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원권 지폐
1. 개요
대한민국에서 2009년 6월 23일에 최초 발행한 지폐. 1973년 만 원권 지폐의 첫 발행 후 36년 만의 대한민국 최고액권 화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개국 이래 두 번째의 여성 모델의 지폐이자 원화에서는 최초의 여성 모델의 지폐[1] 다.
2. 상세
금빛 오렌지색 색상의 오만 원권 앞면 오른쪽의 도안 인물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및 서화가이고, 이미 오천 원권 지폐에 차용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신사임당이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현모양처'''[2] 로 불리며, 그 인지도가 인정되어 오만 원권 도안에 차용되게 되었다.
이 지폐의 신사임당을 그린 사람은 일랑 이종상 화백이다. 서울대학교 미대 명예교수이다. 참고로 오천 원권 지폐의 율곡 이이도 이 사람이 그렸다.
앞면 왼쪽의 보조 소재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와 초충도수병의 가지 그림, 뒷면은 조선시대 주익의 뛰어난 회화작품 중에서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가 보조 소재로 사용되었다. 뒷면 도안인 월매도와 풍죽도가 특이하게 세로 방향'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한민국 지폐 사상 최초의 세로형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파격적이라는 입장.
최고액권인 지폐답게 위조 방지 장치가 가장 많다. 통화위조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위조 방지 장치라는 것이 위조 자체를 기술적으로 원천차단하는 게 아니라 정교하게 위조하려면 액면가보다 많은 돈이 들어갈 만큼, 즉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끔 복잡하게 만들어서 위조를 못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만 원권 지폐에는 국내 지폐에 처음 도입되는 '입체형 은선'이 있는데, 여기에 태극무늬가 숨어있다. 지폐를 좌우로 기울여 보면 태극무늬가 상하로, 상하로 기울여 보면 태극무늬가 좌우로 움직인다.
실제로 부산의 한 병원에서 어떤 사람이 오만 원권 지폐를 모티브로 한 극락은행 오만 원권 지전을 내고 간 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화폐 중에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뒷세계로 가장 많이 흘러들어 간 돈이다. 이유는 현금임에도 불구하고 액면가가 상당히 세서 돈세탁에 아주 편리하게 사용되기 때문인 데다가 500유로가 환전수수료를 징수하는 일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이 화폐에 대한 환전수수료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서류 가방에 1만 원권을 가득 채워봤자 7000만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현행 5만 원권은 1만 원권 구권보다 크기는 더 작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액면가가 5배로 확 뛰었기 때문에 서류 가방에 가득 채우면 거의 10억 원 가까이 들어간다. 다만 500유로 지폐는 발행이 중단되었다.[3]
3. 지폐 도안에 대한 논란
한국에서 실존인물인 모자가 화폐 인물이 된 두 번째 사례이자 세계적으로도 왕정제[4] 가 폐지된 국가에서 혈연관계의 인물이 화폐에 같이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례다.[5]
초상화 인물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는데, 당시 여론은 10만 원권 인물에 대해 모든 관심이 쏠렸기에 상대적으로 아오안이던 5만 원권의 인물은 쉽게 통과되었다. '굳이' 여성 인물로 선정된 것도 선정위원회가 여성계를 의식해서 '그래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라고 내놓은 의견이 대중에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때 신사임당과의 최대 라이벌은 '''유관순'''. 하지만 10만 원권이 결국 유통 및 생산이 무기한 보류되었기에 얼떨결에 최고액권의 모델이 된 것이다.
10만 원권의 당시 경쟁입찰(?!) 당한 위인들은 '''백범 김구''', '''광개토대왕'''[6] , '''안창호''', '''장영실''', '''정약용''' 등이 있었다. 만약 '''안중근'''이 채택되었더라면 일본 엔 1천 엔권에 대한 완벽한 맞불 작전이었을 것이다.[7] 일본 1천 엔에는 1984년까지 이토 히로부미로 했다가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나츠메 소세키도 1천 엔권 인물에서 내려와 현행 1천 엔권 도안으로는 노구치 히데요가 사용되고 있고, 2024년 발행될 예정인 신 1천 엔권에는 세균학자인 키타자토 시바사부로가 도안으로 채택되었다.
화폐의 인물로 등록되기에는 생전 활약이 전무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부족한 인물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유관순이 엄청난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다.
성평등의 추세에 따라 여성 인물을 화폐에 삽입하기야 했으나, 정작 여성계에서도 신사임당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아들 이이를 훌륭하게 키워놓은 현모양처'이지 '자유롭고 적극적인 여성'과 정반대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히려 여성 위인이라는 점이 '대한민국의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고, 그렇다면 구시대적 관점에서 현대 여성들에게 '현모양처'로서의 구시대적 여성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反)유교 성향을 보이는 부류에서는 퇴계 이황 - 율곡 이이에 이어서 성리학과 관련된 인물을 또 지정하느냐며 신사임당의 선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전형적인 현모양처와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역사적 평가도 있다. 이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도 모르면서 나대지 마라'는 식으로 여성계를 비웃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여성계가 신사임당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퍼져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현모양처'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모양처로서의 신사임당'이 없었다면 신사임당이 '위인'으로 추앙받고, 그것도 화폐도안이 될 정도의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수백 년간 신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남편을 보좌한 여성이자 모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로서 부각되어 왔고 신사임당을 '화폐에 쓰일 정도의 위인'으로 만들어준 것 역시 결국 그런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였다. 결국 역사적인 진실과는 별개로 '위인으로서의 신사임당'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에 불과하다.
여하간 까이고 있어서 선정 과정에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음모론도 나왔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의 당시 부총재(이주열, 현 한국은행 총재)가 이순신과 율곡 이이의 성씨인 덕수 이씨 종손이라서 뽑혔다는 카더라라든지.
신사임당 초상화에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일단 현재 오만 원권에 있는 신사임당 초상화는 이전까지 알려져 있던 신사임당 표준영정과는 약간 다르게 생겼는데, 이는 신사임당 표준영정의 작가인 이당 김은호가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되어 초상화를 수정해야 했고, 화폐 도안이라서 정면을 바라보던 영정을 15도 정도 오른쪽을 바라보게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이 초상화 역시 까였다. 어쩐지 박근혜를 닮았다는 말도 있었고, 박근혜의 모친인 육영수 여사와 닮았다는 소리도 있었다. 또한 유력하고 지지가 높았던 백범 김구가 보수 정치권의 마음에 안 들었다는 기사나 48세에 사망한 신사임당이 30대의 초상화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신사임당이 포토샵도 하셨냐"는 비아냥도 존재한다.
한편 뒷면의 도안에 대해서도 약간의 논란이 존재하는데, 뒷면 도안인 월매도와 풍죽도가 대한민국 지폐 사상 최초로 '''세로 방향'''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기존의 지폐 도안이 모두 가로로 되어 있고, 이로 인해 이 작품까지 가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원작 훼손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아니 애초에 작품 자체가 지폐 형태에 맞추기 위해서 매화 가지를 1/3 정도 잘라버리고, 보름달을 하늘 끝에서 1/2이나 끌어내린 '''편집본'''이다. 관련 기사
4. 정보
- 최첨단 위조방지 장치인 입체형 은선은[8] 국내 지폐 최초로 적용되었는데,[9][10] 이 은선 부위에서 지폐가 벌어져 공간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나 민원이 있었지만, 한국은행 측에서는 "입체형 은선 띠는 지난 2006년부터 스웨덴과 멕시코 등 3개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특별한 이상이 보고되지 않았다고 큰 문제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민원이 들어오는데도 이상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지폐 벌어짐 현상이 현금 인출기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답변했다. 이 소식을 안 혐한들은 역시 한국이라며 비난 중. 하지만 이 은선이 사용되는 국가들도 많지 않은 데다가 발급 초기에 발생한 문제인 것을 생각하면 큰 문제이다.
- 지폐 앞장의 숫자 50,000 중에서 위조방지 홀로그램과 겹쳐진 5의 경우 복권 긁듯이 손톱으로 긁으면 쉽게 지워지는 문제가 확인되었다. 한국은행도 이 문제는 이미 알고 있었고[11] , 사용자들이 훼손해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기사.
- 기존의 오천 원권과 색이 유사하다. 오천 원권은 적황색, 오만 원권은 황색으로 색이 다르고 크기가 12mm 차이 난다고는 하지만 색상 계열이 비슷해서 얼핏 봐서는 헷갈리는 게 사실. 실제로 노년층이나 외국인들이 오천 원짜리 대신 오만 원짜리를 잘못 내는 사건이 뉴스에까지 올라오곤 한다.기사1 기사2 이미 천 원권과 만 원권도 색이 비슷해서 구별하기 힘들다는 불만이 있었음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유로화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을 번갈아 가며 쓰는 거라고 설명하지만기사, 유로화는 1, 2, 5 단위로 나가기 때문에 앞자리 숫자가 같은 지폐끼리 서로 다른 계열의 색을 가지게 된다. 당장 사진에서 5유로와 50유로, 10유로와 100유로, 20유로와 200유로의 색을 비교해 보자. 반면 2단위의 화폐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을 번갈아 가며 쓰면 앞자리 숫자가 같은 지폐끼리 같은 계열의 색깔이 돼버리니 혼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로화에 비해 액면의 숫자 단위가 큰 우리나라의 지폐는 더더욱 헷갈리기 쉽다. 다른 나라의 시스템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한 실패 사례.
- 최첨단 위조방지 기능을 이용했다지만 발행 1주일 만에 위조지폐가 발견됐다. 이번에 걸린 오만 원권 위조지폐는 총 266장, 1330만 원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이다. 그러나 플라스틱이 아닌 이상 위폐를 제조하는 것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위폐를 쉽게 구별해낼 수 있는지가 아닐까. 위폐가 빠르게 발견되었다는 것은 일단 그만큼 쉽게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만 원권의 위조방지 장치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하려면 비용이 그만큼 매우 많이 들어갈 것이다. 즉 위조에 드는 돈이 더 많기에 위조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 많은 정치인들의 보구인 사과박스와 돈 봉투의 위력이 5배로 대폭상향되었고, 이것 때문에 오만 원권을 반대한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오죽하면 오만 원권의 출현으로 사과 상자 대신 안전한 빼빼로상자가 대신 이용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정도.[12] 보통 만 원권 구권이 크기가 꽤 되는 데다가 액면가도 비교적 작아서 서류 가방에 7천만 원밖에(?) 안 들어갔지만 오만 원권은 만 원권 구권보다도 크기가 작은 데다가 액면가도 대폭 커지는 바람에 서류 가방에 5억 원 이상 들어간다. 오만 원권을 007 가방 하나에 가득 담을 정도의 액수면 서울특별시의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 한 채 정도에 해당되는 돈이 된다. 대략적으로 개봉역 근처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대략 5억~6억 정도.
실제로도 시중에 발행된 오만 원권 10장 중 4장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조사를 피해서 받은 뇌물을 집에 현찰로 두는 데 대량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당연히 증거는 없다. 물론 정치인 말고도 각종 불법적인 수익을 은닉하는 데 사용되어 지하경제 조성에 일조하는 듯하다. 체납자 집 습격 영상1 영상2 영상3 영상4 영상5
-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고액권 지폐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암시장에서 미국 달러를 사용하는 만큼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량의 현금을 거래하는 데 편리한 고액권 지폐는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부가적인 요소라고 하기도 한다. 실제 엔화나 유로도 고액권을 취급하니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화가 기축통화도 아닌데 무리해서 고액권을 발행해야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문제다.
- 한국 화폐 최고액권이다 보니 발매 초기에는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만 원권이 자기앞수표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유통이 꾸준히 늘고 있고, 2012년 기준, 발행액은 이미 만 원권을 앞질렀다는 통계가 나왔다. 특히 오만 원권은 이미 각종 경조사의 축의금, 조의금, 세뱃돈 등으로 맹활약하는 중이다.[13] 그리고 부동산 거래(계약금, 중도금, 잔금 결제) 또는 경마, 강원랜드, 유흥업소 등 대량의 현금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는 엄청나게 활약하고 있다. 실생활보다는 고액권의 역할에 중점적으로 유통되는 셈이다.
- 일상 경제생활면에서는 전자결제, 간편결제의 발전으로 현찰 자체가 퇴장하는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디노미네이션을 실패한 이상 잔돈을 충전식으로 바꾸려는 시범사업이 나오기도 했고, 북유럽 쪽은 이미 현금을 거의 보관하지 않는 은행이 나올 정도. 현찰을 많이 가지면 "정당하지 않은 돈이 아니냐"며 범죄와 연루해 생각하는 페널티가 회자되고 있다.
- 북한에서는 이 오만 원권 지폐가 소장용으로 인기가 높단다. 실생활에서 쓰이는 용도는 아니지만[14] 북한에선 숫자 5를 각종 선전용 문구에 자주 사용해서 5 단위로 끊어 쓰는 것을 선호하고, 여기에 지폐의 도안이나 무늬가 고급스러운 이미지여서 인기가 높다고. 데일리NK 기사 연합뉴스 '연통TV' 영상
- 여담으로 오만원권은 2009년 IBNS(International Banknote Society) 세계 은행권 협회 올해의 지폐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 [image]
최초는 한국은행 개갑 100환 지폐. 엄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단 25일 만에 유통 종료되어 단명한 비운의 지폐다. 참고로 이 여성 모델은 당시 조폐공사에서 근무 중인 직원이었는데, 퇴직 후 어떤 날 상사가 자녀와 함께 오라고 불러서 갔더니 사진 찍으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찍었다가 얼마 뒤 자신의 그날 사진이 화폐에 나와서 놀랐다고 한다. 현재에는 초상권 문제로 상상도 못 할 일.[2] 단순한 현모양처를 넘어서서 사실상 조선의 대학자 이이의 스승. 전통적 부인의 위치를 초월한다. 당시 조선은 조선 후기와는 달리 아직 고려의 풍습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율곡은 어머니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그러나 남자 집안 중심의 중국식 친영례가 이미 자리 잡아 가던 조선 중기였던 만큼 이이와 신사임당의 사례는 단순히 당시 풍습의 반영만은 아니었다. 남편 이듣보(이원수)는 말 그대로 듣보… 죽기 전에도 남편에게 "아이는 많으니 제가 죽더라도 첩을 두지 마세요!"라며 남편의 정절을 요구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 이 정도만 해도 투기로써 '칠거지악'에 들어갈 수 있는 소재가 된다.[3] 2019년 5월에 100, 200유로 신권이 추가됨에 따라서 기존 500유로 지폐는 사용량이 급감했다고 하지만 현지에서의 사용이나 국내외 환전에는 지장이 없다.[4] 이런 경우에는 그 나라의 국왕이 화폐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다. 희귀한 경우로는 가족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5] 현재는 폐지된 체코 20코루나와 50코루나 지폐의 도안이 부녀관계(오타카르 1세와 스바타 아네슈카)이다. 또한 옛 독일 1,000 마르크권의 도안으로 독일 민담수집가와 언어학자로 알려진 그림 형제가 사용됐던 적은 있다.[6]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언급한 사례도 있어서 김구 다음으로 유력시되었던 적이 있다. 오래된 인물이라 얼굴을 고증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가능할 거라고 아는 경우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백 원짜리 동전에 들어있는 이순신, 만 원권의 세종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린 게 아니라 상상해 지어낸 그림이다. 정확한 얼굴 고증 불가능하다는 점은 다른 조선시대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 얼굴 말고 복식이야 유물이든 회화든 근거는 충분히 있다.[7] 그런데 사실 10만 원권 도안으로 확정된 김구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인물인 건 마찬가지다.[8] 정확히는 입체형 부분 노출 은선[9] 입체형 은선은 사실 국산화한 게 아니고, 오만 원권에 들어가는 입체형 은선은 미국의 회사인 크레인 커런시(Crane Currency)에서 개발했고 제조한다. 당연히 특허가 걸려있어 발행할 때마다 일정한 금액의 로열티를 낸다.[10] 2000원짜리 지폐에도 입체형 은선이 적용되었다. 다만 ㅍ, ㅊ으로 교차하여 움직이도록 형상화한 것이 다르다는 점.[11] 오만 원권이 아니더라도 오천 원권, 만 원권의 홀로그램도 긁으면 지워진다.[12] 실제로 빼빼로 상자 하나에 지폐를 넣을 경우 110장가량이 들어가는데, 액수로 따지면 550만 원이다. 보통 정치인들 받는 뇌물이 억 단위이니 이하생략. [13]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5만 원권 지폐의 실용성도 더 높아지고 있는데, 물가 상승에 따라 예전에는 1만 원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지금은 5만 원권이 있어야 가능한 경우가 수두룩해지면서 더욱 그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14] 실생활에서 쓰이는 것이라면 중국 위안과 미국 달러화를 쓰면 된다.
최초는 한국은행 개갑 100환 지폐. 엄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단 25일 만에 유통 종료되어 단명한 비운의 지폐다. 참고로 이 여성 모델은 당시 조폐공사에서 근무 중인 직원이었는데, 퇴직 후 어떤 날 상사가 자녀와 함께 오라고 불러서 갔더니 사진 찍으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찍었다가 얼마 뒤 자신의 그날 사진이 화폐에 나와서 놀랐다고 한다. 현재에는 초상권 문제로 상상도 못 할 일.[2] 단순한 현모양처를 넘어서서 사실상 조선의 대학자 이이의 스승. 전통적 부인의 위치를 초월한다. 당시 조선은 조선 후기와는 달리 아직 고려의 풍습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율곡은 어머니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그러나 남자 집안 중심의 중국식 친영례가 이미 자리 잡아 가던 조선 중기였던 만큼 이이와 신사임당의 사례는 단순히 당시 풍습의 반영만은 아니었다. 남편 이듣보(이원수)는 말 그대로 듣보… 죽기 전에도 남편에게 "아이는 많으니 제가 죽더라도 첩을 두지 마세요!"라며 남편의 정절을 요구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 이 정도만 해도 투기로써 '칠거지악'에 들어갈 수 있는 소재가 된다.[3] 2019년 5월에 100, 200유로 신권이 추가됨에 따라서 기존 500유로 지폐는 사용량이 급감했다고 하지만 현지에서의 사용이나 국내외 환전에는 지장이 없다.[4] 이런 경우에는 그 나라의 국왕이 화폐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다. 희귀한 경우로는 가족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5] 현재는 폐지된 체코 20코루나와 50코루나 지폐의 도안이 부녀관계(오타카르 1세와 스바타 아네슈카)이다. 또한 옛 독일 1,000 마르크권의 도안으로 독일 민담수집가와 언어학자로 알려진 그림 형제가 사용됐던 적은 있다.[6]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언급한 사례도 있어서 김구 다음으로 유력시되었던 적이 있다. 오래된 인물이라 얼굴을 고증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가능할 거라고 아는 경우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백 원짜리 동전에 들어있는 이순신, 만 원권의 세종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린 게 아니라 상상해 지어낸 그림이다. 정확한 얼굴 고증 불가능하다는 점은 다른 조선시대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 얼굴 말고 복식이야 유물이든 회화든 근거는 충분히 있다.[7] 그런데 사실 10만 원권 도안으로 확정된 김구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인물인 건 마찬가지다.[8] 정확히는 입체형 부분 노출 은선[9] 입체형 은선은 사실 국산화한 게 아니고, 오만 원권에 들어가는 입체형 은선은 미국의 회사인 크레인 커런시(Crane Currency)에서 개발했고 제조한다. 당연히 특허가 걸려있어 발행할 때마다 일정한 금액의 로열티를 낸다.[10] 2000원짜리 지폐에도 입체형 은선이 적용되었다. 다만 ㅍ, ㅊ으로 교차하여 움직이도록 형상화한 것이 다르다는 점.[11] 오만 원권이 아니더라도 오천 원권, 만 원권의 홀로그램도 긁으면 지워진다.[12] 실제로 빼빼로 상자 하나에 지폐를 넣을 경우 110장가량이 들어가는데, 액수로 따지면 550만 원이다. 보통 정치인들 받는 뇌물이 억 단위이니 이하생략. [13]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5만 원권 지폐의 실용성도 더 높아지고 있는데, 물가 상승에 따라 예전에는 1만 원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지금은 5만 원권이 있어야 가능한 경우가 수두룩해지면서 더욱 그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14] 실생활에서 쓰이는 것이라면 중국 위안과 미국 달러화를 쓰면 된다.