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순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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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순(申日淳)'''
[image]
'''출생'''
1948년
'''복무'''
대한민국 육군
'''임관'''
육사 26기
'''최종계급'''
대장
'''주요보직'''
제28보병사단
제3군단
육군교육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비리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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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국군군인. 1948년 생으로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1]
현역 대장 1호 형사구속 피의자이기도 하다.

2. 생애


출처. 광주고등학교(14회)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26기로 입학, 졸업, 임관했다. 그리고 육사 시절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다시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유학을 가서 그곳도 졸업했다. 이때문에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에도 능해서 출세가도에 든다.[2]
동기로는 국방장관을 지낸 이상희가 있다. 제28보병사단, 제3군단, 육군교육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냈다.
아래 서술된 비리혐의로 수감됐으나 곧 풀려났고 한국 육군협회가 2018년 6월 22일 개최한 '2018 국방 세미나'에 참석하여 한미동맹의 약화를 우려하는 의견을 냈다.

3. 비리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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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을 받으러 들어가는 신일순 대장. 2004년에 공금 횡령으로''' 현직 대장으론 최초로 구속 수감'''되었다. 당시 구속 및 기소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군검찰단 수석검찰관이었던 최강욱. 그러나 군부의 반감을 우려한 정부의 의지[3]에 의해 횡령 금액(1억)[4]을 죄다 추징하면서도 징역형 대신 벌금형을 받았다. 2003년에 소장이 7천만원을 수뢰해 징역 5년을 받은 것과 달리 솜방망이 처벌이란 말이 나왔다. 출처.
그를 구속한 최강욱은 "검찰 알아야 바꾼다"라는 팟캐스트에 나와 신일순 구속사건을 회고하면서 "능력은 분명히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폐쇄적인 군 문화 때문에 출세가도를 달릴 때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막나갔다"고 회고한 바 있다. 미국 유학을 했기 때문에 동기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계속 출세가도를 달렸고, 이러다보니 주위에 조언이나 경고를 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순진할 정도로 죄의식 없이 공금을 꿀꺽했다는 것. "나는 청렴한 군인으로, 월급을 모아서 집을 두 채 산 것이 재산의 전부다. 이렇게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공금으로 생활비를 썼을 뿐이다"고 태연이 자백하여 최강욱을 아연질색하게 했다는 것이다.
부하들을 몹시 잘 갈구는 걸로도 유명하다. 최강욱의 회고에 의하면 신일순이 떠난 6개월 후에 자기가 3군단에 부임했는데, 이때도 그의 파렴치한 행각은 전설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신일순 사령관이 너무나 갈궈서 군단장 직속참모 10여 명이 모두 심장병에 걸려있었을 정도. 최강욱이 분노한 것은, 또한 어려운 부사관들 자녀들의 장학금을 위해 부사관 부인들이 부대 근처에 열린 잣을 따서 만든 장학기금까지도 꿀꺽한 것.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최강욱은 "이런 파렴치범을 꼭 손봐줘야겠다"고 결심한 후 조사를 시작했고, 캐다보니 공금 횡령 여러 건을 포착, 결과적으로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구속된 4성 장군이 되었다.
동아일보의 월간지인 신동아에서 다룬 대목이다.

예비역 중령 K씨는 2년 전 신 대장을 허위공문서 작성 및 직권남용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에 고발한 바 있다. 2000년 5월 3군단 예비군 관리대대장이었던 K중령은 이른바 북풍사건이 언론을 통해 불거진 직후 당시 3군단장이던 신 대장에 의해 보직해임됐다. 북풍사건이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를 과장해 여당에 유리한 선거분위기를 조성했던 사건이다. K중령은 당시 합참 정보부서에 근무했었다.

K중령의 보직해임 사유는 부대 무단이탈에 따른 지휘체계 문란. 근무시간에 부대 인근 병원에 갔다 오면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고 예비군동원훈련장에 보고 없이 들렀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구색 맞추기로 씌운 혐의였고, 진짜 이유는 북풍사건과 관련해 YTN 기자의 전화취재에 응한 데 있었다. 당시 신 대장은 K중령에게 YTN 건을 거론하면서 “너 같은 XX는 인간쓰레기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육사를 나왔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K중령이 북풍사건의 진실에 대해 말하려 하자 “북풍사건엔 관심 없다”며 입을 막았다.

K중령은 보직해임 조치로 자신의 특기인 정보와 아무런 관련 없는 군수사령부로 발령이 났다. 이듬해 보직해임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으나 1, 2심에서 모두 패했다. 그가 신 대장과 당시 3군단 감찰참모를 고발한 것은 행정소송 과정에 자신에 대한 감찰보고서와 국방부 인사소청인사위원회에 제출된 문서에서 사실과 다른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검찰단은 이 고발사건을 육군본부 검찰부로 이첩했다. 육본 검찰부는 감찰보고서 내용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고의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신 대장 등을 불기소처분했다. 지난해 6월 전역한 K씨는 신 대장에 대해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부하는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군 생활 30여년 중 3군단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신 대장이 교육사령관을 지낼 때 예하부대에 근무했던 예비역 대령 K씨는 “신일순에게 조인트 까인 대령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우스갯소리로 ‘신일순과 한번도 같이 근무한 적 없으면 복 받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귀띔했다.

참모총장이 교육사 행정학교를 순시했을 때 일이다. 이 경우 교육사령관은 행정학교장과 더불어 헬기 앞에 대기했다가 총장을 맞이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교육사령관인 신 대장은 총장이 헬기에서 내렸는 데도 한쪽에서 행정학교 장교들을 모아놓고 혼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K씨 기억으로는 “너희들 똑바로 일 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요지였다.

참모총장 비서실장을 지낼 때의 일화도 그가 부하들에게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신 대장의 깐깐한 업무 스타일에 비서실 직원들은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의전과의 한 대한민국 군무원은 결국 심장병을 얻은 후 사표를 냈다고 한다. 총장의 외박 기간에 비서실 전직원을 육사 생도 때처럼 완전군장시킨 후 24시간 근무하게 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연합사 장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된장찌개 사건’은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벌어졌던 일이다. 4월 중순 신 대장은 취임 첫 행사로 연합사 소속 장성들과 그 부인들을 초대해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장소는 서울 남성대 클럽하우스. 참석 인원은 20여명에 이르렀다. 메뉴는 4000원짜리 된장찌개였다. 사전에 신 대장은 자신이 직접 메뉴를 선정한 후 보좌관에게 찌개 하나를 2~3명이 먹도록 주문하라고 지시했다. 즉 사람 수보다 적게 찌개를 시키고 공기밥을 추가하라는 얘기였다.

보좌관이 당일 식당에서 보니 1인용 찌개라 두세 사람이 하나씩 먹기엔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부득이 신 대장의 지시를 어기고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찌개를 주문했다. 다음날 보좌관과 비서실 직원은 신 대장 방에서 한 시간 가량 부동자세로 선 채 속된 말로 엄청 깨졌다. 신 대장은 "왜 지시대로 하지 않았냐" "너희들 돈 들어가는 거면 그렇게 했겠냐"고 호통을 쳤다. 남성대 회동에 참석했던 한 장성은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위로했다고 한다. 연합사에서 신 대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모 장교는 “그처럼 아낀 공금을 유용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출처.
그가 구속된 데는 사관학교 출신 눈치를 안 보는 군법무관들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단 평가도 있다. 당시 신 대장의 구속 수사를 국방부 검찰단이 주도했는데 주무자가 소령이었다. 소령이 대장을 어떻게 구속시키냐며 장교단 내에서 굉장히 싫어했다.
똥별 중에서도 부정부패, 인사 줄타기, 인격 모독에 이르기까지 3안타를 달성했고, 그나마 장교로서 3대 징계 사유인 성 군기, 음주 운전, 보안 사고는 가까스로 피했다.

[1] 오랜 영남권의 득세로 인해 호남의 군맥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꾸준히 군내에 일정한 숫자를 유지했다. 김대중 정권을 만나 호남 출신 군맥들은 주요 요직에 진출했다. 김관진, 김장수도 이 범주에 든다. 근데 둘은 도리어 제대 후 보수정권의 핵심으로 근무했다.[2] 소위 임관 후 대장까지 모든 진급을 1차로 하였다. 이는 창군 70년이 넘는 대한민국 국군 장성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기록이다. 김승겸, 안준석 장군도 모두 1차로 진급했다.[3] 재판부는 금액 대부분이 접대에 쓰였다고 참작했다.[4] 제3군단 군단장 시절에 9천3백만원, 부사령관 시절에 1400만원 수준인데 2003년조영길 국방장관한테 경고를 받은 탓에 부사령관 횡령 금액은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