술버릇은 꽤 고약했던 거 같다. 특히 위에 써져있는 홋카이도 투어썰에도 나와있다시피 술만 먹으면 꽤 성질이 사나운듯 싶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다음날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주변인들에게 "어제 나 무슨 짓 했어?"라고 물으며 자신이 벌인 추태에 대해 거듭 사과를 했다고 한다.
  • 또한 패션의 아이콘으로도 통했다. 그의 독특하면서 화려한 컬러 조합의 패션에다가 짙은 화장에 빨간 염색등을 합친 화려한 조합은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세련된 감각으로 평가 받는다. [52]
  • 그가 미용사 일을 하고 있던 시절에 그한테 굉장히 황당한 일이 생겼었는데 그의 단골 손님이었던 야쿠자의 딸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하필이면 그 여자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히데의 본명인 '마츠모토 히데토(松本 秀人) SAVER TIGER' 라는 메모가 있어서 의심을 받게 되었고, 히데는 야쿠자들에 의해 주카이 숲까지 끌려가서 자백을 강요받았지만 계속 모른다고 호소한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고 한다.[53]
  • 늑간 신경통이 있다.[54]
  • hide with spread beaver의 뜻은 꽤 야한의미를 가지고 있다.[55]
  • 잠을 자는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 아니라 침대에 누웠을때 바로 쓰러질 정도로 졸리지 않으면 애초에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56]
  • 팬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래서인지 콘서트에서 파는 굿즈를 5천엔이상으로는 팔지 말라 했다.
팬과 소통을 열심히 한다. 블로그에 자신의 일기를 꾸준히 올리며 팬들에게 다가갔고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5. 음반 목록


본 문단에서는 솔로활동 중 발표된것 만 서술합니다. X JAPAN 시절의 정보는 항목 참조.

5.1. 싱글


  • EYES LOVE YOU (1993년 8월 5일)
  • 50%&50% (1993년 8월 5일)
  • DICE (1994년 1월 21일)
  • TELL ME (1994년 3월 24일)
  • MISERY (1996년 6월 24일)
  • Beauty&Stupid (1996년 8월 12일)
  • Hi-Ho/GOOD BYE (1996년 12월 18일)
  • ROCKET DIVE (1998년 1월 28일) : 일본 애니메이션 의 오프닝으로 차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반응이 별로 안 좋은 건지, 노래가 아깝다, 이건 너무 심했다, hide를 모독하지 말라는 반응이 심심찮게 있다. 예시 그야말로 전형적인 OST는 좋았다의 사례이다.
  • PINK SPIDER (1998년 5월 13일)
  • Ever Free (1998년 5월 27일)
  • HURRY GO ROUND (1998년 10월 21일)
  • TELL ME (2000년 1월 19일)
  • In Motion (2002년 7월 10일)
  • Co Gal (2014년 12월 10일) : 히데 50번째 생일 기념으로 제작된 싱글. 히데가 생전에 녹음했던 미수록 발표곡인데 기존 히데 육성을 빅테이터로 분석한 뒤 복원하는 일종의 보컬로이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참고로 싱글이라기에 보기가 좀 애매한 게, 초회한정판 기준 子 ギャル와 그 데모곡(히데가 살아 생전에 녹음한 거다!)을 빼고도 싱글 타이틀 곡과 2002년에 hide SINGLES ~ Junk Story ~ 에 뒤늦게 수록된 Junk Story까지 총 15곡을 수록한 베스트 앨범 격의 음반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베스트 앨범으로 분류되어 있다.

5.2. 정규 앨범




5.3. 정규 앨범 (Zilch)


  • 3. 2. 1 (1998년 7월 23일)[57]
  • Bastard EYES (1999년 3월 3일)[58]

5.4. 라이브 앨범



5.5. 트리뷰트 및 커버


  • hide tribute spirits (1999년 5월 1일)
  • hide tribute IMPULSE[59] (2018년 6월 6일)

[1] 동생의 이름은 마츠모토 히로시(松本裕士)로 히데 생전 매니저를 담당하였으며, 2020년 현재도 히데의 사무소인 HEADWAX ORGANIZATION의 사장이다.[2] 히데 생전 마지막 싸인이다.[3] zilch 소속으로 낸 앨범 '3, 2, 1' 의 첫 트랙 'Electric cucumber' 의 인트로. 본인의 육성이다.[4] 트리뷰트 앨범 2번 트랙 'ROCKET DIVE'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된 호테이 토모야스의 나레이션.[5] 실제 리더는 요시키지만 맴버간의 유대를 다지고 분위기를 이끌었던 사람은 히데였다. 음악적 지주가 요시키였다면 정신적 지주는 히데였던 셈.[6] 따라서 히데를 이름이라는 이유로 Hide라고 표기하면 안 된다[7] 비주얼계하면 생각나는 무시무시한 화장등은 키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8] 실제로 히데가 사망한 후, 비주얼계의 본래 의미가 퇴색하여 성장 동력이 급감해 '팬덤 장사하는 장르'라는 평가까지 그 위상이 하락했다. 그 예시로 라르크 앙 시엘, GLAY, LUNA SEA 등과 같은 초기 비주얼계 밴드들이 탈 비주얼을 선언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계보를 이으려는 미야비, 각트 등의 후배들이 여전히 왕성한 활동 중이다.[9] 실제로 한국가수들 중에서도 히데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수 존재한다[10] 그러나 의외로 같은 팀의 PATA보다 안정적인 연주력을 갖춘 기타리스트였다. 화려한 외모와 무대 매너 때문에 기타리스트로서 평가절하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11] 이 점은 본인도 인지하여 HIDE YOUR FACE 시절 자신의 보컬 담당을 Vocal이 아니라 Voice로 표기한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Psyence 앨범부턴 자신의 보컬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다채로운 운용법을 익히게 된다. 이는 파타(PATA)의 후일담에서도 잘 언급된 부분.[12] 실제로 그가 시도한 장르만 해도 하드록부터 인더스트리얼, 펑크 등에 걸쳐 매우 넓은 음악적 시도를 하였으며, 팝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 인물이였다.[13] 솔로 활동 시에 보여준 음악들은 한 장르 안에 갇히지 않았다. 대중적인 팝 느낌이 나는 록, 인더스트리얼 록, 펑크 록, 어쿠스틱 넘버를 앨범에 시도하였으며 언뜻 장르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아 조잡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곡들의 질이 너무 좋아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데만큼 다양한 록 장르를 모두다 소화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찾아보기가 어렵다.[14] 오리콘 차트 1위, 정규 앨범 밀리언 셀러 달성 그리고 싱글 밀리언 셀러를 달성. 싱글 밀리언 셀러는 곡이 1~2곡밖에 없는 싱글로 100만 장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정규 앨범만 있을 뿐 여러모로 성공한 솔로 활동이다.[15] 실제로 그가 죽기 며칠전만해도 라이브에 서고 뮤직비디오를 찍는 등 죽기 직전까지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있었다[16] 이에 일부는 시체팔이라며 요시키와 회사를 비난하기도 한다[17] 기타까지 사줄 정도였던 것으로 보면 밴드 활동에 대해 집안 반대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성적인 성격이 어느 정도 고쳐지면서 긍정적으로 본 모양.[18] 생활고로 인하여 처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9] 히데가 X 이전에 소속되어있던 밴드가 SABEL TIGER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SABEL TIGER라는 밴드는 홋카이도의 메탈 밴드로 히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밴드이다. 참고로 히데가 소속되어 있던 SAVER TIGER도 원래는 SABEL TIGER였으나 홋카이도에 자신의 밴드와 동명(同名)의 밴드가 있다는 것을 알고 'B'를 'V'로, L을 R로 바꿨다. 최종적으로 밴드명은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가 되었다.[20] 혼자서 2배를 넘게 받는 인세 등.[21] X가 세계 데뷔를 위해 개명한 밴드명.[22] 나중에 요시키가 밝힌 후일담에서는 오랫동안 알았던 토시의 눈빛이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보여서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23] '얼굴을 숨긴다'라는 뜻과 동시에 히데 자신의 이름의 중의적 표현을 지닌다. 에일리언으로 유명한 H. R. 기거의 작품을 앨범 커버에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커버에 있는 눈은 히데의 눈이다.[24] I.N.A, Kiyoshi, Chirolyn, Kaz, Joe, Die 여기서 Kiyoshi는 솔로 1집 투어 참석 멤버였던 BLIZARD의 마츠카와 토시야가 건강 사정으로 하차하자 2집부터 참석한 멤버이고, Kaz는 hide with spread beaver의 활동이 정해지고 기존 솔로 투어 참석 멤버였던 X JAPANPATA를 대신하여 들어온 멤버이다.[25] 또한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마쳤으나 히데의 사망으로 발매는 커녕 활동조차 못한 'Electric Cucumber'라는 노래도 있다.[26] 히데 사 후에도 리믹스 앨범 Bastard Eyes를 발매하였고, 당시의 곡들을 LUNA SEA의 멤버였던 J를 객원보컬로 삼아 라이브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급조된 활동이 끝난 후로는 새 보컬리스트를 영입하여 새 싱글을 발매하였으나, 밴드의 주축이었던 히데가 사망한 것으로 큰 임팩트가 없던 싱글이었기에 조용히 묻혀버렸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밴드의 베이시스트까지 사망하여 밴드의 활동방향성은 더더욱 잡힐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완전 해산을 하였다.[27] 타이지 자서전 수록 내용.[28] 인도의 여성용 전통의상인 사리.[29] 해당 곡은 doubt라는 곡으로, 과거 1993년 Hide With L7 (Zilch Ver.) 명의로 공개했던 곡이다. 이후 Spread Beaver 활동을 하면서 드럼 앤 베이스, 재즈 요소를 가미한 리믹스를 했는데, 위 영상은 그 리믹스 버전인 "Doubt'97 LEMOMed JELLY MIX".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곡이다.[30] 방송 당시에는 발매되지 않았었다. 히데 사후 발매.[31] 당시 방송에서 웃으면서 "새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자신은 바퀴벌레를 엄청 싫어하는데, 뮤직비디오 연출에서 몸과 얼굴에 벌레를 붙이고 찍어야 했기 때문에 어떤 기분으로 촬영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라는 얘기를 농담으로 하기도 했다. PV의 곡은 'Electric Cucumber'.[32] 자택의 목욕탕에서 수건을 세로로 잘라 양 끝을 묶은 것을 높이 1m 위치에 달려있는 문고리에 걸어 질식사.[33] 언론에도 밝혀졌듯 히데의 저혈압은 상당한 중증이다. 원래 그 정도라면 술, 담배는 입에도 대면 안되는 수준이다.[34] 여담이지만 히데의 장례식에 가던 히데의 후배 2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데샤비에(Deshabillz)의 베이시스트 우츠쿠시이 이비츠(美歪, 향년 21세)와 마데스 그레이르(Madeth gray'll)의 기타리스트 히즈미(歪, 향년 22세).[35] 히데는 장르를 잘 가리지 않지만, 음악생활 초기에는 주로 아메리칸 하드락을 좋아했던 모양으로 LA메탈을 좋아했던 타이지와 잘 맞았던 모양이다.[36] 이는 리치 블랙모어의 특징인데 히데가 그토록 좋아하는 야마모토 쿄지가 리치 블랙모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37] 콘돔은 X JAPAN 시절에도 엑스 명의의 굿즈로 발매된 적이 있다. 그런데 콘돔의 경우는 엑스 시절 때도 그랬고 에이즈 방지를 위한 캠페인 목적으로 발매한 것이기 때문에 히데 본인의 의향도 있었던 물건이다. 엑스 시절에 팔았던 콘돔도 솔로 명의로 팔았던 콘돔도 수익은 에이즈 방지를 위한 기부금으로 돌렸다.[38] 정작 히데 본인은 팬들에게 부담을 준다 싶어 공연 티켓 가격이나 관련 굿즈의 가격도 일정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인물이다.[39] 그의 기타는 거의 대부분이 손수 페인팅한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유명한건 당연 옐로우 하트.[40] 보통 하루에 반갑, 심하면 40개피 줄담배, 레코딩할 때는 3갑도 거뜬히 비웠다.[41] 공교롭게도 hide의 사망 원인 또한 중증 저혈압인 상태에서 술담배를 끊지 않은 것이라는 게 유력하다.[42] 공식적으로 서태지의 히데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후술할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유력해 보이는 것은 맞다.[43] 여담이지만 파타와 히스도 Dope Headz라는 밴드의 멤버로 참석했다. 후기 영상을 보면 서태지와 대화를 나누는 파타를 볼수 있다.[44] 간혹 일부 서태지를 싫어하는 팬들이 실제 기타가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함께 있던 스탭의 후기가 공개되면서 급짜식됐다. 그리고 그냥 페르난데스 시그네쳐 모델이라면 돈 있는대로 있는 서태지한테 굳이 선물을 하겠는가? 악기 구입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서태지인데 말이다. 또 다른 부정적인 의견은 이것이 히데 주변인들의 일종의 마케팅이라는 시선인데. 그 이유 중 큰 것이 히데의 유족들이 히데가 사망한 이후 다방면으로 고인을 돈벌이용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hide museum의 경우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팬클럽의 모금 운동이나 지방 자치단체의 보존 요청 등을 무시하고 철거해버렸을 정도. 이 경우는 그냥 할 말이 없다.[45] 요시키 -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면서) "진짜입니다."[46] 참고로 X JAPAN The last live 영상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엔딩 크레딧에 마유코의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47] 과거에는 네이버 붐에 올려진 것이 링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네이버 붐 서비스가 종료된 관계로 다른 블로그에 올려진 것을 링크.[48] 당초 20살까지 살 수 있으면 기적이라고 진단받았는데 28살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으니 이 또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49] 프로젝트 시작 당시 히데 목소리 데이터 수집과 복원 성공의 가능성은 30%도 채 안 되었다고 한다. 보컬로이드 엔진 V.4.0이 나온 16년만에야 겨우 완성되었으며 그것도 평범한 키보디스트에서부터 일본 락씬내에서 손꼽히는 엔지니어가 된 INA가 거의 10년 넘게 작업에 달라붙어서야 겨우 완성된 것이니까…[50] 원판 모델은 '비씨리치(B.C.Rich)'의 '모킹버드(Mockingbird)'. 깁슨 익스플로러의 변형 기타이다.[51] 실제로 X 초창기때 돈도 없어서 음식을 훔쳐먹는등 꽤나 눈물나는 삶을 살았었는데 어느 날 너무 배고파서 멤버들끼리 같이 레스토랑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음식을 먹고는 돈이 없어서 히데가 곧바로 튀자고 하고 튀지만 히데가 워낙 저질체력이다보니 중간에 타이지가 하는 수 없이 아예 업고(...) 도망쳤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52] 실제로 지디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중 한 명이 바로 히데다.[53] 나중에서야 오해가 풀린 야쿠자들이 집에 데려다 줬다고 한다.[54] 실제로 늑간 신경통 때문에 리허설때는 복대를 차고있다.[55] spread beaver이라는 뜻은 여성의 거기를 벌린이라는 뜻.[56] 아침에 일어날때도 침대에 오래 머무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57] 사실상 히데의 정규 4집으로 여겨진다.[58] 리믹스앨범[59] Hurry Go Round 보컬 Take2가 수록되어 있다. 히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I.N.A가 발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