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도루
[clearfix]
1. 개요
일본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자 전 오사카시장(2011~2015). 일본 유신회(2012년) - 유신당 - 오사카 유신회 - 일본 유신회(2016년)를 사실상 창당하고 이끌었다. 후술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 등으로 2010년대 한국에서도 악명을 떨쳤다. 2020년 현재는 정계를 은퇴한 상태.
2천년대 초반 TV 법률 상담 등에 나와 인기를 얻기 시작해, 7자녀를 둔 다둥이 아빠라는 점까지 알려지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러다 정치계에 발을 들이면서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새 시대 정치를 하겠다 어필하며 일본 유신회를 창당하고 오사카시장에 올랐다. 오사카를 '水の都(물의 수도)'로 만들겠다며 오사카 수변 개발을 이끄는 등 나름 잘 나갔지만, 2013년 위안부 발언으로 사방에서 욕을 퍼먹은 이후 그걸 나름대로는 수습하려다 실패하고 일본 내에서조차 대차게 까인 이후 지지율도 많이 떨어져 결국 정계 은퇴를 하게 된다. 이후 방송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정치하는 동안 생각에 변화가 있었는지 언행이 과거에 비해 많이 유해졌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발언 등으로 인해 극우 인사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후술되어있듯 2014년 재특회 회장과 공개적으로 혐한 현상에 대해 설전도 벌이면서 헤이트 스피치를 멈추라 일갈하는 등 기존의 일본 대중 정치인과는 결이 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속한 정당처럼, 전체적인 성향을 보면 우파적인데 이상하게(?)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게 특징이다.
공식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이것은 하시모토가 부라쿠민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확실히 그의 언행을 보면 오사카 지역주의를 제외하면 현안에 관해선 우익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유독 출신지나 헤이트 스피치를 비롯한 소수자 차별문제에는 좌익 못지않게 민감하다. 아예 파격적으로 호적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하시모토는 극우들에게 "본적지가 어디냐?"는 차별발언을 듣고 있다. 사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우익치고는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3] 그래서 한국인들에겐 극우 정치인 인식이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넷 우익들에게는 반일인사 낙인이 찍힌지 오래인 인물. 특히 유신회가 오사카에서 헤이치 스피치 조례를 통과시킨 후에는 선이 그어졌다.[4]
2. 생애
2.1. 어린 시절
오사카를 기반으로 큰 정치인이기에 간사이(오사카)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알고보면 도쿄도 시부야구 출생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사카로 이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야쿠자 혹은 불량배로서 여러 번 감옥에 왔다 갔다 한 인물이며[5] , 하시모토가 어렸을 때 자살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어릴 때 매우 불량학생이었고, 학교를 그만두고 복학하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시모토는 기타노(北野)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학교는 오사카의 공립 고등학교 가운데 가장 편차치가 높다. 전 법무대신 마쓰시마 미도리와 중의원 아라이 쇼케이가 이 학교 출신이며, 2014년 들어 일본판 고승덕으로 유명해진 노노무라 류타로가 3년 먼저 이 학교를 나왔다. 결손가정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엇나가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애초에 그 깔끔떠는 나가타초[6] 에 그런 불량학생이 들어갈 수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7] . 반대로 반론 측에선 하시모토 도루가 아직도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부라쿠민은 일본 계급에서 최하층에 해당하던 신분이었다. 그의 성인 하시모토(橋下)는 원래대로라면 하시시타로 읽어야 하는 부라쿠민 출신자들의 성이다. 차별 문제로 인해 하시모토로 읽는 법을 바꾼 것이다. 일본 내 부락민 차별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있지만, 성이나 출신지를 잘 벗어나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상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8] . 아직도 대기업 임용이나 결혼에서 차별받는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라쿠민이라는 단어는 방송 같은 곳에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고, 통상적인 대화에서도 그들을 가리키는 말로 '동화(同和)'[9] 라고 에둘러 표현할 정도다. 그가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인정받는 건 이런 그의 출신 덕이 크다[10] .
2.2. 변호사 재직 시절
이후 재수생활을 거쳐, 명문 와세다대학 경제학과에 합격했고, 이후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였다. 일본의 사법시험도 한국에 못지 않게, 아니 한국보다 합격하기 더 어렵다고 봐도 된다. 사법시험 합격 후 로펌에 근무하다가 때려치우고 개업을 한다. 이때 돈이 되는 교통사고 소송만을 집중적으로 담당하며 전문 변호사 역할을 하며 1년에 3억엔(약 30억원)씩 버는 고소득 변호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머리를 파마하고 물들이며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고 출근하는 등의 기행을 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튀는 행동으로 니혼TV의 법률 프로그램인 행렬이 생기는 법률사무소에 픽업되었다.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말빨로 인기를 얻었다. 예컨대 '사랑하는 그 마지막까지' 라고 새긴 커플링를 돌려받고 싶은데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다른 변호사들 모두 법을 따지고 있을 때 "여기 10만엔 받고 말아라. 찌질하게…" 라고 하는 식. 이 위엄폭풍에 인기는 급상승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오사카 부지사에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 있는 일본 예능이다 보니 오와라이 커뮤니티에서는 축하한다는 글도 몇 올라 왔었다. 여기까지는 서울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이혼 전문 변호사가 되어 명성을 얻고 방송에까지 출연했다가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과도 유사한 케이스.
2.3. 오사카부 지사 재임시절
취임사 때는 비장했다. "오사카는 파산 상태다, 청사를 해체하겠다", "나와 함께 죽겠다는 각오로 일해 달라. '''그리고 마지막엔''' '''죽어 달라.'''" 라며… 오사카부의 5조엔이 넘는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과 공무원들의 급료를 절반으로 확 깎아버리고''' 각종 시민단체 지원금 및 복지 예산을 대폭 줄여버렸다.
덕분에 오사카의 재정적자는 줄긴 했다. 그러나 문제 또한 다량으로 발생했다.
하시모토는 신나게 예산을 줄여 겉으로는 재정적자를 해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으나, 오사카 거주민들의 삶의 질은 떨어트렸다. 또한 오사카 사회의 일원인 공무원들의 급료를 줄여, 이들이 오사카에서 소비활동을 하기 힘들게 했다. 근시안적으로 봤을 때는 재정적자가 준 것 같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세수가 줄어들고 거주민의 만족도가 줄어드는 정책을 편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야 어차피 오사카의 재정 상태가 워낙 막장이니 일단 줄이고 보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의 방식이 너무 강압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데에 있다. 재정적자는 복합적이고 섬세한 문제이니만큼 예산 절약을 기본 원칙으로 하되 그 안에서는 다각도로 접근해 해결하는 것이 제일이다. 정말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는 외부 자금을 끌어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 자금이란, 대기업[11] 와 같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나 해외의 대기업에게 부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잦은 테스트와 기밀성을 필요로 하는 업체의 연구소라든가, 재벌 산하의 백화점과 같은 넓은 땅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에게 부지들을 제공하여서 지역의 고용률도 높이고, 그 기업을 따라오는 외부 유입 인구와 관련 인프라의 형성을 통한 자본 유입과 세수 확보, 자본 회전을 노릴 수가 있다. 다만 역으로 이 기업이 이 지역에서 빠져버린다 해버리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니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하는 것. 행정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기본 사항인데, 이는 예산이 정치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며 삭감이 아주 어려운 비재량적 지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정 분야 예산을 무작정 감축하는 방식만으로 손쉽게 해결하려 했다가는 예상치 못한 역풍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심시티나 슈퍼파워2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
하시모토는 아래에서 나오듯이 현재는 복지 정책을 말하고 있는데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포퓰리즘적으로 정책을 미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사카시장인 히라마쓰 구니오가 하시모토의 오사카도 구상을 반대해 걸림돌이 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오사카시장 선거에 출마를 표명했다.
2.4. 오사카 시장 취임 이후
2011년, 오사카부지사를 사임하고 11월 오사카의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인 히라마쓰 구니오 시장은 자민당, 공명당, 일본 공산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런 목적은 하시모토가 도쿄도와 같은 "오사카도 구상" 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관측이 많다. 오사카부지사 선거 때는 자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나 이후에는 자민당이 맘에 안 든다고 스스로 뛰쳐나와서 "오사카 유신회" 라는 독자 정당을 만들고 자신의 측근인 마쓰이 이치로를 오사카부지사로 출마시켜서 당선시켰으며 자신도 오사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12]
오사카시장으로 재임 중인 현재도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중이다. 오사카시 공무원의 업무용 이메일들을 직접 검열하겠다고 자신의 고문 변호사들을 동원하는가 하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 공무원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최근 2년간 특정 정치가를 응원하는 활동에 참가한 일이 있는가", "직장 관계자로부터 특정인에게 투표하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 있는가" 등 22개 항목에 걸친 설문조사도 벌이고 있다. 소속과 직종을 적게 하고 조합원이든 아니든 모두 답을 하도록 하는 아스트랄한 설문조사까지 진행하고 있다.
또한 교육 전문가 오기 나오키가 "학생들의 개성과 특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유연한 유급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유급제도가 필요하긴 하지만 신중하게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걸 교묘하게 왜곡해서 "학력성취도가 낮은 학생은 유급을 시켜야 한다" 라고 교육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이다.
2.5. 일본 유신회 창당
결국 2012년 9월 12일 일본 유신회라는 이름으로 전국구 보수정당[13] 을 창당하고 말았다. 본인이 당대표를 하고 똘마니인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시장이 간사장을 맡아서 전국구 보수정당이라지만 '''사실상 오사카 출신들이 다 해먹는''' 정당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당 본부도 오사카에 둔다니 말 다했다. 거기에 하시모토와 마쓰이는 '''총선에 출마도 안하기로 확정했다'''. 일본 언론들은 어이가 없어하는 중. 당장 일본의 대표 주류언론인 요미우리신문[14] 부터 이 부분을 디스했으니.
게다가 일본 유신회의 로고가 일본 열도를 그려넣은 것인데 거기에 떡하니 '''독도를 그려넣었다!''' 거기에 '''영토수호를 위한 군사력 강화'''를 공약으로 천명해 이 양반이 총리라도 되었다간 '''진짜 독도로 자위대 파병해서 전쟁 일으킬 판이다'''.
일본 유신회를 창당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였으며 오사카시의 오사카 인권박물관[15] 을 '''"일본에는 더 이상 인권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폐쇄하겠다"''' 라고 공언하면서 시의 지원금을 끊는 등 그야말로 막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16]
9월 23일, 뜬금없이 '''독도의 한일 공동관리'''란 걸 언급했다. 한국의 군사력이 만만찮은데다 미국도 한일 간의 정면충돌을 바라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는 것을 무력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 한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된다라고 언급한 것. 그를 위해서 한국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를 확실히 논의하자"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강도가 약자를 죽도록 때리고 강도짓 해놓고 '''"쌍방과실이니 합의 봅시다"''' 랑 같은 의미. 한편으로는 러시아(쿠릴열도의 "북방 4도" 문제)와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의 강제관할권을 수용하게 하도록 압박하자는 주장도 내놓았다. 나름대로 현실적이랍시고 내놓은 주장인 것 같긴 하지만 자국 우익들한테도 욕먹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9월 말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자민당 대표가 된 이후로 '''하시모토의 인기는 추락중이다'''. 요미우리의 여론조사 결과로는 자민당 28%, 민주당 18%의 지지율이 나타났으나 일본 유신회는 겨우 '''2%'''에 불과했다. 아베 신조의 재등장으로 자민당과 민주당의 양당구도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자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자민당 극우파의 대체제였던 하시모토의 입지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17] 게다가 독도 공동관리 등의 국내외 현안에 대한 발언을 당내 의원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쏟아내는 것도 지지율 추락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부분 일본의 정치전문가들은 "하시모토와 일본 유신회가 총선을 치러도 자민당의 연정 파트너가 될 만큼의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말해 사실상 하시모토의 정치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위기상황을 나름대로 의식했는지 뜬금없이 도쿄도지사직을 박차고 신당창당을 선언한 이시하라 신타로와 다시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11월 3일에 교토 오쿠라 호텔에서 만나 '''제2의 메이지 유신''' 개드립을 치면서 회동하였으나 원전과 증세문제에 부정적인 하시모토가 입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성과 없이 끝났다.
11월 16일에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면서 일본은 총선정국으로 들어선 상황. 이에 하시모토는 사실상 이시하라의 영향권에 있는 민나노당과 정책공조를 선언했으며 같은 날 도쿄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와 다시 만나 보수연대를 모색했다. 하시모토가 일본 유신회의 공약사항을 이시하라가 인정해준다면 보수연대를 할 수 있다고 밝혀서(이시하라 신타로의 직할 정당인 태양당과의 합당 포함) 이시하라의 입장표명이 주목되는 상황.
결국 11월 17일, 이시하라가 '''"하시모토가 요구하는 사항을 전부 수용하겠다"'''라고 선언하면서 하시모토의 일본 유신회와 이시하라의 태양당이 '''합당을 선언했다'''. 이시하라는 하시모토와의 연대를 위해서 전날 선언했던 감세일본과의 합당까지도 뒤집을 정도. 형식은 태양당이 일본 유신회로 흡수통합하고 당 대표는 이시하라가 맡으며 대표 대행은 하시모토가 맡는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민당-민주당-극우 보수연대(이시하라+하시모토+민나노당)의 3파전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은 태양당이 아닌 일본 유신회로 통합하게 되었다고.
12월 16일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일본 유신회가 54석으로 약진하면서 제3당의 지위를 확보했다. 다만 현직의원이 된 이시하라와 오사카시장의 지위를 유지중인 하시모토 사이에 벌써부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하시모토가 아베의 수상취임을 지지하자 이시하라가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것.
여담으로 어차피 일본의 수상 선거는 국회의원들이 하므로 후보와 투표수는 정당에 따라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고 투표 자체는 의례 행위에 가깝다. 이미 자민당이 과반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유신회가 아베를 지지하느냐 마느냐는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아무리 야당이라도 총리 후보를 내고 투표를 하는 것은 관례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하시모토의 아베 지지 발언은 '유신회'라는 정당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이시하라가 일본 유신회에서 자신 계파의 의원들을 이끌고 나가서 민나노당과 합당할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2013년 7월에 열릴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약진해서 자민당을 견제할 유력정당으로 떠오를 구상중인 하시모토의 머리가 복잡해질 듯하다.
6월 19일에는 같은 당의 원조 막장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하시모토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 "심각한 민폐다"(大迷惑だ)라고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 당의 지지도를 깎아 먹어 민폐'라는 말인데, 자국민에게도 망언을 남발하는 이시하라가 이런 비판을 할 정도면 하시모토의 이번 망언이 얼마나 파장이 컸는지 알 법하다.
이에 대해 적당히 물러서거나 입을 다물어도 모자랄 판에 하시모토는 (자신의 발언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間違っているとは思っていない)"'''며 끝까지 일관된 막장성을 보였다. 이시하라의 이런 발언은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면서도 정신 못차리는 하시모토를 비판해 일본 유신회가 붕괴될 경우 발을 빼기 위한 명분 쌓기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악의 경우 7월 참의원 선거 이전에 이시하라의 간토파와 하시모토의 간사이파가 찢어질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 그러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멸은 피하자는 생각이었는지 양측이 한발 물러서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봉합이라는게 대체적인 의견.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열린 6월 도쿄 도의회선거에서 일본유신회는 그나마 있던 의석을 까먹으며 참패했다. 자민당이 전원 당선에 민나노당까지도 의석수를 그럭저럭 늘린 반면 일본유신회는 있던 의석을 까먹었다는 점에서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될 전망이다. 물론 도쿄 도의회선거 결과가 참의원 선거와 꼭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으나 일본의 최대 도시인 도쿄의 상황이 이렇다면 참의원 선거의 흐름도 유사할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결국 하시모토 도루의 정치 인생은 파탄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
2013년 6월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20석 이상을 얻지 못하면 일본 유신회 대표직에서 사퇴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깨고 사퇴하지 않았다. 기사
별다른 효력은 없으나 오사카부 내의 사카이시 의회에서 하시모토 도루와 이시하라 신타로의 공직사퇴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또한 하시모토가 방문하려 했던 샌프란시스코시 의회에서도 하시모토의 망언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2.6.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관서지방에서의 지지세가 남아있었기에 '''예상보다는''' 선전했지만 획득의석수가 하시모토 자신이 제시한 승리 기준에 못미쳐[18] 사퇴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본인은 사퇴하는 듯했으나 이시하라가 "책임져야 한다면 나도 책임져야 한다"면서 되려 하시모토를 만류해 둘 다 사이좋게 당대표에 잔류하는 생쇼를 벌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나마 일본 유신회가 칸사이에서 선전한 반면 칸토에서는 전멸했기 때문에 칸사이의 맹주인 하시모토의 입김이 더 강해져버린 탓이다. 아마 칸토에서도 성적을 냈다면 이시하라가 당을 장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대표는 계속 맡게되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야권이 뭉쳐야 한다면서 야권발 정계개편을 추진해 일본 유신회의 생존을 도모하겠다는 전략이지만 다함께당은 자민당-공명당 연립정권에 자기들도 참여시켜달랍시고 일본 유신회에겐 사실상 즐~을 외치고 있는 상황. 하시모토가 뭔가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지않는 이상 일본 유신회나 하시모토나 향후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2013년 9월 29일 치러진 오사카부 사카이시 선거에서 무소속인 타케야마 오사미 전임 시장이 일본 유신회 니시바야시 카츠토시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하시모토 도루의 정치 생명이 끝나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기사 하시모토 시장의 목표였던 오사카도 구상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사카이시에서 참패하면서 그의 목표에 커다란 지장이 생긴 것. 이러한 결과에도 하시모토 시장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2014년 5월, 유신회가 에다 겐지의 결속당과의 합당을 두고 두 파로 분리되었다. 하시모토가 결속당과 연대를 시도하면서 일본 유신회의 분당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하시모토는 결속당 대표 에다 겐지와 회동을 가지고 정책연대를 하겠다고 나섰으며, 결속당과의 합당까지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결속당은 유신회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결정적인 문제라면 당을 나눠도 좋다"라고 까지 발언했다. 심지어 이시하라가 자신의 계파인 태양당파를 거느리고 자민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2014년 5월 28일 이시하라와 하시모토가 분당하는데 의견이 일치해서 분당하게 되었다. 2분당 합의 후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향후 어느 정당에서 활동할 것인지 투표를 했다. 그 결과 소속 국회의원 중 22명은 이시하라 신당으로, 38명은 하시모토 신당, 그리고 2명은 무소속으로 남았다. 7월 31일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나카야마 나리아키, 나카야마 교코, 마쓰자와 시게후미, 다모가미 도시오 등이 차세대당을 창당하자 일본 유신회는 해산되었다. 하시모토는 이후 결속당과 합당해 新일본 유신회를 창당할 것이라고 밝혔고, 유신당을 창당해 초대 공동대표가 되었다.
2014년 7월 10일, 오사카 인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혐한시위에 대해서 "너무 심하다. 직접적인 규제는 어렵지만, 일정한 개입은 어쩔 수 없다"며 시위 내용을 평가하는 제3자 위원회를 신설해 평가 결과를 경찰에 전달, 문제가 있는 단체에는 가두선전과 도로사용 허가를 내주지 말 것을 요구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할 것임을 밝혔다. 지금까지 재특회에 대해서 방관 혹은 묵인하며 호응하는 듯한 의사를 밝혀온 것에 비해 180도로 변한 시각이다. 또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민사 소송을 시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발언도 하였다. 기사.
10월 20일에는 재특회의 수장 사쿠라이 마코토를 오사카시청으로 불러다 토론회를 벌였다. 유튜브 링크. 사쿠라이는 늘 그렇듯 "당신이 말하는 헤이트란 무엇을 말하느냐.", "한국도 반일이라는 명목으로 헤이트 스피치 한다. 고로 우리의 주장은 타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을 고발하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반복했고, 하시모토는 "오사카에서 그따위 차별적 발언은 당장 그만둬라.", "참정권도 없는 사람들에게 트집 잡아 봤자 뭘 하겠냐. (뭔가를 주장해서 이뤄내고 싶다면) 힘있는 자들에게 가서 따져라.", "민족이라는 카테고리로 싸잡아서 말하지 말라.", "어쨌든 시설 관리는 오사카시에서 하고, 오사카시는 너네 같은 활동을 용인할 수도 없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따졌다. 사쿠라이는 하시모토에게 "일개 지방의 수장 주제에 개소리 말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하시모토는 '잘났으면 니가 당선이 되보던가?'라고 맞받아치자 사쿠라이는 '나는 정치엔 관심이 없거든?'이라고 발빼고[19] 서로 꺼지라고 욕을 퍼붓는 등 결국 니놈저놈 소리에 쌈박질 직전까지 가는 등 난장판이 되었고 30분 예정이었던 회견은 10분만에 끝나버렸다.
이러한 하시모토 도루의 행보에 대해 TV아사히에 나온 한 평론가는 “하시모토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단체의 대표를 공식 무대에 올려 놓고 취재진을 부른 것 자체가 저질 코미디”란 평을 했고, 일각에선 이런 행보가 오사카 방문 한중 해외 관광객이 너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무리 일본 내수 시장이 넓다지만 관광객이 던져주는 수입도 무시하면 안 된다. 특히 오사카는 한국, 중국 관광객이 많았는데 "관광객이 줄어들었다"는 푸념이 상인들 입에서 나오는 판국이라고 한다. 또는 막말가이지만 본인 스스로가 일본에서 차별받는 부락민 출신이었던만큼 어떤 특정 집단을 카테고리로 싸잡는 인종주의적 행위에 본인 스스로가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민감하다는 시각도 있다.
2.7. 정계 은퇴
오사카부(府)/오사카시(市)/시정촌으로 나뉘어 행정지역이 센고쿠 시대가 되어있는(…) 오사카를 도쿄처럼 도(都)로 대통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안인 '''오사카도구상''' 주민투표가 부결되면 정계은퇴를 하겠다고 배수진을 쳤지만, 개편직후의 혼란을 우려한 노년층의 반대로 인해 근소한 차로 부결되었고개표 결과,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20] 더군다나 하시모토 도루가 은퇴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에다 겐지를 비롯한 일본 유신회의 뒤를 잇는 유신당(維新の党)인물들이 줄줄이 사퇴하여 유신당이 박살나는 사태까지 나버렸다. 우익 행보를 제외하면 말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일본 정계에서 유신이라 말할만한 행보를 보여줬던 유일하다시피한 인물이었지만, 무리수 덕분에 한방에 훅 간 것은 한국의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2015년 8월 27일, 유신당 최고고문 자리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탈당했다. 그와 동시에 하시모토의 측근인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부 지사도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탈당했다. 그러나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고 하여 정계 은퇴를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유신당 탈당 선언을 하면서 "제 탈당은 절대로 당을 분열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를 지지하던 세력들에게 새로운 당을 창당하겠다고 공지를 돌린 것이 알려지면서 애초부터 계획적인 준비였음이 드러났다.
2.8. 은퇴 번복
2015년 10월 2일 오사카 유신회[21] 창당을 표명하고, 트위터를 통해서 "유신당은 일본에 있어서 백해무익하므로 세금낭비를 막기 위해서 직접 박살내겠다"라며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유신당은 2016년 민주당과 통합해 민진당이 되었다.
이런 하시모토에 맞대응해 2015년 오사카시장 선거에선 민주당과 일본 공산당 및 외곽단체들이 자민당 소속 오사카 시의원인 야나기모토 아키라 후보를 지원하는 그야말로 중앙정치에선 실현되기 어려운 3당의 '''그레이트 합체'''가 실현되었다. 물론 전에도 오사카에 한해선 했던 전력이 있지만...허나 선거에선 하시모토가 밀어준 요시무라 히로후미 후보가 오사카시장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2015년 12월 12일 당대회에서 마쓰이 이치로가 당대표로 선출된 뒤 하시모토는 법률정책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12월 28일 오사카시장직에서 물러난 뒤 잠행 중인데 2016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나올 것이란 전망도 돌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6년 1월 유신회는 공명당, 일본 공산당과 함께 일본 전국 지자체들 중에선 최초로 오사카에서 혐한 헤이트스피치 금지조례를 통과시켰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TV에 다시 나오는 중이다. TV 아사히에서 밤 11시 시사 예능프로그램인 <하시모토X하토리의 새로운 프로그램(가제목)>을 맡는 중. 이 프로그램에서 도널드 트럼프 SP를 다루기도 했다.
2.9. 성향의 중도화
하시모토 종합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트위터, 잡지 그리고 본인이 메인 MC로 출연하는 <하시모토 X 하토리 프로그램>이라는 매체를 통해다양한 정치 이슈에 대해서 독자적인 의견을 내고 있는 중.
2017년 현재 그의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예전 하시모토를 생각하면 다소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논조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하시모토 극장>이라고 해서 '다 때려부수고 새로 만들자'라는 식의 망언과 막나가는 언행 등으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최근의 언행은 그런 언행을 비교하면 다분히 상식적이고 온화한 논조로 바뀌었다.
2017년 19대 대선 기간 중 한국을 방문하여 트위터로 '지금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서울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이 무너진다.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이런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22] '는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인 입장의 트윗을 했고, 2017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선 '더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했다'라는 말로 아베 정권이 심판당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했다. 예전 '일본에 필요한 것은 독재다'(…)라는 발언과 비교해보면 상당한 갭이 있다.
가장 논조가 크게 바뀐 것은 그를 정치적 파탄으로 몰고 간 위안부 문제인데, 그는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에서[23] 자신이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대해 한국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다른 패널이 "어차피 한국과는 사이도 나쁜데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제지하며 "좀 더 한국인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하여 확연히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줬다.(한국 국민이 보기에) 위안부 합의는 국회 차원에서 비준하지 않았다. 따라서 법적 효력은 일단 없다고 볼 수 있다. 외무 장관 레벨의 문서가 없는 정치적 성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법률적으로 보면 레벨 낮은 합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은 이에 납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위안부 문제는 타국의 사례를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시모토가 자신의 스탠스를 상당 부분 바꾼 이유에는 사상적 변화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재기를 위한 부분도 어느정도는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숱한 망언으로 정치적인 데미지를 심각하게 입었기에 온건/합리적 노선으로 변경하여 그간 입은 데미지를 만회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 자신은 더 이상 정치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언론에는 여전히 잠재력 있는 정치인 중 한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입각설도 나오고 있다. 사실 하시모토의 내심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자신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고이케 유리코에 대한 극딜이다.
하시모토가 트위터에 고이케 유리코가 이끄는 도쿄 도정을 언급한 것을 보면 비판 일색이다. 2017년 7월 도쿄 도의회 선거가 끝난 다음에 고이케가 도민 퍼스트회 대표를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사임한 것에 대해 "공당의 대표가 저렇게 중요한 사항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거나 그 대표를 이어 받은 노다 카즈의 과거 발언인 '일본국 헌법은 무효다. 대일본제국의 헌법을 부활시켜야 한다.'에 대해 언급하며 "저런 정계퇴출감의 발언을 한 사람이 대표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하였다. 일본에서 고이케는 종종 하시모토와 비교당하는데[24]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하시모토로서는 자신의 포지션을 뺏어가는 듯한 고이케의 존재감 상승이 아무래도 편친 않기 때문일 것이다.
9월 25일을 마지막으로 <하시모토 X 하토리 프로그램>이 종료되었다. 때마침 중의원의 해산이 발표되고나서 최종회를 방영했기 때문에 일부 일본인들은 정계복귀를 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예전부터 이 날을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을 종료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이후 행보에 대해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시청자들이 '일본 총리가 될 생각은 없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총리가 되기에는 각오가 부족하다. 총리가 되고 싶은 사람을 서포트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으며, 정계복귀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는 '나는 정치적으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정계복귀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으나 이는 겸양의 표현으로 봐야할 듯 하다.
왜냐하면 본인은 정치적으로 죽었다고 말은 하기는 했으나, 다른 일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게 문제. 상술했듯이 이 프로그램에서 시청자의 하시모토에 대한 첫번째 질문 자체가 '총리가 될 생각은 없나?'라는 것이다. 또 인기 프로그램인 <거기까지 말하는 위원회>에서도 흥미 위주이긴 하지만 포스트 아베를 묻는 설문에서는 하시모토를 총리 후보로 넣고 진행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계복귀는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지금은 스스로가 자숙할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정치에서 항상 비자민 보수의 지분은 어느정도 있고, 고이케가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하시모토가 다시 전면에 나설 명분이 생긴다.
'''하시모토의 성향 변화에는 딸의 친한 성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시모토는 딸바보인데, 딸이 방탄소년단 ARMY, 그것도 정국이의 광팬이라고. 그리고 그 딸이 맨날 방탄 노래 듣고 음반을 사서 전파를 하는데, 딸바보인 하시모토 본인까지 '''같이 세뇌당했다'''고 한다.
하시모토 도루는 기본적으로 우익 인사다 보니 우익 지지층에 맞는 반한 발언은 가끔씩 하는 편인데, 이전보다는 확실히 반한 성향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대상(작품상)을 받자, 하시모토는 집 근처 영화관에 딸하고 같이 기생충을 보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런 행보의 변화 때문에 2019년 이후의 일본 넷 우익들은 하시모토와 유신회를 자이니치가 장악했다며 까는 중이다.
2020년에는 빌보드 Top 100 1위를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가 차지하자 이를 축하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고, 넷 우익들은 이 모습을 두고 '''하시모토는 얼른 입헌민주당으로 꺼져라'''고 비난 세례를 퍼부었다.(...)
2020년 상반기에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재밌게 봤다고 언급했다.라디오[25]
2.10.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유신회가 고이케 유리코의 희망의 당과 연대하자 고이케를 헐뜯었던 스탠스를 바꾸어서 어느정도 우호적인 트윗을 하기 시작했다. 민진당 의원들을 희망의 당의 당적을 가지고 출마시킨다는 무모한 정치적 실험을 한 마에하라 민진당 대표의 판단을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며 과감한 행동을 칭찬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희망의 당은 대패, 유신회도 의석수가 줄어드는 패배를 당해 각 당에 자중지란이 일어나자 이를 옹호하고 있다. 오사카부 제19구에서 당선된 유신회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이 마쓰이 이치로 대표의 책임론을 꺼내들고, 희망의 당에서도 고이케 대표를 향해 사퇴론이 고개를 들자 두 경우 모두 "니들 누구 때문에 의원 뱃지 달았다고 생각하냐? 머리가 나쁜 국회의원들이 많은 것 같다."며 비판했다.
하시모토는 계속 집요하게 마루야마 의원을 트위터 상에서 공격했는데, 이 때문인지[26] 결국 마루야마 의원은 유신회를 탈당했다. 바로 이때 마루야마 의원이 한 말이 의미심장했는데 '당 내에서 누구도 하시모토에게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이 말이 맞다면 하시모토는 유신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원로가 아니라 당의 대주주라는 소리가 된다. 아무래도 하시모토는 마츠이 대표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총선거가 공시되자 하시모토는 유신회와 연대한 희망의 당을 호평했는데, 그의 행동을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희망의 당 그리고 그와 연대한 유신회가 성장하게 되면 그걸 발판으로 정치적 재기를 하려던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2017년 방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아베 정권이 추진하던 카지노 사업과 관련해 강원랜드를 방문했다고 한다.#
2018년 9월 13일에 <정권탈취론>이라는 자신의 정견을 담은 저서를 출간했다. 자신의 트위터에 9월 내내 홍보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일본 아마존 베스트 셀러 정치 부분에서 1위를 할 정도인 것을 보면 관심을 받긴 한 듯. 재미있는 점은 그가 정치인이던 시절 아사히신문사와 대립이 심했는데, 이번 저서의 출간은 아사히신문의 계열사인 아사히 신서에서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2019년에 한일갈등에 대해서 도라에몽의 노진구에 빗대어 한국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을 주장했다.#[27] 2월에는 한일갈등에서 자국이 한국을 너무얕잡아 본다면서 한국에 대응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28] .
하시모토 본인은 TV나 인터넷 방송 출연하거나 일본 유신회 당내 행사 때 비공개로 참가하는 정도로 정치권과는 거리를 둬 왔다. 그러다가 2019년 7월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유신회가 간사이 지역에서 표를 쓸어담고 간토 지역인 도쿄도와 가나가와현에서도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그래서 하시모토가 이번 선거의 숨겨진 승리자로, 차츰 명분을 쌓아서 정계 복귀하는 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의원 선거 후 자신의 딸의 사례를 들면서 "젊은이들은 한국 노래 같은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 세대가 바뀌면 한일갈등이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했다.
2019년 8월 들어서 돌연 레이와 신센구미 대표 야마모토 타로에 우호적인 반응을 트위터로 보이고 있다. 8월 들어서 같이 방송에 나와서 정견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데, 확실히 방송 출현 후 제25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후 인기 상한가를 달리고 있는 야마모토 타로 코인을 타는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또한 그의 주장이던 장애인 복지 문제를 자신도 거론하며 오사카부지사에게 트위터로 그 문제에 대한 오사카부정 "충고"[29] 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에서 자민당과 유신회는 야마모토의 들러리였다", "야마모토 타로씨의 공약에 무임승차 하지 마라", "야마모토 타로가 말하는게 더 신뢰감 있다"는 반응이 있을 정도로 그리 좋은 반응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행보를 보면 일본 유신회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야마모토 타로와 친해진 뒤 그의 인기에 묻어가서 자민도 호헌연대도 아닌 생활이나 복지 등에 중점을 둔 제3지대를 형성하려는게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에 대해서 소다 카즈히로 영화감독[30] 은 "하시모토 도루 씨는 인기인인 야마모토 타로씨에게 친한척을 해서 마음을 끌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혼자 죽으세요"같은 말을 하는 하시모토 씨가, "살아있어도 좋습니다"같은 말을 하는 야마모토 타로가 될 가능성은 제로는 커녕 마이너스입니다. 야마모토 타로는 '하시모토 도루적'인 것과 싸우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모른다니"로 비판을 가했다. 그에 대해서 트위터리안들도 "하시모토가 오와콘화되니까 별짓 다한다", "하시모토 씨는 이제 내리막 길!", "하시모토 도루의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 야마모토 타로"같은 반응을 할 정도...
야당에 대해 "야당이 정권교대를 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직이나 지방 행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을 말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실행"하여 자신들의 정치를 유권자들에게 체감하게 해야 한다. 유신회가 오사카에서 강한 것은 오사카의 유권자가 유신회의 정치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정권탈취론 책 아마존 링크를 달았다. 홍보도 홍보인데, 일본 야당들이 세가 약한 이유가 정말로 각 지방자치단체 단체장을 못 맡아봐서라는 설도 있다. 야당쪽에서 추천한 인사가 지자체 단체장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 인사들은 '''일본 국회에 오기 싫어한다'''. 때문에 일본 야당 국회의원들은 정치력은 있지만 실제 정권을 인수했을 때, '''관료 조직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이 안 된다'''. 일본 민주당이 정권 잡고 순식간에 망한 이유가 총리들의 성향 자체는 개혁적이었지만, '''실무 경험 부족'''으로 관료 조직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외교 경험도 부족해서 외국과의 외교에서도 실수가 빈발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조직을 통솔해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 정권을 잡게 되니 내부 마찰로 무능한 부분이 커지는 것이다.
2019년 10월호 문예춘추에서 마스조에 요이치 전 도쿄도지사와 한일관계를 주제로 대담에서 일본 기업이 압류하면 한국 기업도 압류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에 따른 경제위기 대응 차원에서 모든 일본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10만엔(약 114만원)을 지급하는데 이를 공무원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논쟁에 불을 댕긴 것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부 전 지사로 지난 21일 “경제가 어려워져도 급여가 전혀 줄지 않는 국회의원, 지방의원 및 공무원들은 10만엔을 받을 수 없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방송인으로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다카스 가쓰야가 “경제 지원에도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공무원의 경제사정 악화는 맨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다”며 하시모토의 발언에 힘을 보탰다.
2020년 오사카도 전환 주민투표이 다시 한번 반대 다수로 무산되면서 사실상 정계 복귀가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3. 논란
3.1. 잦은 망언
문제는 이런 인간이 일본에서 트위터 팔로워 60여만명을 거느린 인기 정치인이라는 점. 2010년대 초반 하시모토는 자신의 이런 인기에 거침없는지 대놓고 '''"일본에 필요한 건 독재다"'''라는 정줄 놓은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왜 이런 말을 했는고 하면, 일본은 정치 세력간 정쟁으로 1~2년마다 총리가 바뀌어 중앙집권정책 및 정치의 안정을 실현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또한 중국에 정부개발원조를 주는 것을 매춘 행위라며 반중임을 드러냈고[31] 일본의 핵무장도 주장하는 등 실로 위험천만한 소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과 한국은 핵무장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나 국제 협약에 의해 제조를 하지 않는 상태로, 일본이 핵무장을 해 한국에 핵무기 제조의 명분을 준다면, 세계의 화약고 중 하나인 동북아시아의 전 국가가 핵무장을 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에 진 빚 따위는 없다."'''라면서 한국이 제기하는 과거사 청산을 생깔 태세인 걸로 보인다. 오사카부 내 교육 예산과 지원금을 늘리면서 조총련계 조선학교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반면,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소속 한정이긴 하나 재일 등 영주권자의 참정권에 대해선 인정하자는 이중적 태도로 극우 지지자들을 아리송하게 했다. 의외였던게 그의 정치 성향은 어디까지나 우익 심지어 극우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전후 일본의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조총련 차별에 대한 문제 의식은 대체로 일본 좌파 진영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단,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끊은 이유는 그의 극우 성향보다도 소위 조총련계 민족학교의 교실마다 걸린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일반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할 뿐더러, 심지어 일본의 교육 과정을 대체로 따르지도 않고 상급 학교 진학이라는 입시 제도에서도 벗어나 있으면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지원을 해줄래도 그런 결정이 정치가로서 일본에서 인기를 얻기 힘든 실정이다.
어쨌든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이용해 정치를 하려는 이시하라 신타로나 하시모토 도루 같은 세력은, 특히 하시모토의 경우 대중 지지를 등에 업고 이시하라 등과 연대해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유력한 제3 전국 정당 세력으로 일어서겠다는 야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무산) 하시모토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 중의원 후보 300-400명을 내서 200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까지 밝혔었다. 총리 직선제를 주장하며 사실상의 대통령을 꿈꾸는 모양.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두고 오사카부와 오사카시에서의 대대적인 복지 축소와는 앞뒤가 안맞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기초생활연금 같이 귀여운 '기본소득제' 가 아니다. 물론 기본소득제의 경우 기존 복지 제도 축소와 연계해 우파가 먼저 내놓은 담론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복지 이슈는 좌파가 선점하는 감이 있어서… 어쨌든 관련 논의는 기본소득제 항목 참고.
오사카부 지사 땐 유명 축구선수와 접견하는 자리에서 '''7명의 친자녀들을''' 동석시켜 논란이 됐다. "아버지 직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어린이의 인권을 유린한 것" 이라며 흥분했다.
손정의 등 기업가들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한국의 뉴데일리도 신나게 응원했다.#
그리하여 국내에선 2012년 들어서부터 그의 만행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이 사람에 대해 말이 나올 경우엔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누구든 이 인간이 벌이는 행각이 포퓰리즘에 기반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국민이 불만이 있는 부분을 해결한다는 것은 포퓰리즘이라 하더라도 좋은 것 아니냐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이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뛰어넘는 '극장 정치인', '정치 아이돌', '언변 정치인', 사실상의 독재자라는 평가도 있다. #[32] 한때 중앙일보에서 올린 평가도 있었지만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지워졌다.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보수 신당 창당도 생각해본 모양이지만 무산된 모양이다. # 하시모토 입장에서는 간사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오사카 유신회만으로는 전국적인 바람몰이가 힘들기 때문에 이시하라와의 연대를 지향한 것 같지만 서로의 입장차로 무산된 듯.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전 대표도 하시모토와의 연대를 꾀했으나(!) 하시모토가 '''"필요없다"''' 한마디를 시전, 쿨하게 무산됐다. 하지만 지금 하시모토가 하는 짓을 보면 오히려 거절당한 게 전화위복인 상황.
오자와 그룹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중의원의 민주당 단독과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라 2012년 하반기중에 중의원 선거가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하시모토의 오사카 유신회가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도 있다. 하시모토의 인기는 높지만 하시모토의 공언대로 300명 이상의 후보를 내서 200명 이상을 당선시키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란 의견이 많다. 실제 하시모토가 운영중인 유신정치학원에서 후보감들을 키우고는 있으나 현실적으로 민주당이나 자민당의 현역의원들을 밀어낼 수준의 인물들은 아니라는 분석. 물론 하시모토의 인기빨로 당선자를 늘릴 수도 있겠지만 하시모토의 공언이 현실화 될지는 두고봐야 할 듯. 게다가 간사이 지방에 대한 간토 지방의 반감이 워낙 강한 것도 있고.
2012년 6월 4일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차기 중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하시모토의 오사카 유신회를 찍겠다는 응답이 무려 28%를 기록했다. 이 비중은 간사이 지방에선 41%에 달했으나 간토 지방의 도쿄에선 22%로 비교적 저조했다. 그러나 자민당(16%)이나 민주당(14%)을 모두 앞선 수치이긴 하다. 후덜덜.
여담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함께 대원외고를 방문해 "교육의 모범" 이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정작 뒤로 보이는 학생들은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 [33]
법률프로그램 출연 당시 배용준과 닮았다는 의혹으로 '법률계의 욘사마' 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정작 도루 본인은 '닮지 않았다' 라며 부정하고 있다.
2012년 7월 19일, 일본 언론은 일제히 하시모토의 불륜 스캔들을 보도했다. 발단은 주간문예춘추가 2007년 하시모토와 불륜관계였다는 술집 여성과의 인터뷰를 내겠다고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하시모토는 불륜을 인정하면서 '''"오사카부 지사가 되기 전에는 성인군자처럼 살지는 않았다"''' 라고 언급했다. 주간문춘의 보도에 의하면 하시모토의 아내가 6번째 아이를 낳고 7번째 아이를 임신한 사이에 이 여성과 만났으며 모텔에서 코스프레 플레이를 즐겼대나 뭐래나. 이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할 가능성이 거론되었으나 일본인들은 정치가의 사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며 도덕적으로 정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보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고 넘어갔다.
이런 잡음을 일소하기 위해서인지 하시모토는 본격적으로 보수신당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9월 중에 중의원이 해산될 것이 유력한 것으로 보여 이에 대비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전현직 의원들에게 신당참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민주당에서는 오사카 유신회와 도주제[34] 연구회를 함께 하면서 인연을 맺은 마츠노 요리히사 전 관방부장관 등의 참여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당에서는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신당 참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자민당이 다니가키 대표의 후임으로 아베 전 총리를 경선없이 대표로 단독추대할 가능성도 있다고 하여 참여는 유동적이다.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연대가 무산된 상황이라 하시모토의 입장에선 아베 전 총리라도 끌어들어야 할 판. 하지만 결국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영입하는 건 실패했다. 다만 아베 전 총리는 자신이 자민당 대표가 되고 중의원 선거에서 제1당이 된다면 하시모토와의 연대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하시모토의 최측근인 나카타 히로시 요코하마 전 시장의 발언에서 나온 것으로 오사카 시정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출마 가능성은 없지만 다만 국회에서 오사카도 구상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출마할 가능성은 있다고 하는 상황. 일각에서는 오사카시장으로 남아있으려는 게 총선 패배 등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포석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3.2. 위안부 망언 파문
하시모토가 "전쟁 당시 일본군에서 종군위안부 제도가 필요했다"는 '''망발'''을 늘어놓아 분노를 샀다. 기사. 일본 정부에서는 "개인의 발언이며 정부 방침은 이와 다르다" 라고 변명하고 있다.[35] 또한 주일미군에게 "풍속업소를 활용하여 성욕을 해소하라"는 정신 나간 주장도 하였다. 기사.[36]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일본의 위안부 동원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하지만 일본 정부 측은 "위안부는 인정하지만 강제성이 없었다"는 주장이라 팀킬이라 하긴 어렵다.) 평가가 개념을 상실했지만. 일본 극우 입장에서는 팀킬 수준이고 일부 정치인들은 하시모토를 실드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어이가 가출한 발언에 주일미군 사령관은 "하시모토의 발언은 어리석다!!"라고 비판했으며 일본 언론들도 비판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극우 논조로 유명한 우익언론인 산케이 신문조차도 '''"여성의 존엄을 해치는 것"''' 이라고 비판했으며 아사히 신문은 '''"이것이 정치인의 발언인가"''' 라는 사설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 게다가 일본 유신회와 선거공조를 해왔던 민나노당은 하시모토의 발언에 대해서 선거공조를 재검토하겠다고 발언했다.[37]
사실상 하시모토의 발언은 천조국의 심기에 민감한 일본의 상황상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격'''이라, 하시모토는 정치 인생상 최악의 위기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아베 신조 입장에서도 자기가 통치하는 국가. 그것도 자기와 같은 진영에 속하는 유명 인사가 헛소리를 떠든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
여기에 대해 하시모토는 '국제감각이 없었다' 라면서 표현이 부적절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발언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파문을 일으킨다고 해도 의논하는 것이 세계 표준' 이라며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했다. 마이니치 신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24일 하시모토 시장을 만나 면담할 것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혹시나 하는 일이지만 하시모토 시장이 할머니들 앞에서 망언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사.
미국에서도 하시모토의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위안부 문제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온 일본계 미국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성명을 발표해 하시모토를 규탄했다. 국무부 대변인과 # 에드 로이스 공화당 하원의원 #까지 나서서 하시모토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일본 우익들의 입장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의 반응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그저 깨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시모토는 17일 트위터를 통해 '전시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서구권 제국에서도 현지 여성들을 사용했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황판단 못 하는 넷 우익들은 좋다고 하시모토를 응원하는 중.
결국 그의 이러한 망언으로 인해 일본은 물론 우익마저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해당 기사 자민당과 민나노당이 이렇게 하시모토를 멀리하는 데는 하시모토의 망언이 일본 내에서도 여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38] 여성표가 대거 이탈할 것을 우려한 조치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일본 유신회 소속의 핵폭탄급 망언제조가 니시무라 신고가 "도쿄에 한국인 매춘부가 넘쳐난다"라고 하시모토의 망언에 기름을 들이붓는 짓을 했다. 특히 현장에서 일본인 기자가 국가명 언급은 철회하라고 항의하자 웃으며 "아, 그래 위안부?" 같은 비꼬는 말까지 하여 하시모토를 더욱 궁지에 몰았다. 니시무라는 발언을 철회하고 급사과 하긴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결국 빠르게 제명되었다.
하시모토 대표는 5월 29일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니시무라 의원의 발언은 한국인에 대한 모욕이며 정치가로서 함량 미달이다"'''면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만큼 당을 떠나면 사퇴하는 게 당연하다"라는 자기 모순적인 발언을 하면서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하시모토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망언 퍼레이드를 했다.''' 5월 20일 일본 유신회 행사에 참석해서 '''"일본도 전쟁에 위안부를 동원한 건 잘못이지만 서구 열강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 때 그렇게 했다."'''라면서 물타기를 시도했다.[39] 그러나 일반적인 성매매와 엄연히 전쟁범죄인 위안부 제도를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이런 되도 않는 물타기에 비웃음만 사는 중. 한국인 매춘부 발언 파문을 일으킨 니시무라 신고는 제명시켜 놓고선 윗대가리인 하시모토는 저런 발언을 해도 제제를 가하지 않아서 형평성의 문제까지 제기될 조짐이다. 수습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저런 망언 폭탄만 터트리고 있어서 일본 유신회의 지지율은 하락 추세이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비판에 여성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며 같은 극우이지만 아베 신조와는 달리 능력에 의구심을 가졌던 다른 국민들도 등을 돌리는 추세인 걸로 보인다.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일본 유신회 내부에서 내홍이 일어날 개연성도 있어 7월 참의원 선거 직전에 분당사태가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한술 더떠서 일본 유신회의 당 대표대행을 맡고있는 히라누마 다케오도 "종군위안부를 매춘부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실상 일본 유신회의 입장이 저렇다고 봐도 좋을 정도지만 제명처리된 니시무라 신고를 빼면 당 중역들의 발언에는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결국 오사카 변호사 협회에서 하시모토에 대한 징계 청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지만 하시모토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징계권 남용"'''이라고 맞섰다.
5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하시모토의 면담은 할머니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할머니들에 의하면, 하시모토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릎까지 꿇고''' 사죄 퍼포먼스를 벌이려고 해서 '''진정성에 의구심이 들어''' 면담을 거부하기로 했다고. 이러자 일본 유신회의 중진인 나카야마 나리아키 의원이 할머니들의 면담 거부에 대해 '''"가면이 벗겨질까봐 두려워서 그랬다"'''라는 망언을 시전해 더 어그로를 끌고 있다.
하시모토는 주일미군의 풍속업소 이용 권장 발언을 사과했으나, 위안부 망언은 철회하지 않고 있다. 여성 표 이탈 때문에 일본 유신회에는 여성국을 신설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진정성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
그러더니 이제는 "나는 위안부 필요하다고 한 적 없다. 언론이 오보낸 것."이라고 언론 탓[40] 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싶으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상 이판사판으로 막 나가기로 한듯.
이런 하시모토의 행태가 어이가 없었던지 5월 27일 도쿄 외신기자협회와의 기자회견에서 외신 기자들에게 송곳 질문세례를 받았다. 이탈리아인 기자는 "당신은 풍속업소 고문 변호사를 했다던데, 시장이 되어서 그럴 수가 있나?"라고 물었고 하시모토는 "거기는 풍속업체가 아니라 요리업체"라고 둘러댔고 이탈리아 기자는 "거기가 매춘도 하는 건 중딩도 아는 일이거든?"이라고 디스를 당했다. 뉴욕타임즈 기자는 "관리가 위안부의 이송과 관리를 맡은 건 인정하는 것 같은데, 그걸 국제적으로 인신매매라고 부르는 건 아나?"라고 질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어떤 기자는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나, 여자로 태어나고 싶나?"'''라고 묻기도. 이 기자회견에는 내외신 기자 300여명이 몰렸고, 200명 이상은 못 들어가서, 결국 100여명은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기자회견을 지켜봤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여론이 진정되지 않자 예정된 미국 방문을 연기했다. 명분은 '''"방문할 곳에 부담을 줄것 같고 메리트도 없어서"'''라지만 사실상 미국에 가면 영혼까지 털릴 것 같아서 연기했다는게 일반적인 시각. 실제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서 미국 여러 인사들을 만날 계획이었으나 하시모토의 위안부 발언으로 미국에서 하시모토는 기피인물이 돼버려 만날 예정이었던 인사들이 줄줄히 면담을 취소했다. 하시모토는 '''"관광으로라도 가겠다"'''라고 했으나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부지사가 "공무가 아니면 갈 수 없다"고 태클을 걸어서 결국 방문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하시모토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가이에다 반리 민주당 대표는 "말은 주절주절하는 것 같은데 기름종이로 불을 끌순 없지."라고 말했으며,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은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수정하겠다고 한적 없다"라고 비판했고,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일본 정치인들은 다 하시모토 같은 줄 알까 봐 걱정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결국 오사카시의회에서 자민당, 민주당, 공산당의 3당소속 시의원들의 연합으로 하시모토 문책 결의안이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하시모토가 위안부 망언에 대해서 오사카 시민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다"라면서 문책 결의안을 제출한 것. 오사카 시의회의 의석 구성은 일본 유신회가 최다의석을 보유하고 있고 공명당이 2번째로 많은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공명당은 당초 '''"문책 결의안에 동의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해 자민-공명-민주-공산 4당 시의원들이 모두 찬성하면 문책 결의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였으나 하시모토의 측근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부지사가 '''"문책 결의안이 통과되는건 시장에서 물러나란 소리다. 시장에서 물러난 뒤에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시장 재선거로 재신임을 묻겠다!!"'''라는 폭탄발언을 했다. 결국 이에 공명당이 3당의 문책 결의안에 반대입장으로 돌아섰고 문책 결의안은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공명당이 입장을 급선회한 이유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시장 재선거까지 치루게 되면 공명당의 조직력 한계상 집중이 어렵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문책 결의안을 부결시킬수 밖에 없었다는것. 한마디로 하시모토는 정치적 협박을 감행했고 이게 먹혀들어서 문책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과연 하시모토가 언제까지 좋아할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미 7월 참의원선거에서 일본 유신회가 패배하면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상황인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봐선 일본 유신회는 공중분해의 가능성도 높은 상황.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뜬금없이 2013년 6월 1일 트위터로 '''스마일 프리큐어'''라는 트윗이 올라왔다. 바로 해명이 올라왔는데 자신의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썼다는 것이다. 딸바보라서 지우지 않는 건가?
항간에는 근래 들어서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지않은 것을 의식한 '''"자상한 아버지를 연출하기 위한 자작쑈 아니냐"'''는 비난도 나오는 등, 이 또한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 여담으로 그간 주로 정치 관련 발언으로는 하시모토의 리트윗 수가 3자리수를 넘지 않았던 반면, 이번 것은 무려 11만 이상이 리트윗되면서 하시모토의 발언에서 최대 리트윗 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자 다른 정치인들도 프밍아웃하고 있다.
하시모토가 미국 방문을 포기한 이유가 밝혀졌다. 하시모토 본인은 관광으로라도 미국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시에서 "공식방문으로 취급하지 않겠다. 인사방문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거절문서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서 번역본은 여기이며, 하시모토가 가는 곳마다 항의단체에 둘러싸일 거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빨로 발악하는 게 남아서 7월 5일에는 미국이 일본 점령당시에 미군도 일본 여성을 위안부처럼 부렸다고 천조국 심기를 건드리면서 날뛰고 있다. 미국 상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당시에도 일본 극우들이 "미국도 그랬다능~" 하는 개드립으로 네오콘을 비롯한 미국 극우들의 분노를 스스로 샀던 일을 열심히 재현중이다.
그 후 잠잠하더니 또 망언을 퍼부었다. 2013년 11월 10일 후지 TV에서 '당신들도 해온 것 같은 일이니 '당신들도 반성하고 우리도 반성한다'는 스탠스로 임하면 좋겠다'라는 말을 꺼낸 것. 전에 거론했던 베트남 전쟁 때 저지른 짓거리나 자기가 한 짓이 같다고 말한 전과 같은 뉘앙스다. 해당 뉴스.
이후에도 계속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고노 담화를 검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NHK의 회장인 모미이 카츠토의 '''"위안부는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고 '''망언을 정론이라 치켜세우며''' 동조했고 결국 2월 25일 아베가 고노 담화 검증에 매우 충만한 의욕을 보이자 일본 유신회 차원에서 기관 설치를 제안하는 등 계속해서 도발을 일삼고 있다.
다만 은퇴 이후에는 혐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해 극우세력에게 비판받는 등 단순히 혐한파라고 볼 수는 없다.
4. 기타
- 현 효고현지사인 이도 도시조와 사이가 안 좋다. 하시모토가 오사카부지사 시절 이도 지사가 오사카 국제공항 폐항안에 반대를 했으며, 막대한 적자를 흘리는 간사이 국제공항이야말로 폐항하고 고베 공항에 두 번째 활주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전적이 있다. 또한 하시모토가 오사카시장 시절 오사카도 구상안을 발표했을 때 이도 지사가 극렬 반대를 했다.
[1] 원래 橋下는 하시시타로 읽어야 하지만 하시시타가 부라쿠민 계열 성이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성 읽는 방법을 하시모토로 바꿨다. 한자를 해석하면 '''다리(橋) 밑(下)'''이다. 원래 하시모토의 한자 표기는 橋本.[2] 야쿠자였다고 한다.[3] 위안부 발언 논란을 생각하면 뭔 소린가 싶을 수 있는데 다른 발언에서는 위안부를 '전쟁의 비극', '성노예'라는 표현까지 붙여가며 여성인권 침해라는 논조를 보여주고 있다. "강제동원했다는 증거는 없다"가 전제인 현 자민당 정권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다만 이어진 "다른 주요국들도 여성인권을 침해해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분히 양비론적이라,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심기까지 건드렸기에 논란이 된 것이다.[4] 마치 한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일파라는 인식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천황 사죄 발언으로 선을넘은 반일 대통령 취급을 받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5] 부라쿠민이나, 재일 한국인같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던 계층들은 야쿠자나 AV 배우같은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상당한 편이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이들에게는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차별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경우도 미쿠니 렌타로나 추성훈같이 출신 성분이 거의 의미없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된 경우거나, 역시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 의사나 법조인같은 전문 직종으로 가서 성공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대개는 같은 출신 성분을 가진 사람이 경영하는 중소기업에 취직하면 그나마 잘 풀린 경우다. 하시모토 도루는 그야말로 극적인 성공을 이룬 것이다.[6] 일본 정치판을 일컫는 은어[7] 물론 불량학생이라도 추후에라도 진심어린 반성을 한 사람들이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그런대로 탄탄대로를 걷는 일이 드물긴 해도 없는 건 아니다.[8] 때문에 대놓고 부라쿠민들의 성씨나 출신지를 조사해서 정리한 목록이 여러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에게 암암리에 유포되었다가, 이게 발각돼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은 적도 있다. 이게 그 유명한 부락지명총람사건이며, 이 때문에 아직도 자기 출신 성분이 드러나면 약혼자의 가족들로부터 파혼 통보를 받지 않을까하고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부라쿠민 출신자의 글이 5ch에 올라온 적도 있다.[9] 일본어로 '도와'라고 읽는다.[10] 실제로 대부분의 부라쿠민들이 아직도 차별받는 직업에 종사하며, 하층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인간승리가 맞다. 일단 부라쿠민 출신임이 확실하다고 밝혀진 유명인은 손에 꼽는다. 원로 남배우인 미쿠니 렌타로나, 유니클로의 창립자인 야나이 타다시, 세계적인 지퍼 생산 업체인 YKK 그룹의 창립자인 요시다 다다오나 자민당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노나카 히로무 정도가 고작이며, 이들 이외에는 자기 출신 성분을 한사코 숨기려하므로 유명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부라쿠민 출신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극우 꼴통들이 아닌 이상, 누가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이를 아웃팅하는 것 자체가 몰상식한 짓이라서,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뿐이다.[11] 일본으로 치면 소니라든가.[12] 당시 2번째로 최연소였고, 첫번째는 스즈키 에이케이 미에현지사다.[13] 사실 보수정당이 아니라 일본판 나치당에 가깝다.[14] 우익 논조의 톱으로 꼽히는 신문이다.[15]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행위나 일본의 전쟁범죄, 부라쿠민 문제를 비롯한 일본 국내의 인권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일본 유일의 인권 박물관. 1985년 개관하여 일본의 100대 박물관에 선정된 바도 있는 전시관이다.[16] 대책없는 예산(특히 임금)삭감, 설문을 통한 직원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때문에 오사카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나쁘다. 오사카부지사 시절에도 오사카시와 재정개혁 문제, 행정구역 재편 문제 등을 둘러싸고 상당한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부지사 재직 당시 오사카시장이었던 히라마츠 쿠니오(아나운서 출신이다)마저 등을 돌릴 정도.[17] 사실 자민당 극우파의 대체제는 한두 정파가 아니다. 당장 자민당 탈당파만 해도…[18] 그래도 1석 모자라긴 했다. 하시모토는 10석 공언했는데 9석.[19] 그런데 그렇게 말했던 인간이 2016년 6월 29일에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1.7%로 낙선했다.[20] 참고로 5년 뒤에 또 주민투표가 발의되었다 2020년 오사카도 전환 주민투표 참고[21] 기존의 오사카 유신회(大阪維新の会)와는 달리, 당명의 오사카 부분을 히라가나로 표기한다.(おおさか維新の会)[22] 대선 당시 일본 언론에선 북한의 연속된 무력 도발로 인한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부각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23] 하시모토 X 하토리 프로그램 2017년 5월 22일 방송분.[24] 우익인 동시에 개혁성향이 강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지역정당을 창당함.[25] 해당 드라마는 하시모토는 온건하게 보일 정도의 극강경 혐한인 햐쿠타 나오키조차 "한류를 무시해서 죄송하다"라는 발언을 하게 할 정도로 일본인에게 크게 어필한 드라마이다.[26] 또한 치시마 열도 관련한 망언으로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27] 링크된 뉴스에서는 중국을 퉁퉁이라고 비유했으며 도라에몽에서 노진구라는 캐릭터는 작중에서도 만퉁퉁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캐릭터이다.[28] 그러나 항목을 보면 노진구도 그다지 일방적으로 연민을 느낀다고 보기는 어려운 캐릭터다.[29] 말이 충고지 사실상 명령으로 보인다는게 함정이다.[30] 아베의 위안부 정책에 독설을 날릴 정도로 친한파이다.[31] 물론 늘어나는 중국의 경제 규모나 국민소득을 보면, 안 그래도 성장동력이 꺼져가는 일본이 굳이 정부개발원조를 지금까지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긴 하다. 애초에 중국 입장에선 있으나 없으나 수준이기도 하고. 문제는 매춘 운운하면서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것. 다만 시진핑도 인정했을 정도로 중국 성장세도 둔화되는 추세긴 하다.[32] 빅뉴스보다 좀 알려진 반대성향의 프레시안의 평가. 사실 이 인간에 대해 메이저 신문사의 짧은 우려나 보도수준을 제외한 평가는 보기 드물다... 양쪽을 적절히 필터링해서 보자.[33] 정작 하시모토는 오사카의 교육제도와 고교입시제도를 고쳐서 나름대로 교육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오사카 학력은 투자 대비 전국 꼴찌(…)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으며, 명문고도 오사카보다 옆동네 교토부, 나라현, 효고현에 많이 있는 건 덤. 특히 효고현과 교토부는 동네가 동네라 명문 사립대학의 부속고교도 많은 편이다. 보다못한 오사카부는 2015년에 학력평가 결과를 고교입시에 반영하려고 시도했으나 문부과학성에서 '모의고사는 정식으로 성적에 반영되는 시험이 아니다'라며 극력 저지 중. 정작 오사카 교육개혁의 모델이 된 대원외고 등의 한국 특목고는 학력평가 결과가 아니라, 당시 내신과 고난도 영어듣기평가 및 창의사고 면접을 이용해 학생을 선발했다. 실제로 가나가와현에서 공립고교 입학에 '아테스트(어치브먼트 테스트)'란 이름으로 1995년까지 학력평가 결과가 반영되었으며 부작용으로 인해 1997년에 전면 폐지되었다.[34] 道州制. 하시모토의 역점 정책 중 하나로 현재 일본의 행정구역 체제를 도도부현을 도주제로 바꾸고 지방자치단체들을 통폐합하여 중앙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단, 도주제 자체가 하시모토에 의해 최초로 제안됐거나 한 것은 아니다.[35] 그런데 아베 신조의 발언을 생각하면 그렇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 냉전도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의 발언에 대해 이러지 않았나?[36] 하지만 위안소 설치를 처음으로 고안한 오카모토 레이지 사령관조차도, 위안부가 강간 방지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37] 물론 민나노당의 이런 행보는 하시모토의 발언을 핑계로 껄끄러운 하시모토와 결별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38]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불을 싸지르는 수준이다. 일본의 여성계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가 아닌 여성 인권과 젠더 문제, 즉 '''피해자 여성과 가해자 국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 이 시각으로 하시모토의 변명들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이만한 도발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이유 때문에 일본 여성단체들은 위안부 문제가 수면으로 드러나자마자 한국 여성단체와 연대했다.[39] 역사도 안 배웠다는 걸 인증하는 개소리다. 물론 베트남전 도중의 안타까운 사태로 발생한 피해자들과 라이따이한 논란이 있지만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는 절대 일본군처럼 위안소를 세우거나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하라는 미친 명령은 내린 적이 없다.[40] 언론이 "위안부가 왜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본 질문에 "필요하니까 있었겠죠. 저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용인할 생각도 없지만…" 이라고 대답한 걸 짤라서 보도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