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쿠보역 승객 추락사고

 


'''신오쿠보역 승객 추락사고
新大久保驛乘客墜落事故 / 新大久保駅乗客転落事故[1][번역]
'''
'''발생일'''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경
'''발생 위치'''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햐쿠닌초1초메 10-15, 신오쿠보역
(東京都新宿区百人町一丁目10-15, 新大久保駅)
'''유형'''
추락사고, 인신사고
'''원인'''
취객 구조 중 열차와 충돌
'''인명피해'''
'''사망'''
3명
'''부상'''
0명
'''재산 피해'''
-
1. 개요
2. 사고 이후
3. 추모
4. 추모비
5. 추모작
6.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

[clearfix]

1. 개요


2001년 1월 26일 금요일 오후 7시 15분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JR 야마노테선 신오쿠보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취객 사카모토 세이코(坂本成晃)가 열차 선로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열차가 접근 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내렸다.
이와 함께 당시 현장에 있던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도 자신도 취객을 구하고자 함께 선로로 뛰어내려 빨리 취객 구조를 시도했지만, 열차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3명 모두 선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야마노테선의 배차간격은 2분 30초~3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7초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굽은 선로로 들어오면서 70미터 앞에서야 기관사가 추락 사고자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이때 마음만 먹으면 2, 3초 만에 본인만 선로 밖으로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이수현은 마지막까지 사고자를 구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기관사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피하지 않았고 결국 숨진 것이다. 이는 이수현의 아버지가 사고 현장에 찾아왔을 때, 당시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와 신오쿠보 역장(열차 선로에 침목을 놓는 일을 한 경험이 있었다)가 증언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인의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고.

2. 사고 이후


사고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곳은 이수현이 다니던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였다. 당시 교장 아라이 토키요시는 바로 신주쿠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시신 안치소를 찾아갔고, 시신을 확인한 뒤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시신의 손상이 심해 본인인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교장이 "얼굴을 만들어 주세요. 이 상태로는 부모님께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부탁을 했다니 짐작이 갈까? 그래서 안면 수복 작업이 이루어졌다.[2]
그리고 아라이 교장은 부산 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사망 소식을 전하고 다시 여기서 가족에게 연락이 갔다. 차마 부모에게 사망 소식을 바로 전할 수 없어서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다고만 했는데, 아버지는 이때 이미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 시각이 새벽 2시 반이었는데, 경상 정도라면 낮에 해도 충분히 연락할 수 있으니까. 아들에게 계속 전화를 해봤지만 물론 연결은 되지 않았다.
다음날인 1월 27일 나리타 공항으로 일본에 도착한 부모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온 것을 보고 당황했고, 그때 비로소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필 그날 눈이 많이 와서, 공항부터 신주쿠까지 오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고.
학교에서는 학교장으로 치르겠다고 제안했고, 부모도 감사하게 받아들여 학교 차원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정말 성대하게 치러졌고 조문객도 매우 많았는데, 그 모습이 유족들은 정말 고마웠다고. 어머니는 '학교 측에서 이렇게 해주니까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인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는데 그게 정말 신기했다고 한다.
유해는 1월 30일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해 자택 근처의 사찰인 정수사에 안치되었고, 4월 9일 부산 영락공원 안에 있는 공동묘지(7묘원 39블록 1106호)에 안치되었다.[3] 이후 정부에서 의사자로 선정하고 국민훈장을 수여하였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학사를 수여했다.
이 사건은 일본 열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이 생전 남남인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었고 좋지 않던 한국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건 이후 일본에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고, 2006년 5월 21일같은 곳에서 신현구씨가 선로에 추락한 사람을 구했다.[4]
유족들에게도 전 일본에서 조의금과 성금, 위로의 편지가 답지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각종 언론사, 방송사에서도 회사 차원에서 한 모금이 도착할 정도. 유족들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에 답하는 길은 자신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어 위키백과 신오쿠보역 승객 추락사고 문서에 정리된 내용을 쉽게 풀자면, 추락 지점이 교량구조물이 설치 된 지점이었고, 그 지점에서는 낮은 사이쿄선쇼난신주쿠라인이 통과하는 선로로 선구로 건너갈 수 없었다는 점이 이런 사고를 야기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또한 관할 철도회사 JR 히가시니혼은 이 사고의 원인이 술 때문인 것으로 규정하고, 2005년까지 역 구내 매점에서의 술 판매를 금지시켰다.

3. 추모


기일마다 고향인 부산에서 추모행사가 열리며, 일본에서도 계속 찾아온다. 이수현이 다니던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에서도 매년 추모 행사가 학생회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매년 추모 행사를 하는데, 2011년이 마지막 공식 추모 행사가 될 것이라고 했으나 아무래도 추모행사는 계속 진행되기로 한 모양이다. 2013년에도 행사가 열렸다. 2016년에도 행사가 열렸으며, 앞으로도 학생회 차원에서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LSH아시아장학회'가 설립되어 2002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어학교에 다니는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돈은 '우리가 받은 돈이 아니라 사람들이 수현이에게 준 돈'이라고 생각하고, 수현이가 못다한 공부도 있으니까 사적으로 쓰지 않고 아들의 의지를 이어가는 게 자신들의 앞으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라이에게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맡긴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20주기인 2021년이 되자 이 장학금을 지원받은 사람이 1000명이 넘어섰다.
장학회 관계자들은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자라서 운영비가 거의 들지 않고, 그렇기에 기부금이 거의 전부 장학금으로 쓰일 수 있다고 한다. 시작은 조의금이었지만 그 돈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의 후원으로 장학금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6년 기준으로 2500만엔 정도가 모금되었다. 8500여명에 달하는 후원자들이 있으며, 그중에는 한류 팬들, 소식을 듣고 감동한 사람들, 유명인 중에는 역도산의 부인도 있다고.[5] 일본어학교 학생을 위한 장학금이 생겨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신오쿠보역에서도 추모는 계속되고 있다. 2010년 1월 26일 오후 7시 16분, 사고가 발생한 신오쿠보역의 신주쿠 방면 승강장에서 LSH아시아 장학회를 중심으로 묵념의 시간을 가진 것이 그 예. 그리고 이수현을 기리는 기념비가 신오쿠보역에 생겼다.
이수현의 부모님 역시 일본에 자주 가고 있다. 추모식은 물론이고(2019년 아버지가 별세한 후에는 당연히 어머니 혼자만 가고 있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영상 메시지만 보냈지만.) 그에 대한 극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다큐멘터리 <가교>의 시사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일본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부교재에 이수현의 이야기가 실리고''' 이 부분의 수업하는 부분이 참관수업으로 이루어질 때도 한 학교가 초청하면서 참석했고, 수업이 끝난 후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하였다. 아들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린 것, 초청을 받은 것, 학생들이 다들 진지하고 집중해서 들어준 모습에 대해서.
LSH재단 장학금 수여식에도 간다. 이렇게 일본에 자주 가는 것에 대해, 사고 1주기 때 일본에서 출간된 책 <이수현 씨 당신의 용기를 잊지 않아>의 저자에게 '일본에 수현이가 있다', '수현이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작가는 '일본=수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일 양국의 언론들에서 크게 다루어진 유명한 사건이었으며, 수많은 일본 시민들은 물론, 일본의 국회의원, 각 부처 장관[6]들을 비롯한 여러 내각 주요 인사들과 당시 일본 총리인 모리 요시로가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오기도 했다. 이수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일본에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기도 하였고, 이후 일본에 한류열풍이 유행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를 가르쳤던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 교사이자 현재도 이수현의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자주 하고 있는 교사는 이를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서 큰 밭이 되는 것'에 비유했다. 그가 죽었지만 밀이 되어서 커다란 것을 남겼다고.
2001년 일본 국토교통성이 이수현 씨에게 감사장과 은배를 수여한 데 이어 일본 내각도 이수현 씨에게 목배(한국의 훈장에 해당)를 수여했다. 그리고 2015년 4월 25일에는 이수현 씨의 부친 이성대 씨가 긴 시간에 걸쳐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과 상호 이해의 촉진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쌍광장을 받았다. 본인에 대한 전달식은 6월 16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상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아들의 묘소'''라고 한다. 상을 올려놓고 '아들아 고맙다. 아들 공적을 내가 나눠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고. 미안했지만 '아들 훌륭했다, 아들이 참 좋은 일 많이하고 다 칭찬하는데 하늘나라에서라도 편하게 잘 지내라, 아버지가 곧 조금만 있으면 너 곁으로 갈 것이다'라고 했다고.(실제로 그는 4년 후에 세상을 뜬다.)
‘지하철 의인 이수현’ 18년째 잊지 않는 일본 2019년 3월에는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의인 이수현의 부친 이성대가 사망한 것과 관련, 조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2021년 1월 26일에도 20주기를 맞아 추도식을 거행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해 이수현의 어머니는 참석하지 못했다. 20주기를 맞아 신오오쿠보 인근의 상점가에서도 추도식을 진행하였다.

4. 추모비


[image]
일본어
한국어
カメラマンの関根史郎氏、韓国人
留学生の李秀賢氏は、2001年1月26日
午後7時15分頃、新大久保駅において
路線上に墜落した男性を発見し、自らの
身の危険を顧みず救助しようと敢然と
路線に飛び降り, 尊い命を落とされ
ました。

兩氏の崇高な精神と勇敢な行為を
永遠にたたえ、ここに記します。

東日本旅客鉄道株式会社
한국인 유학생 이 수현씨,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경, 신오오꾸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
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
을 바쳤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동일본 여객철도 주식회사
이 사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JR 히가시니혼에서는 의인 이수현과 세키네 시로의 가족에게 감사패를 수여하였으며, 현재도 신오쿠보역에는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JR 히가시니혼 홈페이지에도 추모글이 써져있다.
[image]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에 있는 이수현 추모비. 과학기술2관과 미래관 사이 주차장 옆에 위치해 있다.
그 외에도 부산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과 고인의 모교인 낙민초등학교, 동래중학교, 내성고등학교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5. 추모작


2002년 5월, 앨트웰에서 그의 이타주의를 통한 기업정신을 배우겠다는 취지로 그를 모델로 한 기업PR 광고를 방영하기도 했다.[7]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있다. 개봉 전 시사회 때 아키히토 덴노 부부와 아베 아키에[8]가 참석하여 화제를 모았으며, 한국배우 이태성HIGH and MIGHTY COLOR의 전 보컬인 마키가 히로인 역으로서 출연하였다. 철덕으로서 한 번쯤 볼 만한 영화인데 인트로 도입부가 지금은 볼 수 없는 동해남부선 기장역-해운대역 사이 달맞이길 폐선 구간을 주행하는 영상(운전석 뷰)이다. 영화 자체의 퀄리티는 좋은 편이 아니지만 추모 영화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참고로 체리필터의 기타 정우진과 드럼 손상혁의 2년 선배(이수현은 93학번, 정우진,손상혁은 95학번)로 고려대 세종캠 스쿨밴드 '무단외박'에서 함께 했다고 한다. 체리필터 2집 ''Made in Korea?''의 수록곡 '갈매기 조나단'은 그를 기리기 위한 추모곡이며 2011년 일본의 밴드 안전지대와 한국의 랩퍼 더콰이엇이 함께 STEP이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2017년 2월 4일에는 일본에서 고인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카케하시(かけはし, 架け橋, 가교)'가 개봉하여 고인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영화 감독은 나카무라 슈토. 도쿄 시부야의 한 소극장에서 처음 상영되었으며, 이후 오사카, 벳푸 등지에서도 차례로 상영되고 있다.#

6.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고인을 진화한 신인류라고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국적이나 인종을 고려하지 않고 희생정신을 발휘한 고차원적인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부도리의 꿈' 프로듀서인 시미즈 요시히로는 인터뷰에서 부도리의 모티브가 이수현 씨라고 밝혔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자, 코라 켄고의 주연 영화 요노스케 이야기(横道世之介)에서 라디오로 야마노테선 요요기역에서 한국인 유학생[9]과 사진작가가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숨졌다는 단신 뉴스가 나오는데,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 하다.[10]
만화 간츠의 앞부분 역시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듯 하다
[1] 일본어 위키백과의 표제어.[번역] 신오쿠보역 승객 전락사고[2] 시신을 확인했을 때 어머니는 부정했는데, 아버지는 수현이가 맞다고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부둥켜안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교장은 십수 년이 지나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고 다큐멘터리 <가교(かけはし)>에서 회상했다. [3] 그는 이론상 개정된 법률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대상이다 (별세 당시에는 의사자 묘역이 없어서 안장 대상이 아니었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장하지 않은 듯 하다.[4] 참고로 신현구는 이수현의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 후배다.[5] 역도산 역시 한국 출신이라 남편이라면 돕고 싶어했을 거라 생각한다고 한다.[6] 일본어로는 대신(大臣)이라고 쓴다.[7] 광고수익 역시 유가족에게 지급되었으며 이에 앞서 홍제동 화재 사고 순직 소방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철홍을 모델로 한 광고를 방영한 바 있다.[8] 아베 신조 부인이다. 아베 신조는 2006년 당시 일본 90대 총리로 재임 중이었다.[9] 고인과 이름은 다르지만 나이는 같다.[10]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이 일어난 신오쿠보역(JY-16)요요기역(JY-18)은 모두 야마노테선 신주쿠역(JY-17)을 기준으로 한 정거장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