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파(전국시대)
1. 개요
중국 전국시대의 조나라의 '''명장'''.
흔히 노익장(老益壯)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나, 워낙 늙어서도 출중했기 때문에 그럴 뿐 실제로는 젊은 시기부터 손에 꼽는 명장이었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명장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장수인 동시에 정치가로서도 안목을 갖춘, 문무겸비한 인물.[3]
2. 생애
2.1. 사기의 기록
사기 조세가에서는 그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혜문왕 16년(기원전 283년),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진나라를 공격하여 석양(昔陽)을 빼앗았다.
혜문왕 20년(기원전 279년),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혜문왕 23년(기원전 276년), 조나라가 누창(樓昌)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기(幾) 땅을 공격하게 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幾) 땅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했다.
혜문왕 24년(기원전 275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방자(房子)를 공격하여 빼앗은 다음 그곳에 성을 쌓고 돌아왔다. 다시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효성왕 4년(기원전 260년), 염파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같은 해 조나라는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趙括)을 대장으로 삼았다.
효성왕 15년(기원전 249년), 위문(尉文)의 땅에 염파(廉頗)를 봉하고 신평군(信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장평의 패배로 초토화된 조나라를 노리고 동쪽의 연나라가 2군과 전차 2천승을 이끌고 쳐들어왔다.[4]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출격시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율복을 잡아서 죽이고 경진과 악한은 사로잡았다.
효성왕 16년(기원전 248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연나라를 포위하였다.
효성왕 18년(기원전 246년), 연릉(延陵)을 지키던 조나라의 장수 균(鈞)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와 대장 신평군(信平君) 염파와 합류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효성왕 21년(기원전 243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조왕이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본기가 아닌 세가에서 이 정도로 방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인물은 드물것이다. 세가의 기록 외에도 별도로 인상여와 조사, 이목과 묶여서 열전에서 그의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허나 본인의 열전인 염파인상여열전에서는 누락된 기록이 많아, 위에 있는 조세가의 내용을 참고해야 한다.
2.2. 염파의 활약
전국칠웅 가운데 손꼽히는 강국이면서도 진(秦)나라와 인접한 지리적 약점 탓에 빠르게 쇠락한 조나라의 운명이 인생 역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염파가 활약하던 시기 조나라는 무령왕(武靈王)이 시행한 개혁의 결과로 영토와 국력이 크게 신장된 상태였고,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원군,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인상여와 염파가 버티고 있을 적엔 진나라도 쉽사리 조나라를 건드릴 엄두를 못냈다. 그 시기 진의 왕이 바로 전국시대 정복군주로 이름높은 소양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서쪽으로 이웃한 진나라는 착실히 성장을 거듭하고, 반면 조나라의 전성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나라 전성기를 이끌던 인상여, 조사와 같은 인재가 하나둘 세상을 떠난 가운데, 염파는 혼자 힘으로 진나라의 거침없는 동진을 막아내야만 했다.
70대의 염파가 진나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장평의 전장에서, 염파는 수비를 굳히고 진군의 보급을 유린하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쇠퇴기에 접어든 조나라 조정은 염파를 뒷받침하기는커녕 진나라의 뇌물 공세에 넘어가 염파를 총대장에서 해임한다.[5] 이후 염파의 후임으로 부임한 조괄은 명장인 아버지 조사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진의 명장 백기의 유인책에 휘말려 글자 그대로 개박살당한다. 본인도 전사하고 조나라의 거의 전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한다. 염파의 능력 및 망국 크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화.[6]
멸망 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이었고, 평소 앙앙불락하던 동쪽 연나라가 침략을 개시했다. 이 당시 연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였는데, 신뢰도가 낮은 전국책에서는 무려 연나라가 60만을 동원했다고 하고 자치통감에서는 전차 2천대를 동원했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과장되어 있겠지만 조나라에 비해서는 몇배나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침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오히려 염파한테 걸려 역관광크리(...). 심지어 몇 년 국력을 기르더니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 군대가 연나라를 침략한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 염파의 해임에 앞장섰던 간신배 곽개가 농간을 부린다. 과거 염파가 곽개를 소인배라고 대차게 갈궜는데, 이 일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보복에 나선 것. 곽개의 감언에 넘어간 조나라 도양왕(悼襄王)은 염파가 늙었다는 이유로 해임한다.[7] 결국 빡돈 염파는 '내가 수십 년 동안 불패의 명성을 떨쳤는데, 내 후임이란 새퀴는 어디서 뭐하던 듣보잡임?' 하며 군대를 돌려 후임 대장인 악승의 부대를 공격했다(...). 이유야 어떻든 얄짤없는 반역행위이니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해 버린다.
이후 진은 조를 낚기 위해 위를 친다. 또 돈 맛을 본 곽개는 위에 원군을 보냈는데, 진은 계획대로를 외치며 조군을 개박살내고 조나라로 진격한다. 멸망의 위기에 몰린 조나라는 결국 망명 간 염파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했지만, 염파의 귀환을 꺼린 곽개가 훼방을 놓는데, 바로 이때 염파의 노익장에 얽힌 유명한 그리고 처절한 일화가 나온다.
조도양왕은 염파를 쓰고 싶어도 워낙 고령이라 주저하는 마음이 일었고, 결국 사신을 보내 근황을 살펴보게 한다. 염파는 도양왕의 속셈을 눈치채고 건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 말의 밥과 열 근의 고기를 먹고'''[8] 한바탕 말 달리며 무력시위(?)를 했으나, 곽개가 사신을 먼저 매수했기 때문에 도양왕에게는 염파가 뭇 늙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건강이 쇠락했다는 보고가 들어갔고, 결국 도양왕은 염파도 세월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불러들일 생각을 버렸다.
염파는 결국 위나라에서 중히 쓰이지 못하고 초나라로 옮겼으나 결국 쓸쓸하게 늙어 죽고 만다.
「我思用趙人。」
「나는 조나라 병사를 부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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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염파인상여열전에 기록된 염파의 유언
2.3. 화끈한 성격, 부족한 정치력
염파의 기록을 보다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성격이 굉장히 솔직하고 화끈하다는 점이다. 또한 재주에 걸맞게 자부심도 대단했던 모양으로 이는 겨우 세 치의 입을 놀린 것이 무엇이 공이냐면서 인상여에게 시비를 걸다 데꿀멍한 부형청죄(負荆請罪)의 고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상여가 염파를 피해다닌 것이 개인의 감정보다 국가의 대사를 위한 일이었음을 전해들은 후 크게 뉘우치며 회초리를 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벌을 내려달라며 사죄하는 진솔한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솔직하고 화끈한 면 때문인지 염파인상여열전과 당대 기록을 본다면 '''정치력이 부족한'''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물론 기전파목 중 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간신의 모함으로 숙청 당했지만, 같이 숙청당한 백기와 이목과 비교해보아도 염파의 성격은 확실히 화끈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하는 사기 염파인상여열전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화끈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
인상여와는 결국 화해하여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손님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는 장평대전 당시 억울하게 경질당하였으니 염파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만(...) 이러한 일화들에서 보여지는 솔직한 면 때문에 '정치'를 잘 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인 왕전은 이목이 지휘하는 조나라를 꺾지 못했지만, 정치를 굉장히 잘해서 결국 초나라를 멸망시켰고 편안한 노후를 보낸 것과 대조되는 행보.(인상여가 화씨지벽 사건 이후 왕의 신임을 받고 난 이후)
「我為趙將,有攻城野戰之大功,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而位居我上,且相如素賤人,吾羞,不忍為之下。」
「나는 조나라 장수로 성이나 들을 공격해 싸워 대공을 세웠는데, 인상여는 혓바닥을 놀려 지위가 나보다 위에 있게 되었으며, 또 인상여는 본디 천한 출신이기에 나는 부끄러워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
宣言曰:
염파가 선언했다.
「我見相如,必辱之。」
「내가 인상여를 보면 반드시 욕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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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
염파가 면직되어 장평 땅에서 돌아와 권세를 잃었을 때, 옛 손님이 모두 떠났다.
及復用為將,客又復至。
다시 쓰여 장수가 되자 손님이 또다시 이르렀다.
廉頗曰:
염파가 말했다.
「客退矣!」
「손님들은 꺼지시오!」
客曰:
손님이 말했다.
「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有何怨乎?」
「아아! 당신은 어찌 판단이 느리십니까? 무릇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장사하듯이 사귀니, 당신이 권세가 있으면 내가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원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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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기 염파인상여열전
또한 진(통일왕조)/통일 과정 항목과, 중국 쪽 위키에 적혀있는 내용으로는 조나라는 '''쿠데타가 무려 11번'''이나 일어났기에 왕의 입장에서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저 11번에 달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장군이 아니라 조나라의 왕족들이었기에, 왕권이 불안정했다는 뜻은 될 수 있어도 조나라 군부가 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당시 정황으로 추론하자면 염파는 선대 왕인 효성왕에 의하여 권세를 잃었으나 재기용되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상국의 자리까지 올랐었는데, 이로 인하여 염파는 해임되자마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후임인 악승을 공격할 정도의 군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도양왕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악연이 있으면서 구국영웅이며 군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염파가 두려웠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게다가 기록에서 엿보이는 염파의 화끈한 성격까지 고려하면...
허나 군권을 빼앗는 과정이 매우 졸렬했고, 곽개의 모함을 듣고 조나라를 위해 헌신할 마음을 가진 염파를 끝까지 내쳤다는 것은 도양왕의 엄청난 실책이었다.
이러한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염파가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주 쫓겨다닌 이유는 모함도 모함이지만 정치력의 부족도 한 몫 했으리라는 의견도 있다.[9]
3. 기타
염파의 망명은 염파의 뒤를 이은 조나라의 마지막 명장 이목이 참소를 받아 유명을 달리한 사건과 더불어 결국 조나라가 헤어나올 수 없는 막장으로 굴러떨어진 직접적인 계기라 할 수 있다.
사족을 달자면, 이목을 참소한 이도 당연히 곽개였다. 이 정도면 삼국지의 황호나 잠혼도 명함을 내밀기 어렵고, 조고나 진회 정도는 되어야 견줄만 하다. 적어도 황호 때문에 강유가 죽임을 당하거나 하진 않았고, 잠혼은 황제에게 죽을 뻔한 사람을 앞장서서 구명하기라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황충의 연로함을 우려하자, 염파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밥을 한 말씩 먹고 고기도 열 근씩 먹어서 모두가 두려워했다며 큰소리치는 대목도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덕분에 중국에서 나이 든 사람이 노익장을 과시하면 황충, 혹은 염파라고 부른다.
4. 미디어 믹스
4.1. 킹덤
4.2. 만화 《달인전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정석적인 염파 상, 인상여와의 문경지교도 간접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조사의 장례에서 노구를 이끌고 힘겹게 걷는 인상여에게 등을 내어주고 걸어가는 장면은 이 만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 주변에서 문경지교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인해 더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조를 지키는 유일한 벽이자, 장평에서 진을 막는 거대한 벽'''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조괄과 교체되었을 때,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맡기라고 큰소리치며 방방 뜨는 조괄을 보자 '''왠지 몹시 왕명을 거역하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라는 웃픈 독백을 하기도 한다. 결국 조괄은 오래안가 목이 잘려지지만....
한단 포위전에서는 성벽을 넘어 침범해 들어온 왕흘과 처절한 사투끝에 왕흘을 죽이지만 중상을 입는다.
4.3.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PK에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무/지/정 95/90/73/39 병과는 기병. 전법은 철벽.
전법이 약간 아쉬운데 위에 있는 장평대전과 극신을 물리친 일화를 반영해서 철벽을 준 것 같지만, 정작 '''노익장의 시초'''인 사람의 전법이 노당익장이 아닌 게 '''옥에 티'''이다. 그 때문에 코에이는 염파빠들에게 까인다.
인상여와 문경지교의 일화가 있음에도 친애무장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이벤트'''로 나온다. 전용 일러스트까지 있다.
삼국지 13에서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95, 무력 90, 지력 77, 정치 39이며 특기는 훈련 7, 순찰 8, 위풍 3, 분전 5, 공성 8, 견수 8, 일기 6, 호걸 5에 전수특기는 순찰이다.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A, 궁병이 B에다가 중신특성은 호단맹진, 전법은 '''조운과 같은 투지호장이다.''' 물론 조운만큼은 아니지만 전법이 전법인지라 PK에서는 야전에서 혼자 무쌍을 찍어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만화 킹덤이 일본에서 히트했고, 상술된 킹덤의 염파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포스의 무인으로 나오는지라 그 영향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 염파인상여열전의 기록으로,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후 신평군 군호를 받으면서 함께 임시 상국에 올랐다.[2] 혹자는 중산군(中山郡) 고현현(苦陘縣), 그러니까 현대에는 허베이성 딩저우(定州)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3]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은 바가 있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4] 전국책에 따르면 그 수가 무려 60만에 달했다고 한다. 율복이 40만을, 경진이 20만을 통솔했다.[5] 여담으로 이때 뇌물 받아먹은 조나라 간신배가 곽개(郭開)인데, 훗날 또 나온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리고 기어코 나라를 말아먹는다. 곽개는 도양왕(기원전 244~236) 때의 염파 재기용 방해부터 조나라가 망한 기원전 228년까지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염파의 경질과 조괄의 기용, 그리고 뒤에 나오는 악숭으로의 교체에 개입했다는 것은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6] 한편 백기 역시 지나치게 큰 전공을 세우는 것을 우려한 승상 범수가 훼방을 놓아 조나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7] 곽개는 도양왕(기원전 244~236) 때의 염파 재기용 방해부터 조나라가 망한 기원전 228년까지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염파의 경질과 조괄의 기용, 그리고 악숭으로의 교체에 개입했다는 것은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8] 시대마다 오락가락했으나 점차 양이 줄어드는걸 감안하면 쌀 한 말을 대충 계산해도 '''최소한 20㎏ 이상''',현대인의 쌀 1인분의 양(150g) 기준으로 계산하면 '''대략 133인분 이상'''이고, 중국 전통식으로 계산한 근대로라면 '''약 5960g''', 현대인의 삼겹살 1인분(200g) 기준으로 계산하면 무려 '''29.8인분이다.''' (...)[9] 물론 같은 기전파목 중 하나인 이목조차 곽개를 필두로 한 간신의 모함에 죽은 것을 보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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