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 R. 톨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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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작가, 언어학자. 하이 판타지를 정립했다고 평가받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하며, 호빗, 실마릴리온 등 그가 만든 관련 작품과 방대한 설정은 이후의 판타지 소설·게임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의 팬덤은 톨키니스트라고 불리며 일부 열성 톨키니스트들에게는 그는 거의 신앙 수준이다. 하이 판타지 장르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으로 그는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3] 라고 불린다.
환상문학계 뿐만 아니라 영문학계에서도 높이 인정받는 대문호이며 2008년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 더 타임스에선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6위로 그를 선정했고[4]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영어 작가 6위로 뽑혔다.[5]
2. 생애
2.1. 어린 시절
톨킨의 조상은 대부분 기능공이었다. 가족의 기원은 나폴레옹 시대 독일의 작센 왕국으로 작센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18세기 경부터 영국에 거주하였다고 하며 이주 후 바로 정통 영어를 쓰는 영국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톨킨은 Tollkiehn의 영국식 이름으로 영어로는 덜 킨(Dull Keen), 즉 모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톨킨의 할아버지 존과 할머니 서필드는 침례교인으로 버밍햄시 중앙에 가게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서필드 가족은 한 빌딩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고조부인 윌리엄 서필드는 1810년부터 서점과 문방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증조부인 존 서필드는 포목업과 메리아스 직조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892년 톨킨은 현재 남아프리카의 남쪽 오렌지 프리 주의 불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 아서 류엘 톨킨과 어머니 메이블 서필드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는 불룸폰테인 지사에 승진 발령나면서 영국을 떠나게 된다. 톨킨은 1894년에 태어난 남동생을 두고 있다. 어린 시절 톨킨의 일화 중 하나는 정원에서 바붐 거미에게 물린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톨킨의 집에서 일하던 사환이 톨킨을 자신의 촌락으로 데려갔다가 다음날 집으로 보내준 적이 있다. 데려갔던 이유는 톨킨이 예쁘다고 생각하여 자랑하려 했다고 한다. 한편 톨킨의 부친은 톨킨이 3살 되던 해에 류머티즘 열로 사망했는데, 당시 모친은 동생과 함께 영국에 장기방문 중이었다. 가장을 잃은 톨킨 가족의 당장 생활을 걱정하게 된 모친은 어린 톨킨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내게 된다. 그후 그들은 우스터셔 마을로 이주하게 된다. 이 시골 마을은 후에 톨킨의 작품에 큰 영감을 주게 되었다.
어머니 메이블은 직접 두 아들을 직접 가르쳤는데 톨킨은 가족들에게 섬세한 학생이었다. 톨킨이 식물을 좋아한다고 판단한 모친은 그에게 식물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린 톨킨은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언어였다. 그의 모친은 톨킨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라틴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는데 4살이 되던 해에 글을 읽기 시작했고 곧 자연스럽게 글을 썼다고 한다. 모친은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주었다. 어린 톨킨은 "보물섬"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싫어했으나 루이스 케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심란해 하면서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조지 맥도널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후에 톨킨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톨킨은 버밍햄의 킹 에드워드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 정렬식때 버킹검 궁전 게이트에 붙일 포스트를 함께 작업하게 된다. 상당히 공부를 잘해 전교에서 인정받았던 학생이었다. 그후 톨킨은 세인트 필립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이 당시 어머니 메이블은 1900년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며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서 재정적 지원이 끊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메이블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에 톨킨의 나이는 12살이었다. 톨킨은 모친의 사망은 믿음 때문에 순교 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가톨릭 신앙이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메이블이 죽기전에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버밍햄 오라타리의 프란시스 제이버어 모간 신부를 지목한다. 톨킨은 버밍햄 Edabaston 지역에서 살게 된다. 그는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 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다크 타워를 상상 해내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로는 버밍햄 박물관에 무료로 전시하였던 프리-라파엘리티 브라더후드와 에드워드 번-존스의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고 한다.
1911년 톨킨은 킹 에드우드 스쿨에서 롭 길슨, 제프리 스미스, 크리스토퍼 와이즈맨 3명의 친구를 만나 자신들만의 비밀 조직 the T.C.B.S.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 거창한 조직보다는 친분을 다지는 모임으로, 이 조직의 이름은 Tea Club and Barrovian Society에서 따왔다고 한다. 학교 근처의 바로우 스토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던 그들이 생각해낸 이름이다. 비밀 조직원들은 졸업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914년 런던의 와이즈맨 집에서 다시 뭉치게 된다. 톨킨에게 이 모임은 그가 시를 쓰는데 중대한 계기가 된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로 휴가를 가게 되는데 이 여행은 빌보가 미스티 마운틴으로 여정에 직접적인 영향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해 10월 톨킨은 옥스포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게 된다. 톨킨은 고전을 공부하게 되지만 전공을 바꾸어 영어언어학을 공부하고 1915년 졸업을 하게 된다. 톨킨과 친구 힐라리가 같은 기숙사에 입숙했던 해, 톨킨은 16세가 되던해에 자신보다 3살 연상의 이디스 메리 브렛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후견인이었던 모건 신부는 톨킨이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사귀는 것에 놀랐고 또 이지스를 톨킨의 학업을 방해하는 문제거리로 보고 21살이 되기전까지 그들의 만남을 금지하게 된다. 톨킨은 결국 이 조건에 따르게 되며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톨킨은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 받아주고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쓰게 된다. 톨킨이 자신을 잊은 줄만 알았던 이지스는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지만 결국 이디스는 톨킨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이디스는 톨킨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둘은 워익에 소재한 세인트 마리 이마큘레이트 성당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2.2. 전쟁 참전
톨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자원 입대한 참전 군인이다. 톨킨은 영국 육군에 지원하고 소위로 임관한다. 톨킨은 케녹 체이스에서 13 보충 대대에서 11개월의 훈련을 받게 된다. 훈련을 마친 톨킨은 영국 파견부대 11대대 소속으로 프랑스에 투입되었다. 당시 글을 보면
입대한 해인 1916년에는 개전 당일 5만 8천명의 인명 손실을 낸, 1차대전 당시 가장 참혹했던 전투인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 당시 톨킨은 소위 계급의 대대 통신장교였는데 비위생적인 참호의 환경 때문에 참호열(Trench Fever)에 시달려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렇다고 농땡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자그마치 '''18개월을 병마에 시달렸다.''' 꾀병으로도 장기 요양이 가능할 정도로 톨킨에게 막강한 보호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못 내보낸 것 맞다."많은 신참 장교들이 죽어나갔다. 아내와 생이별을 하고...
이것은 죽음 그 자체 같았다."
하지만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으나 톨킨이 영국으로 후송되자마자 '''대대는 전멸했다'''. 게다가 톨킨으로선 이게 단순히 전우들을 잃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게 보통이었다. 즉, 톨킨이 병으로 후송되었다가 돌아와 보니 '''같은 부대에 입대한 동네 친구, 동네의 아는 형님, 동네의 아는 동생, 동네의 아는 아저씨'''들이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된 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톨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친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끔찍한 경험이 있다. 클럽 좋아하는 영국인답게 네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문학 클럽이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이 전사했다. 두개의 탑에서 나온 죽음의 늪 부분은 이때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모습이 담겨있다고 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톨킨은 병원과 수비대를 요가며 전쟁의 남은 기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아내 이디스는 그들의 첫아들 존 프란시스 루엘 톨킨을 임신하게 된다. 톨킨은 병 요양을 위해 스태퍼드셔 그레이트 헤이우드의 시골집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요양중에 "더 북 오브 로스트 테일스/The Book of Lost Tales"를 쓰게 된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해서 병이 재발하였지만 건강은 호전되어 국내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고 중위로 진급했다. 톨킨이 킹스톤에 배치되었을 때 톨킨과 이디스가 만개한 독미나리 숲을 거닐고 있을 때 이디스는 톨킨을 위해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녀의 귀여운 행동으로 톨킨을 위로한 에피소드로 인하여 베렌과 루시엔의 설정이 소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현대인들이 판타지 문학을 통해 현실도피를 하며 정서적 휴식을 취하듯, 젊은 톨킨도 이때부터 굉장한 집념으로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장편 대작 판타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2.3. 학자, 작가 활동
톨킨이 전역하고 민간인으로 처음으로 맡았던 일은 옥스포드 영어 사전의 편찬 작업이었다. 톨킨은 주로 독일 기원의 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W부터 작업을 했다고 한다. 1920년 톨킨은 리즈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조교로 대학에 출강하게 됐고 1924년 그는 정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최연소 교수였다. 리즈 대학에서 그는 E.V. 고든과 "미들 잉글리쉬 단어 /A Middle English Vocabulary"와 "가웨인경과 녹색기사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최종판을 작업하였다. 동시에 톨킨은 "오르페오경 / Sir Orfeo"과 중세 두운 시 "펄 / Pearl"의 번역도 하였다. 1925년 톨킨은 모교인 옥스포드 대학교로 돌아와 "앵글로 섹슨 라우린슨과 보스워쓰 /Rawlinson and Bosworth Professor of Anglo-Saxon"(1925-1945) 교수직을 맡게 된다.
톨킨이 펨브룩에 있을 때 반지의 제왕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빗 2부작을 쓰게 된다. 2002년 이곳에는 블루 플레이크(주: 영국에서 역사적 이벤트나 유명한 인물과 연관된 장소에 붙이는 표시)가 붙었다고 한다. 1932년 그는 문언학 에세이 "노덴스 / Nodens"를 출판하였다고 한다. 1936년 그의 강의 "베오울프 : 몬스터와 비평 / Beowulf : the Monstars and the Critics"으로 만들어진 대학 교재는 베오울프 연구에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루이스 E. 니콜슨은 톨킨이 베오울프에 대해 저술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톨킨의 작업은 베오울프 비평의 전환점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톨킨은 시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였다"라고 호평하였다. 당시에 학자들은 베오울프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유치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며 멸시하였다고 한다. 톨킨은 베오울프의 작가는 기존의 논리에 구속받지 않고 인간의 운명을 그리려고 했으므로 몬스터는 이 서사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톨킨이 베오울프를 얼마나 값지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베오울프는 나에게 최고로 값진 자원이었다." 이 영향은 반지의 제왕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1945년 톨킨은 옥스퍼드 머튼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톨킨은 1959년 은퇴할 때까지 교직을 지키게 된다. 톨킨은 1948년 반지의 제왕을 탈고한다. 소설의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무려 10년이 흐른 후였다. 그리고 1954년 반지의 제왕이 출판된다.
2.4. 말년
1959년 은퇴로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1973년까지 톨킨은 그의 저서 반지의 제왕으로 인해 꾸준히 증가하는 대중의 관심과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그의 인세가 급격히 증가하자 톨킨은 조기 은퇴를 후회할 정도가 되었다. 팬들의 관심이 과해지자 톨킨은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게 된다. 결국 톨킨 부부는 영국해협의 풀만(灣)에 면해 있는 한가한 본머스로 이주하였다.
1972년 1월 일 톨킨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을 지명받고 1972년 3월 28일 버킹검 궁전에서 훈장을 받게 된다. 1971년 11월 29일 톨킨의 아내 이디스가 사망하자 톨킨은 묘비에 루시엔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21개월 후에 1973년 9월 2일 톨킨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톨킨도 같은 묘지에 묻히게 되고 묘비에는 베렌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부부의 묘지는 옥스포드 울버코트 공동묘지에 위치하고 있다.[6]
3. 경력
3.1. 소설가로서
반지의 제왕은 후대의 하이 판타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흔히 전근대적인 시대배경의 '판타지'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들은 상당수가 톨킨의 작품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오르크(오크)와 호빗, 엔트가 그의 창조물이며 엘프들과 드워프들은 그의 손을 거쳐 마침내 하나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정착하였다. 날개가 달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장난치는 요정부터, 북구신화 속의 신적 존재로 퍼져있던 엘프들은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모델이자 불멸의 수명을 지닌 고아한 존재들, 그러면서도 가운데땅에서 살아가는 동 서쪽 바다너머 발라들의 대륙 아만을 그리워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으며, 잘 쳐줘야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의 난쟁이들이고 심하면 사악하고 비열하다고도 묘사되던 드워프들 역시 땅의 미(美)를 알며 조각의 대가들이자 전투 때에는 요정들에 못지 않은 불굴의 전사들로 다시 태어났다. 그 외에도 발록을 창조해 냈으며 트롤을 일종의 요정 같은 성격에서 완연한 괴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엘프, 드워프, 오크, 호빗, 트롤, 발록 등이 등장하는 수많은 판타지 영화, 게임, 소설, 만화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톨킨의 영향력과 유관하다.'''[7]
또 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대히트로 판타지 소설의 인지도가 대폭 늘어났다. 반지의 제왕이 출판된 이후 판타지 장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으며, 그 이전까지는 주로 단편 위주였던 판타지 장르가 서사시스러운 장편으로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8] 테리 프래쳇은 Magic Kingdom이라는 에세이에서 톨킨을 일본 판화에 나오는 후지 산에 비교했다. 작품마다 그 산이 뚜렷하고 크게 나오거나 배경으로 조그마하게 나오고, 설사 후지 산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화가가 일부러 산을 빼놓으려고 했다는 얘기거나 후지 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톨킨은 오랜 이민족들의 침입과[9] 기록 미비로 잃어버린 영국의 신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관심이 많던 유럽, 아랍 등의 신화적 존재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그 이미지를 창조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입, 그만의 새로운 신화, 레젠다리움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내 조국의 빈곤이 슬펐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수준의 이야기, 다른 나라의 전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희랍어와 켈트어, 로망스어와 그리고 독일어, 스칸디나비아어, 핀란드어로 된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 책자에 나오는 초라한 것을 제외하면 영어로 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톨킨 백과사전> 中
고대 지구인 아르다를 배경으로 수많은 존재들의 흥망성쇠가 펼쳐지는 이 인공 신화 속에서는 물론 실제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연결 고리 등이 즐비하여, 특히나 그의 전문이었던 '''언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0][11]"나는 거대한 우주 기원에 관한 것에서부터 낭만적인 동화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된 전설의 체계를 만들 생각이었고…… '''이것을 오로지 영국, 나의 조국에 바치고자 했습니다.'''"
<톨킨 백과사전> 中
게다가 분량 뿐만 아니라 디테일도 상당한데, 반지의 제왕을 비롯하여 자신이 쓴 글들의 번역을 위해 '각국 언어별 번역 지침'을 작성해둔 터무니 없는 양반이다(톨킨 번역지침 참고). 이 언어 지침이 작성된 이유가 뭔고 하니 자신이 쓴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3부작은 자신이 '번역'한 것이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12] 특히 반지의 제왕의 권말 부록의 '번역에 관하여' 목차에선 작가가 정말로 그 시대의 자료를 영어로 번역했다고 가정하고 짠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설정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서부어[13] 의 2인칭 대명사엔 '상대를 높이는' 형태와 '스스럼 없는' 형태가 있는데, 호빗들이 사용하는 방언은 스스럼 없는 형태만을 사용하는 형태였고, 때문에 피핀이 곤도르에 체류했을 때 곤도르인들 사이에서 피핀이 고위급 인사라는 루머가 나돌았다더라"'''라는 설정이 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세세한 설정들이 목차를 빼곡히 채울 정도로 있다.
그는 결국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죽었고, 정리되지 못한 원고들은 셋째 아들이며 편집 작업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톨킨이 정리하여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가운데땅의 역사서,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등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결국 크리스토퍼 톨킨도 2020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주변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글 쓰는 방식이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않았다'''고 한다. 욕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특이하고, 완벽을 기하느라 효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줄거리를 다 생각해 놓고 줄거리 위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톨킨은 세계관을 먼저 설정하고, 상황과 사건을 설정한 다음 '''정말로 가상의 프로도를 출격시켰다.'''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가상 중간계를 만들고 시뮬레이션 돌리는''' 것으로 반지의 제왕을 써 내려갔다. 대부분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럴 때면 모든 이야기를 백지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때문에 반지의 제왕 완결에 십 수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는 절친이었던 C. S. 루이스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톨킨은 루이스가 책을 너무 성급하고 성의없이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이스의 대표작인 나니아 연대기를 놓고도 너무 주제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며 비판했고,[14]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서들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15][16]
3.2. 학자로서
옥스퍼드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반지의 제왕 작가이기 보다 영문학자로서 알려지기를 희망했고, 자신의 작품은 언어와 신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부산물로 여겼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무협 작가보다 언론인으로 알려지길 원했던 일명 무협의 아버지 김용과 비슷하다.[17]
언어학자로서는 고대·중세 영어를 연구했는데, 『베오울프』[18] , 『가웨인경과 녹기사』[19] 등의 작품을 주로 연구했다. 사실 베오울프를 진지하게 문학으로서 연구한 선구자가 톨킨이다.
그 외에도 톨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고, 『On fairy stories』라는 에세이집을 남겼으며, 고대 웨일스어를 복원하기도 했다.
"영어의 탄생"에 따르면 톨킨은 1919년부터 1년간 옥스포드 영어사전(OED, Oxford English Dictionary)의 부편집장 자리에 있었고 W부분을 맡았으며, W로 시작하는 단어들의 정의에 대해 고심한 자료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영어사전 편집장은 헨리 브래들리.
덴마크의 신학자,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고대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등을 할 줄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 신화 원서를 다 읽은 몇몇 안되는 인물이라 한다. 그리고 이 원서들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쓰는데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
4. 그에 대한 말들
'''"후지산이 너무 자주 일본의 판화에 나오는 것처럼, 톨킨은 모든 판타지에 등장하며 일종의 산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아주 크고 가까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지평선 위에 걸쳐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산을 없애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결정이지요. 아니면, 작가가 사실 후지산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톨킨을 존경하는 만큼, 톨킨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반지의 제왕은 그 이후로 쓰여진 모든 다른 판타지를 뛰어넘어 현대 판타지를 형성한 산이다.'''
'''반세기 남짓한 작업 기간에, 어떻게 한 인간이 민족 하나가 일구어낼 만한 창작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
How, given little over half a century of work, did one man become the creative equivalent of a people?
'''유례 없는 아름다움과 장려함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그는 디킨스, 톨스토이와 동등하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 The New Daily#
5. 기타 정보
5.1. 인간관계
학자의 이미지로 보아 책만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고대 영문학을 실감나게 가르친다면서 '''체인메일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강의실에 들어온 적도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한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구상한 옛날 이야기를 모아서 출판한 작품이 호빗이다. 하지만 그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담은 자기 작품들이 왜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가 됐는지는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자신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을 내보내야 했다. 그것도 공군 조종사로. 아들을 위해 호빗을 지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 톨킨에게는 하루하루가 끔찍한 나날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톨킨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나가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나중에 아버지 사후 실마릴리온을 자신이 편집하고 보충해서 내게 된다. 이 당시부터 톨킨의 중간계 세계관에 크리스토퍼가 관여해 온 것을 생각하면 실마릴리온의 편집도 수월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와는 친구 사이었으며, 루이스가 주최하던 문학인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처음엔 형인 워렌 루이스의 소개로 루이스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루이스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25년 05월 11일 머튼 칼리지 회의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톨킨과 문학에 대해 대화하면서 "모든 문학은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를 들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톨킨에 대한 첫 인상으로 일기를 마무리했는데,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저 한두 대만 날려주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나니아가 반지의 제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네', '반지의 제왕은 루이스 덕분에 써진 것입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를 참조.[20] 그리고 톨킨과 루이스의 관계는 짧은 글로는 설명이 잘 안 되므로 자세한 내용을 정리한 글을 참고하자.# 톨킨은 루이스의 종교관에도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루이스 항목 참조. 옥스퍼드대 모덜린칼리지의 뉴 빌딩 뒷편에는 사슴 수십마리가 사는 ‘사슴공원’이 있다. 톨킨은 뉴 빌딩에 있던 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사슴공원을 내려다 보는 걸 좋아했다. 두 사람은 처웰 강을 따라 사철 꽃이 피는 산책로 에디슨 워크를 걸으며 인생과 문학, 사랑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아내 이디스 브랫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16세 때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 브랫과 한동안 사귀었지만,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부도덕한 연애를 한다'는 후견인 프랜시스 신부[21][22] 의 반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와 일절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1살이 되던 생일날 약속한 구름다리 밑에서 재회했다. 이디스는 이미 약혼했지만 톨킨과 만난 직후 바로 파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결혼식을 올렸다.[23][24] 참고로 톨킨과 이디스의 관계는 실마릴리온에서 몇 안 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 베렌과 루시엔으로 나오게 된다. 실제로 톨킨 부부의 묘비에 에디스-톨킨 순으로 루시엔-베렌이라고 이름 아래에 새겨져 있다고 하니... 참고로 아내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결혼 직후 톨킨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25] , 이디스가 그를 위해 발랄하게 춤을 추었다. 이를 본 톨킨은 실마릴리온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이 작품의 여주인공 요정 루시엔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5.2. 정치 성향
톨킨은 로마 가톨릭의 가치와 지역주의에 기반한 비교적 온건한 전통주의자, 군주주의자[26] 였다.[27] 혁신과 근대화보다 기존의 관습과 정통성을 선호하는 전통주의자였으나 정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했고 관료주의를 안 좋게 생각했다. 톨킨은 또 산업화의 부작용에 대해 비판했고 그는 영국의 시골 지역을 사랑했고 단순한 삶을 즐겼다.[28] 그래도 딱히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나의 정치적 견해는 점점 더 무정부 상태에 기울고 있다. (철학적으로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은 폭탄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아닌 통제의 폐지를 의미한다.)
반공주의자였다. 톨킨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주의 당원들이 성당을 파괴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죽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주의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또 톨킨은 스탈린을 경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톨킨은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늙은 살인자(that bloodthirsty old murderer)"라고 언급했다. 다만 1961년에 톨킨은 한 스웨덴 해설가가 반지의 제왕이 반공적인 우화이며 사우론을 스탈린과 동일시한다고 비유한 것을 비판하며 톨킨은 '나를 화나게 하는 어떠한 읽을 거리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반지의 제왕은 러시아 혁명 훨씬 이전에 고안된 것이다.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말했다.
톨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고, 특히 나치의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톨킨의 작품을 감명깊게 읽은 독일의 편집자가 독일어 번역을 부탁하면서 아리아인 인증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노발대발했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좀 누그러뜨려 답장에 "자신의 조상 중에서 아리안은 없지만, 만약에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라면 아쉽게도 그 '''축복받은 이들'''이 내 조상 중엔 없는 것 같다"라고 디스한 적도 있다.[29] 이건 당시 나치 독일이 출판사에다 저자가 비유대인임을 확인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톨킨이 태도를 좀 누그러뜨리긴 했다.
톨킨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민간인들을 징집해 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비판했다. 또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건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고,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을 "이 미치광이 물리학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톨킨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모두 끔찍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한 전쟁에는 자신이 참여해 생사의 기로를 오갔고, 다른 전쟁에는 아들을 내보내고 노심초사해야 했다. 세계대전에 대한 경험은 어느 정도 그의 작품에도 반영이 되어 있어서 고대 서사시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현대적인 묘사를 많이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 후반에서 메리가 마술사왕의 발목을 찔렀던 팔이 평생 불편했다거나, 프로도가 매년 다쳤던 계절마다 앓아눕는 모습은 PTSD나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참전용사들의 모습과도 일치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전쟁터의 모습 또한 사방에 죽음이 널려 있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갑자기 닥쳐오는 등 현대전에 가까운 이미지가 많다. 그리고 죽음늪은 톨킨 자신이 참전했던 솜 전투의 전장을 모티브로 해서 묘사한 것이다. 이런 디테일 이외에도 용이나 나즈굴을 비롯한 항공전력의 위력과 공포에 대한 묘사,[30] 팔란티르로 대표되는 정보전의 개념도 기존의 전설과 신화, 환상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
그가 생태주의자였다는 루머가 있으나 톨킨 자신은 나무를 심을 때 숲에 대한 사랑과 나무 벌채에 대한 슬픔을 담은 내용의 사적인 편지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생태주의, 환경보호주의자들의 대한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후에, 톨킨의 수많은 전기들이나 문학 분석가들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의 집필 동안에 야생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가치와 산업화된 세계에 남겨진 자연을 보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얻었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5.3. 종교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내[31] 가 될 사람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권했을 만큼 가톨릭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반지의 제왕'은 물론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랬지만, 개정에서는 의식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종교'와 같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컬트나 관습에 대한 어떤 언급도 넣지 않았거나, 실질적으로 모든 언급을 배제한 이유입니다. 종교적인 요소가 이야기와 상징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J. R. R. 톨킨#
어린 시절 톨킨에게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어머니가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래서 톨킨 역시 8살 나이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의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버밍엄 빈민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앙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여동생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된다.[32] 톨킨의 가족은 톨킨이 상급학교에 지원, 합격하였을 때, 사랑하던 시골의 집을 떠나 산업화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던 대도시 버밍엄으로 이주해야 했고 매일매일, 등교하기 위한 교통비를 댈 수가 없었다. 싼 집세의 집을 찾아 여러 번 이사해야 했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에드베이스턴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 근처에는 복자 존 헨리 뉴먼이 세운 오라토리오회의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신부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를 알게 됐다.
생활고와 집안에서 고립되고 냉대받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자녀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점점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졌고 프랜시스 신부[33] 도움으로 잠시 시골집에서 요양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1904년 11월 초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녀는 브롬즈그로브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영면하였고, 유언장에서 프랜시스 신부를 후견인으로 부탁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평생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머물렀던 톨킨은 어머니의 죽음을 일종의 신앙을 위한 ‘순교’로 이해했고, 평생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의 손자 사이먼 톨킨에 의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실시 된 전례 개혁과 변화들에 할아버지가 실망했다고 전했다. 신앙심도 그렇지만 본인이 언어교수라 라틴어에 애착이 간 것도 있을듯하다.
가톨릭용 성경 역본인 Jerusalem Bible 편찬[34] 에도 참여했고 실제로 가톨릭용 성경 중 Jerusalem Bible이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데 아무래도 문학작가인 톨킨의 기여 때문인 듯하다. 장남인 존 프랜시스 루엘 톨킨은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나는 본머스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간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교회가 미사식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꾼 직후였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분명히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나머지 신도들이 영어로 대답하는 동안 라틴어로 아주 크게 모든 반응을 보였습니다.
5.4. 저작권, 판권 관련
톨킨의 작품들에 대한 판권은 크게 두 곳의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톨킨의 후손들이 세운 톨킨 재단과 지금은 타계한 명 프로듀서 사울 자엔츠[35] 가 세운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로 톨킨 재단은 캐릭터를 비롯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는 영화와 머천다이징 권한을 1969년 톨킨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판 것을 1976년에 사들인 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저작권에 관해 엄청나게 엄격하다.'''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의 경우 톨킨에게 저작권을 얻지 못한 제작자가 이름만 바꾸어 출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개리 기각스는 공식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했다. 데이브 아네슨 생애 중 공식석상에서 따로 코멘트를 한 적이 없었다. D&D 제작사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는 톨킨과 관련된 부분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있다. 저작권 소송에 여러 번 당한 한 때문일까? 하지만 톨킨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나간 것은 사실. 심지어는 반지의 제왕 영화로 인하여 다시 D&D가 퍼져나가는 나라도 있다. 이스라엘 등 다국이 해당된다. 이러한 사정과는 별개로 워낙 멋지고 세밀한 세계관이다보니 디앤디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홈브류 캠페인에서 많이 애용되고 Cubicle7같은 제3자 출판사에서는 수권에 걸친 본격적인 중간계 캠페인 북을 내기도 할 정도이다.
한국의 양판소, 게임, 인터넷 소설들이 톨킨의 창작물과 순수 오리지널 이름들을 멋대로 갖다 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36] 따지고 보면 양판 깔 것도 없이 업계에서 이름 높은 사람들도 비슷하다.[37]
"호빗(Hobbit)"은 톨킨 재단에 판권이 있는 단어이므로 함부로 사용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유사단어로 대체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이외에도 미스릴 등 톨킨이 창조한 단어는 많다...라고는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퀘냐 또는 신다린을 소설에 사용하고 싶은데 저작권은?'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톨킨 언어학 관련으로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헬게 파우스캉거가 직접 답변을 해 준 것이기에 신뢰도는 100%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작권법으로 보호가 된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본 후, 괜찮은 경우 써도 된다'이다. 톨킨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고(이건 말할 것도 없이 표절이다.), 캐릭터 이름이나 장소의 이름 같은 경우는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경우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마찰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 컨텐츠 측,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온라인도 사이트 앞 화면에 보면 각 '고유명사'들에 저작권 표시가 되어있다. 일일이 단어들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톨킨 재단 자체에서 클레임을 걸지 않더라도 2차 구입자가 클레임을 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단순히 이름 몇 개를 갖다 썼다고 재단하고 직접 소송이 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퀘냐와 신다린을 이용하여 직접 단어를 창작하는 경우도 자신의 창작이므로 당연히 소송에 걸리지 않는다.
ex) D&D에서 걸렸다가 수정한 것: 호빗 → 하플링, 발록 → 발러, 미스릴 → 미스랄, 헬메이드 → 헬브라이드, 엔트 → 트렌트 등 다수.
톨킨은 몇몇 사어화되었던 단어들을 이들이 계속해서 쓰였다는 가정 하에 현대적인 문법을 주어 복구시켰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정(엘프)과 난쟁이(드워프)이다. 이는 톨킨의 부록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바인데, 엘프와 드워프의 경우 그 단어가 F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던지라 elfs, elfin, dwarfs라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톨킨은 이를 "언어학자임에도 과감한 실수" 라는 식의 이야기와 함께 은근슬쩍 elves, dwarves로 표기하였다.[38] 이 덕분에 원래는 없던 고유형용사 elven같은 단어도 톨킨을 기점으로 쓰이고 있다. (보통 사전에는 안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문에 책이 인쇄되면서 저런 단어들이 과도교정된 경우가 매우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Elves, dwarves가 elfs, dwarfs로 돌아간다거나, (톨킨이 최악으로 꼽은 것으로) elven이 elfin으로 바뀐다거나...
6. 오해
반지의 제왕 같은 경우는 일부평론가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백인우월주의가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집필 당시인 1950년대는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시기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들어 톨킨이 인종주의자라고 보는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오히려 엘프-호빗-드워프 등이 합심하여 악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톨킨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문제는 오크를 '인종'으로 보느냐, 아니면 '악마'로 보느냐이다. 오크가 단순히 '악마'라면 인간-엘프-드워프가 서로간의 반목을 잊고 함께 악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되지만, 오크를 '인종'으로 보면 백인들끼리 서로 팀 먹고 유색인종을 악마라고 부르며 싸운다고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의 인종차별 시비를 보면 오크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어 흑인이나 동양인을 연상시킨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문화권에서 검은색은 악을 상징한다. 아프리카도 지역에 따라서 검은색은 악하다고 여긴다. 피부색을 떠나 검은색은 곧 어둠을 상징하고, 미지의 어둠에 대한 공포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본능이기 때문.[39] 신화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톨킨의 작품들은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크의 이미지를 몽골에서 따왔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40] 고의는 아니지만 무의식에 인종주의적인 생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인식의 기저에 남아 있는 무시무시한 몽골군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이것만으로 인종차별 여부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도트라키라는 다른 예도 있다. 오크만이 아니라 사우론 편을 든 인간들인 하라드림이나 이스터링들은 설정상 유색인종들이므로 이를 근거로 인종차별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실마릴리온에서는 배신자들과 싸우다가 충성스럽게 최후를 맞은 이들도 있었으니 미묘한 부분이다.
사실 톨킨의 편지를 읽어보면 오크나 사우론 같은 존재들을 다른 인종이 아니라 악함 그 자체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의 편지인 Letter 66에선 연합군을 '''절대반지 들고 사우론이랑 싸우는데 어쩌다 보니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런 전쟁의 댓가는 인간과 엘프들을 오크로 만들고 새로운 사우론의 창조라고 코멘트했다. 덤으로 자신의 아들을 우르크 하이 속의 호빗이라고 빗대었다. 더불어 Letter 71에선 오크는 어디에나 있다며 현실에선 어느 쪽(군대)이든 오크, 악마, 괴물, 인간, 천사들이 다 모여 있다고 얘기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 인종차별 시비를 부른 것과 달리 톨킨 본인은 인종차별을 매우 싫어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뼛속까지 증오한다고 얘기했을 정도. 뿐만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자들인 나치에 대해서도 매우 증오했다. 그의 고향 남아공에서는 당시에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지인들 앞에서 자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 깊게 만연했던 인종차별 인식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을지도. 그나마 서구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덜하다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체포된 일이 반지의 제왕이 쓰여지고 난 후의 일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대사는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후에 나온다. 당시에 미국도 이 정도였는데, 영국이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실마릴리온에서 곤도르의 동족분쟁은 순혈주의자들의 어그로가 발단이었다.
참고로 톨킨은 작품을 알레고리적으로 쓰거나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지양했다.[41][42] 60년대에 쓰여진 서문에서도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이야기를 현실에 대한 어떤 은유나 시사로 받아들이기보다, 이야기 그 자체를 사랑하고 쓰는 작가였다. 자신의 글에서 상징성을 찾아내려는 행위를 지극히 혐오했다. 사우론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라느니, 자본주의라느니, 현대 과학이라느니 이렇게 말하는 평론가들을 너무 싫어했고 "그냥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톨킨의 이 관점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화나 전설, 역사에는 자연스럽게 '적용가능성(applicability)'이 생긴다. 톨킨은 본인의 이야기에 다양한 적용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은 무척 환영했다. 그러나 '적용가능성'은 결코 '풍자(allegory)'와 같지 않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보면 쉬운데, "마치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아내리듯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카루스 이야기는 ~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야기야"라고 말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톨킨은 후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톨킨의 표현들은 톨킨의 서간집(The Letters of J.R.R.Tolkien)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다만 역사적인 영감 정도는 받았으며, 예를 들어서 로한은 앵글로색슨, 난쟁이는 유대인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다.
7. 여담
- 톨킨은 킹 에드워드 학교 재학 시절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몹시 싫어했다. "셰익스피어의 '거대한 버넘 숲이 던시네인 언덕을 움직여 오는' 것 같은 표현을 배우는 학창 시절은 정말 실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나는 진짜로 나무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을 만들어내기를 오래도록 염원했다."
- 1969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톨킨 팬클럽 중 하나인 ‘톨킨 협회(Tolkien Society)’는 매년 봄 총회를 잉글랜드 남부 소도시 아런델의 노포크암스 호텔에서 연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회원 200여명이 모인 행사다. 현 회장인 29세의 숀 거너는 “톨킨은 우리 협회의 영원한 명예회장”이라고 말했다. “설립자 베라 채프먼이 톨킨 사망 1년 전인 1972년 런던에서 직접 그를 만나 ‘회장이 돼달라’고 부탁해 동의를 받았어요. 협회가 존재하는 한 톨킨은 영원히 우리의 명예회장입니다.” 매년 톨킨 협회는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이 있는 9월 옥스퍼드에서도 대규모 총회 ‘옥손무트’를 연다. 700여명 정도가 모여 학술대회, 가장행렬, 파티를 사나흘간 이어가는 대규모 행사다. 모금을 통해 저개발국가에 톨킨의 책을 보내는 ‘톨킨을 세계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각자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오직 톨킨을 사랑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톨킨이 죽은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자, 협회 아카이브 담당관인 팻 레이놀즈 박사는 “톨킨이 창조해낸 세계는 읽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누군가는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중간계에 관한 노래를 만들죠. 제 본업은 박물관 큐레이터이지만, 여가 시간엔 톨킨 소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인간 캐릭터의 옷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피터 잭슨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톨킨의 책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처럼요.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창조성을 자극해 또다른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것, 그게 톨킨을 톨킨이도록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 옥스퍼드 대학 식물원에 서 있던 200살 넘은 남미 소나무는 톨킨이 기대 앉아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해서 ‘톨킨 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무는 2014년 가을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여전히 옥스퍼드 대학과 도시 곳곳에는 톨킨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순례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 메탈밴드 블라인드 가디언이 톨킨의 작품을 자신의 곡에 많이 써먹었다. 정규앨범 중 하나인 Nightfall In Middle-Earth는 아예 통째로 실마릴리온의 내용으로 앨범들을 채웠으며 이 앨범은 블라인드 가디언의 앨범 가운데서 손꼽히는 수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앨범들의 곡 대부분이 톨킨의 작품들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있다. 그 밖에 유명한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 Summoning[43] , 핀란드의 Battlelore, 슬로바키아의 Orkrist 등 톨킨의 작품을 주제로 삼는(혹은 삼았던) 메탈 밴드들이 굉장히 많다. 내용상 톨킨과 관련이 없는 밴드도 반지의 제왕 등지에서 등장한 지명을 밴드명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Amon Amarth, Gorgoroth, Minas Morgul 등). 절대반지에 블랙 스피치로 쓰여있는 단어중 어둠을 뜻하는 Burzum을 밴드명으로 쓰는 익스트림 메탈계에서는 전설적인 밴드가 있다.
- 2014년 5월 28일, 톨킨이 직접 반지의 제왕을 설명한 녹음본이 발견되었다. '놀랍다'
- 2015년 '쿨레르보의 이야기'라는 신간이 출간되었다.
- 2017년 6월 2일, '베렌과 루시엔'이라는 신작이, 쓰여진뒤 100년이나 지나서 출간되었다.
- 2013년 톨킨 본인을 다룬 전기영화가 제작에 들어간다는 뉴스가 나왔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어지기 시작했다. 제작사는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이고 제목은 톨킨(Tolkien)이다. 톨킨 역할을 맡게 된 배우는 니콜라스 홀트, 그의 아내 이디스 톨킨을 맡게 된 배우는 릴리 콜린스다. 개봉일은 2019년 5월 10일. 톨킨의 가족들과 톨킨 에스테이트는 이 영화의 제작을 승인하거나 참여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시즌2 15화에서 카메오로 출연하였다.
- 보다 톨킨의 생애를 디테일하게 알고 싶다면 톨킨 전기 (J. R. R. Tolkien: A Biography, 작가 험프리 카펜터)를 읽길 바란다. 톨킨 저작권 협회에서 공식 인증한 공식적인 톨킨 평전으로 국내에서도 2004년 해나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 자신이 창조한 호빗을 좋아했는데 톨킨은 호빗을 통해서 산업혁명과 과학발전으로 인류의 삶이 좋아졌지만 반면에 끝없는 경쟁체재과 환경오염 그리고 삭막해진 세상에 비록 신체는 작지만 제물에 욕심이 없고 가족과 이웃들이 서로 배려하는 등 평화로운 삶을 원해던 톨킨의 이상적인 종족이기 때문이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싫어해서 절대 자기 작품에 손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호빗이 출판된 해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개봉했는데, 친구 CS 루이스와 같이 보고 둘이서 같이 깐 적도 있다.
'''나는 월트 디즈니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절망적으로 타락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작품'에는 감탄하거나 매력적인 구절들이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역겹다. 몇몇은 나를 구역질 나게 했다.'''
1964년 7월 15일
8. 주요 작품
'''생전 작품'''
- 호빗 (The Hobbit)
- 니글의 이파리 (Leaf by Niggle)
-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 햄의 농부 가일스 (Farmer Giles of Ham)
- 톰 봄바딜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om Bombadil)
- 빌보의 마지막 노래 (Bilbo's Last Song)
- 북극에서 온 편지 (The Father Chirstmas Letters[44] )
- 실마릴리온 (The Silmarillion)
-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Unfinished Tales of Númenor and Middle-earth)
- 가운데땅의 역사서 (The History of Middle-earth)
- 로버랜덤 (Roverandom)
- 후린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Húrin)
- 베렌과 루시엔 (Beren and Luthien)
- 곤돌린의 몰락 (The Fall of Gondolin)[45]
8.1. 저서의 판본들
톨킨이 쓴 책들의 참고할 만한 판본들. 모두 해당 링크를 타고 가면 된다.
9. 팬덤
톨킨의 팬들은 보통 톨키니스트란 이름으로 지칭된다. 톨키니스트들은 여타 다른 덕후들과 팬덤과는 그 규모와 깊이를 달리한다. SF쪽에서 팬덤의 본좌인 마블 코믹스, DC 코믹스, 스타워즈, 스타 트렉, 닥터후 등이 규모나 상업적인 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면, 톨키니스트들은 학문적, 철학적인 면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기행의 천국 영국에서는 톨킨학(Tolkienology)이라면서 세계관 연구를 하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다.[46] 열성팬들 중 고학력자가 많고 이들이 나름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학문적으로 연구된 판타지 문학은 드물다.[47]
10. 관련 문서
11. 바깥 고리
- 위키피디아
- 영어 위키피디아: 톨킨에 관한 방대한 정보가 정리 되어있으니 참고.
- 팬 사이트
- 레딧
- lotr: 팬 아트, 정보가 올라오는 게시판.
- lotrmemes: 각종 밈이 올라오는 게시판. 가장 규모가 크다.
- tolkienfans: 톨킨 팬들이 모인 게시판. 레젠다리움 세계관에 관한 각종 질문, 정보들이 올라온다.
- 반지의 제왕 팬덤
- 톨킨 게이트웨이
- 가운데땅 백과사전
- 절대반지넷 (The One Ring.net)
- 아르다 백과사전
- Eä of the Ring: 호빗,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정보 사이트: 연대기와 계보, 지도 등 톨키니스트라면 감탄할만한 자료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 중간계로의 여행: 현 대한민국에서 기능하는 사실상 유일한 톨킨 커뮤니티.
- 레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