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시아

 

[image] '''세인트루시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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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시아
Saint Luc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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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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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면적'''
617km²[1]
'''인구'''
183,809명 (2016년 1월 1일 추정)[2]
'''인종구성'''
아프리카계 카리브인 70.3%
흑백혼혈[3] 10.8%
Dougla 10%[4]
백인 카리브인 5.6%
인도계 카리브인 2.2%
카리브족 0.6%
'''공용어'''
영어[5]
'''수도'''
캐스트리스
'''정치체제'''
영연방 왕국,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국왕'''
엘리자베스 2세
'''총독'''
피얼렛 루이지(Pearlette Louisy)
'''총리'''
캐니 앤서니
'''GDP'''
PPP: 21억 1백만 $ (2011년)
명목: 14억 3900만$ (2016년)
'''1인당 GDP'''
8,268$ (2016년)
'''통화'''
동카리브 달러[6]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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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정치
4. 언어
5. 외교
5.1. 대한민국과의 관계
5.2. 북한과의 관계
5.3. 대만과의 관계
5.4. 영국과의 관계
5.5. 프랑스와의 관계
5.6. 미국과의 관계
5.7. 캐나다와의 관계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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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Lucia

1. 개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 동부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수도인구 7만명 (2013년) 의 캐스트리스. 영연방에 소속되어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고 있다.

2. 역사



기원전 1000년과 500년 사이에, 최초의 거주자들이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했다고 보이나, 관련 유물이 적다고 한다. 이후 남아메리카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 기원후 2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했으며, 카리브족은 기원후 800년경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1500년대에 들어, 세인트루시아는 바티칸의 지도에 실리기 시작했으며, 1550년대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해적이 세인트루시아를 찾아와 캠프를 건설했다.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인트루시아의 동남부, 지금의 Vieux Fort 지역에 네덜란드인들이 캠프를 건설했고, 1605년에는 영국인 67명이 세인트루시아에 정착을 시도했으나 '''카리브인의 습격'''과 '''질병'''으로 인해 '''5주'''만에 '''19명'''만 생존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세인트루시아에서 도망쳤다. 1635년 들어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639년 에는 영국이 다시 정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카리브인들에 의해 '''전멸'''당했다. 몇번의 실패 끝에, 1644년에 프랑스 원정대와 당시 마르티니크의 주지사가 정착지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1664년에는 당시 세인트 키츠 네비스 주지사의 아들인 토마스 워너가 세인트루시아를 영국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세인트루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1,000명의 군사를 세인트루시아에 투입했지만, '''질병'''이 돌아 2년만에 '''89명'''만 남고 다 사망했다. 프랑스는 1666년에 프랑스 서인도 회사를 통해서 세인트루시아를 되찾았고, 세인트루시아를 1674년 마르티니크의 관리하에 프랑스 식민지로 정식 편입했다.
1700년대 동안, 세인트루시아는 설탕 산업을 통해 번영했다. 그러나 프랑스영국은 아직도 세인트루시아를 포기하지 않았고, 둘의 다툼은 17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722년에는 한 영국인이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하여 정착지를 설립했지만, 영국군에게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도망쳐 나왔다. 7년전쟁 동안에 영국이 잠시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1763년에 파리 조약이 맺어져 다시 프랑스로 지배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지배권을 다시 얻은 프랑스는 1765년부터 세인트루시아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세인트루시아의 주지사는 1794년, 세인트루시아의 노예제를 폐지한다. 그러나 1795년 설탕의 안정적 생산을 원하던 영국인 지주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은 1803년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세인트루시아의 노예제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섬을 되찾기 위해 2만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대는 3분의 2가 사망했다.
1804년에는 아이티 출신의 지도자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서반구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공화국이 잘 굴러가지 않았는지 영국이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을 도로 획득했다. 영국은 지배권을 다시 획득한 이후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폐지 후에도 한주의 4분의 3을 전 주인 아래에서 일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리카계 주민의 세가 유럽계 주민의 세보다 커졌고, 이를 바탕으로 1838년에 완전한 자유를 달성하게 된다. 같은 해부터 세인트루시아는 영국 소속 바베이도스의 관리를 받았으나, 1885년부터는 그레나다의 관리를 받게 된다.
프랑스영국의 세인트루시아를 얻기 위한 싸움은 처절해서, 세인트루시아가 프랑스마르티니크로부터 관리를 받게된 1674년부터 영국이 완전히 지배권을 얻은 1814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는 지배권을 6회 얻었고, 영국은 지배권을 4회 얻었으며, 양국 합의 하에 중립 지역으로 결정된 적도 2번이나 있었다.
20세기 동안 세인트루시아의 자치권은 점점 증가해 갔다. 1924년의 헌법에서는 세인트루시아에게 자치정부를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고, 1951년에는 세인트루시아의 모든 성인에게 보편적 선거권이 주어졌으며, 1958년에는 서인도 제도 연방에 가입하였으나, 연방은 편협한 민족주의, 연방정부의 결점, 부적절한 연방의 구성, 대중 지지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1962년에 해산되었다. 이후 영국 지배 하의 자치정부 상태를 유지하다가 1979년 2월 22일 독립을 달성했다.

3. 정치


세인트루시아는 입헌군주제하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의회민주주의,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의회에서 내각과, 국무총리를 선출한다. 또한, 영국에서 보내오는 총독도 존재한다. 또한, 세인트루시아의 의회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17명의 5년 임기 하원의원들과 총독이 임명한 11명의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최근에 치루어진 선거2016년 6월 6일에 치루어진 선거로, 전체 유권자 중 53.45%가 투표했으며, 연합 노동자당이 세인트루시아 노동당을 누르고 제 1당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전체 득표수의 44.09%를 득표한 세인트루시아 노동당[7]이 6석을 얻어 제2당으로 떨어졌고, 연합 노동자당은 54.76%를 득표하여 11석을 얻어 제1당으로, 집권에 성공했다..[8] 이외에도 루시아 사람들의 운동 (0.18%) 과 무소속 후보 (0.96%) 도 선거에 출마했으나, 의석을 얻진 못했다.

4. 언어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주민들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프랑스어 크리올을 사용한다.[9] 세인트루시아에서 쓰이는 프랑스어 크레올은 세인트루시아 크레올로 불린다.

5. 외교



5.1.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은 독립연도인 1979년에 대사급 관계로 수교하였으며 현재 주 트리니다드토바고 대한민국 대사관이 겸임한다. 1988년에 열렸던 서울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1993년에 열렸던 대전엑스포에 참가하였다.

5.2.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1979년에 수교하였다가 1988년 대한항공기 테러사건으로 단교하였다가 1990년에 재수교하였다.

5.3. 대만과의 관계



세인트루시아는 대만과 수교했다. 현재에도 대만은 세인트루시아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5.4. 영국과의 관계



19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 독립했다. 그리고 영연방에 가입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영어도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5.5. 프랑스와의 관계



영국의 지배를 받기 전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세인트루시아는 프랑스어 크레올이 쓰이고 프랑코포니에 가입되어 있다.

5.6. 미국과의 관계


미국과는 독립 이후에 수교했다. 그리고 양국은 독립 이후에 교류, 협력이 많아지고 있다. 세인트루시아는 미국과는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다.

5.7. 캐나다와의 관계


미국과 마찬가지로 캐나다와도 수교했다. 양국은 영국프랑스의 지배를 받은적이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양국은 영연방, 프랑코포니에도 가입되어 있다.

6. 이야깃거리


총 인구가 20만이 채 될까말까 한 작은 섬나라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둘이나 보유한 나라다. 한 명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데릭 월콧, 다른 한명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아서 루이스. 덕분에 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자수 1위 국가가 되었다. 경제학-과학부문 노벨상도 마찬가지.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이 나라가 카리브 해에 위치한 개인농장으로 등장한다.
리오 퍼디난드안톤 퍼디난드 형제의 아버지가 이 나라 출신이다.
한국과 큰 인연은 없는 나라지만, 2014년 염수정 대주교가 추기경 서임을 받을 때 이 나라 출신 케빈 에드워드 펠릭스 캐스트리스 대주교가 함께 추기경 서임을 받아 언론에 함께 언급되었다.
세인트루시아 경찰에서는 선거로 인하여 2016년 6월 6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의 주류 판매를 금했다. 금지 기간동안 주류를 판매한 사람에게는 500 동 카리브 달러의 벌금 또는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내리겠다고 발표하였다.
카리브에 특히나 많은 성인(聖人)의 명칭에서 유래한 나라들 중, 유일하게 성녀(시라쿠사의 산타 루치아)이다. 그래서 관광청의 캐치프레이즈(Let her inspire you, 당신을 격려해줄 그녀)에도 '그녀'를 강조한다.

[1] 서울특별시의 면적보다 약간 크고, 경상북도 성주군과 비슷하다.[2] 이 쪽은 구리시의 인구와 엇비슷한 수준이다.[3] 흑인과 백인의 혼혈.[4] 아프리카인과 인도인의 혼혈.[5] 그 외 세인트루시아 크레올,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된다.[6] 동 카리브 국가기구 정회원국 7개국과 준회원국 1개국에서 쓰이는 화폐로, 고정환율제가 적용되어 1 미국 달러 당 2.70 동 카리브 달러로 페그되어있다. 2016년 3월 초 환율 기준 1 동 카리브 달러는 448원이다.[7] 중도 우파 사회민주주의 정당. 1949년에 창당되었다.[8] 보수주의 정당. 2011년 선거에서 세인트루시아 노동당이 승리하기 이전까지 여당이었다.[9] 그러다보니 영연방프랑코포니에 가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